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피의 보복전을 부른 공작의 세계

  •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5-05-10 16: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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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단어 Operation은 퍽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가동·효력·조작·운영 등으로 번역되지만, 의학계 용어로 쓰일 때는 ‘수술’로 옮겨야 한다. 반면 군사 분야에서 쓰일 때는 ‘작전’으로 번역해야 하고, 첩보나 수사 세계에서 사용되면 ‘공작’으로 바꿔야 그 뜻이 통한다. 한국말 ‘공작(工作)’은 음습하고 뭔가 모략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영어 단어 Operation에서는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첩보 세계 종사자들은 공작 대신 Operation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비밀스러운 공작의 세계

    이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것은 정치자금의 유통과 Operation일 것이다. 정치자금 유통은 한보나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대치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벌인 공작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000년 하반기부터 북파 공작원 출신들에 대한 보도가 나오며, 말로만 듣던 북파 공작원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0년 11월3일 북파 공작원 출신들은 국군정보사령부 앞에 모여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왜 시위를 벌였는가. 이들의 시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공교롭게도 보상을 요구하는 북파 공작원 출신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사선을 넘었다. 왜 박정희 대통령은 북파 공작을 강화했고 이들의 공작은 당시 남북한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가장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남북 첩보 전선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1968년 10월○○일 중동부 전선 비무장 지대에서는 하루종일 남북한 군이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다. 이유는 ‘편의대’로 불리는, 남쪽에서 파견한 특수공작대원들이 북쪽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북한군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동틀 무렵 시작된 교전은 온종일 계속되다가 해질 무렵에야 잦아들었다. 이 날 한국군은, 중동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선에서 전차와 장갑차를 빼내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의 페바(FEBA:Forward Edge of the Battle Area의 약자로 ‘전투지역의 전단’이라는 뜻)에 집결시키고, 교통호에는 완전 군장한 보병들을 투입해 전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교전은 이 날 새벽 북방한계선 북쪽에서 일어난 두 차례 폭음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만 20세였던 김철중씨(가명·52)를 비롯한 5명의 편의대원들은 북쪽에서 북한군을 교란하는 특수공작을 마치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이들에게 부여된 특수공작 임무 중 하나는 북방한계선 너머 북한 땅에 있는 한 인민군 내무반 막사에 폭약을 설치해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날 새벽 폭약 설치를 끝낸 편의대원들을 시속 13㎞라는 ‘귀신 같은 속도’로 산을 타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충분한 거리를 도주했을 무렵 폭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편의대원 중 사진 촬영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잽싸게 카메라를 꺼내 폭풍이 올라오는 장면을 찍었다.

    김씨가 속한 특수공작대는 왜 북한군 내무반을 파괴했는가. 김씨의 해석이다.

    “완전 심리전이다. 당시는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침투 사건(1·21사태) 벌어진 다음이었다. 인민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근처까지 침입한 사실이 밝혀지자 국군 병사들은 크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인민군 특수부대원이 침입해 국군 내무반을 폭파하고 국군의 귀를 베어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자 우리 쪽에서도 북한군의 사기를 죽여 놓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국군 병사들은 3년간 복무했지만 인민군은 7년씩 복무했다고 한다. 우리 병사들은 빠르게 교체되므로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4∼5년이 지나면 잊혀지지만, 북한은 병사들이 오래 복무하는 관계로 그들이 당한 사건은 더 오래 구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고려해 특수공작을 벌인 것으로 안다.”

    실물모형 놓고 침투路 연구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특수공작을 벌인 북한 땅이 정확히 어디인지, 그리고 그가 사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온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심지어 그가 한국군 어느 사단이 지키고 있던 곳으로 넘어왔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김씨가 속한 특수공작대(편의대·일명 ‘돼지’로도 불렸다)를 관리하던 육군 첩보부대 소속의 공작과장(소령)이 침투지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가 속한 편의대 5명은 강원도 춘성군(지금은 춘천시) ○면 ○○리 ○○산에서 훈련받았기에 ‘춘천대’로 불렸다. 춘천대가 있던 곳은 군부대가 아니고 화전민이 사는 산 속이었다. 이들은 일반 군부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지냈기 때문에 사단 마크를 구별할 줄도, 또 사단 마크를 볼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공작과장은 물론이고 이들에게 생필품을 전해주는 조교들조차 이들을 만나러 올 때는 계급과 명찰, 부대 마크를 떼놓고 왔다.

    이렇게 산 속에서 지내다 침투 명령이 떨어지면 이들은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앰뷸런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비포장 도로를 달려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에 있는 GOP 부대에 도착한다. 춘천에서 비포장도로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김씨는 자신이 침투한 곳이 중동부 전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침투했던 북한 지역은 지금도 손금 보듯이 기억한다고 했다. 이유는 작전에 들어가기 전, 미 공군이 찍어온 항공사진을 보고 모래와 석회로 만든 ‘사판’으로, 수십 차례 침투로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사판이란 실제 지형과 똑같이 산과 계곡을 축소해서 만든 모형으로, 가로 세로가 약 4m쯤 되었다. 이 사판은 워낙 세밀해서 좌표로 삼아야 할 큰 산만 눈여겨 봐두면, 북한 땅 어디에서고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판을 보며 지형을 익히다가 공작 개시 3일 전이 되면 면도는 물론이고 비누 세수도 칫솔질도 하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인 비무장지대에서는 며칠 전에 사용한 비누와 치약 냄새가 의외로 멀리 퍼진다. 사람보다 더 예민한 짐승은 이 냄새를 맡고 부스럭거리며 도망칠 수가 있다. 짐승이 소리를 내고 도망치면 적군은 그곳을 주목하기 때문에 침투가 어려워진다(6·25전쟁 때 빨치산도 비누와 치약을 쓰지 않았다. 이들을 잡으러 가는 토벌대도 작전 며칠 전부터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남방한계선 남쪽의 GOP 연대에 도착해서는 긴장을 풀기 위해 연대 특등 사수와 사격 시합을 벌이곤 했다. 김씨는 당시 어린이들이 많이 가지고 놀던 구슬을 25m 거리에서 쏴 박살내는 실력이었기에, 연대 특등 사수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으면 최전방 실습을 나온 신참 소위로 위장해 남방한계선의 통문을 열고 트럭을 타고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아군 GP로 간다. 그리고 해질 무렵 GP 병사에게 이들이 입고 온 신참 소위복장을 입혀, 트럭에 태워 남방한계선 너머 GOP 부대로 보내는 것이다(야밤에는 아군은 물론이고 인민군도 긴장하기 때문에 GOP부대에서 GP소초로는 이동할 수가 없다).

    “인민군을 납치하자”

    비무장지대에는 지뢰가 즐비하고, 아군과 인민군 수색대가 번갈아 설치한 부비트랩(boobytrap·엉뚱한 물건으로 위장된 폭발물)이 많아 길 아닌 곳으로 가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GP소초에서 휴식을 취한 춘천대는 수색대 매복조의 길 안내를 받아 군사분계선까지 접근한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다음부터는 지뢰와 부비트랩 그리고 각종 장애물을 알아서 통과한다. 춘천대는 이렇게 군사분계선 북쪽의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북한 땅에 들어간 후 인민군 내무반을 박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북방한계선 북쪽 산에는 지뢰가 별로 없어 뛰어도 된다. 사진 촬영을 끝낸 춘천대는 곧 북방한계선에 도착해 잠복에 들어갔다. 춘천대가 완전 군장을 꾸렸을 때의 배낭 무게는 약 45㎏이다. 여기에는 각종 폭약과 첩보 수집장비, 비상식량 등이 들어 있다. 작전에 들어갈 때는 군말 없이 이 배낭을 지고 들어가지만 돌아 나올 때는 어떻게 해서든 배낭 무게를 줄이고 싶어진다. 북방한계선에서부터 남쪽은 남북한군이 밀집해 있는 지뢰 지대이므로 야음을 틈타 조심스럽게 전진해야 한다.

    춘천대는 이 날 다섯 번째로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한 땅에서 공작을 한 것이었다. 북방한계선을 넘지 않고 비무장지대 안에서 작전을 하고 나간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매번 작전에 들어갈 때는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에 긴장하지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횟수가 많아지자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쯤 폭약이 터진 인민군 부대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국군 소행으로 짐작은 하겠지만 섣불리 추적대를 보냈다간 또 다른 부비트랩에 걸릴 수도 있으니 법석만 떨 뿐 구체적인 작전은 돌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벌써 북방한계선에 도착한 우리는 귀신같이 비무장지대를 빠져 나간다’ 이런 생각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데 비무장지대 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 햇살이 밝아오는 오전 7시30분쯤이었다. 고개를 빼고 살펴보니 500m 전방쯤에 있는 인민군 GP에서 병사 10여 명이 부식을 수령하려는 듯, 지뢰가 없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이때까지 춘천대는 크레모어는 단 한 발도 사용하지 않은 채 짊어지고 있었다. 간이 커진 춘천대는 ‘남은 폭약을 갖고 가야 무겁기만 하니 다 쏘고 가자’고 합의하고, 앞에 오는 인민군 병사들은 크레모어로 사살하고 뒤쪽에 오는 인민군은 크레모어로 하체를 맞혀 쓰러뜨린 후 납치하기로 했다. 북방한계선 북쪽의 인민군 내무반이 박살나고 이어 비무장지대에서 크레모어가 터지고 인민군이 납치되면 휴전선의 전 인민군이 긴장해 이들의 생환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빨리 한 건 하고 돌아가 춘천 아리랑 홀(미군이 드나들던 맥주홀)에서 한잔 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편의대원들은 인민군 병사들이 한꺼번에 사격권에 들어오게 10m 간격으로 4대의 크레모어를 설치했다. 이어 3명은 크레모어의 인계선을 끌고 언덕에 올라가 잠복했다. 언덕 아래에는 사격 솜씨가 좋은 김씨와 홍민수씨(가명·자살)가 숨어 있다가 부상한 인민군을 납치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부상한 인민군을 납치할 때 언덕에 숨은 3인조는 엄호 사격을 맡기로 했다.

    잠시 후 인민군들이 사격권 안에 들어오자 엄청난 폭음이 터졌는데, 그 순간 김씨는 크레모어에서 나온 후폭풍으로 오른팔에 화상을 입었다. 폭음과 함께 김씨가 본 것은 온통 누런 세상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3인조는 4대의 크레모어를 차례로 누르지 않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동시에 눌렀던 것이다. 그로 인해 흙먼지가 일어 잠시 후 세상이 황톳빛으로 변한 가운데 폭풍에 밀려 하늘로 치솟았던 나뭇가지와 칡덩굴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어 낙엽들이 팔랑거리며 내려왔는데, 한쪽에서는 후폭풍의 불꽃이 낙엽에 옮겨 붙은 듯 허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춘천대는 훈련중에 여러 차례 크레모어를 터뜨려 봤기 때문에 이때 나오는 폭풍과 폭음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크레모어를 터뜨릴 때는 물안경을 써 눈을 보호하고 귓구멍에는 솜뭉치를 넣어 고막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병장에서 하는 훈련과 낙엽과 나무로 뒤덮인 현장에서 벌이는 실전은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네 발을 동시에 터뜨렸으니, 한 발씩 터뜨리는 훈련 때보다 폭풍과 폭음의 강도가 훨씬 강했다.

    폭음이 들리는 순간에 김씨가 쓰고 있던 물안경과 귀마개는 날아가버렸고, 김씨의 귀는 ‘먹통’이 돼버렸다. 김씨는 “크레모어 넉 대가 동시에 터지자 지진이라도 난 듯 옆산이 우르르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먼지가 걷히자 이곳저곳에서 뒹굴며 신음하는 인민군 병사들이 보였다. 김씨와 홍씨는 동물적으로 뛰쳐나가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김씨는 “온 세상이 고요한 가운데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총(無聲銃)을 쏘는 느낌이었다. 소리 없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확인사살을 하던 도중 김씨는 순간적으로 뭔가 햇빛에 반짝 하는 것을 느끼며 그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그 순간 왼팔에 큰 충격을 느꼈다. 그런데도 그는 반짝이는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햇빛을 반사한 것은 폭음에 기절했던 인민군이 깨어나 김씨를 향해 겨눈 총열이었다. 인민군은 정확히 김씨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김씨가 몸을 ‘획’ 돌리는 바람에 심장이 아니라 왼쪽 팔을 맞힌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총은 인민군을 즉사시켰다.

    이러는 사이 언덕에 숨어 있던 3인조는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가려 엄호사격을 전혀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납치를 포기했다. 얼마 후 홍민수는 납치를 포기하고 ‘도망가자’는 뜻으로 김씨의 팔을 잡았다 놓고, 먼저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김씨는 살아서 끙끙대는 인민군을 전부 확인사살하고, 인민군이 갖고 있던 무기를 낚아 챈 후 홍씨를 따라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가 달려간 언덕에는 지난 여름 폭우 때 일어난 사태로 인해 황토가 드러나 있었다. 이 황토 언덕을 기어오르다 미끄러진 김씨는 무심결에 왼팔로 나무뿌리를 잡았다. 그 순간 총에 맞은 왼팔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동시에 아픔이 밀려오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김씨의 말이다.

    “그때부터 왼팔을 쓸 수가 없었다. 왼팔이 마비되자 황토 언덕을 기어오르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나는 세 번이나 미끄러진 다음에야 겨우 몸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언덕을 기어오르자 먼저 올라갔던 3인조 중 한 명인 이철수(가명·자살)가 돌아와 부축해주었다. 그런데 이철수가 하는 말이 ‘한참을 가도 내가 오지 않아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미끄러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잠시 기절했던 것 같다.”

    필사적인 탈출

    김씨가 황토 언덕에 오를 때쯤 폭음에 놀란 인민군이 달려와 사격을 가했다.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지뢰지대여서 북한 GP에서 달려나온 인민군 병사들은 깊숙이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정조준을 위해 무릎쏴 자세로 사격을 가해왔다. 이때 김씨는 왼쪽 복부에 또 한 발을 맞고 쓰러졌다. 이철수도 오른손 검지가 날아가버렸다. 특수부대원들은 동료를 사지에 두고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상황이 다급했던지라 김씨는 이제는 죽었다 싶어, 이씨에게 자신의 총을 던져주며 “먼저 가라”고 했다. 총을 받아든 이철수씨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묵묵히 수풀 속으로 몸을 돌렸다.

    천만다행인 것은 지뢰지대여서 인민군이 수풀 속으로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두 번이나 총격을 받은 고통 때문에 김씨는 혼절했는데, 이때 그는 가족과 친구·동료와 즐겁게 지내던 때의 잔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김씨를 깨어나게 해준 것은 더 높이 올라온 가을 태양이었다. 햇볕이 뜨거워지자 총격을 받은 부위가 심하게 아파, 김씨는 깨어났다. 총상 부위에서 큰 고통을 느끼며 깨어나는 순간 김씨는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는데, 이때 먹통이 됐던 고막이 뚫렸다. 그제서야 “따콩” “따콩” “드르르륵” “꽝”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엄호를 맡았던 3인조 중 2명과 홍민수는 막 분계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김씨를 부축하다 뒤로 처진 이철수는 혼자 분계선을 넘어가다 이씨의 퇴각로를 예상하고 차단하러온 인민군에게 걸려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풀이 키높이만큼 자란 지뢰지대를 헤쳐가던 이씨는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유속이 빨라진 깊은 계곡에 빠졌다. 지뢰 때문에 빨리 따라오지 못하던 인민군도 이씨가 물에 빠지는 것은 목격했다. 그래서 이씨를 찾으려고 모든 병사를 풀어 계곡을 뒤지게 했다.

    한국군은 인민군이 이씨를 추적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인민군이 흩어지는 쪽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이러한 국군 초소를 향해 인민군 GP는 제압 사격을 하고, 이에 맞서 국군도 인민군 GP 쪽으로 제압 사격을 가해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씨는 그제서야 ‘잘 하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교적 성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이용해 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갈대가 흔들렸다. 김씨가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사격을 멈췄던 인민군들은 김씨가 쓰러진 곳에서 풀숲이 흔들리자 다시 맹렬한 사격을 가해왔다.

    이런 와중에 김씨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미끄러졌는데 이때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버렸다. 부상과 탈진으로 지칠 대로 지친 김씨는 오랫동안 애를 써서 간신히 나뭇가지에 낀 발을 빼낼 수 있었다. 발이 빠지는 순간 그는 더 밑으로 미끄러졌는데 주위를 살펴보니 멧돼지 같은 짐승이 다녀서인지 풀이 죽어 있는 길이 보였다. 그는 이 길로 기어가면 풀숲이 흔들리지 않아 적의 사격을 받지 않고 분계선을 넘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열심히 기었다.

    6·25 이후 최대의 남북 교전

    얼마 후 이제는 분계선을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김씨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아뿔사! 남쪽이 아니라 군사분계선과 나란한 방향’으로 기어왔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GP에서 김씨를 발견하고 또 사격을 가해왔다. 적이 사격을 가하건 말건 확실하게 남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김씨는 조금 기다가 몸을 일으켜 제대로 남쪽으로 가고 있는지 살피고 풀숲으로 푹 쓰러지고, 잠시 기다가 또 일어나 살피고 푹 쓰러지며 남쪽으로 접근했다.

    인민군 쪽에서는 총을 겨누고 있었던 듯 풀숲에서 김씨의 머리가 올라올 때마다 요란하게 사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용케도 김씨는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풀숲을 기는 도중 그는 지뢰를 발견하고 손으로 쓱 밀었는데 다행히 한 발도 터지지 않았다. 이 무렵 춘천대를 관리해온 첩보부대 공작과장은 GP에 들어와 포대경으로 과연 김씨가 분계선을 넘어올 수 있을지 초조히 지켜보고 있었다.

    탈진한 김씨는 나무등걸을 발견하고 몸을 기댔는데, 그때 풀숲 사이로 GP에 걸린 태극기가 보였다. 얼마나 보고 싶던 태극기인가. 그는 오른손으로 흰 러닝을 찢어 나뭇가지에 걸고 힘없이 흔들었다. 이것을 GP에 있던 공작과장이 보고 대기시켜 놓았던 다른 공작대원들에게 김씨 구출을 명령했다. 극적으로 이들에게 구출된 김씨는 아군 GP에 도착하는 순간 또 한 번 기절했다.

    얼마 후 그가 정신을 차리자 공작과장이 “이철수는 어떻게 됐나?”라고 물었다. 김씨는 “나보다 앞서 갔는데…”라는 말을 하고 또 혼절했다. 얼마 후 그는 지프에 실려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직 땅거미가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를 태운 지프는 남방한계선의 통문을 향해 질주했다. 그 순간 북한군이 포 두 발을 쐈으나 지프가 워낙 빨리 달려 맞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프가 하도 험하게 튀어올라 그는 큰 고통을 받았다.

    GOP 부대로 빠져 나온 지프는 그곳에 와 있던 경비행기로 김씨를 옮겨 실었다. 이때 김씨는 수많은 장성들이 나타나 그를 근심스럽게 지켜보는 것을 목격했다. 완전 군장을 한 보병들이 교통호에 포진해 있고, 전차와 장갑차까지 출동한 것을 발견했다. 김씨를 태운 경비행기는 춘천의 육군 병원에서 내려 일차 응급조치를 받게 한 후 다시 이륙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이곳에서 김씨는 현재 국군기무사령부가 들어 있는 서울 삼청동의 ‘수도육군병원’으로 호송되었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춘천대원 이철수는 물고기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깊은 계곡에 빠진 이씨는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다 어딘가에서 몸을 세웠다. 그는 잽싸게 갈대를 꺾어 입에 물고 강한 물살 때문에 흙이 쑥 패어 들어간 곳에 숨었다. 그곳에서 이씨는 갈대로 호흡을 하며 밤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인민군은 날이 저물 때까지 이씨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이씨를 괴롭힌 것은 차가운 물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닌 피라미떼였다.

    이씨는 적탄에 오른손 검지가 떨어져 나갔는데, 손가락이 떨어진 곳에서 자꾸 피가 솟았다. 그러자 피냄새를 맡은 피라미들이 달려들어 톡톡 건드는 바람에 이씨는 큰 고통을 받았다. 이씨는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저녁 9시쯤 물 밖으로 나와 혼자 아군 GP로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매일밤 군부대에서는 암구호(암호)가 바뀌었다. 암구호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군인지 적인지 식별하기 위한 암호다. 그날 밤의 암구호가 ‘대구청어’라면, 먼저 인기척을 발견한 사람이 ‘대구’를 외쳤을 때, 상대가 ‘청어’라고 대꾸하지 못하면 그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암구호도 모른 채 아군 GP를 찾아오면 총구멍이 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공작과장은 이씨가 살아올 것에 대비해 이씨 목소리를 아는 공작대원들을 배치했다. 인기척을 느낀 공작대원이 “누구냐”고 묻자 이철수는 “나야 나!” 하고 나타났다.

    특수공작대가 갖고 있는 불문율 중 하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동료를 낙오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료를 낙오시켰는데도 용서받은 공작대는 다시 적지에 들어갔을 때 적에게 투항하거나 반드시 와해된다. 그런 이유에서 동료를 낙오시킨 것은 크게 처벌한다. 먼저 분계선을 넘어온 3명은 이러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살아돌아온 이철수가 3명과 떨어지게 된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3명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이씨는 김씨가 누워 있는 병원으로 후송돼 함께 치료를 받았다. 그 후 김씨는 자신이 생환하던 날 벌어진 총격전이 휴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왜 이렇게 위험한 업무에 참여하게 됐을까.

    첩보부대 물색조와의 만남

    이야기는 그로부터 1년 전인 67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고등공민학교를 중퇴한 채로 놀고 있던 김씨(당시 19세)는 친구 2명과 함께 서울 서대문 로터리의 적십자 병원에 입원한 친구 어머니 문병을 갔다가 운명의 지프와 마주쳤다. 이 지프는 첩보부대 장교를 태우고 온 것이었다. 지프에서 내린 장교가 볼일을 보러 간 사이 김씨는 지프 운전병에게 말을 걸었다. 당시는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은 터라 중앙정보부의 힘이 매우 셌다.

    “끗발 센 데서 나온 차 같은데…, 중앙정보부 찹니까?”

    “아니다. 어디 소속인지는 알 것 없고…, 너희들 군대 갈 때 되지 않았니?”

    “그렇습니다. 내년쯤에 영장이 나올 것 같은데요.”

    “그럼 우리 부대 한번 지원해 볼래?”

    “그럴까요.”

    이런 수작을 하고 있는데 장교가 돌아왔다. 장교는 운전병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더니 세 사람을 길 건너편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세 사람의 신원을 적은 장교는 “1주일 후 이 다방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1주일 후 다시 만난 장교는 “신원조사 결과 자네들은 완벽하다. 우리 부대에 지원해도 좋다”고 입을 열었다. 세 청년이 “도대체 어떤 부대냐?”고 묻자, 장교는 “아주 특수한 부대로 일본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 국가를 위해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곳이다. 임무를 다 마치면 군대를 마친 것으로 해주는데, 장사밑천 700만원 정도는 마련해 줄 것이다. 원하면 경찰이나 특수한 수사기관에 특채되도록 해주겠다”고 대답했다.

    장교는 세 청년에게 각각 2만원과 함께 명함 크기의 신분 증명서를 내주었다. 신분 증명서에는 ‘이 사람은 체포 또는 구금할 수 없다’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장교는 세 사람에게 “1주일 후 서울 남영동의 시립노동복지회관 4층 강당으로 오라”고 했다. 1주일 후 회관 강당으로 가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청년 1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특히 부산 사투리를 쓰는 청년들이 많았는데 전부 김씨처럼 육군 첩보부대 물색조의 권유를 받고 온 것이었다. 이들 중에는 물론 건달 출신이 많았지만, 변호사 아들도 있었고 한국전력에 다니다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이곳에서 청년들은 신체검사를 받고 80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남산을 한 바퀴 돌아 강변도로를 달린 후 지금의 영등포구 양평동 해태제과 자리로 갔다. 그곳에는 ‘동북산업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민간복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간단한 환영식을 거친 후 80명은 머리를 박박 깎고 군복과 총을 지급받았다. 총은 은박지에 싸여 있는 신품이었다. 동북산업사에서 제식훈련과 기초사격 훈련을 받은 이들은 4주 후 수료식을 하고 다시 짐을 싸들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들이 간 곳은 지금 경부고속도로 판교 톨게이트에서 가까운 서울 서초구 원지동의 청계산이었다. 청계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한축산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김씨는 육군 첩보부대 출신을 ‘돼지’라고 하는 것은, 이들을 훈련시킨 청계산에 대한축산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이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6명씩 한 조가 돼 산 속에 흩어져 있는 안전가옥에 수용되었다. 이 날 이후 6명은 독도법·산악행군·돌연사격·지향사격·생식법(生食法)·비트 구축술 등 공작원으로 갖춰야 할 기술을 익혀갔다.

    그런데 훈련을 맡은 교관이나 조교는 전혀 강요를 하지 않았다. 교관이 이렇게 해봐라 하고 동기를 부여하면 6명이 스스로 강도 높은 목표를 정해 이를 달성하는 식이었다. 김씨는 “적지에 들어갔을 때 6명이 투지를 일으켜 사선을 돌파하려면 자율적으로 목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훈련 단계에서부터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선정하고 목표를 이루게 한 것 같다. 우리는 목표를 차츰 상향 조정하고 이를 달성해 나갔다”고 말했다.

    자율적인 훈련이지만 너무 강도가 세다 보니 탈영자가 속출했다. 김씨도 탈영을 시도했으나 청계산 외곽을 경비하는 첩보부대원들에 붙잡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조원이 발등을 크게 다쳤다. 한국전력에서 일하다 온, 김씨보다 6살이 많은 조원이었다. 이 상처로 인해 그는 더 이상 산악행군을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아 청계산을 빠져나갔다. 김씨는 그가 특수부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은 것으로 추정했다.

    1960년대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전 휴전선에서 남북한 군의 충돌이 적지 않았다. 남북한은 특수부대를 상대 측에 투입해 내무반을 파괴하거나 병사를 암살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이 나무꾼 복장을 하고 미 2사단이 지키는 문산 북방의 휴전선을 넘어와 문산 읍내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갔다” “인민군이 잠자던 국군 막사를 폭파하고 죽은 국군 병사들의 귀를 잘라갔다”는 소문이 떠돌던 시절이다.

    이런 소문은 국군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북한은 이를 노리고 거듭해서 특수공작대를 파견한 것이다. 이러한 공작의 클라이맥스가 강추위가 몰아치던 1968년 1월21일 터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이때 청계산 ‘대한축산연구소’에서 훈련을 받던 김씨 조는 급작스레 출동해, 북한산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후 김씨 조는 강원도 춘성군 ○면 ○○리 산속에 있는 안전가옥으로 이동했다.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실전배치된 것이다.

    김씨 조에는 조원 전체가 북한 지역에 들어가 북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특수 공작 임무가 부여되었다. 반면 다른 곳으로 흩어져간 조는 단독으로 북한에 들어가 첩보를 수집해오는 단독 수집 임무가 부여됐다고 한다. 김씨 조는 대한축산연구소 출신으로는 특수 공작을 처음 감행했기 때문에 ‘목장 1기’로 불리고 그 다음조는 ‘목장 2기’로 불렸다. 김씨와 함께 휴전 이후 최대 교전을 벌이게 한 이철수씨가 바로 목장 2기였다.

    모래장애물 통과법

    이씨는 김씨 조원 중 한 명이 체력이 약해 고민하다 면담을 거쳐 단독 수집조로 빠져 나간 후 결원을 메우려고 들어왔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전쟁기념관을 찾은 김씨는, 단독 수집조로 빠져나간 동기가 71년 전사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춘천대는 자율적으로 훈련하다 이따금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잠복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러다 68년 6월 드디어 김씨 조에 북한 지역으로 침투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처음 북한 땅에 들어간 김씨 조는 사진 촬영만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침투에서는 인민군 탄약고와 유류탱크에 폭약을 설치하고, 폭약이 터져 탄약고와 유류탱크가 폭발하는 장면을 찍고 돌아왔다. 세 번째 침투에서는 옥수수 수거 작업을 하는 인민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옥수수단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빠져나왔다. 인민군이 이 옥수숫단을 트럭에 실으려고 들어올렸을 때 부비트랩이 터졌음은 물론이다. 네 번째 때는 시끄럽게 대남방송을 쏟아내는 인민군 스피커를 향해 유탄발사기를 쏘고 돌아왔다.

    한국군이 남쪽 비무장지대에 북한 공작원 침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듯이 북한도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다. 이러한 장애물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지뢰지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주의가 필요하다. 북한 침투시 처음으로 만나는 장애물은 철조망이다. 철조망은 넘어서기 좋은 곳을 골라 간단히 우회 통과하면 된다.

    두 번째는 마른 나뭇가지를 쌓아 올린 녹색 장애물인데, 이 장애물을 잘못 건드리면 마른 나뭇가지들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녹색 장애물 부근에는 반드시 인민군 매복조가 있으므로 매우 주의해야 한다. 녹색 장애물도 건드리지 않고 통과하면 세 번째로 15m 폭으로 고운 모래를 깔아놓은 모래 장애물이 나온다. 이 모래 장애물은 절벽이나 강을 제외한 전구간에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우회할 방법이 없다. 김씨는 모래 장애물 통과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리 고운 모래라도 비를 맞으면 조금씩 단단해진다. 주의깊게 손바닥으로 두드려보면 모래가 단단하게 굳은 곳을 찾아낼 수가 있다. 이러한 곳을 골라 1m 앞쯤에 배낭을 멜빵이 하늘로 향한 자세가 되도록 올려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 동료의 배낭을 받아 다시 1m 앞에 같은 방법으로 놓는다. 이런 식으로 배낭을 징검다리처럼 깔아 놓고 건너가고, 마지막에 오는 사람은 배낭을 걷어 하나씩 앞으로 전해준다. 이런 방법을 쓰면 자국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모래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실 장애물이다. 실 장애물이란 국방색의 가느다란 끈을 사람 발목 높이쯤 되는 나무 사이에 묶어 놓은 것이다. 한밤중에 이 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예민한 공작원조차 실을 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무장지대에는 이 실을 끊을 수 있는 멧돼지도 있고 고라니도 있다. 실을 끊었을 때는 네 발 짐승이 끊은 양 위장한다. 두 발 짐승(사람)은 보폭과 보조가 일정한 편이지만, 네 발 짐승은 뛰었다 걸었다 보폭과 보조가 일정치 않은데다 가는 방향도 마구 바꾼다. 실을 끊었을 때는 네 발 짐승의 소행으로 보이게끔 불규칙하게 이곳 저곳에 있는 실을 함께 끊어 놓는다.

    마지막으로 고압선이 나오는데, 고압선을 통과할 때는 1m쯤 되는 호스 두 개를 사용한다. 호스를 갈라 아래 위쪽의 고압선에 덮어 씌운 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사람이 통과할 만큼 들어올리면 감전되지 않고 고압선을 통과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장애물을 통과가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목적지까지 접근해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68년 10월, 휴전 이후 최대의 남북 교전을 일으키며 살아 돌아온 김씨와 이씨는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병장으로 전역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온갖 작전을 수행하던 이들은 작전에서 해방되는 날 처음으로 군인이 되고 그 날로 전역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러한 신분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北, 울진·삼척 사태로 보복

    꽤 오랫동안 회자될 만한 두 사람의 무공은 약 보름 후 터진 울진·삼척사태에 덮여 잊혀져버렸다. 울진·삼척사태는 중대 규모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내려와 울진과 삼척 일대의 화전민촌을 습격하며 분탕질을 친 대형 유격전이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특전대와 해병대를 동원했다.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공비를 소탕하는 데는 거의 두 달이 소요되었다.

    당시 병상에 있었던 김씨는 육군 첩보부대 장교로부터 “너희가 북한에서 한 공작에 대한 보복인 모양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김씨는 1·2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침투하고, 북한은 김씨 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울진·삼척 사태를 일으키고…. 6·25전쟁 이후 남북 관계가 가장 긴장됐던 1968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미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납치된 것은 1·21사태 다음날이었고, 69년 4월15일에는 미군 첩보기 EC-121이 북한 청진 앞바다에서 북한의 미그-21기의 공격을 받아 격추되었다. 권투에서 홀딩을 한 채 주먹으로 상대의 뒷머리를 때리는 것은 반칙이다. 휴전선 비무장지대로 무장한 병력을 집어넣거나 상대 쪽으로 무장 병력을 집어넣는 것은 모두 정전협정 위반이다. 남북한은 휴전선에서 서로를 ‘홀딩’한 채 끊임없이 상대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일반인들은 1·21사태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사태, EC-121 격추사건 등에 시선을 뺏겨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조차 모르고 살았다.

    대북공작대의 뿌리는 6·25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10월 편성된 국방부 제4국은 대북공작과 한국군 내부로 침투한 북한 간첩을 잡던 곳이다. 그러나 국방부 4국은 49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국측의 요구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육군본부 정보국. 육본 정보국은 48년 10월에 터져나온 여순반란 사건에 관여한 군내 좌익분자를 척결하면서 위상을 굳혔다. 이때 명성을 떨친 이 바닥의 장교가 김창룡(金昌龍)씨였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군의 첩보 및 방첩 조직은 일시에 무너졌다. 이 시기 북한을 상대로 첩보 공작을 벌인 것은 미 극동군 산하 한국인 첩보부대 KLO였다. 49년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하며 ‘한국(Korea)에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를 두었는데 이것이 KLO다. KLO는 북한의 정보를 구하기 위해 이북에서 내려온 한국인 청년들을 고용해 대북 첩보원으로 활용했는데 이들을 가리켜 속칭 ‘켈로(KLO) 부대’라고 했다.

    KLO 부대는 활동지역과 활동무대에 따라 ‘고트(goat·염소)대’ 따위의 암호명이 붙은 분견대로 나뉘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한국군이 정보부대를 재건한 것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할 때인 1950년 10월21일로, 이 날 기무사의 전신인 육군 방첩대가 창설되었다. 1951년 1·4 후퇴로 다시 밀리면서 일단의 한국군 패잔병이 황해도 구월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구월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령도에 포진한 미군(당시는 KLO 부대 고트대가 주둔하고 있었다)의 지원을 받으며 유격전을 펼쳤다.

    구월산 유격대로 불린 이들은 53년 정전을 앞두고 백령도로 철수했는데 미군은 이들을 모아 ‘동키(donkey·당나귀) 부대’를 창설했다. 인천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동키부대는 곧 북한에 들어가는 첩보부대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이북에는 한국에서 투입한 고정간첩이 있었다.

    이창훈씨(70·가명)는 50년대 HID로도 불리던 육군 첩보대에서 장교로 대북 공작을 하던 사람이다. 속초에서 배를 이용해 원산 쪽으로 대북 공작대를 파견하는 일을 하던 그는,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을 경험했다. 속초 HID에서는 Q보트라고 하는 배를 이용해 공작대를 투입했다. Q보트가 북한 해안 가까이 가면 Q보트에 붙어 있던 VP배를 내리고 이 배에 인민군이나 이북 어민 복장을 한 공작원을 태워 북한 해안에 상륙시키는 것이다.

    그 날 흥남에 있는 에이전트(고정간첩)가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와 선박대장 ㅂ소령이 지휘하는 Q보트가 출항했다. ㅂ소령은 해안에서 7㎞쯤 떨어진 지점에서 Q보트를 세워 VP를 내리고 ㄱ중위가 지휘하는 공작원을 옮겨 태웠다. 공작 세계의 불문율 중 하나는 계급의 고하에 관계없이 공작대장이 선박대장보다 높다는 점이다. 선박대장 ㅂ소령이 배를 대고 뺄 때는 반드시 공작대장인 ㄱ중위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속초 HID의 작전 실수

    공작대원들이 VP로 옮겨탈 때가 Q보트에 탄 사람들로서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사지로 들어가는 공작원들이 마음을 바꿔 총부리를 돌려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VP로 옮겨타는 공작원의 총에 꽂아주는 탄창의 맨 위 총알은, 격발되지 않도록 항상 거꾸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갖고 내리는 총의 방아쇠 부분은 실로 묶어 두었다. 공작원이 탄창을 빼 총알을 바로 넣고, 방아쇠의 실을 풀어야 총을 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공작대원을 태운 VP가 막 출발할 무렵 북한 쪽에서 함정이 나타나 사격을 가해왔다. 우리가 심어 놓은 에이전트가 북한 쪽에 붙어 배신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Q보트는 반드시 VP를 구해 함께 도주해야 하는데, ㅂ소령은 그냥 Q보트를 몰고 달아나버렸다. 그날 밤 VP는 용케 이북의 추적을 따돌리고 속초로 돌아왔다. Q보트가 그냥 달아난 것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ㄱ중위는 도착하는 즉시 ㅂ소령의 숙소를 찾아가 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ㅂ소령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몸을 피한 다음이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대북 첩보부대에서 부대원끼리 갈등을 빚어 사고가 일어나고, 또 첩보부대원들이 술집에서 행패를 부린 이야기는 숱하게 전해온다. 김씨가 활동하던 60년대 후반의 첩보부대도 그랬을까. 김씨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우리가 GP에 들어가면 수색대 병사들은 안절부절못한다. 초소장은 연신 연대로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대로 원칙이 있었다. 즉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다음에는 꼭 죽더라’는 징크스 같은 것이 있었다. 춘천대에서 자율적으로 훈련할 때도 공작과장은 ‘XX대 애들이 ○○에서 술을 마시고 깽판을 쳤는데, 작전에 들어가서 다 죽었다더라’라는 말을 해 이런 원칙을 지키도록 유도했고 또 우리는 그것을 따랐다. GP에 들어갈 때 탄창에 총알을 거꾸로 넣은 적도 없고, 방아쇠를 묶어 놓은 적도 없다. 우리는 너무 어렸고 또 살고 싶었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이유

    비교적 괜찮은 사람들로 구성되던 대북 공작부대의 물이 흐려진 것은 70년대 들어서다. 이때부터는 군에 들어올 나이의 비교적 순수한 젊은이를 뽑지 않고, 군에서 사고를 쳐 ‘남한산성’으로 불리던 군 형무소에 수감된 자들을 대북 첩보부대 요원으로 뽑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실미도 부대였다. 실미도 부대는 공군 부대가 경계 근무만 섰을 뿐 실제로는 육군 첩보대 산하의 분견대였다. 당시 해군과 공군은 대북 첩보부대를 운영하지 않았다.

    첩보부대 요원들의 자질이 떨어지자 덩달아 이들에 대한 후생도 나빠졌다. 비인간적인 대우에 혹독한 훈련이 겹치자, 그렇지 않아도 거친 이들이 공군 경계 병력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빠져나왔다. 버스를 탈취해 서울 노량진까지 들어온 이들이 진압부대에 걸려 몰사한 것이 1971년 8월23일 발생한 실미도 사건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남북 관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특수공작대를 보내 상대를 가격하던 남북한은 전쟁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특수공작대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고민하다, 74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를 자제하기로 타협했다. 남한의 이후락(李厚洛)과 북한의 김영주(金英柱)가 발표한 이 공동성명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제2항인데, 2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 도발을 하지 않으며…’ 남북 양쪽은 거듭되는 보복전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공동성명 이후 한국은 정전협정 위반인 북한 공격을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들어서는 대북 공작대 파견을 아예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했더라도 그 규모가 훨씬 축소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80년대 들어 북한에 들어가 테러와 폭파 납치 등 특수공작을 했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데서 간접 확인된다. 여기에는 남북한의 거듭된 정전협정 위반에 불안을 느낀 미국이 한국을 강력히 단속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은 미국이 찍어오는 항공사진과 통신감청 자료, 그리고 증가 일로에 있었던 북한 귀순자를 중심으로 대북 첩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북한은 계속해서 과거처럼 정접협정을 위반하는 방법으로 첩보를 수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78년 10월 일어난 ‘광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충남 홍천군 광천읍으로 상륙한 인민군 특수부대원이 주민 신고로 쫓기게 되자 예비군으로 변장하는 등 갖가지 위장술로 군경 방어선을 뚫고 김포반도에까지 올라온 다음 한강 하구를 건너 북한으로 돌아간 사건이다.

    이들이 김포까지 올라온 것이 알려졌을 때 국군은 10m 간격으로 병력을 배치해 전 김포 지역을 훑었으나 비트를 파고들어간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이들이 쓴 일기를 발견했다. 이 일기는 이들이 북한에 돌아간 후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데 이 일기에는 광천에 상륙한 후 어떻게 변장을 해 국군 방어망을 뚫었는지 소상히 기록돼 있었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96년 9월18일 강릉에서는 북한 잠수함이 좌초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북한은 북한 해군 소속의 잠수함이 통상적인 작전을 수행하다 조류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가 좌초했다고 주장했으나, 이 잠수함은 한국 정탐을 목적으로 내려온 것이었다(그러나 당시 소탕작전을 벌였던 합참과 국방부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첩보 세계에서는 상대에 대한 우리쪽의 분석 능력을 숨기기 위해 분석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러한 증거는 생포한 이광수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다. 소식통에 따르면 경찰에 검거돼 합심조로 넘겨져 조사를 받은 이광수는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고 한다. 합심조의 조사를 받을 때 이광수는 잠수함 승조원이라고 진술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혀 뜻밖의 자료로 확인되었다.

    50년대 한국이 북파 공작원을 보내며 그들이 총부리를 반대로 돌릴까 두려워했듯이 북한 또한 남쪽으로 보낸 공작원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남한에 상륙하지 않고 상륙했다고 허위 보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작원들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는지 체크하는 장비를 설치했는데 그것이 바로 감시 카메라다.

    이 잠수함은 북한 해군이 아니라 대남 공작부대를 내려보내는 인민무력성 정찰국 소속이었다. 그래서 잠수함이 잠수한 상태에서 공작원이 물 속으로 나갈 수 있는 특수한 출입구가 설치돼 있었다. 이 출입구에는 과연 공작원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지를 촬영하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잠수함이 좌초한 후 인민군은 배 내부를 파괴하고 불을 질렀지만 용케도 이 카메라와 카메라에 들어 있는 필름은 파괴되지 않았다.

    이를 분석한 합심조는 필름에 잠수복 차림의 이광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수복 차림의 이광수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잠수함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추궁하자, 이광수는 잠수함을 운영하는 승조원이 아니라 공작원을 육지로 상륙시키는 안내원이라고 실토했다. 잠수함이 좌초하기 전에 이광수는 공작원을 데리고 한국 해안에 상륙했다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공작원을 태우러 갔다가 그만 잠수함이 바위에 걸려 좌초한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광수는 과거 남한의 다른 곳에도 공작원을 상륙시킨 적이 있었다. 98년 12월 남해 여수 앞바다에서는 북한 노동당의 지휘를 받는 반잠수정이 상륙해, 고정간첩을 태우고 빠져나가다 해군 함정에 걸려 격침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소식통에 따르면 전향한 이후 이광수는 반잠수정 격침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곳은 북한에서 특수 공작대를 상륙시키는 중요한 상륙지점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제보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인공위성 발사를 요구한 이유

    이러한 사실들은 적어도 96년 이전에는 북한의 인민군 정찰국이 특수공작부대를 한국에 파견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폭파와 테러 등은 하지 않고 정보 수집에 주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첩보위성 사진 덕분에 아예 대북 공작부대를 보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하지 않는데 이북은 정보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정전협정을 위반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북한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미국에 제시했다. 한 북한 전문가의 분석이다.

    “최근 미국과의 미사일 협상에서 북한은 미국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주면 미사일 발사를 중지하겠다고 제의했다. 첩보위성은 덩치가 크기 때문에 이를 우주 공간으로 쏘아 올리려면 추력이 강한 로켓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이 개발한 대포동 로켓은 이러한 위성을 쏘아 올릴 추력이 없다. 농구공만한 크기의 광명성 위성을 겨우 쏘아 올릴 추력을 낼 뿐이다.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 상당기간이 지나도 북한의 과학기술로는 첩보위성을 쏘아 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미사일 발사와 수출을 계속하겠다고 위협해 미국으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첩보위성을 쏘아 올리게 하려는 것이다.”

    남북 첩보전쟁에는 남북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국가 이익이 깔려 있다. 이 과정에 희생되는 것은 공작원들이다. 80명이던 목장 1기생 중 현재 생존이 확인된 사람은 20여명이다. 북한에 들어갔다가 죽거나 북한으로 귀순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도 적잖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뜻밖의 냉대에 부딪혀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김씨와 함께 사선을 넘은 이철수·홍민수씨가 그런 경우다. 김씨의 말이다.

    “내가 사는 곳 부근에서 살인이나 강도 같은 강력 사건이 일어나면 관할지역 형사들이 가장 먼저 내게 달려왔다. 이들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며 알리바이가 성립될 때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 반복될 때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겼다. 그러나 세 번 이상 반복되자 ‘나를 뭘로 보는가’ 싶어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구느냐’고 박차고 일어나면, 10여명의 형사가 에워쌌다. 개중에는 권총을 뽑아드는 형사도 있었다. 그들은 나를 살인 병기쯤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더러 형사들로부터 맞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생활에 서툴러 사회 적응이 쉽지 않았는데, 강력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형사들이 달려와 괴롭히니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추측하건대 과거부터 우리를 관리해온 ○○부대에서 우리 신상에 관한 자료를 경찰에 넘겨준 것 같다.”

    왕따 당하는 공작원 출신

    이런 일이 반복되자 직장에서도 이들을 수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사선을 함께 넘은 이씨와 홍씨는 나만큼도 표현력이 없는 사내였다. 이들은 점점 더 사회로부터 소외되자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는 왜 북파공작원들이 시위를 벌이는지에 대해 뼈 있는 말을 던졌다.

    “이북은 공작원들에게 벤츠를 제공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훈장 하나와 사회의 냉대뿐이었다. 그래도 북한이니까 그렇지, 하고 참아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광주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 일일이 보상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민주화도 국가가 있어야 민주화가 되는 것 아닌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에게는 덜렁 훈장 하나만 주고,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에게는 큰 보상비를 주는 것을 보고 나는 크게 실망했다.

    사회의 냉대 속에서 상당수 북파 공작원들은 정신질환으로 고생을 한다. 나도 철없던 시절에 저지른 인민군 사살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한참 정신적으로 지쳐 있을 때면 마지막 침투 때 확인사살을 한 인민군들이 도끼와 낫을 들고 내게 덤벼드는 꿈을 꾸곤 했다. 이러한 나를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주었는가.

    내가 총상을 입었을 때 왜 병장으로 전역시켰는지를 이제서야 알았다. 군인은 국가의 명령을 받고 근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상을 입거나 전사를 해도 약간의 보훈 지원이 나오는 것 외에는 다른 지원이 없다. 그러나 민간인이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북한에 들어갈 때 나는 분명히 민간인이었다.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을 냉대하는 국가가 잘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우리는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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