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서울대 입시 우등생 줄세워 뽑지 않겠다”

  •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5-05-11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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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 입시, 그중에서도 서울대 입시를 확 뜯어고쳐야 대학도 살고 중·고교도 산다. 그래서 서울대 입시는 ‘수학능력 측정’과 ‘고교교육 정상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노려야 한다. 취임 2년을 맞은 서울대 이기준 총장으로부터 입시개혁 방향과 서울대의 21세기 비전을 들어봤다.
    서울대학교 총장에게는 대학의 살림을 꾸리고 연구활동을 진작하는 본연의 임무 못지않게 신경써야 될 일이 또 하나 있다. 신입생 선발이 그것이다. 명색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국립대 총장이 ‘가중치’는 어떻고, 수능 소수점 이하 반올림 처리는 어떻고 하는, 별별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일일이 보고받고 고민하고 결재해야 한다는 건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서울대가 신입생을 어떻게 뽑느냐는 것은 대입 수험생들은 물론, 자녀를 둔 모든 학부모에게 지대한 관심사다. 서울대가 해마다 어떤 입시방안을 내놓느냐에 따라 다른 대학들의 입시방안이 춤을 추고, 중·고등학교의 교실 풍경이 달라진다. 우리 중·고등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것은 교육당국이 정한 교과과정이 아니라 서울대 입시정책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니 서울대 총장이 어찌 이런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12월13일 오후 서울대 총장실을 찾았을 때 이기준 총장(李基俊·63)은 예상대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지난 11월 취임 2주년을 맞은 이총장은 12월 말에 발표할 2002학년도 신입생 선발방안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했다. 총장실 옆방에서는 보직교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중이었다. 이날은 마침 2001학년도 서울대 특차모집 원서접수 마감일이어서 학교 전체가 어수선했다.

    “입시철이라 바쁘시겠다”고 인사를 건네자 이총장은 “이 자리는 안 바쁜 날이 없다. 바쁜 것을 즐기는 수밖에 없다”고 받았다.





    교육정상화 유도하는 입시로

    ─이번 수능의 변별력이 낮아져 대학들이 난감해 하고 있더군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중에서는 우열을 가리기가 더욱 어려울 텐데, 서울대의 고민의 크겠습니다.

    “수능의 변별력이 낮아진 것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은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수능 준비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은 신입생을 선발해야 할 대학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게 됐다는 것이죠.

    이번처럼 변별력이 낮아진 경우에는 심도있는 면접과 구술시험, 고교장 추천 등 지금껏 준비해온 여러 단계의 사정을 거쳐 수험생의 기본적인 소양과 원하는 분야에서의 수학능력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대학은 수능이 변별기능을 못하는 이상 지필고사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육부는 이것이 사실상 본고사를 부활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서울대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교육부가 지필고사를 못 치르게 하니 저희도 당장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학력이 우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선택적으로 실시하는 심화된 수능시험(가칭 ‘수능Ⅱ’)을 도입해 현행 수능시험과 함께 실시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궁극적으로 신입생 선발은 대학에 맡겨야 합니다. 대학마다 다 사정이 다른데도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면 무리가 따르게 돼 있어요.”

    ─교육부가 대학에 신입생 선발 자율권을 선뜻 내주지 않는 것은 대학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고등학교를 입시지옥으로 만들지 않고 사교육비를 증가시키지 않으면서도 수학능력을 갖춘 학생을 제대로 뽑을 만한 능력이 우리 대학들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죠.

    “저는 교무처장이나 학장들에게 서울대 입시정책에 두 가지 목표를 분명히 해달라고 늘 강조합니다. 하나는 중·고등학교 교육이 정상화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을 대학에서 다시 복습하는 일이 없게끔 지원자가 대학에서 교육받을 준비가 돼 있는지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중·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한다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이것을 가능케 하는 선발방법을 찾기 위해 입시센터를 만들어 나름대로 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고교시절 화학반 활동도 했고 테니스반에서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미술반에 안 들어갔던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죠. 그런데 요즘 고교생들은 입시준비 때문에 그런 특별활동을 아예 못한다고 하더군요.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고교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도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도록 여러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사교육비에 대한 관점은 좀 다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공교육비 투자는 만족스러운 수준이 못 됐습니다. 그렇다보니 사교육비가 인력을 양성하는 데 크게 기여해온 게 사실이에요. 요즘에 와서 사교육이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단지 입시 준비만을 위한 게 아니라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과외라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고 봐요.

    따라서 무조건 사교육비를 줄이라고 하기보다는 사교육비가 정상적인 교육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넣거나 개인의 특기를 개발하는 데 올바로 사용되도록 이끄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교장 추천제 정착

    서울대는 2002학년도부터 큰 폭으로 바뀌는 입시제도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스탠포드대, UC버클리 등의 외국 명문대학을 벤치마킹하는 등 다각도의 연구를 거듭해왔다. UC버클리 부총장을 지낸 와트슨 래치 박사를 행정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입시제도를 비롯한 행정 전반에 국제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30명의 입시전문위원을 채용, 입시제도를 연구하고 관련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 하게 했다.

    ─2002학년도 이후에는 어떤 방법으로 신입생을 뽑을 계획입니까?

    “구체적인 내용은 12월 말까지 확정해 발표할 예정입니다만, 선발기준이 매우 다양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총점이 1점이라도 더 많은 학생이 들어왔지만, 앞으로는 총점은 좀 못 받았어도 어느 한 분야에 특기가 있는 학생들에게 길을 넓혀줄 생각입니다.

    특별전형에서는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및 경시대회 입상자, 특별한 능력을 가진 학생, 국가적으로 보호·육성해야 할 학문분야의 학생들도 뽑으려고 해요. 서울대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이니 만큼 농어촌 고교 출신 학생들도 배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2000학년도의 경우 개교 이래 처음으로 서울대 입학생을 배출한 고등학교가 90개나 됐어요.

    또한 균형잡힌 사회인으로 성장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려면 세계 시민으로서 문화적 소양도 필요하고 여가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음악, 미술도 좀 알고 스포츠도 잘 하는 지원자에겐 특혜를 줘야 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저는 단체운동을 해본 지원자에게 어드밴티지를 주자고 주장했어요. 한국사람들은 ‘개인기’는 좋은데 팀워크엔 약합니다. 그런데 팀워크를 기르기에 가장 좋은 것이 축구 같은 팀 스포츠거든요. 선발방법에 대해서는 이렇듯 매우 다양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서울대의 신입생 선발기준은 대학 차원이 아니라 학부, 학과 차원에서 마련되리라는 것입니다. 특정 분야를 공부하는 데 적합한 학생은 그 분야의 학부, 학과에서 가장 잘 가려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해서 50∼60개 학부가 서로 다른 기준으로 학생을 뽑게 되면 ‘족집게 과외’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겁니다.”

    하지만 다양한 재능을 가진 신입생을 선발한다고 해서 기본적인 수학능력이 없는 학생까지 받겠다는 뜻은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와야 할 것을 대학에서 다시 가르치는 낭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서울대 교육을 개혁하는 첩경은 1학년 교육을 뜯어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봄에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영어시험(TEPS)을 치르게 해서 500점이 안 되면 아예 강의를 못듣게 했어요. 700점 이상인 학생들은 20명씩 클래스를 나눠 원어민으로부터 고급영어 수업을 듣게 했습니다. 잘하는 학생은 더 잘하게 해줘야죠.

    신입생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 원칙을 적용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부를 지원하는 학생에겐 어느 수준 이상의 물리 점수를 요구해야 합니다. 물리학부를 지원하면서 점수를 더 따려고 물리시험 대신 생물시험을 치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설령 들어온다 해도 대학에서 이런 학생의 수준에 맞춰 ‘고등학교 물리’를 가르치게 되면 잘하는 학생이 피해를 볼 수 있으므로 불이익을 줘야 합니다. 고등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분들은 오랫동안 그 일만 계속해온 달인들입니다. 대학에서 그런 것까지 가르치려 들면 경쟁이 안 돼요.”

    ─서울대는 수년 전부터 일반전형은 물론, 다양한 특별전형을 통해 신입생을 선발해왔습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선발한 학생들이 입학한 뒤에는 수학능력 등에서 어떤 차이를 보였습니까?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일반전형으로 선발한 학생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교장 추천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일반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보다 학업성적이 더 좋았어요. 그래서 내년쯤에는 고교장 추천전형이 완전히 정착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일부 고교에서는 학생의 특기나 적성, 인성보다는 성적 위주로 추천서를 써주는 바람에 추천서의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서로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어요. 따지고 보면 단 한번 치른 수능 성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도 공정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서울대가 이제는 성적순으로 줄 세워놓고 앞에서부터 뽑는 일은 않겠다는 것입니다. 특기가 있고 성실해서 고교장이 추천했으면 믿고 뽑아야죠.”

    외고 학생들은 자신이 택한 과의 외국어를 ‘전공어’로 공부한다. ‘제1외국어’로는 보통 영어를 선택한다. 또한 ‘제2외국어’ 하나를 골라 1년 동안 공부해야 한다. 가령 중국어과 학생의 경우 중국어를 전공어로, 영어를 제1외국어로, 그리고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 하나를 제2외국어로 공부하는 것이다. 학습목표대로라면 외고 학생들은 졸업 무렵에 전공어와 영어는 ‘능숙’하게, 제2외국어는 ‘생활회화 수준’으로 최소한 3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외고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웬만한 대학생들보다 낫다고 한다. 최근 국내 한 대학과 학술교류차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의 한 대학 카운슬러는 모 외고를 둘러보고 나서 “외고 학생들의 영어 질문수준이나 회화능력이 어제 만났던 대학생들을 능가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부 외고는 토플점수가 일정 기준에 미달하면 학년 진급시 불이익을 주기도 하는데, 대원외고의 경우 1학년은 450점, 2학년은 500점, 3학년은 550점의 하한선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학생은 드물다고 한다. 토플, 토익 만점자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대원외고의 경우 2000년에만 6명의 학생이 토플에서 만점을 받았다.

    그러나 외고가 순풍만 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교육현장이 교육부의 대입정책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외고는 특히 이런 ‘바람’을 많이 탄다. 문제는 고교 내신성적.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일반계 고교에서 상위권에 들 수 있는 실력을 가진 학생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다. 불과 0.1점 차이로 합격과 불합격의 명암이 갈리는 대학입시에서 내신이 불리하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요즘처럼 수능의 변별력이 낮아진 상황에선 내신이 외고 지원을 꺼리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외고 설립 초기의 대학입시에서는 외고생에게 특수목적고 학생이라는 이유로 비교내신제를 적용했다. 외고생의 경우 일반고교생처럼 고교 재학시 석차에 따른 상대평가 내신을 적용하지 않고 수능에서 얻은 점수대별로 등급을 달리하는 평균 내신성적을 적용한 것. 이 때문에 외고는 교육여건이 뛰어난 것은 물론 내신까지 유리해져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특수목적고 학생에게 비교내신제를 적용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이 제도는 폐지됐고 이에 따라 특목고 학생들은 커다란 불이익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등교거부와 항의시위가 잇따르는가 하면 자퇴하는 학생들도 늘어났다. 차라리 외고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치러 내신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매년 7월에 실시되는 검정고시에 응시하려면 적어도 시험 6개월 전에 학교를 떠나야 한다. 그래서 외고와 과학고 2학년 학생의 12월은 자퇴서를 앞에 놓고 망설이기를 거듭하는 시기가 된다. 한영외고의 경우 97년에 비교내신제가 폐지되면서 100명이었던 일본어반 학생들이 졸업 때는 60명으로 줄었다. 서울의 6개 외고 입시 경쟁률도 97학년도의 4.60대 1에서 98학년도에는 1.79대 1로 뚝 떨어졌다.

    ‘대학원 중심대학’으론 한계

    어떤 방법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든 서울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집단의 일원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을 거친 수재들을 모아놓은 서울대의 국제경쟁력은 아직도 기대 밖이다.

    99년 서울대는 컨설팅그룹 매킨지에 대학 각 부문의 ‘정밀진단’을 의뢰했다. 매킨지는 나름의 기준으로 서울대의 연구업적 부문을 평가한 결과 서울대가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평균수준 이상의 논문을 낸 비율이 20%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대가 벤치마킹하고 있는 스탠포드대 UC버클리 하버드대 미시간대 위스콘신대의 경우 그 비율은 80∼90%였다. 이에 대해 이총장은 “서울대의 경우 한국어로 발표하는 논문이 많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30% 이상은 될 것으로 본다”며 “앞으로는 영어로 훌륭한 논문을 많이 쓰도록 독려하겠다”고 밝혔다.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인 국제 과학논문 인용색인(SCI)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99년 서울대가 SCI에 등재된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수는 세계 대학 중 73위였다. 97년에 126위, 98년에 94위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성장이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더욱이 논문수에서는 73위를 기록했지만, 논문의 질을 따지는 기준으로 활용되는 피인용 빈도에서는 순위가 한참 아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총장은 “우수한 교수들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3년 안에 세계 일류 대학으로 인정받는 50위권 이내에 진입하겠다”고 자신했다.

    “서울대 학과나 교수 중에는 이미 세계 수준에 올라 있는 이가 많아요. 예를 들어 물리학부 교수들의 1인당 연구업적은 미국 대학 물리학과 중 1, 2위를 다투는 스탠포드대 물리학부보다 훨씬 낫습니다. 다만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32명인데 스탠포드는 43명이고, 스탠포드 물리학과 교수 중에 2명이 노벨상 수상자라 학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우리보다 클 뿐이죠.

    또한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들의 1인당 연구업적은 미국 대학 중 4위인 MIT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생명복제 분야의 황우석 교수 같은 분은 세계적으로도 첫손에 꼽히죠. 조금만 더 밀어주면 두각을 나타낼 분야가 수두룩합니다.”

    서울대가 국제경쟁력을 갖추려면 학부과정에서부터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백화점 학과’ 체제를 지양하고 대학원 중심의 연구중심 대학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는 기형적인 서울대 입시 열기를 잠재워 고교교육의 정상화를 이루는 데도 도움을 줄 것으로 전망됐다. 서울대도 이런 견해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10월 서울대가 작성한 ‘뉴 밀레니엄 비전과 전략’이라는 문건에는 “‘대학원 중심대학’만으로는 세계적 수준의 종합연구대학으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지금의 ‘백화점 학과’들을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총장에게 그 사정을 물었다.

    “그동안 ‘대학원 중심대학’이니 ‘연구 중심대학’이니 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만,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던 개념이었어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카네기위원회의 대학 분류에 따르면 서울대는 ‘세계 수준의 종합연구대학(World Class Comprehensive Research University)’을 지향합니다. 연구대학이란 대학원만 있는 대학이 아니에요. 학사·석사·박사코스에서 기초과정과 응용과정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세계 50위 안에 드는 대학은 모두 이런 종합연구대학입니다. 그동안 매킨지의 자문도 받고 외국의 전·현직 총장들과도 여러 차례 논의하면서 한국에도 이런 대학이 1∼2개는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번에 뉴 밀레니엄 비전을 설정하면서 서울대가 이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제 내부적으로 웬만큼 공감대가 형성됐어요.”

    기회는 여러 토끼에게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한다면 더더욱 학과 통·폐합, 학부 축소 등의 구조조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난 10월 열린 국회 교육위의 서울대 국정감사에선 “사립대학과 중복되는 학과는 폐지하고 일부 학과는 프랑스처럼 별도 대학으로 분화시켜 특성화, 전문화해야 한다”는 발전적 해체론까지 나오던데요.

    “국감 당시 서울대가 모든 학과를 다 가져가고 학사과정도 줄이지 않는다고 지적됐지만, 실제로는 99년부터 이미 학사과정 정원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까지 무려 25%를 줄이게 됩니다. 이건 사립대학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학사과정을 축소하는 대신 대학원과정을 확충해 대학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인데, 이게 홍보가 잘 안됐어요.

    학과 통·폐합 문제를 거론하셨는데, 물론 서울대라고 모든 분야에서 다 경쟁력이 있을 수는 없겠죠. 학교당국으로선 경쟁력이 있는 분야를 계속 지원해서 더 잘 할 수 있게 하면 됩니다. 영세하고 경쟁력없는 분야는 그냥 내버려두면 저절로 통합되게 돼 있어요.

    그걸 인위적으로 하려고 들면 부작용만 커집니다. 잘하는 곳을 밀어주면 되지, 못하는 곳과 자꾸 씨름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어쨌든 기회는 여러 마리 토끼에게 다 주고 나서 제대로 하는지 지켜보자는 겁니다.”

    기업 구조조정에서처럼 이른바 핵심역량(core competence)만 남기고 경쟁력없는 부문은 다 잘라내라는 논리를 모든 대학에 예외없이 요구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 인터뷰에 배석했던 서울대 민상기 기획실장(경영대 교수)은 이 대목에서 중국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베이징대의 경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까지는 인문대 공대 의대 농대 등을 모두 갖춘 종합대였다고 한다. 그러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대대적인 교육개혁을 단행하면서 구소련 모델을 받아들여 1952년 베이징대를 인문대로, 칭화(淸華)대를 공대로 개편했다. 이에 따라 베이징대에서 공대 농대 의대를 분리했고, 칭화대의 문학부와 이학부를 분리해 베이징대로, 농학부를 베이징농대로 흡수시켰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방식의 대학 전문화는 그 나라 에서는 좋은 대학들을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세계 유수의 대학들과 경쟁할 만큼 성장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 그래서 베이징대는 99년에 다시 의대를 통합했고 현재 공대를 새로 만들고 있으며, 칭화대도 70년대 말∼80년대 초에 이과계와 문과계를 복원한 데 이어 84년에는 사회과학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이미 50년 전에 중국이 실험했다가 실패한 소련 모델의 개념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모든 대학이 세계적인 대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미국의 위스콘신주에는 14개의 주립대가 있는데, 이들 모두가 종합대학으로 가려다 낭패를 봤어요. 그런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위스콘신 메디슨만 종합대로 가고 나머지는 다 전문화하기로 한 겁니다.

    우리나라도 대학 전부가 종합대학이 되려고 하는 게 문제지, 우리나라에 종합대학이 하나도 없어야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국가대표’ 격인 서울대까지 전문화하라는 것은 불합리한 주장이에요. 너희는 인문학을 잘하니까 인문대로 가라, 공학이 강하니까 공대로 가라고 하는 것은 포항공대 같은 규모의 특수한 대학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총장은 소모적인 종합대학 논란 대신 학문의 ‘퓨전화’에 초점을 맞춰달라고 주문했다.

    “이제는 ‘문어발’이냐 아니냐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서울대가 앞으로 검증받아야 할 부분은 종합대학에 걸맞은 시너지효과를 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학과가 50개든 100개든 이것들이 학문간, 학제간 시너지 효과없이 따로따로 간다면 ‘유니버시티’가 아니라 파편화된 ‘멀티버시티’에 불과합니다.

    가령 미국 카네기 멜론대의 공과대학과 예술대학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세계 최고 수준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 것이나, 독일 베를린자유대의 생명공학 화학 컴퓨터 약학계열이 힘을 합쳐 ‘생명정보의학(Bioinfomedics)’이라는 새로운 연구분야를 창출한 것처럼 학문의 퓨전화를 이뤄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서울대 어느 학과에 신입생이 들어와도 그 학과의 종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학과와 학과, 계열과 계열 사이의 벽이 창의력을 죽입니다.”

    ─서울대에 학문의 퓨전화 사례로 들 만한 게 있습니까?

    “전기공학부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어요. 전기공학과 전자공학과 제어계측공학과를 합쳐 한 지붕 아래로 넣었는데, 교수가 50여 명이나 되니 학문적으로 운신의 폭도 넓어졌고, 전공이 다른 교수나 대학원생들 간에 협조도 원활합니다. 특히 대학원생들은 서로 허물없는 친구처럼 어울려 함께 연구합니다. 교수 허락도 받지 않고 장비를 같이 쓰기도 하죠. 그러니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밖에요. 세 학과가 나뉘어 있을 때와 지금의 연구업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두뇌한국 21(BK 21) 사업을 계기로 자연대학의 생물분야 3개 학과가 한 학부로 뭉쳤는데, 여기에서도 몇 년 안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서울대의 여러 연구소들도 학문 퓨전화의 현장입니다. 예컨대 반도체연구소에서는 전기 전자 화공 재료 생물 등 다양한 전공 학생들이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국학 연구가 활발해지면 사학 국어학 고고학 분야는 물론, 조선시대 서책들의 뛰어난 지질을 연구하기 위해 공대 학생까지 참여할 수 있어요. 이런 종합연구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교수회의=동문회?

    ─학문의 퓨전화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서울대에는 그것 못지 않게 인력의 퓨전화도 시급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군요. 서울대의 ‘순혈통주의’가 도마에 오른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이를 깨트릴 의지가 좀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98년부터 2000년 2학기까지 채용한 교수 172명 중 95%인 163명이 서울대 출신이었습니다. ‘대학 교원을 신규 채용할 때 특정 대학의 학사학위 소지자가 채용인원의 3분의 2를 초과하지 않아야 된다’는 교육공무원 임용령이 적용된 99년 2학기 이후에도 신규 채용자 75명 중 무려 73명이 서울대 출신이었습니다.

    “하버드대의 총장을 지낸 엘리어트 같은 분은 ‘훌륭한 대학으로 성장하려면 학문적인 인브리딩(inbreeding·근친교배)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건 정말 문제가 많아요.

    그런데 인브리딩이라고 하면 대개 최종학위를 보는데, 최종학위로 따지자면 서울대에는 철저한 도제식 교육이 실시되는 의과대학 외에는 학문적 인브리딩이 없습니다. 학부는 서울대를 나왔어도 박사학위는 대부분 다른 대학에서 따오거든요. 이렇다 보니 누군가가 뭘 연구하다가 나가면 그 사람이 하던 연구가 중단되는 형편이에요. 아마 의과대학도 전문대학원이 되면 다른 대학 출신들이 많이 들어와서 인브리딩 현상이 줄어들 것입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학문적인 인브리딩은 없어도 대부분의 교수들이 서울대에서 학부를 마쳤기 때문에 교수회의가 마치 동문회 같다는 겁니다. 이런 분위기에선 선배가 한마디 하면 후배는 아무 소리도 못하게 되죠. 이래서야 어떻게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음 임용 때는 반드시 교육공무원 임용령에 따라 3분의 1을 다른 대학 학부 출신으로 뽑겠다고 학장들로부터 다짐을 받았습니다. 일부 학장들은 ‘실력이 나은데도 서울대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안 뽑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했지만, ‘서울대 안 나온 사람 중에도 우수한 사람이 많을 테니 그런 사람을 찾아보자’고 했어요.

    이제는 다들 수긍합니다. 몇 년 안에 사정이 많이 달라질 겁니다. 99년 2학기부터는 외국인도 교수로 뽑을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어요. 한국말도 못하는 서울대 교수가 나올 판인데, 서울대 학부 안 나왔다고 서울대 교수가 못 된대서야 얘기가 안 되죠.”

    ─각종 교육예산이 서울대에 몰리는 데 대해서도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BK 21 사업에서도 과학기술 분야 예산의 58%, 교육개혁 지원비의 64%가 서울대에 지원돼 다른 대학의 불만을 샀습니다.

    “하버드대나 도쿄대의 1년 예산은 우리돈으로 2조 원에 달합니다. 99년 중국은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집중 육성키로 방침을 정하고 200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동아시아 4개 대학(서울대 베이징대 도쿄대 하노이대)의 학술교류 및 공동문화 창출을 위한 공동선언 직전인 지난 11월2일에는 중국 부총리가 교육부 장관과 과기부 장관을 대동하고 베이징대를 방문해 이 대학의 발전방안을 논의할 정도였어요.

    서울대의 한 해 예산은 2400억 원 정도로, 세계 일류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전년도 예산에서 이월되는 예산은 36억원에 불과합니다. 서울대 교수의 월급은 국립대 중에서도 중하위권 수준이에요. BK 21 사업은 원래 서울대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추진과정에 과제별 경쟁지원 방식을 취했습니다. 경쟁 결과 서울대가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인문·사회계 적극 지원

    ─인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인문학 퇴조현상은 서울대도 예외가 아닙니다. 2001학년도 대학원 석·박사과정 모집에서 인문·사회계열에 미달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는데요.

    “언론이 기사를 지나치게 키웠어요. 이번에 미달된 곳이 좀 많긴 했지만, 과거에도 대학원 정원이 꽉꽉 찼던 적은 드물거든요. 또한 이공계열에도 미달 학과가 많았는데, 인문·사회계열에만 초점을 맞췄더군요.

    어쨌든 이런 현상은 인문·사회계열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줄었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간 정부, 특히 교육당국이 인력수급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학원 학생이 줄었다고 인문·사회학이 쇠퇴할 이유는 없습니다. 학문은 사람 수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웃푸트의 질이 중요한 것이죠.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인문학은 위기에 처할수록 아웃푸트가 좋아진다’고. 사람 사는 동네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없어질 수 있겠어요.

    다만 연구비 지원이 이공계통에 집중되다 보니 인문학 하는 분들로선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연구비는 이공계통에 많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대신 서울대 자체 예산에서 나가는 연구비로는 인문·사회계를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50억 원의 발전기금을 조성, 95년 이후 170여 명의 교수에게 해외 연수를 지원하기도 했죠. 앞으로도 공동 집담회나 한국학 연구, 그룹 및 개인에 대한 다양한 지원방안을 마련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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