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나만의 소리 찾아가는 ‘바꿈질’의 즐거움

  • 김갑수 시인·음악칼럼니스트

    입력2007-01-26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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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디오는 생명체다. 자신만의 성격과 표정과 목소리를 가졌다. 그 각각의 만남에 따라 천변만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음악에서 빠져나와 오디오 자체에 푹 잠기는 것은 그런 능동성 때문이다. 》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다 3층 높이에서 떨어져 척추뼈가 으깨진 가까운 후배에게 막 병문안을 다녀왔다. 시를 쓴다고 헤맨 끝에 문예창작과에 진학하더니 1년도 못 가 중퇴하고 다시 통계학과에 진학해 근근이 졸업하더니, 세월은 흘러 지금은 엉뚱하게 부동산 컨설턴트로 살아가는 괴짜다.

    시인에서 부동산 중개인이라. 아무래도 어울리는 행로는 아니다. 그 와중에 언제 하늘은 날아다녔을까. 혹시 그의 패러글라이딩은 일종의 몸부림 같은 게 아닐까. 날자, 날자, 날아보자꾸나! 하면서 시심(詩心)의 나래를 펼쳐 하늘로 치솟다가 그만 꽈당 하고 부동산에 처박혀 허리를 부러뜨린 게 현실이렷다. 아파 죽겠다고 오금을 못 펴는 환자 앞에서 왜 그리도 키득키득 웃음만 나오던지. 예의상 “빨리 나아라” 한 마디 던지니 냉큼 돌아오는 답변인즉, “기럼요, 얼릉 나아서 또 날아야쥬….”

    ‘오디오론’을 펼치고자 기(氣)를 모으는 초입에 자꾸만 머리에서 후배의 부동산과 패러글라이딩이 떠나질 않는 게 아무래도 어떤 동병상련의 증세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 다들 뭔가 샛길로 빠져 킁킁대고 허우적거려야 견딜 수 있는 인생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칭찬받는 길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삽짝 지나 저 건너 샛길에 단봇짐 싼 순이가 손짓을 해댄다. 손짓하는 순이들이 많기도 하여라. 여행에 등산에 낚시에 영화에 춤에 노름에 하다못해 고주망태 주막강아지 노릇까지…. 하여간 교회나 절에 다니는 ‘취미생활’까지를 포함해서 호모 사피엔스의 지위를 지탱하기가 힘겨운 호모 히스테리쿠스들에게는 무언가 다른 ‘별짓’이 필요하다.

    별짓, 집착, 마니아 파라디소



    별짓할 때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중독형 인생들. 그런 종족을 일본에서는 ‘오타쿠’라고 한다지. 우리는 ‘마니아’라는 표현을 쓰고. 요즘 들어 부쩍 마니아층에 대해 우호적인 관심이 늘어나는 걸로 보아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대중소멸론의 사회학이 현실로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산업사회에서 출현한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인간군상인 대중.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조작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 대중집단이 앞으로 점차 소멸해가고 특정한 전문성을 가진 소집단으로 분화된 방사형의 사회구성체를 이룰 거라는 게 그 전망인데, 요즘 도나 개나 한두 개쯤은 가입하는 각종 동호회 같은 게 그 전조일 것이다.

    하긴 어느 분야에나 온갖 정보와 식견이 흘러 넘치는 판이니 제 아무리 둔중한 태백산맥형 인품잡이여도 문화충동을 아니 느낄 도리가 있겠는가.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어서라도 샛길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는 판국에 시대의 흐름까지 ‘삶의 질’ 추구라는 훈장을 달고 무슨 별짓이라도 하라며 등을 떠밀고 있으니 바야흐로 마니아 파라디소, 천국이 저들 마니아의 것이로다….

    은밀과 비밀의 공유지점에 오디오가 있다.

    이쯤해서 오디오로 건너가 보자. 먼저 비교 한 가지. 가령 텔레비전은 쉽다. 왜 쉬운가. 물론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담긴 내용물이 쉬워서이기도 하겠지만, 텔레비전은 보고 듣고 읽고 등등 동원할 수 있는 감각이 풍부하다는 것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진짜 이유다. 다시 말해 오관의 기능을 많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일수록 이해가 빠르고 그만큼 쉬워진다는 이치다.

    오디오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가운데 오로지 청각 한 가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매체다. 그만큼 어렵다. 눈만 사용해야 하는 미술품처럼, 코로 결판내야 하는 향수처럼 활용할 수 있는 감각의 수가 적고 그에 대한 판단과 반응이 주관적일수록 집착과 노력은 배가되고 고급화하는 경향이 있다.

    역시 주관적인 단정이지만 아무래도 인간의 감각 가운데 청각이 가장 모호하고 불명료한 기관인 것 같다. 여러 종의 오디오 기기 성능을 비교 판정할 때 소위 ‘블라인드 테스트’라고 해서 커튼으로 가려놓고 음악을 들어보는 경우가 많은데, 당대의 평론가라는 고수들도 자칫 헤매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은 걸로 보아 인간의 귀라는 게 그리 신통한 물건이 못 된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막연하고 골 아픈 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먼저 전제할 것이 있다. 오디오에 몰두한다는 것은 음악을 애호하는 것과 부분적으로 겹치지만, 결국은 좀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언어학에서 쓰는 말인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 좋을 듯한데, 음악이 소리의 내용물, 즉 시니피에에 가깝듯이 오디오는 말의 물질적 부분인 시니피앙과 같아서 소리의 성분에 신경을 집중하는 장르다.

    그러니까 인생을 빗대기도 해가며 건축물 같은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음악의 원대함보다는 훨씬 범위가 제한되고 ‘좀스러운’ 장르인 게 사실이다. 데면데면 듣자면 거기서 거기인 소리의 극미한 차이와 변화, 현미경적인 척도를 들이대야 파악되는 그 미소한 감흥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바로 ‘오디오질’이라는 것이다.

    헌데 그 소리라는 놈이 요물이다.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따오기가 바로 사운드라는 마물인 것. 저역이네 중역이네 고역이네 터럭 같은 소리 한 낱을 화두로 삼아 좀스러운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다 멀쩡한 사람 미쳐돌기도 하고 우주의 기미(?)를 훔치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든 따오기와의 기쁨과 절망은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무쇠로 만든 스피커 스탠드의 빈 구멍 속에 모래를 한 짐 볶아 넣었더니 축 처졌던 저역이 탱글탱글 맺힌다거나, 3극관으로 파워앰프를 교체하니 사랑스러운 레베카 피존의 목소리가 분무기로 뿜어져 나오듯 아련한 스테이지감을 형성할 때의 묘미는 이웃사랑, 나라사랑 하듯이 널리 나눠 가질 수 있는 흔한 기쁨이 아니다.

    반면 마냥 주관적일 것만 같은 소리에 대한 판단에 어떤 공통항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것도 바로 그 은밀과 비밀의 체험에 공유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척 많은 노력과 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오랜 시간을 들이고 많은 노력을 해서 겨우겨우 깨달아 가는 감동, 그것의 깊이와 한없는 심연을 어찌 인스턴트 놀잇감들이 제공해 줄 수 있으랴.

    거듭 말하지만 오디오에 몰두하는 것은 베개만한 두께의 고전명작 소설을 섭렵했을 때의 그 땀 밴 희열처럼 아무 대가 없는 노력과 고생의 소산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는 차원 높은(!) 기쁨인 것이다.

    의자 위의 생

    본격적으로 음반 모으고 오디오 바꿈질해온 게 근 20년 가까이 된다. 그 결과 약 7000장의 레코드와 3조의 오디오 시스템을 갖게 됐다. 스피커는 대략 서른 번쯤 바꾸었고 앰프도 프리, 파워의 교체횟수를 합치면 그 정도는 되는 것 같다.

    20년의 날짜 수를 헤아린다면 레코드는 하루에 한 장 꼴로 산 셈이다. 확률적으로 한 100장을 뒤진 끝에 한 장의 레코드를 구입한다면 그동안 70만장의 레코드를 살펴보았을 것이고, 파트별로 오디오 시스템을 바꾼 횟수를 100회 정도로만 잡는다 해도 평균 두어 달에 한 번 꼴로는 무언가를 바꾸거나 구입한 셈이 된다.

    ‘석수의 삶은 돌을 깨트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고 시인 이성복은 썼는데, 그렇다면 나의 삶은 대학로 바로크 레코드점 한구석에 서 있거나 세운상가, 용산전자상가의 오디오숍을 서성이며 고스란히 지나갔다.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의 삶은 레코드점과 오디오숍을 거쳐 집에 돌아와 앉은 의자 위에서 지나갔다. 의자 위의 생. 의자에 앉아, 의자에 들러붙어, 의자에 헝겊처럼 포개져, 마침내 의자가 되어 나의 생은 음악소리를 따라 흘러갔다.

    존재의 심연을 가득 품은 시인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의자가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나마 시인의 모자를 쓰게 만든 단 한 권의 시집도 어쩌다 음악을 멀리한 1년간이 있었던 덕택에 가능했다. 그 옛날 파종기의 풋풋한 열망을 함께 나누었던 글친구들이 점차 화려한 명망으로, 심지어 살아 있는 신화로 제 이름의 그늘을 드넓게 드리우는 과정을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아야 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성복의 한 구절,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대체 무엇이 나의 인생을 의자로만 내몰았을까. 결코 원만해질 수 없는, 삐죽삐죽 날이 선 성격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사람을 갈망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

    굳이 자신을 위로해 보자면 ‘좋은 게 좋은’ 세상의 풍토와 화해하기 힘들었다. 매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어두운 습성, 멍에처럼 주어진 천성적인 이기심과 무신경함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기에는 에고가 너무 강했다. 그러니 의자 위에서 혼자다. 브람스의 겨울 하르츠 여행에 의한 알토 랩소디 혹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내 사랑하는 고립과 유폐의 선율이 의자 위를 떠돌며 습기 찬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의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그렇더라도 다시 되물어야 한다. 정녕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시 기질적인 면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오디오 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귀가 얇다고 한다. 늘 어딘가가 근질거리고 궁금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충동에 이끌리는 변덕스러운 성정, 그리고 산만 신경계. 이런 걸 아마 예술가적 성향이라고 부른다지.

    게다가 지금 이곳이라는 낮은 땅의 시간이 항상 불만의 계절로 느껴지는 사람에겐 초월과 몽상의 갈망을 채워줄 어떤 무한, 무변(無邊)의 광막한 영토가 필요하다. 삶이 근질거리는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무변의 영토. 음악과 오디오, 거기 모든 게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가 소리의 끝을 보았는가.

    오디오는 생명체

    대체 그 동안 어떤 기기들이 의자 곁을 지나쳐 갔던가. 그걸 일일이 기억해 내기는 참 번거로운 일이다. 충동에 사로잡혔다가 일주일을 못 넘긴 불운한 녀석도 있었고, 백년해로를 맹세했다가 갑작스러운 변심으로 떠나보내고는 땅을 치며 후회했던 아련한 옛사랑 같은 기기도 몇몇 있다.

    일본 신도 래브러토리에서 만든 콜톤 EL34 파워앰프와 바이타복스 CN191 스피커가 결합해 만들어 내던 망망대해와도 같은 음의 해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프리앰프는 오디오 리서치의 SP11이었는데 언제고 다시 한 번은 꼭 이 조합을 리바이벌해 보고 싶다.

    하도 여러 번 언급해 또 말하기가 좀 머쓱하지만, 기기에 대해 애착을 넘어 진심 어린 사랑마저 느끼게 해준 연인 같은 존재로 미국 청년 폴 헤일즈가 만든 스피커 헤일즈 시스템 시그너처Ⅱ가 있다. 통상 헤일즈 시그너처라고 부르는 이 가상동축형 스피커를 내 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저릿저릿 오줌이 마렵게 만드는 음색에 머리칼이 곤두서는 정위감을 가졌다.

    하지만 보잭의 무어리시 4000을 주고 맞이해 장장 2년간이나 동거했던 헤일즈도 결국은 윌슨의 와트파피 스피커에 혹해 떠나보내고 만다. 인간사가 그런가 보다. 변덕과 충동 앞에서 영원의 맹세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쯤하자. 오디오 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각종 기기의 모델 이름이나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무슨 암호처럼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적에게 아내와 회사까지 빼앗긴 마크 레빈슨의 70년대 초반 작업이 얼마나 위대한 선견지명이었는지, 스레숄드의 넬슨 패스가 개발한 스테시스 회로가 가졌던 가능성과 그의 최근 작업인 알레프 시리즈가 보인 발상의 전환, 뒤늦게 뚝심을 보이는 크렐의 다고스티노, 오디오리서치의 윌리엄 존슨, 제프 로렌드, 왠지 범접하기 힘든 골드문트 혹은 킴버, 카다스, 트랜스패어런트 같은 케이블들의 용쟁호투….

    오디오는 단지 소리를 내주는 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성격과 표정과 목소리를 갖고 사는 생명체에 가깝다. 특히 매칭의 묘미가 오디오 자체라고 하듯 각각의 파트들이 어떠한 조합으로 만났는지에 따라 천변만화의 파노라마를 펼쳐 주므로 ‘오디오 하기’라는 게 마치 인생살이의 축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디오를 하다 보면 떠오르는 상념들이 있다. 가령 오디오와 음악감상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물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로 오디오를 시작한다. 그러다 음악에서 이탈해 오디오 자체에 푹 잠겨 버리는 경우는 그 능동성에 매료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을 들을 때 제 아무리 머리꼭지 위로 우주를 공 굴리듯이 한다 해도 감상자가 그 음악에 직접 개입할 일이란 거의 없다. 단지 수동적으로 들으며 나름대로 해석하고 상상을 보태고 할 뿐이다. 반면에 오디오는 연주자가 악기를 튜닝하듯이 스스로 사운드의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작은 예를 들어보자. LP를 듣기 위해 고심 끝에 티타늄 재질의 톤암을 구하고 저임피던스의 MC형 카트리지(바늘)도 구하고 호사스러운 영국제 승압 트랜스도 구비하고 마침내 플로팅형의 육중한 벨트 드라이브 턴테이블도 구비하게 됐다. 이제 계측기를 동원해 부품간의 오버행과 앤티스케이팅과 무게추를 맞추고 조절하여 음악만 들으면 되는가.

    아니다. 이제부터 또 시작되는 일이 있다. 플레이어의 세팅 방법이 대두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진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인슐레이션(받침)이 관건이다. 턴테이블을 받쳐주는 인슐레이터를 세라믹콘이나 블랙 다이아몬드 같은 초강성 재질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사람들이 유별나게 좋아하는 소보탄 같은 물렁물렁한 재질로 진동을 흡수시킬 것인가. 단단한 콘으로 받칠 때 뾰족한 접촉면을 턴테이블 쪽으로 향하게 할 것인가, 바닥 쪽으로 할 것인가. 콘을 받칠 때 다소 불안정하지만 방진효과가 탁월한 3점 지지로 할 것인가, 안정되게 4점 지지로 타협할 것인가.

    이렇듯 오디오장 위에 턴테이블을 올려놓는 방법만으로도 여러 가지 다른 음향효과를 자아내는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니 전체 시스템에서 ‘구사의 묘’를 발휘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얼마나 다양하고 많겠는가. 빨리 음악부터 듣고자 하는 씩씩한 사람들은 웬만한 과정은 건너뛰지만, 뭐 좀더 좋은 일이 없나 해서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는 호사가형 인물이라면 날밤을 새워가며 소리의 터럭 한 오라기를 제거해내고 닦고 죄고 기름칠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디오는 자기가 만든 음악을 듣는 일이다.

    이른바 ‘원음 추구’라는 것도 이 동네에서 오래된 토론거리다. 잘 튜닝된 연주회장에서 뛰어난 연주자들이 훌륭한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직접 듣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음악감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일생에 몇 번이나 있겠는가. 극성스럽게 저녁마다 공연장을 전전하는 존경스러운 음악 애호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방에 틀어박혀 연주회장을 그리며 앰프에 불이나 지피기 마련이다.

    그러면 오디오파일(오디오 애호가)들은 밥 대신 라면을 먹는 심정으로, 공연장 사운드의 마이너 대체물로 오디오를 접한다는 것인가. 디지털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이제 그런 발상은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젠 생음악과 오디오를 통한 재생음악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연주회장에서는 노이즈도 디스토션도 없는 무결점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를 극복할 수는 없다. 반면에 오디오를 통해서는 최고의 음악가를 최고의 레코딩을 통해 팬티 한 장만 입고 앉아(이건 나만의 취미생활이다)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음반에는 레코딩 엔지니어를 존중하여 크레딧에 ‘레코디스트 누구’라고 기록을 남기는 일이 많아졌다.

    아울러 재생음악이 독자성을 갖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는 CD 같은 디지털 음원에서 가능한 극단의 재현능력을 들 수 있다. 어쩌다 처음 고급 첨단 오디오(‘하이엔드’라고 부른다)를 접하게 된 사람이라면 대체 어디서 이런 소리가 다 튀어나오나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피아노를 두드리는 연주자의 손톱이 살짝 건반에 긁히는 소리, 바이올린 연주에서 활을 움직일 때 나는 미세한 바람소리, 조심스레 숨을 멈추거나 내쉬는 소리, 없는 듯하면서도 수런수런 느껴지는 공기의 느낌과 울림…. 재즈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담배연기 소리’를 가장 즐긴다나.

    하여튼 약간은 편집증적이다 싶게 별별 소리가 다 튀어나오는데,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으되 하여간 재미를 더해 주는 건 사실이다. 아울러 공연 현장에서는 시각적인 자극이 커서 신경이 다소 분산되는 반면에 오르가즘을 느끼기에는 오디오 같은 집중성 높은 도구가 더 이로운 면이 있다고 (나 혼자) 생각한다.

    이제 내가 갖고 있는 시스템을 소개할 차례 같다.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얼마나 어렵게 일을 저질러 왔는지 늘 돈 궁상을 떨어댔지만, 이젠 그런 말로 면피할 단계도 지난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보증금 300만원짜리 월세 자취방에 살 때 4000만원이 넘는 오디오를 사용했고, 화장지 살 돈이 없어서 한 보름쯤 아침마다 샤워로 뒷일을 도모했던 바로 그때에도 음반은 덥석덥석 사들여 오는 식으로 살아왔다.

    300만원짜리 월셋방의 4000만원짜리 오디오

    고급 기종이 늘어선 내 방을 들여다보고 “야, 너 참 부자다” 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치밀곤 했다. 좋은 옷에 기름진 식사에 자동차에 아파트 부금까지 부으며 사는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은 없지 않은가. 적어도 당신은 내의와 양말 따위를 매형이 버리려던 걸 얻어다 해결하지는 않았잖은가. 아파트 입구의 헌 옷가지 버리는 통을 당신은 뒤져보기나 했는가.

    헌데 궁상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상황에는 꽤 변화가 생겼다. 특히 근래에는 방송 일을 많이 하니까 재미있는 오해도 따른다. 얼마 전 용산전자상가의 잘 아는 가게를 아주 오랜만에 갔더니 거기 영업부장께서 몹시 반색을 하며 첼로사의 유명한 앰프인 퍼포먼스Ⅱ를 구입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참으며 얼마에 줄 수 있느냐고 점잖게 물었더니 그이 왈 “우리 김선생님이시니까 특별히 5600만원까지 해드리죠”라고. “거 좀 생각해 보죠 뭐.” 우하하하하!

    하여간 오디오란 참 값비싼 물건이다. 그 바람에 속칭 ‘노오픈’ 또는 ‘곤뽕’이라고 부르는 새 물건을 사본 적은 별로 없는 대신, 가격 산정이 다소 모호한 중고 물건을 두고 가게주인과 서로간에 포커페이스를 하고서 거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이며 심리학적인 흥정의 사투를 벌이는 데는 꽤 이골이 나 있다.

    그들 중에는 앞통수 뒤통수 다 쳐서 사람 허탈하게 만드는 선수들도 있지만, 과거에 회사생활 할 때 상장 전의 우리사주 주식을 장차 오를 가격을 전제로 몽땅 받아준, 신의 어린 양 같은 천사표도 있었다(신이여, 건강이 나빠진 그를 돌보소서).

    현재 나는 나름대로 레퍼런스 시스템(소리의 기준을 만들기 위한 구성), 빈티지 시스템(고전 명기를 사용한, 취미적 경향이 강한 구성), 아리송한 시스템 이렇게 3조의 오디오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집에서 듣고 있는 레퍼런스 시스템은 미국의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즐겨 사용하는 유명한 윌슨의 와트파피 스피커를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독특한 자기만의 색채를 최대한 억제한 중립적인 모니터 경향의 사운드인데, 모델은 요즘 인기있는 5.1이 아니라 89년에 나온 구형 3 모델이다.

    여기에다 근래 들어 갑자기 우리나라에 늦바람 인기가 불고 있는 스펙트럴 DMC 20 프리앰프(정말 끔찍하게 탁월한 명기다)와 마크 그래지어가 이룩한 고전명작 마크 레빈슨 NO. 20.5 파워앰프를 조합해 놓았다. CD시스템은 역시 마크 레빈슨의 NO 31L 트랜스포트에 NO 35L D/A 컨버터를 부착시키고 있다. 아날로그 시스템으로는 진공 흡착식인 소타의 스타 사파이어 턴테이블에 SME Ⅴ 톤암, 오르토폰의 MC 5000 카트리지를 결합시킨 구성이다. 스피커 케이블은 MIT사의 속칭 ‘도시락통’이라고 부르는 MH-750E EXTENDED를 쓰고 있고 기기간의 인터커넥터는 킴버와 몬스터사 제품을 이것저것 사용하고 있다.

    레퍼런스, 빈티지, ‘아리송’ 시스템

    아마 도사들이 품평을 한다면 “음, 하나하나 명기이기는 한데 좀 개성이 없군” 할 것 같은 표준적인 구성이다. 사실 소싯적부터 이렇게 명성 높은 기기를 사용해 보는 게 꿈이었다. 정작 소유해 보니 환상이 깨지더냐고? 천만에. 이 시스템의 장점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면 꼭 자식 자랑하는 주책과 같을 것 같아서 참아야겠다.

    하지만 만능이란 이 세상에 없는 법. 가끔은 별미가 필요하다. 오디오 평론가이자 친구인 사진작가 윤광준이 고심해서 세팅한 알텍 9708A 스피커를 한동안 빌려다 듣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인수’하여 내 개인 작업실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다. 프리앰프는 집에서와 같이 스펙트럴 제품으로 한 등급 아래인 DMC 10이고, 파워앰프는 알텍과 찰떡궁합이라고 하는 300B 사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이 파워앰프는 원래 다무라 트랜스를 사용한 일본 선오디오의 2A3 싱글앰프였는데, 거의 껍데기와 트랜스만 남기고 완전히 개조하여 호블랜드니 스프라그니 하는 지상 최고의 부품들을 구해다 갖은 호사를 다 부린 물건이다. 웨스턴 일렉트릭 같은 300B 진공관의 최고봉들은 능력상 사용하지 못하고 중급 정도에 해당되는 세트론제에 만족하고 있다.

    여기에 턴테이블은 토렌스제 TD 350MKⅡ, 톤암은 일제 하이포닉을 사용하고 있으며 독일제 펜타곤 CDP를 트랜스포트용으로, 모나키 22B를 D/A 컨버터로 사용하고 있다. 이 구성은 근본적으로 50∼60년대쯤의 미국 시골 극장에서 나오는 소리를 재현하고자 하는 빈티지 시스템이다. 구식 혼 특유의 소리 왜곡과 찌그러짐이 심하지만, 이른바 아메리칸 사운드 특유의 호쾌함과 진솔함이 버릴 수 없는 매력이다. 특히 재즈연주에는 이만한 시스템도 드물지 않나 할 정도다.

    소리편력은 일탈과 해방의 몸부림

    역시 작업실에서 사용하는 또 한 조의 ‘아리송 시스템’은 전통의 어쿠스틱 리서치사가 90년대 접어들어 재기해 보고자 유명한 엔지니어 세큐에라를 영입하여 온갖 물량을 투자해 만들었던 스피커 리미티드 버전 3 모델을 살리기 위해 구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케팅에 완전 실패한 모델로, 덕분에 성능과 원가에 비해 꽤 싸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크렐의 KSA 150 파워앰프를 물렸다가 최근에는 넬슨 패스가 만든 알레프 5를 들여다 울리고 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그 스피커는 B.A.T사의 탱크처럼 무지막지하게 생긴 뿔 달린 진공관 앰프(6C33C관) VK 60 모델과 인연을 맺을 예정이다. 이 시스템을 자꾸만 아리송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나 자신도 어떤 사운드를 추구하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오디오를 좀 잊고 음악에만 파묻히고 싶은 심정일 때 자주 사용하는 나의 또 다른 반려이다.

    ‘책이나 영화 같은 건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대하게 되지 않는데, 음악은 들을수록 새롭다’는 오디오 쪽 어느 대가의 말씀이 있다. 그것 참 맞는 말이다. 음악은 쉽사리 파악되거나 또렷이 기억되지 않은 채 아련한 연상만을 남겨 놓아 다시 들을 때마다 새롭고 신선한 감흥을 안겨준다. 언어와 사고로는 번역되지 않는 도저한 추상의 세계다.

    오디오는 여기에 적극적인 뉘앙스를 부여해 준다. 낮과 밤에 따라, 날씨에 따라, 리스너의 건강상태에 따라 소리는 변한다. 기기의 위치나 배열 같은 세팅방법에 따라 소리는 좀더 적극적으로 달라진다. 더 나아가 기기 바꿈질, 이른바 업그레이드를 실행할 때는 음악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됨을 느끼게 된다. 변화가 큰 업그레이드일 때는 평소 즐기던 음반이 처음 듣는 듯 새로워서 하나하나 되풀이 감상을 시작하는 일도 흔히 경험한다. 자,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

    그래서 시간이 흘러간다. 오디오는 시간을 소비재로 삼는 어른들의 장난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오디오는 없다. 허망한 것인가. 이 세상엔 할 일도 많은데 시간이나 축내며 쭈그려 앉아 있는 게 한심무쌍한 일 아닌가. 그렇다고 다 인정하기로 하자. 세상 쪽을 향해서 보자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셈인 무위의 시간 도둑질에 무슨 변명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건대 이 세상을 떠도는 슬픔의 원천에는 무슨 일을 하지 않아서보다는 너무나 열심히 무슨 일을 해서 생겨나는 것이 훨씬 많다. 무슨 일에서건 의미와 가치를 찾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세상의 톱니바퀴 속에서 이 허랑방탕의 몸부림은 나름대로의 일탈이며 해방이기도 하다.

    그래도 굳이 의미가, 가치가 필요하다면 감히 이렇게 자위의 건방을 떨어도 본다. 산중의 스님이 저 홀로 중생제도의 목탁을 두드린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그 목탁소리 속에 충만한 한 세상이 있다. 방 안 귀신으로 의자 위에 들러붙어 소리에 담긴 시간을 흩날린다. 저 혼자 충만하고 저 혼자 난해한 삶의 시간들. 아득하면 되리라, 뭐 그만하면 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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