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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남북첩보전쟁 반세기

피의 보복전을 부른 공작의 세계

  • 이정훈 hoon@donga.com

피의 보복전을 부른 공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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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대는 훈련중에 여러 차례 크레모어를 터뜨려 봤기 때문에 이때 나오는 폭풍과 폭음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크레모어를 터뜨릴 때는 물안경을 써 눈을 보호하고 귓구멍에는 솜뭉치를 넣어 고막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병장에서 하는 훈련과 낙엽과 나무로 뒤덮인 현장에서 벌이는 실전은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네 발을 동시에 터뜨렸으니, 한 발씩 터뜨리는 훈련 때보다 폭풍과 폭음의 강도가 훨씬 강했다.

폭음이 들리는 순간에 김씨가 쓰고 있던 물안경과 귀마개는 날아가버렸고, 김씨의 귀는 ‘먹통’이 돼버렸다. 김씨는 “크레모어 넉 대가 동시에 터지자 지진이라도 난 듯 옆산이 우르르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먼지가 걷히자 이곳저곳에서 뒹굴며 신음하는 인민군 병사들이 보였다. 김씨와 홍씨는 동물적으로 뛰쳐나가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김씨는 “온 세상이 고요한 가운데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총(無聲銃)을 쏘는 느낌이었다. 소리 없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확인사살을 하던 도중 김씨는 순간적으로 뭔가 햇빛에 반짝 하는 것을 느끼며 그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그 순간 왼팔에 큰 충격을 느꼈다. 그런데도 그는 반짝이는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햇빛을 반사한 것은 폭음에 기절했던 인민군이 깨어나 김씨를 향해 겨눈 총열이었다. 인민군은 정확히 김씨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김씨가 몸을 ‘획’ 돌리는 바람에 심장이 아니라 왼쪽 팔을 맞힌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총은 인민군을 즉사시켰다.

이러는 사이 언덕에 숨어 있던 3인조는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가려 엄호사격을 전혀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납치를 포기했다. 얼마 후 홍민수는 납치를 포기하고 ‘도망가자’는 뜻으로 김씨의 팔을 잡았다 놓고, 먼저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김씨는 살아서 끙끙대는 인민군을 전부 확인사살하고, 인민군이 갖고 있던 무기를 낚아 챈 후 홍씨를 따라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가 달려간 언덕에는 지난 여름 폭우 때 일어난 사태로 인해 황토가 드러나 있었다. 이 황토 언덕을 기어오르다 미끄러진 김씨는 무심결에 왼팔로 나무뿌리를 잡았다. 그 순간 총에 맞은 왼팔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동시에 아픔이 밀려오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김씨의 말이다.

“그때부터 왼팔을 쓸 수가 없었다. 왼팔이 마비되자 황토 언덕을 기어오르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나는 세 번이나 미끄러진 다음에야 겨우 몸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언덕을 기어오르자 먼저 올라갔던 3인조 중 한 명인 이철수(가명·자살)가 돌아와 부축해주었다. 그런데 이철수가 하는 말이 ‘한참을 가도 내가 오지 않아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미끄러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잠시 기절했던 것 같다.”



필사적인 탈출

김씨가 황토 언덕에 오를 때쯤 폭음에 놀란 인민군이 달려와 사격을 가했다.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지뢰지대여서 북한 GP에서 달려나온 인민군 병사들은 깊숙이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정조준을 위해 무릎쏴 자세로 사격을 가해왔다. 이때 김씨는 왼쪽 복부에 또 한 발을 맞고 쓰러졌다. 이철수도 오른손 검지가 날아가버렸다. 특수부대원들은 동료를 사지에 두고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상황이 다급했던지라 김씨는 이제는 죽었다 싶어, 이씨에게 자신의 총을 던져주며 “먼저 가라”고 했다. 총을 받아든 이철수씨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묵묵히 수풀 속으로 몸을 돌렸다.

천만다행인 것은 지뢰지대여서 인민군이 수풀 속으로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두 번이나 총격을 받은 고통 때문에 김씨는 혼절했는데, 이때 그는 가족과 친구·동료와 즐겁게 지내던 때의 잔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김씨를 깨어나게 해준 것은 더 높이 올라온 가을 태양이었다. 햇볕이 뜨거워지자 총격을 받은 부위가 심하게 아파, 김씨는 깨어났다. 총상 부위에서 큰 고통을 느끼며 깨어나는 순간 김씨는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는데, 이때 먹통이 됐던 고막이 뚫렸다. 그제서야 “따콩” “따콩” “드르르륵” “꽝”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엄호를 맡았던 3인조 중 2명과 홍민수는 막 분계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김씨를 부축하다 뒤로 처진 이철수는 혼자 분계선을 넘어가다 이씨의 퇴각로를 예상하고 차단하러온 인민군에게 걸려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풀이 키높이만큼 자란 지뢰지대를 헤쳐가던 이씨는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유속이 빨라진 깊은 계곡에 빠졌다. 지뢰 때문에 빨리 따라오지 못하던 인민군도 이씨가 물에 빠지는 것은 목격했다. 그래서 이씨를 찾으려고 모든 병사를 풀어 계곡을 뒤지게 했다.

한국군은 인민군이 이씨를 추적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인민군이 흩어지는 쪽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이러한 국군 초소를 향해 인민군 GP는 제압 사격을 하고, 이에 맞서 국군도 인민군 GP 쪽으로 제압 사격을 가해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씨는 그제서야 ‘잘 하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교적 성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이용해 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갈대가 흔들렸다. 김씨가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사격을 멈췄던 인민군들은 김씨가 쓰러진 곳에서 풀숲이 흔들리자 다시 맹렬한 사격을 가해왔다.

이런 와중에 김씨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미끄러졌는데 이때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버렸다. 부상과 탈진으로 지칠 대로 지친 김씨는 오랫동안 애를 써서 간신히 나뭇가지에 낀 발을 빼낼 수 있었다. 발이 빠지는 순간 그는 더 밑으로 미끄러졌는데 주위를 살펴보니 멧돼지 같은 짐승이 다녀서인지 풀이 죽어 있는 길이 보였다. 그는 이 길로 기어가면 풀숲이 흔들리지 않아 적의 사격을 받지 않고 분계선을 넘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열심히 기었다.

6·25 이후 최대의 남북 교전

얼마 후 이제는 분계선을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김씨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아뿔사! 남쪽이 아니라 군사분계선과 나란한 방향’으로 기어왔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GP에서 김씨를 발견하고 또 사격을 가해왔다. 적이 사격을 가하건 말건 확실하게 남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김씨는 조금 기다가 몸을 일으켜 제대로 남쪽으로 가고 있는지 살피고 풀숲으로 푹 쓰러지고, 잠시 기다가 또 일어나 살피고 푹 쓰러지며 남쪽으로 접근했다.

인민군 쪽에서는 총을 겨누고 있었던 듯 풀숲에서 김씨의 머리가 올라올 때마다 요란하게 사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용케도 김씨는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풀숲을 기는 도중 그는 지뢰를 발견하고 손으로 쓱 밀었는데 다행히 한 발도 터지지 않았다. 이 무렵 춘천대를 관리해온 첩보부대 공작과장은 GP에 들어와 포대경으로 과연 김씨가 분계선을 넘어올 수 있을지 초조히 지켜보고 있었다.

탈진한 김씨는 나무등걸을 발견하고 몸을 기댔는데, 그때 풀숲 사이로 GP에 걸린 태극기가 보였다. 얼마나 보고 싶던 태극기인가. 그는 오른손으로 흰 러닝을 찢어 나뭇가지에 걸고 힘없이 흔들었다. 이것을 GP에 있던 공작과장이 보고 대기시켜 놓았던 다른 공작대원들에게 김씨 구출을 명령했다. 극적으로 이들에게 구출된 김씨는 아군 GP에 도착하는 순간 또 한 번 기절했다.

얼마 후 그가 정신을 차리자 공작과장이 “이철수는 어떻게 됐나?”라고 물었다. 김씨는 “나보다 앞서 갔는데…”라는 말을 하고 또 혼절했다. 얼마 후 그는 지프에 실려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직 땅거미가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를 태운 지프는 남방한계선의 통문을 향해 질주했다. 그 순간 북한군이 포 두 발을 쐈으나 지프가 워낙 빨리 달려 맞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프가 하도 험하게 튀어올라 그는 큰 고통을 받았다.

GOP 부대로 빠져 나온 지프는 그곳에 와 있던 경비행기로 김씨를 옮겨 실었다. 이때 김씨는 수많은 장성들이 나타나 그를 근심스럽게 지켜보는 것을 목격했다. 완전 군장을 한 보병들이 교통호에 포진해 있고, 전차와 장갑차까지 출동한 것을 발견했다. 김씨를 태운 경비행기는 춘천의 육군 병원에서 내려 일차 응급조치를 받게 한 후 다시 이륙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이곳에서 김씨는 현재 국군기무사령부가 들어 있는 서울 삼청동의 ‘수도육군병원’으로 호송되었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춘천대원 이철수는 물고기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깊은 계곡에 빠진 이씨는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다 어딘가에서 몸을 세웠다. 그는 잽싸게 갈대를 꺾어 입에 물고 강한 물살 때문에 흙이 쑥 패어 들어간 곳에 숨었다. 그곳에서 이씨는 갈대로 호흡을 하며 밤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인민군은 날이 저물 때까지 이씨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이씨를 괴롭힌 것은 차가운 물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닌 피라미떼였다.

이씨는 적탄에 오른손 검지가 떨어져 나갔는데, 손가락이 떨어진 곳에서 자꾸 피가 솟았다. 그러자 피냄새를 맡은 피라미들이 달려들어 톡톡 건드는 바람에 이씨는 큰 고통을 받았다. 이씨는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저녁 9시쯤 물 밖으로 나와 혼자 아군 GP로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매일밤 군부대에서는 암구호(암호)가 바뀌었다. 암구호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군인지 적인지 식별하기 위한 암호다. 그날 밤의 암구호가 ‘대구청어’라면, 먼저 인기척을 발견한 사람이 ‘대구’를 외쳤을 때, 상대가 ‘청어’라고 대꾸하지 못하면 그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암구호도 모른 채 아군 GP를 찾아오면 총구멍이 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공작과장은 이씨가 살아올 것에 대비해 이씨 목소리를 아는 공작대원들을 배치했다. 인기척을 느낀 공작대원이 “누구냐”고 묻자 이철수는 “나야 나!” 하고 나타났다.

특수공작대가 갖고 있는 불문율 중 하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동료를 낙오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료를 낙오시켰는데도 용서받은 공작대는 다시 적지에 들어갔을 때 적에게 투항하거나 반드시 와해된다. 그런 이유에서 동료를 낙오시킨 것은 크게 처벌한다. 먼저 분계선을 넘어온 3명은 이러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살아돌아온 이철수가 3명과 떨어지게 된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3명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이씨는 김씨가 누워 있는 병원으로 후송돼 함께 치료를 받았다. 그 후 김씨는 자신이 생환하던 날 벌어진 총격전이 휴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왜 이렇게 위험한 업무에 참여하게 됐을까.

첩보부대 물색조와의 만남

이야기는 그로부터 1년 전인 67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고등공민학교를 중퇴한 채로 놀고 있던 김씨(당시 19세)는 친구 2명과 함께 서울 서대문 로터리의 적십자 병원에 입원한 친구 어머니 문병을 갔다가 운명의 지프와 마주쳤다. 이 지프는 첩보부대 장교를 태우고 온 것이었다. 지프에서 내린 장교가 볼일을 보러 간 사이 김씨는 지프 운전병에게 말을 걸었다. 당시는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은 터라 중앙정보부의 힘이 매우 셌다.

“끗발 센 데서 나온 차 같은데…, 중앙정보부 찹니까?”

“아니다. 어디 소속인지는 알 것 없고…, 너희들 군대 갈 때 되지 않았니?”

“그렇습니다. 내년쯤에 영장이 나올 것 같은데요.”

“그럼 우리 부대 한번 지원해 볼래?”

“그럴까요.”

이런 수작을 하고 있는데 장교가 돌아왔다. 장교는 운전병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더니 세 사람을 길 건너편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세 사람의 신원을 적은 장교는 “1주일 후 이 다방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1주일 후 다시 만난 장교는 “신원조사 결과 자네들은 완벽하다. 우리 부대에 지원해도 좋다”고 입을 열었다. 세 청년이 “도대체 어떤 부대냐?”고 묻자, 장교는 “아주 특수한 부대로 일본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 국가를 위해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곳이다. 임무를 다 마치면 군대를 마친 것으로 해주는데, 장사밑천 700만원 정도는 마련해 줄 것이다. 원하면 경찰이나 특수한 수사기관에 특채되도록 해주겠다”고 대답했다.

장교는 세 청년에게 각각 2만원과 함께 명함 크기의 신분 증명서를 내주었다. 신분 증명서에는 ‘이 사람은 체포 또는 구금할 수 없다’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장교는 세 사람에게 “1주일 후 서울 남영동의 시립노동복지회관 4층 강당으로 오라”고 했다. 1주일 후 회관 강당으로 가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청년 1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특히 부산 사투리를 쓰는 청년들이 많았는데 전부 김씨처럼 육군 첩보부대 물색조의 권유를 받고 온 것이었다. 이들 중에는 물론 건달 출신이 많았지만, 변호사 아들도 있었고 한국전력에 다니다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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