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4·13총선 나는 이렇게 투표하겠다

  • 설호정 주부·서울 강동구

    입력2006-11-03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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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도 버릴 수 없는 너절한 잣대 ]

    설호정 주부·서울 강동구

    기권해버리면 간단하다. 깨끗한 한 표 좋아하네. 내 손에 오물 안 묻히는 길은 기권밖에 없다. 현미경은커녕 확대경도 필요없다. 그 행적을 잠깐 일별만 해도 “당신들을 위해 내 금쪽 같은 시간을 쪼개 투표소에 가? 어림도 없지” 하는 생각이 북받친다.

    새로 들어왔다는 사람? 물론 우리 동네는 그나마도 없는 듯하지만, 딴 동네에 나선다는 물 좋은 ‘삼팔륙’이라 하더라도 존경심은커녕 호감조차 가지 않는 대상이 수두룩하다.

    후보를 재는 다섯 가지 잣대



    이것 말고도 기권해야 할 만 가지 이유가 머릿속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많을 줄로 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죽을 병이 들어 자리보전할 처지가 아니면 기권은 안 할 생각이다. 적어도 ‘똥친 막대기’ 또 그런 ‘인재’들이 뭉쳐서 된 정당을 백 그라운드로 하고 나선 후보는 떨어뜨려야겠기 때문이다. 요컨대 누가, 어떤 집단이 좋아서 찍는 것이 아니라 되면 안 되는 후보에 순위를 매겨 꼴찌 한 후보에게 하는 수 없이 한 표 던져주겠다는 말이다.

    참담한 일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현실의 주권 행사라는 것은 실체가 이것이 아닌가 한다.

    거명하면 지킬 명예도 없는 개인 또는 집단으로부터 가소로운 명예훼손 송사를 당할 수 있으므로 참고, 내 평점 기준을 털어놓자면 이렇다.

    첫째,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거나 협력한 사람 또는 그런 이들의 정당. 그중에는 이미 저승에서 심판받는 사람이 많겠으나, 아직도 잔명을 보전하고 전혀 회개함이 없이 줄기차게 정치판의 단물에 매달려 있는 박씨의 적자 또는 서자를 자임하는 인물이나 집단.

    또 같은 맥락에서, 자기 선친의 과오를 반성적으로 통찰해 보았다는 소식 없는 박씨의 혈연상의 적통 한 사람을 정치적 수지 타산에 영합하여 느닷없이 ‘정계 거물’로 떠받들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

    둘째, 박씨의 ‘늠름한’ 과단성을 적극적으로 계승해 발전시킨 전두환·노태우의 잔혹한 군사독재에 출연했던 주연, 조연 또는 그 스태프로 전비(前非)를 뉘우칠 생각이 없어 보이거나, 이른바 상황론을 늘어놓고 있는 가증스러운 인물 또는 그이들이 주축이 된 집단.

    셋째, 돈 뿌리고 당선되어, 임기 동안 그 본전 챙기느라고 오늘은 부자한테 빌붙고 내일은 부자 약점 잡아 협박하다가 들통났거나, 천만다행으로 교묘하게 망신은 면했으되 그런 정황 증거가 분명해 보이는 인물이나 그런 인물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집단.

    넷째, 악의적인 차별로 수십 년 피해 본 지역이 명명백백 존재하니 지역차별이라 해야 옳건만 가해자인 주제에 사과 한마디 없이 적반하장으로 지역감정, 거기다 한 수 더 떠 지역정서 어쩌고 하며 원인 규명을 차단하고 국토를 동서로 갈라서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개인 또는 집단. 또 그런 통탄할 작태로부터 ‘소외’되면 안된다고 선량하고 가치 중립적인 자기 고향 사람들 부추겨 왜곡된 애향심 ‘창출’해내 지역 맹주 노릇 하는 인물 또는 집단.

    다섯째, 총선시민연대의 낙천 대상자 목록에 올라 있는 인물 또는 비율적으로 그런 인물 가장 많이 공천한 집단.

    사실 우리 지역구의 경우에 이쯤에서 ‘쓰레기’는 대강 ‘분류’됐지만, 정작 ‘결선’에 남아 있는 기표 대상의 ‘우열’을 가리기는 아직 난감한 지경이다. 기권의 유혹이 배암의 혀처럼 나를 꾄다는 말이다. 그래도 찍지 않으면 꼭 떨어져야 할 인물 또는 정당에 유리할 터이니 이번에는 더 좀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야 하겠다.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반독재 운동을 고문으로 분쇄한 ‘공적’이 입증되는 인물을 두둔해 은닉하며 매끄러운 세 치 혀끝으로 음습한 ‘음모론’을 펼치고 ‘정치 탄압’ 어쩌고 하는 데에 써먹는 무리들과 한패인 인물.

    이쯤에 내가 한 표를 던져 주어야 할 대상은 명백해지는 듯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 동네 후보에 대한,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평점 기준은 이렇다는 말이다. 드물게 흔쾌히 한 표 줄 수 있는 지역의 주민은 행운이겠으나, 아무리 재 보아도 어느 한 사람 찍을 데가 없는 지역이 적잖을 줄로 믿는다. 더구나 이번 선거가 더 그런 듯이 보인다. 그런 분들에게 행여나 나의 이런 상대 평가 기준이 참고가 될 수 있을까?

    그 밖에도 나에게는 잣대가 몇 개 더 있기는 하다.

    우선 한 재야인사가 발을 (잘못) 들여놓음으로써 ‘완공된’ 정당, 곧 ‘한국 현대 정치사 박물관’이라고나 할 만한 곳의 사람은 피한다. 나는 중앙청이나 허리 잘린 성수대교가 그대로 보존되었더라면 후손에게 반면 교사 노릇을 해줄 수 있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 정당도 비슷한 것 아닐까? 말하자면 그 구성원의 존재 가치는 ‘움직임 없는 진열품’으로서 소임을 다할 때나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아무려면 ‘박제’가 되어야 할 대상에게 표를 줄 수는 없지.

    그리고 요 몇 해 전에 자기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조차 아직 깨닫지 못한 듯한, 무뇌증(無腦症)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는 사람의 집 문턱을 넘나들며 그 입에서 무슨 견강부회할 말 한마디 나와 주기를 애간장 태우며 기다리는 개인이나 집단도 곤란하다.

    ‘최악’을 면해 보자고 이런 너절한 잣대를 늘어놓자니 서글프다. 그러나 이나마도 안 하면 ‘최악’이 기뻐할 터이니 하는 수 없다. 그러나 저러나 ‘최상’을 가려내려고 번민하는 날도 이 땅에 오기는 오려나?

    [ 나의 ‘차악(次惡) 선택 방법론’은 근시안 되기 ]

    노염화 문화평론가

    아 직까지 총선이라는 지극히 속세적이고 순발력 넘치는 주제는 내게 현실감을 주진 못한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자마자 이 땅을 떠나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먼 서역(西域)에서 4·13 총선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여행중에 만난 한 한국 여행자 덕분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도 안 된 그가 전한 최근 고국의 핫이슈는 ‘국회의원 낙천 운동’이었다. 참신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총선시민연대의 다소 수세적인 실상을 보고 그 신선함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여운(?)’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땅에 사는 이상 어쨌든 이번 총선에 대한 정보와 지식들이 내 머리에 쌓이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정치 혐오는 ‘오래된 미래’다. 이에 반해 놀라운 사실은 우리 국민의 높은 투표율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아마 최소한 50%가 넘는 투표율은 문제없을 듯하다(지난 15대 총선의 투표율이 사상 최저였음에도 63.9%였다). 이는 평소엔 지독한 정치 혐오를 드러내는 우리 국민들도 정치권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혹은 순진한) 증거다. 또 국민의 80% 이상이 ‘낙선운동’을 지지한다는 것도 희망의 잔존을 말해준다. 정치혐오와 묘한 짝패를 이루고 있는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기원들, 과연 이 소중한 기원을 지금의 ‘저런’ 정치권이 떠안을 수 있을까.

    과연 그들이…. 정치권에 대해 터져 나오는 욕설의 수사들을 잠시 멈추어야 할 때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섣부른 냉소는 가장 쉬운 삶의 방식이다. 제대로 된 절망을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선거판을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국민 80% 낙선운동 지지는 희망의 잔존

    총선의 시작은 유권자에게 차악(次惡)의 향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뭘 보고 뽑아야 하나 혹은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하나보다는 사실 어떤 후보가 그래도 좀 덜 나쁘냐가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지 않은가. 어떤 정당이 좀 덜 나쁠까. 정당의 색깔? 가뜩이나 색이 불분명한 정당들인 건 다 안다. 게다가 선거 때만 되면 ‘레드 바이러스’가 옮을까 두려워 모두 착한 보수정당이 되는데 색깔이 기준이 될 리 만무하다.

    정당이 안 되면 다음 차례는 후보의 자질론으로 넘어간다. 요즘 시대에 걸맞은 후보의 자질은 전문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정치판이란 곳이 초강력 믹서 같은 힘이 숨어 있는지 어떤 경력을 가진 누가 들어가도 대부분 느끼하고 당리당략적 ‘조폭 정치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전문성은 선거용 간판이지 실제 국정운영에 큰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준일까. 아시다시피, 정책선거를 부르짖어도 결국 선거 막판이 되면 여당, 야당, 지역개발, 고향 등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집권당이면 의당 안정을 부르짖고, 야당이면 견제의 힘을 외치며 지지를 호소한다. 이 두 당의 위치가 바뀌어도 상황이 똑같다는 것은 이미 많은 보궐선거에서 보았다. 여당 후보가 내뱉는 지역 발전론은 이기적이다. 제로섬 게임인 예산 분배에서 권력을 남용하겠다는 말일 뿐이다. 또한 합리성의 눈을 가리는 고향이니 터줏대감이니 하는 말도 우습다.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서는 차라리 고향 지역에 출마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드는 게 어떨까. 지역 사정을 잘 안다는 말은 한 나라의 국회의원을 뽑는 데 최우선 조건이 아니다. 구의원이나 시의원이면 몰라도.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사는 곳의 지역구 명칭은 서울 ‘성북 갑’이다. 이번 선거의 민주당 후보는 유재건 현 국회의원, 한나라당은 386세대 정태근, 자민련은 아직 후보 미정(혹은 불출마). 그리고 아는 이가 별로 없겠지만 이번에 서울의 모든 선거구에 후보를 내세울 예정인 ‘청년진보당’의 정회진(28·여)이라는 사람이 출마한다고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시대를 거슬러 여전한 좌파 모험주의에 지지를 표하고 싶지 않고, 80년대를 팔아 자신들을 탄압한 세력의 모태인 정당에 몸을 던지는 상한 고기인 삼팔육(肉)에 거는 기대는 정말 하나도 없다. 현역 국회의원이지만 여전히 TV 토론 사회자 이미지가 강할 만큼 의정활동에 약했던 사람도 시덥잖긴 마찬가지다.

    마땅한 후보 없어도 기권은 않겠다

    그래서 기권해 버리고 휴일을 즐기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거에 대한 게으른 거부를 하고 싶진 않다. 낙선운동처럼 선거에 대한 거부운동, 집단적 보이콧으로 불참이 세력화되기 전엔 나도 누군가 차악을 택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차악 선택 방법론’은 부분만 보는 것이다. 원시안(遠視眼)으로는 후보를 판가름할 수 없을 때 근시안(近視眼)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경우를 보자면, 내가 제일 관심 있는 영역인 문화정책과 사회적 소수자 인권에 관련된 정책을 그래도 가장 덜 황당하게, 덜 비현실적으로 내놓는 후보, 정당을 선택하려 한다. 그래서 아직은 후보를 결정할 수 없다. 선거용 홈페이지들이 구축되면 꼼꼼히 살피겠다.

    이 근시안 방식이 궁극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씁쓸한 감을 지울 순 없다. 하지만 나를 설득하는 가장 나은 방법인 걸 어떻게 하나. 언젠가 원시안과 근시안을 다 작동시켜서 후보를 저울질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그리고 선거가 즐겁게 느껴질 날 역시 순진한 맘으로 기대한다.

    배삼준 (주) 가우디 대표이사 회장

    온 국민이 축제로 맞아야 할 새 천년 첫 선거를 앞두고 있건만 선거판은 어느 때보다 더 혼탁한 양상이다. 조그만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처지에서 보면 축제는 고사하고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과 두려움이 앞선다.

    새 천년에는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역량과 덕망을 갖춘 국민의 대표를 선택하자고 시도했던 경실련과 총선시민연대의 부적격 정치인에 대한 낙천·낙선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국민들은 이 운동에 절대적 지지를 보냈으며, 언론과 정치권도 이에 수긍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래서 4·13 총선이 광복 이후 우리의 정치문화를 혼탁으로 몰고 갔던 역대 선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고, 희망 찬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은 이가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기대는 정치권의 구태에 의해서 ‘역시나’ 하는 실망감으로 깨졌다. 그토록 외쳤던 ‘정치개혁’이 실종된 지 오래고 밀실공천, 계파정치, 금권정치, 지역주의 망령 등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재연되고 있다. 특히 지금에 와서 지역감정이 언제부터 시작됐고, 누구 때문인지를 따져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지역감정을 조장해서 국민들을 쪼개 놓고 요행으로 권력을 쥔다 하더라도 그 역사적 책임을 어찌 다 지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 경제는 외환 위기의 터널을 막 벗어나고 있을 뿐이다.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나는 외줄을 탄 아슬아슬한 심경으로 경제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온 국민이 합심 단결하고 더 노력하여 경제 위기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지니고 있다.

    선량(選良)이 어려우면 퇴출이 최선책

    경제 전문가들의 진단에 따르면 현재 우리 나라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굿바이 코리아’ 하면서 떠날 수 있는 핫머니 성격의 외화가 1000억 달러 이상 들어와 있다고 한다. 이들은 항상 한국의 투자 가치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원유 가격 상승, 엔화 약세와 같은 부정적 징후들이 밀려오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은 우선 선거에서 이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위기에 처한 경제를 도외시하고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의 속성상 그들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편 가르기는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유권자들을 구태의연한 선거 싸움판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라 살림과 우리 경제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 것이다. 더구나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상대방 후보나 정부의 정책을 무책임하게 비방하고 있다.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라는 큰 틀 안에서 선의의 경쟁이 이루어져야만 선거 이후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지난날의 경험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대가 변하고 있다. 세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대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안주하는 국가와 민족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것은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경제, 통일, 교육, 환경, 교통 등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거나 전문적 식견이 없거나 동참한 적이 없었던 사람, 선거를 앞두고 무엇인가를 ‘하는 척’하는 사람,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지역 주민을 볼모로 삼고, 탈법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사람들에게 조국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국회의원을 우리는 선량(選良)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역주의와 색깔론이 난무하는 케케묵은 정치현실에서 ‘선량’이 어렵다면 지역감정 같은 원초적 감정에 의지하고 불법 타락선거를 조장하는 정치인을 색출하여 완전히 퇴출시키는 방안이 가장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집권당을 견제하는 야당이 필요하다는 당위론은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시대적 색깔론과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소위 야당 지도자들과 그 추종세력들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지목한 퇴출 정치인들을 표로 심판하기를 바란다.

    최후의 선택은 유권자의 몫

    그래서 냉철한 이성으로 연고주의·지역주의 등과 같은 감성이 아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만한 능력과 정치적 신념을 지닌 사람을 선택하도록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결국 새로운 정치문화의 조성과 국가 발전을 위한 최후의 선택은 유권자 몫이다.

    우리가 근·현대사에서 난관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은 정치권이 제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며, 유권자들도 기득권을 보유한 정치인들이 교묘히 활용하는 금권주의·지역주의에 포로가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새 천년의 첫 출발인 4·13 총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유권자들은 책임의식을 공유하여야 한다.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용두사미에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마음을 계속 끌고 가서 유권자의 힘에 의한 선거혁명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정치 냉소주의, 방관자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 참여자로서 민주사회, 성숙한 시민사회로 가기 위한 토대를 닦기 위한 귀중한 한 표를 던져야 할 것이다.

    김보성 한국민족음악인협회 사무총장

    나 는 ‘정치는 최고의 예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무릇 최고의 예술가는 창조적인 작품을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과 커다란 기쁨을 주고 나아가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달래준다.

    최고의 경지가 아니어도 문화예술의 특성상, 특히 모든 비영리의 음악가, 화가, 배우, 작가, 무용수, 고고학자 그리고 박물관 등은 문화(와 예술)는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사회적 풍토를 형성하도록 도와준다. 정치에 정통한 정치가라면 당연히 자신의 정치행위를 통해서 국민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고 지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며, 정치야말로 우리의 일상과 가장 긴밀히 연결되어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스승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쓴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글에 담긴 내용이 생각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로 시작되는 이 글은 “높은 수준의 문화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로 일단락을 짓는다. 강병(强兵)은 남의 침략에 내가 가슴 아팠으니 남을 침략할 힘이 아니라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한 힘이면 족하다고 했고, 부국(富國)은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4·13총선은 21세기 첫 선거

    나는 이번 총선에서 ‘문화적으로 성숙한(?)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특별히 융숭한 접대를 바라고 뇌물을 필요악 정도로 여기는 낯두꺼운 후보만은 피하고 싶다. 또 지역구 국민을 대의(代議)하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잘못된 정치 행태를 꾸짖는 국민들에게 도리어 국회의원의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고 대드는 만용을 부리는 후보만은 가려내고 싶다.

    4·13 총선은 새 천년 문화예술의 21세기에 처음 치르는 총선이다. 그래서 나는 ‘문화의 새로운 흐름을 짚어낼 수 있는 후보’를 찾고 싶다. 문화 선진국들은 지식 기반 사회로의 진입을 준비하면서, 지식 기반 사회의 국가 경쟁력은 누가 더 국가나 거기에 속한 사회의 창조력을 극대화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판단 아래 기존의 비영리 및 상업 영역의 문화예술 활동은 물론이고 나아가 ‘공공(公共)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아마추어 예술활동’에서조차 그 사회의 창조력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문화정책으로 담아내고 있다.

    거리의 악사나 광장의 청소년 댄싱그룹이 발산하는 그런 창조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는 후보 누구 없소? 지금까지 공공기관의 문화지표 연구에서는 ‘대중문화’는 민간의 상업적 영역으로 간주되어 문화의 공공성에서 제외해왔으나, 다양해진 문화현상에 발맞춰 ‘대중문화’ 속에도 비영리 예술을 중심으로 활동하는(아마추어를 포함한) 예술가들이 전국에 산재한다는 사실을 포착해내고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창조력을 극대화하는 최전선의 일꾼임을 간파해서, 중앙 및 지방정부의 문화정책에 주요 관심대상으로 떠올리는 지혜로운 안목을 지닌 국회의원 후보, 거기 누구 없소?

    다양성 속에서 통합 추구하는 후보를

    나는 이번 총선에서 오히려 ‘지방색(地方色)을 살리고 그 다양성 속에서 통합을 향해 나아가려는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겠다. 서울 표준말을 서울 사투리로 생각하듯, 각 지방 고유의 언어와 그러한 언어감각을 만들어낸 독특한 풍속과 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후보에게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의 지방색만큼은 이번 선거에서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지방정부의 문화정책을 연구하고 실행하다 보면 동일한 문제에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즉 “문화를 일종의 구별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 즉 문화적 정체성을 그 자신의 무리와 타인의 무리를 구분해주는 방법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종종 무익한 방어적 자세를 취하기 쉽다. 그들의 문화는 명백하게 적대적인 외부세계에 대한 방패구실을 하며 불충분하나마 안전과 보호의 느낌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더 이상의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정체성을 잃게 될까 전전긍긍하지 않고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지지구조로서 문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유연함과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유지해 간다. 전자처럼 갑옷으로 무장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의심이라는 바다 위를 부유하게 되지만, 반대로 문화를 그들의 척추로 간직한 사회는 다양성 속에서도 통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네덜란드 ‘Cultural Policy Document 1997~2000’ 요약. 출처 http//www.minocw.nl/english/index.htm).

    빈대(지역감정)를 잡으려고 초가삼간(다양성·지방색)을 다 태우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나 후보를 가리다가 출마한 후보자 중에 적임자를 찾지 못해 나의 투표 원칙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는 낭패를 맛볼까 봐 나는 두렵다.

    송 영 작가

    지 난 96년 총선 당시 나는 유감스럽게도 투표에 참가하지 못했다. 아이 교육문제로 모스크바에 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그때 판문점 시위사건이 일어나서 모스크바 교민 사이에도 불안한 소문이 나돌았다. 일부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이번에는 틀림없이 전쟁이 터질 거라고 단언하며 내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그들에게 설득하느라고 한동안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총선이 끝나고 귀국해서 보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당시 여당(신한국당)은 예상 밖으로 많은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접전지역으로 알려진 수도권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던 여당이 선전한 것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런 결과가 반드시 판문점의 그 해괴한 사건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심증이 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진위가 분명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비슷한 ‘총풍 사건’이 지난 대선 때도 벌어질 뻔하지 않았던가.

    이런 얘기를 새삼 늘어놓는 것은 지금까지 정치가 거짓되고 과장된 정보로 국민을 속여왔고 이번 선거에서도 그 관행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이번 선거에도 지역감정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거라고 모든 신문이 예고하고 있다. 수십년씩 정치무대에서 장수를 누려온 자칭 프로 정치인들이 마치 장기자랑을 하듯 경쟁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고, 그런 기사들이 연일 신문 정치면을 장식하고 있다. 지역감정에 관해 그들이 쏟아내는 말들이 100% 거짓말이라는 것은 이 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아마 본인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예비 범법자들이고 파렴치범들이다.

    시민단체 총선 개입은 참된 민주화

    이번 선거에서 시민단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거짓과 기만으로 유지되던 정치권에 대한 최초의 본격 심판이며 직업 정치인들이 독점했던 정치를 주인인 국민에게 되돌리는 작업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를 성취했다고 자찬해왔지만 정치는 여전히 소수 정치꾼 손에서 요리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단체의 적극 활동은 참된 민주화가 이제 겨우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다.

    이번 총선에서 나는 아주 간단한 판단 기준을 세워 놓았다. 판단의 대상은 당과 인물 개인이다. 나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2년 동안 우리가 IMF 체제를 극복해오는 과정에 그 당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당을 선택하는 우선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개인도,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단체나 정치집단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무수한 변신과 파행적 사건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지고지선의 정치집단 혹은 이상적 정치인을 가려내는 것은 무리이며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구태여 그런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년 동안 IMF라는 국민적 대재난을 맞아서 그 당이 어떤 기여를 했고 어떤 활동을 펼쳤는가를 따지는 것은 국민 개개인에게도 아주 중요한 일이며 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마치 하룻밤의 희미한 꿈처럼 망각하고 있다. 경제가 너무 빨리 회복되어 그런 것일까?

    내가 살고 있는 성남시 분당의 탄천변 언덕배기에서, 밤이 되면 서울에서 노숙자들이 이곳까지 몰려와 풀밭 위에 잠자리를 펼치던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했고 지금도 그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시야에 남아 있다. 만약 그 당이나 그 정치인이 참된 정치집단이고 정치인이라면 국민과 함께 이 재난을 극복하는 데 힘쓰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당의 출생 내력이나 오랜 정치 행적을 따져볼 것도 없이 우선 지난 2년간의 행적만으로도 그 당을 판단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또 이번 선거에서는 이른바 386세대를 비롯한 정치신인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저마다 참신성을, 혹은 젊음을 내세우고 의욕을 과시하고 있다. 어려웠던 군사독재 시절에 감옥 출입을 마다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에 열정을 바쳤던 인물들도 상당수 있다. 물론 그런 이력과 참신성은 정치신인으로 갖춰야 할 훌륭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이력과 참신성을 내세우고 정치에 입문한 뒤 그 세계의 기만적 관행과 혼탁에 합류해버린 그들의 선배격인 인물들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착실한 신인은 여전히 희망

    어쩌면 우리나라 정치풍토에서 개인의 좋은 품성과 덕목 따위는 꽃피울 여지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확고한 생각과 비전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런 정치악과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싸울 의욕도 능력도 없는 인물이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참신한 신인은 여전히 희망이다. 만약 그가 무소속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희망의 씨앗을 보여준다면 나는 그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 정치사회에는 새 시대를 바라보는 비전도 의욕도 없고 오직 관록만을 내세우는 진부한 인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지구는 글로벌시대를 향해 숨가쁘게 줄달음질치고 있다. 그뿐인가. 우리는 남북분단, 경제의 재정립, 빠른 사회변동에 따른 신세대의 정신적 공황 등 남들보다 유달리 심각한 난제를 많이 안고 있는 국민이다. 이런 절박하고 중요한 시기에 계속 영남 정서가 어떻고 호남 분위기가 어떻고 따위의 말만을 지껄이고 다니는 그런 인물들을 떠받들고 그들에게 우리의 내일을 맡겨야 할 것인가?

    해답은 너무 자명하다. 이미 시민단체들이 참된 민주사회의 길로 가는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듯이 나는 이번 선거가 국민들이 오래 갈망해왔던 참된 정치, 참된 정치인들을 쏟아내는, 좋은 의미에서 정치혁명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영진 시인·계간 ‘작가’ 주간

    정 치가 변해야 된다고 한다. 누구나 입만 벌리면 되뇌는 이 오래된 화두는 전국 어디에서나 쏟아져 나온다. 온나라가 변하기를 갈구하는 거대한 집회장을 방불케 한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삽시간에 강력한 힘을 얻은 것도 이러한 변화의 요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가올 총선이 국민들에게 변화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번에도 ‘정치개혁’이라는 주제가 지금까지 되풀이되어온 것처럼 일종의 통과의례로 끝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지역이나 정당의 이해를 넘어선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치적 기득권이나 지역감정의 망령을 해체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인 것 같다.

    왜 수백만, 수천만 명이 원하는 일이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입으로는 변화와 개혁을 외치면서 정작 정치적 실천이나 선택의 순간이 오면 자신의 논리와 이성을 배신하게 되는 것일까.

    유권자들은 직업정치인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치적 행위 역시 믿지 않는 것 같다. 자기 혐오와 모멸로 이어지는 이런 정치의식은 편견으로 가득 찬 정치경험에서 비롯된다.

    현실과 정치의 역학에 대해 누구든 자기 경험을 말할 수 있다.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선에서 어떤 주관적인 주장도 가능하다. 그만큼 우리의 정치 현실은 중첩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특정지역 출신 정치인이 대권을 장악하면 곧바로 그 지역 인물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요직을 독차지하고 학맥과 인맥에 따라 권력의 세밀한 지형이 완료되어온 저간의 경험이 지역감정의 근거가 되어왔다. 박정권 때부터 비롯된 이런 현실은 지금까지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근대 이후 우리 정치사는 모순에 모순을 덧씌우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정치의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중 삼중 사중의 정치적 태도와 판단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현실이 지속되어온 결과다.

    잘못된 모순을 지적하는 손가락이 곧 자신의 내부를 향한 비난으로 귀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손가락질이 계속되고, 냉소를 냉소로, 무관심을 무관심으로 맞대응하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피와 땀을 흘리는 자기 헌신과 희생은 늘 비현실적인 것이 돼 버리곤 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 도덕과 윤리의 불일치는 비단 정치의식의 문제만이 아닌 현실 전반의 가치의식에 심각한 이중의 잣대를 만들어 놓았다.

    사적 이익과 결부된 판단 버려야

    그러나 ‘진실한 것은 영원히 진실한 것’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성급한 변화에 대한 기대는 망각을 부추기기 쉽다. 한 정치인의 개인사에 내재한 역사적 인과는 아무리 시간이 덧씌워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한다. 그것을 상대적으로 판단해서는 끝없는 모순의 도그마에 빠져들고 만다. 부정부패와 독재 그리고 중대한 윤리적 문제에 결부된 개인의 역사가 치열한 반성을 통과하지 않은 채 시민들의 지도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제라도 거부해야 한다. 그것이 내 아버지나 숙부, 혹은 선배, 후배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선택은 사실 어려운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치가 구현되는 곳은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현실이므로 우리는 정치 행위의 결과를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정치는 곧 삶이자 현실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문적인 정치행위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유권자들인 ‘우리’는 정당이나 지역의 연고와 관계없이 공공의 영역에 발휘되는 정치적 역량과 도덕성을 주체적으로 판단할 책임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사적 이익과 결부된 판단은 사적인 정치력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그대로 개인에게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 만든 법률이나 제도라도 그 자체가 진실과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인의 권리와 책임이 쉴 사이 없이 발휘되지 않는다면 제도와 법률은 정치적 야만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변질하기 쉽다. 현대 사회에서 유권자들의 정치행위가 개별적인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공공의 가치를 중심으로 상호 연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자아 실현을 가능케 하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역과 각 정파의 자기 이익을 정당화하는 ‘말놀음’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스스로에게 조롱당하는 정치적 자기 비하의 씁쓸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다시 정치인들에게 되돌려준 채 망각이나 무관심 속에 둥지를 틀고 앉아 ‘나만은 예외’였다고 자위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지역감정을 토대로 게임의 규칙을 주도하는 ‘제도적 관념’의 주재자들은 이번에도 자기 지분만큼의 ‘승리’가 어쩔 수 없는 ‘정치현실’임을 깨달으라고 큰소리칠지도 모른다. 정치가 우리에게 보내는 조롱을 극복하기 위해 말을 실천으로 바꾸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투표권을 행사하는 일에 대단한 원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금품이나 사적 인맥을 통해 접근해 친근하게 속삭이는 비리의 목소리 대신 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제시하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적어도 과거에 부정부패 비리에 연루됐거나 독재정권에 복무했던 이력을 지닌 후보자, 그리고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 이익에 더 우선순위를 두어왔던 정치인들에게는 표를 주지 않음으로써 정치개혁을 출발선에 세울 수 있다. 자기 존엄성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사적 욕망을 제어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올바른 실천은 단순한 정직성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은 쉬운 일이다.

    [ ‘묻지마 투표’는 단연코 NO! ]

    장수임 ‘포스닥’ 기자

    ”내 꿈은 내가 꾼다!” 친구에게 E-메일이 왔다. 요즘 장안에 화제인 어느 이동통신 광고에서 “잘 자. 내 꿈 꿔!”라는 문구가 유행을 하자, 통신과 인터넷에서 순식간에 번진 유명인들의 특색 있는 패러디 중 하나였다. 그냥 읽어선 안 되고 원조 터프가이 최민수를 상상하며 읽어야 한다나.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 내 표는 내가 찍는다!

    2000년이 되자마자 우리의 눈과 귀를 자처하는 언론을 도배한 것은 정치권과 선거에 관련된 뉴스였다. 21세기에 한국인이 풀어야 할 숙제들, IMF 사태, 실업과 빈부 격차, 공권력에 대한 불신, 사회적 갈등 요소 같은 분야가 본질적으로 정치에 귀착한다.

    디지털 혁명기라 부르는 현시점에는 한국인의 좌표와 같은 철학·문화적 문제도 정치권의 정책결정과 깊이 관련된다. 한마디로 한국인에게 정치는 ‘생활의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4월의 총선은 2000년 최대 이벤트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지역감정, 밀고 밀리는 세력 다툼, 시민단체와 민심의 아우성…. 결말이야 어떻게 되든 선거의 파도와 그 결과는 우리 사회를 1년 내내 휩쓸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충격파에서 나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유권자는 투자자! 의원은 상장종목!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성년이 되었음을 인정받은 뒤로 이번이 공식적으로 두 번째 큰 선거이긴 하지만, 나는 그동안 매일매일 선거에 참여한 셈이나 다름없다. 포스닥 정치증권 시장에서 내가 한 거래는 실상은 정치인에 대한 나의 심판이자 투표였으니까.

    기본적으로 가입과 동시에 주어지는 사이버머니 100만원을 가지고 정치인을 사고팔면서 가격이 정해지는데 이는 실제 증권시장의 매수 매도나 다름이 없다.

    또한 실제 증권시장에서 기업의 ‘내재 가치’가 그 기업의 주가를 결정하듯이 정치인의 주가는 그가 갖고 있는 ‘내재 가치’가 결정한다.

    그러나 치밀한 분석과 예상을 통해 투자를 한다 해도 수익률이 예상대로 나오지는 않는 법이다. 더구나 정치인에 대한 아무런 사전 조사 없이 이미지나 이름을 보고 투자하면 별수 없이 수익률에서도 실패를 보기 마련이다. 이런 게 소위 ‘묻지마 투자’가 낳은 비애다.

    이런 포스닥에서의 학습(?)을 통해 얻은 결론은 정치를 정치인에게 맡겨선 안 되겠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분도 계실 테지만,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얘기다. 앞에서 길게 거론한 것처럼 정치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만 보고 결정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결국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정책과 원칙이 그리고 비전이 정치를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 NO! 정책 OK!

    이번 선거는 유난히 정당도 많고 후보자도 많아 결정하는 순간까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될 듯하다. 후보자가 많다는 것이 꼭 선택의 폭이 넓어졌음을 의미하진 않겠지만. 내 지역구(서울 성북 갑)에서도 많은 후보가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나의 신중한 선택을 도와줄 펀드매니저는 다름아닌 ‘선거 포트폴리오’다. 이 포트폴리오에 따라 투표를 한다면 ‘대박’은 못 터트린다 하더라도 실패는 하지 않을 테지.

    포트폴리오의 첫째 원칙은 ‘이름을 보지 말 것’이다. 정치인의 유명세는 때로 실제 활동보다 더 부풀려 있기도 하고 미리 짜둔 각본에 맞추어 가공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포스닥 투자 원칙에서도 언론 플레이에 능한 정치인을 경계 대상 1순위에 올려놓는 것처럼, 허명에 흔들려서는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없을 테니까.

    두 번째 조건은 ‘정치적 소신과 정책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춘 인물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자’는 것이다. 사실 선거철에 유세장에 가거나 시장이나 전철역에서 정치인을 기다리지 않으면 지역구 출마자와 눈 한번 맞추지 못하고 투표장에 가기가 쉽다. 게다가 예전 같은 선거운동 방식으로는 후보의 정책과 공약을 알아내는 것이 열의가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꾸는’ 인터넷상에서라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각 후보의 홈페이지를 꼼꼼히 살펴보고, 정책과 소신이 묻어나는 구성과 성실한 관리가 돋보이는 인물에 한해서 정책과 공약을 살펴볼 것이다. 내가 궁금해하는 사항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답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당연히 점수가 높아질 테고. 그러나 아직은 공개된 자료와 E-메일만으로 각 후보의 ‘내재 가치’를 전부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해 세밀하고 솔직한 자료를 공개하는 후보가 우선은 점수를 더 받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잡지에서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 한 사람의 투표행위를 돈으로 환산하면 1만2000원이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여기다 ‘현실’을 고려하면 ‘0’ 하나 더 붙여도 그리 무리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에 들이는 비용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나로부터 나오는데도―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니―정작 국회의원의 잘못을 지적하려면 4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더구나 잘못된 선택으로 또 그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만저만 고민되는 일이 아니다. 나의 ‘선거 포트폴리오’가 제발 쓸모 없지는 않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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