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문화는 돈이다

  • 입력2007-01-17 14:2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경제적 이익 획득이란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국가적 아젠다로 부상한 문화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마음만 급할 뿐 갈 길은 멀어만 보인다. 우리 문화산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문화기획자 3인의 대담을 통해 그 길을 모색해 본다.》
    • 때 : 1999년 1얼 1일
    • 곳 : 신동아 회의실
    • 참석자 : 홍사종 (정동극장장·극작가)
    •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대표·음반프로듀서)
    •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한국영화인회의 공동의장)
    • 정리 : 이강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내곳간이 차야 예의를 안다’는 옛말이 있다. 생물학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이에게 여유니 보람이니 하는 ‘배부른 얘기’가 먹혀들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곳간이 차야 알 수 있는 게 어디 예의뿐인가. 인간의 정신적 허기를 달래주는 문화 역시 수용자나 제공자나 곳간이 차지 않고는 영위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IMF를 통해 제조업 시대의 패러다임이 일대 곡절을 겪은 우리 사회에 그 대안의 하나로 문화가 ‘뜨고’ 있다. 진원지는 정부다. 세종로 청사 위에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는 구호를 걸어놓은 문화관광부는 드디어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문화예산 1% 확보라는 숙원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지금 뜨고 있는 주제는 정확히 말해 문화가 아니라 ‘문화산업’이라고 해야 옳다. 몇 년 전 청와대 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영화 ‘쥬라기 공원’의 흥행수입이 자동차 150만대 수출대금과 맞먹는다는 얘기가 나와 관료들의 잠을 깨운, 그리하여 최근에는 ‘21세기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자 ‘무공해 고부가가치산업’ 대접을 받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평소 문화의 중요성을 쉼없이 언급해온 김대중 대통령도 문화의 날인 10월 20일 문예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문화는 곧 돈’이란 요지의 치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문화창조력은 경제의 핵심”, “새로운 세기에는 한 나라의 문화 역량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국가적 위상이 결정될 것”이라며 문화계 인사들의 활약을 주문했다. 문화산업에 걸고 있는 국가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킨 것이다.

    애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쓴 ‘계몽의 변증법’이란 책을 통해 처음으로 등장한 문화산업은 ‘문화의 산업화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산물’이란 부정적 시각이 담긴 용어였다. 이들은 문화산업이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따라 대중의 욕구를 조작함으로써 상업적 이익을 관철시키는 반계몽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화가 가진 경제적 잠재력이 부각되면서 문화의 산업화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기술 제일의 시대였던 20세기와 달리 21세기는 독창적인 문화 전략 없이는 물건을 팔 수 없는 시대로 전망된다. 바야흐로 문화산업 키우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방법론을 찾아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신동아’는 문화 상품화의 방법론을 모색하고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 인프라를 점검하기 위해 ‘경영마인드’로 무장한 문화계 인사 3인이 대담을 가졌다. 허다한 문화 장르 중에서 공연 가요 영화 세 분야에서 대담자를 선택한 것은, 이들 분야가 다른 장르에 비해 대중의 접근과 이해가 용이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꿈 공장의 사람들

    홍사종 :문화와 산업이 만나는 접점이 어디인가는 문화가 대중의 일상 속에 침투된 과정이 잘 보여줍니다. 유럽에서 르네상스 이전까지 순수예술이란 존재하지 않았지요. 수요가 없었으니까요.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나 베네치아의 영주들에 의해 발레와 오케스트라, 오페라 같은 예술 장르가 태동했고, 이것이 점차 귀족들의 놀이공간인 살롱으로 넘어왔다가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는 극장과 공연장이 생겼지요. 이 점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화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인택 :이제는 음반 한 장, 영화 한 편이 얼마를 벌어들였다는 차원에서만 문화산업을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90년대 후반 들어 벤처기업의 돈줄인 창업투자사들이 영화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쉬리’를 만든 강제규필름과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가 곧 코스닥에 등록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문화산업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꽃이라고 불리는 벤처산업 가운데서도 가장 앞선 산업이 된 것이지요.

    홍사종 :이런 비유는 어떨까 싶군요. 생산요소적 관점에서 볼 때 카세트 테이프를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 그리고 공장을 위한 토지가 있어야 돼요. 이런 것들을 다 모아 만든 빈 테이프 한 개는 원가 600원, 여기에 300원의 마진을 붙여 나갑니다. 그런데 빈 테이프를 900원에 사다가 조수미나 H.O.T의 노래를 담으면 5000원에 팔리죠. 4100원이 부가가치예요. 이건 노동과 자본, 토지가 집중적으로 투자돼야 부가가치가 나온다는 고전 경제학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산장수가 짚신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산업 분야가 어려울 때 문화 산업은 국가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산업이 되는 것이지요.

    이수만 :한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서 옛날에는 군대를 키웠지만, 지금은 가수와 영화배우를 키워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40대 이상 되는 이들은 대개 백인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요. 영화에서 백인을 멋있게 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이런 얘기를 해요. 댄스 가수는 우리가 외국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고. 이건 뭐냐 하면 적어도 이 분야만큼은 자신감을 가졌다는 겁니다. 이런 자신감이 여러 문화 분야에 차곡차곡 쌓이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크지요.

    홍사종 :저는 문화산업을 단순히 돈을 버는 사업이라기보다 꿈을 주는 산업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있는 극장 얘기 좀 할게요. 97년 12월 IMF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다음해 공연 걱정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공연시장이 다 죽어버렸는데 국가적인 경제위기가 몰려왔으니 앞길이 막막했죠. 그때 존 스타인벡이 쓴 ‘분노의 포도’를 떠올렸어요. 미국 공황기에 빈한한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이 소설을 보면 1달러 때문에 살인까지 할 정도로 극에 몰린 이들이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였습니다. 영화 속에 뭐가 있습니까, 꿈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빈한한 노동자가 금광을 발견해서 부자가 되고, 평범한 사람이 공주를 만나서 사랑도 하지요. 저는 꿈을 파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일수록 더 경쟁력이 있다라고 거꾸로 생각했어요. 물건은 안 사도 꿈은 산다는 거죠. 그래서 극장의 공연횟수를 더 늘렸고, 그 결과 98년 공연수입 매출이 전년보다 40% 신장했어요.

    한국적인 상품, 세계적 상품

    80년대 북유럽의 스웨덴에는 세 가지 국가적인 보물이 있었다. 볼보자동차, 테니스 스타 비요른 보리, 그룹 아바가 그것이다. 74년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워터루를 불러 대상을 차지하며 떠오른 아바의 음반판매 수익은 절정기에는 볼보의 수출 수익을 앞질렀을 정도. 장르를 돌아가며 찾아보면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문화가 가진 잠재력은 경제적 이익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를 비롯해 아시아의 젊은 세대가 일본의 만화영화를 보고 자라 록그룹 X재팬의 음악에 열광하고 헬로키티 캐릭터로 자신의 장신구를 치장하면서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한결 엷어졌다는 사실은 문화가 가진 ‘만능키’ 역할에 주목하게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산업디자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풍부한 문화유산과 역사가 물려준 창의력이 디자인 경쟁력으로 전환돼 패션, 가구, 자동차 등 산업 전분야에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다.

    지난 98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한국의 경제 위기를 독창적인 문화의 개발과 전파의 실패’에서 찾고 ‘한국 상품의 최대 약점은 이미지가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급 브랜드 하나 없는 것이 사실인 우리로서는 아픈 훈수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이미지는 무엇이며, 또 우리는 외국에 무엇을 팔아먹을 것인가.

    유인택:저는 문화가 보이지 않는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얘기에 깊이 공감합니다. 90년대 초 중국이 개방된 이후 중국을 다녀온 많은 관광객들은 중국이 우리보다 30년쯤 뒤떨어졌다고 얕잡아봤습니다. 그러나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탄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다시 보게 됐어요. 마찬가지로 유럽사람들한테 당신 한국 영화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딱 하나,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얘기해요.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받았지만 유럽 영화계에서 정식으로 극장 개봉을 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확실히 달라요.

    홍사종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말씀이신데, 비슷한 사례는 ‘난타’와 ‘명성황후’의 성공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난타’ 같은 경우는 에딘버러 축제에 가서 100만달러 계약을 하고 왔을 정도입니다. 이런 공연의 흥행성공은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키는 한편으로, 우리 문화가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수만 :그러나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한국적인 것에 매달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문화 상품을 얘기하면서 주체의식, 혹은 민족주의와 연결시키려는 발상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는 TV를 안 본다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프랑스를 닮아야 할까요. 이렇게 되면 국민의 문화향유에서 텔레비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우리의 여건으로 보아 문화 전체가 도태할 가능성도 있어요.

    유인택 :제 경험담을 한 가지 말씀드릴게요, 90년대 후반 들어 몇 차례 해외 합작을 시도한 일이 있습니다. 폴란드하고 ‘이방인’이란 영화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이재수의 난’을 프랑스와 합작했지요. 이들 영화 전에 만든 게 호주와 합작해 ‘현상수배’란 영화입니다. 당시 저는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한국 영화를 해외에 팔려면 언어의 장벽이 있으니 영어로 가야겠다. 영어권에서는 자막을 읽기 싫어하거든요. 프랑스 같은 경우도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자막을 치지 않고 더빙을 합니다. 자막처리해서 외국영화를 보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둘째, 상품으로 국경을 넘으려면 백인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배우는 박중훈 한 사람에다가 나머지는 전부 호주 사람들로 썼단 말이죠. 그 다음에 국경과 인종을 떠나서 공통적으로 다 좋아하는 영화장르를 생각했어요. 바로 액션과 코미디입니다.

    이렇게 기획해서 만든 게 ‘현상수배’라는 영화인데, 결국은 제가 착각을 했더라구요. 어느 나라나 코미디는 좋아하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코미디가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성공하더라도 한국에 와서 실패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챙기지 못한 거예요. 외국 관객들에게 한국의 멜로영화라든가 어설픈 액션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늘상 보아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보다는 같은 사랑을 다룬 영화를 하더라도 한국적인 것, 못 봤던 것이 먹히는 것이지요.

    이수만 :국내 경쟁력이 좀 모자라더라도 나가서 자주 하면 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 먼저지요. 국내에서 출발해 아시아로 나가고 그 다음 유럽, 미국을 공략하는 전략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가수를 생각하면, 이를테면 빌보드 차트에 오르기 전에 아시아 차트를 먼저 공략하는 것이 순서지요. 현실적으로 당장의 경쟁상대는 미국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음반시장이 일본인데, 일본도 아시아 시장에 별 관심이 없어요. 우리나라와 대만 중국 다 합쳐봤자 자기네 음반시장의 10%밖에 안 되거든요. 우리 문화가 일본이나 미국보다 수준이 낮더라도 남미나 아프리카, 중국에서 많은 대중들한테 호응을 얻는다면 적어도 이들 나라에서는 문화 선진국으로 대접받을 수 있잖아요.

    유인택 :새 정부 들어서 영화계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된 것이 스크린쿼터 문제입니다. 한편으로는 영화는 벤처산업이라며 시장경제 논리에 맡겨야 한다면서, 또 한편으로는 문화의 논리를 들어 스크린쿼터를 유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자기 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는데, 프랑스를 뺀 전세계 대다수의 나라들이 자국 영화가 없다는 현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영화가 산업이면서도 문화라는 인식은 반드시 견지돼야 하거든요.

    홍사종 :문화상품은 그것이 영화가 됐든 음반, 연극이 됐든 시장논리로만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죠.

    이수만 :문화에는 선도하는 축이 있어야 해요. 하나의 선도축이 있어 그 장르의 종사자들이 이를 쫓아가고, 이것이 다시 커지면서 분화하는 방식이어야 전체가 질적·양적으로 성장하지요. 이를테면 ‘모래시계’ 같은 것이 자꾸 만들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TV문화에는 이게 없어요. 저는 그 이유를 경직된 광고 가격에서 찾습니다. 지금 텔레비전 광고료는 프라임타임에는 얼마, 다른 시간 얼마 이런 식으로 고정돼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건 없건, 그 시간대에 방영되는 광고는 모두 같은 가격이에요. 우리 방송사들은 밤 12시 반 이후에는 프로그램 제작을 안 해요. 시청률이 낮으니까 짜깁기 편집만 해서 방송하고 있어요. 광고료가 비싸니 광고가 안 붙고, 제작비가 안 나온다는 거죠. 이렇게 해서 무슨 발전이 되겠느냐 이거예요. 일본은 밤 10시 이후에는 레코드사 없이 TV사가 존재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많은 레코드사가 광고를 합니다. 싸기 때문이에요.

    문화의 논리, 산업의 논리

    최근 진행되고 있는 문화산업 관련 논의의 특징은 문화보다 산업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이다. 국민의 문화적 소양을 심화시켜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문화의 논리가, 소비자가 외면한 상품은 도태돼야 한다는 산업의 논리에 밀리는 형국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지난 11월 25일 사단법인 4월회가 연 ‘21세기 문화산업 정책의 방향과 과제’ 토론에서 한 참석자는 “우리는 아직도 ‘문화’가 순수하게 문화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는 왜곡된 문화환경에 둘러싸여 있다”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와 관련, 최근 한국연극배우협회가 연극공연을 공공근로사업으로 인정해줄 것을 유관기관에 요구하고 있는 현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협회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최저생계비를 밑도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며(협회 조사 결과 회원 409명 가운데 수입이 연간 500만원 이하인 경우가 268명), 그나마 IMF 이후 공연물의 절대 감소로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기업구조조정에 따른 실직자들이 매월 50만원 가량의 혜택을 받듯이 연극연습 시작일부터 공연이 끝나는 날까지 3개월간 하루 2만7000원씩을 지원하면 약 150만원의 수입이 발생해 최저생계유지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번 예산안에서도 문화예술 예산이 99년보다 70억이 증가한 545억원인 데 비해 문화산업 예산은 803억원이 늘어난 1553억원이나 됐다. 문화투자인지 산업투자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예술은 아직도 배가 고파야만 하는가.

    이수만 :제가 활동하는 무대는 가요라기보다는 넓게 TV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싶군요. 그런데 대개는 TV에 나오는 문화를 단순한 놀이 정도로 치부해버려요. 언론도 대중문화계의 소식을 전하는 데 인색하고요. 말로는 문화의 한 영역이라고 하면서도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별 다른 지원이 없어요. 이전까지 비슷하게 대접하던 영화는 요즘 문화의 범주에 당당히 끼워주고 있으면서도 말이죠.

    유인택 :이선생님 말씀은 일종의 ‘연예인 콤플렉스’ 아닐까요. 우리를 왜 예술가로 대접하지 않느냐는. 대중문화가 가진 콤플렉스의 본질은 사실 문화가 아니라 예술에 대한 콤플렉스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80년대에 끝났다고 봅니다. 특히 가요 분야는 서태지와 H.O.T가 시대의 사회현상을 주도했잖아요. 이처럼 문화의 한 장르의 파급효과가 그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90년대 대중가요가 우리 사회에 확인시킨 분명한 현상입니다.

    홍사종 :대중문화에 지원이 없는 것은 문화적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확실한 구매력이 뒷받침돼 자금 회전이 빠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국가에서 정통예술인들을 지원하는 것은 이와 차원이 다릅니다. 국가가 우리 영화 산업에 대해 정책적인 지원을 하는 것도 발전의 여지가 많은데 집중적인 투자가 안 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가요가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요.

    대중문화에도 관심을

    이수만 :그 말씀은 자립기반이 있으니까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그러나 사정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시각을 외국으로 향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 세계 대중문화계의 판도는 미국이란 메이저와 이에 대항하는 세력간의 싸움입니다. 모든 것의 적은 메이저, 즉 미국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우리가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가. 저는 그렇지 못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일단 아시아 시장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V뿐만 아니라 지금 전 문화 영역에서 한국과 대만 중국이 중요한 문화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어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먼저 아시아의 리더가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아시아에서부터 경쟁력을 가져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홍사종 :경제적인 지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수만 :돈을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너희끼리 알아서 해보라는 식의 인식이 바뀌고 정책이 뒷받침되길 바라는 것이지요.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문화를 크게 클래식문화와 대중문화 두 가지로 나누어 클래식 부분만 문화로 취급하는 사회 인식이에요. 물론 대중문화 종사자들이 국내에서 돈을 버는 것으로 끝난다면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정한 무대는 세계거든요. 문화가 경제적 진출의 기반을 다지는 기초임을 인정한다면, 딱히 대중문화를 다른 문화와 구분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예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상품이 나갈 유통망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유통망은 혼자 하면 되지 않느냐, 이건 혼자 못 합니다.

    홍사종 :그건 가수나 영화배우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사정은 정명훈도 백남준도 마찬가지예요. 문화 인프라에 대한 정책적인 지원, 예술가에 대한 지원은 가수나 영화배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니죠. 제 이야기는 대중문화에 지원이 필요없다는 게 대중문화가 자립기반이 강하다는 것과, 더 연약한 곳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지원해야 한다는 겁니다. 순수예술은 쉽게 말해 문화산업의 인프라입니다. 모든 문화는 이 뿌리의 바탕 위에서 가지를 친 것이지요. 미켈란젤로나 보티첼리의 그림에서 이탈리아의 디자인, 패션이 나온 거란 말이죠. 패션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고 누가 얘기할 수 있어요.

    유인택 :옳은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부분은 21세기를 앞두고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가 인기 위주, 다시 말해 돈 되는 것 위주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향은 비단 문화 부분만의 현상은 아니지요. 인문과학은 인기가 없고, 스포츠도 프로축구 프로야구만 하려 들지 기본인 육상은 소홀히 하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순수예술이 돈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홀대해서는 안 되지요.”

    99년 초 푸에르토리코 출신 가수 리키 마틴을 세계 무대에 내놓아 재미를 본 소니뮤직이 밀레니엄의 글로벌 마켓을 겨냥해 내놓은 두 번째 상품은 아시아계다. 99년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에 참가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대만 출신 가수 코코 리가 그 주인공. 노래 춤 외모의 3박자를 갖춘 그는 대만인 부모 아래 홍콩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라 영어도 능숙하다. 국제적인 상품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두루 갖춘 것이다. 그의 이런 조건은 꼭 한 가지씩 핸디캡을 가지고 있어 아시아 시장조차 제대로 진출하지 못하는 우리 가수들과 비교해볼 때 강점임에 분명하다.

    세계 5대 메이저 음반사의 지원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첫 아시아권 가수가 된 그는 분명 신데렐라다. 국내 가요계 관계자들은 코코 리 같은 가수가 탄생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국내 가수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가창력 외모 춤 언어 가운데 꼭 한 가지씩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기획자에게로 눈을 돌리면 어떨까. 소니뮤직은 11월 초 전세계 기자들을 홍콩의 고급 호텔로 불러들여 화려한 시범공연을 열었다. 여기에 쏟아부은 돈은 수십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품을 만들겠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다. 코코 리도 “무엇보다 역량 있는 매니저와 멋진 팀을 이루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본, 상품, 그리고 안목 있는 기획자….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홍사종 :방금 이선생님이 우리 문화유통망이 취약하다고 지적하셨는데 저 역시 동감하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시장의 프로모터와 비교하면 규모도 훨씬 영세하고. 이런 부분을 국가가 지원해준다면 우리 문화가 훨씬 경쟁력 있는 상품이 되겠지요.

    이수만 :우리의 문화가 가장 많이 논의되고 표출되는 것은 TV를 통해서입니다. 극장보다 TV를 통해 영화를 보는 인원이 더 많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진정 문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TV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유인택 :이수만 선생께서는 가요 쪽에 소홀한 것 아니냐고 했는데, 저는 공연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체의 노력없이 정부 당국자에게 그저 손을 벌리거나 알아서 해주려니 하는, 그런 자세를 오히려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홍사종 :유선생 말씀은 문화관광부 예산과 관련이 있는 얘기인데, 제가 있는 정동극장이 문화관광부의 산하단체이다 보니 예산편성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아요. 문광부는 순수문화를 도로, 교량, 항만과 같은 인프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새해 예산은 창조적 예술활동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창작여건을 개선하는 데 238억원이 책정됐습니다. 다리는 그 자체로 부가가치가 없지요. 다리를 통해 트럭이 왔다갔다 함으로써 부가가치가 나오잖아요. 마찬가지로 가수들도 어떻게 보면 순수음악에서 뿌리를 두고 오늘날 서태지, H.O.T 같은 대중가수가 나오게 된 거죠.

    먼저 순수예술 분야 내부에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건 옳은 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예술은 그것이 순수예술이기 때문에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바탕 위에서 산업이 될 만한 다양한 예술, 예를 들어서 H.O.T가 나오고 디자인, 패션이 발전할 수 있는 거죠.

    유인택 :제가 왜 그 얘기를 꺼냈는지 자세히 설명할게요. 저도 80년대 내내 연극이나 무용 등을 기획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연극이나 무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단발성 작품에 대해 정부의 지원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관객은 공짜로 채우고 말입니다. 경쟁력이란 진보와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연극계나 무용계는 현실에 안주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연극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고 하고, 무용은 학연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하고. 이런 부분에 대한 반성 없이 지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IMF 이후 모든 것이 침체됐으나 그나마 영화 분야만 지원을 받았다는 세간의 평가도 있더군요. 하지만 이런 이면에는 1988년 미국영화 직배 반대 투쟁 이후 우리 영화계는 근 10년간 계속 한국영화의 근본적 발전을 위해 고민한 영화인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획자 혼자서는 해결 못 한다

    홍사종 :정부도 그런 내용을 알고 있다고 봅니다. 정부가 순수문화예술에 대해서 투자하는 것은 유통분야라든가 인프라 구축 측면이나 하드웨어에 대한 투자지, 예술단체에 대한 무차별 지원의 방향은 아닙니다. 유선생이 지적하신 연극계의 상황에 대해서는 동감이에요.

    사실 우리나라의 공연예술계가 아주 취약해요. 지금까지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배고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한 이유이지요. 그런데 제가 우리 직원들한테도 그렇고 연극인들을 만나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장사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관객과도 멀어진다’고 말입니다. 자발적인 유통을 통해서 소비를 촉진시켜야만 예술과 문화가 자꾸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고, 저변도 확대됩니다. 극장뿐만 아니라 연극단체의 경영수지가 좋아져야 문화 창달이라는 공적인 이익과 가치추구도 더불어 부합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 점에서 저는 순수예술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 대중문화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이수만 :일단 경쟁력을 가진 다음에 정부에 손벌리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경쟁력 있는 물건, 경쟁력 있는 가수나 영화배우, 영화를 어떤 유통망을 통해서 내보내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겠죠. 사실 이건 기획자 혼자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정부에서 지원해줘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겁니다. 제 이야긴 그렇다고 정부가 문화상품유통공사 같은 것을 만들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홍사종 :우리 공연예술시장이 취약한 점은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이 많지 않다는 겁니다. 이는 공연단체들이 작품을 일과성으로 만들 뿐 고정 레퍼토리화 하지 않았고, 또 수요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정부 지원만 바라는 관행들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경쟁력이 없으면 문화가 상품화되지 않는 것이고, 문화가 상품화되지 않으면 관객이 없어지고, 국내 관객이 없으면 외국 시장에 나가서도 관객이 없는 거예요. 뉴욕시는 관광 수입의 23%를 브로드웨이 극장가에서 벌어들이고 있어요. 그 액수가 대략 2조700억원입니다. 이는 극장도 관광자원화하고 산업화하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상품이 있다면 대학로가 얼마든지 브로드웨이 같은 명소가 되겠죠.

    이수만: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나부터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이를 위해서라도 다양한 시도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여기서는 그냥 있다가 나가서 해보라고. 도대체 해보지 않고 뭐가 어떤지 어떻게 압니까.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건 우리의 전반적인 풍토가 아직도 닫힌 문을 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일례로 KBS가 H.O.T에게 노랗게 머리 물들이고 나오지 말라고 해요. 어른들 심기 사납다고. 그런데 청소년들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오빠들은 머리 검게 물들이고 KBS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제 이야기의 초점은 머리색깔이 아닙니다. 문화 상품을 만드는 기반이 튼튼해야 해외진출 등 여러 가지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움직일 여지를 달라는 겁니다. 가뜩이나 유통구조가 왜곡돼 있는 상태에서 내수기반은 ‘길보드’ 불법복제품이 잡아 먹고, 각종 규제와 검열이 설쳐대면 어느 세월에 경쟁력이 생기겠어요.

    홍사종 :문화계 전반을 누르고 있는 규제와 각종 법률의 정비가 문화예산 1% 확보보다 더 중요하죠.

    문화향유의 기회를 넓혀야

    유인택 :외교관이나 정치인, 경제인들도 21세기에는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몇 년 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그곳의 우리 외교관들은 ‘하필이면 왜 이런 영화를 가지고 왔냐’고 타박을 하더군요. 못살고 못먹던 시절을 다룬 운동권 영화가 어떻게 한국을 대표한다고 내보내냐고요.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만 자랑스러운 문화가 되나요?

    이수만 :그런 일이 있었군요. 1년 전쯤 베이징의 제안이 있어 H.O.T가 2000년 1월 5일에 그곳으로 가 공연할 예정인데, 아주 협조가 잘 됐어요. 대사관에서는 자동차도 내주고 저녁에 만찬도 해주기로 했지요. 문광부에서도 미리 연락해 필요한 것 없느냐고 관심을 보여줘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대우받으며 외국 갔다오면 애국자돼서 돌아와요. 내 나라가 자랑스러운 거죠.

    유인택 :그리고 또 하나, 좋은 기량을 가진 예술인들이 공연을 하려고 해도 장소가 없습니다. 이럴 때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인식을 바꿔 문화예술회관을 개방하고 자치단체의 문화비로 공연을 하면 어떨까요. 지금 지방의 문화예술회관은 번드르르하게 잘 지어놓고도 소프트웨어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구민대회용으로밖에 기능을 못 하고 있어요. 이런 곳을 활용해 지자체가 공연을 유치하고 콘서트를 열고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자치단체에서 한 영화를 100만원에 살 경우에 이런 곳이 100곳이 있다면 1억원입니다. 그러면 어렵게 돈을 투자해서 소프트웨어를 만든 문화예술 생산자도 도움이 되고 국민들도 문화향유의 기회를 넓힐 수 있어 좋지 않겠어요.

    홍사종 :시장을 개발해 나가는 데 그런 방법도 좋겠네요. 사실 우리 시장이 취약한 건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 대한 체험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가치를 최고로 치는 사회에서 살아온 탓에 나이 들어 문화 생활을 하려니까 익숙해지기가 어려워요. 어렸을 때부터 생활 속에서 가까운 구민회관이라든가 예술회관 같은데서 영화를 보고 대중 가수와 만나고 연극을 만난다면 이들이 커서 소비자가 될 것 아닙니까. 꿈도 키우고, 실질적인 구매자도 되고, 결과적으로 문화시장을 받쳐주는 활력이 되지 않겠어요.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