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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논단|美·유럽 언론인의 불꽃 튀는 논쟁

세계화, 기묘하고 멋진 신세계?

세계화, 기묘하고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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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시오 라모네(르몽드 디플로마띠끄 편집장)

세계화가 20세기 말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임은 최소한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토마스 프리드먼이 지적하지 않아도 이를 모를 사람은 없다. 1980년대 말 이후 많은 사람이 세계화를 해부하고 성격을 규정했으며 세계화가 무엇인지 묘사해왔다. 프리드먼의 색다른 점이라면 세계화와 냉전을 두동강내는 이분법을 시도했다는 점인데, 이런 이분법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프리드먼은 이를 상반되며 상호 대체할 수 있는 ‘체제’로 보고 있다. 그는 이 주먹구구식의 지나친 단순화를 반복해서 우리 신경을 거스른다.

냉전과 세계화가 이 시대의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해서 둘 다 체제라고 부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체제라는 것은 이 세계에 실재하는 논리적 틀을 제공하는 관행과 제도의 집합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냉전은 체제라 부를 수 없는데도 프리드먼은 냉전을 체제라고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냉전’이라는 용어는 언론이 만들어낸 말로 지정학적, 그리고 지략학적(地略學的. geostrategic) 이해관계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고려되던 현대사의 한 시대(1946∼1989)를 지칭한다. 하지만 냉전만 가지고는 다국적기업의 팽창, 항공운송의 발달, 국제연합(UN)의 범세계적 확대,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 남아공의 인종차별, 환경보호론의 대두, 컴퓨터나 유전공학 등 하이테크 산업의 발달 등 냉전과는 관계없이 동일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다른 사건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일이 있다.

게다가 서방진영과 소련 사이의 긴장은, 프리드먼이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냉전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실 바로 그 긴장이야말로 민주국가들이 1920년대 이탈리아의 파시즘,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이후 재무장한 독일, 그리고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스페인 내전을 이해하는 틀이 됐다.



세계화가 체제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프리드먼에게도 일리가 있다. 기술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이 괴물은 모든 것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한 단계 한 단계 몰아넣는다. 그런데 프리드먼은 세계화를 마치 디즈니 만화의 줄거리처럼 미화하고 있다. 프리드먼이 고운 눈으로 보는 이 혼돈은 인류 전체로서는 곱게 봐줄 여지가 없다.

프리드먼은 오늘날 모든 것이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는 동시에 상충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는 또 세계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생태학 분야에서 현재 진행하는 모든 흐름과 현상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파악한다. 하지만 그는 각 민족, 종교, 그리고 인종집단 중에는 세계통합과 획일화에 극구 반대하는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화가 통합과 분열이라는 상반되는 두 역학을 이 세계에 강요하고 있음을 프리드먼은 파악할 능력이 없는 듯하다. 한편으론 많은 국가들이 동맹국을 찾아 나선다. 이들은 다른 나라들과 연합을 통해 수의 우위 혹은 안전을 보장하는 국제기구 - 특히 경제기구 - 의 조직을 추구한다. EU와 같이 아시아, 동유럽, 북아프리카, 북미와 남미의 국가들이 정치 및 안보동맹을 강화하면서 자유무역협정을 조인하고 교역증진을 위해 관세 장벽을 낮추고 있다.

그러나 이런 통합의 이면에서 몇몇 다국적 공동체는 분열의 희생양이 되어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내분으로 갈라서는 길을 걷기도 해 이웃 나라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동유럽 진영이었던 3개의 연방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갈라져 22개의 독립국가가 탄생했다. 가위 여섯번째 대륙이다.

세계화의 정치적인 영향은 끔찍하다고 밖엔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세계화가 파열을 일으켜 세계 도처에서 옛 상처가 도지고 있다. 국경분쟁이 심해지고 소수민 거주지는 합방과 분리, 그리고 인종청소의 유혹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발칸과 코카서스 지방에서는 이 긴장상태로 인해 전쟁의 봇물이 터졌다. 아브카지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 몰도바, 나고르노-카라바흐, 슬로베니아, 그리고 남(南)오세티아 사태가 그런 예들이다.

사회적인 영향도 별반 나은 것이 없다. 가속일로에 있던 세계화는 1980년대에 대처 영국 총리와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인정사정없는 신자유주의(ultraliberalism)와 맞아떨어지게 됐고, 이로 인해 세계화는 심화된 불평등, 급증하는 실업, 탈산업화, 열악해진 공공 서비스 및 상품의 질 등과 동의어로 인식됐다.

오늘날 사건사고, 불확실성과 혼돈은 세계화 진행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됐다. 오늘날 우리에게 세계화는 어떤 상태로 다가오는가? 빈곤과 문맹, 폭력과 질병이 증가일로에 있다. 세계 인구의 최부유층 5분의 1이 자원의 80%를 점유한 반면에 최빈곤층 5분의 1은 0.5%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세계인구 59억명 중에서 고작 5억명만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45억 명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EU 역내에서조차 1600만명이 일자리가 없으며, 5000만명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 최고 갑부 358명의 재산을 모두 합하면 세계 최빈층 45%, 즉 26억명의 1년치 벌이와 맞먹는다. 이것이 세계화된 멋진 신세계의 자화상이다.

독단에 빠지지 말자

세계화는 인간이나 인간의 진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관계가 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금전과 관계가 있다. 신속한 이윤회수라는 한 가닥 욕심에 눈먼 세계화의 앞잡이들은 앞날에 대한 배려, 인류나 환경을 위한 수요예측, 팽창하는 도시에 대한 대비, 그리고 점차 개선해야 할 불평등과 치유해야 할 우리 사회의 상처 등에는 눈길도 줄줄 모른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이런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과 거시경제학적 성장이 모두 해결해줄 것인데, 이런 주장은 프랑스 사람들이 유일사고(唯一思考; pensee unique)라고 부르는 해괴망측하고 위험한 논리다. 유일사고 혹은 영어식 표기로 ‘single thought’라 함은 경제에 있어 특정 집단의 이해만 대변하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는 특히 자본의 국경 없는 자유 이동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거만한 유일사고는 이제 극에 달해 현대판 독단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 사악한 논리는 마치 암세포처럼 아무도 모르게 반대측 논리를 둘러싸고는 그 반대 논리를 기죽이고 교란하고 마비시켜, 끝내는 없애버린다. 이 유일사고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침투하지 않는 곳이 없는 여론경찰(opinion police)이 공인한 유일무이의 논리다.

이 유일사고는 1944년 브레턴 우즈 협정과 함께 등장했다. 프랑스은행, 독일의 분데스방크, 유럽공동체, 국제금융기구(IMF),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세계 유수의 경제촵금융기구들이 이 교리를 만들어내고는, 그들의 두둑한 주머니를 털어서 세계 도처의 연구기관, 대학, 학술재단이 이 복음을 퍼뜨리도록 부추겼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대학의 경제학부, 프리드먼과 같은 언론인, 작가, 정치 지도자들이 이 새로운 원칙의 요점을 언론매체를 통해서 목이 터져라 선전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의 교리는 투자자들이나 주식중개인들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이코노미스트’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로이터 통신 ‘월 스트리트 저널’ 등의 경제정보 전달자들이 말 한마디 바꾸지 않고 메아리를 넣어준다. 이들 경제매체는 대부분 산업계와 재계의 대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무엇을 믿으라고 우리를 몰아세우는 것일까? 경제가 정치에 우선한다는 이들의 근본 원칙은 아주 강렬한 것이어서 마르크스주의자조차 아차 하면 넘어갈 수밖에 없다. 혹은 작가 알랭 맹(프랑스의 경제평론가. 1949년 파리生. 저서에 ‘유럽통합에의 환상: 더 넓은 공동체에서의 비즈니스’ 와 ‘미래의 도전’ 등이 있다. - 역주)의 말을 빌리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시장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회적 과속방지턱이나 ‘비효율’이 없는 경제만이 후퇴나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 유일 사고의 나머지 주요 계명들은 위의 근본 원칙에서 파생한다. 예를 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역기능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시장 중에서도 특히 자본시장의 “지표가 경제의 전반적인 동향을 예고하고 결정짓는다.” 경쟁과 경쟁력은 “비즈니스를 자극하고 발전시켜 유익한 현대화의 장으로 나아가게 한다.” 장벽 없는 자유무역은 “교역의 무제한적인 발전 요소가 되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무궁한 발전을 가져온다.” 제조업과 자본 이동의 세계화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려해야 한다. 노동의 국제분업화는 “노동 수요의 집중을 완화하며 노동비용을 줄여준다.” 강력한 구매력을 가진 통화는 필수 사항이다. 규제완화와 공공기업의 민영화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필수불가결함을 강조한다. 늘 ‘국가기능의 최소화’를 부르짖고, 자본가의 이해를 편들고 노동계층의 피해는 외면한다. 환경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후안무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좌파와 우파를 불문하고 언론에서 이런 식의 교리문답을 계속해서 읊어대니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제3의 길’과 ‘신중도파’를 보라) 자유로운 사고는 공포에 질려 싹도 트지 못하고 만다.

큰손과 낙오자

세계화는 두 개의 버팀목 혹은 패러다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두 패러다임은 프리드먼과 같은 세계화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첫번째 버팀목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게이션은 지난 2세기 동안의 주된 견인차였던 ‘진보’의 자리를 조금씩 더 차지하고 들어앉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학교건 기업체건, 가정에나 정부에나 이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지상 명령만 있다.

두번째 버팀목은 시장이다. 시장은 사회 구성원간의 ‘결합’을 대체하고 있다. 사회적 결합이란 민주사회는 마치 시계처럼 기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시계에는 쓸모없는 부품은 없고 모든 부품이 힘을 합해 돌아간다. 이 18세기를 대표하는 기계에서 현대판 경제 및 금융의 밑그림이 나온다. 이제부터는 ‘시장이라는 지배세력’의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이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가치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넝쿨째 굴러오는 이윤, 능률, 그리고 경쟁력이다.

이 시장에 의해서 지배되는 상호 연결된 세계에서는 최강자만이 살아남는다. 삶은 약육강식의 싸움이다. 끝없는 경쟁, 자연선택, 그리고 적응을 강조하는 경제적·사회적 진화론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몰아붙인다. 이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 개인은 “용해되는가” 혹은 “용해되지 않는가”로 나뉜다. 다시 말하면 시장에 통합되는가 아닌가이다. 시장은 용해되는 사람들에게만 바람막이가 돼준다. 인간적인 유대가 더 이상 지상과제가 아닌 이런 신질서 속에 나머지는 낙오자가 되고 소외된다.

세계화 덕분에 세계적이고 영구적이며 직접적이고 비물질적인 네 가지 주요 속성을 가진 행위만이 번창한다. 이 네 속성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속성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세계화는 복종과 믿음, 숭배와 새로운 의식(儀式)을 강요하는 일종의 현대판 신격(神格)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진선미(眞善美)와 정의(正義)를 시장이 규정한다. 시장의 ‘법칙’은 새로운 숭배 대상이다.

이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면 쇠락하리라고 프리드먼은 경고한다. 따라서 이 ‘새 믿음’의 다른 선교자들처럼 프리드먼은 경제문제, 나아가 궁극적으로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로지 신자유주의 밖에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려 하고 있다. 프리드먼에게 정치는 사실은 경제요, 경제는 금융이며, 금융은 시장이다. 볼셰비키들은 “모든 힘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프리드먼과 같은 세계화 지지자들은 “모든 힘을 시장으로”라고 요구한다. 이 주장은 아주 독단적이어서 이제 세계화는 교리와 사제를 갖춘 하나의 새로운 전체주의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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