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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통일신라 이끈 대 패밀리

통일신라 이끈 3대 패밀리의 불교신앙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통일신라 이끈 3대 패밀리의 불교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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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황복사 3층 석탑을 건립한 사람은 신목태후 자신이었다. 효 조왕이즉위할때 그는 겨우 6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다. 그러니 신목태후가섭정이 되어 만기(萬機; 만 가지 일의 기틀이란 의미로 임금이 보살피는 모든 정사)를 재단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때신목태후 나이는 38세 어름이었다. 전회에서 잠시 언급하였듯 이신목태후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 사위인 김흠운(金運, ?∼655년) 과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따님으로 유복녀였을 듯하다. 그 의부친인 김흠운이 무열왕 2년(655)에 왕명을 받고 낭당대감(郎幢大監)이 되어 백제를 정벌하려고 양산(陽山, 옥천)의 조비천성(助比川城, 飛鳳山城)을 공격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삼 국사기’권 47 김흠운전(金運傳)에서 그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김흠운은내물왕 8세손으로 부친은 달복(達福) 잡찬이었다. 흠운 이어려서 화랑 김문노(金門努)의 문하에 나가 놀았는데 그때 낭도 들이서로 말하기를 아무개는 어느 전투에 나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남기고있다고들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흠운은 정의감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격려하며 그와 같고자 하는 생각을 얼 굴에드러내었다. 동문의 승려였던 전밀(轉密)이 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한다.‘이 사람이 만약 적진에 나간다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영휘(永徽)6년, 즉 태종 무열왕 2년(655)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 구려가변경을집적거리는 일에 분통을 터뜨리고 이를 정벌하고자 군사를출동하면서 흠운으로 낭당대감을 삼았다. 이에 흠운은 집에 서 자지도 않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빗물로 목욕하며 사졸과 더불 어 달고 쓴 것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에 이르러 양산 아래 군영을 설치고 조비천성을 공격하려 하 는데백제인이 밤을 타고 급히 몰려와서 새벽에 보루(堡壘)를 타고 넘어들어오니 신라군은 놀라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진정할 수 없었 다.백제군이이런 어지러움을 틈타 급히 공격하자 나르는 화살이 비처럼 모여들었다.



흠운이 말을 빗겨 타고 창을 꼬나 잡아 적을 기다리자 대사 전지(詮知)가 이렇게 달랬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서로 가릴 수가 없으니 공이 비록 죽는다 해도 알아볼 사람이 없다. 하물 며공은신라의 귀골(貴骨)이요 대왕의 반자(半子, 사위) 임에야! 만약 공이 적들 손에 죽는다면 백제는 자랑하며 떠들 것이고 우리나 라 사람은 깊이 부끄러워 할 것이다.’

그러자 흠운은 이렇게 말하였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 으면남이 알고 모르고는 매 한가지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겠는 가.’ 버티고 서서 움쩍도 하지 않자 시종한 사람이 고삐를 잡고 돌 아갈 것을 권하니 흠운은 칼을 빼 이를 뿌리치고 적과 싸워 몇 사람 을 죽이고 죽었다. 이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 적득(狄得)도 함께 나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보기당주(步騎幢主)보용나(寶用那)는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말하였다. ‘저분은 골품이 귀하고 가세가 영화로워 사람들 이사랑하고 아까워하는 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거늘 하물며 보용나처럼살아도 이익될 게 없고 죽어도 손해날 게 없음에서이겠 는가!’ 그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태종대왕은이를듣고 몹시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을 추증하고보용나와적득에게는 대나마의 지위를 추증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따라서김흠운의 장렬한 전사는 진골 귀족 청소년들의 귀감이 되어 장차 백제 정벌전에서 소년 화랑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에 뛰 어드는용맹을 떨치게 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기를 마련 하게 된다.

김흠운의장렬한 전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태종 무열왕의 체면을 세 우고도 남는 것이었다. 태종 대왕에게는 맏사위 김품석(金品釋, ?∼ 642년)이 대야성 도독으로 있다가 백제 장군 윤충(允忠)에게 패하여 항복하고나서 처자와 함께 살해당한, 치욕스러운 과거가 있었기에 더욱이를 드높이 평가하였던 모양이다. 항상 태종대왕을 멍에처럼 속박하던그 불명예를 씻어내기에 충분할 만큼 둘째 사위의 장열한 전사가백성들의 심금을 울리고 진골의 연소 자제들의 마음을 격동 시켰기 때문이었다.

신목태후는 무열왕계와 김유신계의 결속 상징

이에 태종대왕은 김흠운의 혈손들을 특별히 애호하여 양육하도록 하 고그들과의 혼인을 통해 이후 신라 왕실 진골 혈통의 순수성을 지 켜나가기를 희망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태종대왕의 적장손인 신문왕 이즉위한후에 왕비가 그 부친 김흠돌(金欽突, ?∼692년)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폐출되자 왕실에서는 새 왕비로 김흠운의 막내딸을 간택하여성대한 혼인의식을 치르면서 맞아들이니 이 분이 바로 신 목왕후였다.

‘삼국사기’권8 신문왕본기에 기록된 혼인관계 기사를 간추려 보 면 다음과 같다. 신문왕 3년(683) 2월에 신문왕은 10세 연하의 고종 사촌누이 동생인 신목왕후를 맞아들이기 위해 셋째 고모부인 김유 신의 심복으로 통일과정에 수훈을 세운 전쟁 영웅인 김문영(金文穎, 652년경∼695년)과김유신의 장자로 신문왕의 고종사촌 동생이며 신목왕후에게는 이종 사촌동생이 되는 파진찬 김삼광(金三光, 656년 ∼?)을요석공주궁으로보내 납기(納期; 맞아들이는 날짜)를 정한 다.이때 왕후의 모친이자 신문왕의 고모인 요석공주(632년 경∼?) 는 50대 초반의 한창 나이였으며 요석공주와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게했던 원효(元曉, 617∼686년)대사도 67세의 나이로 아직 생존 해 있었다.

또한 신문왕의 일가인 대아찬 김지상(金智常)으로 하여금 납채(納采 ; 신랑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며 보내는 예물)를 가지고 가게 한다.비단이 15 수레, 쌀과 술, 기름과 꿀, 장과 메주, 포와 젓갈 이 135 수레, 벼가 150 수레였다.

5월7일에는혼인 예식을 거행하는데 역시 이찬 김문영과 막내 숙부 김개원(金愷元,645년 경∼720년)을 책봉사로 보내 왕비를 부인(夫人)으로 책봉하고 파진찬 김대상(金大常), 김손문(金孫文), 아찬 김 좌야(金坐耶), 김길숙(金吉叔)으로 하여금 각기 그 처와 딸 및 급량 부(及梁部)와사량부(沙梁部)의늙은 부인들 30여명씩을 거느리고 가서 왕비를 수레에 태워 왕궁으로 맞아들이도록 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혼인예식을 치르고 맞이한 신목왕후가 4년 뒤인 신문 왕 7년(687) 2월에 원자를 낳으니 이가 곧 뒷날 효조왕이 되는 이홍 (理洪)이다.늦도록 아들이 없던 신문왕이 42세 경에 첫 왕자의 출 산을보게 되자 기쁨에 겨워 원자가 겨우 5세 나던 해인 11년(691) 3월1일에 태자로 봉한다.

그러나호사다마라고 태자를 책봉한 지 1년 남짓 지난 뒤인 신문왕 12년(691)7월 2일에 신문왕이 48세 쯤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난 다.그래서 효조왕이 6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고 38세 쯤 된 신목 왕후가섭정을 하면서 신문왕릉을 황복사 동쪽 가까이에 쓰고 황복 사를 원찰로 삼아 그곳에 3층석탑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신문왕릉을 이곳에 쓴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가 경주에서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 대왕암과 문무왕의 원찰인 감은사로 가는길 초입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문무 왕릉비석이 세워진 사천왕사나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능지탑(陵旨塔)이 지척에 있는 낭산(狼山) 기슭이라는 점이다.

남쪽기슭에 사천왕사가 있고 남서쪽 기슭에 능지탑이 있으며 북동 쪽기슭에 황복사와 신문왕릉이 있게 된 것이다. 원래 동해안 일대 는석(昔)씨세력 판도 안에 있어서 토함산과 명활산이 모두 그들 소유였고 낭산 일대도 그 세력권에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선덕여왕 16년(647)에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으로 석씨 일족이 멸족 당하자 이곳에 세력 공백이 생겨 왜구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가 되자 문무왕 자신이 스스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해의 호국용왕이 되 기를 자청하여 이 지역을 자기 혈족 집단의 근거지로 삼아나갔던 듯 하다.

그때감포에서 토함산, 명활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문무왕계의 혈 족 집단이 차지하고, 입실과 모화를 거쳐 울산으로 연결되는 길목은 김유신집안에서 차지했던 듯하다. 장차 성덕왕릉이 토함산 기슭에 자리 잡고 불국사와 석굴암이 그 원찰로 지어지는데 반해 모화의 원 원사(遠源寺)는김유신집안의 원찰이 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문무왕계의 혈족 집단은 문무왕이 사천왕사, 망덕사를 지어 가며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낭산 일대를 자신들의 근거지로 확보하 려는계획을 실천에 옮기게 되니, 그 첫 작업이 신문왕릉을 황복사 경내에 써서 황복사를 그 원찰로 삼는 일이었다.

신목태후가섭정을하며 이와 같이 대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당나라에서도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년)가 섭정을 하다 가천수(天授) 원년(690) 9월에 스스로 황제가 되어 성신(聖神) 황 제를 자칭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신라의 형편을 보면 통일전쟁에 공훈을 세운 전쟁 영웅들이 원로가 되어 아직 건재했고, 통일의 주역이던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의 자손들이 굳건하게 결속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있었다. 사실 신목 왕후는 무열왕계와 김유신계의 결속의 상징으로 선택된 인물이었다.

그러니신목태후가 섭정이 되어 대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목태후가 신문왕릉을 황복사 경 내에 쓰고 황복사를 그 추복사찰로 삼아 그를 위해 3층 석탑을 건립 하는 일에 털끝만큼도 장애가 있을 수 없었다.

신문왕 초상조각인 금제여래입상

신목태후는 신문왕을 위해 (14회 도판 11) 양 식을계승하는(도판 6) 1기(基)를 건립하는데 그 규모는 (높이 13.4m)의 반밖에 안돼 높이가 7.3m에 불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탑신석이나 옥개석을 한 개의 통 돌로 쓸 수 있어 이후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을 이루어 놓는다.

그리고사리와 함께 순금 불상 1구를 조성하여 탑안에 봉안하였다. 그것이현재국보 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즉 (도판7)이다. 총 높이 14.4cm밖에 안 되는 이 작은 황금불상은 탑 속에 1250년 동안 모셔져 있다가 일인들의 손에 끌려나와 현재는 국 립박물관진열실에 전시되는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130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우리나라 불상 연구에 움직일 수 없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은 아주 특이한 몇 가 지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겉옷 표현이 종래 포복식불의(袍服式佛衣)의 영향을 받아 곤룡포나 도포를 입은 것같이 표현하던 삼국 시대 불상의 겉옷 표현과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다.

(8회 도판 8)이나 (8회 도판 14) 의주불에서처럼 도포깃을 연상시키던 느슨한 양쪽 깃 표현이 사리 지고(5회 도판 1)이나 (5회도판 2)과 같이 옷깃이 목을 둥글게 바짝 감고 넘 어가는 형식을 보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간다라나 굽타불상의 통견(通肩) 양식 불의 표현방 식을재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터인데 옷깃 표현만 그렇지 그 아 래겉옷의 옷주름 처리는 계열의 삼국시대 불입 상겉옷 표현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타원형 호(弧)가 물결 처럼 일정 간격으로 중복되어 내려가는 옷주름 표현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옷주름이 만들어지려면 도포처럼 느슨한 옷깃이라 야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런 옷주름 표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보통 은팔을 내려 허벅지 근처에서 옷깃을 잡도록 되어 있는 왼손을 시 무외인을 지은 오른손 높이까지 들게 하여 옷깃을 끌어 올려다 잡게 하는억지를 부려 놓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억지도 합리적인 이해 기반 위에서만 수용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니, 통일초기 신라 문화의 건실성이 어떠했는지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또하나특이한 것은 대좌 형식이다. 씨방 아래에 연꽃 잎을 엎어 붙여놓고씨방 위에 올라서 있는 것이 일반 불입상의 연화대좌니 그연꽃잎 표현이 둥근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연꽃 잎을강제로펴서 뒤집어 놓은 듯 씨방을 중심으로 팽팽하게 펼쳐 놓았다.

그 결과 대좌는 낮아지고 경쾌한 긴장감이 무게 중심을 결속하여 더 욱 안정감을 느끼게 하였으니 중후한 불신의 후덕한 표현과 좋은 대 조를이루었다.표현의 주체와 객체를 분명히 구분하여 종합할 줄 아는 진정한 예술정신의 발현이라 하겠다.

또하나다른 데서 보기 힘든 것은 촛불꽃 형태의 두원광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광배가 대부분 따로 만들어 붙인 것이기 때문에 파 손되어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는 형편에, 이 불입상에서 완전한 형 태를 확인할 수 있으니 이를 통해 이 시대 이전의 광배 형태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투각(透刻; 맞뚫림 조각)기법으로 만들어서 불꽃을 사실적으로 형상 화하였는데,머리 뒤쪽에 연꽃 한 송이를 표현해 놓고 그를 중심으 로 세 가닥 동심원(同心圓)을 그려나가며 투각 장식으로 광염(光炎; 빛나는불꽃)을상징하고 그 밖으로는 이를 에워싸며 불꽃이 촛불 모양으로둥글게 타오르는 양 불꽃무늬를 어지럽게 투각해 놓았다. 그러나자세히살펴보면 철저하게 좌우대칭이라, 밑그림을 반쪽에 그려서 엎어 뜨는 기법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얼굴이 몸체에 비해서 상당히 크지만 작은 규모의 불상을 크게 느끼 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옷자락 끝이 아래에서 날개 깃처럼 펼 쳐지는것은삼국시대에 유행하던 포복식불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 다.이에 반해 둥근 깃으로 옷깃을 조인 것은 당고종 상원(上元) 2 년(675)에당고종의 초상 조각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중국 하남 성 낙양의 용문석굴 봉선사동(奉先寺洞)의 주불인 (도판8)에서그 형식을 확인할 수 있어 이것이 당시 당나라로부터 새로 들여온 양식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신목태후가 효조왕 원년(692)에 부군인 신문왕의 추복을 위 해조성한 이 은 전통양식과 외 래양식이이상적으로 조화된 특이한 불상이라 하겠다. 이것이 당시 통일신라 초기의 문화성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용문 봉선사동 주불인 이 당고종의 초상 조각이듯 이 도신문왕의 초상 조각일 수 있 다. 합리적인 사고로 계산된 억지를 부려 신·구양식을 무리없이 조 합한조성자의예술감각이라면 신문왕의 모습을 충분히 사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되니 이 얼굴이 48세 경에 돌아간 신문왕 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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