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세계화, 기묘하고 멋진 신세계?

  • 입력2006-11-30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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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우리에게도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용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세계화를 이루지 못하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느니, 세계화를 가로막는 법적·제도적·심리적 장벽을 하루 빨리 철폐해야 한다는 등의 목소리는 어느새 이 시대를 지배하는 목소리가 됐다. 그런데 세계화의 명확한 실체는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바람직하기만 한 것인지에 대한 깊이있는 설명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일례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IMF 경제위기와 세계화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깊이있고 명쾌한 설명은 그동안 매우 드물었던 게 사실이다.

    이 글은 미국의 저명한 계간학술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최근호에 실린 ‘세계화 논쟁(Dueling Globalizations)’을 전문 번역한 것이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외신담당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프리드먼과 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띠끄’의 편집자인 이그나시오 라모네가 각각 세계화의 찬반 양측 주장을 대변하면서 치열한 논전을 벌이는 이 글을 통해서 독자들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화에 대해 한결 깊이있는 이해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

    [ 세계화가 가져온 새 체체, DOScapital ]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외신담당 칼럼니스트)

    범 법행위에 대한 기소기한법(起訴期限法)이 있다면 국제관계를 특징짓는 상투적인 표현에도 기한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나는 ‘냉전 이후의 세계’는 이미 끝났다고 선언한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냉전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동안 세상의 실체를 잘못 인식해온 탓에 잘못된 정의를 내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계화’라는 새로운 국제체제가 냉전을 대신해서 등장했음이 확연해졌다.

    그렇다. 바로 세계화다. 시장과 자본, 그리고 기술이 통합됨으로써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인류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더 멀리,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싼 비용으로 세계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화는 단순히 경제분야에서만 진행되는 조류가 아니다. 반짝했다가 사라지고 마는 일시적인 유행 또한 아니다. 지금까지 등장했다가 사라졌던 모든 국제체제가 그랬듯이 세계화는 모든 나라의 국내정치, 경제정책과 대외관계를 직접, 간접으로 좌우하는 것이다.

    장벽과 통합

    국제체제로서의 냉전은 나름대로 힘의 구도를 갖추고 있었다. 각자의 동맹국을 포함한 미국과 소련 양 진영 사이의 균형이 그것이었다. 냉전체제에는 미·소 어느 강대국도 대외관계에 있어서 상대방 영향력의 중심 영역은 건드리지는 않는다는 나름의 규칙도 있었다. 냉전체제하에서 저개발국가들은 자국의 국가산업을 일으키는 데에 전념했고, 개발도상국은 수출주도 성장, 공산권 국가들은 자급자족 경제, 그리고 서방진영은 통제 무역에 전념했다.

    냉전시절을 지배했던 사상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과 동서(東西) 화해, 비동맹주의,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 등이었다. ‘철의 장막’ 때문에 공산진영에서 자본주의 진영으로의 인구이동은 거의 얼어붙다시피 했고, 가난한 남(南)으로부터 개발된 북(北)으로의 인구이동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기술 면에서는 핵무기와 제2차 산업혁명이 냉전시대를 상징했지만, 많은 개도국에서는 아직도 망치와 낫이 널리 쓰였다. 냉전체제를 규정하는 또 한 가지로, 핵으로 인한 지구 멸망이라는 불안감을 들 수 있다. 통틀어서 볼 때, 이런 냉전체제는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을 좌지우지했다.

    오늘날의 세계화 체제는 냉전체제와는 아주 다른 속성과 법칙, 동기와 특징을 보여주지만 냉전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냉전시대의 특징은 한마디로 분단이었다. 세계는 조각 조각이 나서 분단국끼리 서로 위협도 하고 기회를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냉전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장벽’이었다.

    반면에 세계화 체제는 한마디로 통합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 한 나라가 마주치는 위협과 기회는 그 나라와 ‘접속’된 나라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흔해지고 있다. 세계화 체제를 상징하는 심벌은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다. 이렇게 볼 때 세계는 장벽을 중심으로 했던 체제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체제로 이전한 셈이다.

    한 나라가 일단 세계화라는 체제 속으로 뛰어들면, 그 나라 엘리트들은 통합이라는 개념을 체질화하고는 지구촌 울타리 안에 머물고자 노력한다. 1998년 여름 필자는 암만을 방문해서 요르단의 유명 정치 칼럼니스트인 친구를 만나 “요즘 뭐 재미있는 일 없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CNN 세계 일기예보에 요르단이 막 포함됐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CNN처럼 세계화된 사고방식을 가진 기관이 암만의 날씨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요르단으로서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요르단 사람들은 자신이 지구촌의 중요한 성원이라 느끼게 됐고, 더 많은 관광객과 세계적인 투자가들이 요르단을 방문해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를 만난 다음 날, 필자는 이스라엘 은행 총재인 야콥 프렝켈을 인터뷰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자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종전에 거시경제학을 거론할 때는 각국의 국내 시장, 국내 재무구조, 그리고 이들의 상호 관련성을 분석하는 데에서 시작해 추후 고려사항으로 국제 경제를 살펴보았다. 국내 영업이 주된 관심사였고 여력이 있을 때 해외로 눈을 돌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역전됐다. 이제는 어떤 상품을 생산할까 결정한 뒤에 어느 시장으로 수출할까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국제시장을 먼저 연구한 뒤에 어떤 상품을 생산할지를 결정한다.”

    컴퓨터화, 소형화, 디지털화, 위성통신, 광섬유, 그리고 인터넷 등과 같이 세계화를 대표하는 기술들은 통합을 촉진했다. 그리고 그 통합이 이제는 냉전체제와 세계화체제 간에 많은 차이를 주도하게 됐다.

    케인스와 슘페터, 스모와 100m 경주

    냉전체제와는 달리 세계화에는 특유의 문화가 있다. 이 때문에 통합은 동질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문화적 동질성은 과거에는 지역적 규모로만 형성됐다. 서유럽과 지중해 연안 지역의 로마화(化), 아랍권에 의한 중앙아시아와 중동 및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이슬람화, 소련 지배하의 동유럽과 중유럽, 그리고 유라시아 일부 지역의 러시아화를 보라.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아 세계화란 싫든 좋든 간에 빅맥(Big Macs)과 아이맥(iMacs), 그리고 미키마우스로 상징되는 미국화의 확대다.

    냉전의 척도가 중량, 특히 미사일 탄두의 중량이었다면 세계화 체제의 척도는 상거래와 여행, 통신과 기술혁신 등의 속도다. 아인슈타인의 질량과 에너지 방정식인 e=mc²이 냉전을 지배했다면, 세계화를 지배하는 공식은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씩 향상된다는 무어의 법칙이다. ‘동맹’이 냉전체제를 규정했다면, 세계화 체제를 정의하는 것은 ‘협상’이다. 틀에 박힌 세력다툼 속에서 아주 잘 아는 적에게 말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냉전 시절을 휩쓸었다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적의 신속한 변화라는 두려움, 즉 우리의 직업과 일자리, 그리고 공동체가 한순간에 미지의 경제력 혹은 기술력에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공포가 세계화 시대를 휩쓴다. 이 경제력과 기술력은 틀에 박힌 것과는 거리가 멀다.

    칼 마르크스와 존 케인스가 냉전체제를 정의한 경제학자였다면, 세계화 체제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는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와 인텔의 회장인 앤디 그로브(Andy Grove)다. 마르크스와 케인스가 자본주의에 재갈을 물리려 애쓴 데 비해서 슘페터와 그로브는 속박없는 자본주의를 주장한다.

    오스트리아의 전 재무장관이며 하버드대학 교수였던 슘페터는 1942년의 고전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의 요체를 ‘창조적 파괴’의 과정, 다시 말해 낡고 효용이 떨어지는 상품과 서비스를 새롭고 효용이 높은 것으로 끊임없이 바꿔나가는 순환과정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그로브는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는 슘페터의 통찰을 제목으로 삼은 자기 저서를 통해서 실리콘 밸리를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볼 수 있는 비즈니스의 전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로브는 오늘날 산업의 변화를 야기하는 극적 혁신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반화하는 데에 일조했다. 이런 기술혁신 덕분에 새로운 창안이 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에 쓸모없이 되거나 생필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파멸시킬 새로운 뭔가를 창안하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그들보다 한발 앞서 살아남기 위한 방도를 찾는 사람들, 다시 말해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우리를 감싸주는 보호막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마이클 만델바움 교수의 비유에 따르면, 냉전은 스모다. “엄청나게 살진 선수 두 명이 모래판에서 온갖 폼을 다 잡고, 갖가지 의례를 행하고, 잔뜩 별렀다는 듯 발을 쿵쿵 찍어대지만, 상대방을 모래판 밖으로 밀어내 씨름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별다른 몸싸움도 없고, 어느 한 쪽이 죽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세계화 체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100m 달리기라고 할 수 있다. 몇 번을 이겼느냐와는 상관없이 다음 날이면 다시 경기에 나서야 하고, 100분의 1초를 뒤지나 1시간을 뒤지나 진 것은 마찬가지다.

    세계화시대의 ‘힘의 구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화는 나름대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힘의 구조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힘의 구조는 냉전시보다 훨씬 복잡하다. 냉전은 단지 민족국가 사이의 관계였고, 양대 진영을 중심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반해 세계화 체제는 서로 중첩되고 상호 영향을 주는 3개의 균형 위에 정립했다.

    첫째, 민족국가들 사이의 전통적 균형이다. 세계화 체제하에서도 민족국가 사이의 균형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 균형은 지금도 중동에서의 이라크 봉쇄나 러시아에 대비해 나토를 중유럽까지 확대하는 등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뉴스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다.

    둘째, 민족국가와 세계시장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세계시장은 마우스를 한번 클릭만 하면 자본을 세계 곳곳으로 이동시키는 수백만 투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필자는 이 투자자들을 ‘전자적 무리 (Electronic herd)’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은 소위 ‘슈퍼마켓’이라고 일컫는 프랑크푸르트, 홍콩, 런던, 그리고 뉴욕 등 세계 금융의 중심지에 몰려 있다. 미국은 폭탄을 투하해 우리를 파괴할 수 있지만 이 슈퍼마켓들은 당신네 채권의 신용을 평가절하 해버려서 당신을 파괴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을 누가 축출했는가? 그건 강대국이 아니라 이들 슈퍼마켓이었다.

    세계화체제의 세번째 균형은 개인과 민족국가 사이의 균형이다. 이 균형은 세계화의 세 균형 중에서 가장 새로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는 그동안 사람들의 이동과 접근을 제한했던 많은 장벽을 무너뜨렸고 동시에 세상을 네트워크로 연결했기 때문에, 개인들은 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직접적인 힘을 갖게 됐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에는 강대국, 슈퍼마켓들뿐만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개인들도 존재하는 셈이다. 초능력을 가진 개인들 중에는 분노에 떠는 자도 있을 것이고 아주 건설적인 이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들 모두가 정부나 기업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 세계무대에서 직접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디 윌리엄스는 지뢰를 금지하는 국제운동을 벌인 공헌으로 199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녀는 강력한 여러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로부터 별다른 도움도 없이 지뢰 금지에 호응하는 국제 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세계 6대주에 걸쳐 있는 1000여 인권 및 군축관련 단체를 조직한 그녀만의 비밀무기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전자우편이다.

    조디 윌리엄스와는 다른 경우로, 1993년 2월26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폭탄을 터뜨린 장본인인 램지 아메드 유세프는 전형적인 ‘분노에 가득 찬 초능력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그의 계획은 무엇이고 그의 사상은 무엇이었나? 그는 미국에 있는 최고층 빌딩 중 2개를 날려버리기로 작정했다. 뉴욕 브루클린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뉴저지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려고 했을까? 아니다. 그는 단지 미국에 있는 최고층 빌딩 중 2개를 날려버리기로 작정했을 뿐이다. 그는 맨해튼에 있는 연방지방법원 증언에서, 자신의 목적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 중 하나를 폭파해 다른 쪽 건물을 덮치게 함으로써 시민 25만명을 살해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전지전능한 이슬람 사회로 전파되는 미국의 메시지를 찢어발긴다는 것 외에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없었다.

    결국 세계화(다시 말해 미국화)는 그에게 영향을 끼침과 동시에 미국화에 대항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마음먹은 그에게 힘을 준 것이다. 미국 정부가 발표한 유세프의 음모 대부분(1993년의 세계무역센터 폭파 시도 외에 1995년에는 아시아에서 10대가 넘는 미국 여객기를 폭파하려고 계획했다)은 그의 컴퓨터 파일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 흰색 계열의 도시바 랩톱 컴퓨터는 그가 검거되기 직전인 1995년 1월 필리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도주할 때 버리고 간 것을 경찰이 회수했다. 수사관들이 유세프의 랩톱 파일을 분석해보니 비행 일정표와 공범들의 사진이 포함된 신상서류가 담겨 있었다. 자신의 모든 계획을 도시바 랩톱의 C 드라이브에 차곡차곡 챙겨두다니 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 행동인가? 그렇다고는 해도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분노에 떠는 초능력자들이 있고, 이들은 미국과 세계화 체제의 안정에 위협 세력이 되고 있다. 램지 유세프가 초능력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에서는 누구라도 램지 유세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더 이상 혼란스럽고 사리에 맞지 않는 ‘냉전 이후 세계’에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세계화라고 정의해야 할 나름의 법칙과 특성을 가진 새로운 국제체제 속에 살고 있다. 이 체제가 어떻게 기능할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사실 냉전에 빗대 보면, 지금의 세계화 체제는 1946년 정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계화 체제가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해 이해하는 수준은 처칠이 ‘철의 장막’ 연설을 했던 1946년에 냉전체제가 어떻게 돌아갈지 이해했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새로운 체제가 부상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분석하고, 우리 나름대로 이 새로운 체제에 이름을 붙여줄 때가 됐다.

    나는 이를 ‘DOScapital’(이 글의 필자인 프리드먼의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중 제7장의 제목이다. - 역주)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그나시오 라모네(르몽드 디플로마띠끄 편집장)

    세계화가 20세기 말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임은 최소한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토마스 프리드먼이 지적하지 않아도 이를 모를 사람은 없다. 1980년대 말 이후 많은 사람이 세계화를 해부하고 성격을 규정했으며 세계화가 무엇인지 묘사해왔다. 프리드먼의 색다른 점이라면 세계화와 냉전을 두동강내는 이분법을 시도했다는 점인데, 이런 이분법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프리드먼은 이를 상반되며 상호 대체할 수 있는 ‘체제’로 보고 있다. 그는 이 주먹구구식의 지나친 단순화를 반복해서 우리 신경을 거스른다.

    냉전과 세계화가 이 시대의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해서 둘 다 체제라고 부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체제라는 것은 이 세계에 실재하는 논리적 틀을 제공하는 관행과 제도의 집합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냉전은 체제라 부를 수 없는데도 프리드먼은 냉전을 체제라고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냉전’이라는 용어는 언론이 만들어낸 말로 지정학적, 그리고 지략학적(地略學的. geostrategic) 이해관계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고려되던 현대사의 한 시대(1946∼1989)를 지칭한다. 하지만 냉전만 가지고는 다국적기업의 팽창, 항공운송의 발달, 국제연합(UN)의 범세계적 확대,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 남아공의 인종차별, 환경보호론의 대두, 컴퓨터나 유전공학 등 하이테크 산업의 발달 등 냉전과는 관계없이 동일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다른 사건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일이 있다.

    게다가 서방진영과 소련 사이의 긴장은, 프리드먼이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냉전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실 바로 그 긴장이야말로 민주국가들이 1920년대 이탈리아의 파시즘,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이후 재무장한 독일, 그리고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스페인 내전을 이해하는 틀이 됐다.

    세계화가 체제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프리드먼에게도 일리가 있다. 기술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이 괴물은 모든 것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한 단계 한 단계 몰아넣는다. 그런데 프리드먼은 세계화를 마치 디즈니 만화의 줄거리처럼 미화하고 있다. 프리드먼이 고운 눈으로 보는 이 혼돈은 인류 전체로서는 곱게 봐줄 여지가 없다.

    프리드먼은 오늘날 모든 것이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는 동시에 상충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는 또 세계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생태학 분야에서 현재 진행하는 모든 흐름과 현상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파악한다. 하지만 그는 각 민족, 종교, 그리고 인종집단 중에는 세계통합과 획일화에 극구 반대하는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화가 통합과 분열이라는 상반되는 두 역학을 이 세계에 강요하고 있음을 프리드먼은 파악할 능력이 없는 듯하다. 한편으론 많은 국가들이 동맹국을 찾아 나선다. 이들은 다른 나라들과 연합을 통해 수의 우위 혹은 안전을 보장하는 국제기구 - 특히 경제기구 - 의 조직을 추구한다. EU와 같이 아시아, 동유럽, 북아프리카, 북미와 남미의 국가들이 정치 및 안보동맹을 강화하면서 자유무역협정을 조인하고 교역증진을 위해 관세 장벽을 낮추고 있다.

    그러나 이런 통합의 이면에서 몇몇 다국적 공동체는 분열의 희생양이 되어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내분으로 갈라서는 길을 걷기도 해 이웃 나라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동유럽 진영이었던 3개의 연방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갈라져 22개의 독립국가가 탄생했다. 가위 여섯번째 대륙이다.

    세계화의 정치적인 영향은 끔찍하다고 밖엔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세계화가 파열을 일으켜 세계 도처에서 옛 상처가 도지고 있다. 국경분쟁이 심해지고 소수민 거주지는 합방과 분리, 그리고 인종청소의 유혹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발칸과 코카서스 지방에서는 이 긴장상태로 인해 전쟁의 봇물이 터졌다. 아브카지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 몰도바, 나고르노-카라바흐, 슬로베니아, 그리고 남(南)오세티아 사태가 그런 예들이다.

    사회적인 영향도 별반 나은 것이 없다. 가속일로에 있던 세계화는 1980년대에 대처 영국 총리와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인정사정없는 신자유주의(ultraliberalism)와 맞아떨어지게 됐고, 이로 인해 세계화는 심화된 불평등, 급증하는 실업, 탈산업화, 열악해진 공공 서비스 및 상품의 질 등과 동의어로 인식됐다.

    오늘날 사건사고, 불확실성과 혼돈은 세계화 진행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됐다. 오늘날 우리에게 세계화는 어떤 상태로 다가오는가? 빈곤과 문맹, 폭력과 질병이 증가일로에 있다. 세계 인구의 최부유층 5분의 1이 자원의 80%를 점유한 반면에 최빈곤층 5분의 1은 0.5%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세계인구 59억명 중에서 고작 5억명만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45억 명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EU 역내에서조차 1600만명이 일자리가 없으며, 5000만명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 최고 갑부 358명의 재산을 모두 합하면 세계 최빈층 45%, 즉 26억명의 1년치 벌이와 맞먹는다. 이것이 세계화된 멋진 신세계의 자화상이다.

    독단에 빠지지 말자

    세계화는 인간이나 인간의 진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관계가 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금전과 관계가 있다. 신속한 이윤회수라는 한 가닥 욕심에 눈먼 세계화의 앞잡이들은 앞날에 대한 배려, 인류나 환경을 위한 수요예측, 팽창하는 도시에 대한 대비, 그리고 점차 개선해야 할 불평등과 치유해야 할 우리 사회의 상처 등에는 눈길도 줄줄 모른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이런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과 거시경제학적 성장이 모두 해결해줄 것인데, 이런 주장은 프랑스 사람들이 유일사고(唯一思考; pensee unique)라고 부르는 해괴망측하고 위험한 논리다. 유일사고 혹은 영어식 표기로 ‘single thought’라 함은 경제에 있어 특정 집단의 이해만 대변하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는 특히 자본의 국경 없는 자유 이동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거만한 유일사고는 이제 극에 달해 현대판 독단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 사악한 논리는 마치 암세포처럼 아무도 모르게 반대측 논리를 둘러싸고는 그 반대 논리를 기죽이고 교란하고 마비시켜, 끝내는 없애버린다. 이 유일사고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침투하지 않는 곳이 없는 여론경찰(opinion police)이 공인한 유일무이의 논리다.

    이 유일사고는 1944년 브레턴 우즈 협정과 함께 등장했다. 프랑스은행, 독일의 분데스방크, 유럽공동체, 국제금융기구(IMF),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세계 유수의 경제촵금융기구들이 이 교리를 만들어내고는, 그들의 두둑한 주머니를 털어서 세계 도처의 연구기관, 대학, 학술재단이 이 복음을 퍼뜨리도록 부추겼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대학의 경제학부, 프리드먼과 같은 언론인, 작가, 정치 지도자들이 이 새로운 원칙의 요점을 언론매체를 통해서 목이 터져라 선전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의 교리는 투자자들이나 주식중개인들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이코노미스트’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로이터 통신 ‘월 스트리트 저널’ 등의 경제정보 전달자들이 말 한마디 바꾸지 않고 메아리를 넣어준다. 이들 경제매체는 대부분 산업계와 재계의 대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무엇을 믿으라고 우리를 몰아세우는 것일까? 경제가 정치에 우선한다는 이들의 근본 원칙은 아주 강렬한 것이어서 마르크스주의자조차 아차 하면 넘어갈 수밖에 없다. 혹은 작가 알랭 맹(프랑스의 경제평론가. 1949년 파리生. 저서에 ‘유럽통합에의 환상: 더 넓은 공동체에서의 비즈니스’ 와 ‘미래의 도전’ 등이 있다. - 역주)의 말을 빌리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시장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회적 과속방지턱이나 ‘비효율’이 없는 경제만이 후퇴나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 유일 사고의 나머지 주요 계명들은 위의 근본 원칙에서 파생한다. 예를 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역기능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시장 중에서도 특히 자본시장의 “지표가 경제의 전반적인 동향을 예고하고 결정짓는다.” 경쟁과 경쟁력은 “비즈니스를 자극하고 발전시켜 유익한 현대화의 장으로 나아가게 한다.” 장벽 없는 자유무역은 “교역의 무제한적인 발전 요소가 되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무궁한 발전을 가져온다.” 제조업과 자본 이동의 세계화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려해야 한다. 노동의 국제분업화는 “노동 수요의 집중을 완화하며 노동비용을 줄여준다.” 강력한 구매력을 가진 통화는 필수 사항이다. 규제완화와 공공기업의 민영화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필수불가결함을 강조한다. 늘 ‘국가기능의 최소화’를 부르짖고, 자본가의 이해를 편들고 노동계층의 피해는 외면한다. 환경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후안무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좌파와 우파를 불문하고 언론에서 이런 식의 교리문답을 계속해서 읊어대니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제3의 길’과 ‘신중도파’를 보라) 자유로운 사고는 공포에 질려 싹도 트지 못하고 만다.

    큰손과 낙오자

    세계화는 두 개의 버팀목 혹은 패러다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두 패러다임은 프리드먼과 같은 세계화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첫번째 버팀목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게이션은 지난 2세기 동안의 주된 견인차였던 ‘진보’의 자리를 조금씩 더 차지하고 들어앉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학교건 기업체건, 가정에나 정부에나 이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지상 명령만 있다.

    두번째 버팀목은 시장이다. 시장은 사회 구성원간의 ‘결합’을 대체하고 있다. 사회적 결합이란 민주사회는 마치 시계처럼 기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시계에는 쓸모없는 부품은 없고 모든 부품이 힘을 합해 돌아간다. 이 18세기를 대표하는 기계에서 현대판 경제 및 금융의 밑그림이 나온다. 이제부터는 ‘시장이라는 지배세력’의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이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가치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넝쿨째 굴러오는 이윤, 능률, 그리고 경쟁력이다.

    이 시장에 의해서 지배되는 상호 연결된 세계에서는 최강자만이 살아남는다. 삶은 약육강식의 싸움이다. 끝없는 경쟁, 자연선택, 그리고 적응을 강조하는 경제적·사회적 진화론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몰아붙인다. 이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 개인은 “용해되는가” 혹은 “용해되지 않는가”로 나뉜다. 다시 말하면 시장에 통합되는가 아닌가이다. 시장은 용해되는 사람들에게만 바람막이가 돼준다. 인간적인 유대가 더 이상 지상과제가 아닌 이런 신질서 속에 나머지는 낙오자가 되고 소외된다.

    세계화 덕분에 세계적이고 영구적이며 직접적이고 비물질적인 네 가지 주요 속성을 가진 행위만이 번창한다. 이 네 속성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속성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세계화는 복종과 믿음, 숭배와 새로운 의식(儀式)을 강요하는 일종의 현대판 신격(神格)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진선미(眞善美)와 정의(正義)를 시장이 규정한다. 시장의 ‘법칙’은 새로운 숭배 대상이다.

    이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면 쇠락하리라고 프리드먼은 경고한다. 따라서 이 ‘새 믿음’의 다른 선교자들처럼 프리드먼은 경제문제, 나아가 궁극적으로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로지 신자유주의 밖에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려 하고 있다. 프리드먼에게 정치는 사실은 경제요, 경제는 금융이며, 금융은 시장이다. 볼셰비키들은 “모든 힘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프리드먼과 같은 세계화 지지자들은 “모든 힘을 시장으로”라고 요구한다. 이 주장은 아주 독단적이어서 이제 세계화는 교리와 사제를 갖춘 하나의 새로운 전체주의가 돼버렸다.

    토머스 프리드먼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도전적이고 감정이 섞인 반(反)세계화론에도 군데군데 일리는 있다. 이에 대해 나름대로 대꾸해보겠다.

    라모네는 냉전이 국제체제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나는 이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1946년부터 1989년까지 벌어진 모든 일, 예를 들어 항공운송이나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냉전이 국제체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제체제라고 해서 어떤 특정 기간에 일어난 모든 일을 설명할 수는 없다. 국제체제라 함은 다른 무엇보다도 더 많은 나라와 지역의 국내 정치나 국제관계 형성에 영향을 주는 지배적인 사상, 힘의 구조, 그리고 경제 유형이나 법칙의 총합을 말하는 것이다.

    냉전은 이런 정의에 꼭맞는 국제체제이며 프랑스는 독특하게도, 양대 진영을 잇는 건설적인 교량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제 이 옛질서가 사라졌으니 프랑스는 오늘날의 세계화 체제 안에서 전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틈새를 찾고 있음에 틀림없다. 냉전 때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이 새로운 체제와 관련해 자국의 위상을 정리해야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띠끄’의 지면에서 읽을 수 있는 세계화에 대한 강박관념은 프랑스가 실제로 이런 위상 정리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햄버거와 코소보

    라모네는 내가 “각 민족, 종교, 그리고 인종집단 중에는 … 세계화에 극구 반대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의 졸저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는 다섯 장이나 할애해서 이러한 반대 기류를 서술했다. 이 책의 마지막 바로 전 장은 내가 왜 세계화를 되돌이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세계화에 대한 주요 위협 요인으로 아래 다섯 가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 세계화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한마디로 “너무 힘들게“ 느껴질지 모른다. 둘째, 세계화는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소수의 사람들이 세계 전체의 연결망을 교란할 수 있다. 셋째, 세계화는 사람들의 생활을 “심하게 침해할 수 있다.” 넷째, 세계화는 “너무 많은 이에게 너무 불공평할 수 있다.” 다섯째, 세계화는 “너무나 비인간적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세계화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이 월트 디즈니식 환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해 나는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라모네보다 더 많은 사례를 거론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했다. 세계화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라모네처럼 사람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기회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부유한 몇몇을 위한 기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테크 산업에 종사하는 인도의 방갈로르나, 타이완, 혹은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 혹은 핀란드, 중국의 해안지역, 아이다호주에 있는 근로자들에게 세계화가 어떤 기회를 가져다 주었는지를 물어보라. 그들이야말로 바로 라모네가 성토한 시장의 힘으로부터 막대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다. 이들 근로자들이 별볼일 없는 사람은 아니잖은가? 인터넷이나 세계화에 힘입은 인권이나 환경관련 비정부기구(NGO)는 또 어떤가. 이들도 별볼일 없는 이들인가? 프랑스의 트럭운전사만 중요한가?

    라모네는 내가 “세계화가 통합과 분열이라는 상반되는 두 역학을 이 세계에 강요하고 있음을 파악할 능력이 없는 듯하다”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는 내가 왜 내 책의 제목을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라고 정했다고 생각하는가? 이 제목은 올리브 나무로 대표되는 공동체, 국가, 가족, 종족, 정체성(正體性)이라는 옛 가치와, 이들이 오늘날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는 세계화라는 경제적 압력이라는 갓 태어난 것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렉서스라는 자동차가 이 신생아를 대표한다. 몇 세대를 거쳐온 이 옛 가치들은 세계화와 충돌하기도 하고, 세계화에 기가 죽기도 하고, 세계화를 물리치기도 하고, 혹은 세계화와 균형을 맞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세계화 체제가 현재로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 올리브 나무의 가치관을 압도하고 있다는 나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는 있다. 많은 평론가들은 맥도날드를 먹는 나라들끼리는 서로 싸운 적이 없다는 나의 소견이 빗나간 것임을 코소보의 예를 들어가며 지적했다. 그러나 이 지적 또한 옳지 않다. 코소보는 어느 한 순간은 유일한 예외였지만 결국 나의 법칙을 입증해주었다. 공군력이 어떻게 발칸전쟁을 발발 78일 만에 종지부를 찍었을까? 나토의 공습이 세르비아의 탱크와 병력을 코소보 외곽으로 몰아냈기 때문일까? 결코 아니다. 공군력만으로 종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나토가 현대 유럽식 도시이며 시민 대다수가 유럽과 세계화의 일원으로 통합되기를 바라는 베오그라드의 발전소와 수도시설, 교량, 그리고 경제 인프라를 폭격했기 때문이다.

    전쟁에 이긴 것은 베오그라드의 도시계획에서지 코소보의 참호에서가 아니다. 전쟁이 끝나자 베오그라드 시내에서 가장 먼저 정상을 찾은 곳은 맥도날드 매장이었다. 결국 세르비아인들이 원한 것은 햄버거였지 코소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장은 괴물이 아니다

    라모네는 세계화에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프랑스 지성인들이 흔히 빠져드는 덫에 걸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세계화를 혐오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약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세계화를 고수할 각오가 돼 있음을 알고는 경악한다. 미안하지만 라모네 선생, 당신과 프란츠 파농(Franz Fanon: 1925년생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철학자. 북아프리카에서 의료활동중 프랑스·알제리 전쟁이 발발하자 알제리 혁명군을 지지해 이들을 조직하는 데에 일조했다. 폭력적인 흑인인권운동을 비롯해 자신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The Wretched of the Earth)’, 즉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한 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 역주)을 존경하는 마음은 굴뚝 같지만,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디즈니월드를 가보고 싶어하지 장벽을 보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디즈니의 요술궁전을 원하지 ‘레 미제라블’을 원하지 않습니다. 물어보나마나입니다.

    마지막으로, 라모네는 내가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이 세계화에서 파생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했다는데, 그런 사고방식은 제쳐 놓더라도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인용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하다. 그 말은 내가 쓴 글에서 인용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나는 내 책의 마지막 장 전체를 할애해 세계화를 ‘민주화’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특히 미국정부가) 경제적 또 정치적으로 해야만 할 일을 거론했다.

    오늘날 시장의 힘과 ‘전자 무리’가 강력해진 탓에 이들이 때때로 정부와 경쟁을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절대적으로 ‘그렇다’다. 하지만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거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다. 라모네는 헤지펀드(hedge fund)와 고슴도치(hedgehog)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혼동이 어리석을 정도로 시장을 마수(魔獸)처럼 보게 하는 것이다. 라모네는 정부가 시장이라는 괴수 앞에 무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반론을 편 라모네의 열정에는 감사하지만, 그는 내가 세계화를 분석한 것을 마치 내가 이를 옹호하는 양 오해하고 있다. 주의깊게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내 책은 세계화를 찬양하거나 비방하려고 쓴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그 뼈대가 되는 두드러진 국제체제(내가 개발하지도 않았고 내가 중단할 능력도 없는 기술력에 의해 가동되는 체제)에 대한 보고서다.

    라모네는 세계화를 마치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여기며 은연중에 대안을 찾고자 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다. 나는 세계화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이 현실을 우선 이해하고, 그런 이해를 통하여 이 현실 속에서 무엇을 활용하고 어떻게 최악의 상황에 대처해 나갈까 살펴보고자 했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다.

    라모네에게 털어놓을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사실 프랑스 편이다. 무자비하고 획일적인 세계화의 물결로부터 프랑스 문화와 생활방식의 독창성과 장점을 잘 보존하기를 희망한다. 미국식 노선과 북한식 노선 사이에서 새로운 노선을 찾을 공간은 틀림없이 있다. 나는 프랑스가 나름의 중도노선을 찾기를 바란다. 하지만 ‘르몽드 디플로마띠끄’의 독자들은 아마도 라모네의 비평보다는 내 책 속에서 그 중도노선을 찾는 방법을 보게 될 것이다.

    불행히도 그의 독자들은 내 책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프랑스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책은 아랍어, 중국어, 독일어, 일본어, 그리고 스페인어로 나올 것이다. 주요 국가들 중에서 미국 출판업자들이 출판 계약을 하고 싶어도 출판사를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국가가 바로 프랑스다.

    [ 빅맥을 먹으라고? ]

    이그나시오 라모네

    토머스 프리드먼이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은 디즈니월드에 가고 싶어하지 장벽을 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다니 정말 가슴이 뭉클하다. 이는 1789년 파리 시민들이 빵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하고 헛소리한 마리 앙뜨와네뜨의 말에 버금가는 발언이라고 하겠다.

    프리드먼 선생,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행한 1999년판 인간개발보고서를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전 인류의 4분의 1에 달하는 13억명의 인구가 하루에 1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연명합니다. 디즈니월드에 간다고 해서 이들이 기분 나쁠 이유는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이들이 바라는 것은 잘 먹고, 보기 흉하지 않은 집과 의복을 갖고, 더 나은 교육을 받고 일자리를 갖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수백만의 사람이(이들의 수는 매일 매일 늘어납니다) 장벽을 치고 폭력에 호소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프리드먼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이런 식의 해결책에 대해서는 통탄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현명하게 대처한다면 그런 사태는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을 위해서 세계의 부를 극소량만이라도 할당해주면 어디 병 날까? 이 부의 1%만이라도 불우한 형제들을 위해 20년간 꾸준히 배정한다면 끔찍한 고통은 사라질 것이고, 이와 더불어 고질적인 폭력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성의 시대에서 시장의 시대로

    하지만 프리드먼도 알다시피 세계화는 이런 배려에는 눈멀고 귀먹었다. 세계화는 오히려 사회의 차별, 분열, 그리고 극단화를 악화시키고만 있다. 세계화 이전인 1960년에 세계 인구의 최부유층 20%는 최빈곤층 20%의 30배에 달하는 부를 가졌었다. 그러나 세계화가 극에 달한 1997년에 그 격차는 74배에 달했고, 이는 매일 더 크게 벌어지고만 있다. 인구 6억명을 포함하는 세계 전체 저개발국가들의 국민총생산(GNP)을 모두 합해봐야 세계 최고 갑부 3명의 전재산에도 미치지 못한다. 프리드먼 선생, 당신은 이 6억의 주민이 디즈니월드에 가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세계화에 부정적인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화가 진행된 지난 15년 동안 세계의 절반인 80여개국에서 1인당 소득이 감소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있습니다.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서방세계가 옛 소련 경제를 위해서 자신들의 기적과도 같은 치유책(다시 말해 프리드먼 당신 같은 이들이 말하는 맥도날드 매장 설립 같은 것을 말합니다)을 공언한 이후 2억9000만명의 옛 소련 인구 중 1억5000만명이 빈곤의 나락에 빠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십니까? 프리드먼 선생, 당신이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면 세계화가 시대의 말기증세임을 아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화는 (현대의 신기술로 인한) 산업시대의 종말이며 (금융혁명으로 인한) 1차 자본주의 혁명의 종말인 동시에 18세기 철학자들이 정의한 이성(理性)에 의해 작동하는 지성시대의 종말이다. 이성은 근대 정치사상을 낳았고 미국과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국가, 사회, 산업,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근대 이성이 낳은 거의 모든 것이 큰 변화를 겪어왔다.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보아 이 전환은 큰 의미를 갖는다. 고대부터 인류는 신과 이성이라는 세상의 원칙을 바꾸는 양대 요인을 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시장이 그 지위를 이어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시장의 승리와 세계화의 득세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에 불가피한 사생결단이 벌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자본주의는 부와 경제력을 소수 집단의 수중으로 무자비하게 몰아주었다.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소수 부유층의 지배를 용인하게 하려면 얼마만큼의 부를 재분배해야 할까? 문제는, 프리드먼 선생, 시장은 이런 재분배 기능을 하지 못하리란 것입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세계화는 복지국가를 거덜내고 있으니까요.

    어찌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인류의 절반이 폭동을 일으키고 폭력을 선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프리드먼 선생, 당신의 대답은 뻔합니다. 빅맥을 주고 디즈니월드를 구경시켜주면 된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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