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만화가 점령한 일본열도

  • 최영재 cyj@donga.com

    입력2005-05-13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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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지배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산업, 그 시작은 역시 인쇄된 만화책이었다. 특히 만화전문 서점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도쿄의 신주쿠(新宿)역 동쪽 출구로 나오면 서울의 신촌 같은 젊은이의 거리가 펼쳐진다. 이 동쪽 출구에서 조금 걷다보면 ‘망가노 모리(만화의 숲)’라는 만화전문서점이 나온다. 1984년에 설립된 이 서점은 도쿄에만 분점을 8개 두고 있다. 신주쿠점은 4개층을 쓰고 있는데, 모두 만화책만 팔고 있었다.

    지하 1층과 지상1층 등 2개층은 외국만화와 일반인과 청소년이 볼 수 있는 만화, 2층은 어린이가 보는 만화, 3층은 성인 만화책을 판다. ‘망가노 모리’ 신주쿠점장 나가오 아사시(長尾麻史)씨는 “일본 사람들은 만화를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서 본다. 우리 서점의 고객은 어린아이부터 30~40대 샐러리맨까지 광범위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서점에서 만화를 고르고 있는 고객들은 초등학생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했다. 하루 매출액이 얼마냐고 나가오씨에게 물으니 영업 비밀이라 가르쳐줄 수 없다고 한다. 서점을 가득 메운 손님들이 계속해서 만화책을 사는 것을 보니, 매출액은 수월찮을 것 같다. 점잖은 신사가 만화책을 골라 돈을 치르고 사는 풍경, 일본이 아니면 보기 힘든 것이다.

    젊은이의 거리인 신주쿠에는 이와 같은 만화 상품 가게가 많다. ‘망가노 모리’를 나와 조금 걷다보면 유명한 프라모델 가게인‘옐로 서브머린(yellow submarine)’이 있다. 이 가게는 만화 주인공을 캐릭터 상품화해서 인형이나 장난감으로 만들어 파는 곳이다. 옐로 서브머린 신주쿠점은 2개 층을 매장으로 쓰고 있다. 점포 입구에는 2m 크기의 철인28호 인형이 세워져 있었다. 이 매장에는 에반게리온 , 공각기동대, 건담, 우주전함 야마토, 철완 아톰 등 일본 유명 만화 주인공 인형이 가득차 있었다. 20세기에 출현한 세계 각국의 전차, 군함, 전투기 등 무기 모형도 가득했다. 모형 뿐만 아니라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을 이용한 게임기와 캐릭터 상품도 빼놓을 수 없었다.

    만화 고객은 샐러리맨



    이 가게에서 파는 일부 모형들은 조립식 모형에 물감을 칠한 것이나 무선조종 장난감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도의 정밀모형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정밀 모형을 ‘겔러지 키트’라고 한다. 겔러지 키트는 원래 아마추어가 소량 생산하여 판매하는 수제품 프라모델이다. 그러다가 모형전문점들이 아마추어 모델 제작자를 고용해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을 원형으로 대량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밀모형들은 시장 자체가 좁기 때문에 값도 그만큼 비쌌다. 이 모형들은 기본 단가가 한국 돈으로 수백만원대였다.

    ‘옐로 서브머린’에서 상품을 보고 있는 고객들도 30∼40대 직장인,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도 있었다. ‘옐로 서브머린’신주쿠점장 요시유키 타고(多湖義之)씨는 “나이 많은 고객들은 자녀에게 사줄 선물을 사러 온 사람도 있지만, 자신들이 즐기기 위해 온 사람도 상당수다. 특히 정밀모형 겔러지 키트는 어른들의 장난감이다”라고 말했다. 옐로 서브머린은 둘째 층 매장 반을 고객이 프라모델을 직접 만들거나, 사용방법을 교육받는 장소로 쓰고 있었다. 이 교육장에서는 고객 50여명이 열심히 물감으로 프라모델에 색칠을 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30∼40대 직장인이 대다수였다.

    일본의 만화 산업 기업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도쿄 나가노(中野)역 앞 선프라자빌딩에 본점이 있는 ‘만다라케’다. 이곳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을 견학하러온 외국 사람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86년에 설립된 이 기업은 일본의 만화 산업 매장 가운데 가장 많은 상품을 갖추고 있다. 만다라케에는 일단 지금까지 출판된 일본의 만화책이 모두 있다고 보면 된다. 직원 설명에 따르면 만화책의 경우 워낙 다양한 종류를 갖추기 있기 때문에 어떤 계층이 와서 무슨 만화를 찾더라도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이다. 철완 아톰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 같은 작가의 50년대 만화책은 가격이 한국돈으로 수백만원을 오르내린다.

    만다라케는 이른바 헌 만화책을 많이 취급한다. 40∼50년이 지나서 빛이 바래고 너덜너덜한 책인데, 책꽃이에 꽂아 파는 다른 만화책과는 달리 유리진열장에 소중히 모시고 있다. 이 골동품 만화들은 대부분 한화로 500만원이 넘는다.

    만다라케의 주수입원은 만화책이지만 애니메이션 비디오 테이프, 캐릭터 상품, 사진집, 만화영화에 나오는 컷(동화) 등 만화산업과 관련된 모든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만다라케 나가노점에는 아이템별로 독립된 9개의 점포가 있다. 이 점포를 다 둘러본 뒤 사무실을 방문해 후루가와 마쓰미 사장(古川益藏·50)을 만났다. 기껏해야 3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가 50세라니 믿기지 않았다. 우선 옷차림 자체가 만화였다. 그를 만난 접견실도 만화의 한 장면 같은 공간이었다. 들어가는 문도 원형이었고, 내부도 만화세계에 온 것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조금전까지 매장을 둘러보았습니다. 50년대에 나온 겉장이 다 떨어져 나간 만화책과 그 당시에 나온 풍속화(남녀가 성교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를 비싼 값에 파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골동품 만화책에서부터 최근 상품까지 종류가 엄청나게 많은 상품을 판매하고 있던데, 이 상품들을 어떻게 다 관리하고 있습니까?

    판매하는 상품은 오래된 것이 많지만, 이를 취급하는 시스템은 첨단입니다. 우리는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서적, 장난감, 원화류, CD, LD, 비디오 등 취급하는 모든 상품은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습니다. 만다라케의 상품 전략은 한 아이템당 개수는 적더라도 모든 종류의 아이템을 다 갖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취급하는 상품은 모두 150만 종류나 됩니다. 2001년 말까지 이 모든 상품을 데이터베이스화할 것입니다.

    ─현재 이곳 본점말고 만다라케 지점이 설치된 곳이 몇군데나 됩니까? 또 앞으로 확장 계획이 있으면 말해주십시오.

    현재 만다라케는 도쿄의 경우 이곳 나가노점과 시부야점이 있고, 오사카에는 우메다점이 있습니다. 또 후쿠오카와 오오가미에도 상점을 열고 있습니다. 올해 안으로 나고야 중심가에도 지점이 생깁니다. 해외를 공격하는 신호탄으로 뉴욕점이 올 연말에 문을 열 예정입니다. 또 전국 주요도시 모두에 만다라케 지점을 배치할 계획입니다.

    ─상품이 150만가지가 넘는다는데, 지점을 확장하면 그 많은 상품을 어떻게 분류해서 배치할 수 있습니까?

    사실 상품 유통 관리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저희 회사의 당면 과제입니다. 저희 회사는 만화와 관련된 상품이라면 골동품까지 취급하므로 상품을 구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입담당자를 키우는 것도 시급한 일입니다. 이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방대한 상품데이터를 컴퓨터상에 입력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POS 시스템으로는 35만에서 40만 아이템 정도만 취급할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100만이 넘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상품수로만 따지면 400만 점이 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현재 저희 회사의 주요 수입원은 헌만화책입니다. 수백만권의 헌만화책을 관리하기 위해서 책모서리에 딱 맞는 소형 바코드를 직접 붙이고 있습니다. 또 현재보다 15∼20배의 정보를 담는 고성능 바코드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작업이 2001년 말까지 완성될 예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400만점에서 1000만점에 이르는 상품을 개별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상품들의 정보는 컴퓨터상에서 장악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매달 재고조사를 하는데 현재는 사람이 직접 한권 한권 세기 때문에, 이틀이나 걸립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책모서리에 붙인 소형 바코드를 스캔하면 개수, 아이템, 구입날짜 같은 정보가 바로 집계되므로 한나절 업무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틀 내내 사람 손으로 재고량을 세고, 한 주일 동안 집계하고 계산하는 작업을 생각하면 업무가 15배에서 20배나 빨라지는 것입니다.

    ─현재 만다라케의 직원은 몇명이나 됩니까?

    모든 지점의 파트타임 직원까지 합치면 300명 정도 됩니다. 직원들은 모두 내가 면접을 해서 뽑습니다.

    ─인터넷을 이용한 사업 구상은 없습니까? 만다라케의 상품을 인터넷으로 판매하면 점포와 직원 수를 줄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일본에서 인터넷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을 때 해외 판매를 위해서 판매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만다라케에서 파는 상품은 인터넷 판매가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중지했습니다. 특히 우리 회사의 상품은 단 한가지밖에 없는 것이 많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팔릴 때마다 새로운 것을 올려야 하니까요. 하지만 인터넷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재 한 광고회사와 함께 일본 최대의 만화·애니메이션 정보 사이트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이용해서 만다라케가 가지고 있는 기초 데이터를 사용자에게 제공할 계획입니다. 사용자들은 구입한 작품과 상품에 대한 감상이나 희망 사항을 이 데이터에 입력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사이트를 통해 거대한 애니메이션 정보 유통 기지가 형성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본 궤도에 오르면 100만명 정도가 접속할 것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물품을 판매하거나 통신 판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나오는 비즈니스 찬스는 엄청납니다. 예를 들면 접속 횟수를 가지고 올릴 수 있는 광고 효과입니다. 또 이 사이트에 몰리는, 사소하지만 광범위한 사용자 정보는 사업을 구상하는데 큰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저희와 제휴하는 광고회사는 이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저희 만다라케는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를 상대로 상품 경매를 할 계획입니다. 이 경매는 단순 상품 판매가 아닙니다. 전세계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만화 상품을 경매에 올리는 것입니다.

    만다라케 같은 만화관련 상품만 취급하는 기업이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 만화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일본 효쇼(法政)대학의 이나마스 다쓰오 교수는 일본만화의 현주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지금 하루에 쏟아져 나오고있는 만화잡지와 만화단행본은 평균 잡아 570만권, 연간 20억권, 국민 1인당 매달 1.5권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이 현재 일본 출판계에서 만화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다. 만화주간지 ‘소년 점프’ 발행부수는 현재 매주 600만부를 돌파하고 있다. 만화책은 대부분 돌려보기 때문에 회독률을 2배로만 잡더라도 매일 읽히는 책이 1200만 권에 이르고 있다. 국민 10명당 1명이 매일같이 만화를 읽고 있는 셈이다. 이 부수는 TV 시청률에는 못미치지만 최소한 ‘요미우리’(발행부수 1000만부), ‘아사히’(860만부) 같은 대신문에 필적하는 미디어가 돼 있음을 의미한다”

    대다수 나라에서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매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최고 여론 선도매체인 신문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만화와 관련된 일반 출판물 판매량도 엄청나다. 인기를 끈 만화에 나왔던 명언이나 대사만 골라 모은 수필집 형식의 만화명언집이나 각종 만화평론, 만화가입문서, 만화 연구논문, 만화의 사회학 같은 서적도 불티나게 팔린다.

    좋은 예가 하나 있다. 1946년 ‘후쿠니치 신문’(오늘날의 아사히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단행본 68권이 출간되고 28년간 일요일 저녁 시간에 TV에 방영된 최장수 연재만화 ‘사자에상’과 관련된 출판물이다. 90년대 중반에 아마추어 연구모임인 도쿄 사자에상 연구회가 사자에상의 역사성을 분석한 연구논문 ‘이소노가(家)의 수수께끼’를 펴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자그마치 25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평범한 가정주부 사자에상이 꾸려나가는 이소노집안 사람들이 여지껏 살아온 삶이나 복장을 살펴보면, 파란만장했던 일본 현대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 책을 사본 주 독자층은 중년 이상의 지긋한 노년 세대였다. 이는 일본의 만화 독자층 가운데는 ‘실버 독자층’도 넓게 형성되어 있다는 증거다.

    도쿄 지하철은 승객들의 독서 열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실상 지하철 승객들이 보는 책은 70% 이상이 만화책이다. 실제로 도쿄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면 멀쩡하게 신사복을 차려입은 회사원들이 만화책을 읽고 있는 광경을 매번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사적이다. 이들이야말로 2차세계대전 패전 직후인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베이비붐을 타고서 태어나 굶주림 속에서 ‘철완 아톰’ ‘정글 대제’ ‘리본의 기사’ ‘거인의 별’ ‘내일의 조’를 읽으며 자란 사람들이다. 이들은 만화를 읽으며 일본 재건과 과학 입국이라는 꿈과 근성을 키운 이른바 ‘단카이(團塊) 세대’다.

    실제로 일본 만화사를 살펴봐도 이들이 18세에서 20세가 될 무렵인 1965년에는 ‘빅코믹’이라는 청소년잡지가 창간되었다. 성인이 될 무렵에는 각종 주간지가 나왔다. 이들은 대학시절에 ‘한손에는 만화잡지, 다른 한손에는 마르크스’를 쥐고 지냈던 전공투 세대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 지도층이 된 이들이 한손에는 만화책, 다른 한손에는 전문서적을 들고 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반 대중도 이처럼 만화와 친숙한 세대로 성장했지만, 이중에서도 유별나게 만화에 집착하는 이들은 이른바 ‘오타쿠’(굳이 번역하자면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미친 사람들)로 성장했다. 이들은 열렬한 SF팬이었는데, 그중 일부가 ‘스튜디오 누에’라는 오타쿠 계열의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직하여,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모든 오타쿠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오타쿠의 출현

    오타쿠의 대부격인 토시오 오카다씨는 이 오타쿠들은 TV가 보급되면서, 그것도 비디오 데크가 발매된 이후 생긴 새로운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말하자면 영상에 대한 감수성을 크게 진화시킨 시각적 인간이 오타쿠라는 것이다. 토시오 오카다씨에 따르면 이 오타쿠들은 미디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의 관심은 애니메이션에서 게임으로, 특수촬영 영화로, 영화로, 소설로, 뮤지컬로 넘나드는 것이다.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주도하는 이들은 바로 이 오타쿠들이다.

    만화와 친숙한 대중, 소수의 오타쿠. 이들이 있기에 일본은 만화가 모든 문화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산케이’ 등 일본의 유수 신문들도 만화 월평과 만화 관련 시리즈물을 꼬박꼬박 싣고 있다. 하루 발행 부수가 1000만부나 되는 ‘요미우리’는 만평 게재에서 한걸음 더 나가 매년 초에 만화가를 대상으로 카툰 대회를 열고 있다.

    일본은 초·중·고·대학마다 만화동아리가 있다. 4년제 대학에는 만화학과가 있고, 1년 과정의 만화전문학원도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만화가 예비군 집단이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다. 이들이 모두 만화가 지망생이고, 만화 산업으로 뛰어든다.

    뿐만 아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철완 아톰’ 같은 만화가 실렸고, 일본 만화 발달사가 근대사 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 국민의 만화 사랑이 이처럼 높으니 정부도 만화를 이용한 각종 홍보 출판물을 내고 있다.

    만화는 일본에서 스포츠 문화를 이끌고 있다. 일본은 90년대 초반까지 축구 후진국이었다. 당연히 축구에 대한 관심도 적었다. 그런데 1993년 J리그를 시작하고 월드컵까지 유치하며 축구붐을 일으켰다. 청소년을 축구 강국에 유학보내는 등 노력을 기울여 최근에는 한국 축구를 넘어서서 아시아 축구 정상에 올라섰다.

    여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 만화였다. 1983년 첫방영을 시작한 이래 폭발적 인기를 끈 다카하시 유이치의 ‘캡틴 쯔바사(날개)’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축구왕 슛돌이’같은 유의 축구 만화들이다. 이 일본 축구 만화들의 줄거리는 한결같다. 일본 축구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일본 축구 꿈나무들이 어린 나이에 남미와 유럽 축구 선진국으로 축구유학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은 뒤에 기량을 높인 뒤 귀국해 일본 축구를 세계 정상으로 끌고 간다는 식이다.

    축구 뿐만 아니다. ‘슬램 덩크’라는 농구 만화도 마찬가지다. 이 만화는 일본 전역에 대대적인 농구 붐을 일으켰다. ‘슬램 덩크’는 농구 자체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 사이에서 헐렁한 상의와 긴 팬티, 농구화로 대표되는 농구패션 붐까지 일으켰다. 농구 열기는 청소년 뿐만 아니라 직장인에게까지 번져 길거리 농구 같은 문화를 만들어냈다. 만화 한편이 일본에서 외면받던 농구를 대번에 일본인의 사회체육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슬램 덩크’가 한국으로 수입된 이후 한국 청소년으로까지 이어졌다.

    모든 문화 위에 군림하는 만화

    만화 파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화는 다른 장르의 문화까지도 몽땅 만화화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만화를 영화나 TV드라마로 만들거나 소설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게임으로, 퀴즈로 만드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한 예로 1992년 10월부터 ‘주간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가네다이치(金田一)소년의 사건부(事件簿)’라는 소년 탐정추리만화는 13권의 단행본으로 나와 판매부수 2500만 부를 기록했다. 또 1995년 여름에는 TV주간 드라마로 방영되어 평균 23.2%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만화를 소설로 개작하는 작업도 왕성하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은하철도 999’ ‘우주전함 야마토’ ‘루팡 3세’ 같은 히트 만화들이 만화 소설책으로 나와 인기를 끌었다. 만화의 연극화, 뮤지컬화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공연에는 만화 주인공 분장을 한 배우들이 출연한다.

    만화침투현상은 일본의 모든 대중 문화에 예외없이 진행되고 있다. 일본 문화 평론가들은 이런 현상을 ‘만화 기원(起源) 현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화기원현상은 일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이미 국제사회에서 일본 만화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에 버금가는 국제 대중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 홍콩의 영화프로덕션도 ‘스트리트 파이터’ ‘슈퍼 마리오’ ‘파워 레인저’ ‘가면 라이더’ ‘시티 헌터’ ‘배틀 컴뱃’ ‘크라잉 프리맨’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전자오락 게임을 영화로 만들어 히트시키고 있다. 여기에 전세계 안방극장의 3분의2를 장악하고 있는 TV용 애니메이션과 세계시장의 9할을 차지하는 전자오락 게임 소프트웨어까지 합치면 일본 만화 파워가 얼마나 큰 힘으로 지구촌 대중문화를 강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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