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2년 반 동안 공들인 남북 음악회, 정부가 가로챘다”

북한 상대로 민사소송 제기한 대북사업가 배경환씨

  • 송문홍·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입력2006-09-04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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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정상회담 이후 순풍에 돛 단 듯 ‘잘 나가고 있는’ 남북관계 기류에 한 줄기 작은 와류(渦流)가 발생했다. 내용인즉, 한 대북사업가가 우리 법원에 북한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주인공은 남북 문화예술 교류사업을 추진해온 배경환씨(50·CNA Korea 대표).

    저간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배경환 사장은 1998년 초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부터 우리 연주자들이 평양에 가서 북한 국립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회를 갖고, 그 멤버가 다시 서울에서 연주회를 갖는다는 내용의 사업을 추진해왔다. 사업 외적 변수가 워낙 많은 대북사업이 으레 그렇듯, 이 사업안은 장기간 우여곡절을 겪다가 98년 11월29일 북한측 아태평화위원회와 합의서를 체결하는 데까지 진전됐다. 우리측 통일부로부터도 99년 4월16일 협력사업 승인을 받았다.

    남북 양측 정부의 승인을 얻었으니 이제 큰 고비는 넘긴 듯했지만, 사업은 여전히 속시원히 진전되지 못했다. 지난 4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대형 사고’가 터지기도 했다. 1차 선발대가 평양에 먼저 들어가 북한 연주자들과 연습을 하고 있는데 2차 본진 관람단이 베이징에서 입북(入北)을 거부당하고 사흘 만에 서울로 되돌아오는 사태가 벌어진 것. 당시 관람단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사돈인 윤경빈 광복회장과 고려대 강만길 명예교수, 소프라노 조수미씨 등 저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6월13∼15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 화해의 새 전기를 연 정상회담은 언뜻 보면 배사장의 ‘음악회 사업’에 호재가 될 듯 싶었지만, 일은 엉뚱하게 꼬여만 갔다. 이번에는 우리 정부가 8월15일 북한 오케스트라의 서울 공연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 이 사안은 7월26일 김대통령이 언급했고, 8월1일 정식으로 발표됐다.

    지난 2년간 이 사업에만 매달려온 배사장에게 이건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만약 정부 발표대로 8월15일 북한 오케스트라가 서울에 와서 공연한다면, 그가 추진해온 사업은 무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 후에 배사장이 추진해온 음악회가 성사된다 해도 그 때는 이미 사업의 의미는 사라진다. ‘최초’라는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난 뒤이기 때문이다.



    배사장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지난 8월2일, 서울지방법원에 공연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것이다. 채권자는 (주)CNA Korea, 채무자는 북한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용순·대한민국·한국방송공사 등 세 곳. 신청 취지는 “채무자는 채권자의 승낙을 얻지 아니하고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서울공연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여파 때문이었을까, 애당초 8월14∼15일로 예정됐던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서울방문 음악회는 8월초 8월20∼22일로 슬그머니 연기됐다.

    헌법상 북한은 대한민국의 영토다. 따라서 당연히 대한민국 사법권의 관할에 속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법원의 판결이 북한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배사장은 왜 이런 소송을 제기했을까?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순조로운 시기에 어울리지 않게, 소송이라는 극한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정부가 내 사업 가로채갔다”

    8월12일 토요일 오후, 배경환 사장을 만났을 때 그는 매우 격앙된 상태였다. 마침 그 날 낮 법원의 판결이 ‘기각’으로 나왔기 때문. 서울지방법원 제50 민사부는 ▲ 신청인(배경환 사장)이 피신청인 아태평화위와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서울공연에 관하여 전속적, 독립적 지위를 갖기로 약정했거나 신청인이 위 교향악단의 서울 공연 초연(初演)에 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인정할 소명이 없으며 ▲ 신청인이 추진해오던 공연과 피신청인들이 현재 개최 예정인 공연의 내용이 반드시 동일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 신청인과 피신청인 아태평화위 사이의 공연계약에 따른 이행청구권은 채권적 청구권에 불과하므로,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피신청인 대한민국, 한국방송공사에 대하여는 이를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등의 기각 사유를 밝혔다.

    “뭐, 예상했던 결론이지만, 그래도 화가 나네요. 이런 일을 재판도 해보지 않고 판사들끼리 결정했다는 게 우선 납득할 수 없어요. 또, 판결문에 기각의 뚜렷한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죄다 모호한 표현들이고, 그 모호한 표현들마저 모두 피신청인측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 것들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번 기각에 대해서는 당장 항소할 생각입니다. 또, 저와 계약한 당사자는 북한이니까 북한에 대해서 사기에 의한 형사소송을 제기할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 저와 합의서에 서명한 당사자인 조광주 참사, 협상 파트너였던 황철 참사, 이렇게 세 사람을 묶어서 소송을 제기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국방송공사에 대해서 지난 3월까지 저와 합의했던 사항을 파기한 것에 대해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겁니다.”

    ―그게 남북관계 사상 초유의 일이라는 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주위에서들 그렇다고 하데요.”

    ―소송을 제기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시는 겁니까?

    “현재 남북관계나 정치상황으로 볼 때 제가 이긴다는 기대는 하지 않아요. 혹시 재판부에 제 소신에 동의하는 분이 있을까 일말의 기대도 해보지만, 그건 아무래도 저 혼자 생각인 것 같고….”

    ―우리 법원으로서도 꽤 곤혹스럽지 않겠어요? 헌법상으로야 우리 사법권이 북한 영토에까지 미치는 걸로 돼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안이 없지 않아요?

    “제가 확인해본 바로는 이런 소송사건은 일단 접수를 받아서 예외조항을 근거로 기각시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저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므로 사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최종적으로 호소할 곳이 법원밖에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북한측 당사자들에 대해서 형사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일이고, 현실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무언가 조치를 취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 정부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먼저 도덕적인 면에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해달라는 겁니다. 정부가 국민의 이익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은 직무유기 아니냐는 겁니다. 이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제가 끝까지 제 권익만 주장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제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할 수 있어요.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정부와 주변에서 어느 누구도 이런 사업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저는 혼자서 외롭게 이 일을 추진해왔습니다. 저는 이런 프로젝트가 필요한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래서 국민이 자기 사업을 통해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니냐고 생각해서 이 일에 매달려왔어요. 새로운 공연 아이디어를 짜내고 기획하는 것은 제 전문분야고 생업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프로젝트가 현실적으로 가능해진 상황이 됐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혼자서 이 일을 추진해왔지만, 이제 국가가 직접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양보할 수 있어요. 이 일이 좋은 방향으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제가 하면 어떻고, 정부가 하면 어떻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패망 직전의 베트남 같은 나라도 아니고 정상적인 국가인데, 국민이 애써서 추진해온 일을 정부가 가져가겠다면 거기에 마땅한 보상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제가 지금까지 투자한 비용 다 날리고 끝난다면, 평양 음악회에 가겠다고 몇백만원씩 돈을 낸 수십명의 사람들과 제 사업에 투자한 기업들은 어떻게 됩니까? 북한에 준 100만 달러도 돌려받지 못하고, 국가에서도 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국가 정책을 믿고 이 일을 추진해온 저만 사기꾼이 돼버리고 말아요. 이게 정부가 할 일입니까?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정부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누가 나라에 세금 내고 법 지키면서 살겠습니까? 안 그래요? 국가가 국민의 일을 돕지는 못할지언정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최고위층에서 당신 계획을 환영한다”

    배사장은 한번 말문이 터지자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동일한 사업에 대해서 이른바 ‘이중계약’을 체결한 북한측에 대한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자신이 지난 2년여 동안 공들여 추진해온 사업을 ‘빼앗아간’ 정부에 대한 원망이 더 큰 듯했다.

    그렇지만 그가 한 말만으로는 자세한 속사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쯤에서 시점을 앞으로 돌려 배사장이 남북 음악회를 추진해온 과정을 들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이제 좀 감정을 가라 앉히시고, 남북음악회를 처음 기획한 단계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시지요.

    “대북사업은 제가 1985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당시 정부에 문의를 해봤는데 ‘민간은 나서지마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90년에도 다시 한번 남북 문화교류를 시도했어요. 90년대 초반 남북교류가 활발하던 분위기를 타서 북한의 국립교향악단과 지휘자 김일진을 서울에 초청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김일진은 80년대 중반에 세계적인 지휘자 등용문인 카라얀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로 입상한 인물입니다. 정부에서도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했어요. 그러나 북한과의 접촉선도 마땅치 않고 해서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98년에 김대중정부가 들어와 햇볕정책을 표방하기에 저는 ‘이제 때가 됐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98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측과 어떻게 접촉했습니까?

    “98년 4월에 중국 베이징에서 금강산 국제그룹 박경윤회장을 소개받았습니다. 박회장은 90년대 내내 국내 대기업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을 북측에 연결해준 분인데, 저는 사실 그 때까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어요. 대북사업에 완전 초보였던 거지요. 아무튼 박회장에게 제 계획을 얘기했더니 좋은 사업이라며 돕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프로젝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나요?

    “당시에는 첼로와 바이올린의 세계적 거장인 로스트로포비치와 아카르도, 그리고 한국의 사라장과 장한나, 이렇게 네 명이 평양에서 북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게 한다는 계획이었어요. 서울 공연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고, 평양 공연실황을 전세계에 중계한다는 복안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논리로 북측을 설득했습니다. 첫째 평양음악회 실황을 사상 처음으로 전세계로 내보내는 것은 북한의 국가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둘째 문화·예술이라는 게 당신네가 생각하듯이 선전도구만이 아니라 돈이 될 수 있다, 셋째 남북이 힘을 합해 음악회를 열면 한반도 긴장해소에 큰 도움이 될 터이고 북한의 외자 유치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설명했어요.

    얼마 뒤 반응이 왔습니다. ‘최고위층에서 당신 계획을 환영한다. 장군께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 사업은 수행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이러더군요. 그게 98년 4∼6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해 추석 무렵에 북쪽에서 갑자기 200만 달러의 담보를 요구해왔습니다. 당황했지요. 왜냐하면 애초에 북측에 제시했던 것은 동업을 하자는 것이었거든. 다시 말해 선투자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고, 기업 협찬금이라든가 방송 중계료, 공연 입장수입 등 전체 수입에서 제작비를 제한 수익금을 반반씩 나누자고 제안했고, 북쪽에서도 처음엔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200만 달러를 내라는 겁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북측이 자기네 유럽 공관을 통해서 시장조사를 해 200만달러 가치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불을 내라고 나온 겁니다.

    제가 그 쪽 입장에서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요. 모든 수익은 일차적으로 남쪽으로 들어오니까. ‘음악회로 얼마를 벌든 간에 우리에게 200만 달러를 먼저 주고 나머지는 CNA가 다 가져가라’는 북측 말이 이해가 되더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수익금을, 더욱이 그 거액을 사전에 내놓기는 어렵고, 그걸 거부하자니 협상 자체가 깨질 것 같고, 그래서 제가 다시 새로운 협상안을 제시했습니다. ‘좋다. 200만 달러는 담보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내가 그 200만 달러를 만들 수 있도록 당신네가 협조하라. 평양 음악회에 외부 관람객에게 표를 팔게 해달라’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북쪽에서 이런 식으로 공연을 한 전례가 있습니다. 일본의 프로레슬러 이노키가 평양에서 시합을 할 때 재일동포를 7000명인가 받아들인 적이 있었거든. 저는 우리쪽에서 5000명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가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또 ‘200만 달러 지급에 대해서 우리 정부를 설득할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도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북한에 200만 달러를 주려면 저는 우리 대기업들을 스폰서로 끌어들여 400만 달러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평양 공연만으로는 도저히 수익성이 없다…”

    ―400만 달러를 확보해야 한다는 건 무슨 얘깁니까?

    “북에 주는 200만 달러 이외에 제작비가 있잖아요? 연주자들 출연료도 줘야 하고. 아무튼 그만한 돈을 만들려면 우리 정부를 설득하고 기업들로부터 협찬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신네가 서울에 와서 공연을 해야 한다, 이걸 약속해주면 200만 달러를 담보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북쪽에서도 동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와 아태평화위원회 사이에 합의서가 만들어진 겁니다.”

    그는 지금까지 대북사업에 뛰어든 기업인들이 돈은 돈대로 쏟아 부으면서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우리 기업인이 언제까지 북한에 저자세로 사업을 간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젠 북한도 남쪽 자본주의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는 것. 배사장은 또 “문화·예술 분야의 공연 이벤트에 대한 지식이 없는 북한에 노하우를 전수해준다는 측면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아무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북한과 ‘정상적인’ 사업자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서울과 평양 공연 합해서 200만 달러를 주기로 한 것이지요? 평양 공연에 100만달러, 서울 공연에 나머지 100만 달러, 이런 식으로 나뉘는 게 아니고….

    “그렇지요. 서울, 평양공연을 합쳐서 200만 달러였어요. 지불방식은 평양공연 때까지 200만 달러를 완불하고, 평양 공연 후에 서울 공연을 갖기로 했던 겁니다. 아무튼 저는 올해 2월7일 북한측에 100만 달러를 보냈습니다. (자료를 들춰보이며) 여기 그 송금서류가 있어요. 그 후 2∼3월에 두 차례 평양에 다녀왔는데 두 번 다 서울 공연에 관해서 문서화한다든가 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 3월에 평양에서 제가 ‘서울 공연 날짜를 잡고 표를 팔겠다’고 하자 북측에서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묵시적인 동의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올해 배사장께서 추진해온 연주회는 작년과는 내용이 다른 것 아니었나요?

    “아, 그 얘기가 빠졌군요. 98년 6, 7월 경에 북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로스트로포비치는 자기 조국을 배반한 망명자다. 그런 사람은 곤란한 게 아니냐’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는 ‘그러면 아예 음악회 형식을 바꾸자’ 이렇게 제의해서 남북한을 대표하는 지휘자를 내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 논의하기론 북쪽에선 김일진, 남쪽에선 정명훈씨를 고려했어요. 오케스트라는 양쪽 연주자들이 섞이는 형태로 하기로 했고요. 협연자는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문제였고…. 아무튼 이런 협의가 98년 11월 합의서 체결 때 완전 타결됐던 겁니다.”

    통일부와의 신경전

    ―사업 추진과정에 우리 정부와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북한과 합의서를 체결한 한참 뒤까지도 정부의 사업승인을 받지 못했어요. 햇볕정책을 한다고 했지만 일선 행정기관에서는 다릅디다. 말로는 교류하라고 하면서 규제가 심했어요.

    정부에서는 제 사업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사업은 말이 안된다, 그렇게 많은 돈을 줘가면서 어떻게 하려는가 등등 사사건건 걸고 넘어갔어요. ‘나는 민간인 사업자이고, 그만큼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니까 이걸 계획했다, 사업 취지가 인정된다면 나머지는 사업자에게 맡겨줘야 하는 게 아니냐’ 이렇게 대응했더니 이번에는 ‘그런 큰 돈이 건너가면 군사비로 전용될 수 있어서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정부 논리대로라면 현대그룹이 금강산 관광대가로 매월 북쪽에 주는 현금은 뭡니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사사건건 부딪쳤어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통일부로부터 99년 3월25일에 사업자 승인, 4월16일에 사업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4월16일에 제가 받은 건 반쪽짜리 승인이었어요. 즉 100만 달러에 대해서만 승인이 난 겁니다. ‘서울 공연은 꿈도 꾸지 마라. 당신이 하도 조르니까 100만 달러로 평양 공연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해봐라’ 이렇게 해서 내준 겁니다. 애초에 제가 북측과 체결한 합의서는 서울과 평양 공연을 묶어서 200만 달러였는데 말입니다.

    저로서는 그 반쪽짜리 승인이나마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한 걸음, 한 걸음씩 나갈 수밖에 없는 거니까. 제가 통일부로부터 사업승인을 받으려고 대북사업에 대해서 손해보험까지 만들었습니다. 통일부에서 제 자금계획을 내놓으라고 해서 당시 스폰서를 하기로 한 대기업을 댔습니다. 그러자 ‘만약 돈만 떼이면 어떻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내 돈도 아닌데 그러면 문제가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보험회사에 의뢰해서 처음으로 평양 관련 보험을 만들게 했습니다.”

    ―아무튼 북측과는 서울·평양 공연 합해서 200만 달러로 해놓았는데 우리측 통일부에서는 평양 공연에 대해서만 100만 달러로 승인을 내줬단 말입니까? 그러면 서울 공연은 평양 공연 후에 다시 사업승인을 받으라는 얘기였나요?

    “거기에 대해서는 서로 얘기가 없었던 거지요. 통일부에선 서울공연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돈문제는 그냥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제가 ‘만약 북측 공연진이 서울에 오면 경비는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당연히 별도로 부담해야지요’ 하기에 그냥 넘어갔어요.”

    ―아무튼 북쪽과 합의서를 체결했고, 통일부에서 사업승인도 받았는데 그 다음엔 또 뭐가 문제였나요?

    “사업승인을 내준 그 날, 통일부가 저에게 협찬을 해주기로 약속했던 대기업에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승인이 났다고 해서 일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향후 일에 대해서는 통일부는 책임이 없으니 그리 알아라’ 그 기업에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얘기 아닙니까? 기업으로선 겁먹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이건 정부가 해서는 안될 말입니다. 아무튼 그러다보니까 30억원을 협찬하기로 했던 대기업이 태도를 바꿔버렸어요. 그래서 또 한동안 표류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외에도 돌출변수가 속출해 그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고 한다. 99년 6월에는 서해교전 사태가 벌어지고, 9월에는 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 때문에 또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 99년이 훌쩍 지나갔다.

    “올해 들어서는 새로 스폰서를 확보하고 보험에 가입하는 등 새롭게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올 2∼3월에 제가 평양 갔다온 것은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3월경에 평양공연은 4월5일, 서울공연은 4월9일에 하기로 날짜까지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KBS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우리는 손 떼겠다’고 나왔습니다. KBS는 99년부터 이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요청을 해서 구체적인 협의까지 다 마쳐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올 3월20일 갑자기 손을 떼겠다고 통고해오니 참, 미치겠더라고요. (서류를 찾아 보여주며) 제가 여기 KBS 내부 결재서류까지 확보해놓고 있어요.”

    베이징에서 일어난 일

    ―아무튼 4월 초에 평양 음악회에 가려고 사람들이 출발했잖아요? 결국은 무산됐지만.

    “3월31일 지휘자 금난새씨를 비롯해서 음향기술자들과 오케스트라 단원 27명을 선발대로 평양에 들여 보냈습니다. 사전에 북쪽 국립교향악단과 연습을 해야 하니까요. 본진 70여명은 조수미, 미국 가수 그레이스 범블리 등의 아티스트들, 나머지 스태프와 관람단이었는데, 이들을 이끌고 4월3일 출국했습니다. 관람단 중에 대통령 사돈이 계시다는 사실을 저는 베이징에 가서야 알았어요.

    그런데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2일 저녁에 갑자기 북측에서 ‘입북날짜를 하루만 늦춰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이건 4월4일에 들어오라는 얘긴데, 그렇게 되면 공연날짜도 하루씩 연기될 수밖에 없어요. 항의도 하고 이유가 뭐냐고 따지기도 했지만, 자기네도 위쪽 지시를 받았을 뿐 이유는 모른다는 겁니다.

    저는 일단 예정대로 3일 출국해서 베이징에서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얻었습니다. 북한에서 초청장이 굉장히 늦게 나오고, 그 바람에 중국비자를 미처 발급받지 못하고 나온 분이 많아서 공항을 빠져 나오는 데에 애를 많이 먹었어요.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4일) 북한 고려민항 비행기에 짐 다 싣고서 입북비자를 기다리는데 북측에서 느닷없이 돈 100만 달러를 미리 달라고 떼를 쓰는 겁니다. ‘좋다. 주겠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줄 수는 없다. CNA가 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장하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돼서 현대측에 100만달러를 맡겨놓고, 그 돈을 받았다는 확인서를 현대에서 받아다가 북측에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현대에 100만 달러를 들고 갔는데, 현대에선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던 사람이 자리를 피해버렸어요.

    다른 한편으론 입북 비자도 안 나오고 있었습니다. 오후 5시가 되도록 영사관이 문을 열지 않아요. 그래서 그 날은 틀렸구나, 하고 사람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습니다. 저녁 6시쯤 아태평화위원회의 황철 참사에게서 전화가 와요. 이런 일은 이제껏 없었는데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일단 오늘은 그만 호텔로 돌아가 쉬고 다시 연락하자, 이랬어요.

    그 때 사람들이 참 고생 많이 했어요. 3일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서는 4일 출발한다고 하고서 넘어갔고, 4일에는 또 5일에 출발한다고 해서 넘어갔는데, 한두명도 아니고 수십명이 왔다갔다 했으니까. 베이징 공항측에서도 비자없는 사람들이 수십명씩 돌아다니니까 신경이 곤두섰어요.

    4월5일 아침에 다시 공항에 나갔는데, 이 날도 결국 입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관람단에 북측이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포함돼 있었다나 봅니다. 관람단 인선은 우리측 민화협에서 맡았는데, 평소 북측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꽤 포함됐다나 봐요. 평소 정치에 무관심한 저로서는 이런 사정을 알 턱이 없었어요. 아태측에서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초청장을 보냈고, 북한 내부에서 이걸 문제삼아 비자 발급을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저에게 돈을 미리 내라고 억지를 부렸던 건 입북을 막으려는 핑계였던 겁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정치적인 상황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베이징 공항에서 그러고 있는 동안 베이징 시내 호텔에서는 남북 정상회담 비밀 협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애초에는 통전부 쪽에서 입북자 신원문제로 비자발급을 늦추다가 이게 하루 이틀 계속되면서 정상회담 문제와 맞물리게 되지 않았을까…. 이건 저 혼자 생각이지만,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언론은 북쪽에 대해서 비판적인 논조가 많았습니다. 총선이 임박해서 여야가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던 때라서 혹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언론이 시끄럽게 떠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 많은 사람이 돈을 주고도 입국을 거부당했다, 언론에 이렇게 노출되면 총선이나 당시 정상회담 협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남북 양측이 이런 판단을 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본진 70여명이 며칠간 베이징에 있었던 거지요?

    “이틀간은 입북을 시도했고, 마지막 6일에는 또 한국으로 돌아오려는데 황사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해서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3월31일 평양에 먼저 갔던 사람들도 7일 베이징으로 나와서 다 함께 귀국했습니다.

    그 며칠간 참, 난리가 아니었어요. 저로선 이런 낭패가 없었습니다. 나중엔 관람단 중 원로인사 몇 분이 모여서 이 분들이 그때 그때 서울의 모처로부터 지침을 받아서 행동지침을 결정했습니다.

    그 때 저는 공연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해서 보험 처리를 하려고 했어요. 보험은 북쪽 뿐만 아니라 남북간에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공연이 중단 또는 취소 됐을 때 처리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 보험 청구를 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원로들이 ‘그건 안된다’고 막았습니다.”

    ― 그분들이 왜 그랬을까요?

    “정부에서 관람단이 자체적으로 구성한 지휘부에 ‘CNA는 절대 건드리지 말고 북쪽을 자극하지도 말라. 언론에도 나오지 않도록 철저하게 덮으라’는 지침이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보험 처리에 들어가면 또 시끄러워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정치 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보험 처리를 막았던 것 같아요.”

    ― 먼저 들어간 선발대는 며칠간 평양에 머물렀습니까?

    “일주일. 3월31일에 들어가 7일에 나왔으니까, 날짜로는 8일간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북측과 연습은 완벽하게 끝냈다고 합니다. 사진과 비디오 자료가 다 있어요.”

    ―그 다음엔 일이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베이징에서 그 난리를 치고, 사정이야 어떻든 제가 죽을 죄를 지은 셈이 됐는데, 서울로 돌아오니까 의외로 국정원과 통일부에서 부드럽게 대하더군요. 4월20일 경에는 아태평화위원회 강종훈 서기장이 만나자고 해서 베이징에 갔더니 첫 마디가 ‘아무 일 없었느냐’고 해요. 자기네들은 내부에서 엄청나게 시달렸다면서. 아무튼 그 자리에서 추후 일정을 논의하고 헤어졌습니다.

    4월 말에는 아태평화위원회 황철 참사를 만났는데, ‘5월1일 이후로는 새 비자가 발급되지 않고, 5월15일부터 정상회담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입국시키지 않을 방침’이라고 해요. 그래서 음악회는 다시 7월로 연기된 겁니다.

    그 때 황철 참사와 많이 다퉜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통일부에서 ‘서울 공연건 100만 달러를 마저 승인해줄 테니까 합의서에 ‘서울’이라는 문구 하나만 넣어오라’고 했거든. 북쪽에선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고. 이 문제 때문에 제가 수차례 베이징을 들락거리면서 참 많이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7월9일 김일성 주석 기일을 맞아 박경윤 회장이 평양에 들어간다고 해요. 그래서 박회장에게 ‘도대체 북쪽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박회장이 베이징에서 강종훈 서기장을 만나서 물어봤다고 합디다. 강종훈 서기장이 ‘사실 배사장 사업에 대해서는 남쪽 정부와 협의 없이는 해주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이러더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민간쪽 사업은 막고 당분간 정부 차원에서만 하기로 이면 합의를 했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7월12일 베이징에서 박회장과 함께 황철 참사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황철 참사도 이면 합의가 있었다고 실토를 하더라고요.”

    ―잘 이해가 안되는데…. 어떻게 그런 합의를 할 수 있는 겁니까?

    “황철 참사가 말하기를 ‘이미 남쪽 정부에 북쪽 국립교향악단이 8월15일 서울에서 공연하기로 약속해줬다’는 겁니다. ‘남쪽 정부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무튼 그건 남쪽 문제니까 남쪽에서 해결해라. 우리는 또 돈을 준다니까 내려간다고 했다’고 말했어요. 북쪽 논리는 ‘8·15 음악회는 그것대로 하고, 배사장 음악회도 그 다음에 따로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고 ‘배사장이 추진한 음악회는 국제친선음악회라는 명칭이 붙어 있고 남쪽 정부가 추진하는 건 다른 명칭인데 무슨 상관이냐’는 건데, 이게 말이 되는 얘깁니까? ‘제가 같은 사업으로 이중계약을 한 당신네는 부도덕하지 않냐’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어요. 지금 우리 정부 쪽에서도 이런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번에 법원에서 제 건을 기각한 사유도 결국 이런 논리고.”

    ―명칭이야 어떻든간에 북한 국립교향악단이 한번 서울공연을 하고 나면 그것의 경제적 가치는 사라지고 만다는 말이지요?

    “당연하지요. 그리고 이 음악회의 핵심은 교향악단입니다. 제가 북한 국립교향악단을 지명해서 연습까지 해놨는데, 이게 무슨 소립니까? KBS 측에서는 제 기획과 어떻게든 좀 달라보이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는데 그런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남쪽에서 음악회가 발표된 건 언제였죠?

    “대통령이 7월19일경엔가 관광 무슨 회의에서 이 문제를 처음 거론했습니다. 그 때 KBS 팀이 8·15 음악회에 대해서 북측과 협상하려고 베이징에 가 있었는데, 저는 그 다음날 회담이 결렬됐다는 얘기를 KBS 내부 인사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금액 차이가 너무 컸다, 그래서 KBS 측에서 먼저 협상을 깨고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대통령이 이런 사정을 보고라도 받고 음악회 얘기를 꺼낸 것인지 궁금해요.

    이건 순전히 제 추측인데, KBS와 북측간의 협상이 결렬된 이유는 양측이 제시한 금액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아무튼 KBS는 7월24일경에 재차 베이징에 가서 협상을 타결짓고 7월31일경 정부가 정식으로 음악회 개최를 발표했습니다.

    이번에 정부가 음악회 대가로 북측에 주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건 텔레비전 2만대 뿐입니다. 그러나 북쪽이 현금을 받지 않고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상식이고, 통일부 지침에도 교류 대가는 현금 50%, 물자 50%로 하라는 지침이 있습니다. 여기에 비춰보면 텔레비전 2만대 규모는 그 전에 평양 교예단이 왔을 때와 똑같은 규모니까….”

    ― 평양 교예단도 그렇게 했나요?

    “평양 교예단은 현금 300만 달러에 컬러 텔레비전 2만대였죠. 이번에도 똑같이 텔레비전 2만대로 발표한 걸 보면 현금 300만 달러 정도는 주기로 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겁니다.”

    남북의 상반된 반응

    ― 그런 과정을 지켜보다가 법원으로 달려가신 겁니까?

    “7월26일경엔가 제가 북한 김용순 위원장 앞으로 질의서를 보냈어요. 사정이 이러저러한데, 당신네가 이렇게 하면 부도덕한 것 아니냐, 이렇게 항의했어요. 타협안도 내놨어요. 우리 정부와 하기로 한 공연을 CNA와 협력해서 하도록 해주든가, 돈을 돌려주든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내가 그 사업을 국가에 양보할테니 손실을 만회할 수 있도록 다른 사업에 대한 권리라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런 내용의 팩스를 평양에도 넣고 베이징주재 북한대사관 등 여러 군데에 넣었습니다. 그것이 전달됐는지 2∼3일 뒤에 응답이 왔습니다. 왜 무관한 기관들에 그 서류를 보냈냐고 짜증을 내면서 ‘그러면 무슨 사업을 할 건지 말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북쪽은 됐고, 저로선 이제 우리 정부쪽과 얘기해야 하잖아요. 북쪽에서 어떤 걸 보장받으면 뭐합니까? 저로선 우리 정부로부터도 보장을 받아야 믿을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설명한 이 형국이, 국민이 해온 일을 정부가 뺏어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제가 다른 사업을 해도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그런 국가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런데 정부가 저를 상대해주지 않는 겁니다. 통일부, 문광부, 청와대, KBS 모두 자기네는 책임이 없다면서 발뺌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니 저로선 마지막으로 갈 데가 사법부밖에 없잖아요. 전체 판을 깨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에 일단 공연정지 가처분 신청부터 시작했어요. 변호사가 서류를 만들어놓고 접수하려는데 북쪽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왜 새 사업안을 가져오지 않느냐고. 그게 7월31일입니다.”

    ―우리 정부에 그런 내용을 탄원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봤습니까?

    “물론 했지요. 여기 있는 문서들이 다 그겁니다. 3월에는 제가 문광부에 이 공연에 후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6월 정상회담 이후에는 정부가 직접 이런 공연을 할 생각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통일부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와 유사한 공연, 교향악단, 지휘자, 성악가 등이 출연하는 공연에 대해서는 기득권자를 보호해주는 차원에서 통일부에서 보류 또는 조정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가 이런 요청을 한 것은 대북사업은 정부가 승인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모든 권한을 쥐고 있으니 최소한 기득권자에 대해서는 보호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만약 대북사업이 신고제로 돼 있어서 자유경쟁으로 하는 방식이라면 누구든지 자기 책임하에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부가 권한을 행사하는 한 국민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통일부에선 ‘책임질 수 없다’고 했고, 그런 와중에 북쪽으로부터 모든 사정을 듣게 된 겁니다.

    한번은 제가 이 문제 때문에 문광부 장관실에 찾아갔는데, 당시 KBS 협상팀이 베이징에서 북쪽 대표를 만나고 있던 때였어요. 그런데 문광부 측에선 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장관을 만나고 싶다고 하니까 ‘문화정책국장에게 서류를 보냈으니 그 사람을 만나라’, 그 사람을 찾아가니까 ‘금시 초문이다. 그런 지시 받은 적 없다. 예술과에 한번 가봐라’ 해요. 예술과에 가면 ‘우리는 골치 아파서 손 뗐습니다’ 이러고. 그 사이에 KBS가 협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KBS에 가면 ‘문광부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문광부가 음악회 발표를 했잖아요. 이런 부도덕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법원에 공연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게 8월15일 공연이 연기된 이유라고 보세요?

    “원래 정부 발표로는 8월7일 서울에 와서 14∼15일 공연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쪽에서 자기들 사정 때문에 일주일 연기하자고 해서 8월18일 서울에 와서 8월20∼22일간 공연하기로 바뀌었어요.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는 두고 봐야지요.”

    “이제 비정상적인 교류는 안된다”

    이제 한 대북사업가가 지난 2년여 동안 뛰어다닌 행적과 과정이 대충 실상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인 문화·예술사업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고, 마지막 순간에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돈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다고 사업 못합니까? 지금까지 저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아이디어와 그것을 현실화할 실천력, 열정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애초에 제가 북한쪽 사업에 눈을 돌린 것은, 국내적으로 대형 이벤트의 한계가 점점 분명해진 상황에 이것이야말로 상품 가치가 높고, 또 민족적으로도 유용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개인이 피땀 흘려 준비하던 것을 정부가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아도 되는 겁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정부와 북한을 싸잡아서 소송을 걸기엔 부담이 많았을 텐데요.

    “지금 어떤 이들은 저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남북화해 분위기에 재를 뿌리는 일이 아니냐, 민족 반역적인 일이다, 이럽니다. 참, 딱합니다. 제가 민족 반역하려고 이런 걸 기획했습니까? 교류활성화하고 민족이 화합해서 통일에 초석이 되려고 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부로부터 이런 부도덕한 일을 당하고 거기에 항의하니까 이제 민족반역한다고 욕을 먹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이 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1%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양쪽 집단이 입만 열면 민족과 국가,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는데, 진정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앞으로 남북 교류는 정상화돼야 해요.

    이런 식의 비정상적인 교류는 오래 갈 수도 없고 진정한 화합에도 도움이 안됩니다. 그런 점에서 제 행동은 양쪽에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북은 이제 우리 체제를 좀 이해해야 합니다. 그동안 대북사업을 하면서 피해를 본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그렇게 불이익을 당하고도 아무 소리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어야 됩니다. 북쪽이 우리 체제를 알게 하려면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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