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잃은 것은 이빨 아홉개 얻은 것은 개혁 프로그램”

김성훈 전농림장관의 ‘농정개혁 29개월 비망록’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8-11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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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훈 전농림부 장관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98년 3월3일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그가 재직하고 있던 중앙대학교 교정엔 축하 대자보가 나붙었다. 그로부터 2년6개월 여. 장관직에서 물러나 중앙대 교수로 복직했을 때는 그를 환영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농림부 장관으로도 그는 합격점을 받았다. 지금껏 누구도 해내지 못한 수세를 폐지하고 농축협 통합을 이루어냈다. 그는 ‘개혁의 대명사’였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참 불운한 사람이다. 장관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모진 풍파에 시달렸다. 소값 폭락, 김강용 사건, 구제역 파동, 산불 등이 연이어 터졌다. 김포매립지를 놓고 동아건설과 맞붙었을 때는 둘째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또한 농축협 통합 과정에는 가족들이 위협에 시달렸고 김전장관 자신은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해야 했다. 그는 재임중 두 번이나 의식을 잃었고 이가 9개나 빠졌다.

    “개혁을 멈추면 반동이 시작됩니다”

    8월7일 오전 청와대의 개각 발표가 나온 직후였다. 김성훈 농림부 장관은 불과 1시간 만에 이임식을 치르고 과천 청사를 떠났다.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홍시론’을 폈다. “홍시는 때가 되면 떨어지는 겁니다. 나무가 붙잡을 수도 없고, 나무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겁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경질을 예상한 듯한 대답이다. 이틀 뒤 김전장관은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남북한과 캐나다의 교류협력을 연구하기 위해 출국했다.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아들까지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8월23일 오후 김성훈 전농림부 장관의 청담동 집을 찾았다. 이른바 ‘김강용 그림 도둑 사건’이 터졌을 때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곳이다. 현관에 놓여 있는 죽도를 보고 “검도를 배우시나요” 라고 묻자 수행비서가 “김강용이 잡으려고 갖다 놓았습니다” 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이번엔 김전장관이 놀라면서 “김강용이는 우리 집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선물로 받은 물건입니다” 라고 말했다.



    김전장관에게 ‘신동아’ 9월호를 건넸다. 표지 제목을 훑어보던 김전장관은 “개혁을 멈추면 반동이 시작됩니다” 라고 말했다. ‘신동아’ 9월호 머리기사였던 ‘보수는 반격을 노린다’에 대한 촌평이었다.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6개월 동안은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김전장관. 하지만 장관 시절 자신을 괴롭힌 루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이날 저녁 김전장관은 일본에 있는 박태준 전국무총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전장관이 구제역과 산불 때문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시절 박전총리는 내각을 책임지고 있었다. 당시 박전총리는 김전장관을 간접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으로 날아간 김전장관은 박전총리와 꼬박 24시간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둘이서 시공을 초월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화우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우리 농산물 얘기를 했고, 다이옥신 처리시설을 보면서 우리의 열악한 환경문제를 논했습니다. 새삼 박전총리가 일찍 물러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8월29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잠사회관을 찾았다. 이곳은 김전장관이 국회에 출석하는 날이면 베이스캠프처럼 이용하던 곳이다. 좀처럼 약속 시간을 어기지 않는 김전장관이 이날은 4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김전장관은 “그만두고 나니까 위로한다며 밥을 먹자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중절모를 벗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은 교수 시절 그대로였다. 하지만 질문에 답하는 자세는 달랐다. 재야 시절 그는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젠 현실적인 이야기를 많이 곁들였다. 아마도 2년5개월 동안의 공직자 생활이 가져다 준 변화일 것이다.

    ―장관직에서 물러나자 마자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셨습니다.

    “내가 교수로 재직했던 브리티시콜럼비아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남북한과 캐나다가 친환경적 농업을 추진하자는 연구인데 이번에 가서 마무리해놓고 왔습니다. 그동안 가족한테 너무 봉사를 못해서 아내와 초등학교 6학년짜리 꼬마를 데리고 갔습니다. 2년6개월 동안 사적인 생활이 전혀 없었거든요. 낚시도 하고 캐나다의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오랜만에 푹 쉬고 왔습니다.”

    ―장관을 그만두신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책임에서 벗어나니까 훨훨 날아갈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녁에 비가 막 쏟아지면 아직도 장관인 양 착각이 들어요. 걱정이 돼서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장관할 때는 빗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거든요. 그러다 ‘아, 나는 장관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면 비로소 잠자리에 들게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98년 2월이었다. 기자는 당시 중앙대학교 제2부총장으로 농림부 장관 후보에 거론되고 있던 그를 만난 일이 있다. 평소 농민 위주의 농정개혁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그였지만 장관직에 대해서는 그다지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농림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솔직히 하고 싶지 않습니다”는 말도 했었다. 그만큼 그 무렵의 우리 농촌은 파탄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IMF 직후였다. 기름값을 감당하지 못한 온실 농가에서는 농작물이 얼어죽었다. 젖소 송아지 가격이 개값만도 못한 3만원까지 떨어지자 급기야 젖소를 서울 도심에 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분유 재고도 1만6000톤을 넘어 전국적으로 우유 소비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관을 맡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고 며칠 뒤 조각 명단에 포함됐습니다.

    “내가 연구는 많이 했지만 행정 경험은 별로 없었잖아요. 그래서 행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의견을 물어온다면 정중히 사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8년 3월3일 아침 10시10분이었어요. 경기도 안성에서 화상으로 교무위원회의를 하고 있는데 11시에 뉴스 발표하니까 빨리 올라오라고 비서실장에게서 통보가 왔어요. 그러니 사양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던 거지요.”

    ―장관으로 재직한 2년5개월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국가와 농민을 위해 내 정성과 힘을 다 썼습니다. 재야 때 농촌을 이렇게 바꾸겠다고 연구했던 것 중에서 중요한 건 거의 했습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농림부가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겁니다.

    ―장관으로 취임하던 시절 우리 농촌 사정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나름대로 무슨 복안이라도 있었습니까.

    “솔직히 암담했습니다. ‘과연 우리 농촌에 희망이 있는가’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정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취임하자마자 소비자 대표, 농민 대표, 시민 대표를 불러서 ‘농소정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장관이 직접 현장을 찾아가서 그 자리에서 결정하는 ‘이동장관실’도 열었습니다.”

    ―서울 도심에 버려진 젖소들은 농림부에서 키웠다면서요?

    “과천 청사에 젖소가 돌아다니는데 송아지 목에 ‘장관님, 기르면 기를수록 빚만 늘어나니 맡아서 길러 주십시오’ 라는 글이 있었어요.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련 회관 앞에 있는 것까지 모으니까 그럭저럭 50 마리나 됐어요. 두 마리는 죽고 마흔여덟 마리는 수원 축산기술연구소와 축협 목장에 보내서 농림부 돈으로 키웠어요. 8개월쯤 지나니까 소값이 회복됐고 그 소들도 중소가 됐어요. 소 주인에게 연락해서 가져가라고 하니까 미안하다며 못 가져가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이 옛날에 나하고 같이 데모하던 농민들이었어요. 그래서 사료값으로 45만원씩 받고 130만원짜리 소를 줬어요.”

    ―우유 소비를 권장하기 위해 과천 청사에서 우유밥을 즐기셨지요.

    “사실은 1966년 하와이에 갔을 때부터 즐겼어요. 지금도 아침에 급하면 우유에 말아먹어요. 그것을 그때 보편화시킨 건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또 한가지 ‘우유폭탄주’도 제가 개발했어요. 기자들이 술 마실 때 맥주에다 위스키를 타서 마시는데 그렇게 하면 위가 다 상해요. 농림부에서는 우유에다 위스키를 타서 마시는 ‘우유폭탄주’를 즐겼어요. 술도 안 취하고 몸도 안 상하고 아주 좋아요.”

    아들 결혼식에 몰래 참석

    김전장관은 재임시절 두 가지 루머에 시달렸다. 둘째 아들의 병역문제와 ‘김강용 사건’이 그것이다. 김전장관이 수차례 해명했는데도 아직까지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많다. 병역문제는 김전장관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 단골로 등장했다. 김전장관은 아들의 병역문제가 나오면 말을 아끼는 편이다. 불행한 가족사를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드님 병역문제가 중요한 순간마다 불거져나왔습니다. 처음 그 얘기가 나왔을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정의 비극입니다. 두 아이가 미국에서 태어나서 시민권을 갖고 있었어요. 중학교 다닐 때 미국에서 아이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아비가 객지에서 아이들 셋을 기를 수가 없어서 LA에 사는 고모에게 둘째 아이를 ‘양자’로 맡겼습니다. 미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중국을 보내주는 바람에 거기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재혼해서 막내를 낳았습니다. 둘째 아이에게는 내가 참 부끄러운 아버지입니다. 또 장관 재임중에 결혼을 하게 돼 결혼식 때 아무한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내 수행비서와 운전기사도 따돌렸습니다. 혼자서 전철 타고 가서 밖에서 담배 피우고 있다가 신랑 입장할 때 슬쩍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 아이는 항상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 아이는 오래 전에 국적이탈신청서를 내놓아서 6개월 만 더 있으면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이 상실되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장관인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자꾸 비판을 받으니까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귀국해서 한국 군대에 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짐이 되면 안된다고 갓 결혼한 아내까지 외국에 두고 들어온 겁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피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잃어버렸던 ‘내 아들’을 되찾았습니다. 군대에 가더니 전보다 훨씬 씩씩하고 남자다워졌습니다. 요즘엔 둘째가 누구보다도 저를 많이 걱정해주고 있습니다.”

    ―장관을 그만두셨으니 막내 아들과도 친해지셨겠네요.

    “이번에 캐나다에 같이 가서 보름 동안 참 많은 얘기를 했어요. 아내나 주변 사람도 막내가 캐나다에 다녀와서 얼굴이 환해졌다고 그래요. 학교에 가기 싫다던 녀석이 이젠 자기 친구들도 집으로 불러들여요. 내가 장관에서 물러난 게 그렇게 좋은가봐요.”

    ―장관 시절엔 친척들과의 관계도 많이 신경쓰였을텐데….

    “장관 되고 나서 친척을 일절 만나지 않았습니다. 누님이 두 분, 형님이 한 분 계신데 우리 집에 못 오시게 했습니다. 우리 집을 출입하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청탁하게 되고 그러면 제가 난처하잖아요. 내가 장관 그만둔다고 전화하니까, 큰 누님이 ‘이젠 너희집 가도 되겠구나’하고 좋아하시더라구요. 작은 누님도 ‘이젠 비가 내려도 걱정 안해도 되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김강용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세간에서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와본 사람은 금방 알아요. 우선 120평 짜리 집이 아니잖아요. 실평으로 48평이에요. 우리집은 300호 짜리 그림은 커녕 100호 짜리도 붙일 벽이 없어요. 김강용이 우리집 현관문을 빠루로 따고 들어왔다는데 자국이 없잖아요. 그래서 기자들 보고 우리 집에 와서 보라고 했는데, 확인도 않고 사실과 다른 기사를 쓰는 거예요. 모 신문사는 논설실장이 내 동서라서 한 달이 멀다 하고 우리 집에 왔었는데 그 신문조차 다르게 쓰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피똥을 싸서 병원에 갔더니 직장이 찢어졌대요. 그런데 ‘고맙게도’ 김강용이 우리집 약도를 그린 다음 현장검증을 했는데 그게 다른 곳이라서 오해가 풀렸던 거예요. 하지만 신문들은 그 얘기를 써주지 않았어요. 이번에 캐나다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 얘기를 묻는데 뭔가 못 믿겠다는 투더라구요.”

    ―사건 초기에 농림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 없어졌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뭔가 잃어버린 게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오해의 시작이었습니다. 김강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한달쯤 전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전화로 ‘부적을 잃어버렸냐’고 물었습니다. 김강용이 우리집에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어서 기념으로 부적을 가져갔다고 한 모양이에요. 그러나 우리 집엔 부적 같은 게 없거든요. 기증하고 남은 그림 몇 점도 그대로 있었구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광개토대왕비 기와 탁본이 없는 겁니다. 탁본을 자세히 보면 부적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농림부 공보관에게 ‘탁본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답니다. 중국돈 10위안을 주고 산 탁본이었습니다. 나중에 야당 대변인이 발표하는 걸 보니까 6억짜리 운보의 그림과 1억짜리 남농 그림을 우리집에서 훔쳤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김강용이 한 건지, 김강용을 만난 국회의원이 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10위안 짜리 탁본이 7억원짜리 그림 두 장으로 뒤바뀐 거예요. 더 재미있는 건 그 탁본도 나중에 우리집 문갑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김성훈 장관이 물러난 속사정은 무엇일까. 개각을 앞두고 그의 거취는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김전장관은 이미 이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심전심’으로 김대통령과 의견조율이 끝났다는 것. 김전장관은 지난해 가을에도 사의를 표한 일이 있다. 당시 김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더 할 일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다고 한다. 김전장관에 대한 김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전장관이 스스로 물러나고자 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건강이다. 장관으로 일하면서 그는 이가 아홉 개나 빠지고 두 번이나 졸도할 만큼 건강이 나빠졌다. 다음으로 개혁에 대한 김전장관의 지론이다. 그는 올 초부터 “내가 할 일은 끝났다. 개혁의 완성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마지막으로 대학 교수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는 벌써부터 ‘대학에 돌아가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구제역 파문이 번졌을 때 졸도하신 적이 있었지요.

    “선거 때였는데 봄가뭄이 대단했어요. 축협이 전국의 민주당사만 골라서 데모를 하니까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망생들이 아우성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구제역이 퍼졌어요. 서둘러 ‘구제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뛰어다니는데 동해안에 돌풍을 동반한 산불이 났어요. 국가적 재난이 연이어 터졌는데 지방자치단체들이 자기 할 일을 안해요. 옛날엔 산불이 나면 군수의 목이 달아났어요. 그런데 선출직으로 바뀌면서 나몰라라 하는 거예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대통령께 건의하려고 해요.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제가 좋다지만 지방자치단체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봐요. 그때는 정말 촌각을 다투는 위기였어요. 구제역이 났다는 소리만 들리면 새벽이든 밤중이든 달려가서 사태를 파악하고 가축들을 땅에 묻으라고 지시했어요.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으면 안되거든요. 산불 현장에도 여섯 번이나 갔어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점심을 굶고 야전침대에 앉아있는데 몸이 뻣뻣해지면서 반신마비 증세가 오는 거예요. 누구한테 알리지도 못하고 2시간을 혼자서 끙끙 앓았어요. 며칠 있다가 또 한번 마비가 오는데 그때는 집무실에서 그냥 쓰러졌어요. 어떻게 꼼짝할 수가 없더라구요.”

    협동조합 개혁 비화

    98년 3월3일 ‘국민의 정부’가 조각 명단을 발표했을 때 농림부는 교육부와 함께 가장 주목받는 부서였다. 이해찬 교육부 장관과 김성훈 농림부 장관. 두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개혁장관’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임기중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83년 묵은 수세를 폐지하고 4개 협동조합을 개혁한 겁니다. 일제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던 우리 농업의 해묵은 숙제를 풀었어요. 나는 개인적으로 새천년농촌농업기본법을 마련해 농정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에도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어요. 그렇게 세 가지가 제가 2년5개월 동안 전력을 다해 만들어 놓은 겁니다.”

    ―농림부가 최초에 제안했던 3개 개혁안은 협동조합중앙회장단에서 결렬되고 국회 심의과정에 수정됐습니다. 결국 김전장관께서도 한발 물러난 셈인데요.

    “200회가 넘는 공청회를 통해 합의된 안을 국회에서 심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통합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내걸고 당선된 신구범 축협 회장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야 국회의원들이 축협 회장을 서너 차례 만나서 축협쪽 주장을 거의 다 받아들인 개정안을 만들었던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개혁이 변질됐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100점 짜리가 단계적인 70점 짜리 개혁안으로 바뀐 겁니다.”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상임위에서 통과되던 날 신구범 축협 회장이 할복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날의 상황을 설명해주시죠.

    “의장이 통과시키려고 하는데 신구범 회장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문구칼로 할복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법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습니다. 그때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축협 임직원들이 흥분해서 국회의원을 구타하려고 했습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빠져나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잡혀 구타 직전까지 갔고 나머지 국회의원과 장차관, 농림부 간부들은 상임위원회실에 갇혀서 나오질 못했습니다. 2시간쯤 그렇게 무법천지가 지속됐습니다. 정말 공포의 순간이었습니다. 어떤 나이 드신 의원 한 분은 공포에 질려서 헛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가족들도 정신적 피해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6개월 정도는 새벽 2시에서 4시까지 조직적으로 전화가 걸려왔어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가정파괴적인 비난을 퍼부었어요. 나도 위협을 느껴서 한 3일간은 경찰이 우리 집을 지켰어요. 200여회에 걸쳐 신문광고를 통해 나를 음해하는 거짓말을 내보내니까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장관인 것이 그렇게 싫었대요. 방안에서 꼼짝을 안하고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는데 인사조차 안해요. 그때의 스트레스로 잇몸이 붓는 바람에 이빨 5개가 빠지고 나중에 4개를 더 뺐어요. 농림부 장관 2년5개월에 잃은 것은 이빨 9개고 얻은 것은 개혁 프로그램입니다.”

    막내아들은 학교에서 ‘왕따’

    ―농축인삼협 통합이 어려움을 겪자 정암 조광조 선생의 사당을 찾으셨다면서요.

    “이제는 그때의 일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도 저항이 심하니까 통합의 당위성을 잘 모르는 정치인들이 ‘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나와 뜻을 같이 했던 지인들마저 고개를 젓더라구요. 그무렵이었어요. 이동장관실을 운영하고 돌아오다보니까 무등산 자락에 정암 조광조의 사당이 있어요. 저는 평소 조광조 선생의 인간평등 사상과 토지정책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거든요. 해가 어스름히 질 무렵 사당 문을 따고 들어가 영정 앞에서 몇시간을 앉아 있었어요. 그때 조광조 선생에게 물었어요. ‘당신의 개혁은 왜 실패했는가’ ‘왜 당신을 등용했던 중종과 당신을 지지했던 사림파마저 등을 돌렸는가’ 두 차례 그곳을 방문하고 나서 두 가지 해답을 얻었어요. ‘개혁을 할 때 한꺼번에 얻으려고 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우군도 적이 된다’ ‘정책 수혜자를 우군으로 만들어라. 그들이 집단 이기주의에 맞서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계시를 받았어요. 그런 마음으로 돌아와서 축협의 주장을 대폭 수용하고, 시민단체와 농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통합에 박차를 가했던 겁니다.”

    농축협 통합 외에 빼놓을 수 없는 개혁이 일제시대의 잔재인 수세를 폐지한 일이다. 수세를 폐지하는 과정에 농어촌진흥공사, 농지개량조합, 농지개량조합연합회 등 3개 기관을 농업기반공사로 통합했는데, 내부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번에도 김성훈 장관의 우군은 시민단체와 농민단체였다. 이들은 ‘농조 농진공개혁위원회’를 만들어 농림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김전장관 특유의 ‘역포위 개혁작전’이 이번에도 적중했던 셈이다.

    ―수세를 폐지하는 과정에도 마음 고생이 크셨지요.

    “멀쩡하게 군대에 다니고 있는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져나오고 각종 루머가 끊이질 않았어요. 6억 짜리 그림을 받았다느니, 농협 회장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받았다느니 하는 괴문서도 나돌았어요. 협동조합 통합 때는 경기도 어느 도시에서 나를 그려놓고 달걀을 던지는 게임도 했어요. 입을 맞히면 10점, 배를 맞히면 5점, 뭐 그런 식이었어요. 그때는 속이 상했지만, 지나고 보니까 즐거운 추억이네요. 그때 나온 각종 유인물을 묶어서 백서로 만들고 있어요.”

    ―당시 시위과정에 장관님의 허수아비를 불태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 심정은 어떠셨습니까.

    “우선 대통령을 불태우지 않고 장관을 불태운 것이 고마웠어요. 그 사람들이 장관을 주모자로 모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집회를 열 때마다 나보고 ‘물러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물러가겠다. 다만 해놓고 물러간다’고 대답했어요. 나는 결국 약속을 지킨 겁니다. 여의도에서 처음으로 화형식을 하는데 정말 섬뜩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나하고 팔자눈썹이 똑같을 수 있어요? 옷도 똑같아서 ‘정말 제대로 만들었구나’ 하고 웃었어요. 내가 태어날 때 무당이 단명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때 무당을 또 하나의 어머니로 삼았어요. 화형식으로 몇 번 죽었으니까 ‘이젠 장수하겠구나’ 했어요. 그렇게 웃으면서 극복했어요.”

    ―농업기반공사가 출범하던 날 갑오농민전쟁을 말씀하셨지요.

    “1월1일이었습니다. 83년 동안 농민을 괴롭혀온 수세를 없앴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수세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농민전쟁의 발원지였던 전라북도 정읍에서 이동장관실을 할 때 나왔거든요. 그래서 ‘지하에 계신 녹두장군과 농민군이 수세가 폐지됐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춤을 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농축협 통합과 수세 폐지. 어찌 보면 이것은 농업계 내부에 관한 문제였다. 김전장관은 여론의 지원을 받으면서 ‘농민 위주의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두 가지 사안에 있어서 김전장관은 분명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반면 동아건설과 김포매립지 용도변경 문제를 놓고 맞붙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이 싸움에서는 정치권과 언론, 심지어 정부 부처도 김전장관 편이 아니었다.

    ―김포매립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혔을 때 “이것을 풀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지금도 단언합니다. 김포매립지를 풀어주었으면 ‘제2의 수서사태’가 왔을 겁니다. 이름을 댈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의 한다하는 정치인은 거의 다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김포매립지를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관계부처 장관회의에서도 농림부 장관 빼고는 전부 풀어주자고 했습니다. 나는 완전히 ‘왕따’ 당한 겁니다. 나는 그때 식량기지가 될 농토를 지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권의 치명적인 도덕성과 국기가 흔들릴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국의 논 중에 간척지가 15% 정도 됩니다. 만약 김포를 풀어주면 김포보다 10배나 큰 현대의 아산 간척지도 풀어줘야 합니다. 너도 나도 용도변경해달라고 나올 거고 그렇게 되면 이 나라는 온통 투기와 부패로 뒤덮이게 됩니다. 재계의 판도를 완전히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난 특혜를 부실기업인 동아그룹에 준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건 수서비리 정도로 끝날 사안이 아닙니다. 정권의 도덕성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DJ와 JP가 농림부를 도왔다

    ―김포매립지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워낙 압력이 세게 들어와서 김종필 총리에게 보고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과 정치권이 다 허용해주라고 했지만, 김총리는 내 얘기를 듣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내가 어지간하면 그 아버지를 생각해서 해주려고 했는데 안되겠구먼’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최원석 회장의 부친이 충남 부여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동아그룹이 포기하지 않아 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대통령께서 ‘아무리 기업이 어려워도 부정한 방법으로 도울 수는 없다’며 농림부에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선례를 만들어 놓으니까 얼마전 현대 아산에서 용도변경을 요청했을 때 농림부 과장이 ‘김포매립지처럼 공시지가의 66%로 사서 농민에게 분양하겠다고 퇴짜를 놓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젠 뭐 장관이나 국장이 나설 것도 없습니다. 그랬더니 현대에서 ‘언제 판다고 했느냐’며 꼬리를 내렸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압력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일 무서운 건 역시 언론계의 압력이죠.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지요. 개혁을 계속 해야 하는데 이것으로 미움을 받으면 다른 농정개혁은 생각할 수 없거든요. 어떤 의원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독하게 마음먹고 꼬박꼬박 대꾸했습니다. 처음엔 열을 올리더니 나중엔 ‘회의록 좀 써먹을 수 있게 해달라’며 타협을 제안해온 적도 있었습니다. 또 각 부처의 시각이 달라서 설득하는 것도 참 힘들었습니다. 지인을 동원해 밖에서 만나자는 제의도 무수히 많았지만 저는 어떤 사람도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동아그룹 사람들도 장관실에서 국과장 입회하에 기록하면서 만났습니다. 최원석 회장은 나하고 용도변경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나중에 딴 얘기를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회의록을 공개했고 최회장이 거짓말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장관께서는 유혹을 받으신 일이 없습니까.

    “제가 워낙 강경하게 나갔습니다. 말 붙일 기회를 주지 않았고 전화가 와도 끊었습니다. 내가 약하거든요. 그래서 빌미를 줄 만한 것을 차단했던 겁니다. 천주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를 지을 수 있는 소지를 없애버리라고 했습니다. 곰팡이가 끼지 않게 하려면 물기를 다 뽑아내라고 했습니다. 로비할 길을 사전에 막아버린 거죠.

    개혁한 사람은 ‘팽’을 당한다?

    ‘개혁(改革)’이란 무엇일까. 한자로 풀어보면 ‘고칠 개(改)’와 ‘가죽 혁(革)’이 합쳐진 단어다. 즉 ‘가죽을 벗기는 과정’이 개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농촌의 해묵을 때를 벗겨낸 김성훈 장관의 개혁작업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농림부의 개혁과는 달리 김대중 정부의 총체적인 개혁은 미흡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최근 집권 후반기를 맞아 각종 기관이 내놓은 성적표가 이를 대변해준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통일분야’를 빼면 시원치 않다는 주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농업분야에 국한해서 본다면 이제부터 제2단계 개혁이 필요합니다. 하드웨어를 고치는 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 혜택이 농민에게 가도록 하려면 소프트웨어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달라져야 하고 운영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따라주지 않으면 개혁은 실패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현 정부의 개혁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지금 평가하는 게 시기상조인 분야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개만 고치면 바로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성급한 기대감 때문에 낮은 점수가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개혁한 사람이 나중에 팽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혁을 하면 곧바로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성급한 기대감이 빚어내는 현상입니다. 개혁을 한 뒤에는 반드시 알맹이를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진단하기엔 하드웨어의 개혁조차 기대에 미치지 못한 분야가 너무 많습니다.

    “개혁 청사진이 처음부터 잘못돼 있거나 정책 수혜자의 동의를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 경우라고 봅니다. 개혁은 철저한 준비와 조정과 설득과 합의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은 후반기로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농림부가 개혁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제부터는 좋은 일 좀 많이 했으면 합니다. 하드웨어 개혁과정에 낙오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구제해줘야 합니다. 사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소프트웨어 개혁과정에 사람들이 등을 돌리면 실패합니다. 소프트웨어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혁해도 별거 없지 않으냐’는 목소리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바로 이때 반개혁적인 사람들이 동조해서 저항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반동’입니다.”

    9월6일 오전 경기도 안성의 중앙대학교. 2년5개월 만에 강단으로 돌아온 김전장관은 가장 먼저 ‘현장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한달에 한번씩 농촌 문제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을 방문하겠다”고 밝혔다. 김전장관은 예전에 몸담았던 시민단체에도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농림부에 관계된 일은 피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 자리를 떠나서는 그 자리의 일을 논하지 말라’는 ‘맹자’의 말로 자신이 걸어갈 길을 암시했다. ‘개혁장관’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가 제도권 밖에서도 개혁의 파수꾼으로 남아주기를 기대해본다.

    [이런 일도 있었다]‘튀는 장관’의 농정일기

    2000년 1월1일. 정부 과천청사 대강당에서 농림부 시무식이 열렸다. 공무원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대형 멀티비젼을 통해 가수 이정현의 ‘바꿔‘가 흘러나왔다. 노출이 심한 옷차림에 자극적인 테크노 음성….

    김성훈 장관은 “방금 들은 노래처럼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행사장 맨 앞줄에는 농축협과 농업기반공사 관계자들이 앉아 있었다.

    김전장관은 농림부 월례조회에서 시를 자주 낭송했다. 분위기에 맞는 시를 골라 임직원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99년 8월 협동조합개혁 입법을 앞두고 그는 이정하 시인의 ‘길을 가다가’라는 시를 읽었다. 지속적인 개혁으로 지쳐 있는 공무원들을 향한 위로의 편지였다. ‘가파른 길에서 한숨쉬는 사람들이여. 눈앞의 언덕만 보지 말고 그 뒤에 펼쳐질 평원을 생각해보라.’

    농림부에는 하급자가 상급자를 평가하는 제도가 있다. 설문지에 국장 자리를 다 비워놓고 그곳에 하급자들이 적임자를 채워넣도록 했다. 김전장관은 그 자료를 토대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국장급 세 사람이 농림부를 떠났던 것.

    김전장관은 재임중 해외출장을 4번 다녀왔다. 특이한 건 검소한 씀씀이. 방은 싱글로 잡았고, 수행원은 최소로 했다. 이렇게 해서 4번 모두 평균 4000달러씩 남겨 반납했다.

    98년 수해가 났을 때 일이다. 경북 상주와 충남 예산에서 아버지를 잃은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이 돈이 없어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3개월치 장관 월급을 나눠준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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