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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스크린에 투영된인간심리의 지옥도

  • 심영섭 영화평론가

공포영화스크린에 투영된인간심리의 지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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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무성영화들에서부터 이미 우리는 공포영화의 어떤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방화자’에서 범죄자가 처형되는 순간 떨어지는 머리와 흥건한 피는 거의 최초로 사지 절단 드라마를 선보인다. 이후 루이 브누엘은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젊은 여자의 눈을 면도날로 도려내고, 길거리에서 잘린 손을 줍는 엽기적인 장면을 추가하여 당시 유행하던 정신분석학과 영화를 결합하는, 즉 무의식의 시각화를 통해 오히려 육체 자체의 파편화를 시도했다.

이미 1915년경에도 공포영화의 요소를 섞은 수준을 넘어 공포영화 자체의 싹을 보이는 작품들이 있어왔다. 뮤직홀 출신인 여배우 무시도라는 ‘으르마 뱁’이라는 여자 뱀파이어로 출연, 여성 흡혈귀에 관한 최초의 영화를 선보였다. 흡혈귀영화는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영화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노스페라투:공포의 심포니’의 영향으로 긴 그림자와 어두컴컴하고 사람을 압도하는 건물의 디자인 등을 빌려와 시각적인 면을 강조하는 풍부한 뱀파이어 영화들이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적 하위문화로서의 공포와 유럽의 표현주의를 결합시킨 사람이 바로 전설적인 감독 토드 브라우닝이다. 서커스단 출신인 그는 영화의 아버지라는 D. W 그리피스 밑에서 영화를 배운 후, 유니버설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호러들을 내놓았다. 그중 벨라 루고시 주연의 ‘드라큘라’(1931)와 서커스에서 알게 된 신체장애인들을 출연시킨 ‘프릭스’(1932) 등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호러영화의 초석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공포영화는 불처럼 일어나는 애국심, 이에 따른 전쟁과 멜로영화의 홍수에 밀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흡혈귀의 이빨만으로는 관객을 불러모을 수 없던 호러 진영은 늑대, 사자, 음침한 은둔 남작, 프랑켄슈타인 같은 좀 다른 종류의 괴물들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테렌스 휘셔 감독이 활약했던 1950년대 영국의 해머 프로덕션은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들었던 거의 최초의 영화제작사였다.

해머 프로덕션이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저주’(1957)나 ‘프랑켄슈타인의 복수’(1958) 등은 시체들에서 떼어낸 눈, 손 등을 보여줌으로써 조각조각난 시체에 관한 어떤 불쾌한 연상을 이끄는 데 성공한 작품들이다. 해머 프로덕션의 성공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도 본격적인 호러영화가 등장하도록 자극했다. 미국의 호러영화들 역시 이 시기 신체 절단과 훼손·파괴·해체 등을 통해 호러영화의 사라지지 않는 핵심을 만들게 된다.



‘고깃덩어리’로 격하된 몸

1960년은 호러영화사에 빛나는 한 해였다. 마침내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가 개봉돼, 슬래시 무비의 효시로 여겨지는 샤워장에서 죽어가는 여주인공 재닛 리를 선보이게 된다. 8개의 카메라가 동시에 찍어낸 이 샤워실 장면은 공포영화 특유의 ‘악명 높은’ 관음증과 여성 신체에 과다한 가치를 부여하는 페티시 전통의 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은 관음증에 관한 으스스한 보고서인 마이클 포웰 감독의 ‘피핑 탐’이 선보인 해이기도 하다. 이어 전설적인 고어영화 ‘피의 향연’(1962년)이, 1964년에는 ‘2000 마니악’이 등장하게 된다. ‘2000 마니악’은 남북전쟁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 미치광이 소읍의 학살극을 통해 완벽한 집단적 광기와 미국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함의를 담고 있는 영화다.

이후의 미국은 정치적 측면을 지닌 저예산 B급 호러영화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냉전시대 이후 도덕적 붕괴가 극도에 달한 미국의 1970년대는 명실상부한 미국 호러의 황금기였다. 1969년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새벽’을 필두로 인간의 신체는 좀비의 먹이인 ‘고깃덩어리’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며, 1983년에 발표된 ‘비디오 드롬’ 등은 기계와 결합하는 육체에 관한 영화적 상상을 극단까지 몰아붙인다(그 유명한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 발표된 것이 1974년이었다).

90년대 호러의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타락한 자궁이라 할 우주를 배경 삼고 있다. 남극에 떨어진 우주 생명체와 벌인 사투를 그린 존 카펜터 감독의 ‘괴물’이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에일리언 3’ 등은 이제 우주조차 안전하지 못한 지옥으로, 장차 도래할 암과 에이즈 같은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다.

공포영화는 한마디로 관객을 무섭게 해야 한다. 무섭지 않으면 공포영화가 아니다. 예컨대 근자에 개봉된 ‘여고괴담2-죽음을 기억하라’는 잘 만든 영화지만 관객들이 기대했던 공포가 함량미달이었던 탓에 흥행성적은 전편보다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단 알아둘 것은 무서움은 끔찍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비록 공포영화가 귀신의 흉측함이나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 등을 자주 보여주지만 그 ‘끔찍함’이 곧 공포의 근원은 될 수 없다. 이를테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의 참혹함을 너무 생생하고 끔찍하게 보여주고 있으나 무섭지는 않다. 다만 그 비참함에 몸서리 쳐질 뿐이다.

쾌락을 탐한 자, 죽임을 당하리라

오히려 공포영화의 공포심은 악몽을 꿀 때의 그것과 닮았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공포물이 악몽처럼 우리들 무의식의 욕망을 변장해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고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심리적 기제를 ‘투사’라 한다. 그렇다면 공포물과 이 투사 심리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우리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망, 그리고 사회적으로 매우 위협적인 소망을 무의식의 한켠에 지니고 있다. 사실 마음 깊숙이 우리 모두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고 사회의 질서에 어긋나고 싶은 소망이 숨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마치 그것이 내가 아닌 남의 것인양 투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내가 아닌 타자에게 투사된 공격 욕망’이 호러영화 속의 괴물이나 살인자로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호러영화에서 희생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의식의 껍질을 쓴 우리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경험한다. 따라서 나의 존재를 뿌리째 흔들어놓는 괴물을 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고 그를 통해 관객들은 엄청난 공포를 경험한다는 뜻이다.

공포영화는 욕망의 미장센이다. 따라서 공포영화를 거꾸로 읽으면 그 시대나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고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링’은 한국의 공포영화가 오랫동안 유교적 가부장제도에 억눌려 살아 온 여성의 심리적 억압을 담보로 만들어졌음을 재입증한다. 이때의 공포란 ‘스크림’ 같은 영화에서 보듯 살점 떨어지고 피가 솟아나는 식의 즉각적이고 반사적인 공포라기보다, 한겹 한겹 차곡차곡 쌓여가는 ‘으스스한 공포’인 것이다.

한국 공포영화는 여자귀신류의 주술적인 면이 강조되는 반면 서구의 공포영화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잔혹하다. ‘스크림2’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서구 공포영화는 대개 칼, 가위, 도끼 같은 도구로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린다’. 뱀파이어류 영화에서도 피는 주요한 살인 모티브가 되는데 젊은 미녀의 하얀 목덜미 깊숙이 이빨을 꽂는 드라큘라는 다분히 피·가학적 모양새와 성적인 함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중세와 빅토리아시대에 철저히 억눌린 성적 억압이 의식의 표면으로 분출되는 행위인 셈이다. 성적 쾌락을 맛본 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피를 빨고 또 제공하는 형태로 서구인들의 무의식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공포 영화에 깃들인 반역의 기운

따라서 당연히 공포영화의 괴물은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 혹은 문명체제의 유지를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누가 괴물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가 억압하고 있는 본원적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공포영화가 단골로 삼는 괴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족살해자, 근친상간 성향의 정신질환자, 동물, 흑인, 인디언 등이며 때로는 아동(‘오멘’류의 공포영화)의 모양새로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 근친상간, 동성애, 사람을 죽이는 것(이것이 상징화되면 ‘식인’이 된다), 미쳐버리고 싶은 것(즉 ‘정상’이라는 체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 마귀와 손잡고 싶은 것(잔혹해지고 무자비해지고 싶은 것), 어른이 되는 것을 버리고 아이로 돌아가고 싶은 것 등등은 모두 사회가 금기시하는 일종의 터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욕망들은 개인에게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사회, 즉 문명체제의 유지에도 위협이 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억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포영화는 일종의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항거이자 변장한 무의식의 원맨쇼다. 공포영화는 억압의 마음이 의식으로 귀환하는 과정이다. 괴물들이 득세하고 판치는, 죽지 않고 다시 부활하는 공포영화는 다분히 체제반역적이고 반동적인 기운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가부장제도가 가장 약해질 때, 다시 말해 사회의 도덕성이 실추되는 시기에 공포영화는 가장 성행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깊었던 70년대의 미국이 그러했다. 흑인민권운동, 여성운동, 게이운동이 힘을 얻은 그 시기에 B급 호러가 전성기를 누렸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 ‘힘있는 미국’을 외치자 호러는 힘을 잃고 유아적인 동화, 한마디로 환상 심어주기인 ‘ET’ ‘레이더스’ ‘인디아나 존스’ ‘스타 워즈’ 같은 모험활극·SF영화들이 득세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이 학교체제의 억압에 시달리고 진학문제나 교사─학생 간 갈등이 심해지자 ‘여고괴담’이라는 학교 배경의 귀신영화가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호러영화, 특히 B급 영화들은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 할리우드 정통파 영화들이 보여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공포영화광들의 겉모양이 어떻든 그들 마음 한쪽에는 권위에 대한 반항과 나름의 삶에 대한 희구, 체제전복의 염이 숨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열정적이고 순수해 보이나 반면, 공포영화를 사랑하는 데 머물 만큼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 왜 공포영화는 여름에 기승을 부리는 걸까? 그것은 여름이야말로 심리적 억압이 가장 약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노출심리가 극대화되듯, 바로 무의식이 의식으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자리, 조금은 마음을 풀어헤칠 수 있는 계절, 여름이야말로 괴물들이 기승을 부리기에 안성맞춤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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