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난치병 名醫’로 소문난 한의사 배원식 옹

韓中日 주름잡은 ‘67년 현역’최고참

  • 입력2006-09-22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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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회현동, 옛 대연각호텔 맞은편 도로변에 ‘배원식한의원’(전화 02-752-3398)이 있다. 의원이 세들어 있는 건물은 인근의 현대식 고층 건물들에 견주면 퇴락해 보이는 외양을 하고 있고, 한의원 간판도 자못 고전적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밝고 넓고 산뜻한 요즘의 한의원들과는 달리 18평의 비좁은 공간을 그나마 약제실과 진찰실로 쪼개 쓰고 있다. 조명마저 침침하다.

    당당한 현업 한의사

    그러나 그 한의원은 상당히 특별하다. 우선 배원식(裵元植·86)이라는 할아버지가 원장으로 있기 때문이다. 처음 신동아 편집실로부터 여든여섯 살이나 된다는 배옹을 만나보라고 권유받았을 때 두 가지 걱정이 앞섰다. 그 연배에 이른 할아버지라면 귀도 어둡고 총기도 흐려서 대화가 제대로 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첫째 걱정이었다. 그리고 특정한 분야에 평생을 바쳐 일가를 이뤘다는 사람은, 세상 흐름 따위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고집쟁이인 경우가 많더라는, 다분히 경험에서 비롯된 걱정이 다른 하나였다.

    두 가지 걱정 중에서 하나는 적중했고, 하나는 빗나갔다. 그는 미수(米壽)를 목전에 둔 노인답지 않게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뒷전에서 젊은 의사에게 훈수나 몇 마디씩 보태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홀로 진찰실을 지키고 앉아서 밀려드는 환자들의 맥을 짚고 처방을 내리는, 당당한 ‘현업(現業)’이었다.

    그는 고집이 셌다. 얘기 나누는 중간중간에 “그건 사술(邪術)이야” “틀려먹었어” “나는 할 수 있지” 등의 언사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외길로 천착해온 분야가 첨단 의료기기나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양의(洋醫)가 아니라 전통의학인 한방(韓方)인 바에, 그의 고집은 더 이상 풍부할 수 없는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보통 사람들은 생명을 부지하기에도 숨찬 67년이라는 세월을 한의사로 지내왔으니, 그는 일제 말기부터 지금까지 우리 전통 의학의 변천사를 육성으로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사람이다.



    “작가 선생이 온다기에 예쁜 여자분이 오나 해서 가슴 두근거렸는데….”

    오전 11시, 한의원을 찾았을 때 처음 건네온 인사가 그런 농담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넉넉한 체구, 그리고 얼굴 생김새가 중국인을 닮았다. 그와 한의원을 통째로 북경이나 상해로 옮겨놓아도 어울릴 것 같은 풍경이다. 개원 초기에 그를 찾아왔던 사람들은 그 생김새를 보고 ‘중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었다. 물론 그는 ‘왕서방 할아버지’가 아닌 토종 한국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가 스무 살 되던 해에 한의사 생활을 시작한 곳이 중국이었으니까.

    그는 안경에 돋보기 렌즈를 끼운 채 뭔가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진맥하고 처방한 내용을 기록한 진료부(診療簿)였다. 위쪽 귀퉁이에 ‘강’ 혹은 ‘일’이라고 표시해둔 진료부가 섞여 있다.

    “‘일’이라고 표시해둔 것은 일본 사람이 나한테 찾아와서 진료받고 간 기록입니다. ‘강’ 표시는 후배 한의사들 모임에 나가서 강연할 때 자료로 쓰기 위한, 특수한 질병의 경우고요. 서울 시내에만도 한의원이 1700 개요. 그런데 40~50대 의사들은 모르는 병이 너무 많아. 내가 그 사람들한테 물려줄 게 뭐 있겠어요. 이런 임상경험을 전수하는 게 큰 보람이지.”

    배원식옹은 서울시 한의사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 참고자료로 쓰기 위해 표시해둔 진료부 한 장을 빼낸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이 환자는 버거씨병을 앓는 사람이오. 이 병에 걸렸다 하면 발가락부터 온몸이 썩어들어가요. 첨단 의술을 자랑한다는 양의들도 이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몰라요. 젊은 한의사들도 모르고. 그래서 나한테 찾아오는 건데, 내가 거뜬히 치료를 했단 말이야. 그런데 양의들은 나한테 치료 경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그래요. 설명을 하지. 음과 양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고 역학, 오행, 상생, 상극, 허실… 등등의 원리를 들어서 설명하면 양의사들이 알아듣기나 하나? 귀신 푸닥거리하는 소리로 여기지. 자기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생각은 안 하고 ‘한방은 비과학’이라고 매도를 하는 겁니다. 양방병원에 가서 병이 다 낫는다면 한의원들 모두 문 닫아야 돼요.”

    “불임 환자가 많아요”

    다른 진료부는 신장병의 일종으로 혈액 속 단백질이 오줌 속에 다량 배출되며 몸이 붓는 네프로제(Nephrose) 환자의 임상기록이다. 이 환자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S대학병원을 2년 동안 다니고 치료하지 못한 것을 배옹의 처방으로 낫게 됐다는 것이다. 신기(腎氣)가 허(虛)해서 생긴 병이다. 한의사들이 까다롭게 느끼는 질환자를 배원식옹에게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근래에는 양의들도 그에게 문의를 하거나 아예 치료 자체를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불임(不姙)을 치유했다는 그의 ‘화려한’ 전력이다. 아이를 갖고 못 갖는 것이야 단순한 질병 차원을 넘어 조물주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수백 명의 불임여성에게 아기 갖는 기쁨을 선사했다는 그의 자신감 넘치는 자랑을 받아들이기는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아이를 못 가진 전국의 신동아 독자들에게 “어느 한의원에 가면 당신도 애를 낳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을 때, 그 다음 일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못 미더워하는 내 눈초리를 눈치챘는지 배옹이 별도로 보관하고 있던 한 무더기의 진료부를 꺼냈다.

    “이거 보시오. 그 동안 내가 불임여성을 상대로 처방해준 진료부의 일련번호가 643번 아니오? 이 643명은, 나를 찾아온 사람들의 누계가 아니라 내가 처방해서 애를 낳게 해준 사람들의 숫자요. 불임여성뿐만 아니오. 아이를 갖지 못하던 사람들이 뒤늦게 임신을 하면 유산 확률이 높아요. 지켜보면 알겠지만 우리 한의원에는 양의원에서 유산 징후가 보여서 찾아온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중국에서 더 유명

    ─불임의 경우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자궁 발육이 약하거나 자궁에 문제가 있는 경우지요.”

    ─그것을 한방 처방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나는 찾아온 환자들에겐 어떤 문제로 찾아왔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맥을 짚어보면 알아요. 당신 이 상태로는 임신이 불가능한데 애는 낳았느냐, 이렇게 물으면 아니나 다를까, 그 문제로 찾아왔다는 겁니다. 내가 진맥을 해서 문제를 먼저 발견해야 처방을 해주는 것도 신나지. 여기 이 진료부에 적힌 환자의 경우 한약 석 제 먹고 3개월만에 임신했어요.”

    ─시도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있지요. 하지만 병원에서 죽는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이 벌떡 살아나는 경우도 있고, 문제 없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잖습니까.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 해보는 거지요. 소설가 선생이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인데, 내가 이래봬도 일본이나 중국에서까지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오. 그런 권위를 가진 사람이, 권위 있는 신문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헛소리를 하면 안 되지.”

    일본과 중국에서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는 근거가 있다. 그는 외국 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의 ‘동아의학회’로부터 명예회원증을 받았으며 이 단체의 명예고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은 조금 더 특별하다. 섬서성(陜西省) 중의과대학을 비롯한 두 군데 대학에서 명예교수로 추대됐으며 중국 중의과연구원에 ‘배원식장학회’를 설립해두고 있다.

    서안(西安)에 가면 당나라 시대의 전설적인 중의학자 손사막(孫思邈)의 묘지가 있다. 중국 당국에서는 중국 전체의 중의학 의사 중에서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의술활동을 한 명의(名醫) 95명을 선정하여 99년 5월18일에 성대한 발표행사를 갖고, 이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손사막의 묘지에 세웠는데, 여기에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배원식옹의 이름이 들어 있다.

    ─특별하게 아프신 데는 없습니까?

    “다리가 조금 아파요. CT촬영을 해서 확인해봤더니 척추가 굽어지면서 신경을 압박해서 생긴 통증이에요. 젊은 나이라면 칼슘을 섭취해서 뼈를 부드럽게 하면 되는데, 나이가 들수록 힘들어요.”

    ─그래도 남들은 살아 있기도 힘든 연세에 아직 한의원을 꾸려갈 만큼 정정하시니 ‘건강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종종 받겠습니다.

    “선천적으로 건강체를 타고났다고 봐야지요. 문제는 늘 마음이 기뻐야 해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남을 상하게 할 궁리를 하면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몸도 망가져. 스스로 실력을 배양해서 인정받도록 노력해야지. 또 남자 같으면 정수(精水)를 아껴야 해. 부부관계를 하더라도 물은 안 빼내는 게 좋아요. 나는 20대부터 그 사실을 알고 주욱 지켜왔어요.”

    ─현대 의학에서는 사정을 참으면 전립선에 문제가 생겨서 배뇨장애가 올 수도 있다는데….

    “그렇게들 얘기하지. 하지만 실제 한방 임상에서 터득한 바에 의하면 정력이 강한 사람은 전립선 질환 같은 것 안 옵니다. 어쨌든 정수를 아껴야 건강하다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이고 있지 않소.”

    그렇다면 우리 식 나이로 여든일곱이나 되는 배옹이 지금도 성관계를 할까? 불손하고 짓궂은 질문이 스멀거렸으나 입 밖에 낼 엄두를 못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도 합니다. 한 달에 한두번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허허허….”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대화를 나눈 대여섯 시간 동안 그가 가장 우러러뵈는 순간이었다.

    ─사상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체질에 따라서 섭취를 권장하거나 금기시하는 음식을 정해두고 있던데요?

    “난 반대입니다. 본래 이제마 선생이 사상체질의학을 창안하게 된 동기가 뭐냐. 장질부사(장티푸스) 같은 역병이 돌 때, 같은 증상을 보인 환자들에게 똑같은 처방을 했는데 그중에서 약발이 안 듣는 사람이 있더란 말이지. 아, 특이체질이구나 해서 이제마 선생이 질병치료를 위해 체질 분류를 했던 거요. 그걸 악용해서 무슨 기계를 갖다놓고 신체 부위 어디를 두드려서 체질을 감별하고 또 체질에 따라 어떤 음식을 먹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건 틀렸어요. 오늘 뭐가 먹고 싶다고 몸이 부르면 그걸 먹어야 해요.”

    의생에서 약종상, 한의사로

    ─하지만 이제마의 체질의학설을 체계화해서 우리 의학으로 발전시켜나가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태음·태양·소음·소양 하는데, 이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다르고 저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또 달라요. 내 생각은 뭐냐, 가령 체질을 측정할 수 있는 항목을 10개쯤 정해두고 그중에서 7개 이상이 맞으면 태양인으로 분류한다든지 이런 기준을 만들어야 공신력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럼 선생님께서는 환자를 진단할 때 체질을 어떻게 분류하십니까?

    “어디, 작가선생, 시계 풀고 손목 한 번 이리 줘보시오.”

    배옹이 내 왼손을 끌어다 맥을 짚었다. 그리고 말했다.

    “습담(濕痰)체질이야. 수분이 많다는 얘기지. 지금은 이상이 없지만 앞으로 질병이 온다면 혈관계통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 근육통이나 척추통 같은. 술은 마셔도 잘 이겨낼 체질이지만 담배는 심하게 피우면 안 좋아.”

    술을 마셔도 좋다. 듣던 중 반가운 얘기였다.

    1914년 그는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목재상을 했으니 식민시절이었지만 궁핍을 모르고 자랐다. 보통학교 졸업식에서 1등에게 주는 ‘도지사상’을 받았는데, 상품으로 닭 3마리를 주더란다. 머리가 좋았다는 얘기다.

    진주사범에 진학하려 했으나 몸이 아파서 진학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부친의 친구인 김민구 의생이 운영하던 동제의원(한의원)에 들어갔다. 일제 강점기이던 당시에는 우리 의료계가 독일의학의 영향을 받고 있던 일본의학에 지배받고 있던 터라, 한의사는 ‘의생(醫生)’이라는 명칭으로 격하되고 있다.

    김민구 문하에서 중국인 이동원이 지은 ‘의학입문’을 팠다. 6개월 후 그는 “한의학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평양 의학강습소로 올라간다. 열일곱 살 때였다.

    한의사 자격시험이라 할 의생시험에 응시하려 했으나 무의면(無醫面) 지역에 결원이 생긴 인원만큼만 선발했고, 마땅히 지망할 지역도 없어서 포기했다. 만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아무 연고도 없는 국경 너머 만주로 건너갔다. 그가 건너간 곳이 길림성의 신경(新京), 요즘 이름으로는 장춘(長春)이고, 중국식 발음으로는 ‘창춘’이다.

    장춘에서 1년쯤 지낸 뒤 수도경찰청에서 주관하는 약종상(藥種商)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한약사에 해당하는데 일제는 그런 종류의 시험을 경찰관서 위생국에서 시행했다. 약종상 문을 여니 개업 첫날부터 손님이 ‘일곱 명이나’ 들이닥쳤다. 당시 약종상들은 약재만 파는 게 아니라 맥도 보고 진단도 했다.

    1932년 일제는 중국 동북지방에 괴뢰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게 되는데, 1938년에 만주국 건국 후 처음으로 만주국 한의사 국가고시가 시행되었다. 자격시험에 합격한 그는 약종상 시절에 벌어둔 돈을 기반으로 만주국에 정식 한의원을 차린다. 그러니까 그가 얘기하는 ‘67년 한의사 이력’은 약종상 시절까지 포함하는 것이고, 정식 한의사 자격으로 진료에 임해온 세월만 따진다면 금년이 62년째라 해야 옳다.

    만주시절 얘기에 한창 흥이 올라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병원 의사의 전화였다. 혈압 관련 질환자 한 사람을 보낼 테니 봐달라는 전화라 했다. 환자만 보내는 게 아니라 의사들이 배원식한의원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의사의 첫째 목적이 환자 병 낫게 해주는 것 아니오. 나는 양의사들을 우습게 봅니다. 그들은 21세기 첨단 의료기기인 복강경을 이용해 로봇으로 수술을 하지만 나는 얼굴 한 번 쳐다보고 맥을 짚어보면 금방 압니다. 그래서 치료에 성공하고 나면 양의들은 ‘소가 뒷걸음질하다 개구리 밟는 격’이라고 해버려요.”

    그러나 천하의 배원식도 못하는 게 있다. 침술이다. 그가 한의학을 공부할 때에는 침 놓는 사람을 ‘침쟁이’라 하여 천시하였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안 배웠다. “배웠더라면 참 재미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아쉬움이다.

    최남선과 맺은 인연

    장춘에 차린 그의 ‘대륙한의원’은 요즘 표현으로 ‘잘나갔다.’ 당시 그곳엔 한국인 3만여명이 거주했는데 대륙한의원을 찾는 손님은 한국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쪼끄만 한국 한의사가 영험하게 잘 본다’는 소문을 듣고 점령군이던 일본 관동군, 그리고 현지 중국인들까지 몰려왔다.

    “모리라는 왜놈 소위가 설사병이 나서 찾아왔는데 약 여섯 첩을 먹고 나았어요. 고놈이 돌아가서 헌병 준장을 소개했어요. 고놈이 또 나았겠다. 그런데 한번은 관동군 사령관이던 헌병 소장이 설사병이 났다고 급히 오라는 겁니다. 사령부에 가서 진맥을 하고 처방을 해서 병을 척 낫게 만들어줬지요.”

    오사카로 돌아간 사령관은 후임 사령관에게 배원식을 소개했고, 이후 식민지 출신 의사였던 배원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점령군 간부들의 단골의사가 됐다. 배옹이 잊을 수 없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 3·1운동으로 투옥됐다 석방된 최남선은 만주로 건너가 만주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후반기 육당의 친일행적은 여기서는 제쳐두기로 한다).

    교수 시절 간장이 나쁘던 육당이 각혈 증세로 대륙한의원을 찾아와 배원식의 처방으로 치료를 받았다. 당시에 서울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두 아들을 두었던 육당은, 장춘으로 올라온 아들들이 치료를 해주겠다고 했으나 마다하고 배원식의 처방을 고집했다는 것. 이후 육당은 대륙한의원과 배원식의 열렬한 선전자가 되었다.

    해방되던 해에 그는 귀국했다. 그러니까 1999년에 중국 당국에서 95인의 ‘20세기 최고 명의’를 선정할 때 배옹이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주에 머물면서 8년여간 중의(中醫)로 활동했던 초기 이력에다, 그걸 인연으로 현재까지 중국과 학술교류를 꾸준히 해온 때문일 것이다. 만주에서의 8년 동안 돈 좀 벌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단히 많이 벌었다”고 대답했다. 주로 전염병 치료로 번 돈이었다. 만주 시절 당국에서도 다치모도(達本·배원식의 일본식 이름)가 제출한 ‘전염병에 대한 임상보고서’를 가장 신뢰했다고 그는 말한다.

    1945년 12월, 그는 서울 회현동 지금의 한의원 자리에 터를 잡았다. 그러니까 같은 자리에서 55년째 똑같은 간판을 내걸고 있는 셈이다. 일본인들이 살던 서울시내의 유일한 아파트였던 그 건물은 애당초 3층이었다. 한의원 개업할 공간을 찾던 배원식은 그 적산가옥의 1층 18평짜리 음식점 터를, 음식점 주인으로부터 권리금 94만원을 주고 ‘샀다.’

    그런데 훗날 자유당 국회의원 김아무개가 막강한 정치적 ‘끗발’을 이용하여 그 건물의 소유권을 통째로(물론 공짜로) 차지하더니 배원식이 지불한 94만원은 없던 일로 해버리고 세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 그 건물에 그런 사연이 있다.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한의사들 모임인 ‘의생협회’에서 ‘동양학관’이라는 강습소를 만들었다. 배원식은 의생 중에서는 가장 어린 나이(30세)로 일제에 의해 도태된 한의학을 되살리기 위한 강습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박호풍(朴鎬豊), 김영훈(金永勳), 박성수(朴性洙) 등이 한의사협회(의생협회)를 창건하기 위해서 주도적으로 뛰었던 사람들이다. 이 중 박호풍과 김영훈은 왕조시대의 전의(典醫) 출신이다.

    전쟁이 터졌다. 1·4후퇴로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피란지에서 열린 국회에서 국민의료법이 만들어진다. 국민의료법 중에 한의사 관련조항이 포함됐는데 이번에는 양의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의생’을 ‘한의사’로 개명하는 것이야 상관없으나, 한의사들은 ‘스승사(師)’자가 아닌 ‘선비사(士)’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산 주재 한의사들은 자금을 마련하고, 서울에서 내려간 한의사들은 정치적 로비를 맡아 뛴 끝에 어렵사리 ‘師’라는 글자를 달 수 있었다.

    한의과대학 출범에 참여

    국민의료법이 통과되자 한의사들은 부산 피란지에 천막 하나를 세워 ‘서울한의과대학’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우리나라 한의과대학의 시초다. 전의 출신 박호풍이 학장을 맡고, 배원식도 강사를 맡아 50∼60명의 학생들에게 ‘의학입문’ ‘동의보감’ 등을 가르쳤다.

    서울이 수복되자 서울한의과대학은 동양의과대학으로 명칭을 바꿔 서울 안암동에 들어서고, 얼마 후 동양의약대학으로 개칭된다. 그러나 한의사회가 재정난에 봉착하면서 대학 운영이 어려워졌다. 이때 동양의약대학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경희대 조영식 총장이었다.

    조총장은 “그런 부실덩어리를 인수하면 대학 전체가 망한다”는 교수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인수를 강행하여 오늘날의 경희대 한의과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대학에 한의사 양성체계가 도입된 내력이 대충 이러하다. 배원식은 54년에 실시된 한의사국가고시에도 합격하였다.

    배옹이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부인 김백동 여사와 근년에 찍은 사진이다. 배옹은 사진 속의 김여사를 가리키면서 “잘생겼지?” “틀이 좋잖아?” “참 예쁘게 잘생겼어”를 연발했다. 만주 시절 평안북도 덕천 출신인 김여사와 연애결혼했는데, 1914년 동갑이니 자랑할 만한 해로(偕老)다.

    국제전화가 왔다. 도쿄에 있는 큰아들 배정덕씨(57)의 전화다. 하루에 두세 번 연락이 오는 건 보통이다. 단순한 문안인사는 아니라는데, 무슨 용무가 그리 잦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는 것일까?

    정덕씨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의과대학 유학을 마친 뒤, 일본의 동경대학병원에 들어가 17년간 의사로 재직했다. 그런데 성형외과 전문의인 정덕씨는 대학병원을 그만둔 뒤 엉뚱하게도 도쿄에 ‘배한방의원’을 차렸다. 뒤늦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의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는 까다로운 환자가 찾아올 때면 서울의 아버지께 전화를 해서 도움을 청한다.

    이번에는 부자간에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었다.

    “술집에 나가는 우리 동포 여잔데, 늘 마음에 압박을 받는 데다 피임약도 복용하고 있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고, 잠도 잘 못 잔다는 거요. 그래서 내가 노이로제 치료약 소요안신탕(逍遙安神湯)을 처방해주라고 했지. 또 한 환자는 근육통으로 어깨가 몹시 아프고 손가락 통증도 있는 환자래요. 그 환자한테는 개갈탕이라는 약을 처방해주라고 했지.”

    그러니까 배옹은 서울 회현동에 앉아서 한국과 일본의 환자를 동시에 진료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아들 배정보씨(53) 역시 서울 강남에서 ‘배이비인후과’를 개업한 의사다.

    “우리 집 노친네(부인 김여사를 지칭)가 처녀적부터 자식을 낳으면 의사로 키우는 게 꿈이었대요. 그래서 의학공부 안하겠다는 놈들을 빗자루로 두들겨 패가면서 닦달해서 기어이 의사로 만들어냈어요. 요즘은 둘 다 아주 열심히 합니다.”

    배옹이 건네준 자신의 약력서에는 그가 맡았거나 맡고 있는 직함이 나이만큼이나 길게 적혀 있다. 한국한의사협회 회장을 두 차례나 지냈고, 1984년에 대한한의사협회 국제위원장에 피선된 이래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 한의학회의 국제교류를 책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일본의 동아의학회와 학술교류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회원이 40만명에 이르는 중국의 중의학회와는 자매결연을 해서 상대 국가를 오가면서 학술발표회를 하고 있어요. 76년에 열렸던 제1회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 대회장을 내가 맡았거든.”

    비법은 감추지 않고 공개

    그는 중국에 한의학을 공부하러 가 있는 한국 학생들이 현지에서 ‘괄시받을까봐’ 중국 중의연구원에 배원식교육장려기금회를 설립해두고 매년 중국 학생과 한국 유학생을 6명씩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배옹은 67년 동안 자신이 몇 명이나 되는 환자를 진맥하고 처방했는지 알지 못한다. 개인별 진료기록카드격인 진료부도 집안 지하창고에는 더 이상 보관할 공간이 없어서 트럭으로 실어냈을 정도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많다.

    박동양이라는, 포항제철에 근무하던 사람이 배원식한의원을 찾아왔다. 오른손 손가락 전부가 갑자기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은 지가 1년이 넘었다는 사람이었다. 주먹을 쥔 채 지내야 하니 글씨를 쓸 수도 없는 처지였다. 국내 대학병원은 물론 일본의 유명 병원을 찾아다녀봤으나 치료법은커녕 병명도 모른다 했다.

    배옹은 병인(病因)을 풍습(風濕)으로 진단했다. 풍습이 근육에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는 많다. 병의 원인인 풍습을 없애기 위해 혈액순환을 활발히 하고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는 약을 처방했다.

    “탕약 한 제를 지어주면서 두 제까지 써보고 반응이 없으면 나도 두 손 들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딱 한 제 먹고나니 손에 뭔가 느낌이 온답디다. 그 사람이나 나나 희망을 가지고 약을 재차 처방했지요. 조금씩 펴지기 시작하던 손이 칠팔 개월 뒤에는 활짝 펴져서 완치됐어요.”

    바로 그 맛 때문에 한의사 노릇을 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배옹은 불치병을 치료했을 때 그 치료법을 비술(秘術)로 감춰두는 게 아니라 그 병의 원인과 처방을 한의사협회 회원들에게 상세히 가르쳐준다.

    “혈전(血栓)이라는 게 있어요. 혈관이 막혀서 중풍이 되는 것 말이오. 또 심근경색증이라는 게 있어요. 관상동맥에 혈전이 생겨서 가슴에 심한 통증이 오는 병 말이오. 혈전과 심근경색, 이거 양의사들이 못 고치지만 나는 고칩니다. 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 대단히 많습니다. 이거는 확실히 기사로 써도 좋습니다.”

    ─확실하게 고칠 자신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내가 고친 사람이 한둘이 아녜요.”

    ─어떤 원리로 치료를 합니까?

    “어혈(瘀血)입니다. 탁한 피를 맑게 해주는 처방을 하지. 물론 혈전이다 심근경색이다 하는 것은 양의사들이 검사를 해서 발견하지만 고치는 건 못 해요. 그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보면 안타까워 죽겠어. 자기들은 못 고치는데 내가 고친다면 양의사들이 나를 미친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미친놈인가 아닌가 데리고 와보라고 내가 큰소리를 치지. 나이 많은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뭣하겠어. 그렇잖아도 요즘은 하루에 환자를 열 명 이상은 안 봐요. 의사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환자는 약자 아니오. 예나 지금이나 고통받는 환자한테 거짓말이나 해서 돈 버는 의사들이 종종 있는 모양인데 그건 의사가 아니라 도둑놈이지. 오죽하면 의사들 후손이 잘 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얘기가 있겠어. 천벌을 받아서 그렇지.”

    여자 환자 한 사람이 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들어왔다.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부근에 산다는 김용희씨(36)였다. 매월 경도가 끝날 때즘이면 하혈이 심하고 소화가 안 돼 산부인과에 갔더니 아무 이상 없다고 해서 한의원에 왔다는 얘기다.

    “난소기능이 약해서 생긴 증상이니 난소 기능을 강화하는 치료약 한 제를 복용하면 월경 후 하혈이 틀림없이 멈출 것”이라는 것이 배옹의 자신 있는 처방이다. 참외, 과일 등 냉성(冷性) 음식을 삼가라는 주의사항이 보태졌다.

    김씨에게 그 먼 곳에서 품 버리고 거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물었더니 시어머니가 처녀적부터 다닌 단골 한의원이라 했다. 아이까지 데리고 왔으니 3대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배원식한의원에는 가끔 “배선생님 아직 살아 계시냐?”는 문의전화가 온다고 한다. 몇십 년 전에 찾아와 단골이 되었던 사람이 최근 얼마 동안 못 들른 사이에 배원장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출발 전에 확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불임증세로 찾아온 여자들에게 아기를 갖게 해준 사례가 600명이 넘는다는 것이 배옹이 수차례 강조한 자랑거리려니와, 그 한의원에는 유독 부인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한번은 서른여섯 된 충청도 여자가 무월경을 호소해왔다. 스물네 살부터 원인 모르게 월경이 중단됐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 배옹은 탕약 여섯 제를 복용시켜 결국 작년 9월7일에 “선생님 저 월경 나왔습니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강서구 화곡동 사는 스물네 살짜리 처녀는 열여덟 살 때 여드름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 약을 먹었는데, 그 약의 독성 때문에 월경이 없어져버렸다고 찾아왔어요. 6년 동안 월경이 없으니 부모 걱정이 오죽 크겠습니까. 장기 치료를 해보자고 제안했지요. 그런데 약 열 제를 써도 변화가 없는 거요. 내 권위를 믿고 찾아왔는데 맥이 전혀 좋아지지가 않아요. 난감합디다. 그런데 지난 4월19일에 지방 출장을 가 있는데 그 처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했어요. 자기 딸이 월경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 때 그 기쁨은 아무도 모릅니다.”

    배옹이 당사자의 진료부를 꺼내놓고 흥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실력 없는 한의사는 한약 열 제를 써서 장기 치료를 해보자는 제안을 못해.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하지!”

    허준의 모델이 되기도

    환자들이 간단없이 들이닥쳤다. 내방객들에게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했으므로 나는 중간중간에 대화를 끊고 환자들을 맞이하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본의는 아니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점심 먹을 시간까지 빼앗은 채 오후 4시에 이르고 말았다.

    환자 대기실 벽면에는 각종 감사패며 위촉장, 그리고 행사 사진들이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미국의 유인(YUIN)대학으로부터 받은 명예박사 학위증도 보였다. 70년대 이후 미국에서 동양의학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를 타고 배원식옹도 미국에 한의학을 전파하는 활동을 줄기차게 해왔다.

    색다른 사진 하나가 보였다. 1991년 9월에 ‘이 달의 문화인물’로 허준이 선정되어서 기념행사를 갖게 되었는데, 바로 배원식옹이 허준으로 분장해서 가마에 올라타고 문화행렬의 진두에서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한의학(漢醫學)이라 지칭했는데, 우리 나라는 1986년에 우리 민족의 실정에 맞게 한의학의 ‘漢’자를 ‘韓’으로 바꾸었다. 중국은 중의학(中醫學)으로, 그리고 일본은 ‘동양의학’이라고 지칭한다. 우리의 경우 단순히 글자 하나를 바꾼 게 아니라 중국과 차별되는 우리 고유의 의학체계를 갖추었다. 얼마 전 기록적인 시청률을 보였던 TV 드라마의 주인공 허준이 엮어낸 ‘동의보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양의학과 한의학을 모두 배워라”

    목이 마른데도 그의 한의원에서는 야속하게 물 한 잔 내오지 않았다. 어렵사리 보리차 한 잔을 청해 마셨다. 이유가 있다. 배원식옹은 물을 마시지 않는다.

    “그게 내 체질입니다. 아무 것도 안 넣고 맹물을 마시면 체합니다. 설탕을 타 먹거나 뭘 섞어 먹으면 괜찮은데 맹물이나 보리차를 먹으면 체한단 말이오. 밥 먹고 나서도 과일을 먹지, 물은 안 먹습니다. 이게 내 체질인데 사상의학으로 그걸 판별할 수 있습니까.”

    그가 부탁할 게 있다고 했다. 서양의학 하는 사람이 한의학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한약 먹지 말라” 따위의 소리는 삼가는 게 좋겠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양의학을 잘 모르니까 절대 그 영역에 대해서 근거 없는 비난은 안 하겠다는 것이다.

    한의학 혹은 동양의학도 눈부시게 발전하는 현대 과학의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해보았다.

    “내가 ‘동양의학의 현재와 미래’라는 논문을 외국에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동양의학의 현대화 작업을 가장 앞서 진행하고 있는 쪽이 일본인데, 한의학의 현대화와 과학화를 누구보다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러자면 인재가 필요합니다. 같은 병원에서 한의사와 양의사가 함께 진료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한의학과 양의학을 두루 섭렵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배옹은 또 조건을 단다. 반드시 동양의학을 먼저 공부한 다음에 서양의학을 추가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 서양의학을 먼저 공부하면 서양의학식 사고체계로 세뇌되고, 고정된 나머지 동양의학은 ‘귀신 같은 소리’로 들리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반면 동양의학을 먼저 공부한 다음에 현대의학을 접하면 먼저 배웠던 동양의학이 새로운 충격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 배옹의 지론이다. 어쨌든 한 사람이 양쪽을 겸해야지 의학적 사고체계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모여서 진료를 한다는 건 실효가 없을 뿐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폐렴환자가 왔을 때 양의사가 항생제를 쓰면 나아야 되는데 안 나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한의사가 한방처방을 해서 나았다고 해봐요. 서양의학 공부한 의사가 믿으려고 안 합니다. 나을 때 돼서 나았다고 치부해버려요. 귀신 푸닥거리하는 소리로 생각한다니까.”

    “치매는 치료법이 없소”

    모든 질환에 자신 있어 보이는 그도 치매 질환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병하기 전에 예방해야지 발병 이후에는 완벽한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치매는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센데다 내성적인 사람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했을 때 발병한다는데, 맺힌 스트레스를 가급적 밖으로 드러내 발산하는 것이 예방법”이라며 그 얘기를 꼭 끝에다 써달라고 했다.

    그의 업적 중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한방 격월간지 ‘의림(醫林)’ 발간사업이다. 1954년 11월에 창간한 이래 광고 없이 자비를 투여해 45년간 발행해왔다. 그러다 99년도에 “판권을 절대 팔아먹지 못한다”는 내용을 공증하고 한의학계의 다른 사람에게 무료로 넘겼다.

    대연각호텔 자리가 코앞인데, 71년 12월 대연각 화재 때 별일 없었느냐는 질문에 “큰일날 뻔했다”고 맞장구를 친다. 당시 아시아 한의학 학술대회를 배원식옹 개인이 주최했는데, 중국 일본 등 아시아 동양의학자 17명이 대연각호텔에 투숙했다. 다행히 그들은 24일에 떠났고 화재는 25일에 발생했다. 지금도 그들을 만나면 천운이었다며 웃는다고 한다.

    장시간의 대화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한의사로서 느끼는 쇠심줄 같은 자부심이 여든여섯의 그를 든든하게 지탱하는 힘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천하의 배원식도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인 오진(誤診)을 했다. 그가 내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더니 덕담 삼아 이렇게 얘기한 것이다.

    “작가 선생은 얼굴 생김을 보니 심성이 부드럽고 도량도 넓고 머리도 총명하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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