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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공모 당선작

길림댁은 등나무처럼 살고 싶다

제36회 1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 당선자: 김진분

길림댁은 등나무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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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오후 2시가 다 돼 간다. 함께 기다리던 두 사람은 30분쯤 전에 돌아갔고 이젠 나만 남았다. 마침내 나도 일어섰다. 이쯤에서 더 기다려본들 일이 생긴다는 보장도 없는데다 소장이 점심 채비를 하고 있어 눈치가 보였다. 무엇보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아까부터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픈 듯했다. 오늘따라 소장이 끓인 된장찌개가 왜 그리도 맛있어 보이는지, 허둥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데도 찌개냄새가 유혹하듯 뒤쫓아오는 듯했다. 아무리 공친 날이지만 오늘은 뭔가 사 먹어야 할 것 같다. 다른 날 같으면 아무리 늦어도 허기를 참았다가 집에 돌아가서야 점심을 차려 먹었다. 일도 얻지 못했는데 밥까지 사 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쩐지 새벽보다 날씨가 추워진 느낌이다. 파카를 입었는데도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시장 노점상들이 파는 음식이 미더워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살펴보니 전에 먹어본 호떡집이 눈에 띄었다. 한 개만 사서 허기만 면할 요량이었는데, 하나는 안 팔고 1000원에 세 개씩 판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1000원짜리를 내주고 호떡봉투를 받아들었다.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먹기가 뭣해 한쪽으로 비켜서서 호떡 하나를 꺼내 물었다. 급한 마음에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입에 채 들어오기도 전에 뜨거운 단물이 턱밑으로 주르르 흘러 덴 듯 따가웠다. 호떡 아줌마한테서 화장지를 얻어 끈적이는 턱을 얼른 닦아냈다.

날씨도 추운데다 물도 없이 빨리 먹으려니까 자꾸만 목이 메었다. 가까운 슈퍼마켓에 들어가 우유를 한 통 샀다. 구석진 곳으로 찾아들어가 우유를 몇 모금 꿀꺽꿀꺽 마시는데, 그런 내 모습이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이곳에서 한국남편 만나 늦게나마 호강하며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부러워할 것이다.

가게를 나오다 보니 마침 입구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잠깐 걸음을 멈추고 비춰 보니 내 피부는 이곳 여인네들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일 만큼 거칠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안색도 엉망이었고, 입성도 어설프고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낯설게 변한 내 모습에 순간 설움이 치솟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만약 그이(전 남편)가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지 않았을 뿐더러 재혼해 이곳에 정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이가 살아 있다면 나는 지금쯤 중국땅 어디엔가 그이가 마련해준 보금자리에서 예나 다름없이 밥짓고 빨래하고 랄랄라 사랑 노래 부르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귀국하는 배표까지 끊어놓고도 왜 나는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한국남자와 결혼하게 됐을까. 그때 중국으로 돌아갔다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들이 내 민족인가

8년 전,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섬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였다. 한국은 중국보다 부유한 나라이면서도 나와 같은 핏줄의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고, 무엇보다 둘도 없는 고국땅이어서 나는 자나깨나 나의 아름다운 섬, 한국에 나오고 싶어 안달을 했다. 천신만고 끝에 나는 한 친지의 도움으로 요란스레 출렁거리는 배를 타고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서 그토록 꿈에 그리던 내 마음속의 섬에 닿았다. 1992년 6월2일이었다.

인천항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한 나는 긴긴 뱃길의 피곤함도 잊은 채 아름다운 분위기에 흠뻑 젖어 한참을 감격에 빠져 있었다. 여기저기 눈에 띄는 까마득한 고층건물, 물결처럼 흐르는 자동차 행렬, 활보하는 행인들의 깨끗한 옷차림….

어렸을 적에 그림에서 봤던, 중간 가리마 양편으로 탐스런 머리칼을 곱게 빗어 넘긴 아리따운 여인네의 모습이나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수줍게 미소를 머금은 실눈의 얼굴들, 코고무신 위로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사뿐사뿐 걷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화사하고 대담한 미니스커트에 울긋불긋한 컬러 머리 같은 다양한 차림새와 세련된 모습이 상상외로 예쁘고 아름다웠다. 더욱이 귀에 들어오는 말은 딱딱하고 높낮이가 심해 거북살스러운 중국어가 아니라 하나같이 부드러운 조선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 조선말은 아름답다 못해 신기하게 들렸다.

그러나 이 모든 감상도 잠깐, 나는 여느 중국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침식이 가능한 일자리부터 구해야 했다. 동서남북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서울에서 비싼 택시를 타고 물어물어 찾아 다닌 끝에 마침내 침식을 제공하는 어느 식당에 주방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내가 생각했던 한국이 아니었다. 겨우 몸을 풀고 일을 시작한 그날부터 나는 이방인 취급을 당했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임금을 받았다. 그것까진 좋았다. 그때 주방에선 나말고도 네 사람이 일했는데, 그들은 틈만 나면 홀에 나가 고스톱을 치거나 의자에 걸터앉아 쉬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종일 다리를 쉴 틈이 없었다. 화장실 가는 일조차 부담스러워 변비가 생길 정도였다. 그들은 편히 앉아 쉬면서도 혼자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 자기네 몫의 일까지 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개인적인 바깥 잔심부름까지 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설거지 담당’인 내가 씻어야 할 그릇들은 싱크대에 어지럽게 쌓여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주인은 그때마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식당주인은 걸핏하면 내가 중국동포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주제를 알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시시콜콜 일러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밀린 그릇들을 한꺼번에 씻어내느라 혼자 부산을 떨어야 했다.

특히 주말이나 휴일에 많은 손님들이 일시에 들이닥치면 주방 여기저기서 내게 소리를 질러댔다. 나보다 한참 어린 종업원까지도 강아지 부리듯 ‘아줌마!’ ‘아줌마!’ 하면서 반말투로 일을 시켰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고기도 썰다가, 채소도 다듬다가, 국수사리도 삶아내다가, 홀에 나가 빈 그릇도 날라오고, 물컵도 내가는 등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런 날이면 주방 일꾼들이 간혹 인심 쓰듯 설거지를 도와줄 때가 있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세제로 닦은 그릇을 내가 일일이 깨끗하게 헹굴라치면 그들은 “그럴 필요 없어. 그렇게 해서 언제 다 씻어?” 하면서 내 앞에서 그릇 씻는 시범을 보였다. 세제를 많이 붓고 씻은 그릇을 그저 싱크대 개수통에 받아놓은 물에다 덤벙덤벙 담갔다가 건져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헹궈낸 물에도 세제거품이 허옇게 떠 있었다.

그렇게 씻어 내놓은 그릇은 하나같이 세제가 그대로 묻어 있어 몹시 미끄러웠다. 모르는 사람들 눈엔 깨끗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마치 독이 묻은 그릇처럼 여겨져 꺼림칙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헹궈내면 “더러운 똥되놈 나라에서 살다온 것이 어지간히 깨끗한 척한다”면서 대놓고 비웃으며 모욕을 줬다. 그런 말을 듣고도 타향살이 하는 처지라 아무 대꾸도 못하고 치솟는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은 세제를 어지간히도 조심했다. 세제를 만질 때는 피부가 상한다면서 반드시 고무장갑을 꼈고, 자기들이 먹을 음식을 담을 때는 이미 씻어 엎어놓은 그릇들을 손수 다시 헹궈서 사용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민족애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3년만 고생하면 갑부?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법적 체류기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귀국일자가 어느새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이었다. 황급히 법무부로 달려가 체류기간을 한 달 더 연장했다. 그러고 나서 또 다시 한 달을 더 연장했지만, 서울 생활은 물 흐르듯 빨리 지나갔다.

하는 수 없이 체류 마감일에 맞춰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표를 끊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오기 위해 보낸 너무도 길고 힘겨웠던 수속기간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이렇게 일찍 귀국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깝고 억울했다. 그 무렵엔 내가 알기로도 수많은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남아 있었지만, 나는 날마다 안절부절못했다. 그때가 마침 불법체류자 단속기간이기도 해서 운 나쁘게 단속에 걸려 법무부로부터 강제 추방된다면 그것처럼 불명예스러운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고된 식당 일을 하면서도 피곤함조차 느낄 여유가 없는 신경과민증에 시달렸다.

자정쯤 일이 끝나 모두 돌아가고 식당 현관셔터가 철커덕 내려지면 나는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어 외로이 잠자리로 찾아들었다. 식탁 두 개를 맞붙여 놓은 ‘침대’에서 나는 가뜩이나 짧은 밤의 절반을 걱정과 한숨으로 지새웠다. 아직 63빌딩이며 자연농원이며 민속촌도 구경 못했는데, 김동건의 ‘가요무대’도 못 가봤는데, 이렇게 고생만 하다 쫓겨나면 어쩌나 하면서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그때 경기도 일산 신도시 건설현장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잖아도 배표를 쥐고 돌아갈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무작정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만약 그곳까지도 단속의 손길이 미친다면 배를 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나는 일하던 식당을 빠져나와 일산의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황급히 뛰쳐나오다 보니 밀린 월급도 얼마간 떼였다. 현장에 이르자 다행히 어느 함바식당에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소문대로 그곳은 복잡한 서울과 달리 구석지고 조용해서 얼마 동안은 피신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나처럼 단속을 피해 그곳으로 몰려오는 동포가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한국에 온 지 1∼3년째 되는 동포도 더러 있었는데, 용케도 단속을 피해가며 버텨온 악착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 무렵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신고하자’라는 표어가 유난히 내 눈에 잘 띄었다. 그렇게 단속 걱정을 하는 나에게 한 교포가 픽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오장육부가 그렇게 콩알만해서 어떻게 딸라를 벌어가요? 우리가 무슨 강도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버티는 데까진 버텨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지요….”

그는 이미 상당한 액수의 돈을 저축해 놓았는지 우쭐대는 여유마저 보였다. 그가 부러웠다. 그에 비해 나는 거지나 다름없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게 또 돈 아닌가. 나는 한껏 용기를 내서 한국에 있는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이곳 함바식당의 월급은 60만 원으로, 서울에서 일하던 식당보다 10만 원이 더 많았다. 1년이면 720만 원, 2년이면 1440만 원, 3년이면 2160만 원이란 얘기다. 중국돈으로 따져보면 가히 천문학적인 거금이었다. 중국돈으로 환전하면 지게로 지고도 남을 액수였다. 돈을 벌기도 전에 산수놀음부터 하기 바빴다. 3년 동안 벌 수 있는 돈을 머리 속에 떠올리자 잠시나마 갑부가 된 듯한 기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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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 김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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