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태클과 반칙 구분 못하는 선수가 태반”

  • 문영숙 자유기고가

    입력2007-01-26 10: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한국 축구 여성심판 1호, 프로축구 여성심판 1호, 국제 여성 축구심판 1호. 임은주 심판의 이름 앞에는 늘 ‘1호’ ‘첫’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남자들만의 세계라는 금기를 깨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심판 자격을 획득한 ‘특별한’ 여자인 탓이다. 국제 축구무대에서 ‘타이거’라는 심판계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그녀가 한국 축구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
    임은주씨(34)가 한국 축구계 처음으로 여성 심판이 됐을 때 사람들은 ‘여자도 축구심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뒤이어 그녀가 국제 여성 축구심판 자격증을 따내자 이번에는 ‘능력이 있긴 있나 보다’며 ‘대견해’했다. 그러나 남자심판들의 아성인 프로축구계까지 넘보는 순간 ‘어떻게 여자가…’라는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눈들은 그라운드의 그녀를 그저 한 사람의 심판으로 봐주지 않았다. 자리를 잘못 찾아든 이단아 취급을 하기도 했고, 하루라도 빨리 ‘여자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빗나갔다. 그녀는 오히려 대담하고 공정한 판정으로 ‘칼심판’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칼심판’의 명성을 얻기까지 그녀는 기꺼이 축구계의 ‘모난 돌’ 역할을 떠맡았다. 규정보다는 관행이 횡행하는 그라운드에서 선수들 코앞에 여지없이 규정을 디밀었고, ‘손대지 않던’ 스타급 선수를 퇴장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가 무슨 특별한 존재거나 또는 튀려고 기존 관행에 따르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융통성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구요. 그저 배운 대로 실천할 뿐이고 우리 축구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발 여자라서 어떻다는 식으로는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전 그냥 규정에 충실한 축구심판일 뿐입니다.”

    그녀는 축구얘기를 할 때면 ‘습니다’ 체를 유난히 많이 쓰며 말 한마디 한마디를 무척 신중하게 내뱉었다. 아마도 프로축구계 최초이자 현재로서는 유일한 여성심판이라는 이유로 늘 관심의 초점이 되는 자신의 위치를 의식한 조심성이 몸에 밴 때문일 것이다.



    육상, 배구, 하키, 그리고 축구

    짧은 커트머리, 검은 심판복, 크고 튼튼한 체격조건까지, 언뜻 봐서는 그녀를 남자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특히 그라운드에서는 남자심판과 분간이 안 되는 탓에 축구연맹 측에서 “머리를 기르라”고 종용할 정도. 이쯤 되면 너무나 ‘남성적인 여자’라 남자들의 세계에 뛰어든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그녀가 축구심판이 된 것은 유난히 남성적이어서도, ‘금기’의 세계를 향한 도전욕이나 모험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축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가 축구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 선수로 입문하기에는 좀 늦은 스물다섯살 때였다. 타고난 운동광이었으나 대학 졸업 후 한국사회체육센터에서 강사로 일하며 운동에 대한 갈증을 달래고 있을 즈음이었다. 대학에서 여자축구팀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축구는 해본 적도 없었지만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판단이 섰고 서둘러 이화여대 대학원에 체육 특기생으로 진학했다.

    강남초등학교 시절에는 단거리와 던지기를 주종목으로 하는 육상선수로, 세화여중에서는 배구선수로, 그리고 인천체고와 서원대에서는 필드하키 선수로 활약하며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었지만 축구만큼 그의 적성에 딱 들어맞는 운동은 없었다. 북경아시안게임 여자축구 국가대표로 발탁돼 센터포워드로 활약하는 동안 그녀는 ‘여자 차범근’으로 불릴 만큼 열정적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사가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선수생활은 ‘행복’을 그리 오래 보장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현역으로 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조금씩 불안해졌지요. 특히 국제대회에서 외국선수들을 만나면서부터 그 불안이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는 운동이 곧 직업인데 외국 선수들은 본업을 따로 갖고 있으면서 취미활동처럼 선수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특히 변호사인 어느 하키선수가 제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충격이 컸죠. 운동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내가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처음부터 축구심판으로 장래를 설계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은 불안한 마음에 ‘마치 환장한 사람처럼’ 온갖 자격증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체육정교사, 스포츠마사지사, 사회체육지도자, 수영강사…. 이후 취득한 심판자격증까지 합치면 그가 가진 자격증은 무려 19개에 달한다.

    온갖 자격증을 섭렵한 뒤 이화여대 대학원 축구부 코치를 맡으면서 비로소 심판자격증에 욕심이 생겼다. 특히 1급 심판이 되려면 2급 심판으로 5∼7년 동안 경력을 쌓아야 하는 데 반해, 국가대표선수 출신에게는 3개월의 합숙훈련과 시험통과만으로 바로 1급 자격증이 주어진다는 규정이 그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러나 순전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강한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여자는 심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지만, ‘축구심판은 당연히 남자’라는 인습이 그녀를 가로막았던 것. 93년 심판 자격증 시험에 응시한 사실을 두고 주변 사람들은 “여자가 어떻게 축구심판이 되느냐”며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편견을 무색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꼭 자격증을 따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솟았고, 그는 결국 해냈다.

    금기에 도전하다

    그리고 97년, 이번에는 1급 심판자격증을 획득한 지 만 3년이 경과해야 응시자격을 주는 국제심판 자격증에 도전장을 냈다. 그 사이 전국대회 이상의 경기에서 주심으로 10게임 이상, 선심으로 20게임 이상을 뛰어야 한다는 응시자격을 갖추고 영어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까다롭고 힘들기로 유명한 체력테스트에는 평소 꾸준히 해온 10㎞ 달리기와 2∼3시간의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대비했다. 그리고 축구규정 필기시험을 위해 규정집을 아예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했다. 그 결과 그녀는 문턱 높은 국제심판자격증 시험에서 쟁쟁한 외국 심판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남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세계에서 여자가 남자만큼만 해서는 절대로 인정 못받습니다. 그래서 국제심판자격증에 도전할 때 1등으로 붙을 각오를 했어요. 아무리 정정당당하게 시험에 합격했어도 여자심판은 못 믿는다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아예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국제심판자격증을, 그것도 최고성적으로 획득하고 돌아온 뒤에도 한국 축구계는 그녀를 선뜻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한국 최초의 국제여성심판’이 탄생했다며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데 반해 심판세계에서는 어쩐지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

    “1급 심판자격증으로 아마추어에서 활동할 때는 선배님들이 저를 꽤 예뻐하셨거든요. 여자가 무슨 축구심판이냐고 하던 분들도 막상 제가 뛰는 모습을 보고는 인정하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국제심판자격증을 따고 난 후에는 나이도 어리고 경기경력도 많지 않다는 이유로 뒷말이 좀 많았어요. 경쟁상대가 아니라고 여길 때와는 달라진 태도를 보고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동등한 자격을 갖췄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애초 남자들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기에 ‘꾹 참고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하자’며 주변의 편치않은 시선들을 받아냈다. 그러나 심판으로서 그녀의 위치가 확고해질수록 주변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99년 2월 프로심판자격증에 도전해 또다시 ‘최초’라는 타이틀로 프로심판이 된 이후, 그녀는 더 힘든 고비를 맞아야 했다.

    98년도 베스트 심판으로 뽑힐 만큼 아마추어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녀가 프로심판에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10개 구단 구단주들과 축구연맹 관계자들이 만장일치로 프로심판 자격을 인정했는데 그녀의 존재는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홍일점으로 특혜를 받았다느니, 경력이 부족해 실력을 믿을 수 없다느니 하는 뒷말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런데 여기서 그만두면 또 어떤 말들이 오갈지 눈에 뻔히 보이더라구요. ‘그렇지, 역시 여자는 안 돼’ 하는 편견만 더 심어주는 꼴이 될 게 틀림없었어요.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야, 임은주. 이런 것도 못 견디면 장차 뭘 하겠다는 거야’ 하면서 순전히 오기로 버텼어요.”

    축구판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한편으로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선배 심판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했다. 최소한 예비심판코스 1∼2년, 부심 등의 수순을 거쳐 전임심판으로 입문한 선배들과 달리 프로심판 계약 당시 바로 전임심판으로 영입된 자신이 ‘특혜’를 받은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추어에서 인정받은 경기운영 능력, 국제심판 경력 등이 참조된 것이지만 어쨌든 예비코스를 거치지 않은 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던 셈이다.

    “사실 전 프로심판에는 별로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가는 게 당연한 순서니까 프로심판이 되기로 한 거죠. 그리고 예비코스도 당연히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구요. 그런데 프로심판 계약 당시 심판위원장님이 예비코스 없이 바로 전임으로 계약하자는 거예요. 한동안 고사했습니다. 열 자리밖에 없는 전임심판 자리 중 하나를 제가 차지하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다른 남자선배들에게 피해가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예비심판 자리를 달라, 전임은 절대로 못 한다고 버티다가 집까지 찾아오신 심판위원장님께 설득당한 겁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는 저보다 평균 열 살씩 많은 선배님들이 어렵게 얻은 자리를 비교적 쉽게 얻은 셈이니까 미움을 살 만하다고 이해했어요.”

    그때부터 친선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헐뜯고 대놓고 그녀를 미워하는 선배들에게까지도 모든 자존심을 접어놓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인 99년 여름 미국에서 치러진 여자월드컵에 심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심판계 내에서도 그녀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 100년 역사상 월드컵 주심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비록 막판에 번복되기는 했어도 여자심판으로는 세계 최초로 결승전 주심에 내정되기도 했다. 결승전에 중국팀이 올라간 탓에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결승전 주심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것.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세계 축구계가 ‘한국의 임은주 심판’을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이 충분히 증명된 셈이었다.

    “축구판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그것도 늘 내 입지를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첫 번째 케이스라는 사실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어요. 하다못해 옷 갈아입는 데도 ‘여자’라는 사실이 불편했으니까. 보통 옷은 심판실에서 갈아입는데 우리나라에 여자심판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운동장에 나가도 여자 심판실이나 여자 탈의실이 따로 없습니다. 아마추어 심판 때는 혼자 화장실에서 갈아입거나 차창을 진하게 코팅하고 그 안에서 갈아입곤 했죠. 지금은 남자심판들과 워낙 친밀해져서 제가 있는 자리에서도 남자심판들은 편하게 갈아입어요. 그리고 제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는 운동장 점검을 하느라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주구요. 지금 아마추어에서 활동하는 후배 여성심판들은 여전히 옷 갈아입는 문제가 제일 힘들다고 하더군요.”

    선배심판들과 관계가 부드러워지면서 한 고비 넘겼다고 안도하는 순간 이번에는 한국 축구계의 관행이 그녀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다가섰다. 그라운드에서 ‘칼심판’으로 통할 만큼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 그녀의 스타일. 그래서 프로심판으로 입문한 지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선수들을 가장 많이 퇴장시킨 심판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퇴장시킨 선수는 총 3명.

    특히 99년 5월 열렸던 대한화재컵 울산 현대와 부산 대우 간의 4강전에서 울산 현대의 윤재훈과 부산 대우의 안정환을 연달아 퇴장시킨 것은 ‘사건’이었다. 안정환이 자신의 프리킥을 방해한 울산의 이길용을 발로 차자 즉시 퇴장판정을 내렸던 것. 당시 안정환은 ‘결승전에 뛰어야 하니 제발 퇴장만은 시키지 말아주세요’라며 경고판정을 부탁했으나 단호하게 퇴장판정을 고수했다.

    “그건 누가 봐도 100% 퇴장감이었습니다. 볼을 차려다가 상대편 선수를 잘못 찬 게 아니라 볼과 상관없는 행동이었거든요. 더구나 제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찼기 때문에 의도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했죠. 다른 사람들은 못 봤는지 모르지만 퇴장판정을 내린 순간 안정환이 두 손으로 빌면서 부탁했어요. 저도 사람인데 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안정환 한 사람 봐주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날 안정환을 봐주었다면 다른 경기에서 다른 선수들도 봐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죠.”

    그녀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판정 원칙이 무너지는 것이다. 단지 규정을 제대로 지키기 위한 평범한 판정이었는데도 퇴장선수가 스타플레이어라는 이유로 그녀는 ‘스타플레이어 안정환을 퇴장시킨 대담한 심판’으로 화제가 됐다. 안정환을 퇴장시키기 전 그를 심하게 방어하던 상대팀의 윤재훈을 퇴장시킨 판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

    “판정 원칙을 세우는 것과 함께 심판에게 중요한 일은 선수보호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윤재훈이 너무 과도하게 안정환을 방어하는 바람에 안정환이 다칠까 봐 선수보호 차원에서 퇴장판정을 내렸던 거예요. 마찬가지로 안정환에게 챈 이길용을 보호하고 규칙을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 안정환을 퇴장시킨 것이구요. 스타플레이어라고 해도 심판에게는 다 같은 선수일 뿐입니다. 안정환을 퇴장시킨 것이 특별한 화젯거리가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나 주변의 시각은 달랐다. 구단장들도 “다른 사람이라면 못 했을 것”이라며 놀라워했고 허정무 감독도 “과감하게 잘했다”고 격려했다. 심판 임은주에게는 ‘당연한’ 판정이 축구계에서는 ‘용기 있는’ 판정으로 비칠 만큼 우리 축구계가 규정보다 관행에 휘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와 선수들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해도 반드시 풀고 넘어가거든요. 경고나 퇴장판정을 받고 안 좋은 얼굴로 경기장을 떠났던 선수라도 다음에 만나면 꼭 농담을 건네서 기분을 풀어줍니다. 그래야 서로 앙금이 안 남죠. 안정환한테도 ‘정환아, 너 삐졌냐?’ 하는 말로 웃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니 제발 “스타플레이어 운운하며 큰일이나 되는 듯”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우리 선수들 규정 너무 모른다

    “제가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원칙을 지킨다는 측면도 있지만 우리 축구가 국제무대에 제대로 서기 위해서도 규정을 엄수하는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심판들과 얘기해 보면 하나같이 ‘한국선수들만큼 판정에 불만이 많은 선수들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도 외국팀과 경기할 때마다 자꾸 억울하다고 하구요. 그건 규정보다 관행에 따라 축구를 해왔기 때문이에요. 외국에서는 규정에서 벗어난 관행이 통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했는데 왜 너희는 그렇게 하냐는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심판으로 그라운드에 서서 답답함을 느낄 때는 규정을 너무 모르는 선수들이 항의해올 때다. 규정에 명백하게 나와 있음에도 정반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심판의 판정과 비교하며 항의하는 경우도 잦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우리 심판계의 판정원칙이 바로 서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도 좋지만 진정 축구를 사랑하고 선수들을 아낀다면 제대로 된 규정부터 축구관계자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선수들을 비롯한 축구관계자들과 심판들 사이에 신뢰가 싹트고 ‘판정이 공정치 못하다’느니 ‘편파판정’이라느니 하는 오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팀 가운데는 일종의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팀도 있어요. ‘어느 심판만 들어오면 우리는 진다’ 하는 식이죠. 단순한 징크스일 수도 있지만 그건 곧 편파판정을 의심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오심은 있어도 편파판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심판을 배정할 때부터 학연·지연까지 다 따져서 시비가 일지 않도록 배정하고 지켜보는 눈도 많은데 어떻게 편파판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축구관계자들과 심판들 사이에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특히 자기 팀이 불리하다 싶으면 누가 잘못했건 일단 심판에게 소리부터 지르고 보거나 경기에 진 이유를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뒤집어 씌우는 감독도 종종 만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규정을 몰라 그러겠거니 여기다가 심판경력이 쌓이면서 한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바로 계약기간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계약만료 시점이 임박한 감독일수록 경기성적이 재계약 여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판정에 항의하는 일이 잦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자기편의에 의해 함부로 판정을 평가하는 관행도 결국 심판판정에 권위가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 축구는 관중을 위한 쇼

    “돌아가신 대우 신윤기 감독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경기 끝나고 나면 서로 인사도 없이, 마치 원수진 것처럼 돌아서버리는 축구계가 너무 무섭다고, 꼭 전쟁 같다구요. 그 말씀에 정말 공감했습니다. 경기성적이야 어떻든 어차피 정정당당하게 한판 승부를 겨룬 것인데, 이긴 팀이든 진 팀이든 마치 다시 안 볼 사람들처럼 경기장을 떠나버려요. 휑하니 빈 양쪽 벤치를 볼 때마다 기분이 참 이상합니다. 모두들 축구가 좋아 모인 사람들인데 꼭 그렇게 살벌하게 굴어야 할까 싶어요.”

    물론 경기성적에 생계가 달려 있기는 해도 프로축구가 관중을 위해 존재하는 만큼 축구인들은 한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기량과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경기를 펼치려는 노력이 경기성적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라운드에 설 때마다 그녀는 경기를 최대한 재미있게 진행하려고 노력한다. 규정은 엄격하게 적용하되 경기 흐름은 끊지 않는 것이다. 그냥 넘겨도 좋을 만한 파울은 양쪽팀에 다 허용함으로써 선수들이 약간의 신경전을 펼치도록 하면 한결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심판의 존재를 자주 드러내지 않는 경기운영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99년 K리그 시즌에는 심판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경기장면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수원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수원 대 LG 경기. 수원팀 선수가 파울을 범했을 때 그대로 경기를 진행시켜 결국 최용수가 첫 골을 뽑게 했던 것이다. 이른바 어드밴티지를 살린 것인데 파울이 났을 때 뒤에서 뛰어들어오는 최용수를 보고 다음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심판을 보면서 바로 그런 때 보람을 느낍니다. 선수들의 잘못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경기를 정정당당하고 박진감 넘치게 운영해 관중을 즐겁게 만드는 거죠. 그 일로 선배심판들과 부심들에게 엄청나게 칭찬 들었습니다. 웬만큼 노련한 심판도 경기를 끊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판단이 절묘했다면서.”

    휘슬 부는 연습을 따로 하고 멋진 사인 폼을 익힌 것도 모두 관중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라운드에서 되도록 가볍게 뛰기 위해 은광여고 육상부를 찾아 달리는 자세를 교정받았다. 또 휘슬 소리를 좋게 하기 위해 휘슬 잘 불기로 유명한 선배심판을 괴롭혀가며 노하우를 전수받았고 거울 앞에서 심판 사인을 끊임없이 연습한 후 가장 좋은 폼을 골라내기도 했다.

    요즘 그녀가 몰두하고 있는 것은 집중력 기르기와 단점 교정. 선수들의 순간적인 행동을 보고 재빨리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시야를 넓게 가지면서도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함이다. 거리를 걸으며 ‘방금 나를 지나쳐간 사람이 모두 몇 명이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더라’ 하는 식의 훈련이 아예 습관처럼 돼버렸다. 그리고 그라운드에서 선수들 사이로 너무 깊게 파고들다가 선수들과 부딪치거나 공에 맞거나 하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녹화해 둔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개선책을 찾는 중이다.

    올림픽까지만 뛰면 미련없다

    여성심판으로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자축구경기에서 심판을 볼 기회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1년에 남자 경기를 300번 정도 보면 여자 경기는 1∼2건에 그칠 만큼 침체돼 있는 실정. 그래서 어쩌다 여자경기를 맡으면 오히려 어색하다.

    “우리나라 여자축구가 침체된 것은 역사도 짧고 팀도 너무 적은데다 축구협회의 지원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아시아권 16개팀 중에 5위 안에 든 것을 보면 역사에 비해 성과는 크다고 봐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자축구팀이 너무 없다는 거예요. 7∼8년 동안 호흡을 맞춘 대표팀만 강한데 대표팀 선수들이 모두 인천제철팀이니 실력을 겨룰 만한 상대팀이 국내에는 없어요. 당장 시급한 문제가 선수들을 많이 길러내는 겁니다.”

    문화부는 99년 8월 여자축구 실업팀을 대거 창단하고 대폭적인 재정지원도 하겠다는 여자축구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좀 늦긴 했어도 반가운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여자구기 종목이 강하잖아요. 선수층만 두터워지고 지원만 확실히 된다면 틀림없이 인기 스포츠가 될 겁니다. 실제로 중국이나 일본, 북한 같은 곳은 여자팀도 남자팀 못지않게 실력도 좋고 관중들에게 인기도 높습니다. 선수를 기르는 일과 함께 여자 감독, 코치, 트레이너 등 여자 지도자들을 기르려는 노력도 물론 해야지요.”

    국제여성심판으로서 세계 랭킹 1위이자 아시아 랭킹 1위. 여성심판의 역사가 오래된 아시아권에서조차 결승전에 여성심판을 투입하지 않는 관행을 깨고 97년 아시안게임컵 대회 결승전 심판으로 투입돼 ‘타이거’라는 심판계 최고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최초’에서 ‘최고’로 타이틀이 발전을 거듭했으니 그녀에게 더 이상의 난관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아닙니다. 이대로 머물 순 없습니다. 제가 심판을 하면 몇 살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프로축구, 아시안게임, 월드컵 다 뛰어봤으니 이제 올림픽만 남았어요. 올림픽 결승전에서 뛰어보는 것이 심판으로서 제 마지막 소망이거든요. 그러고 나면 크게 미련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심판직에 대한 미련이 없어질 그날을 대비하기 위해 그녀는 슬슬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 스포츠마케팅을 공부한 후 장차 체육 행정인력이 되는 것. 우선 국내 대학원에서 스포츠마케팅을 공부하다가 유학을 떠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러나 심판직을 그만두는 날까지 그녀는 ‘칼심판’의 ‘악역’을 고수할 작정이다. 명예로워서가 아니라 관행에 물든 우리 축구계가 자신 때문에 조금이라도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