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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⑨

마동과 선화공주 사건은 백제와 신라의 미륵 쟁탈전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마동과 선화공주 사건은 백제와 신라의 미륵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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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백제 성왕(523∼553년)이 신라 진흥왕에게 배신당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나서 분김에 이를 응징하려고 나섰다가 도리어 국왕 이하 3만 군사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몰살하는 참변을 겪고 나서 거의 멸망 위기에까지 몰려있던 백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던 듯하니, 이 위기를 극복해낸 위덕왕(554∼597년)이 바로 이런 미륵하생신앙으로 민심을 결속시켜 국력을 키워간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일찍이 무령왕(501∼522년) 이래 백제의 군사거점이자 해양전진기지로 일종의 문화특구를 형성하고 있던 태안반도에 무령왕의 초상조각이라 생각되는 ‘예산사면석불’(제7회 도판 7)이 조성됐는데, 이 4면에 조성된 불상이 동방 약사여래·서방 아미타여래·남방 석가여래·북방 미륵여래의 4방불이라 한다면 벌써 성왕 초기부터 미륵신앙이 백제에서 싹텄다고 볼 수 있다.

위덕왕이 성왕의 초상조각으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큰 ‘태안마애삼존불’(제7회 도판 9)에서도 동향(東向)하여 쌍으로 서 있는 남쪽과 북쪽의 두 불상을 반드시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로 볼 수만도 없으니, 오히려 남쪽을 석가여래로 보고 보주(구슬 모양 지물을 반드시 약 항아리로 볼 수만은 없다. 보병으로 볼 수도 있다)를 들고 서 있는 북쪽 불상을 미륵여래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수도 있다.

이는 비참하게 전몰한 성왕의 혼백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원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현세의 여래인 석가여래로 출현한 성왕의 모습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미래불인 미륵여래로 하생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미륵불상을 병립시켰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왕(600∼640년) 초년 경에 위덕왕의 초상 조각으로 조성하였을 ‘서산마애삼존불’(제8회 도판 14)의 좌협시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과도 연계되면서, 백제의 마애불에는 하생한 미륵의 모습이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이 당시 백제의 미륵신앙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미륵상으로 보고자 한 것도 기왕의 다른 주장과 마찬가지로 불보살상 조각에 대한 일반 상식을 근거로 내세운 가설일 뿐이니, 이 가설의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방증을 찾아내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방증 자료가 될 만한 기록으로는 당나라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시조인 도선 율사(道宣, 596∼667년)가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8 독송편(讀誦篇)에 들어 있는 백제국 달나산 석혜현전(百濟國 達拏山 釋慧顯傳)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혜현(慧顯, 570∼627년)이 어려서 출가하여 ‘법화경(法華經)’을 독송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았고 삼론(三論; 中論, 百論, 十二門論을 일컬음)도 전파하였는데 처음에는 백제국 북부 수덕사(修德寺)에 머물다가 남방 달나산으로 가서 수덕사에서처럼 수행하다 돌아갔다. 달나산은 산세가 지극히 험준하여 오르기 힘들었지만 혜현은 그 가운데서 정좌하여 수행했고, 돌아간 뒤에 함께 수도하던 사람들이 시신을 석굴 속에 놓아두었더니 호랑이가 모두 먹고 오직 해골과 혀만 남겨 두었다. 혀는 3년 동안 더욱 붉고 부드러운 상태로 있었는데 그 뒤에는 자색으로 변하면서 돌같이 굳어지므로 도속(道俗; 도인과 속인)이 모두 괴이하게 생각하고 석탑에 모셨다.

혜현이 돌아가던 해가 정관(貞觀) 원년(627)인데 나이가 58세였다. 이 내용은 뒷날 고려 충렬왕 7년(1281)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년)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으면서 권5 ‘혜현구정(慧顯求靜)’조에 거의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

여기서 태안반도에 미륵신앙이 팽배해 있던 정황을 간취할 수 있으니, 혜현이 수덕사에 살면서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혜현이 살았다는 백제국 북부 수덕사는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가 분명하다.

수덕사는 ‘예산사면석불’이나 ‘서산마애삼존불’과는 가야산 줄기로 한데 이어져 있는 곳이다. 다만 수덕사가 맨 남쪽 산기슭에 있고, ‘서산마애삼존불’이 맨 북쪽 산기슭에 있으며, ‘예산사면석불’이 동쪽 산기슭에 있을 뿐이다. ‘태안마애삼존불’은 그 산줄기가 서쪽 끝으로 뻗어나가 바다와 맞닿은 곳에 있어서 가장 멀지만 역시 한구역에 있다.

그러니 혜현의 이념, 더 나아가서 혜현이 살던 수덕사 대중의 이념이 곧 이들 세 곳의 불보살상 조성에 바탕 이념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데 혜현이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삼고 이로써 사람들을 가르쳤다 하고 있다. 따라서 ‘법화경’에서 설하고 있는 불상관이 이들 불보살상 조성에 크게 작용하였으리라 생각되는데, ‘법화경’에는 그 첫머리 서품(序品)에서 벌써 미륵과 석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부각시키고 있다.

석가 세존이 법화경을 설하기 위해 백호(白毫;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 잡아다니면 길이가 한 길이나 되는데 놓으면 오른쪽으로 도르르 말려 둥글게 되고 여기서 빛을 뿜어낸다고 함. 32상 중 하나)에서 광명(光明)을 놓아 동방팔천세계와 천상과 지옥 등을 두루 비추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을 보여주자, 미륵보살은 이런 신변(神變)을 보여주는 까닭이 궁금하여 과거무량제불을 가까이 모시며 공양해온 문수보살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문수보살은 자기 생각으로 헤아려보건대 아마 큰 법을 설하려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석가 세존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한다. 과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전에 일월등명여래(日月燈明如來)라는 부처님이 나서 정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였다. 성문(聲聞;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는 이)을 구하는 자를 위해서는 4제법(四諦法)을 설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하고, 벽지불(支佛; 獨覺 혹은 緣覺이라고도 번역하며 스승 없이 홀로 깨닫는 이)을 구하는 자를 위해서는 12인연법을 설해서 그렇게 하였으며, 여러 보살(菩薩; 이미 깨달았으나 중생을 모두 깨닫게 하기 위해 성불을 보류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6바라밀(婆羅密)을 설해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즉 대각을 얻게 하였다. 그런 일월등명불이 2만 명이나 계속 나온 끝에 마지막 일월등명불 시대에 석가와 미륵이 만났다는 것이다.

마지막 일월등명불은 출가 전에 8왕자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묘광(妙光)보살에게 법화경을 배워서 성불하게 된다. 그중 막내인 법의(法意) 왕자가 연등불(然燈佛)이고 연등불의 800제자 중에 구명(求名)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는 이해(利害)에만 집착해서 여러 경전을 읽어도 항상 꿰뚫지 못했으나 착한 마음으로 무수한 부처님을 만나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하는 복덕을 짓게 된다. 그 결과 묘광보살은 금세의 석가가 되고 구명 비구는 미륵보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등불은 석가에게 장차 불타가 되리라는 사실을 수기(授記; 예언)하게 되고 석가는 미륵에게 다음 세상에 성불하게 된다고 수기한다는 내용이다.

[ 백제식 사방불 ]

이로써 법화 이념을 기반으로 불상을 조성하게 되면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위로는 연등불, 아래로는 미륵불로 이어지는 삼세여래 조성이 가능하게 된다. 미륵하생을 희구하는 당시 백제 사회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하생한 미륵을 어느 불보살상 구도에서나 반드시 포함시키려 했을 듯하다. 그래서 중국의 음양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아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 오방불(五方佛)의 개념으로 출현했을 사방불(四方佛) 개념도 백제에서는 대담하게 파괴하여 백제식 사방불을 설정했던 듯하다.

북량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금광명경(金光明經)’(414∼426년 번역) 권1과 동진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불설관불삼매해경(佛說觀佛三昧海經)’(421년 번역) 권9 등에서는 사방 불국토의 주재불을 동방 아촉불(阿佛), 남방 보상불(寶相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이라 하고 있다. 중앙에 석가불이 있다는 전제 아래 설정된 이름이다. 그래서 사실 중국에서는 동위 효정제(孝靜帝) 천평(天平) 2년(535)에 조성한 하남성 등봉현 소림사(少林寺) 소장 4면 비상(碑像)에 다음과 같은 명문을 남기기도 한다.

‘남방 보상여래, 동방 아촉, 북방 미묘성불, 최진(崔進)이 집안을 합쳐 만들다. 서방 무량수(南方寶相如來, 東方阿, 北方微妙聲佛, 崔進合家 西方無量壽)’

그러나 백제에서는 이런 중국풍의 사방불 설정을 무시하고 구마라습 번역의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402년 번역)에서 서방 아미타를 이끌어내고, 동진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 번역의 ‘불설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佛說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 즉 ‘관정경(灌頂經)’ 권12(317∼322년 번역)에서 동방 약사유리광여래를 도출해낸 다음 석가여래는 남방 인도에서 출현하였으므로 남방에 위치시키고, 미륵의 하생은 백제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여 북방에 배치한 모양이다.

그래서 ‘예산사면석불’에서부터 그런 배치를 한 듯하다.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최초로 지어준 일본 대판(大阪)의 사천왕사(四天王寺; 593년 건립)와 내량(奈良) 원흥사(元興寺; 593년 건립)의 5중탑 안에 모신 사방불이 동방약사, 서방미타, 남방석가, 북방미륵으로 되어 있고 역시 백제 유민들이 지었을 내량 흥복사(興福寺) 5중탑(730년 건립) 안의 사방불 역시 그와 같은 배치를 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용화낭도(龍花郎徒)의 등장 ]

이처럼 백제가 자기 국토에서 미륵의 출현을 확신하며 이런 신앙을 통해 민심을 결집하여 국난을 극복해가자, 승승장구로 국토를 확장해놓고 이를 지키느라 힘겨워하던 신라에서도 미륵하생신앙을 통해 소년 용사들을 길러 확장한 영토를 결사적으로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진흥왕이 최대로 확장해 놓은 북쪽 영토의 국경 지대를 돌아보고 이원의 마운령과 함흥의 황초령 및 서울의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짓는 진흥왕 29년(568) 이후부터 이런 일이 진행된 듯하니, ‘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조의 내용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진흥왕은 법흥왕을 이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절을 일으키고 사람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그런데 진흥왕은 천성이 풍류를 좋아하고 신선도 숭상하여 처녀 중에 아름다운 이를 뽑아서 원화(原花)로 받들고 무리를 모으고, 선비를 가려뽑아 효제충신(孝悌忠信;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친구간에 믿음이 있음)을 가르치게 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기틀로 삼으려 하였다.

원화는 근원이 되는 용화수(龍花樹)라는 의미이니 곧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그곳에서 3회(會) 설법을 통해 96억과 94억, 92억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대중을 해탈시키는 능력을 가진 미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원화를 소년으로 하지 않고 미소녀로 한 것은 이미 중국에서 미륵보살이 여성화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졌기 때문인 듯하다.

처음에 남모(南毛)와 교정(貞) 두 낭자를 원화로 뽑아 각각 300~400명의 소년 낭도(郎徒)를 거느리게 한 모양이다. 그런데 교정이 남모를 질투하여 취하도록 술을 먹인 다음 북천 가운데로 들어다 놓고 돌을 덮어 죽이니 남모의 낭도들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교정을 죽이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이에 진흥왕은 일시 원화제도를 폐지하나 결국 국토 방위를 위해 소년 군단의 창설이 절대 필요하게 되자 다시 양가집 아들로 덕이 있는 미소년을 뽑아 원화를 대신하게 하고 이를 화랑(花郞)이라 하게 되었는데, 최초의 국선(國仙)으로 받들어진 화랑이 설원랑(薛原郞)이었다. 이것이 화랑과 국선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조에도 대강 비슷하게 실려 있다. 다만 교정(貞)을 준정(俊貞)이라 하고 두 처녀가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모를 집으로 끌어들여 억지로 술을 먹이고 취하자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 뒤에 다시 용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데려다가 꾸며서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가 구름 모이듯 하여 혹은 도의(道義)로 서로 갈고 닦으며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과 물을 찾아 노닐어 멀리 가지 않는 데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사람됨이 그르고 바른 것을 알게 되니 그 착한 이를 가려서 조정에 천거하였다”라고 한 내용은 ‘삼국유사’와 다를 바 없다.

[ 원화제도와 진골 귀족 ]

그런데 이런 내용으로 보면 진흥왕이 원화제도를 폐지한 다음 미소년으로 원화를 대신해 화랑을 세운 것으로 돼 있어, 원화제도가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제8회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진흥왕의 증손녀대에 가서 선덕여왕(632∼646년)과 진덕여왕(647∼653년)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면 이 원화제도는 그대로 존속한 듯하다.

말하자면 진평왕(579∼631년)대에 왕녀나 왕손녀 등 진흥왕 혈통을 이어받은 진골 귀족의 딸들이 원화를 맡은 듯하다. 특히 진흥왕이 백정반이라 이름지어 석가여래의 부친처럼 되어줄 것을 기원했던 진평왕과 그 왕비 마야부인 김씨 사이에 출생한 공주들 중에서 선출된 원화는 미륵보살의 화신 노릇을 하다가 왕위에 나가야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원화로 뽑힌 왕녀나 왕손녀들은 평생 출가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에게서 소생이나 부군 등 가정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규정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선덕여왕의 둘째 여동생인 천명(天明) 부인은 진지왕의 아들인 당숙 용수(龍樹, 570년대∼645년경)에게 출가하여 태종 무열왕 김춘추(金春秋, 604∼661년)를 낳았다. 그러므로 만약 진평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어 여왕을 세울 지경이었으면 진지왕과 진평왕의 내외손으로서 혈통이 가장 순수한 김춘추가 바로 왕이 되거나 그 부친 용수 이찬이 진지왕의 왕자이며 진평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나갔어야 한다. 그런데도 선덕여왕에게 그 왕위가 물려진 것이다. 더구나 선덕여왕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선덕여왕에게는 친아우인 천명부인이나 제랑(弟郞)인 용수, 조카인 춘추를 제쳐놓고 사촌 아우인 진덕여왕에게 또다시 왕위가 넘어간다.

이로 보아 미륵의 화신인 원화에게 왕위가 계승되는 제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진덕여왕이 돌아가고 김춘추에게 왕위가 계승되는 것은 아마 미륵보살의 출현이 필요없게 된 사회 상황의 변화와 당나라와 자주 접촉해 가부장적인 유교 윤리 강령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결과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륵하생 신앙이 백제에서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뒤따라 모방하려 한 신라에서는 초기에 백제로부터 하생한 미륵을 모셔오는 형식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삼국유사’ 권3 미시랑 진자사조의 내용이다. 그 대강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진지왕(眞智王, 576∼578년)대에 흥륜사 승려인 진자(眞慈)가 매양 미륵당에 들어가 당주인 미륵상 앞에서 발원하여 맹세하기를 이렇게 하였다.

“원컨대 우리 대성(미륵)께서 화랑(花郞)으로 변화를 지으시어 세상에 출현하소서. 저는 항상 거룩한 모습을 곁에서 가까이 모시며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비는 마음이 날로 깊어지더니 어느날 밤 꿈에 어떤 승려가 나와 “네가 웅천(熊川, 현재 공주)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 선화(仙花)를 볼 수 있으리라”하고 말한다. 진자가 꿈에서 깨어나 몹시 기뻐하며 그 절에 도착하니 문밖에 한 소년이 있는데 흠 잡을 데 없이 잘생겼다. 그런데 그가 반가이 맞이하며 샛문으로 이끌어들여 객실로 맞아들인다. 진자가 방으로 올라와 읍하며 말하기를 “낭군을 예전에 알지 못했는데 어찌 이렇게 정답게 대접하시오”하자 소년은 “나도 또한 서울사람입니다. 대사가 먼길을 찾아오셨기에 오신 것을 위로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조금 있다 문으로 나갔는데 소재를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우연일 뿐이라 말하며 그것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 절 승려와 더불어 지난 날의 꿈과 오게 된 뜻을 말하고 잠시 아랫자리에서 지내며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이 절 승려들은 그 정열이 솟구치는 모습에 탄복하고 그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이웃에 천산(千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부터 어진이들이 머물러 살며 그윽하게 감응하는 바가 많다고 하니 어찌 저곳으로 가서 살지 않겠는가.” 진자가 이 말을 좇아 산 밑에 이르니 산신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며 “무엇하러 여기에 왔는가”하고 묻는다. “원컨대 미륵선화를 뵙고자 할 뿐입니다”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접때 수원사 문앞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을 터인데 다시 와서 무엇을 찾는가”라고 한다.

진자가 듣고 놀라서 땀을 흘리다가 급히 본사(흥륜사)로 돌아와 한 달쯤 지났는데 진지왕이 이를 듣고 불러다 그 연유를 묻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소년이 이미 서울 사람이라 하였고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데 어찌 성안을 찾아보지 않았느냐.” 진자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골목마다 찾아다니니 한 작은 소년이 입술이 반듯하고 눈매가 빼어난데 영묘사의 동북쪽 길가 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며 놀고 있다.

진자가 맞이하며 놀라 말하기를 “이 분이 미륵선화시다”하고 나아가 묻기를 “낭군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씨는 누구십니까”하니 소년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고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서 성을 무엇이라 하는지 모른다”라고 한다.

이에 견여(肩輿)에 태우고 왕에게 들어가 보이니 왕이 이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그러자 그 자제들을 화목하게 하고 예의로 풍속을 가르치는 것이 보통사람과 달라 풍류로 세상에 빛내기를 거의 7년 동안 하더니 홀연히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진자가 몹시 슬퍼하였으나 자비로운 혜택을 입고 맑은 교화를 직접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능히 스스로 회개할 수 있어 정성으로 도를 닦더니 만년에는 역시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위의 내용에서 신라가 백제로부터 미륵선화를 맞아오는 상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최초로 건립된 국찰로 법흥왕과 진흥왕이 출가하여 살았던 흥륜사의 승려인 진자가 백제의 구도인 공주에 있는 이름 없는 절에서 미륵선화를 찾아 모셔왔다는 사실은 신라의 미륵하생신앙이 백제보다 얼마나 더 절실하고 간절했는가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주는 확실한 증거라 하겠다. 미시랑이 본래 서울 사람이라 한 것은 미륵이 신라 서울 경주에서 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으니, 백제의 미륵하생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종당에는 신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의미의 표출인 듯하다.

진지왕에 의해 국선으로 세워진 미시랑이 7년 동안 국선의 자리에 있다가 종적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진평왕 초에 새로운 미륵이 출현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진평왕 등극 직후인 580년 경에 선덕여왕이 탄생하였을 터이니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제 신라에서는 신라 왕손이 직접 미륵의 화신으로 출현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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