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

“그를 놓으면 나도 놓여나리라”

  • 소설가 공선옥 / 소설가 유금호 / 이진경 일러스트

    입력2006-09-22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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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외로울까봐 눈물을 두고 간 당신 ]

    - 공선옥 소설가

    그날 나는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호남선 안내원 숙소에서 막 깨어나는 중이었다. 1984년 5월13일, 언니를 따라 나도 고속버스 안내원이 되기 위해 면접을 보러 왔다가 하룻밤 언니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는 참이었다. 언니와 함께 세수를 하고 언니가 하라는 대로 화장도 하면서 나는 그날 오전에 있을 면접에 대비하였다. 우리 집은 그때 경제적으로 비상사태에 직면한 상태였다. 우리 생활을 꾸려가고, 엄마 병원에 입원시키고, 동생 학교 보내고, 아버지가 진 빚 갚아나가려면 언니와 내가 함께 번다 해도 힘든 처지에 있었다. 학교를 휴학한 나는 그전에 직행버스 안내원을 좀 했는데 이번에 월급이 좀더 센 고속버스로 옮길 참이었던 것이다.

    그 전날 나는 언니가 승차한 차 운전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승해 서울로 왔다. 이제 우리 두 자매가 벌면 아버지 빚은 다 못 갚더라도 엄마를 입원시킬 수는 있을 거라며 언니는 희망에 차서 말했다. 언니가 스물네 살, 내가 스물두 살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빚쟁이들에게 쫓겨 집을 나가버린 상태였다. 엄마는 지난 겨울 광주의 우리 자취방에 옷 보따리 하나만 달랑 보듬고 들어오셨다. 봄이 된 어느 날 언니가 역전 어디선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한 날부터 엄마가 이상해졌다. 우리는 그게 병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엄마가 이상한 행동이나 말을 하면 마구 짜증부터 냈다. 엄마가 바보같이 말하고 행동하다 주인아줌마 앞에서 면박을 당할 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그때 엄마가 자꾸 모자란 사람처럼 구는 것을 단지 시골에서 갓 올라왔기 때문에 도시사람과 비교가 되어서 그런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전에 시골 살 때도 사실 우리 엄마는 말이 느리고 행동도 그다지 야무지지 않았다. 그래서 늘 주위 친척이나 동네사람들한테 구박을 당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가장 구박을 많이 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살가운 사랑 한번 못 받아보고 지금 저 세상으로 가버리셨다. 불쌍한 내 어머니는.

    안내원 숙소의 사감 방에 언니를 찾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언니는 엉엉 소리내 울면서 돌아왔다. 언니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서, 선옥아, 어, 엄마가….”

    뒷말은 차마 잇지를 못했다. 나도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이 주저앉는 것 같은 깊은 슬픔과 충격이 나를 강타했다. 언니와 나는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날이 언니 월급날이었다. 월급은 오후 2시쯤 지급된다고 했다. 낮 12시쯤 광주에 도착해서 언니와 나는 오후 2시까지 은행에서 언니 월급이 입금되기를 기다렸다. 우리 두 자매의 몸과 마음은 이미 뻣뻣하게 굳은 상태였다. 엄마는 이미 그날 오전에 시골집으로 운구가 되어 있었다.

    남의 집 문간방에서 홀로 숨 거둔 어머니

    우리집은 딸만 셋이다. 언니와 내가 서울로 간 사이 내 바로 밑 동생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여 점심시간에 잠깐 집에 들렀다고 했다. 전날 밤 엄마가 생전 안 하던 요실금을 하고 이따금씩 하던 헛소리를 그날 따라 유달리 자주 했다는 거였다. 엄마는 그때 마흔여섯밖에 안 됐는데도 마치 일흔 살 할머니같이 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고 늘 머리가 아프다면서 하얀 끈 같은 걸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지팡이를 짚거나 벽에 의지해 변소도 가고 골목길에도 나가고 그랬다. 그때 우리는 엄마는 늘 아프시니까, 그저 조금 더 아프셔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때 이미 엄마 머릿속의 핏줄 하나가 터져버린 다음이었음을 우린 알지 못했다.

    머리가 아프다고, 어지럽다고 토하기만 하던 엄마. 그런 엄마 기운 차리시라고 언니는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팥밥을 맛있게 지어놨었다. 오이국도 만들어서 윗목에 차려놓고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 말도 잊지 않았다.

    “엄마, 선옥이 데리고 서울 갔다 올게. 와서 엄마 꼭 병원에 가. 낼 월급 타가지고 맛있는 것도 사 올게, 엄마.”

    엄마는 말은 못 하고 어여 가라 손짓했다. 그것이 내가, 우리 엄마 살아 생전 마지막 본 모습이다. 선옥아, 내 강아지야, 하고 부르던 우리 엄마 목소리를 언제 들어본 게 마지막인지. 말도 느리고 행동도 굼뜨다고 만날 딴사람들한테 잔소리를 듣고 살아야 했던 내 어머니. 어머니 살아 생전 한 번도 진정으로 사랑해보지 못했는데, 나는 이제 어쩌라고 엄마는 그다지도 허망하게 가버리셨나. 무에 그리 바쁜 일 있어서….

    내가 그때 아주 나쁜 짓을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빚쟁이한테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 견디고 딸들이 자취하는 광주 우산동 산동네 꼭대기방을 물어물어 찾아온 엄마는 그때 이녁 목숨처럼 소중한 돈 2만원을 손수건에 싸서 골마리 속에 넣어 가지고 오셨다. 그것을 또 누가 가져갈세라, 그것 없으면 세상 끝난다는 듯이, 돈 2만원을 벽장 속 구석에 숨겨두었던 것을 내가, 아무리 철없다손 치더라도, 어쨌든 지금 생각하면 미친 것이 분명한 내가 그 2만원을 훔쳐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돈을 어디다 써버렸는지 모르겠다. 어디다 썼는지도 모르게 함부로 써버렸던 것이다. 직행버스 안내원을 그만두고 고속버스 안내원 시험을 보러 가기 전까지의 공백기간, 그러니까 대학 휴학생이기보다 룸펜처럼, 아니 진짜 룸펜으로 살았던 내 스무 살 초반 시절의 일이다.

    어디 외출했다 돌아오면 엄마는 이녁 딸들 기다리느라고 골목 밖에 우두커니 나와 있다가 나를 보고는 반갑게 퍼득거리며 달려오곤 했다. 한번도 도시생활을 해보지 않은 엄마가, 그리고 광주 와서도 골목 밖 한번 벗어나보지 않은 엄마가 길을 잃을까봐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실제로 엄마가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서는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던 적도 있다. 뒤에서 차가 빵빵거려도 엄마는 재빨리 몸을 피할 능력이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늘 불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는 엄마가, 그토록 순진하고 그토록 느리기만 한 엄마가, 그리고 이따금 도시사람들한테는 택도 안 닿을 소리를 퉁퉁 내뱉기도 하는 엄마가 나는 창피스러웠다. 그래서 엄마에게 곧잘 화를 내고는 했다. 엄마가 해사하게 웃으며, 절룩거리는 다리를 내게로 옮겨올 적이면 휭하니 몸을 피해 엄마 앞서 집으로 들어와 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나와 사뭇 달랐다. 나는 돈 벌어 최소한의 생활비만 언니한테 주고 내 맘대로 쓰고 돌아다녔다. 하다 못해 엄마 모시고 목욕탕엘 한번 안 가봤던, 어찌 보면 아버지만큼 무정한 딸년이었다, 나는. 저 놀기 바빠 휴무일에도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던 나는 왜 불쌍한 울 엄마와 언니와 동생이 꼬물거리며 살고 있는 그 문간 자취방이 그다지도 싫었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점심시간에 와보니 어머니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그것도 모르고 동생은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엄마를 보듬고 한숨 자고 일어났던 모양이다. 엄마를 아무리 흔들어봐도 기척이 없어 코에 손을 대보니 숨을 안 쉬더라고 동생은 나중에 울먹이며 말했다. 그리하여 그 어린 동생이 골목 밖 한길가의 공중전화 있는 데로 가서 광주에 살고 있는 유일한 친척인 작은아버지 집에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와 서울의 우리한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아무도 지켜봐주지 않는 남의 집 문간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뇌출혈이라고 어른들이 말해서야 나는 어머니 머릿속에서 핏줄이 터져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시골집에 도착하니 이미 입관이 된 후였다. 아버지가, 낯선 아버지가 아직 관 뚜껑에 못질을 안 하고 있다가 우리가 오자 살짝 관 뚜껑을 열어보였다. 거기 엄마가, 세상에, 우리 엄마가, 하얗게 누워 있었다. 어제 아침에 분명히 어여 가라 손짓도 했던 우리 엄마가 이제는 눈도 꼭 감고 입도 꼭 다물고 얼굴이 좀 부은 듯하고 눈가는 파랗게 변해서 안방 아랫목이 아닌 행랑채 헛간방 윗목에 놓인 관 속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 죽었기 때문에 안방에 들일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럴 수는 없다고 악을 썼던 것 같다. 엄마 돈을 훔쳤던 내가, 엄마한테 맛있는 것 한번 사줘본 적 없던 내가, 언제부터 엄마를 그리 애달피 찾았었다고. 그러나 나는 정말로 애달퍼서, 가눌 길이 없는 절망감 속에서 엄마를, 우리 엄마를 살려내라고 악을 써댔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목이 쉬어서 울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초상을 치르던 그 사흘 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울지 못했다. 딸만 셋이고 아버지는 차마 나서지 못해 큰집 오빠가 상주노릇을 했다.

    “오냐아, 내 새끼야, 내 강아지들아”

    나와 동생은 넋을 놓고 방이나 마당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만 했는데 언니는 그나마 맏딸이라고 음식 장만하는 부엌에도 나가보고 이따금 곡을 해야 하는 시간에는 동생들 챙겨서 데리고 들어가 곡도 했다. 상식도 언니가 혼자 다 올리고, 하여튼 그랬다. 가장 효녀였던 언니가 엄마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가장 야무졌다. 동생들은 마치 살아 있는 엄마한테 그러듯 상여 내가지 말라고 떼를 썼다. 꽃상여가 동구 밖을 빠져나갈 때쯤 요령잡이가 그 지방 풍습에 따라 상여를 끝까지 따라가려는 우리를 제지하면서 마지막 하직인사를 올리라 지시하였다. 삼베 치마저고리에 두건을 쓰고 대나무 막대기에 몸을 의지한 우리 세 딸 중에 나와 동생은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버리고 언니만 고요히 절을 네 번 하였다. 엄마는 끝내 이 몹쓸 둘째딸한테서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절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시고 말았다.

    엄마가 떠나간 시골집은 적막했다. 아들 못 낳는다고, 그리고 말과 행동이 야무지지 못하다고 누구보다 엄마를 구박했던 팔십 먹은 고모할머니가 특유의 체머리를 흔들며 그랬다.

    “아이구, 칠칠치 못헌 것, 존 꼴 한번 못 보고 그래 죽어부러? 요만큼만 살라고 왔어? 어이구 망할 것.”

    나는 눈에 불을 쓰고 그 고모할머니한테도 대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고모할머니도 엄마가 가여워서 했던 말일진대 그때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원망스러웠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아버지는 다시 아버지 사는 데로 갔다. 우리 딸들도 광주 산동네 문간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시골집은 언제 누가 와서 살지 그 앞날을 알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세 딸이 부둥켜안고 날이 새도록 울기도 숱하게 울었다. 어머니 없는 모든 시간이, 모든 계절이, 모든 아침과 낮과 밤 들이 모두 다 허무하기만 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그러니까 아무리 아픈 엄마라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있을 때는 백수건달 노릇도 재미있었고 돈을 버는 일도 재미있었다. 한 번도 그 돈 벌어 어머니 위해 써본 적 없지만 하여튼 그랬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틀려버렸다. 노는 것도, 돈 버는 것도 다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오직 방구석에 틀어박혀 엄마 생각하며 눈물 줄줄 흘리다가 아침과 낮과 밤을 보내는 것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세상에 그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그래도 엄마 장례 치르고 나서 한 달은 아니더라도 일주일만이라도 깊은 슬픔 속에 잠겨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어야 옳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례 치르고 나서 곧바로 우리 자취방에 한번 들르고 쌀 한 포대 사주고 부식 값 얼마 주고 나서 가버렸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때 너무나 삶에 지쳐 있던 양반이었다. 평생을 웬수 같은 돈 때문에 편한 잠 한번을 못 자보고 가신 가여운 내 아버지.

    언니는 곧바로 일터로 갔다. 상중이라 하루이틀 더 쉬어도 좋으련만 언니는 굳이 그냥 일터로 갔다. 동생도 학교에 갔다. 아침에 벌떡 일어나 책가방 차곡차곡 챙기고 머리 얌전히 빗고 발목 부분 정갈히 접은 흰 양말 신고 학교에 개근했다. 나만 ‘지랄’을 했다. 엄마 장례 치를 때도 유독 내가 굿을 했던 것 같다. 다 지 죄를 스스로 알아서, 엄마한테 그마저도 안 하면 너무도 죄스러워서 그래서 그런 면구스러운 짓을 벌였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나의 그런 행동은 일면 나의 진실이기도 했으니, 지하에 계신 어머니는 당신 둘째딸이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니 그 모든 것 어여삐 봐주셨으리라.

    죽음이 있으면 탄생도 있는 법, 세월이 흘러 우리 엄마와 똑같이 나 또한 아이 셋 낳은 엄마가 되어 있다.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가 셋이나 있다. 엄마가 낳은 세 딸이 엄마를 엄마아, 하고 부르면 우리 엄마는 오냐아, 내 강아지들아, 혹은 내 새끼야아, 했다. 나도 우리 아이들한테 엄마와 똑같이, 우리 엄마 목소리로 그런다. 내 강아지야아, 라고. 내가 그랬듯이 우리 아이들도 내가 저희들을 그렇게 불러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때로 나는 내 아이들이 지 엄마인 내 속을 상하게 할 때 그런다. 꼭 나 어렸을 때 내 동무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 그러면 너희들 우리 엄마한테 다 일러버릴 거야. 그러면 내 딸들은 배꼽을 잡고 마구 웃어대고 다섯 살 먹은 막내는 엄마 엄마가 어딨는데? 한다. 그러면 나는 또 애기처럼 눈물이 난다.

    우리 엄마가 이제 우리 아이들한테는 엄마 엄마가 되었다. 엄마의 엄마. 나는 나를 가리키며 그런다. 여기에 있지. 왜냐하면 내가 우리 엄마와 똑같기 때문이다. 말투도, 목소리도, 하는 행동도. 해먹는 음식도 꼭 우리 엄마가 우리한테 해주던 음식만 해먹는다. 그것을 제일 잘한다. 요즘의 신식 음식은 잘 못해도 옛날 우리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개떡, 시루떡, 쑥떡, 반찬도 상추겉절이, 무생채 따위들. 냉장고 없이 살던 시절에는 그렇게 반찬도 젓갈 같은 것 빼고는 그때그때 해먹는 것이 많았다. 내 속에서 우리 어머니를 느낄 때, 나는 든든해진다.

    딴사람들 다 우리 엄마 흉봤어도 나는 내가 우리 엄마처럼만 살았으면 싶다. 젊은 내 친구들은 자기들은 결코 자신의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많은데 나는 안 그렇다. 엄마가 불행했던 건 결코 엄마 탓이 아니니까 그렇다. 우리 엄마처럼만 살면 아무 문제 없는 것이다. 세상에 무슨 죄를 지을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다. 아, 엄마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어. 상상하는 것조차 싫어. 그러나 나는 안다. 아무리 엄마가 없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살아지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엄마, 엄마, 목이 쉬도록 엄마를 부르며 우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내 살 궁리를 했던 것이 사실이니까. 허나, 그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을 어쩌겠는가. 부모가 저 세상으로 가면, 가고 나면, 자식은 슬피 울게 마련이다. 저를 이 세상에 던져놓고 어찌 부모는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지, 자식은 끈 떨어진 매처럼 정처가 없다. 제 정처 없음 때문에 우는 것이다. 정처 없지만 또 살다 보면 정처를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의 자식들이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 순간 내가 우리 어머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모습이 점점 엄마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눈물이 다시 샘솟듯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잃고 내가 이만큼 살았구나, 싶은 게 자신에 대한 하염없는 연민과 기특함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뒤범벅된 그런 눈물이었다. 부모 잃고 우는 자식의 눈물은 그 자식 생이 다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가없는 그리움의 눈물이 되었다가, 회한의 눈물이 되었다가, 때로는 지친 마음 고요히 정화시켜주는 눈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모 잃은 자식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고아다. 외로운 아이다. 그러면 눈물은 부모 없는 외로운 아이의 친구인가? 너 나 없이 살기 외로울 테니 나 대신 눈물을 주고 가마, 하고 내 부모가 내게 준 선물일까?

    - 유금호 소설가·목포대 교수

    1997년 2월 나는 페루 안데스 산맥 한 자락에 숨어 있는 마추픽추 정상에서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에 젖고 있었다. 잉카의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스페인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후, 쿠스코 광장에서 네 마리 말에 찢겨 죽으면서도 끝내 마추픽추의 비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는 해발 2280m의 공중 도시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같이 오기로 했던 친구, 윤강원의 부재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헤어짐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 헤어짐이 다시는 재회가 불가능한 사별이라 해도, 예견하고 준비해온 사별과 전혀 준비 없는 사별의 충격은 다르다. 내 생애, 단 한 분, 내 존경과 의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면 나는 그 순간 어떻게 하든 견딜 수 있었을 거였다. 아버지는 노환중이었고, 80이 넘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 겨울 휴가 때 만년설 쌓인 잉카의 유적지와 몽골의 초원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제멋대로 앞서 여행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죽어서 나는 돌아오리라

    프로메테우스의 독수리가 되어

    돌아와서 나를 만나리라

    이제는 巨木이 된 분노의 심장을

    쪼아서 남김없이 찢으리라

    인간에게 또다른 불을 가져온 자들의

    肝마다 할퀴어 그들을 영광케 하리라

    찢어서 그들을 尊貴케 하리라

    (윤강원 -나무심기 일부-)

    친구는 그의 시 속에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해 겨울방학 때 같이 안데스 산맥 깊은 골짜기에 감추어진 마추픽추 정상과 몽골의 드넓은 초원을 여행하기로 약속했던 친구는 나보다 훨씬 빨리 이곳을 다녀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911년 하이람 빙검에 의해 발견되어 잃어버린 도시로 명명된 엉뚱한 공간에 서서 나는 그를 불러보았다. 같이 서 있기로 한 장소에 그가 앞서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무게 100t에서 300t에 이르는 거석들을 맞은 편 산에서 잘라다 세운 작은 도시의 석벽과 수로, 태양신전, 왕녀의 궁전을 지나 나는 오두막 곁의 고인돌 크기의 다듬어진 넓은 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의석(葬儀石)이라고 했다.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그 돌 위에서 잉카인들이 사자(死者)와 마지막 결별 의식을 진행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 돌 한쪽에 손 하나가 드나들 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물로 썼던 라마를 묶어놓은 곳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고,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맞은편 언덕에 150구의 여성을 포함해서 173구의 미라가 누워 있었다고 한다.

    고도가 높아 술을 마시면 큰일난다는 안내인의 설명을 들었지만 나는 장의석 위에 종이컵을 올려놓고 서울에서 가져간 팩 소주를 몰래 따랐다.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앞서간 친구는 아마 거기 150명이나 되는 잉카의 태양의 처녀들 사이에 껴 유쾌히 소주를 마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소주잔 안으로 안데스 산맥의 정령들이, 잉카의 혼령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환영을 보며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워놓았다. 잔 속으로 부슬비 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어디선가 친구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 나쁜 자식아, 이제 네 맘대로 훨훨 날아다녀라. 그래, 맘대로… 혼자 잔을 비우고, 또다시 한 잔을 따라놓고…

    많이 알려진 친구는 아니었어도, 너무 갑자기 이승을 버린 시인 윤강원을 기억하는 문우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평소 화내는 얼굴을 보인 적 없는, 너무 갑자기 가버린 시인 한 사람을 떠올리면, 자주 어울려 다니던 소설 쓰는 유모 역시 기억나리라 생각한다.

    그곳 페루의 수도 리마는 5월이 되어야 두어 차례 새벽녘 안개 같은 습기가 잠시 대지를 적실 뿐,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아 그 새벽안개를 잉카의 눈물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잠깐이었지만 그 2월 초순 리마 시가지에는 먼지를 잠재울 만큼의 보슬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자 환성을 내지르며 거리로 뛰어나가던 그 잉카 후예들 사이에서 언뜻 친구 윤의 모습을 본 듯했다.

    면도날도 안 들어간다는 정교한 거석들로 쌓아 올린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로레토 골목 석벽 곁을 역시 친구가 어깨에 비스듬히 판초를 두르고 지나가는 것을 본 듯도 했다. 길이가 360m나 이어진다는 커다란 거석의 성곽 사크사이와만 석조 성곽 아래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라마 곁을 그가 스치고 지나는 모습 역시.

    “6월24일이면 태양의 축제가 열립니다. 그날 하루는 모두가 옛날의 잉카로 돌아가지요. 황금 왕관도, 태양의 처녀들도 모두 다시 살아나서 제일 좋은 옥수수 코클로로 빚은 술이 황금 잔에 따라 바쳐지고, 제일 잘생긴 라마의 심장을 잉카의 칼 투미로 도려내 코리칸차 신전에 바칩니다. 잉카인들이 죽은 것이 아니지요. 이 숲 속에 정령으로 살아 있다가 그날은 다시 현신을 합니다.”

    그날 밤, 신성한 강물 우르밤바 강가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거기 강가에 노랗게 핀 야생 키니네 꽃 사이에서도 나는 그의 그림자를 느꼈다.

    긴 여행 떠난 친구, 남은 사람들…

    윤강원.

    시인이었고, 영문학 박사였고, 교수였다.

    “형도 흰머리 늘었네.”

    제 머리칼 희어지는 건 거울에 안 보이더냐고 같이 웃다가, 그해 겨울방학 여행 약속을 다시 하고, 윤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왜 하필 그날 아침 윤과 나눈 마지막 화제가 ‘죽음’에 관한 것이었을까. 왜 하필 쉽게 갈 수 없는 안데스와 몽골로의 여행 약속이었을까.

    참 이상하게도 우리는 30여 년을 늘 가깝게 있으면서도 조금씩 비켜서서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다투어본 적 없이 늘 많은 걸 공유한 사이였다. 4·19와 5·16의 외연적 충격과 20대라는 격정기의 대학생활을 같이하면서 문학과 학문의 치열함 속에 우린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때로는 형제였다. 문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 속에 때때로 밤새워 격론을 벌이기도 했고, 나의 20대, 앞서 세상을 떠난 동생의 죽음 앞에 휘청거리던 나를 그가 지탱해주기도 했다.

    “형, 부활은 죽음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거 알잖아?”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던 새벽, 내 동생의 무덤 앞에서 이를 갈며 울고 있던 나를 그는 그렇게 위로했다.

    “그래, 쓸 거다. 내 동생, 다 살지 못한 이승의 세월, 내가 더 살아준다.”

    “글을 쓰는 건 생명의 창조적 전환일 수도 있어….”

    그가 웅얼거렸다.

    그렇게 30여 년이었다. ‘한국 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분석’으로 문학박사 학위 논문을 끝냈을 때, 뒤이어 윤 역시 늦은 나이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문득 서로의 머리칼에 백발이 섞여가는 걸 확인하면서, 그 일요일 아침 우리는 겨울방학이 되면, 남미 잉카의 유적지나 몽골의 초원, 아니면 아프리카로 훌쩍 떠나자는 약속을 했다. 늘 어울려 지냈지만 문우들끼리 저녁에 만나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가족들과 함께 아침 해장국을 먹는 모임으로 바꾸어 한 반년쯤 지났을 터였다. ‘또ㅁ방각하’의 최기인, ‘남사당’의 김용우, 시인 황청원. 늘 그래왔듯 그 일요일 아침도 우리들은 부부가 같이 모여 해장국을 먹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반주로 몇 순배 소주를 나누고, 다시 우리 집에 모여 차를 마셨다.

    한쪽에서 아내들이 남편들의 현실 감각 없는 무능력을 실컷 흉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어가는 동안 남자들은 흰 머리칼이 늘어가는 나이들은 또 다 잊은 채 소년들로 돌아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침 하필이면 왜 ‘죽음’이 우리 화제에 중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신문에 장지 면적에 관한 기사가 실렸던 것도 같고, 아니면 가십란에 어느 외국 배우의 사망 소식과 그의 남겨진 젊은 아내와 어린아이 기사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우리의 매장(埋葬) 문화가 화장(火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티베트의 조장(鳥葬) 풍습, 시베리아 북단에 사는 몽골리안 계열 축치족의, 시신을 조각 내어 짐승들이 쉽게 먹도록 들판에 뿌려주는 특수한 장례의식, 거기다 이집트와 잉카의 미라, 장자(莊子)의 생사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죽음의 형태까지 화제가 되었다.

    “근대 한국 소설의 주인공들은 거의가 물에 빠져 죽어. 물이 가지고 있는 소멸과 재생의 상징성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거지. 심청이 물을 통해 왕비로 변신하듯 그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거든.”

    결국 내 학위 논문까지 화제에 끼어들어 그날 아침은 계속, 죽음의 의미, 그 본질에 대한 결론 없는 의견의 해일이었다. 아내들이 아침부터 왜 하필 그런 화제냐고 끼어든 후에야 우리는 다음 주말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월요일인 이튿날 나는 늘 그래왔듯 직장이 있는 목포에 버스로 내려갔고, 버스에서 내리자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화를 아내에게 걸었다.

    전화 속의 아내가 이상하다고 느낄 사이도 없이 아내는 목이 잠긴 채, 놀라지 말아요… 놀라지 말아요…, 그러다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나는 병석에 계시던 80이 넘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참으로 불효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리고 이제는 그분 역시 이승에 계시지 않지만 그 순간 나는 아내가, 시골 아버님이…, 그렇게 다음 말을 이을 거라고 예상했다. 잠시 하늘이 빙그르르 돌았고, 견뎌야 된다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말해. 괜찮아.”

    “…….”

    “…말 하라니까….”

    “… 윤교수가… 윤교수가 조금 전… 심장마비….”

    바로 전날 아침 겨울 휴가 때 몽골의 초원이나 만년설 쌓인 잉카의 유적지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제멋대로 앞서 여행을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밤기차로 서울로 되돌아와 새벽에 병원에 도착한 나는 같이 해장국을 먹었던 친구들과 시체실로 내려가 설합 속에 들어 있는 친구를 꺼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얼굴빛도 피부색도 그대로인 친구는 우리를 놀리듯 체온만 없을 뿐,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

    그때 다섯 살이었나, 뒤늦게 둔 그의 외아들이 나를 발견하고 뛰어와 안겼다. 늘 제 아빠랑 같이 있던 아저씨였으므로. 하루 전부터 안 보이는 제 아빠도 우리와 같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 아빠는요?”

    “응, 곧 올 거야.”

    내 손에 매달리는 아이와 눈을 안 마주치려 안간힘을 해가다가 결국 우리 몇 친구들은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관상동맥협착증. 의사가 무어라고 설명해주어도 도무지 나는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자식아, 내가 죽은 자리에 니가 와야지. 내가 널 문상 와? 이놈아….”

    은사였던 시인 조운제 교수가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죽는 건 순서도 없는 거야? 버르장머리 없이….”

    반백의 김윤성 시인이 주먹으로 땅바닥을 때리는 모습이 보였다. 선후배 문인들이, 제자 아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나는 비칠거리며 영안실 뒷마당 고목 그루에 기대 울지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를 묻던 날 충청도식으로 관에서 시신을 꺼내 맨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관을 태우던 잔디밭 한쪽 불길 위로 싸락눈이 계속 내렸다. 다섯 살배기 아들은 제 아비가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있는데도 불 피우는 재미에 강아지처럼 눈 속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죽는 건 순서도 없는 거야? 버르장머리 없이…”

    그가 떠나고 나서 몇 년 동안 방학 때마다 나는 허깨비처럼 지구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내가 대학 2학년일 때, 1학년으로 입학했던 윤강원을 만나온 것이 30년. 내가 소설을 쓸 때 그는 시를 썼고,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자 그는 성경을 파고들었다. 내가 오스카 와일드에 흥미를 가지자, 그는 청산별곡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논문을 썼다. 자기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온 친구의 급작스러운 사별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부재(不在). 그가 지상에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도 갔고, 아마존 밀림에도,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도 갔다. 그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갔던 몽골 초원에서도 나는 그의 모습을 찾으려고 이곳 저곳 허둥댔다.

    120마리의 표범 가죽으로 지붕을 덮었다는 황제의 겔을 중심으로 수백 수천의 질서 정연한 겔이 늘어서 있었을 몽골의 옛 수도 카라코룸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뿐, 아무런 과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무덤이 없어요. 알려진 무덤이 없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제 고장에 칸의 무덤이 있다고들 주장하고, 그렇게들 믿고 그래요.”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던 가이드가 그 텅 빈 공간 위, 땅바닥으로 깔린 무지개를 바라보며 그렇게 내게 설명해주었다.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덤이 없으므로 해서 수십, 수백의 칸의 무덤이 존재하는 이치에 대해….

    혈관마다 아열대의 큰 뱀들과

    능구렁이와 살모사와

    돗바늘 같은 새끼 뱀들이라도

    放牧하고 싶다

    들개처럼 달을 향해 짖으며

    덧없는 불꽃뿐인 우리들의 젊음과

    다만 흘레일 뿐인 꿈과

    箴言들을 물어뜯고 싶다

    어느 날 거리에서

    바람쏘는 먼지에 눈멀고

    햇빛의 번쩍이는 칼날에 귀 잘리었을 때

    뇌리 속 모든 등불도

    亡命해버리고

    빈 포켓들만 甲胄처럼 비어 있을 때

    (윤강원의 술노래 일부)

    젊음의 한때 너무 뜨겁던 시인의 열정이 그를 이승의 한곳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게 했을지 모른다. 끝도 없이 펼쳐져간 바양고비 푸른 구릉 위, 지천으로 보랏빛 지츠꽃이 깔려 있었고, 한가하게 흰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나는 친구의 음성과 웃음소리를 거기서 들은 듯했다.

    동생을 보내면서 시작된 내 사별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이 광주 금남로 거리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도 했고, 아침 출근길에 교문 앞에서 혼자 침묵 시위를 하던 학생이 점심시간 스스로 뿌린 시너 불꽃에 산화하던 모습을 지켜보게 하기도 했다.

    나는 드디어 사랑하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놓아 보내주기로 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부활의 개념이 오는 것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완벽한 자유란 인연의 끈을 놓아주는 것에서 올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내 동생과 아버지와 어머니, 불 속에서 소신공양(燒身供養), 떠나버린 사람들을 현실의 공간, 이 지구 어디에서도 다시 만날 수 없음을 더 이상 어떻게 하랴. 그들이 불과 물과 공기와 대지의 원소로 환원하여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도록 진정으로 놓아주는 일이 이제 사랑이리라. 그리고 언젠가 우리 역시 그 원소들 속에 환원하여 우주를 그들과 더불어 함께 유영하는 것 아니겠는가.

    친구는 이제 거기 카라코룸 초원 위 지츠꽃 사이에, 마추픽추 새벽 하늘 별 언저리에, 우르밤바의 야생 키니네 숲 속에, 시공을 넘어서 그렇게 늘 자유롭게 있을 것이다. 이제 친구를 놓아 보내주기로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확신이 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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