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파이프담배 문 정형근이 고문을 지시했다”

  • 김당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7-01-26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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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형근이 2~3일에 한번씩 들러 뒷짐진 채로 파이프 담배를 물고 나타나 ‘심진구! 이제 간첩이라고 불 때가 되었는데’라며 그뒤에 있을 고문을 ‘예고’하곤 했다. 그가 들렀다 간 다음에는 더 강도 높은 고문이 어김없이 가해졌다.”》
    한나라당 기획위원장 정형근 의원(부산 북·강서갑)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정의원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적은 많으나 이번은 사정이 좀 다르다. 언론뿐만 아니라 검찰도 그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원 관련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의 한 관계자는 “정의원의 명예훼손 혐의가 인정되는 만큼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고 전제하고 “고문 의혹 등 정의원을 둘러싼 과거 행적에 대해서도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낱낱이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12월14일 현재 정의원에게 5차 소환장을 보내 놓은 상태다. 그래서인지 정치권에서도 “이번만큼은 정의원이 검찰의 포위망을 빠져 나가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신동아’는 이미 99년 1월호에 ‘정형근을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정의원의 과거 행적을 추적취재한 기사를 실은 바 있다. ‘신동아’는 이 기사에서 ▲홍사덕 후보 비방 유인물 살포사건(92년 3월)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89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87년 1월) 등에서 정의원이 당시 안기부 수사단장·국장으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보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해서는 당시 정의원이 안기부 수사단장으로서 이 사건의 축소·은폐를 꾀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서의원 밀입북사건과 관련해서는 “정형근은 ‘DJ와 북한을 엮기’ 위해 직접 나를 고문했다”는 서씨의 증언을 통해 고문 의혹을 폭로했다.

    특히 “92년 총선 흑백 선전물 사건 총감독은 정형근 대공수사국장이었다”라는 전직 안기부 간부 K씨의 직격 폭로는 홍사덕 의원 비방 유인물사건에 관해 처음 밝혀진 충격적인 증언이었다.

    그러나 정형근 의원은 세 사건에 대해 각각 ▲“흑색 유인물사건은 터지고 나서야 알았다” ▲“국회의원을 어떻게 고문했겠나” ▲“박종철군 아버님도 오해 푸셨다”라는 말로 의혹의 핵심을 피하거나 이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또 최근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1만달러 수수 및 고문 여부가 자신의 부산 집회 발언을 계기로 다시 문제가 되었으나, 정의원은 여전히 “나는 정치공작한 적도 고문한 적도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정의원은 나아가 “현 정권이 ‘고정간첩’(서경원 전 의원)을 앞세워 ‘정형근 죽이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역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결과와 국정원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정의원의 주장은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신동아’는 이와 같은 취재결과를 토대로 지난 11∼12월 두번에 걸쳐 인터뷰 및 서면 답변을 요청했으나 정의원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정의원은 보좌진을 통해 “인터뷰 및 서면 답변을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 국정원 ‘정형근 파일’에 담긴 4대 비리유형 ]

    정치공작·용공조작·축소은폐·직권남용

    한 나라당 기획위원장 정형근 의원(부산 북·강서갑)은 매우 독특한 이력과 멘탈리티의 소유자다. 그는 194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수재였던 그는 경남중·경남고(64년)·서울대 법대(68년)를 졸업하고 70년 사법시험(12회)에 합격해 사법연수원·군법무관 생활을 거쳐 75년 부산에서 처음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검사나 법조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검사(8년)나 변호사(5개월) 생활이 짧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안기부 경력이 강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의원은 83년 서울지검 검사를 끝으로 그해 안기부 대공수사국 법률담당관으로 파견나가 대공수사국 수사2단장(85년), 대공수사국장(88), 기획판단국장(93년), 1차장(94년) 등을 거쳐 95년 안기부의 ‘지방자치단체 선거 연기 검토 문건’이 폭로되어 옷을 벗기까지 13년 동안 안기부에서 근무했다. 정의원처럼 검사로 안기부에 파견나가 그토록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정의원의 안기부 경력은 공안검사들의 ‘경력 관리’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잘 나가던 정씨의 안기부 경력은 95년 지자체 선거 연기 검토 문건 폭로를 계기로 끝났다. 안기부의 2인자인 국내담당 차장까지 오른 그가 야당의 문건 폭로로 일격을 맞았으니 그로서는 야당의 ‘정치 공세’에 의해 안기부장을 눈앞에 두고 물러났다는 ‘피해의식’을 가졌을 법하다. 국민회의에서는 정형근 의원의 ‘사설 정보팀 운영’ 건도 이런 피해의식의 발로로 보고 있다.

    정권 바뀌면 국정원장 영순위?

    국민회의 한 관계자는 “정형근 의원의 사설 정보팀 활동은 한나라당의 단순한 일상적 정보수집 활동이 아니다. ‘3년만 있으면 정권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 누가 신임 국정원장이 되는지 영순위가 정해져 있다’는 공공연한 말로 퇴직한 국정원 직원들을 끌어모으는 등 정권탈취를 위한 공작기구의 성격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공작에 유능한 사람이라도 흔적은 남기기 마련이다. 특히 한 곳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면 그 ‘현장’에는 ‘업적’ 못지 않게 ‘과오’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정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듯, 그가 몸 담았던 안기부와 그 조직의 생리를 가장 잘 아는 ‘안기부통’이지만, 역으로 그의 ‘어두운 과거 행적’을 가장 훤히 꿰뚫고 있는 ‘정형근통’은 그가 몸 담았던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이다. 안기부 시절 그의 흔적들이 국정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말이다.

    ▲구미유학생 간첩사건(85년) ▲반제동맹 및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86년) ▲문익환·임수경·문규현 방북사건(89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89년) ▲화가 홍성담 사건(89년)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91년) ▲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92년) ▲김낙중― 손병선 간첩사건(92년) ▲남한조선노동당 및 거물간첩 이선실 사건(92년) ▲구국전위 사건(94년) 등이 국정원에 남아 있는 정형근씨의 ‘업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씨가 수사를 지휘한 이 굵직굵직한 공안사건에서 문익환·임수경·문규현 방북사건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고문·가혹행위나 용공조작 시비가 일었다는 점이다. 정의원 본인은 ‘간첩 잡은 훈장’을 왜 이제 와서 문제삼냐고 항변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당시 언론이 공(功)만 보도했을 뿐 과(過)를 문제삼지 않았을 뿐이다.

    ‘신동아’가 입수한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에 따르면, 정형근씨의 안기부 재직중 비리나 물의를 빚은 사건의 유형은 크게 ▲정치공작 ▲용공조작 ▲축소은폐 ▲직권남용의 네 가지다.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은 이 네 유형의 대표적 사례로 각각 ▲홍사덕 후보 비방 흑색유인물 살포 사건(92년 3월) ▲서경원 의원 ‘간첩’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87.1) ▲직원을 동원한 사적 업무 수행 등을 들고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홍사덕 의원 ‘흑색유인물’ 살포지시

    92년 3월 14대 총선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재임중 강남을 선거구에서 여당인 민자당 김만제 후보와 민주당 홍사덕 후보가 경합하게 되자, 홍사덕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상부 지시도 없이 당시 수사과장에게 홍사덕 후보의 여성편력 비방 유인물을 제작해 살포토록 지시하여 ▲당시 수사계장 한기용 등 4명이 홍후보의 축첩 관련 비방유인물을 제작해 3월21일 야간에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단지에 살포하던 중 홍후보 선거운동원에게 발각되어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혐의(후보자 비방)로 구속되자 ▲부하 직원 한기용이 민자당원인 친구의 부탁으로 행한 개인적인 사건으로 축소조작 후 직속상관인 소속 과장과 단장을 견책 등 징계처리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사건 직후 소속 직원들로부터 갹출한 격려금을 자신의 명의로 관련자 한기용 등 4명의 순화 및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활용했는 바 ▲그 결과 유인물 살포를 지시받은 한기용 등 부하 직원 4명은 사법처리(각각 징역 1년6월∼8월, 집행유예 1년6월∼3년)되어 직장을 떠났음에도 ▲정형근 자신은 동 사건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은폐조작 후 충성심을 인정받아 수사차장보로 영전함으로써 직원들로부터 지탄을 받음.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및 가혹행위

    89년 6월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 서경원(62)은 85년 4월경 서독 여행중 북한공작원 성낙영에게 포섭되어 88년 8월 체코 프라하에서 북한 특별기편으로 밀입북한 혐의로 구속되었는 바(서경원은 그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98년 3월 특별사면 때 잔형집행면제로 출소) ▲김일성과 허담 접촉 및 공작금 미화 5만달러를 수수하고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국회와 가톨릭농민회 등을 기반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한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정형근은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서경원 간첩사건과 연계시킬 목적으로 ▲직접 조사에 참여하여 주먹과 발로 서경원의 머리, 가슴, 얼굴 등을 무차별 구타하고 구두를 신은 채 발등을 짓밟는 등 가혹한 고문을 통해 ▲허담으로부터 받은 5만 달러 중 1만 달러를 김대중 총재에게 건네준 사실과 김총재가 김일성에게 친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등 가혹행위를 통해 김대중 총재에 대한 용공조작을 자행했음.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 관련 박종철(언어학과 3년)을 연행해 조사시 물고문 등으로 치사사건이 발생하자 치안본부로부터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 소집 등 지원을 요청받고,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단장 정형근은 ▲1월14일 심야에 당시 광화문에 있는 서린호텔에서 개최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검찰·경찰·청와대 관계자 등 10여명과 함께 참석하여 ▲사건 처리방향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의 발표문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그후 수차례 시내 앰버서더호텔(1817호)에서 검찰·경찰·청와대 등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소집하여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 5공 정권 출범 이래 최대 위기인만큼 사건이 절대 깨져서는 안 되며, 이대로 묻혀야 한다”며 사건 처리방안을 제시하고 ▲담당검사 안상수에게 고문경찰관의 구형량을 낮추도록 요구하는 등 고문치사사건 은폐 및 축소조작에 개입하였고 ▲당시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조한경 경위를 직접 찾아가 “두 사람만 관련된 것으로 하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어 달라”면서 금품을 제공해 회유하고 검찰·교도소측에 각종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음.

    위에서 인용한 ‘정형근 파일’의 일부는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일 뿐이지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또 이것이 그의 ‘전력’의 전부도 아니다.

    이를테면 ▲구미 유학생 간첩사건 ▲반제동맹 및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화가 홍성담 사건 ▲사노맹 사건 ▲김낙중―손병선 간첩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등에서 하나같이 고문 및 가혹행위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에는 고문·가혹행위 유형과 사례를 따로 적시하지 않고 있다. 용공조작 유형 사례로 예시한 서경원 간첩사건에서만, 김대중 대통령과의 관련성 때문인지 몰라도 일부 가혹행위를 적시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고문·가혹행위의 경우 당시 정형근 수사국장(단장)의 지휘 아래 가담했던 관련 당사자들이 상당수 현직에 있기 때문에 이는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누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형근 파일’에 담긴 정보는 부분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실 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히 구체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정원 내부에서 수집한 정보라는 점에서 일단 이를 공개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그 사실 여부를 면밀히 검증해 보았다(물론 정형근 의원에게도 사실 여부 확인을 요청하는 질의서를 보냈다). 아울러 ‘정형근 파일’에는 없지만 고문·가혹행위를 호소하는 피해자를 취재했다.

    “관계기관대책회의 핵심멤버로 축소은폐 개입”

    현재까지 출간된 박종철 사건에 관한 기록으로는 사건 당시 수사검사였던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경기 과천·의왕)이 95년 변호사 시절에 쓴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가 가장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 붙인 ‘박종철사건 수사검사의 일기’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지만, 필자는 “박종철 사건을 수사하면서 언젠가 때가 되면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기를 써나갔다”고 밝히고 있고 이 책은 그 일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안변호사는 그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 책 제목을 ‘안검사의 일기’로 바꾸어 출간했다).

    그러나 이 ‘수사검사의 일기’에도 한계는 있다. 이 책의 필자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 사건은 그 폭발력만큼이나 그 안에 감춰진 내막도 많았다. 세 차례에 걸쳐 사건이 터지면서 진상이 많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사실들이 적지 않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중략)… 이 책에서 나는 박군 사건에 대해 내가 아는 사실, 내 주변에서 있었던 일과 내가 했던 고민을 모두 기록했다. 그래야 올바른 역사가 씌어져 후세에 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의원은 자신이 아는 진실을 모두 밝히지는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박종철 사건 수사와 관련해 안검사에게 사건 처리방안(축소은폐)을 제시하고, 고문 경찰관의 구형량을 낮추도록 요구한 안기부 정형근 수사단장 관련 부분이다.

    안검사의 일기에 안기부와 앰버서더호텔에서 ‘안기부 J단장’을 만나 박군 사건 처리방안을 의논하는 대목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J단장은 안검사의 일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익명 인물이다. 그 대신에 안의원은 ‘일기’에서 자신과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안기부와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집단’에 떠넘기고 있다. ‘안검사의 일기’의 한 대목이다.

    “87년 박군 사건이 터졌을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결정은 사실 안기부의 결정이었고 그것은 곧 법이었다. 그래서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이 안기부장에게 밀려 이 사건에서 검찰이 파행적 수사를 거듭하고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두 사람은 검사 출신의 같은 당 의원인 데다가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도 506호·507실로 나란히 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64년 서울대 법대 입학동기로 66년 3학년 때는 법대 학생회 선거에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회장(정형근)·부회장(안상수)을 지낼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또 당시 안상수·조영래군(작고한 인권변호사)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성토대회’ 사회를 보다가 함께 유기정학(1개월)을 당하자, 정형근 회장은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관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고, 안부회장은 정회장 대신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검사의 일기에 정형근 단장만 박군 사건 관련자 중에서 유일하게 익명으로 기록한 배경에는 ‘절친한 관계’말고도 ‘숨겨줘야 할 무엇’이 있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앞에서 인용한 ‘정형근 파일’은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해 준다.

    관계기관대책회의 핵심멤버 이해구·정형근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은 박군 사건과 관련해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어떻게 작동했으며 그 구성원이 누구였는지를 일부 드러내 준다.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 참석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이렇게 운영되었다.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정부조직법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회의체다. 그러나 5·6공화국 정부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두고 어떤 정치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안기부를 비롯한 정보·치안기관들과 그 문제에 관련된 정부 부처 담당자들이 회합을 갖고 그 문제의 성격과 정부 당국의 대처방안을 의논해 왔다. 즉 회의 소집 발의는 관련 부처(노사 분규는 노동부, 학원 사태는 교육부 등)가 했지만 회의 소집권은 안기부장에게 있었다. 그러한 관계기관대책회의는 문제의 수준이나 정치적 의미에 따라 장·차관급이 참석하는 고위 관계기관대책회의, 실무 국·실장급이 참여하는 관계기관 실무대책회의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고위 관계기관대책회의에는 안기부장과 청와대 수석비서관급이 참석하게 돼 있으나 주로 1차장과 비서관들이 대신 참석했다. 마찬가지로 실무대책회의에도 실세기관인 청와대와 안기부는 한 단계 낮은 직급자들이 참여하곤 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회의 장소는 주로 안기부 별관이나 호텔에 있는 안기부 안가(安家)를 이용했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군 사건의 축소은폐를 기도한 고위·실무 관계기관대책회의 핵심 멤버는 당시 치안본부장 출신으로 안기부 국내담당 차장을 맡고 있던 한나라당 이해구 의원(경기 안성)과 검사 출신으로 안기부 수사단장을 맡고 있던 정형근 의원이다. 두 사람이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은 당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여했던 검찰 관계자의 증언이다.

    “5공 안기부는 당시 경찰의 물리력으로 정권을 지탱했고 검찰은 그 물리력을 합법화하는 법무참모쯤으로 간주했다. 당시 경찰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전임 치안본부장 이해구씨는 국내 보안정보를 총괄하는 안기부 1차장으로 앉아 있었다. 당시는 안기부의 비호를 받은 경찰이 검찰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6공이 검찰국가였다면 5공은 경찰국가였다.”

    최환 공안부장의 ‘운명의 날 1월14일’

    안검사의 일기는 ‘운명의 날 1월15일’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박종철군이 사망한 것은 그 하루 전인 1월14일이다. 따라서 박군 변사사건을 배당받은 안상수 당시 수사검사에게는 1월15일이 운명의 날일지 모르지만 박종철군 사건의 전체 맥락에서 보자면 운명의 날은 1월14일이었다. 박군 사망 직후부터 당시 경찰과 안기부는 축소은폐 공작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월14일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다. 관련 당사자들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1월14일 당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 검찰에서 박군 사망사건의 첫 보고를 접한 인물은 지난해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변호사 개업을 한 최환 부장검사(서울지검 공안2부)였다. 최환 변호사는 87년 1월14일 상황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박군 사망과 관련해 경찰이 최초 보고한 시점은 언제인가.

    “1월14일 19시40분 경에 내 방(서울지검 공안2부장실)으로 대공수사단 경찰 2명이 2쪽짜리 보고서(변사사건 발생보고 및 지휘품신서)를 들고 변사사건 지휘를 해달라고 찾아왔다. 보고서에는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찾아온 경찰도 ‘쇼크사가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보고서를 보니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 그때 경찰은 뭐라고 했는가.

    “정확히 이렇게 말했었다.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진 것으로 보아 쇼크사가 틀림없다. 유족과도 합의가 되었으니 오늘밤 안으로 화장할 수 있도록 지휘해 달라.’ 유족과 합의했다고 강조한 것은 ‘뒤탈이 없도록 마무리했으니 화장할 수 있도록 사인만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 화장하라고 했으면 박종철 사건은 의혹만 남긴 채 묻혔을 것이다.”

    ― 찾아온 경찰은 대공수사단장 박처원 치안감인가.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박처원 치안감보다 낮은 직급자였다.”

    ― 그래서 어떻게 처리했나.

    “고문에 의한 사망이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불가 입장을 피력했다. 왜냐면 당시는 김근태씨 고문 사건과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으로 시국사건에 대한 고문 의혹이 사회적으로 쟁점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럴수록 더 철저히 해야 했다. 그래서 ‘사체를 부검해 사인을 밝힌 연후에 처리해야지 2페이지짜리 서류만 보고 결정해선 안 된다’고 했다. 또 ‘변사사건 지휘를 공안부장이 한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나를 두 시간 동안이나 설득했는데 그날 청와대, 안기부 등 20여 군데서 전화가 왔다. 그중에는 ‘유족과도 화장하기로 합의했는데 왜 그러냐’는 위협성 전화도 있었다. 검찰 상부에는 보고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는 검찰에서까지 ‘도장 좀 찍어주지 그러냐’며 전화가 왔다. 나중에 박군 사건으로 학생시위가 불붙고 6·29 항복 선언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그때 압력과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나는 ‘역사의 죄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

    “밤 9시30분 경에 퇴근하면서 ‘내일 아침에 정식 변사사건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이 말은 (대공분실이 있는) 관할 용산경찰서에서 변사발생보고를 작성해 정식 사건으로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해놓고 집에 와서는 아예 수화기를 내려놨다. 다음날(1월15일) 출근해 정구영 검사장에게 ‘어젯밤 대공수사단에서 변사사건 지휘를 요청했는데 정식으로 변사사건 지휘를 받으라고 했으니 오늘 아침 변사사건 발생보고가 올라올 것’이라고 어젯밤 일을 보고했다. 공안부에서는 변사사건을 지휘한 전례가 없었다. 그런데 정검사장은 대공수사단에서 발생한 사건이니 공안부에서 맡아주길 원했다. 그래서 ‘제가 부검을 지휘할 테니 형사부 검사 1명을 파견해 달라’고 검사장에게 요청했다. 워낙 민감한 사건이라 수사검사 1명에게만 일임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검사장이 이 사건을 형사부 당직검사인 안상수 검사가 부검하되 공안부장의 지휘를 받도록 지시한 것이다.”

    앰버서더호텔서 검찰에 구형량 주문하기도

    부검 과정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부검 결과는 물고문에 의한 익사(실제로는 질식사)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 경찰과 안기부는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박처원 치안감은 박군의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 지휘를 맡게 된 최환 공안부장을 찾아가 “부검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박치안감은 안검사한테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입니다, 부검을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또 이날(1월15일) 석간신문에 첫 보도가 나가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오후 6시께 기자간담회를 갖고 박군 ‘변사사건’을 처음으로 공식 시인했다. 그러나 강본부장은 이 자리에서 심장마비에 의한 쇼크사 가능성을 비쳤고 배석한 박처원 치안감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덧붙였다. 이후 이 말은 두고두고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명문’이 당시 정형근 단장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정의원은 이에 대해 “그런 말 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부인했다. 그런데 ‘정형근 파일’은 정형근 단장이 치안본부로부터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 소집 등 지원을 요청받고 사건 처리방향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의 발표문 작성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에 누가 참여했으며 누가 그런 방향으로 은폐를 주도했는지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에 대한 관련자들의 진술은 엇갈린다. 우선 최환 당시 공안부장은 서린호텔 대책회의에 참석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참석한 회의는 사건 축소은폐를 논의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아니라 발표문을 조율하기 위한 회의였고, 그 날짜도 사건이 발생한 1월14일이 아니라 1월16일이라고 밝혔다.

    ― 1월14일 서린호텔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했는가.

    “1월14일이 아니라 1월16일이다. 사인 규명을 한 뒤에 나는 박군 사건에서 손을 뗐다. 정구영 검사장이 ‘부검을 마쳤으니 이제 범인 색출 수사는 안검사와 신창언 부장검사(형사2부)가 맡도록 지시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이날(1월16일) 저녁 사무실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정검사장이) 나더러 이날 밤 서린호텔에서 담화문 관련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있으니 검찰측 대표로 참석해 달라고 했다. 1월17일 아침에 대국민 사과 담화문을 발표하기로 돼 있는데 서린호텔에서 그 문안을 기초하는 회의였다. 강민창 본부장, 김길홍 청와대 정무비서관, 문공부 관계자 등 10여명이 참석했다. 내가 서린호텔에 불려간 배경은, 강본부장이 계속 ‘쇼크사’로 발표하자고 주장하자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서울지검장에게 연락해 부검을 지휘한 공안부장이 사망원인이 뭔지 확실히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가게 된 것이다.”

    ― 그래서 서린호텔 대책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나왔나.

    “서린호텔에 가 보니 사인을 어떻게 발표할지 논란이 벌어지고 있어 나는 이렇게 설명을 했다. 이 사건은 적당히 넘어갈 사건이 아니다, 국민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사실대로 밝혀라,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맹세하는 심정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이런 주장이 그대로 반영되어 1월17일 담화문 발표 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경질되었다.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표현은 1월16일 밤 서린호텔 회의에서 논의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전에 경찰 보고서에도 적혀 있었고, 강본부장 기자간담회(1월15일) 때 박처원 치안감도 한 말이다. 서린호텔 회의는 통상 언론에서 말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아니고 담화문 발표 문안을 조율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른바 축소은폐 관계기관대책회의는 그뒤에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고 나중에 공범들이 더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장충동 앰버서더호텔 등지에서 열린 것으로 알고 있다.”

    ― 앰버서더호텔에서 정형근 단장이 검찰에 고문 경관들의 구형량을 낮춰줄 것을 주문하지 않았나.

    “앰버서더호텔건은 내가 수사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안상수 검사 일기에 보면 앰버서더호텔에서 J단장(정형근 수사단장)이 주임검사인 신창언 형사부장과 안상수 검사에게 그런 요구를 한 것으로 돼 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지휘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많은 압력이 있었으나 아직 현직에 있는 사람도 있고 해서 구체적으로 누가 압력을 넣었는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인 규명 당시에는 검찰 선배인 내가 공안부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정형근 단장이 함부로 못했다.”

    다음은 청와대측 참석자 김길홍 당시 정무비서관의 증언이다.

    ― 87년 박종철 사건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 멤버였는가.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장관급, 차관급, 실무급 등으로 나뉘었는데 장관급의 경우 관련부처의 장이 소집을 발의하면 안기부장이 소집했다. 장관급 회의는 안기부장이 주재했다. 당시 안기부는 장세동 부장― 이해구 차장 체제였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 장관(부장)이 못나오면 차관급(차장)이 대리 참석하는 게 관행이었다. 나의 경우 장관급대책회의에는 정무수석이 나가야 하지만 정무수석 대신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무대책회의에는 청와대 비서실에서 안 가고 관련부처 실국장급이 나갔던 것으로 안다.”

    ― 정형근 당시 안기부 수사단장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허허 웃으며) 정형근씨는 실무자로서 참석했다. 정의원은 당시 수사단장이었으니 실국장들이 멤버인 실무대책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차관급 회의에 안기부에서는 주로 이해구 1차장이 참석했다. 경찰쪽에서는 박처원 치안감은 당사자라서 대책회의 참석이 배제되었던 것 같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참석했다. 검찰에서는 아마 공안부장 등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와 관련 이해구 의원은 자신과 정형근 의원이 당시 했던 역할에 대해 묻자 “지난 일은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 “정의원 건은 여야 대화와 정치로 풀어야 하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적어도 정형근 단장은 당시 관계기관 실무대책회의에 참석해 안기부 의견을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덮기 위해 검찰 수사팀에 구형량을 낮춰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기부 대공수사국 정형근 수사단장과 치안본부 박처원 대공수사단장의 관계다. 안검사의 일기에 보면 안상수 검사가 87년 1월16일 상부의 지시로 남산 안기부에 불려가 J단장(정형근 단장)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정형근과 박처원 치안감의 긴밀관계

    “만나는 대상이 친구지간이라 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육중한 대문을 지나 으스스한 집무실에서 기다리던 J단장을 반갑게 만났더니 대뜸 옆방에 치안본부의 박처원 치안감이 와 있다고 귀띔하면서 ‘경찰에서는 고문사실이 없다는데 부검해 보니 어떻더냐’고 물었다. 나는 부검결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J단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박처원 치안감이 안기부의 정형근 단장한테 사건의 축소은폐를 요청한 것은 두 사람의 긴밀한 업무 관계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85년 당시 재야 인사 김근태씨(현 국민회의 부총재)를 고문한 이근안 경감의 자수를 계기로 퇴직 후 10억원을 받은 사실이 최근 드러난 박처원 치안감에 대한 검찰 조사에서도 밝혀지고 있지만, 당시 안기부 정형근 단장은 경찰 대공수사단의 김근태씨 고문수사를 배후에서 지휘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당시는 안기부가 막대한 대공정보비와 수사공작비로 경찰(대공수사단)을 주무르던 시절이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중이던 고문 경관 조한경·강진규 두 사람은 87년 3월7일 갑자기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된다. 죄를 뒤집어쓰게 된 두 사람이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2월 중순 면회온 유정방 경정에게 ‘양심선언’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박처원 치안감은 이감 다음날 의정부로 부하들을 찾아가 조용히 있으라고 회유했다.

    당시 안기부는 경찰 상급자들이 이들을 수시로 찾아가 회유·설득할 수 있는 특별면회를 교도소측에 요청했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가 완강하자 박처원 치안감은 4월초 조한경·강진규 명의로 가입한 2억원짜리 신탁예금증서를 들고 의정부로 찾아가 회유하기까지 했다.

    당시 2차 사건을 수사한 대검 중수부는 이 돈의 출처에 대해 “박치안감이 직접 관리하는 수사공작비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공작비’를 폭로무마용으로 꺼내 쓴 박치안감에게 범인도피죄를 적용했을 뿐 공금횡령죄로 구속하지는 않았다. 당시 2억원이라는 거금은 안기부 공작비였던 것이다.

    십수년 한솥밥을 먹은 상급자들이 회유해도 잘 안 되자 안기부 관계자들까지 의정부교도소를 찾아가 이들을 회유하고 은폐를 기도한 사실은 안검사의 일기에도 일부 적시되어 있다.

    “4월9일 안기부의 고위 관계자가 직접 나서 피고인들(조한경·강진규)을 만났다는 사실도 듣게 되었다. 아마 안기부측에서는 4·13 호헌조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당황해서 직접 뛰어든 것인 듯했다.”

    이 ‘안기부 고위 관계자’가 정형근 단장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에는 당시 정형근 단장이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조한경 경위를 직접 찾아가 “두 사람만 관련된 것으로 하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어 달라”면서 금품을 제공해 회유하고 검찰·교도소측에 각종 편의를 제공토록 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사자(조한경―정형근)로부터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짐작이 가는 일이다.

    “파이프담배 문 정형근이 나를 고문했다”

    심진구씨(39·경기도 안산시 부곡동)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둔 가장이다. 그러나 심씨는 지난 13년 동안 노동력을 상실해 아내한테 의존해 힘겹게 살아오고 있다. 86년 안기부에 끌려가 37일 동안 당한 살인적인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상처 때문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말기인 86년 12월10일 당시 삼립식품 노동자였던 심씨는 이른바 ‘민족해방 노동자당’ 사건으로 안기부에 불법 연행되어 이듬해 1월15일까지 37일 동안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 심씨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최악의 인권유린이 시작된 날이다. 더 중요한 것은 1월15일이라는 날짜다. 그날은 바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이다.

    “그 당시에는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몰랐어요. 나중에 말로만 듣던 남산 안기부라는 것을 알았는데, 지하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그러더니 금세 다 벗으래요. 알몸으로 발가벗긴 상태에서 뒤로 손을 젖히고 발을 소돼지처럼 묶더니 수사관 여섯명이 달려들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두들겨패는 거예요. 그렇게 몽둥이질로 ‘기 죽이기’를 해 온몸이 늘어지게 혼을 빼놓더니 그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너 엔엘피디알(NLPDR)이 뭔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이 새끼 거짓말하고 있어!’ 하며 사정없이 몽둥이가 날아왔어요. 저는 정말 그때는 NLPDR이 뭔지 몰랐거든요. ‘그러면 민족이 영어로 뭐냐?’ ‘네이션이오’ ‘이 새끼 알면서 모른 척해!’ 그렇게 영어 이니셜 하나가 나올 때마다 맞았어요. 나중에 그러대요. ‘너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은 알지?’ ‘그건 알지요’ ‘그런데 왜 NLPDR은 몰라, 이 새끼야’ 나는 그때 알았어요. 영환이가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을 NLPDR이라고 했다는 걸. 그렇게 써서 뿌렸으면 나한테 한마디 언질이라도 해줬어야지.”

    심씨가 말한 영환이는 당시 먼저 잡혀온 김영환군(당시 서울대 공법4 제적)이다. 심씨가 잡혀온 지 두달 뒤인 87년 2월23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발표한 이른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의 조직 그림표에는 모두 9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일반인에게는 서울대생들이 주축이 된 구국학생연맹(구학련)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총책’이 바로 ‘강철’ 김영환이었다.

    사건 관련자 중 당시 유일한 노동자였던 심씨는 84년 처음 김영환군을 만나 자취를 하면서 김군의 대학동기인 하영옥군 등과 함께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노동운동의 진로를 고민했었다. 그러다 86년 김영환씨는 ‘강철 시리즈’로 인해 수배되고, 심씨는 회사를 옮기면서 헤어졌는데 심씨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작성해 김씨에게 보여주었던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라는 문건(김군은 이 문건을 자신이 작성해 배포한 ‘강철 시리즈’에 ‘백두산’이라는 필명으로 실었었다) 때문에 주체사상과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론을 김씨에게 ‘전파’했다는 이유로 잡혀온 것이었다. 서울대 법대생을 ‘친구’로 둔 대가 치고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86년 12월24일부터 87년 초까지 연말연시라 회식이 잦았던 수사관들은 술을 먹고 들어와 술냄새를 풍기며 고문을 했다. 수갑 채워서 몽둥이로 목 조르기, 목 비틀기… 고문은 끝이 없었다. 군대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닌데 3년간 하사로 전방 근무한 것 때문에 더 맞았다. 철책 근무 하면서 대학노트 한 장 찢어서 원근법으로 그린 그림이 경기도 안성 본가에서 나오자 수사관들은 ‘월북루트 지도’라며 3년간 전방 근무하면서 제3자를 대동, 이북에 갔다왔다는 식으로 몰아 간첩 올가미를 씌우려 했다.

    “수사관들은 자기들끼리 전무니 상무니 실장이니 하는 회사 직함을 썼다. 그런데 들어온 지 닷새쯤 지나 누가 들어오자 실장이라는 키 큰 사람이 갑자기 ‘단장님 오셨습니까’ 하며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마도로스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이 낯선 남자는 내게 다가와 비꼬는 투로 물었다.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 이것 네가 썼다며?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놈이 이걸 써? 네 뒤에 있는 놈을 대!”

    심씨는 뒤에 92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수사발표 때 텔레비전에 나온 정형근 수사국장을 보고 당시 파이프 담배를 물고 들어와 부하들에게 “더 족쳐!”라고 지시했던 수사단장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다시 심씨의 증언이다.

    “정형근은 이근안보다 나쁘다”

    “정형근 단장이 들어오고 나면 더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한번은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심진구, 이제 불 때가 되었는데. 여기 들어와 15일이면 다 불어. 여기가 어딘지 알지? 여긴 국회의원도 맞아 나가는 데야. 그래야 고생하는 우리 수사관들도 특진하지. 그러고는 부하들에게 ‘간첩이라고 불 때까지 더 족쳐!’라고 고문을 독려했다. 그중에서 성고문이 제일 치욕적이었다. 손을 뒤로 한 채 목을 젖히고, 심문대 책상 위에 내 성기를 올려 놓고 몽둥이로 쳤다. 10분씩 두 차례에 걸쳐…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한 대만 맞아도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그들은 좋아하며 히히덕 거리며 즐겼다.”

    안기부에서 심씨는 86년 12월10일부터 87년 1월15일까지 37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수사관들로부터 돌아가면서 계속 맞아 피오줌을 흘렸고, 잘 때는 팬티가 붙어 야전침대에 누울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때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간첩으로 모는 것은 너무 두려웠다고 한다. 정형근이 2~3일에 한번씩 들러 뒷짐진 채로 파이프 담배를 물고 나타나 “심진구! 이제 간첩이라고 불 때가 되었는데”라며 그뒤에 있을 고문을 ‘예고’하곤 했다. 그가 들렀다 간 다음에는 더 강도 높은 고문이 어김없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다 정형근이가 들어와서 지시해서 때리거나 고문했으니 그가 이근안보다 더 나쁜 놈이다. 쫄다구는 시키니깐 하는 일이고. 나는 정형근이 보는 앞에서도 당했다. 정형근 자신도 잔혹해서 더 이상 못보고 자리를 떴을 정도다.”

    그러다 별안간 대우가 달라졌다. 하루는 “조사받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며 “조사받을 때 불편했던 점이 있으면 적어라”고 설문지를 돌렸다. 병 주고 약 주기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심씨는 지옥 같던 안기부를 떠나 구치소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구치소에 갔더니 재소자 학생들이 “박종철군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심씨는 ‘간첩’이 아닌 국보법 7조3항 위반(이적표현물 제작 및 배포) 혐의만 인정되어 1심에서 검찰은 징역 5년을 구형했으나 집행유예를 받아 5개월 만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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