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몰락한 舊공안 무기력한 新공안

  •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7-01-17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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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안검사들이 만신창이다. 연초부터 검찰조직을 강타한 사상 최대규모의 지각변동의 진앙에 서 있다 보니 성한 구석이 한군데도 없다. 유신독재정권, 5공화국 신군부 권위주의체제 등을 거치며 숱하게 들었던 정권수호의 ‘홍위병’이라는 비아냥에도 ‘체제수호의 보루’라는 자부심을 지켜왔지만 이제는 그같은 긍지와 자존심도 무너졌다. 50년 검찰 역사상 가장 춥고 외로운 겨울을 앓고 있는 ‘공안동지’들의 목소리.》
    99년 11월 9일, 검찰은 89년 정치권에 엄청난 회오리 바람을 몰고왔던 서경원(徐敬元) 전 평민당 의원의 밀입북 사건 중 서씨가 김대중(金大中) 당시 평민당 총재에게 1만 달러를 건넸고, 김 전총재가 서씨의 방북을 사전에 알고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의 결론에 대해 사실상의 전면 재수사에 착수했다.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이 11월 4일 부산집회에서 “김대중씨는 서경원의 밀입북 사실을 불고지하고 공작금도 받았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국민회의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자 이에 응하는 형식이었다.

    검찰은 이 사건을 통상의 명예훼손 사건과는 달리 공안부에 배당해 정의원을 제외한 관련자들에 대한 소환조사를 마친 뒤 당시 수사검사와 보고라인에 있었던 검찰 간부들에 대한 조사를 착착 진행시켰다.

    이같은 재수사 착수과정과 수사진행을 지켜본 많은 검사들은 허탈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연대의식이 특히 강해 스스로를 ‘공안동지’라 부르는 공안검사들은 자신의 동료나 선후배 검사들이 또 다른 공안검사에게 소환돼 조사를 받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연초부터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온 대전법조비리사건, 심재륜(沈在淪) 전 대구고검장 항명파동, 고급 옷로비의혹 사건에 이어 진형구(秦炯九) 전 대검공안부장의 파업유도발언에 따른 대검공안부 압수수색 등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던 공안검사들은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며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구(舊)공안의 항변



    수사과정을 지켜본 동료검사들의 심정이 이럴진대 직접 조사를 받은 검사의 심정은 어떨까? 89년 당시 서경원 의원과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수사했던 인물은 이상형(李相亨·사시20회)경주지청장. 5, 6차례 경주지청장실에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고 스스로가 당사자인 사건인지라 기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무작정 경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99년 12월 8일 오후 4시반 어렵사리 이상형 지청장을 만났다. 동료검사에게 조사를 받은 직후였다. 먼저 우회적인 질문 몇가지를 던졌다.

    ― 공안검사가 필요합니까?

    “체제질서를 좌우하는 업무를 합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 같은 건이 한번 터지면 온나라가 들썩들썩 하지만 어찌보면 국가안에서 재산이 왔다갔다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대공사건은 그 질이 확연히 달라요.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입니다.”

    ― 공안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는 했나요?

    “현 정부가 공안을 너무 망쳐놨어요. 이근안(李根安)사건만 해도 그게 뭡니까. 고문한 사람 잡아넣으면 됐지 70먹은 노인(박처원·朴處源·전 치안감)은 왜 오라가라 합니까. 그런 꼴보고 누가 대공업무 하려고 하겠습니까. 공안기능이 너무 축소돼 걱정입니다. 매일 동향 보고하고 공휴일 야근하고…. 이렇게 힘든데 누가 공안하려고 하겠어요.”

    ― 한 번 공안검사를 하면 계속해서 공안을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공안검사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나요?

    “공안수사중 대공수사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일단 간첩사건은 범죄가 일어나서 완성되는 곳이 국내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물증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당사자의 자백 이외에는 증거를 확보하기가 곤란하지요. 국가가 피해자이므로 실질적인 피해자가 없다는 점도 그렇고 관련자가 많다는 점 등도 수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지요. 따라서 일반 형사범죄나 특수수사보다 매우 치밀하고 철저한 수사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을 경우 재판에 가면 공소유지가 힘들어지죠.”

    ― 무리하게 피의자의 진술을 받아내다 보면 적법한 수사절차를 지키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 않나요?

    “공안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고 조금만 수사가 잘못되도 수사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고문 같은 것은 절대 금기사항입니다. 피의자의 진술에 대해서는 이중 삼중의 검증과정을 거칩니다. 가령 ‘노동당에 가입했다’고 하면 당원증을 그려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이전에 잡힌 간첩이나 귀순자에게도 당원증을 그려보라고 해서 일치하면 피의자의 진술을 인정하는 식이지요.”

    ― 공안검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나 간첩사건 등을 인지해 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요?

    “어차피 보안법 피의자들은 안기부나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했던 진술을 뒤집게 마련입니다. 80년대 대부분의 공안사건을 처리했지만 대한항공을 폭파했던 김현희를 제외하고는 모든 피의자가 진술을 바꿨어요. 따라서 검찰수사는 사건을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기분에서 해야 해요. 그런데 요즘 보면 국정원이나 경찰 대공수사쪽에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사건 중 검찰 손을 거쳐 기소되는 사례가 50%를 넘지 않아요. 기소를 신중히 한다는 뜻도 되지만 공안의 수사력이 약화됐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분위기가 조금 달아올랐다. 이제 요즘 ‘현안’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 최근 검찰에서 서경원 전의원이 평양에서 돌아온 직후 2000달러를 환불했다는 영수증을 찾아낸 뒤 현 대통령이 1만달러를 받지 않았다는 증거를 잡은 것처럼 발표했는데….

    “(흥분한 어조로) 웃기는 소리예요. 그건 경험칙 아닙니까? 평양에서 구린 돈을 받아 온 사람이 귀국 당일 은행직원을 의원회관에 불러 돈을 바꾸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또 당시 수사검사들이 사건을 은폐 조작하려 했다면 증거서류를 왜 검찰에 보관해 두겠어요?”

    이 지청장은 “서경원 사건 재조사야말로 특별검사가 해야 할 일”이라며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이 자기 휘하의 검사를 시켜 다른 검사를 다시 조사하는 것은 적절한 조치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지청장은 인터뷰 도중 자세를 자주 고쳐가며 검찰 수사에 대한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자는 앞으로 공안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그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이 지청장은 “앞으로의 공안의 방향? 그런 걸 왜 나한테 물어요. ‘신공안’한테나 물어보슈”라고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신(新)공안의 논리

    신(新)공안은 국민의 정부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그 동안의 공안정책을 반성하고 인권을 중시하는 새로운 공안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취지였다. 98년 3월 새정부 들어 첫 검찰 인사에서 법무부는 공안경험이 전혀 없는 인물들을 공안의 요직에 대거 포진시켰다. 이 논리에 따르면 지난 89년 서경원 사건수사를 담당했던 이상형 지청장은 구(舊)공안이고 10년만에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99년 서울지검 공안부는 신공안이 되는 셈이다.

    이 지청장을 만나기 나흘 전인 12월 4일 오후, 기자는 서경원 사건 재수사의 주임검사인 임성덕(林成德·사시24회) 서울지검 공안1부 부부장검사를 만났다. 이 날은 토요일인데다 정전예고까지 있었던 터라 서울지검 청사는 오랜만에 적막한 분위기였다. 임 부부장 검사는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를 앞에 놓고 씨름하고 있었다.

    ― 대통령이 관련된 사건이라 ‘오버’하는 것 아닙니까?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해명하고 싶었던 부분입니다. 국민회의가 낸 정의원에 대한 고발장을 분석해 보면 정의원의 부산집회 발언중 ▲북한 공작금 1만달러가 서씨를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대통령은 서의원의 방북사실을 미리 알고도 공안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싹싹 빌어 공소취소 처분을 받았다는 내용 등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서경원 전의원은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1만달러 전달 부분과 대통령의 불고지 사실은 서 전의원의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처음에 기소됐지만, 공소가 취소됐기 때문에 이번 명예훼손 사건의 판단의 준거가 될 법원의 확정판결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시대의 어느 검사가 이 명예훼손 사건을 맡더라도 재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공안검사, 특수부검사 하는 식의 전공이 필요한가요?

    “태어나면서 이마에 공안이라고 쓰고 태어난 사람이 없잖아요. 공안검사 따로 있고 특수부 검사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난 6개월에 한번씩 검사의 보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건의도 많이 했고요. 공안검사니 특수검사니 하는 식으로 구별을 지워 가며 인사때마다 ‘누구는 요직으로 발령났네’‘누가 어느 기의 선두주자네’하는 식의 이야기가 오가고 인사철을 앞두면 눈이 벌개져 인사 민원하는 등의 양태는 빨리 사라져야 해요.”

    ― 현재 공안1부에 계류중인 ‘총풍’사건, 김홍신(金洪信) 한나라당 의원의 공업용 미싱발언 사건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안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암초에 부딪힌 심경입니다. 총풍사건은 한나라당 변호인단의 지리한 고문주장과 두 번의 재판부 기피로 인해 몇 달째 재판이 중단돼 있고 공업용 미싱발언의 피고인인 김의원도 국회일정을 이유로 법정에 몇차례 나오지 않고 있지요.”

    ― 공안검찰은 숙명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인정할 수 없어요. 하지만 여당이든 야당이든 검찰이 누구편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최고 엘리트? 빵찍는 기계?

    새천년을 맞는 현시점에 공안검사가 검찰내에 최고의 보직이라는 인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지난 49년 출범 이후 50년 검찰사에서 공안검사는 대부분 양지에서 따스한 햇볕을 쬐며 자라온 엘리트 검사의 대명사였다. 실제로 유신정권 이후 5, 6공까지도 공안검사는 검찰에서 가장 각광받는 보직이었고, 최고의 엘리트 검사들만이 공안부에 배치될 수 있었다. 시국사건을 도맡는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를 시작으로 공안담당인 법무부 검찰3과, 대검 공안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을 거치는 정통 공안검사 코스는 검찰 고위간부로 승진하는 ‘출세의 왕도(王道)’이기도 했다.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지만 과거 법무장관을 지낸 이종원(李鐘元·31대) 정치근(鄭致根·32대) 정해창(丁海昌·36,37대) 김기춘(金淇春·40대) 최상엽(崔相曄·45대)씨가 모두 내로라는 ‘공안통(公安通)’이었음은 물론이고 박순용(朴舜用) 현 검찰총장과 임휘윤(任彙潤) 서울지검장도 모두 공안인맥으로 분류된다. 한때 ‘영원한 중수부장’이라는 애칭을 가졌던 안강민(安剛民·전서울지검장) 변호사도 공안부검사와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지내며 잔뼈가 굵었다.

    안 변호사가 회고하는 81년 서울지검 공안부의 면모는 이렇다. ▲부장 김경회(金慶會·형사정책연구원장) ▲수석검사 안강민 ▲차석 박순용(사시8회) ▲3석 김경한(金慶漢·법무부차관) ▲4석 임휘윤 ▲5석 정형근(鄭亨根·한나라당의원). 안 변호사는 “이제와 보면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검사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당시 주위에서는 사상 최악의 약체 공안부라고 우려의 소리가 컸다”고 말했다. 공안검사들이 얼마나 잘 나가는 엘리트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고 말했던가. 64년 8월 당시 중앙정보부가 송치한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검찰 수뇌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인민혁명당은 반국가단체로 보기 어렵고 그들이 북한공산집단의 지령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할 자료가 없다”며 불기소 결정을 내렸던 빛나는 전통에도 불구하고 공안검사들은 그후 국가의 안위보다는 정권의 안위를 더 중시하는 정치검찰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67년 동백림(東伯林)사건, 71년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단사건 등에서 보듯 정권안보를 위해 시국사건을 부풀리는 일이 흔히 벌어지기 시작한 것.

    서슬 퍼렇던 유신을 지나면서 정권과 공조해온 공안검사들은 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5공과 6공을 거치면서 검찰은 점점 더 권력에 종속돼 갔고, 당시 검찰에서는 ‘출세하려면 공안통이 되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신군부의 권위주의에 맞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점차 거세질수록 이른바 ‘공안수요(公安需要)’가 급증한 것도 공안이 득세할 수 있었던 한 이유.

    전성기를 누리면서 공안의 기능도 대폭 강화됐다. 86년 4월에는 서울지검 공안부가 공안 1,2부로 확대 개편됐고, 같은 해 10월에는 대검공안부에 공안 3, 4과와 공안기획담당관이 신설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9년 12월 현재 공안업무를 담당하는 검사는 141명으로 전체 검사 1150여명의 약 12% 정도이다(하지만 이중 공안업무만을 전담하는 순수 공안은 대검 7명, 서울지검 공안부 16명 등 30여명 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공안검사들의 양적팽창은 결과적으로 공안부의 비극을 가져오는 ‘원인(遠因)’이 되고 만다.

    대공업무라는 본연의 직분을 넘어서 노동, 학원, 선거, 정치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문어발식으로 관장업무를 확장하면서 소화불량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이어트 할 기회도 있었지만 한번 불어버린 몸을 줄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세하려면 공안통이 되라는 속설을 금과옥조로 여긴 출세주의형 공안검사들도 많이 탄생했다. 공익의 대변자로 묵묵히 일해야 할 공안검사들이지만 절대권력에 근접한 곳을 떠돌며 급격한 변질과정을 보인 것이다.

    공안검사들의 위상은 YS 문민정부를 지나며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는다. 과거 군부독재와 신군부의 권위주의 체제를 거치며 공안검사로부터 핍박을 받아온 야당 인사들이 권력을 쥐면서 원한 맺힌 ‘구공안’인사들을 좌천시키는 등 공안조직을 흔들기 시작했기 때문. 이때부터 ‘공안의 시대가 거(去)하고 특수의 시대가 래(來)’했다.

    5공시절 공안부에 근무했던 한 변호사는 “거의 기계적이라 할 만큼 정권의 구미에 맞게 사건을 처리해 검사들은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빵찍는 기계’라고 표현했다”고 털어 놓았다. 학생시위가 격렬해 대량연행 대량구속 사태가 빈발했던 5공 후반기 시절 공안검사들은 연행자를 극렬행위자 내지 주동자, 적극가담자, 단순가담자, 격리차원 연행자 등으로 분류해 A B C D로 급수를 매겼다. 검찰은 그뒤 ‘B급까지 구속’또는 ‘C급까지 구속’‘전원구속’ 등의 ‘외부 방침’에 충실히 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공안, 실패한 실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신(新)공안’개념이 새로 등장했다. ‘질서와 인권이 함께 숨쉬는 사회를 만들자’는 기본철학을 담고 있는 신공안은 새 정부의 인권중시 정책에 발맞춰 법무부가 내놓은 야심작이었다. 신공안의 사령탑인 대검 공안부장에 공안경험이 없는 진형구 대검 감찰부장을 앉힌 것을 비롯, 공안검사의 절반 가량을 과거에 공안경험이 전혀 없는 검사들로 물갈이했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의 이런 ‘신공안 실험’은 1년여 만에 결과적으로 실패한 실험으로 끝을 맺고 만다.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으로 진 전부장이 구속된 직후 한 검사장은 자신의 이름을 빗대 스스로 진(眞)공안이라고 떠벌렸던 진 전부장에 대해 “진공안은 참 히트작이야. 허(虛)공안이면서 진공안이라고 얘기했으니 말이야. 진짜 공안은 그렇지 않아”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새정부가 신공안을 주창했지만 진정한 새공안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합법보장 불법필벌’이라는 기치를 높이 내걸었지만 파업 등 노동운동을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로 인식하기보다는 사회불안을 불러 일으키는 집단행동으로 보는 공안당국의 인식은 크게 변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학생운동에 대한 대처방식도 구공안의 인식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총련은 반국가단체’라는 전제하에 대의원대회 등 비폭력 집회도 원천봉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그 보기다.

    이같은 시대착오적인 공안검사의 인식은 재판과정에서 재판부의 지적을 받기도 한다. 99년 4월 서울지법 형사합의부는 한총련대표로 북한에 가 8·15 통일대축전에 참가하고 연방제 통일을 결의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모피고인의 ‘특수잠입탈출’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기록에는 피고인이 북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취지로 기록보완을 요구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미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는 내용이라며 법원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법원은 해당부분에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하지만 재판부는 찬양고무와 회합통신부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해 실형을 선고했다). 실제로 새정부 들어 검사가 기소한 공안사건의 90% 이상이 집행유예의 판결을 받고 있다.

    많은 공안검사들은 신공안이니 구공안이니 하는 구별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인다. 69년부터 6년간 평검사로서 공안업무를 담당한 것을 비롯, 82년부터 만 5년간 ‘최장수’대검 공안부장을 지낸 최상엽(전 법무부 장관)변호사도 신공안이란 개념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낯선 용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투철한 국가관 ▲고도의 사명감과 소신 ▲ 전문지식과 안목 등이 요구되는 공안검사의 자세에서 구공안이나 신공안이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최변호사는 “다만 국가와 체제안보를 위협하는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지나친 사명감에 사로잡혀 수사절차의 적법성을 훼손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며 “새정부가 신공안을 주창한 것에 대해서도 과거의 불행한 사태를 되풀이하지 말고 거듭나자는 취지로 이해했기 때문에 신공안이란 개념을 거부감 없이 받아 들였다”고 말했다.

    12월 9일 오전 창원지검을 찾았다. 창원에는 한국중공업 삼성 대우 등 대규모 사업장이 위치한 곳으로 매년 크고 작은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는 곳. 그에 걸맞게 창원지검에는 과거 ‘공안통’이라고 불리우는 소위 골수공안들이 모여 있었다. 20년 공안검사임을 자부하는 ‘구공안’ 김원치(金源治·사시13회) 검사장이 지검장, 80년대 거의 모든 공안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공안논객(公安論客)’고영주(高永宙·사시18회)검사가 차장검사로 재직중이고 노환균(盧丸均·사시24회)검사가 공안부장으로 포진하고 있다.

    처음에는 “서울지검 형사부장 등을 거치며 탈색(脫色)한 게 언젠데 공안을 이야기하라고 하느냐”며 능청을 떨던 이들은 기자가 그동안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을 하자 못 참겠다는 듯 특유의 공안론을 토해 냈다.

    (고영주)“무엇보다도 공안검사의 가장 큰 비애(悲哀)는 일반인들보다 먼저 체제의 위험을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체제의 안녕을 위협하는데 어떻게 뒷짐만 지고 있어요.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당시 검사들이 용공조작한다고 사회전반적으로 비판적인 분위기가 팽배했지요. 저도 당시 친하게 지내던 한 병원의사로부터 ‘용공조작이나 일삼는 너같은 놈하고는 다시는 친구로 만나지 않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너무 슬펐지만 아무 대꾸도 못했습니다. 당시 외신이나 외국방송에서는 한국내 용공세력의 위협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했고 관련자들을 조사해 본 결과 주체사상에 경도됐다는 것은 밝혀냈는데 기소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88년 대규모 학원 폭력시위 등이 이어질 때 쯤 그 의사에게 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때는 생각이 짧았던 것을 사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 무려 5년이나 걸렸습니다. 96년 연대사태가 터지니까 국민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공안검사는 뭐하고 있느냐고 질책합디다.”

    (노환균)“공안검사는 절대로 정치검사가 아닙니다. 정통공안은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검사가 맡는 것입니다.” (이때 옆에서 김원치검사장도 ‘내가 정치검찰이라면 공안검사 20년에 벌써 뭐 한자리는 했겠지 창원지검장이나 하고 있겠소’라고 거들었다)

    ― 갖은 욕을 먹어가며 왜 공안검사 합니까?

    (고영주)“솔직히 약간의 선민의식도 있었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를 최일선에서 지켜나간다는 사명감이지요. 그것이 모든 고초를 이겨내고 검사하는 보람입니다. 아직도 자부심과 애정이 많아요. 제대로 된 공안검사 하나 만들려면 4, 5년가지고도 안됩니다. 특히 대공업무는 아무나 못해요. 억울하게도 공안검사는 단 한차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본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 왜 정치검사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까?

    (김원치)“과거 정치하는 사람들이 검찰을 이용해 정권안보를 도모하려 했다는 것이 비극의 시발점입니다. 일부 검찰도 정치와 관련된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려 했는데 이 점도 비난받아야 하는 일이지요. 결국 정치와 관련된 시국사건을 처리하는 공안검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정치적으로 민감한 수사는 모두 특수부에서 했습니다. 공안부는 정치적인 일을 전혀 처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인의 명예훼손과 관련된 고소 고발 사건도 대부분 형사부 관할입니다.”

    김원치 검사장은 자신이 공안부에서 평검사를 할 때도 정치검사 시비가 있었다며 최상엽 당시 공안부장과의 일화를 설명했다.

    “내가 사건을 들고 가면 항상 이렇게 묻더라고요. (그 사건이) 대체 반체제적이야 반정부적이야? 그럼 나는 반체제적이면서도 반정부적입니다라고 답하곤 했어요. 그런 것이 공안업무입니다. ”

    멈춰버린 ‘공안시계’

    인터뷰를 마치자 김원치 검사장은 호주머니에서 자신의 친필로 적은 A4 용지 2장짜리 메모를 전달했다. 다음은 김원치 검사장이 말하는 공안검사의 자질론.

    “대공사건, 선거사범, 노사 및 학원문제 등 사회전반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는 공안검사는 철학 의학 법학 등 다방면에 고른 지식을 갖춘 ‘파우스트’적인 기질과 풍부한 사건처리 경험이 있어야 한다. 또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기절제의 미덕을 갖춰야 한다. 예를 들어 ‘북풍공작’사건에 대한 수사의 경우 안기부의 활동 중 일부분이 정치공작에 휘말린 사건이었으므로 북풍공작에 대한 수사는 철저히 하되 대공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서는 안된다는 것이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검사로서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다. 공안검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익(公益)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국가를 위한 ‘에토스’가 절실하다.”

    김 검사장의 메모는 공안검사의 역할과 앞으로의 과제로 이어졌다.

    “공안검사는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앞으로 점점 심해질 산업스파이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이적행위 등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체제유지라는 명목을 내세워 공안검사를 정권유지에 교묘히 이용하는 점에 대해 단호히 뿌리치는 것이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공안의 숙제다.”

    공안검사를 했고 공안을 사랑하는 선배들의 걱정만큼, 99년 12월을 보내는 현직 공안검사들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하기자 붓 끝에 공안검사의 흥망이 달려 있어. 또 짓뭉개 버리면 공안검사는 다시 설 수 없을지도 몰라”라고 하는 한 공안검사의 농담아닌 농담은 현재 공안검사들이 느끼는 위기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안검사를 만났다. 이 검사는 파업특검의 수사발표를 염두에 둔 듯 “연말이면 공안검사 얻어맞을 일이 또 나올텐데 솔직히 두렵다. 어디 호젓한 곳에 있는 지청에 나가 맘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 대검 공안부가 압수수색까지 당했는데 요즘 공안부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죽을 맛이지요. 일단 대검만 보아도 공안을 담당하는 연구관 수가 99년초 8명에서 진형구 파동을 겪으면서 2명으로 줄었습니다. 조계종사태, 대우사태, 국가보안법 개정 논의 등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목소리를 내놓지 못한 채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공안기능이 멈췄다고 우려하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봐라. 너희들이 뒷짐지고 있어도 아무일도 없지 않느냐’며 비아냥 거리기도 합니다. 공안검사가 맞는 최대의 위기는 자긍심이 붕괴됐다는 것입니다. ”

    ― 어쩌다 동네북 신세가 됐습니까?

    “과거에는 공안검사가 시국사건의 법정에서 욕을 먹는 것은 다반사였고 검사석을 향해 물건을 집어던지는 사례도 종종 있었지만 지금처럼 외롭지는 않았습니다. 96년 연세대, 97년 한양대사건 등 대규모 학원사태를 처리할 때는 박수를 보내는 국민도 있었습니다.”

    ― 시대가 바뀐만큼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검 총무부에서 개선방안을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안과 기구를 줄이거나 기능을 축소하는 것 등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동계가 ‘동투(冬鬪)’를 선언한 12월 6일 정현태(鄭現太·사시20회) 공안기획관을 찾았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탓일까?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검 공안기획관을 맡은 부장검사답게 공안이 처한 어려움과 고뇌를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 공안이 왜 이렇게 두드려 맞나요?

    “업무특성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공안검사는 한가지 사안이 발생하면 공안검사 모두가 달려들어 같이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다른 직역의 검사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공안검사들끼리 몰려다니는 경우가 많지요.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조직내부에서도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아요. 최근 모 지검의 한 공안검사가 옷을 벗었는데 새로운 공안검사를 충원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공안을 하겠다고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참 씁쓸합디다. 그동안 공안은 무엇인가를 갖고 살아왔는데 말입니다.”

    ― 공안이 담당하는 업무가 지나치게 확대됐다는 지적도 있는데….

    “정통성이 없는 정권하에서 군부나 정보기관이 비대했을 때 그들이 하던 일을 이제는 검찰이 떠맡는 경우가 있었지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을 검찰이 했다고 욕하는 것은 일종의 질시가 섞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반대예요. 조계종사태, 의사들의 대규모 집단행동 등에 대해서도 공안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공안시계가 멈춘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요.”

    ― 노동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던데…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히 2000년 봄 대대적인 춘투(春鬪)를 공언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IMF를 졸업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해고된 노동자에 대한 복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삭감된 임금도 원상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에요. 또한 대검 공안부가 파업유도나 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2000년 봄은 89년 봄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협박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안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전 노동계의 그같은 예언이 현실화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허허….”

    생살도 도려낸다?

    ‘잔인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공안검사들의 마음에는 반성보다는 ‘왜 일반 국민들은 우리를 몰라주느냐’는 서운한 생각이 더 많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이 비판받는 이유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공안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노력은 적어 보였다.

    현재는 공안업무를 떠난 A검사는 “공안검사 위기의 본질은 현재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혼동하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라고 분석했다. 그는 “노동계의 극단적인 폭력시위 등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된다는 인식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공익의 대변자인 공안검사가 다시 설 자리가 있을 것”이라며 공안검사의 부활을 기대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몇몇 공안검사들이 언뜻언뜻 밝힌 ‘생살론’도 좀 섬뜩했다. 생살론의 내용은 이렇다.

    ‘공안검사가 하는 간첩이나 좌익사범에 대해 벌이는 수사를 수술에 비유한다면 용공세력들은 환부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살 군데군데에 붉게 물든 용공세력이라는 썩은 살이 생겨난 것이다. 검사는 신체에서 붉게 물든 부분을 도려내는 집도의다. 수술은 시뻘건 부분에 집중해야 하지만 완벽한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붉은 곳은 물론 발그스레한 부분도 모두 도려내야 한다. 생살을 도려내고 싶은 의사가 없듯 공안검사도 그렇다. 하지만 생살이 일부 떨어져 나간다 해도 그것은 시대의 아픔이다.’

    이 생살론을 들려주자 한때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B변호사는 상당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같은 인식이 아직도 때를 벗지 못한 ‘공안적인 사고’며 시대착오적인 공안검사적 인식의 전형이라고 흥분했다. B변호사는 “증거가 명확한 형사사건을 다루는 검사도 아니고 사상범을 단죄한다는 공안검사들이 그같은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을 사회의 세균이나 병균으로 생각하는 파쇼적인 생각이다”라고 주장했다.

    공안검사들은 은연중에 자신들이 확증없이 국가보안법 사범을 기소한다는 고백아닌 고백을 하기도 했다. 지방에서 만난 C검사는 “10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라는 형사소송법의 원칙은 국가보안법 사건에 만큼은 직접 적용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공안검사가 국보법 피고인을 무리하게 기소한다고 하지만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C검사는 “이는 사건을 억지로 꿰맞추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최종의 물증이 없더라도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여러 정황증거와 확고한 심증을 갖는다면 기소를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보법 위반사범이 저지른 범죄행위 자체는 그 범죄자의 머릿속에만 남아있고 물증이 남아있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철저히 물증위주로 수사하라는 것은 수사를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사건에 대한 강원일(姜原一)특별검사팀의 수사가 막바지로 접어들어가고 있을 즈음인 99년 12월 11일 오후 공안의 사령탑인 김각영(金珏泳·사시12회)대검공안부장의 방을 노크했다. 불명예 퇴진한 진 전부장의 바통을 이어 받은 김 대검공안부장도 공안통으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89년 광주지검 형사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이철규 변사사건이라는 공안 성격이 강한 큰 사건을 수사한 경험이 있다. 당시 김 부장검사는 부검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협박을 당해 하숙집을 이집저집 전전했던 일화가 있다.

    ― 강희복 전사장에 대한 영장을 청구한 특검수사를 어떻게 보십니까?

    “특검이 청구한 영장을 방금 읽어 보았는데 난 머리가 나빠 도저히 이해가 안되더군요. 당시 공기업의 구조조정은 시대적 과제였습니다. 대통령도 공기업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여러차례 강조했고 강희복은 이를 충실히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

    ― 검찰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은 벗은 것 같습니다.

    “수사결과를 신중히 지켜볼 생각입니다.”

    ― 곧 공안부에 대한 기구개편 작업이 있을 것이라던데요.

    “기구개편은 일개 대검공안부장이 확인해 줄 수 있는 사항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 공안검사들이 극도로 위축됐고 공안기능이 크게 약화됐다는 우려의 소리가 크던데요.

    “12월 10일 도심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보면서 착잡했습니다. 공안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뒷짐만 지고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것이 절실합니다. 믿어주지 않으니 답답하지만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요.”

    ‘공안적 인식’의 탈피

    하지만 ‘공안동지’들의 이같은 항변에도 불구하고 공안검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엄존한다. 그들이 국민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도 일조일석에 회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검찰 공안부가 체제수호와 정권수호 사이에서 커다란 갈지자(字)를 그려온 것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통해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공안검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사무국장을 지냈으며 가장 적극적인 국가보안법 개정론자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백승헌(白承憲)변호사는 “그동안 정통성 없는 정권에 대한 비판을 실정법에 의해 재단하면서 많은 무리를 범한 것이 기소독점권을 가진 검찰, 특히 공안검사가 저지른 원죄”라며 “실제로 그같은 과정을 거치며 공안(부)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고 말했다. 많은 힘을 거머쥐면서 교만해진 검찰이 송치사건 처리와 기소만을 담당해야할 본분에 머무르지 않고 자가발전해 저지른 사건이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의 본질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백변호사는 공안검사들은 자신들의 의식과 시각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결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위 ‘공안적 사고방식’때문에 파업 같은 노동운동을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하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사문제를 노동자와 사용자가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거나 또는 대립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공안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한다고 말했다. 백변호사는 “공안기능의 필요하다는 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140여 명이나 거느리고 있는 거대 공안부의 존재이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며 “공안부가 대대적으로 축소 또는 개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스로 검찰을 사랑한다는 검찰출신의 D변호사도 공안검사 무용론을 말한다. 공안부를 거친 검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안검사에 대해 손가락질을 하는데 정작 공안검사들은 그같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99년 서울지검 평검사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검사들의 연판장 파동때 공안검사들은 아예 논의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는 것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안검사가 검찰 발전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공안검찰이 그동안 정권의 안보와 체제의 안보를 혼동해 검찰조직 전체를 위기에 빠뜨린 것이 한 두번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 뒤 “한줌도 안되는 순기능을 살리기 위해 검찰 전체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99년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검사들 특히 공안검사들에게도 99년은 영원히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리고 싶은 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천년이 와도 당장 ‘공안검사=정치검사’라는 기존의 인식 대신 ‘공안검사=공익의 대변자’라는 관념이 국민들의 머리에 자리잡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폭탄주 먹을 때는 박수를 받았는데 요즘은 폭탄주도 못 먹으니 통 박수받을 일이 없어요.” 한 공안검사의 자조섞인 넋두리에 담긴 공안검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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