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북풍조작은 있었다”

96년 판문점 북풍사건 ‘청와대 보고서’

  • 조성식 mairso2@donga.com

    입력2006-10-10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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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 4월5일 식목일 아침. 이양호 국방부장관은 한 여인에게 연정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린다에게’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당신을 사랑하는 L’로 끝맺고 있다. 그날 오후 2시20분 이장관은 국방부에서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사태와 관련한 대책회의를 주관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대북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WATCH CONDITION) 격상조치를 지시했다. 이어 3시쯤엔 안보 관련부처 장관들이 참석하는 안보정책조정회의에 참석했다. 북한군의 무력시위는 3일간 이어졌지만 미군은 이를 대수롭잖게 여겼다. 총선을 3일 앞둔 4월8일 밤 합동참모본부 상황실. 청와대쪽에서 “여론이 15% 이상 좋아졌다”는 격려전화가 걸려온 후 한 장교가 들뜬 목소리로 “총선 승리합시다”라고 외쳤고 일부 장교들이 박수를 쳤다. 》
    지난 4월18일 예비역 육군 대령 김남국씨(육사28기)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96년 4월 총선 직전 청와대와 군 수뇌부가 당시 판문점에서 일어났던 북한군 무력시위 상황을 왜곡·과장함으로써 총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군 수뇌부는 청와대 지시에 따라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을 무리하게 격상시켜 안보 위기감을 조성했다. 또한 대국민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북한군의 무력시위 날짜까지 조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자신의 일기(육군수첩)를 바탕으로 한 그의 증언은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고 언론도 이를 크게 다루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당시 상황일지와 워치콘 격상 관련 문서를 내세우며 김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워치콘 격상은 판문점 위기상황에 따른 정상적인 조치였으며 북한군 무력시위 날짜가 조작됐다는 주장은 김씨의 착각이라는 것. 북풍에 관련된 것으로 거론된 당사자들도 자신들의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크게 엇갈리며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할 더 이상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이 일은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에 따라 북풍의 실체는 수수께끼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김씨는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 그가 ‘소설’을 썼거나 국방부와 관련자들이 뭔가 숨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신동아’의 심층취재에 따르면 김씨는 결코 무모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신동아’는 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새로운 증거를 확인하고 확보했다. 이는 북한군의 무력시위 날짜와 워치콘 격상 발령일 등 핵심 쟁점들에 대한 국방부 발표내용에 심각한 의문을 던지는 증거들이다.

    당시 청와대와 군 지휘부의 교감 여부는 북풍의 실체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다. 김남국씨에 따르면 당시 유종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뒷날 육군참모총장이 된 김동신 당시 합참(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과 몇 차례 통화하며 판문점 상황을 보고 받고 대국민 홍보전략을 지시했으며 김작전본부장은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통화한 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신동아’는 당시 두 사람의 통화사실을 목격한 현역 장교의 증언을 확인했다.

    청와대가 이미 지난해 하반기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으며 그 결과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됐다는 점도 눈여겨볼 일이다. 지난해 10월 김동신 육군참모총장이 임기 5개월을 앞두고 전격 해임된 데는 이 청와대보고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밝혀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 전총장은 96년 북풍사건의 한 주역이다. 아울러 지난해 8월 육군 중앙수사단을 시켜 북풍사건을 청와대에 진정한 김남국 대령(당시 정보학교 어학처장)을 불법연행하는 한편 자신의 부하를 시켜 김대령을 회유 또는 협박한 혐의도 받고 있다.



    당시 김총장은 처음엔 청와대의 조사를 대수롭잖게 여겼다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당시 천용택 국정원장과 여권 실세인 K, H의원 등 정치권 실세들을 상대로 구명로비를 폈으나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동아’는 청와대 모 수석비서관실에서 작성해 대통령에게 올린 ‘96년 판문점 북풍사건 조사보고서’를 단독입수했다. 이 보고서와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된 김남국씨의 일기 그리고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96년 판문점 북풍사건의 실체를 추적했다.

    문제의 ‘청와대 보고서’

    A4 용지 27쪽 분량의 청와대보고서는 지난해 10월 중순쯤 모 수석비서관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 보고서의 작성자인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 김동신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에 대한 자체 조사 후 김남국 예비역 대령의 북풍 주장을 믿을 만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 과정에 청와대 조사관은 여러 경로에서 적지 않은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이를 물리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를 받은 김대통령은 “언젠가 꼭 밝혀야 할 것”이라며 진실 규명 의지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최초의 호남 출신 육군참모총장인 김동신씨가 해임된 것은 그 직후였다.

    보고서 제목은 ‘96년 4월 15대 총선 직전 발생한 판문점 북풍사건 관련 보고’. 모두 10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보고서는 먼저 북풍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 조사과정, 북풍체계도, 이양호 당시 국부방장관을 비롯한 북풍 관련자들의 혐의사실 등을 적시한 뒤 결론을 맺고 있다. 맨 끝에 당시 국방부 합참근무자 명단과 15대 총선에서 북풍이 끼친 영향을 분석한 자료가 첨부돼 있다.

    보고서는 “96년 4월4∼6일 판문점 북측 구역에서 총 3회에 걸친 북한군 무력시위가 있자, 당시 청와대와 국방부, 합참은 사건 내용과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일반 국민들에게 북한이 당장 전쟁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과장·왜곡해 공포와 불안 및 긴장을 조성해 15대 총선에 이용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 정부와 주한미군은 판문점 지역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의 특이한 군사동향이 없어 심각한 군사 도발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시점에 청와대와 국방부 및 합참이 안보상황을 표와 연결시키기 위해 북풍을 조작했다는 것. 군사적으로 엄격히 통제돼 기밀이 유지돼야 하는 합참의 핵심시설인 지휘통제실을 언론에 공개하는가 하면 전투복 차림을 한 합참의 장군들이 판문점뿐만 아니라 서해5도와 DMZ 등 다른 지역에서 도발이 일어날 듯 예단하며 국민에게 위기 의식과 긴장감을 확산시켜 여당에 유리한 득표환경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자는 당시 군 수뇌부가 북풍조작을 통해 조직적으로 총선에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유권자들의 안보의식을 자극해 여론을 15% 이상 반등시켜 특히 수도권과 강원도 지역에서 당시 집권당인 신한국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 그에 따르면 15대 총선에서 득표율 10% 내 표차로 국민회의 후보가 2위로 낙선한 선거구는 38개에 이른다(서울:24, 경기:10, 인천:4). 이를 두고 보고자는 “미군 통제 지역인 판문점에서 일어난 북한군의 사소한 무력시위 동향을 빌미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을 위반한 행위가 명백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청와대 모 수석비서관실이 96년 총선 당시의 북풍조작 여부에 관심을 가진 것은 현 정부 출범 초기 ‘총풍’이라 불리는 ‘휴전선 총격요청 사건’의 실체가 밝혀진 후였다. 그때부터 내사에 들어가 증거를 찾던 중 지난해 6월 당시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 김남국 대령을 비롯한 현역 영관급 장교 3명의 진술을 확보하게 됐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96년 4월의 ‘판문점 북한군 시위사건’이 선거에 이용된 경위와 당시 국방 관련 고위관계자들의 행적을 알게 됐다. 보고서엔 임복진 의원이 96년 9월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북풍사건을 파헤치려 애썼으나 국방부와 합참의 조직적인 은폐와 방해로 진상규명에 실패했다는 점도 언급돼 있다.

    보고서에 나타난 북풍 관련자들의 당시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김동신 전육참총장과 유종하 전외무부장관. 김동신씨는 당시 중장으로 합참작전본부장이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유 전장관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었다. 당시 유수석은 김동신 합참작전본부장에게 대언론 홍보강화를 지시했고 김작전본부장은 세 차례에 걸친 유수석의 전화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후 그 결과를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에게 보고한 혐의를 받고 있다.

    “총선 승리합시다”

    유수석의 1차 지시는 96년 4월6일 21시20분께. 지휘통제실에 있던 상황실의 한 중령이 외교안보수석의 전화를 받았다. 유수석은 처음에 김동진 합참의장을 찾았는데 합참의장이 거기에 없었다. 그러자 작전본부장 김동신 중장이 대신 전화를 받아 당시 판문점 북한군 투입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이어 김작전본부장은 유수석의 지시사항을 복명했다. “예, 전투복을 착용하고 즉각 브리핑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작전본부장은 “청와대에서 작일(어제) 국방부에서 한 브리핑의 반응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한다”면서 자신의 직속부하인 작전처장 신상길 준장에게 “청와대 수석님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지체 말고 ‘작전본부장 계신다’고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신작전처장은 상황실에 근무중인 합참 정보·작전부서 요원들에게 “동작 그만!” 하면서 김작전본부장의 지시 내용을 다음 근무자에게 인수인계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김작전본부장은 신상길 장군과 작전처 장교 3명에게 전투복을 입고 언론 브리핑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 신장군은 전략정보과장 김남국 대령에게도 전투복을 입고 브리핑에 참석할 것을 지시했으나 김대령은 거절했다. 신장군의 기자 브리핑은 23시30분께 이뤄졌다. 브리핑 장면 사진은 다음날 일부 일간지에 실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수석은 일요일인 4월7일 21시10분께 또다시 합참 지휘통제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작전처 장교가 지시대로 김동신 작전본부장을 바꿔줬다. 유수석이 뭔가를 얘기하자 김작전본부장은 “3일간 상황을 종합해 브리핑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장관님 지시로 저놈들 야간배치상황과 장비들을 사진촬영하고 있고 그 사진을 보도 준비중에 있습니다” “기자들을 판문점에 넣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음날인 4월8일 20시30분께 유수석은 한 차례 더 김동신 작전본부장과 통화했다. 통화 후 김작전본부장은 상황실 근무자들에게 “너희들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 청와대에서 여론이 15% 이상 좋아졌다고 한다. 이 시간 이후 기자 브리핑 그만 하라”고 말했다. 이에 작전처 소속의 한 중령이 “여론이 30% 이상 좋아졌을 텐데 청와대에서 잘못 파악한 것 같다”고 말했다. 15% 이상 빼앗았다면 결과적으로 30%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그 장교는 이어 “총선 승리합시다”라고 말하며 박수를 유도했다. 이에 일부 근무자들이 박수를 따라 쳤고 누군가 “지난해(95년) 지자제 선거는 졌지만 이번 총선에선 여당이 압승하겠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은 워치콘 격상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은 크게 4단계로 나뉜다. 워치콘의 변경 권한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지만 최종 승인권자는 미군 합참의장이다. 워치콘4는 평상시, 곧 별다른 위협징후가 없을 때의 감시태세다. 적의 위협이 증가하면 워치콘3 상태로 들어간다. 한미연합군은 93년 북한이 NPT(핵확산금지협약) 탈퇴선언을 한 이래 워치콘3를 유지해왔다. 워치콘2는 적의 위협 및 공격징후가 현저한 경우에 해당한다. 워치콘2가 발령되면 미군의 조기경보기가 한반도로 날아오고 미군 정보분석팀이 급파된다. 워치콘1은 그야말로 전쟁을 코앞에 둔 상태로 적의 위협이 급격히 증가했을 때 취해지는 조치다. 6·25 이후 워치콘1이 선포된 적은 없다.

    국방부에 따르면 96년 4월5일 워치콘이 3에서 2로 바뀌었다. 워치콘이 격상한 것은 81년 북한군의 대규모 공군 훈련 이후 15년 만의 일이다. 90년대 들어 북한 고위인사의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을 때나 북한의 NPT 탈퇴 선언,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워치콘 3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96년 4월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는 과연 얼마나 위험한 사태였을까. 이 의문에 대해선 뒤에 자세히 짚어보기로 하고 다시 청와대보고서로 돌아가보자.

    96년 4월5일 14시20분께 국방부 정책실장실. 북한군의 무력시위 사태와 관련한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주요 참석자는 이양호 국방부장관, 국방부 정책실장 박용옥 소장(현 국방부차관), 정책기획관 김인종 소장(현 2군사령관), 대변인 윤창로 소장 등 국방부 주요 장성들과 김국헌 정책실협상전략과장, 김남국 합참전략정보과장, 김선홍 합참합동작전과장 등 대령 3명이었다.

    박용옥 정책실장이 북한군의 판문점 동향을 보고하자 이양호 장관이 “워치콘 격상 문제는 어떻게 돼가나”라고 물었다. 이에 김남국 대령이 “현 상황에선 아직 거론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자 이장관은 “연합사부사령관에게 내가 얘기하지”라고 말했다.

    다시 박정책실장이 “기자가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장관은 “장성 대장(연합사부사령관)이 미측과 협조하면 바로 격상될 테니 한미 합의로 워치콘이 격상됐다고 하는 것이 좋겠지”라고 말했다. 회의가 끝난 직후인 오후 3시쯤 박정책실장은 언론 브리핑을 통해 워치콘을 3에서 2로 격상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4월5일 KBS MBC 밤 9시 뉴스). 하지만 청와대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한미 협의과정을 거치기도 전 한국군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으로 워치콘이 실제 격상된 시점은 4월7일 이후라는 것.

    무리한 위치콘 격상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측 정보실무자는 선거에 악용할 우려가 있다며 한국측의 워치콘 격상 협조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연합사부사령관을 위시한 한국군 관계자의 끈질긴 요구에 미8군 정보참모(미군 준장)가 설득돼 미측의 수집자산 증가(정찰기 동원 등)도 없는 워치콘 격상이 형식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장관은 4월5∼7일에 연합사부사령관 장성 대장과 합참정보본부장 유정갑 중장에게 미측과 협조해 워치콘을 빨리 격상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군 수뇌부는 위기감 조성에 급급해 언론에 군사기밀을 마구 공개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벌였다. 기자들을 군사통제지역인 합참 지하벙커(지휘통제실. 군사2급비밀시설)에 출입시켜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각종 군사기밀이 노출되게 만든 것. 이장관은 한 술 더 떠 4월7일엔 지휘통제실에서 전방의 1사단장과 자신이 통화하는 모습을 국방부 기자단에 공개했다(96.4.7 중앙일보 사진). 4월8일엔 국방부 긴급대책회의 장면을 촬영케 한 후 또다시 기자단을 지하벙커로 안내해 긴박한 근무현장을 공개했다.

    김동진 당시 합참의장은 정보판단을 부풀려 북한군 위협을 강조하는 한편 정보판단관을 바꾸도록 압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4월6일 1400시. 대통령 주재로 전 국무위원이 참가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렸다. 그 직후인 6일 1600시. 김합참의장은 지휘통제실에서 상황대책회의를 주관했다. 정보·작전본부의 장군들과 각 부서 대령급 주무장교들이 10명 이상씩 모두 20여명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김합참의장은 먼저 북한정보부차장(합참정보본부차장) 박현진 소장에게 판문점 상황을 물었다. 박장군은 “종전에도 있었고, 이번 상황도 별것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김합참의장은 “왜 교범대로 정보판단을 하지 않았느냐. 어느 놈이 정보 판단했느냐”고 화를 냈다. 합참전략정보과장 김남국 대령이 “제가 했다”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김합참의장은 “야 임마. 북한군이 서울로 포를 쏠지, 판문점에서 총격으로 쓸어버릴지, 미사일로 원전을 때릴지 너희들이 어떻게 아느냐. 정보에는 저런 엉터리 장교만 있느냐. 누구 사람 없어?”라고 큰소리로 질책했다. 회의가 끝난 후 정보판단관은 김남국 대령에서 합참전투정보과장 홍호선 대령으로 바뀌었다.

    당시 합참정보본부장 유정갑 중장은 이양호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부하들에게 워치콘 변경작업에 협조할 것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96년 4월6일 0700시. 유정보본부장은 정보상황대책회의에서 주무부서인 징후분석과의 과장 정양 대령(공군)에게 워치콘 격상을 지시했다. 정대령이 “미군 실무자는 위협이 없다고 하며 그럴 상황이 아니다”고 대답하자 유정보본부장은 한번 더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에 정양 대령의 호출을 받은 김대영 중령이 달려와 직접 유정보본부장에게 보고했다. 김중령은 징후경보과에서 워치콘 징후를 분석하는 실무장교. 김중령은 “연합사 미군 실무자들은 오히려 지난 3월30일 북한 김광진 대장의 ‘일천배 보복’ 발언과 관련된 비상 징후도 작일 내렸으며, 선거가 다가오니 신중이 요구된다는 견해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유정보본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워치콘을 한 단계 격상하는 한국측 의견서를 즉각 써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김중령은 관련공문을 작성, 이날 오후 늦게 유정보본부장의 결재를 받아 주한미군의 2개 관계기관에 전달해 협조를 구했다.

    유정보본부장은 또 0700시 대책회의에서 “미군이 상황을 브리핑해야 한국사람은 믿는다”면서 홍호선 전투정보과장에게 미측 실무자와 협조하도록 지시했다. 그에 따라 이날 오전 미8군 존 라이츠 대령이 국방부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했으며 이는 그날 밤 KBS 뉴스와 다음날인 4월7일 일간지에 보도됐다.

    유정보본부장은 또 부하인 항공사진해석단장 김응수 대령에게 “미군과 협조해 판문점에 북한군이 구축한 교통호와 박격포 진지, 항공사진 등을 미군 요원이 브리핑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4월8일 김대령과 연결된 미군 요원이 국방부 기자실에서 판문점 요도, 항공사진 등을 갖고 브리핑했다.

    청와대보고서는 당시 청와대와 군 수뇌부가 판문점 상황을 선거에 악용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합참의 최초 정보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북한군의 기도는 판문점 임무포기 선언 직후 판문점의 책임 당사자인 미군을 겨냥,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고 미·북간 장성급 회담의 성사 및 핵사찰 문제와 관련해 추가적인 이익획득 등 미·북간의 각종 현안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려는 다목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해서도 ‘예전에도 종종 있었던 시위성 활동이며 군사적 무력도발 가능성은 낮으나 예의주시가 요망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합참의 정보 판단은 김동진 당시 합참의장이 정보판단관을 바꾼 직후(4월6일 1600시) 180도 바뀌게 된다. ‘판문점에 투입된 부대는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킨 호전적인 부대로 군사적 무력도발 가능성이 심각하게 우려되므로 철저한 군사대비태세가 요망된다’(96.4.8 밤 9시 KBS 뉴스).

    청와대보고서에 언급된 관련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보고서엔 북풍을 주도한 인물 5명의 당시 행적이 드러나 있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역시 김동신 전육참총장이다. 김남국씨의 일기엔 그와 유종하 외교안보수석의 통화 장면이 청와대보고서보다 훨씬 자세히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사실이라면 군 지휘계통을 어지럽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와대보고서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당시 판문점 사태를 부풀리는 데 청와대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누가 거짓말했나

    김남국씨가 지난 4월18일 기자회견에서 두 사람의 통화사실을 폭로하자 김동신 전 육참총장은 언론을 통해 “유수석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고 통화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또 “작전본부장은 정보본부에서 판단한 자료를 토대로 작전상의 조처만 하는 자리”라며 “혹시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호남 출신인 나를 그런 일에 개입시키겠느냐”고 반박했다. 김씨는 ‘신동아’의 취재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가족을 통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는 말을 전해왔다.

    유종하씨도 김씨와 마찬가지로 통화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당시 청와대 상황실에 보고된 내용을 요약·정리해 대통령께 보고했지만 합참작전본부장(김동신)에게 전화 지시를 한 적은 없다”고 했다. 또 “청와대가 국방부장관이나 합참의장이 아닌 합참작전본부장에게 지시했다는 것은 관례에도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김남국씨는 명예훼손에 걸릴 엄청난 거짓말을 늘어놓은 셈이다. 아울러 청와대 조사관은 엉터리 조사를 했고 대통령도 허위보고서를 받은 셈이 된다. 과연 그럴까. 유일한 증거는 김남국씨의 일기. 당시 합참전략정보과장이었던 김씨는 정보판단을 ‘정직하게’ 한 죄로 합참 상황실(지휘통제실)에서 대기하며 며칠을 보내는 동안 두 사람의 통화를 세 차례 목격했고 이를 그때그때 일기에 적어놓았다고 한다.

    기자는 이 일기의 신빙성을 검증하기 위해 당시 합참 상황실(지휘통제실) 근무자들을 상대로 탐문취재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현역군인이라는 신분 제약 탓인지, 아니면 기억력의 한계 때문인지 명쾌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거나 “모른다”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96년 4월6일 직속상관인 김동신 합참작전본부장의 지시에 따라 한밤중에 전투복을 입은 부하장교들을 뒤에 배치시키고 기자들에게 긴급브리핑을 실시한 당시 합참 작전처장 신상길 준장은 “브리핑을 여러 번 했던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종하 당시 외교안보수석과 김동신 작전본부장과의 통화 여부에 대해선 “모른다”며 비켜갔다. 그는 또 당시 워치콘 상황에 대해 “알아도 말할 처지가 아니다”며 입을 다물었다.

    당시 합참상황장교로 지휘통제실에 근무한 것으로 알려진 영관장교 A씨는 “그때 근무했는지 안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워치콘 상황에 대해선 “상황실은 워치콘 결정과 상관없다”며 “기억나는 게 없다”고 말했다. 또 김남국씨에 대해선 “그 양반이 가끔 (상황실로) 내려와 커피를 사주곤 했는데 그래서 내 이름을 기억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합참상황장교로 지휘통제실에 근무했던 영관장교 B씨. 당시 한 일간지엔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 신상길 준장의 뒤에 B씨가 다른 영관장교 2명과 함께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세 명 모두 전투복 차림이다. 그러나 B씨 또한 “본부장(김동신)이 누구와 통화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자는 약 2주 동안의 수소문 끝에 문제의 통화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영관장교 C씨를 만날 수 있었다. 96년 4월 판문점 사태가 일어났을 때 C씨는 지휘통제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유종하 외교안보수석과 김동신 합참작전본부장이 통화한 사실과 김작전본부장의 복명복창, 김작전본부장의 지시사항을 전달하던 신상길 준장의 고함을 기억했다.

    뿐만 아니라 상황이 종료되던 시점인 4월8일 20시30분께 김작전본부장이 유수석과 통화한 후 “청와대에서 여론이 15% 이상 좋아졌다고 한다”고 말한 것도 기억했다. 그는 또 김작전본부장의 얘기가 끝난 다음 영관장교 D씨가 “여론이 30% 이상 좋아졌을 텐데 청와대에서 잘못 파악한 것 같다”라며 “총선 승리합시다”라고 박수를 유도한 사실, 몇몇 장교가 따라서 박수친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당시 군 수뇌부가 안 하던 짓을 했다”며 “우리는 (그런 짓을) 안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또한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인 북한군의 무장병력 수가 과장됐다고 말했다.

    기자는 C씨의 증언을 확보한 후 유종하씨에게 이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씨는 여전히 당시 김동신 합참작전본부장과의 통화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외교안보수석으로서 합참의장과 통화할 수는 있지만 군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작전본부장과 통화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말엔 일리가 있다. 김남국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유씨가 합참 상황실로 전화해 찾았던 사람은 김동진 합참의장이었다. 그런데 합참의장이 상황실에 없자 김동신 작전본부장과 연결됐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확인을 거듭 요구하자 유씨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며 한 발 물러섰다.

    96년 4월5일 국방부회의에서 처음 워치콘 격상을 지시한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은 북풍의 실체를 밝히는 데 꼭 필요한 중요한 증인이다. 그러나 이 전장관은 때마침 발생한 린다 김 사건 탓인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집전화와 휴대폰에 몇 차례 메시지를 남겼으나 끝내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증인은 뒷날 국방부장관이 된 김동진 당시 합참의장. 96년 4월6일 합참 지휘통제실에서 대책회의를 주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20여명의 장성 및 영관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남국 당시 전략정보과장을 “정보판단을 잘못했다”며 질책한 사실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매일 오전 합참회의를 열었지만 그것(판문점 상황) 때문에 별도의 대책회의를 열지는 않았다는 것. 그는 또 “어떻게 지휘관이 의도적으로 적 상태에 대한 평가를 왜곡·과장할 수 있겠느냐”며 “김씨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이제와서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김씨를 비난했다.

    기억을 잘 못하기는 유정갑 당시 합참정보본부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부하장교들에게 워치콘 격상 공문을 작성, 주한미군측에 전달하도록 지시한 일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이 기자들을 군사통제구역인 합참 지하 벙커(지휘통제실)에 데리고 들어갔던 일은 기억해냈다.

    청와대보고서엔 북풍사건 관련자들의 당시 행적은 드러나 있지만 김남국씨의 기자회견 직후 불거진 ‘날짜 논쟁’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렇지만 ‘날짜 논쟁’은 북풍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국방부는 김남국씨의 기자회견 후에도 “북풍은 없었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날짜 늦춰 홍보 극대화?

    김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군의 96년 판문점 무력시위 날짜에 대해 “실제로는 4월4∼6일 발생했으나 청와대와 국방부가 총선을 앞두고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날짜를 실제보다 하루씩 늦춰 발표했다”고 폭로했다. 날짜를 하루씩 늦추는 것과 홍보효과 극대화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북한군이 처음 무력시위를 벌인 4월4일 국방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브리핑도 하지 않았다. 합참 상황실에서 이를 대수롭지 않게 판단한 탓이다. 그래서 4월5일자 신문엔 북한군 도발에 관한 기사가 전혀 실리지 않았다. 거기다 그해엔 신문의 날인 4월7일이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4월6일자 신문이 발행되지 않았다. 여당쪽에서 보면 선거에 엄청난 호재가 될 일이 이틀 동안 신문에 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대국민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판문점 상황을 하루씩 늦춰 발표할 필요가 있었다.

    북한군은 총 사흘간 시위를 벌였는데, 시위 날짜를 하루씩 늦추면서 언론 브리핑 횟수를 늘릴 명분이 생겼고 주말을 넘겨 월요일인 8일자 신문에까지 판문점 상황을 보도하게 만들 수 있었다.”

    김씨의 주장대로 당시 신문들을 살펴보면 4월6일엔 휴간했고 일요일인 4월7일자부터 북한군의 무력시위사태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국방부 발표대로라도 북한군은 7일 이후 더 이상 무력시위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총선 전날인 10일까지 북한군의 ‘엄청난’ 위협과 국군의 ‘단호한’ 대응태세를 연일 특집으로 보도했다.

    국방부가 기자간담회에서 공개한 정보상황일지엔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가 발생한 기간이 96년 4월5∼7일까지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김씨는 상황일지 조작 의혹을 제기한다. 과연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는 걸까. 국방부가 당시의 일지를 조작했으리라고 믿기지 않는 만큼이나 김씨의 주장이 틀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그의 일기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다. 일기에 따르면 96년 4월5일 아침 그를 포함한 합참정보본부 소속 장교 10여명은 정보참모부 차장인 박현진 소장의 주도로 OO비행장 부근에서 골프 모임을 가졌다. 식목일이라 당직자를 빼곤 휴무였기 때문이다.

    오전 6시께 필드에 나갔는데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박소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보본부 소속 징후경보실 상황장교가 간밤의 상황을 보고하는 전화였다.

    통화를 마친 후 박소장은 당시 전략정보과장이던 김남국 대령과 징후경보과장 정양 대령을 불렀다. 상황장교가 박소장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전날인 4월4일 18시부터 약 1시간반 동안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이 트럭을 타고 무력시위를 벌였다는 것.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약 3분 동안 토의했는데 과거 비슷한 사례에 비춰 특별한 군사적 위협은 없을 것으로 판단, 박소장은 운동을 계속했다.

    다만 김대령과 정대령은 상황 판단과 보고서 작성을 위해 골프를 취소하고 출근했다.

    일기 내용대로라면 북한군이 처음 무력시위를 벌인 날짜가 4월4일이라는 김씨의 주장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박현진씨(중장 예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묻자 “몇 년 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운동을 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며 입을 다물었다.

    증언자들

    일기보다 더 김씨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예비역 장교 2명의 증언이다. 예비역 소령인 김규열씨. 96년 4월 판문점 사태가 벌어졌을 때 김규열 소령은 합참 징후경보과에서 상황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상황장교들은 3교대로 근무했는데 4월5일 근무자가 바로 김소령이었다는 것. 그는 지난 5월3일 기자와 만나 “그날(96년 4월5일) 아침 전임자와 교대할 때 전임자로부터 ‘어젯밤 북한군이 (판문점에) 들어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한 명의 증언자는 역시 예비역 소령인 윤길상씨. 97년 10월 전역한 윤씨는 북한군의 판문점 도발이 있었던 96년 4월 1사단 정보처 소속의 정보항공장교였다. 지난 5월4일 확인한 그의 증언은 국방부 발표를 완전히 뒤집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매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북한군은 틀림없이 4월4일에 처음 무력시위를 벌였으며 국방부 발표는 잘못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4월4일 자신이 사단 일직사령으로 근무하며 야간에 JSA(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연락장교(중위)로부터 북한군 도발 상황을 보고 받았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사단본부에 이를 보고함과 동시에 군단 군사령부 합참(징후경보과)에 상황발생을 알리는 팩스를 보냈다고 했다.

    윤씨는 “4년 전 일인데 날짜를 착각했을 가능성은 없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95년 10월 임진강에 침투한 무장공비 2명 중 1명이 도주한 사건 이후 사단장 지시로 휴무일엔 반드시 중령급이, 토요일이나 휴무일 바로 전날은 소령급 장교가 사단 일직사령을 서게 돼 있었다. 4월5일은 식목일로 휴무일 아니었나. 국방부 발표대로라면 내가 4월5일에 근무했다는 얘긴데 규정에 맞지 않게 일직근무를 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4월4일이다. 상황일지는 조작할 수도 있다. 당시 보고계통상에 있었던 각 부대의 상황일지와 당일 근무한 장교들의 진술 및 필적을 대조해 확인해보면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윤씨의 증언은 김남국씨의 기자회견 이후 이제껏 진행된 ‘날짜 논쟁’을 단숨에 잠재울 만큼 위력적이다. 아마도 그런 증언이 현역장교로부터 나왔다면 그 폭발력은 훨씬 컸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취재과정에 접촉한 현역장교들의 기억력은 예비역에 비해 떨어졌다. 당시 합참 지휘통제실에서 근무했던 영관장교 Y씨, 징후경보과에 근무했던 영관장교 K씨 등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잘 모른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현역장교의 증언을 확보한 것은 지난 5월8일. 당시 합참 합동작전과 소속으로 상황실에 근무했던 영관장교 K씨가 그 주인공으로 그는 워치콘 격상 날짜에 대해 묻자 “첫째날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첫째날이란 물론 북한군이 처음 무력시위를 벌인 날을 뜻한다. 이어 그는 “첫째날이 언제였냐”는 물음에 “4월4일”이라고 명확히 답변했다. 국방부 발표를 뒤엎는 새로운 증언이 현역장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북한군의 최초 무력시위 발생 시각에 대해선 “4일밤 12시가 다 돼 보고 받았다”며 김남국씨나 윤길상씨와는 다르게 말했다. 그렇지만 윤씨의 증언, 곧 당시 1사단의 상황전파시각(18시30분∼20시30분)을 들이대며 다시 묻자 “1사단의 보고시각은 그럴 수 있지만 우리는 분석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라고 말해 상황발생시각이 밤 12시 이전임을 인정했다.

    그동안 이 문제에 관한 현역장교의 증언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당시 합참 징후경보과 징후분석장교로 근무했던 김대영 중령은 지난해 이 사건에 대한 청와대 조사 과정에 김남국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증언은 주로 워치콘 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역장교인 K씨의 증언은 북한군의 무력시위에 관한 ‘날짜 논쟁’에 쐐기를 박을 만한 것이다.

    또 하나의 ‘날짜 논쟁’은 대북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 격상 시점에 관한 것. 워치콘 변경은 한국군이 맘대로 할 수 없다. 주한미군과의 협의를 거쳐 한미연합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김남국씨에 따르면 당시 국방부는 이런 절차를 무시한 채 4월5일 오후 일방적으로 워치콘 격상 결정을 발표했다. 그런 다음 미군측을 끈질기게 설득해 4월7일에 사후합의를 이끌어냈고 이를 근거로 공식문서에 워치콘 격상날짜를 4월5일로 소급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역시 관련 문서를 내세우며 반박했다. 국방부는 김씨가 기자회견을 한 직후 일부 언론에 당시 워치콘 격상과 관련한 연합사 문서 및 팩스를 보여줬다. 당시 연합사 문서엔 ‘96년 4월5일 대북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을 3에서 2로 변경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문서에 나타난 워치콘 변경시각은 ‘Z(런던 타임) 050900’.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면 5일 오후 6시가 된다. 국방부에 따르면 주무부서인 합참 징후경보과가 연합사로부터 이 내용을 팩스로 받아본 시각은 5일 오후 6시32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방부의 발표내용엔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 많다. 첫째 의문점은 국방부의 성급한 발표. 당시 언론보도(96년 4월7일자 일간지)를 보면 워치콘 2가 발효된 것은 4월5일 오후 6시25분이다. 이번에 국방부가 내놓은 당시 합참 상황일지에 적힌 워치콘 격상 시각도 이와 같다. 그런데 당시 국방부 정책실장 박용옥 소장은 그날 오후 3시쯤 언론 브리핑을 통해 워치콘 격상조치를 미리 발표했다. 4월5일에 워치콘이 격상됐다는 국방부 주장이 맞다 치더라도 연합사 승인 시점보다 무려 3시간여나 앞서 발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박차관은 “당시 기자회견 직전 한미연합사부사령관 장성 대장으로부터 전화로 연합사가 워치콘 격상을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장성씨는 일부 언론 인터뷰에서 “워치콘 격상은 한미연합사령관의 고유권한인데 내가 월권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전화로 그런 내용을 통보한 적이 없다”고 말해 국방부와 박차관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장씨의 말대로라면 당시 국방부가 연합사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워치콘 격상을 발표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당시 북한군이 처음 무력시위를 벌인 날도, 워치콘이 격상된 날도 모두 4월5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국방부에 따르면 4월5일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도발한 시간대는 오후 6시30분∼8시. 그렇다면 국방부는 몇 시간 후 판문점에서 북한군의 무력시위가 있을 줄 미리 알고 워치콘 격상을 발표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북한군쪽에서 판문점 도발 계획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국방부의 주장은 중대한 딜레마에 빠진다. 북한군의 무력시위가 없었는데도 워치콘을 격상한 셈이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이에 대해 “전날인 4월4일 북한군이 ‘비무장지대 의무포기 선언’을 하는 등 긴장이 고조됐기 때문에 워치콘을 격상하게 됐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행동이 아닌 ‘선언’만으로 워치콘을 격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이 전장관은 김남국씨의 기자회견 직후 ‘내일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워치콘 격상 이유에 대해 “비무장지대 병력 투입 때문이지 북한이 그런 발언을 한다고 해 (워치콘을) 올리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워치콘 격상 발효를 알렸다는 연합사 팩스도 논란거리다. 당시 합참에 근무했던 장교 중 일부가 팩스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워치콘 변경에 관한 사항은 합참 징후경보과 소관이며 그 실무자는 징후분석장교다. 당시 연합사에서 워치콘 관련 팩스를 보냈다면 징후분석장교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징후분석장교는 현재 전방부대의 예비군 대대장을 맡고 있는 김대영 중령. 그런데 김중령은 당시 문제의 팩스를 본 기억이 없다.

    그의 증언.

    “그날(4월5일) 저녁 특별한 상황이 없는 가운데 옷을 갈아입으려고 숙소에 들렀다가 밤 9시 뉴스에서 워치콘이 격상됐다는 보도를 보고 깜짝 놀라 급히 부대로 달려가 보니 정식 상황 계통으로는 경보전파가 안 돼 있었다. 그에 따라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군 지휘부와 실무진이 따로 놀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은 당시 징후경보과 상황장교였던 김규열 예비역 소령에게서 들을 수 있다. 4월5일 근무자였던 그는 김중령과 마찬가지로 그날 워치콘 관련 팩스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팩스가 오면 몇 장을 복사해 정보본부장 합참의장 장관 등에게 동시에 보내 상황을 전파한다. 북한군이 두 번째 들어온 날 근무한 게 확실한데 그날 그런 팩스는 보지 못했다. 만약 그날 워치콘이 올라갔다면 엄청 바빴을 텐데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

    김대영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워치콘은, 김남국씨의 주장대로 4월5일이 아닌 4월7일께 격상됐을 개연성이 크다. 김중령은 4월5일 오후 연합사를 찾아가 워치콘 격상 문제를 협의했으나 미군측의 반대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유정갑 당시 합참정보본부장의 지시에 따라 4월6일, 7일 이틀에 걸쳐 워치콘 격상을 건의하는 한국측 문서를 갖고 다시 연합사를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7일 오전까지도 미군측은 워치콘 격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 국방부 주장대로 워치콘이 4월5일 격상됐다면 유정보본부장이 6일 아침 김중령에게 그런 지시를 한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기자는 5월초 “워치콘 격상이 실제론 4월7일 오후쯤 이뤄졌지만 관련 문서엔 4월5일 격상된 것으로 날짜가 소급돼 기록됐다”는 김중령의 증언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김중령은 지난해 10월엔 대통령에게, 지난 2월엔 국방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북풍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국방부는 김남국씨가 기자회견을 한 직후인 지난 4월20일 전방에 있는 김대영 중령을 국방부로 불러들여 조사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김중령과 군 고위관계자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김중령은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유엔사 대변인의 증언

    예비역 소령 윤길상씨는 워치콘 상황에 대해서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4월7일 오후 사단에 워치콘 격상에 관한 상황이 전파됐다. 비밀 팩스가 왔는데 하단에 ‘상기 정보감시태세 변경은 4월5일 18시25분으로 소급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속으로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 6월25일 일어난 전쟁을 6월27일 일어났다고 고치는 것과 같은 미친 짓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정갑 당시 합참정보본부장의 증언도 국방부 주장과는 달리 워치콘이 4월5일에 격상되지 않았을 상황을 엿보게 한다.

    “워치콘 변경에 대해선 미군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 당시 워치콘이 격상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런 일에 대해선 늘 미군측과 의견이 달랐다. 우리는 몸이 달아 격상을 요구했는데 미군측이 시간을 끌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청와대보고서에 따르면 유씨는 4월6일 당시 합참징후경보과장 정양 대령과 징후분석장교 김대영 중령에게 미군측과 워치콘 격상문제를 협의하도록 지시했다. 유씨는 이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나 “김대영 중령이 그렇게 증언했다”고 일러주자 “실무자가 그렇게 얘기했다면 맞겠지”라며 4월6일 이후 워치콘이 격상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청와대 보고서는 당시 청와대와 국방부가 정치적인 목적에서 판문점 상황을 부풀렸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 결론은 그다지 틀린 것 같지 않다. 당시 정국을 되짚어보면 그런 의혹을 제기할 만한 일들이 적잖이 발견되는 까닭이다.

    96년 3월말 한국군은 호국훈련을 실시했다. 호국훈련은 NPT(핵확산금지협약)를 탈퇴한 북한을 달래기 위해 일시 중지한 팀스피리트훈련을 대신한 것으로 후방에서 육해공군 합동으로 치러졌다. 김남국씨에 따르면 이 훈련은 원래 그해 4월 중순 이후에 실시하도록 계획된 것이다. 그런데 국방부가 96년 1월 월간회의를 통해 훈련시기를 앞당겨 총선이 임박한 3월말에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회의석상에선 “지난해 지자제(선거)에서 참패했으니 총선에선 뭔가 도와줘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오갔다고 한다.

    북한군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광진 차수(대장)와 양형섭 최고인민회의의장의 ‘한반도 전쟁 불사론’이 나온 것은 바로 호국훈련이 실시되던 3월말이었다. 이어 4월4일 오후엔 ‘비무장지대 임무포기 선언’을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3일 동안(국방부 발표대로라면 4월5∼7일) JSA(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북측 지역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당시 북한군의 행동이 특이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시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다. 김남국씨는 “20여년 동안 정보분석을 하며 얻은 결론”이라며 “당시 북한군의 행동은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JSA에서 도발을 일으킬 수 없다는 점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1사단 정보장교였던 예비역 소령 윤길상씨는 “JSA 지역을 제외한 모든 전선은 평온했으며 특이징후가 없었다”며 “결코 워치콘을 격상할 만한 위기상황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합참징후경보과 분석장교로 주한미군측과 워치콘 격상에 관한 협의를 벌였던김대영 중령에 따르면 당시 한미 정보파트 실무자들의 의견도 윤씨의 견해와 다르지 않았다. 김중령은 진술서를 통해 “총선을 앞두고 발생한 사건이라 고위층에서 과잉대응한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이를 만류하거나 반대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주장했다.

    “워치콘 변경은 한미 정보실무자의 건의로 연합사령관이 최종 승인해야 가능하다. 당시엔 판문점 시위사건 외 어떤 위협징후도 없었는데 워치콘 격상 결정과정에 한미 정보실무자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워치콘 격상과 관련한 연합사 문서(영문)를 보면 당시 미군측은 판문점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엔 “우리는 한미연합군의 특별한 감시태세를 검토하지 않는다. 아울러 이전보다 워치콘 등급을 올리거나 내리는 어떤 변화를 강조하지도 않는다”고 적혀 있다.

    이 문서엔 “연합사는 워치콘을 올린다”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그러나 문서의 전반적인 내용은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다. 문서를 읽어보면 오히려 당시 상황에 워치콘 격상이 불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북한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우리의 정찰 활동을 올리자는 사령부의 결정은 북한군의 적의가 현저하다거나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마지막 문구는 워치콘 격상이 형식적으로 이뤄졌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낳는다. 워치콘2란 ‘현저한 위협징후가 보이는 경우’에 발령되는 정보감시태세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96년 6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던 당시 유엔군사령부 대변인 짐 콜스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한국 언론엔 워치콘을 3에서 2로 높였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것은 한국 국방부가 발표한 것이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숫자를 써서 발표한 적은 없다. 다만 워치콘의 수준을 높였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경계태세를 강화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 대한 감시를 좀더 했을 뿐이다. 판문점 사건 때문에 어떤 행동을 더 취할 필요는 없었다… 한국 정부의 어떤 사람이 발표한 성명이나 발표문들은 때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언급했다… 북한이 성명(비무장지대 임무포기 선언)을 공식발표하고 이어 행동을 취한 점은 과시에 불과하다. 그 시기에 북한은 발포한 일도 없고 우리측을 다치게 하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짐 콜스의 증언은 96년 4월5일 한국 국방부가 발표한 ‘워치콘 격상’이 미군측과 합의 없이 이뤄졌거나 미군측의 ‘마지못한 동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였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낳고 있다. 그렇다면 4월5일이든 4월7일이든 당시 전군에 전파된 ‘워치콘 격상’은 등급태세를 바꾸는 실제적인 조치가 아니라 시늉만 낸 형식적인 조치였을지 모른다. 실제로 당시 미군측은 워치콘2가 발령되면 반드시 따르는 조치들, 이를테면 정찰기 수를 늘리거나 미 본토 정보분석팀을 급파하는 일들을 하지 않았다. 한국측의 조기경보기 파견 요청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직무에 충실한 ‘죄’

    김남국씨는 당시 북한의 판문점 무력시위는 한국의 총선 사흘 전인 그해 4월8일 뉴욕에서 열기로 예정된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후속협상에서 뭔가 얻어내려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짐 콜스 역시 인터뷰에서 그런 견해를 드러냈다. 그것은 북한측이 미국과의 협상을 앞두고 즐겨 쓰던 수법 중 하나로 북한측의 움직임을 오랫동안 관심 있게 지켜보고 분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일이었다. 당시 합참전략정보과장 김남국씨가 그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올바른 판단과 보고를 했던 김남국 대령은 군 수뇌부에 의해 철저하게 매도됐다. 합참전략정보과장 자리를 거치면 장군으로 승진하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김대령은 그 사건 이후 한직으로 내몰리고 승진에서 탈락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받다 지난해 12월 28년간 몸담았던 군을 떠났다. 김씨뿐만 아니다. 유정갑 당시 합참정보본부장으로부터 미군측으로부터 워치콘 격상에 관한 협조를 제때 끌어내지 못했다고 질책을 들은 김대영 중령 또한 승진하지 못한 채 한직을 돌며 먼저 대령 계급장을 다는 후배들을 지켜봐야 했다. 반면 당시 청와대와 군 수뇌부의 주문에 충실히 따랐던 일부 정치군인들은 ‘출세 가도’를 달렸다.

    96년 북풍사건에 대해 청와대와 국방부 주변에선 “과거 일을 들춰 국익에 도움이 될 게 없다”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시각은 취재과정에 접촉한 예비역 장성들과 현역 장교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지난해 2월 김남국씨가 새 정부의 국방부장관 후보로 거론되던 C의원과 L의원을 찾아갔던 일이다. 두 사람의 시각은 대조적이었다. C의원은 김씨가 북풍사건의 내막을 털어놓자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런 짓 안 했겠느냐. 군을 시끄럽게 하지 말라”며 묵살하고 오히려 김씨를 질책했다고 한다. 반면 L의원은 “장관이 되면 반드시 진상을 파헤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북풍사건에 직·간접으로 관련됐던 군인사들이 지금 군수뇌부를 형성하고 있고 청와대 및 국방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는 점도 진상 조사에 걸림돌이 되는 듯싶다.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은 당시 소장으로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한국측 수석대표로 누구보다 판문점 상황을 잘 아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사정 때문인지 외교안보수석실은 북풍사건에 대한 모수석실의 조사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국방부 정책실장이었던 박용옥 국방부차관은 워치콘 격상을 허위발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청와대 국방비서관 L준장은 당시 박용옥 정책실장 밑에서 정책실총괄기획과장을 지냈다.

    청와대보고서는 당시 정치적 중립을 취하다 피해를 입은 군인들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위의 범죄사실을 역사와 국민 앞에 엄정히 밝혀 이 땅에 다시는 조직적인 동일범죄가 발생되지 않도록 일대 경종을 울려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며 북풍사건의 철저한 조사와 관련자 처벌을 건의하고 있다. 정부 당국은 지금이라도 96년 북풍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죄로 불이익을 받았던 양심적인 군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할 것이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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