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새벽 바위’는 순결한 처녀의 속살

  • 장인석 산악인·바름산악회 이사

    입력2006-09-22 11:0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산꾼들은 산에 난 아스팔트길은 절대로 밟지 않는다. 포장도로가 있으면 택시를 타고 올라간다. 그렇게 가서 야영을 하고 선인봉에 톱으로 붙으면 저 멀리 즐비한 아파트군이 보이고 발 아래는 녹음이 깔려 있다. 이럴 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면 신선이 따로 없다. 》
    “왜 산에 오르냐고요?”

    ‘새벽 바위’는 순결한 처녀의 속살
    6년 전 여름, 회사에 한달간 휴가를 내고 미국 요세미티 밸리에 있는 엘 캐피탄(El capitan)이란 바위산을 등반하고 온 적이 있다. 이 바위산은 깎아지른 수직의 절벽이 1000m 이상 솟아오른 난코스로 전세계 암벽 등반가들의 메카 노릇을 하는 곳이다. 나는 이곳에 개척돼 있는 수십 개의 코스 중 비교적 쉬운 루트를 선택해 바위에서만 4박을 하며 산악회 후배 2명과 함께 등정에 성공했다.

    “장선배, 아니 뭐할라꼬 내려올 걸 그렇게 기를 쓰고 올라가요? 그것도 졸나 위험한 데를….”

    평소 아주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새카맣게 타서 온 나에게 이렇게 불쑥 물었다. 난 갑작스러운 이 물음에 대답이 궁했다. 뭐라 말해줘야 그 짜릿하고 간질간질하고 시원하고 감미롭고 환상적인 기분을 설명할 수 있을까. 뭐라 한마디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 때문에 난 대답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과거 유명한 산악인이 폼나게 말한 대로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할 수도 없었고(아마도 내 생각엔 이 산악인 역시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영화 ‘클리프 행어’에서 누군가 말한 대로 “섹스보다 더 좋으니까”라고 말하기도 곤란했다.



    산이 좋아서 그때까지 6년여간을 토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배낭을 싸고 산으로 들어가 주말과부와 애비 없는 자식을 만들어놓고도 죄책감 한번 없던 주제에 ‘왜 산에 다니는지’ 확실한 가치관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기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난 후배와 헤어진 후 곰곰이 생각해봤다.

    ‘땀흘려 오르고 난 뒤 문득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침 일찍 바위를 거슬러 올라오는 가스의 상큼한 향내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절벽 아래를 쳐다보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껴본 적은…. 그렇다면 바위에 매달린 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듯 떠 있는 수많은 별을 바라본 적은 있는가. 아니면 내 전생의 죄까지 추궁하는 듯 무섭게 불어대는 폭풍설(暴風雪)에 부대끼느라 잠을 설쳐본 적은 있는가?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떨지 이해가 되는가?’

    나는 이렇게 되물어야 했던 거 아닌가. 하지만 이 말은 산을, 암벽등반을 모르는 사람에겐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뭔가 그럴 듯한, 간결하고도 명료한 대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그 엘 캐피탄을 오르기 위해 1년여간 맹렬히 트레이닝하고, 떠날 수 있기 위해 직장과 가정으로부터 온갖 싫은 소리를 들었던 것 아닌가.

    山은 다가갈수록 거대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또다시 직장으로부터 20일간의 출장과 10일간의 휴가(이번에는 운 좋게 출장을 얻었다)를 얻어 산악회 후배 6명과 함께 매킨리봉 원정길에 올랐다. 매킨리는 북미 최고봉(6194m)으로 미국 알래스카주에 있는 험난한 산이다. 기후변화가 급격하고 온도가 낮은 데다, 악명 높은 바람 때문에 등정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한국에서는 에베레스트산을 올랐던 고상돈씨가 초등했으나 하산 도중 실족사했다.

    암벽등반과는 현격히 다른 고산등반을 하면서도 나의 궁금증 ‘왜 산에 오르는가’에 대한 해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영하 40도의 추위에 강풍을 뚫고 원하던 정상에 섰지만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다만 ‘내가 왜 이곳에 서 있는가’ 하는 강한 의문만 머리 속을 맴돌았을 뿐이다.

    서울로 돌아오고 또다시 직장동료와 주변 친지로부터 “내려올 걸 뭐 하러 기를 쓰고 올라가나, 위험하게”란 말을 들었지만 난 대답할 수 없었다. 쉽게,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은 다가갈수록 너무나 거대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당당함, 포근함, 경이로움을 표현하기에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다. 산이 어떻다고 말하기에 나의 존재는 너무 미약했다. 산에 대해 뭐라 말할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처럼 한창 더운 여름철이면 가까운 일본의 클라이머들이 서울의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으로 원정길에 나선다. 나 역시 한여름에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과 여러 번 같이 등반한 경험이 있다. 등반을 마치고 야영장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며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서울 친구들이 부럽다, 이렇게 좋은 겔린더(암벽 훈련장)가 바로 지척에 있으니”다.

    그렇다. 아마 세계 어디에서도 도시 한복판에 이렇게 삼빡한 바위절벽이 있는 곳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 도쿄에 사는 클라이머들은 주말에 암벽등반을 하려면 서너 시간을 차로 이동해야 한다. 그것도 인수봉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절벽이라고 한다. 그들에 비하면 서울의 클라이머들은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낸다고 할 수 있다. 토요일 늦게까지 일한 직장인들이 집에서 배낭을 메고 북한산 입구나 도봉산 입구까지 와도 밤 11시를 넘기지 않는다.

    북한산 입구의 6번 버스 종점 부근과 도봉산 입구의 19번 버스 종점 부근의 상점들은 토요일 저녁 9시부터 갑작스럽게 바빠진다. 풀 배낭에 운동화 차림(클라이머들은 암벽등반을 하기 위해 산에 올 때는 절대 등산화를 신지 않는다)으로 야심한 시간에 상점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야영한 다음날 ‘바위하러’ 온 바위꾼들이다. 이 바위꾼 대부분은 대학이나 전문 산악회에 소속돼 있는 회원들이다.

    야영에 필요한 각종 물건을 구입하는 바위꾼들은 상점 안에 걸린 대형 칠판에 어떤 메모가 적혀 있는지 살피기도 한다. ‘동석, 풀떼기 외 4인 9시 출발…’‘대장 외 3명 약수터 뒤 큰 바위 옆… 올 때 안주 좀 많이 사올 것’ ‘에코 회원 필독: 누가 수박 좀 사오면 이쁘징’ 등 다양하다.

    아스팔트길은 걷지 않는다

    ‘새벽 바위’는 순결한 처녀의 속살
    북한산은 도선사까지 아스팔트길이 나 있다. 걸어가려면 족히 30분 이상이 걸린다. 산꾼들은 이런 아스팔트길을 저주한다. 그래서 절대로 걸어다니지 않는다. 6번 버스 종점에는 이런 산꾼들을 위해 합승택시가 항상 기다리고 있다. 1000원씩만 내면 배낭까지 실어 도선사 입구까지 태워준다.

    도선사 입구에서 인수산장 부근의 야영장까지는 20분에서 30분. 좀 오래 된 산악회 중에는 회원들에게 ‘무산소 무랜턴주의’를 강조하는 데도 있다. 야영장까지 걸어오면서 한 번도 쉬지 말고, 랜턴도 켜지 말고 오라는 뜻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아무리 짧은 등반이라도 요즘 세계적인 추세인 등로주의(登路主義·알피니즘을 뜻하는 우리 말로, 어디를 오르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오르는가를 중요시한다. 이왕이면 아무도 오르지 않은 어려운 코스로 오르거나, 남이 지나간 코스로 올라도 산소통이나 셰르파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오르자는 새로운 등반 사조다)를 따르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밤 랜턴 없이 산길을 오르려면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곤욕을 치러야 한다.

    밤 10시경 야영장 부근은 이미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텐트 옆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얘기꽃을 피우고 있는 팀이 적어도 100개 이상은 된다. 이들은 얘기 도중 동료들이 오면 반갑게 맞아주고 그들이 어떤 희귀한 안주를 대동하고 왔는지 궁금해한다. 토요일 밤의 술자리는 대개 새벽 2~3시까지 이어지는데, 늦게 올라오는 회원이 많을수록 술자리도 길어지기 일쑤다.

    북한산에서는 인수산장 부근에서만 야영이 가능하다. 그것도 서울시산악연맹에 가입된 산악회 중 미리 야영 허가서를 받은 팀에 한해서다. 야영 허가서는 북한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발행하는데 한밤중에 공단 직원들이 단속하러 다니기 때문에 허가서 없이 야영을 하다가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인수봉이 대학로면 선인봉은 무교동

    선인봉에 이르는 아스파트길은 차로 5분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도봉산 매표소에서 산악구조대가 있는 야영장까지 걸어가려면 50분 정도가 걸리므로 다소 힘이 든다. 특히 마지막 5분 동안 펼쳐지는 ‘깔딱고개’는 클라이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고개를 절반쯤 오르면 고개 너머 야영장에서 떠들어대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마지막 힘을 보태준다.

    선인봉 야영장은 북한산 야영장과는 달리 발 아래 펼쳐지는 서울 야경이 압권이다.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북한산 야영장은 시원한 바람이 일품이라면, 선인봉 야영장은 스카이라운지를 방불케 한다. 특히 추석날 이곳에서 보는 보름달은 가슴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

    선인봉 야영장은 인수봉 야영장에 비하면 다소 썰렁하기까지 하다. 야영하는 팀이 많아야 30팀을 넘기는 적이 별로 없어 한적하고 조용하다. 야영장 규모가 인수봉에 비해 작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수파’보다 ‘선인파’가 적은 게 더 큰 이유다. 최근 들어서는 선인봉과 인수봉을 고루 등반하는 산악회가 많아지면서 이런 구분이 무의미해지기는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둘의 구분은 아주 엄밀했다. 지금도 몇몇 고전적인 산악회 중에는 한 군데를 고집하는 곳도 있다.

    내가 속한 바름산악회는 ‘선인파’에 속한다. 한 달에 네 번 주말마다 산행을 하는데, 세 번은 선인봉행이고 인수봉은 한 번 정도만 등반한다. 선인봉과 인수봉은 같은 바위산이라도 개성이 판이하다. 초급 코스부터 고급 코스까지 두루 개척돼 있는 인수봉이 남성미를 자랑한다면, 모든 코스가 중·고급 이상인 선인봉은 날렵한 자태의 여성미를 보여준다.

    만만한 초급 코스가 많다 보니 인수봉은 늘 만원이다. 여기서도 ‘러시아워’가 있어 아침 10시경이면 코스마다 등반대가 붙어 있어서, ‘재수 없으면’ 한두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실력이 있는 팀은 등반대가 없는 코스로 옮겨다니며 ‘지그재그 등반’을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봄철에는 신입생을 받은 대학팀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인수봉의 가장 쉬운 출발지점인 대(大)슬랩에는 늘 초보등반강좌가 열리며 2피치를 오르면 나오는 ‘오아시스’(나무도 있는 넓은 쉼터라서 이렇게 부른다. 물론 물은 없다)까지 등반연습을 하느라 시끄럽기 짝이 없다.

    인수봉이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대학로’라면 선인봉은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사람들이 몰리는 ‘무교동’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인수봉의 패션은 늘 최첨단이고 장비도 화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선인봉은 고전파가 많은 탓으로 다소 촌스러운 구색도 많다.

    선인봉은 출발지점부터 만만한 코스가 거의 없다. 때문에 실력이 다소 떨어지는 산악회는 선인봉에 와봐야 망신만 당할 게 뻔하기 때문에 인수봉의 쉬운 코스에서 부지런히 실력을 쌓아 도전해야 한다. 그래서 선인봉의 등반 코스는 늘 조용하다.

    야영을 한 산악회들의 기상시간은 대개 아침 7시. 밥 당번들인 ‘졸따구’들은 이미 6시쯤 일어나 밥과 국을 준비해놓고 고참들을 깨운다. 고참들은 일어나자마자 이 닦기는커녕 세수도 안 하고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등반대장의 지휘 아래 등반 준비를 시작한다.

    자일(로프)을 한쪽에 가지런히 정렬해놓고 확보장비(등반할 때 추락에 대비해 바위 틈새에 장치하는 프로텍션: 프렌드나 티시유, 캠롯 등 종류가 다양하다)와 퀵드로(확보장비와 자일을 연결시키는 장비), 초크통과 초크(손의 미끄러움을 방지하는 가루), 런너(자일 소통을 원활하게 하거나 볼트에 연결해 자기 확보를 하기 위한 슬링), 암벽화 등을 매만지고, 안전벨트를 찬다. 조그만 배낭에 먹을 것과 식수를 담는 것도 잊지 않는 절차다.

    한창 준비에 여념이 없다 보면 전날 사정이 생겨 야영에 들어오지 못한 회원들이 땀 흘리며 올라온다. 아침 9시면 암벽으로 출발하니 야영장까지 시간 맞춰 오려고 집에서 새벽밥을 먹고 떠났을 것이다. 당일 등반하는 산꾼들의 배낭은 야영 산꾼들의 배낭에 비하면 괴나리봇짐이다. 다소 엄한 고참 중에는 젊은 친구들이 야영을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 야단치곤 한다.

    “이봐, 클라이밍의 기본은 야영에 있어. 풀 배낭을 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워킹, 막영법 등을 먼저 익혀야 클라이머의 기본을 갖추는 것이지. 괴나리봇짐 달랑 메고 등반이나 하려고 들면 곤란해.”

    등반대장은 서둘러 조를 편성한다. 보통 한 조에 두세 명이 적합하지만, ‘톱쟁이’(선두에 서는 클라이머)가 부족할 때는 네 명, 다섯 명까지 조를 짜기도 한다. 한 조에 사람이 많으면 짜증도 나고 등반시간도 길어지므로 바람직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산악회라도 모든 회원이 톱쟁이가 되기는 힘들다. 물론 모든 산악회가 ‘전회원의 톱쟁이화’를 모토로 삼고 있지만 실력 외에 담력과 신중함까지 요구되는 톱쟁이는 어느 정도 세월이 걸려야 탄생하는 법이다.

    혼자서 등반하는 것을 ‘솔로’라고 한다. 하지만 솔로 등반은 위험하고 힘이 많이 들어 어느 산악회도 허락하지 않는다. 가끔 기록이나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프리솔로(확보물 없이 혼자서 등반. 이때 추락하면 바로 죽음이다)로 등반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올바른 알피니즘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클라이밍이란 목적한 곳을 파트너들과 힘을 합쳐 등반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등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파트너들의 신뢰감이며 등반을 통해 우애와 우정, 진한 동료애를 느낄 때 등반의 참맛을 알게 된다. 따라서 마음에 맞는 파트너를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톱쟁이, 즉 ‘선등자’는 자일을 안전벨트에 묶고 올라가면서 바위에 박혀 있는 볼트나 바위 틈새에 본인이 설치하는 확보장비에 퀵드로를 건 후 그곳에 자일을 통과시킨다. 이때 후등자, 즉 세컨은 선등자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일을 조금씩 풀어주고 선등자가 추락하면 제동을 걸어 바닥까지 추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선등자가 등반중 추락하면 마지막 확보장비로부터 올라온 거리의 두 배 이상을 떨어지므로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생긴다. 클럭스(등반중 만나는 어려운 곳)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순간을 당해보지 않고는 암벽의 참 묘미를 느끼기 힘들다. 그곳을 떨어지지 않고 올라갔을 때의 희열, 결국 그곳에서 추락했을 때의 당혹감과 허망함, 한없이 떨어지는 듯하다가 순간 제동됐을 때의 안도감 등….

    이러한 경험 때문에 진정한 클라이머는 바로 톱쟁이를 뜻한다. ‘톱에 설 수 없는 사람은 암벽등반가라 말하지 말라’는 것은 산악계의 불문율이다.

    한 피치를 올라간 선등자는 벽에 박힌 볼트에 자기확보줄을 걸고 후등자 릴레이를 준비한다. 이제 세컨이 올라올 차례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자일은 모두 외국산인데 직경 10mm 길이 50m짜리를 사용한다. 피치는 한 코스의 구간을 일컫는데, 암벽 상태와 자일 길이에 따라 나뉘어 있다.

    선인봉의 경우는 대부분 3~5피치이고 인수봉은 4피치부터 9피치까지 다양하다. 후등자는 선등자가 연결된 자일을 몸에 묶고 있기 때문에 등반중 추락해도 1m 이상 떨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선등자보다 안전하므로 보다 과감해질 수 있다. 하지만 후등만 하다 보면 바위의 미묘한 감각에 둔감해지므로 선등을 한다는 기분으로 등반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컨이 올라오면 그 다음 서드, 말번의 순으로 등반한다. 선등자는 세 번째 등반자가 올라와야 다음 피치 등반에 나설 수 있으므로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때 바위절벽에 매달려 태우는 담배맛은 천하의 일품이다. 저 멀리 서울의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보이고 바로 발 밑으로 녹음 짙은 숲들이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 바람은 산들거려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거나 기성을 질러대는 산꾼도 있다. 이때만큼은 누구나 열린 마음, 자연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후등이 선등보다는 쉽다 해도 실력 이상으로 어려운 코스를 만났거나 트레이닝이 부족한 경우에는 ‘버벅거리기’ 십상이다. 아무리 용을 쓰고 난리를 쳐도 자일을 팽팽하게 당겨주지 않으면 올라갈 수가 없다. 이 때문에 평소의 트레이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에도 그는 그 코스를 돌파할 수가 없다.

    실력이 뛰어난 등반가가 암벽을 오르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학이 춤을 추는 듯 경쾌하고 아름답다. 암벽등반을 발레와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인데,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듯하다. 암벽등반을 손 힘만으로 잡고 오르거나 혹은 자일을 잡고 올라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암벽등반은 거의 발로 올라가는 것이다. 손은 미세한 홀드를 잡고 중심을 유지하거나 지지를 얻을 뿐, 몸을 끌어올리지는 못한다. 결국 암벽화 밑창의 고무 마찰력을 이용해 밸런스를 잃지 않은 상태에서 발 힘으로 중력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셸 위 댄스’를 바위에서?

    ‘새벽 바위’는 순결한 처녀의 속살
    암벽등반가들의 실력은 일반적으로 어떤 난이도의 루트를 오를 수 있는가로 평가한다. 암벽은 기울기와 상태, 홀드의 유무, 홀드의 종류 등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데 우리나라는 미국식 등급을 채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쉬운 바위길을 5.7로 하고 5.8 5.9 5.10으로 한 등급씩 올라간다. 5.9급까지를 아마추어용이라고 한다면, 5.10급부터는 전문가 코스라 할 만하다. 이때부터 난이도는 5.10a 5.10b 5.10c 5.10d 다시 5.11a 5.11b 5.11c 5.11d로 세분되는데 현재 5.14d까지 개척돼 있다.

    선인봉을 예로 들면 초보자들에게 ‘표범길’은 베테랑 바위꾼이 되는 자격증 같은 곳이다. 훼이스(경사가 80도 이상 되는 직벽)와 슬랩(경사가 80도 이하인 완만한 벽), 크랙(바위에 틈새가 벌어진 곳) 등 여러 종류의 바위 상태가 혼합된 루트인데다 완력과 담력 균형감각 등이 고루 요구되는 곳이어서, 이곳을 선등한다면 바위꾼으로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는다. 인수봉에서는 ‘하늘길’이 초보 클라이머들의 제1차 목표가 되고 있다.

    주말 클라이머들의 한계는 5.11d 정도이며, 5.13 단계는 프로 중에서도 대회에서 우승을 다투는 실력이다. 5.9급을 완벽하게 선등할 수 있는 실력이면 선인봉과 인수봉의 어지간한 코스는 다 오를 수 있다. 쉽게 바둑에 비유하자면 5.10급이면 1급이고 5.13이면 프로 7∼8단, 5.14면 프로 9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 5.14a를 해낸 클라이머가 탄생했으나 미국이나 프랑스 등 암벽 선진국에서는 5.15a에 도전하고 있다고 한다.

    5.9급까지는 운동신경이 좀 있거나 완력이 센 사람이 6개월 정도 암벽경험만 쌓으면 돌파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실력을 얻으려면 등반경험이 많아야 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트레이닝도 필요하다. 트레이닝은 체력과 근(筋)지구력 근력을 단련하고, 실내암벽장에서 균형감각과 유연성 순발력 등을 키워야 하는데, 한 등급 올리려면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실내암벽장은 요즘 새로운 트레이닝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어 서울을 비롯, 전국의 대도시에 고루 분포돼 있을 정도다. 특히 운동부족으로 고민하는 직장인이 많이 찾는데, 그리 큰 힘을 요구하지도 않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정에 스릴과 재미도 만끽할 수 있다. 일주일에 서너 번, 하루 1시간씩 3개월만 꾸준히 연습하면 순발력과 유연성, 근력이 강화됨은 물론 상당한 체중감량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목적했던 피치를 끝내면 그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거나 바로 하강해서 휴식을 취한다. 선인봉은 코스가 짧은데다 정상 부근에 낙석이 심해 올라간 코스에서 바로 하강한다. 선인봉에서는 하루에 보통 두세 코스 이상 등반한다. 하지만 인수봉은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므로 정상에서 식사 겸 휴식시간을 갖고 서면 쪽에서 하강한다.

    인수봉 등반시에는 하강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10~20m짜리 짧은 피치에서 볼더링을 한다. 볼더링은 특정한 등반동작이나 밸런스 감각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개척된 짧은 피치의 암벽에서 등반훈련을 하는 것이다. 볼더링은 특히 ‘하드프리’라고 해서 난이도가 높은 암벽등반을 선호하는 바위꾼들이 즐기는데, 서울의 불암산과 관악산을 비롯, 전북 선운산, 원주 간현암, 부산 금정산 등 전국 각지에 고루 개척돼 있다. 특히 볼더링장은 접근이 용이한 데다 등반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가족단위 나들이장으로도 적격이다.

    야영장으로 돌아오면 장비정리를 하고 철수준비를 한다. 배낭을 싸고 주변 쓰레기를 깨끗이 모아 비닐봉투에 담는다. 대개 하산시간은 저녁 6시경. 적당히 배도 고프고 갈증도 나, 한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다. 하산주를 마시지 않으면 ‘등반을 한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산주는 산꾼들에게 중요한 행사다. 등반중 재미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누가 실력이 많이 늘었느니, 어디서 버벅거렸느니’ 하는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등’이나 ‘코락’ 등에서 바위 배워

    어떻게 하면 산악회에 가입할 수 있을까는 어떻게 하면 암벽등반을 배울 수 있을까와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암벽등반이란 앞서 말했듯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취미생활이므로 반드시 산악회에 가입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대개 산악회에는 연중 무휴로 신입회원을 모집하는데, 뚜렷한 자격조건은 없지만 대부분 30세 이하를 원하고 있어 나이 많은 사람은 들어가기 어렵다.

    30세 이상이거나 좀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은 한국등산학교(한등)나 코오롱등산학교(코락), 정승권등산학교 등에 입학하면 된다. 토털 클라이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산악인 정승권씨가 운영하는 정승권등산학교는 소수정예에 나이 제한이 없다. 필자도 33세가 돼서야 암벽등반에 입문했지만 해외원정을 두 차례나 다녀왔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산악인은 56세의 나이에 암벽등반 학교를 마치고 산악회에 가입했다. 그분은 처음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쩌면 저렇게 못할 수 있나’ 생각될 정도로 겁도 많고 감각도 없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과 같이 산에 다니는 것만도 영광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꾸준히 산에 다녔고 틈틈이 트레이닝에 전념해 지금은 ‘선인봉의 날다람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분이 지난해 가을 인수봉 정상에서 회갑잔치를 연 것이 문화방송 등에 방송돼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겨울철 구곡폭포를 등반하는 그분 모습도 역시 방송을 탄 바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대머리였던 그분의 머리에 지금은 몰라볼 정도로 머리털이 많이 자랐다는 것이다.

    클라이밍, 그 무심의 행위

    정작 산악회에 필요한 인력인 젊은 사람들의 가입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스포츠나 취미생활에도 3D종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처럼 감각적인 생활을 즐기는 젊은이들에게 암벽등반은 다소 힘들고 거칠고 더러운 일인가 보다.

    산악회에 가입할 때는 다소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암벽등반이란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여가활동이기 때문에 경험이 많거나 질서체계가 어느 정도 잡힌 산악회를 골라야 한다. 해외원정 경험이 풍부한 회원들이 많이 포진한 산악회도 좋지만, 그보다는 산악회 리더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곳이 좋겠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야 등반중 사고가 나더라도 체계적인 수습을 통해 산악회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교육비는 20만원 내외, 교육기간은 대개 한 달이다. 하지만 교육을 받으려면 최소한 개인장비를 갖춰야 하는데 이 돈이 만만치 않다. 물론 한 번 구입하면 오래도록 쓸 수 있어 장기적으로 볼 때는 큰 비용이 아니지만 젊은 사람들에게는 좀 부담스럽다. 4만원에서 7만원 하는 암벽화, 5만~6만원 하는 안전벨트, 1만원 정도 하는 퀵드로 서너 개, 2만~3만원짜리 초크통, 5만~6만원짜리 작은 배낭은 필수여서 최소한 20만원은 필요하다.

    본격적으로 등반을 하려면 20만원짜리 자일 한 동과 30만~40만원 하는 확보장비, 야영을 하는 데 필요한 풀 배낭과 매트리스, 침낭, 코펠, 버너 등등 구입해야 할 장비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겨울철에 적설기 산행을 하거나 빙벽등반까지 하려면 100만원을 들여도 빠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장비를 한꺼번에 구입할 필요는 없다. 서서히 갖춰나가거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는다면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산에 가려는 마음가짐이지 장비가 아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적으로 서서히 ‘자유등반’이란 개념이 형성되면서 우리나라도 암벽등반만 하려는 산악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유등반이란 모든 장비를 활용해서 올라가는 인공등반에 반대해 인위적인 수단은 ‘추락방지용’만 인정할 뿐, 손과 발의 힘으로만 올라가자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고난도 루트가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고, 트레이닝을 위한 실내암벽장이 곳곳에 설립됐다.

    자유등반 혹은 스포츠 클라이밍을 즐기는 클라이머들은 더 어려운 등반을 위해 극도로 체중을 감량하게 된다. 미세한 홀드에 체중을 실어야 하니 체조선수 같은 어려운 동작과 체격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시간만 나면 실내암벽장이나 볼더링장에 붙느라 등산의 가장 근본적인 행위인 워킹에는 관심이 없다.

    등반이 장비의 발전과 기술 향상으로 인해 세분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산악인들은 어느 한 가지만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알피니즘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등반의 궁극적인 목적은 ‘높은 산’ ‘어려운 산’을 올라가 인간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지 남과 경쟁하거나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한 산악인은 “등반의 전과정을 고루 익히려는 토털 클라이밍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디지털이니 뉴밀레니엄이니 하면서 세계는 급변하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의 생활도 극도의 편리함을 위해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 자연은 오염되고 우리의 정신은 황폐해지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무심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산이다. 건강도 얻고 좋은 친구도 사귈 수 있는 곳이 암벽등반의 세계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