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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정주영’, 현대 형제오너 3인의 생존게임 시나리오

  • 이병기·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포스트 정주영’, 현대 형제오너 3인의 생존게임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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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는 왕회장의 건강문제는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이고, 그의 건강상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극소수다. 왕회장의 건강상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몇몇 가족과 청운동 자택에 머무는 간호사와 비서, 평소 청운동 자택을 드나드는 김윤규(金潤圭)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金在洙) 구조조정본부장 정도.

현대측은 정 전 명예회장의 건강에 대해 “방북 이후 식욕을 잃고 잠시 기력이 떨어졌지만 건강에는 크게 이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건강상태에 대해 설명하는 현대 관계자들도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모범답안’을 말할 뿐이다.

한편 관가와 재계에서는 ‘왕회장 위중설’이 파다하다. 대북사업이 평생의 마지막 사업이라며 애정을 품고 있는 정 전 명예회장이 8월 방북계획을 취소했고, 9일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하는 등 심상치 않은 징후들이 드러났기 때문. 그의 건강에 대해서는 재계뿐이 아니라 청와대와 금융감독원, 정치권 등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도 왕회장의 건강이 걱정돼 산삼을 보내왔다고 한다.

재계에서는 최근 국정원이 정 전 명예회장의 건강에 대해 심층적으로 조사, 고위층에 보고서를 올렸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가 현대의 구조조정을 압박했던 것도 만일 왕회장이 구조조정이 이뤄지기 전에 사망할 경우 현대의 내분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빨려들 것이고, 그런 상황에선 구조조정이 요원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청운동 자택을 드나드는 한 관계자는 “어른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소리나 위독하다는 소리 모두 과장된 것”이라며 “‘가족들이 염려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밝혔다. 왕회장은 지난해 말부터 한 달 정도를 주기로 건강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고 있는데, 특히 지난 7월 방북 이후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는 것. 3월 이익치 회장의 인사문제로 왕회장이 내용이 정반대인 두 서류에 모두 사인을 하는 등 판단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것은 건강 사이클이 하강기에 있을 때였으며, 5월말 3부자 동시 퇴진을 했을 때는 사이클이 좋은 때였다는 것.



왕회장은 방북 이후 식욕을 잃어 한달 이상을 영양제로 버텼다. 식사를 해도 초밥 한 개나 죽 한 숟가락을 드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지난해 말부터는 시력이 나빠져 신문을 읽지 못하고 TV 시청을 즐겼다는 것. TV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들었는데, 건강이 더 나빠진 뒤에는 TV도 보지 않고 방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측근들이 함께 식사하러 갔다가 왕회장이 누워 있는 바람에 인사도 못하고 돌아간 일도 많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볼 때 정 전 명예회장의 위독설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해도, 사실상 현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밖에 없는 건강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유언장 논란

정반대의 예측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현대 관계자의 말이다.

“말년의 왕회장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인생을 명예롭게 마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유언장을 작성,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공익사업에 쓰도록 유언장을 작성해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김재수 본부장이 공익사업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자체가 왕회장이 김본부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듯 지난 5월 정 전 명예회장이 몇몇 측근들과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 유언장을 작성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현대자동차측에서는 유언장 이야기가 나오면 힘을 잃는다. 정 전 명예회장의 성격상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몽구 회장에게 유리하도록 유언장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

왕회장이 만약 유언장을 만들어두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한다면 껄끄러운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2000억 원이라는 돈은 보통사람들에게 천문학적으로 큰 액수지만, 재벌들에게도 큰 돈이다. 특히 현대건설과 현대투신의 부실문제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면 현대로선 결코 양보하기 힘든 돈이다. 더욱이 현대자동차마저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일은 더욱 꼬일 수 있다.

일부에서는 “두 형제의 불화가 계속되고 가신들의 행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유언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유언장의 진위여부를 놓고 또 한 차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는 말까지 들려온다. 형제간 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때인 지난 3월 현대차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 전 명예회장의 인감을 가신들이 갖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며 “몇몇 가신들이 건강이 좋지 않은 왕회장을 농단하고 있다”고 열을 냈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더라도 현대차측의 이런 시각에 변화가 없다면 유언장을 둘러싼 또 한번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현대중공업 계열분리 문제를 놓고서도 마찰이 일어날 수 있다. 현대는 자동차 계열분리를 발표하면서 당초 2003년으로 예정됐던 현대중공업 계열분리 시한을 2002년 6월로 앞당긴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중공업측은 “발표 전에는 2001년 6월로 앞당긴다고 했다가 1년을 늦췄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가 주위의 눈총을 의식, 목소리를 낮췄다.

현대그룹 관계자들이 현대중공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한 핵심 관계자가 사견임을 전제로 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 아닌가. 한국 현실에서 현대중공업 오너가 대통령을 꿈꾸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민들이 엄청난 재산가를 대통령으로 뽑아줄리 없다. 때문에 정의원은 중공업을 몽헌 회장에게 맡기고, 몽헌 회장은 정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도록 물심 양면 지원해주는 것으로 역할분담을 하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령 정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돼도 문제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어떻게 현대중공업을 감독할 것인가.”

분통 터진 중공업

현대그룹 사정을 들여다봐도 중공업 계열분리는 만만치 않은 문제다. 현대건설이 해외에서 공사를 수주하거나 다른 계열사가 해외계약을 맺을 때 현지 금융기관들은 확실하게 현금창출을 하는 현대중공업 보증을 요구한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전자와의 2억2000만 달러의 대지급금 소송에서도 드러났듯 중공업은 현대그룹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중공업을 선뜻 분리하고 싶을 리 없다.

외국인들은 현대중공업이 그룹 계열사의 자금줄 역할까지 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그래서 외국인의 현대중공업 주식보유율이 5% 이하를 맴돌 정도다. 장부상 드러난 ‘매출 6조 원, 순이익 3000억 원’이라는 숫자도 의심한다. 실제로는 순이익이 훨씬 더 많은데도 중공업측이 이익을 빼돌려 현대 계열사를 돕는 데 쓰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측은 “사외이사들이 활동하고 금융당국이 감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계열사를 지원하겠느냐”며 “다만 중공업 현금사정이 좋아 그룹 차원의 대북사업에 출자하고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중공업이 그룹측의 계열분리 약속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 지난 6월 정 전 명예회장의 지분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MH 계열인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가 된 것. 이에 따라 중공업의 지분구조는 현대상선(12.46%)-정몽준 의원(8.06%)-현대건설(8.06)-정주영(0.5%)의 순이 되고 말았다. 지분구조 변동 이전에는 정 전 명예회장과 정의원이 최대주주였다.

이런 지분구조에서는 현대측이 마음만 먹으면 상선과 건설이 가진 지분을 이용해 중공업 경영진도 교체할 수 있고, 계열에서 분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문에 MK-MH 간에 빚어진 갈등이 MH와 정의원 사이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의원이 지분구조 변동 아이디어가 이익치 회장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이회장 퇴진을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3부자 퇴진 후 정의원이 청운동 자택을 자주 찾아간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현대의 한 관계자는 “정의원은 몽구 회장보다는 몽헌 회장과 훨씬 가깝다. 최근 정의원이 몽구 회장과 가까운 것처럼 보인 것은 두 사람이 쏜 ‘탄착점’이 일치했기 때문”이라며 “정의원과 몽헌 회장은 곧 예전 관계를 회복할 것이다. 몽헌 회장은 술수를 꾸미거나 말을 뒤집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중공업 계열분리를 약속했으면 지킨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이회장이 제거되고 정회장이 약속을 지키면 두 사람의 관계가 복원된다는 뜻이지만, 만약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악화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편 이익치 회장의 한 측근은 “이회장이 마치 그룹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며 “중공업 계열분리 문제는 구조조정본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고 해명했다.

중공업측도 “정의원은 개인 대주주일 뿐이고 현대중공업은 전문경영인이 운영하는 회사”라며 “중공업 일을 모두 정의원과 연결해 해석하는 것은 음모론이다”고 발을 뺐다. 될 수 있으면 갈등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발언들이다.

비록 법적으로는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이지만 이미 만천하에 계열분리를 선언했고 채권은행과도 약정을 맺은 만큼 그룹측이 중공업 계열분리 약속을 깨기는 어려워 보인다. 만일 현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정부와 시장이 이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발 우리를 이대로 놔뒀으면 좋겠다. 최근 현대에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으면 시원하게 정리하는 게 또 현대다. 조금만 지켜보면 알 것이다. 자신들의 치부가 사회문제화하는 것을 꺼리는 다른 재벌들이 현대문제를 자꾸 확대 재생산하는 기류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 현대는 감정에 치우치고 음모론을 좋아하는 여론이나, 명분만 따지는 정부 심판을 받지 않고 오직 시장 심판만 받으면 된다. 현대가 시장을 거스르면 망할 것이요, 시장을 따르면 다시 도약기를 맞을 것이다.”

신동아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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