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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기행 | 순채(蓴菜) 나물

영혼의 갈증 풀어주는 물풀

  • 시인 송수권

영혼의 갈증 풀어주는 물풀

영혼의 갈증 풀어주는 물풀
동의 보감’에는 유일하게 순채(蓴菜)라고 하는 물풀의 효능이 소개되어 있다. 숙취에 좋고 모세혈관의 불순물을 제거하여 청혈작용에 특효하다는 물풀이다. 이 물풀 농사를 짓는 곳이 꼭 한군데 있다. 몇년 전 ‘남도의 맛과 멋’을 쓰면서 1년여에 걸쳐 헤매고 다닌 끝에 이곳을 찾아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수련과에 딸린 물풀로 크기도 모양도 서식상태도 토종연꽃과 비슷하지만, 그 타고난 성품이 연꽃보다 곧아서 가까이할 수 없는 풀이다. 현재 우리 국토에서는 한라산의 늪지대와 강원도 고성지방의 저수지 1급수 정도에서만 보이는 물풀이다.

연꽃이 썩은 진흙 속에 뿌리를 묻고 물위로 솟아 청정한 꽃을 피우는 식물이라면, 순채는 아예 더러운 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군자의 성품을 지닌 꽃이다. 조금만 물이 어지러워도 개도학이란 비슷한 풀에 눌려 물위로 노란 꽃을 확 퍼뜨리고 만다.

일본인들은 도자기의 흠집을 ‘에라’라고 부르는데 이 순채의 에라를 일컬어 ‘개도학’이라며 상품으로 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물풀은 ‘물 속의 안테나’ 또는 물 속의 ‘비단 띠’라고 부를 만하다.

중국 고서에 금대(金帶)라고 쓰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아예 순채 순(蓴)자라고 못박힌 한자를 보면 고대인들이 즐겨 채취했던 물풀임도 알 수 있다.



19세기 초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에도 순채가 나온다. 또 요리(조리)백과라고도 할 수 있는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에도 전라도의 순채나물이나 탕 등이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 국토에서도 그만큼 흔했던 물풀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맨 먼저 이 땅에 발을 디딘 일본인들은 다름아닌 순채를 따러 온 수채(水採)꾼들이었다. 이 사실이 소문나 김제뜰 유역의 농민들간에 내수면 허가권 문제로 분쟁이 그치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순채 1캔을 따오면 쌀 한 가마로 값을 매겨주었고 어떤 농민은 쌀 150가마를 벌어들인 적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 물풀을 따다가 ‘준사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하여 달러 시장에 내놓았다. ‘21세기 마지막 환상의 풀’ 또는 ‘꿈의 식품’등으로 명명했다.

먹을 것이 너무 많아 무엇을 먹어야 할지 터무니없는 선택의 고민 속에 빠져 있는 우리들은 이제 ‘밥은 굶어도 더 이상 배는 굶지 않는다’고 말한다. 썩지 않는 것보다 조금쯤 썩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우리들은 모두 썩고 싶어 안달하는 일회용 컵이거나 팩이거나 캔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순채야말로 우리 체내, 특히 두뇌의 뇌세포에 쌓인 백가지 독을 해독한다는 청정무구한 풀이고 보니, 영혼의 갈증까지도 풀어 주는 이슬 같은 풀이라고 할 만하다.

송이가 솔숲을 깔고 있어 버섯 중의 황제라면, 맛으로 볼진대, 순채야말로 오미(五味)를 제거해 버린 무색, 무취, 무미의 냉한 맛이지만 확실히 그것을 무어라고 표현 못할 멋 이상의 맛이다. 맛에도 나르시즘이 있고 환각이 있다면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런 맛을 불러오는 맛 뒤의 청미한 맛인 감칠맛이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순채는 된장국을 끓여 먹기도 했고, 나물로 무침하기도 했던 서민 음식이다. 또 한되 들이 댓병 소주를 다 마셔도 순채나물 한 숟갈만 물에 타 먹으면 숙취가 말끔히 가셨다. 생각하면, 구황식(救荒食)의 채근(採根)만을 씹고 살아온 민족인데 언제부터 우리 식탁에서 이 순채나물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 청결했던 검약과 절제의 선풍이 쏙 빠져 있는 식탁이 되어 버렸다. 일본인들이 물러가고서부터 이 순채 음식의 맥이 끊긴 것이다. 이는 하천의 오염 때문에 순채가 싹을 낼 수 없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순채의 가공법을 아는 몇 사람 중에서 지금은 최옥주 여사(전북 김제시 요촌동)만이 그 식품을 완제품이 아닌 반제품으로 시판하고 있다.

이제 음식이란 맛과 멋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에코체인’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러니 우리 물풀 중 ‘환상의 엑스트랙스(농축물)’ ‘물의 안테나’라고 하는 순채나물을 먼저 식탁 위에 되살려 놓는 일도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다.

신동아 2005년 5월호

시인 송수권

영혼의 갈증 풀어주는 물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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