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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인 성공학|한독화장품 박효석 사장

‘스펠라 707’로 발모제 시장의 ‘비아그라’ 꿈꾼다

  • 곽희자·자유기고가

‘스펠라 707’로 발모제 시장의 ‘비아그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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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원료로는 황금(黃芩) 감초 매실 의이인 천화분 난초 은행잎 올리브 맥아유 알로에 등 한방 생약과 자연 추출물을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한독화장품 제품은 피부 보호제인 것은 물론, 피부를 재생시키기까지 하는 기능성 화장품(화장품과 의약품의 중간 형태)이다.

주력 생산 제품은 스킨, 로션, 에센스, 영양크림, 마사지 크림, 클렌징 크림 등 6가지 기초 화장품이다. 이들 제품은 연령에 따라 3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여드름이 많은 10대를 위한 ‘달란트’, 여드름과 민감성 피부를 가진 20대용 ‘리브가’, 피부가 건조해진 40∼50대를 위한 ‘스펠라’가 그것. 이중 스펠라는 기능성이 가장 강화된 제품으로 기미 주근깨 잔주름 예방효과가 크다고 한다.

이 밖에도 각종 색조 화장품과 여드름 전문 화장품(토닉 9011, 토닉 9012, 콘디셔너), 특수화장품(나이트 크림, 스펠라 아이젤, 스펠라 썬크림), 목욕제품(한방비누, 샤워젤, 바디 마사지, 정금치약), 피부기능 활성제품, 건강보조식품(스펠라 라파) 등을 생산하며, 남성용 화장품도 연령층에 따라 다른 종류의 스킨과 로션을 만들고 있다. 현재 생산제품은 총 70여 종.

한독 제품은 기능성 화장품이다 보니 일반 화장품보다 가격이 두 배 정도 비싸다. 그래도 한 번 제품을 써본 소비자들은 계속 찾는다고 한다. 한 방문판매 사원은 “써본 사람들의 ‘자발적 광고’ 덕분에 구매자가 계속 늘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물건을 사용해본 사람들이 다시 그 물건을 찾는다는 것은 품질에서는 일단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

그러나 한독화장품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설 연구소를 두고 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박효석 사장은 전남 해남의 ‘꽃이 만발한다’는 화산면에서 4남2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6·25가 터졌고,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던 삼촌 때문에 인민군들에게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그는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대학에 진학했다. 의과대학 진학을 꿈꿨지만, 가정 형편을 생각해 졸업하자 마자 돈을 벌 수 있는 약학대학을 지원했다. 65년 조선대 약학과를 졸업한 그는 계획대로 졸업 직후 광주 월산동에 약국을 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약국을 운영한다는 것은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었고, 수입도 생각했던 것처럼 대단치 않았다.

1년 남짓 지난 후 그는 넓은 바닥에서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운동장 근처에 자그마한 약국을 열었다. 그러던 어느날 종로를 걷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대형 약국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데, 약국마다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저거다’ 싶었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박사장은 당장 그날부터 대형 약국을 차릴 계획을 세우고, 약 공급업자들로부터 이런 약국을 내려면 돈이 얼마나 들고, 마진은 얼마나 되는지, 운영상태는 어떤지 하는 정보를 하나하나 입수했다. 큰 약국을 차릴 요량으로 열심히 돈을 모아 2년 만에 꿈을 이뤘다. 약사를 7명 고용해 종로5가에 ‘성실약국’이라는 간판을 내건 것. 예상대로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말 그대로 돈을 쓸어 담았습니다. 하루 장사를 마치고 나면 돈이 얼마나 많은지 새벽까지 돈을 세어도 다 못 셀 정도였어요. 벌긴 많이 벌었지만,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만 하니까 돈을 쓸 시간이 없었지요.”

돈이 주체할 수 없이 들어오자 사채놀이를 시작했다. 선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장사는 약 파는 장사보다 훨씬 더 짭짤했다.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큰돈이 모이자 이번에는 마진을 많이 내는 화공약품 공장을 인수했다. 겨우 30대 초반에 대형 약국과 공장까지 갖게 되니 세상이 다 내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면서 안하던 술도 입에 대고 생활도 방탕해졌다. 그러나 하늘은 교만해진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72년, 그의 돈을 빌려다 쓴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렸다. 빌려준 돈을 받으려면 그 회사 대신 부도를 막아야 했다. 갖고 있던 돈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돈까지 모두 끌어와 막았다. 그러나 결국 부도가 났고 그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도가 난 지 한 달 뒤에는 화공약품 공장에 불이 나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됐다. 빚쟁이들에게 다 내주고 나니 몸뚱이 하나 뉠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 아이를 끌고 서초동 꽃동네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 들어갔다. 몸에 지닌 거라곤 옷가지와 패물 몇 개가 전부였는데, 이것들을 전당포에 맡기고 입에 풀칠을 했다. 웬만큼 가까운 이들에겐 다 돈을 빌리고 못 갚았기 때문에 더는 빌릴 데도 없었다. 생각 끝에 한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친구는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볼테니 다시 약국을 차려보라”고 했다.

“그날 신촌에서 친구를 만난 후 차비가 없어 서초동 집까지 걸어 왔어요. 그 때는 한강에 제 1한강교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서 ‘다시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한강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친구로부터 빌린 돈은 30만 원. 이 돈으로 임대료가 싼 봉천동에 ‘한독약국’이라는 작은 약국을 열었다. 집을 따로 구할 형편이 못돼 조제실에서 살림까지 꾸렸다.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져보니 인생관이 바뀌더라고 한다.

“사람이 좀 살 만하면 좀체 변하지 않아요. 그런데 갈 데까지 가라앉고 나면 그땐 변해요. 빈털터리가 되고 나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감기에 걸려도 돈이 없어 약을 못 사먹는 사람들에게 빈 박카스 병을 깨끗이 씻어 쌍화탕을 끓여 담아주곤 했어요. 약국을 찾는 사람들이 그때부턴 그냥 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참으로 귀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한 번 찾아온 손님은 철저하게 관리했다. 고객차트를 일일이 만들어 자료화했다. 그랬다가 다음에 다시 약국에 오면 친근하게 이름도 불러주고 그 전에 불편했던 곳은 어떤지 세심하게 챙겼다. 그러자 단골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일회용 반창고 하나 사러 온 사람에게도 마실 것을 내놓으며 인심을 쓰자 이 사람들이 다른 손님을 데려 오기도 했다.

피부약 개발로 재기

겨울이면 화상 환자들이 약국을 많이 찾았다. 치료비가 비싸 병원에 갈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상처를 동여맨 채 약국으로 달려왔다. 이런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박사장은 피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러 서적을 뒤적이며 연구를 거듭하던 중 꿀풀과 다년초인 황금에 피부 재생효과를 지닌 바이칼린 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 물질을 추출해 여러 가지 실험을 거친 후 치료제로 만들어 사용했다. 효과는 매우 좋았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곳곳에서 피부병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바이칼린 성분에 갖가지 한방 생약 추출물을 배합해 기미, 주근깨 치료제도 만들어봤다. 이것 역시 치료효과가 좋았다. 이를 상품화하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와 ‘샤론크림’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내놓았다. 제품은 날개돋친 듯 팔려 나갔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어 신경통, 류머티스, 관절염 약도 만들었는데 이들도 치료효과가 좋았다.

다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래서 빚도 모두 갚고, 지금의 사옥 자리도 샀다. 한독화장품 사옥은 지하 3층, 지상 7층짜리 건물인데, 박사장은 돈 한푼 없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층 한 층을 지어 올릴 때마다 꼭 필요한 만큼의 돈이 마련됐다고 한다. 기독교 장로인 박사장은 건물이 완공되자 감사의 의미로 꼭대기층인 7층에 성전을 꾸몄다.

그가 샤론크림 등 여러 종의 치료약을 직접 만들어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을 보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이들 제품을 기초로 화장품을 만들어보라”고 조언했다. 박사장은 화장품 만드는 기술과 시설이 약 만드는 기술이나 시설과 다를 게 없겠다는 생각에 화장품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여의도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우선 6가지 기초 화장품을 생산하기로 하고 연구인력을 모아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화학재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생약만 사용해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인천 남동공단에 1300평 남짓한 건물을 구해 생산시설을 들였다. 95년 4월 마침내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화장품 회사를 세울 결심을 한 지 불과 7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제품이 생산된 후에 문제가 생겼다. 그때껏 제품 연구와 생산에만 급급했던 나머지 판매망을 전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 유통업체와 계약하고 지나치게 많은 양의 제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판매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재정적인 어려움까지 닥쳤다. 생산에 들어간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 개의 제품도 팔리지 않았다. 하루빨리 판매망을 뚫어야 했다.

당시 화장품 시장에서는 유명회사, 무명회사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할인판매를 통해 유통되고 있었다. 소비자들도 거의 다 할인점을 통해 화장품을 구입했다. 이때 한 유통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화장품을 아주 저가로 납품하면 자신들의 유통망을 통해 보급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사장은 내키지 않았다.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할인점에 내놓는다는 것도 꺼림칙했고 납품가도 너무 쌌기 때문.

방문판매 통해 급성장

이때 부인 나애숙씨가 주부사원 제도를 도입해보자고 했다. 주부사원을 통한 방문판매는 한때 유행했다가 대형 할인점들이 생겨나면서 거의 사라진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제품을 알리는 데는 더디지만 고객과 1대 1로 대면해 구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품질만 좋다면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부사원들에게 처음엔 샘플제품을 나눠주며 제품 선전을 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자 샘플을 써본 사람들이 효능이 좋다며 제품을 구입했다. 제품 판매와 함께 미용사원들이 피부 마사지와 피부상태 점검, 메이크업 강좌 등을 무료로 해주자 소비자들의 반응은 더욱 좋았다.

이렇게 주부사원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회사도 성장을 거듭했다. 9개월 동안 두 차례나 시설을 확장했고, 설립 1년만에 제품 종류도 36종으로 늘었다. 최근에는 중국에도 수출되고 있는데, 아직은 소량이지만 중국의 엄청난 시장규모로 볼 때 효능이 인정되면 수출고가 급증할 전망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지런함”이라고 강조하는 박사장은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성공을 위한 첫째 조건은 갖춘 셈이다. 그는 ‘정직한 경영’과 ‘나눔의 정신’으로 나머지 조건을 채워 넣겠다고 다짐했다.

신동아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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