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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무용가 정명자

일본무대에 뿌리내린 한국춤 전수자

  • 소설가 이상락

일본무대에 뿌리내린 한국춤 전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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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최승희의 무용을 구경했던 때의 감동을 어린 딸에게 들려주며 “너는 재주가 있으니 절대로 시집가지 말고 최승희 같은 무용가가 돼라”고 했다. 그 시절(아니 지금도) 여느 부모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춤바람’이 불러온 정명자의 돌발행동은 알아줄 만하다. 여덟 살 무렵 정명자는 동네에 들어온 서커스 구경을 하다가 막간에 선보인 무희들의 춤에 반한 나머지 서커스단이 타 지역으로 옮겨갈 때 자기도 춤을 추겠다며 ‘아주 당연히’ 그들을 따라가 버렸다. 부모가 찾아나서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이틀 만에 간신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전국 어린이무용발표회에 출전할 작품을 연습했는데, 키가 크다는 이유로 ‘나무꾼과 선녀’의 주인공을 맡겨주지 않자 하루 종일 울기도 했다. 무용하려면 키가 너무 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데, 지금 그녀의 키가 작은 편에 드는 것은 아마 그때 이후 훌륭한 무용가가 되기 위해서 오기로 ‘안 커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예고 한국무용과에 진학하려던 그녀는 학교측에서 실수로 원서접수 시한을 넘겨버리는 바람에 한바탕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춘천여고에 진학한 그녀는 1학년 때 자퇴원을 내고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고등학교로 출발한 지 고작 2년밖에 안된 국악고에는 무용과가 없었다. 물론 그녀는 개인적으로 무용공부를 계속했지만, 무용하는 사람한테 필수적인 국악 공부를 했던 그 기간을 정명자는 소중하게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진도북춤의 박병천, 살풀이춤의 김숙자, 승무의 이매방, 장고의 전사습 등 쟁쟁한 명인들로부터 차례로 사사하면서 실력을 쌓아 갔다. 그녀는 어떤 상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대느냐”고 했다. 전국단위의 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두 차례나 받은 것을 비롯해 그녀의 입상경력은 화려하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무용을 연마하던 그녀가 왜 하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일본땅에서 한국춤 전파



“첫째는 서울대에 응시했다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실망한 나머지 유학을 결심했지요. 두 번째로는 춤 다음으로 좋아하던 사진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춤추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대할 때면 ‘춤꾼이 액자를 박차고 뛰어나올 듯이 생동감 넘치는 사진을 찍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마침 고종사촌이 도쿄에 살고 있어서 훌쩍 건너갔지요. 일종의 도피심리가 작용한 거지요.”

도쿄 공예대학 사진기술학과에 입학했다. 일본에는 무용과를 둔 대학이 거의 없다. 일본대학에 일본무용을 가르치는 곳이 한 군데 있는 정도다. 서양무용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무용천국인 셈이다.

졸업 후 그녀는 무용 불모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일본땅에 한국무용을 전파하겠다고 결심하고 도쿄에 한국민속예술연구원을 차려 본격적인 보급에 나선다. 처음엔 재일 한국인을 주로 가르쳤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들도 한국무용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로부터 20여년 간 그녀는 일본에 한국 전통무용을 전파하는 ‘한국 문화대사’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예술인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춤에 대한 욕심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제가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저하고 교포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근래 3, 4년 사이에 한국무용을 가르치겠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르쳐온 저하고는 좀 다르긴 하죠.”

─어떤 점에서 다르지요?

“우선 스튜디오를 정식으로 갖추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격상 내 문하에 들어온 사람들이 배우는 듯 마는 듯 대강대강 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가르칠 때에도 거의 진을 다 빼가면서 연습시키거든요.”

─평생을 걸고 춤을 배워 보겠다는 자세로 달려드는 사람들이 없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데, 성심을 다해서 가르쳤던 사람이 실망시킬 때 참 가슴이 아프지요.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교육자와 플레이어는 구분돼야 한다고 봅니다. 가르치면서 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춤꾼 가운데 1년이나 2년 단위로 성실히 준비해서 꾸준히 새로운 모습의 춤을 개인발표회를 통해 보여주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럼 지금은 가르치는 일에는 손을 떼신 건가요?

“조교들이 주로 담당하고, 저는 일정한 수준에 있는 소수만 담당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정통 한국춤을 제대로 가르치자는 게 제 생각이고, 제 자신이 내 춤의 터전인 한국에 가급적이면 자주 드나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정명자는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공연해 왔다. 1988년에 바탕골소극장에서 ‘정명자 춤의 세계’를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해도 개인발표회를 거른 적이 없다. 그녀가 한국에 나와 있을 경우 서울의 부모는 그녀의 외동아들 히도시(11세)를 돌보기 위해 도쿄로 건너가고, 그녀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거꾸로 부모는 서울로 오는 식이다.

남편 우치노씨는 든든한 후원자

춤꾼으로서의 정명자에게 아버지 다음으로 든든한 후원자 구실을 해온 사람이 남편 우치노 시게루씨(변호사·52)다. 84년 어떤 모임에 갔다가 첫눈에 ‘이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어 ‘춤과 결혼해 살겠다’던 생각을 바꿨다. 결혼하더라도 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얘기에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남편은 그저 마음으로만 아내의 무용활동을 인정해 주는 정도의 소극적인 후원이 아니라, 공연에 필요한 음악을 편집하고 비디오를 촬영하는 일부터 홍보물을 만들고 공연장과 스폰서를 물색하는 일까지 도맡아 뛰어다닌다.

“남편이 기계 만지는 일을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찍은 비디오는 거의가 맘에 안 들어요. 남편이 찍어야 만족할 만한 모습이 나옵니다.”

─공연 뒤에 무용에 대한 평가도 하십니까?

“그럼요.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가 남편과 제 아들입니다. 아들 녀석도 춤에 대한 안목이 있어요. 내가 학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쪽지 하나를 건네고 나갑니다. 쪽지를 펴보면 ‘이 누나는 너무 웃는다’ ‘저 누나는 손동작이 너무 빠르다’ 같은 지적 한 두 마디가 적혀 있어요. 핏덩이 무렵부터 제 엄마가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자라왔기 때문에, 자기도 나름대로 한 마디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내가 춤 연습을 하고 있으면 부자(父子)가 간섭하느라고 아주 시끄러워요.”

─무슨 민족감정까지는 아닐지라도 가령 일본에서 한·일간 축구경기 같은 국가대항전이 벌어진다면….

“저는 물론 열렬한 한국 편이고 남편은 일본 편이지요. 아이는 부모 눈치 살펴 가며 때때로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고…. 제가 요란스럽게 응원하고 때로는 도발적으로 싸움을 걸어도 남편은 그저 잔잔하게 웃어 넘기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도 남편에게는 좋은 아내입니다. 이건 자화자찬이 아니라 남편의 얘기예요.”

─남편이 한국말을 할 줄 아십니까.

“듣기는 조금씩 듣는데 서툴러요. 그런데 아들은 한국어를 잘하는 편입니다.”

97년 1월, 정명자는 연례행사로 해오던 개인발표회를 일본에서 갖게 되었다. 준비 과정에서 발표회의 홍보물을 한국에서 제작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입원했다. 그녀는 3개월여 동안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며 문병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그 만큼의 입원 기간을 가졌던 것에 감사한다. 그 시간이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와 이승에서의 이별 절차를 넉넉하게 가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예정된 상황에서, 저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도 만져보고 피부도 맞대고 한참 동안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했어요. 너무 갑자기 돌아가셨다면 그런 시간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입원하고 처음 며칠 동안은 의식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저 혼자 일방적으로 떠들었어요. 살아 계실 때 아버지와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자는 생각으로….”

손수 홍보전단을 만들어 나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공연은 구경하고 죽어야겠다”던 아버지는 하필 정명자가 잠시 일본으로 건너간 사이에 눈을 감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부랴부랴 달려와 보니 이미 입관 절차를 마친 상황이었다. 관 뚜껑을 열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임종을 못했다는 자책감,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귀천지’라는 이름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만든 배경이다.

그녀가 아버지 문병 중에 병원 창밖으로 내린 눈발을 바라보며 읊조렸다는 헌시(獻詩)는 ‘귀천지’ 살풀이 과정에서 녹음물로 삽입돼 흐른다.

…이유 없으시, 나의 길을 열어주시고자 항상 애쓰셨으매

한없으시, 조용한 애정으로 늘 포용해 주셨나이다

끝없으시, 나의 밝은 꿈이 되시고자 언제나 빛을 주셨으매

말없으시, 따스한 사람들을 온통 나의 전신에 수놓아 주셨나이다

그리곤 소리 없으시, 모습 없으시, 모든 걸 내게 남기시고

영원한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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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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