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정·부통령 4년 중임제로 개헌합시다”

부통령후보 박근혜·김덕룡·노무현·최병렬 순

  • 김기영 hades@donga.com

    입력2005-05-04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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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계개편이 정치권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각도의 개편론이 정가를 휘젓고 있다.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론도 공공연히 거론된다. 구체적 정계개편의 모델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정계개편을 원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논쟁으로 시끌벅적하다. 과연 정치 현장에 있는 의원들의 속내는 무엇일까.

    현재 나도는 정계개편론의 특징은 과거처럼 정가의 밑바닥 여론으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굳이 얼굴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논쟁에는 여야 정치권의 수장(首長)들도 가세했다. 지난 1월8일 이회창 한나라당총재는 의원총회에서 강삼재 부총재에 대한 검찰수사를 비난하면서 “현정권이 정계개편을 위해 이번 수사를 강행하고 있다”고 했다.

    또 “여권의 대표적인 정계개편 시나리오는 일부 우리 당 의원들과 군소정당을 합해 한나라당을 포위하는 위성정당을 창당하는 것”이라며 세부 전술까지 거론. 정계개편론을 경계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월11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자꾸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나는) 들어본 일도 없고, 주위에서 논의한 일도 없다”며 반박했다.

    정계개편론과 더불어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론도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 있다. 정·부통령제를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를 합쳐 미국식 대통령제로 헌법을 고치자는 제안도 있다.



    최근에는 한화갑 민주당 최고위원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 연말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도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를 골자로 한 개헌이 김대중 대통령 임기 내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최고위원은 “빠를수록 좋을 뿐만 아니라 개헌 논의가 활발해진다면 1년 정도면 개헌이 가능하다”면서 이례적으로 시한까지 제시하며 개헌론에 부채질을 했다.

    이최고위원에 앞서 김중권 민주당대표와 김종호 자민련 총재대행 등 두 공동여당의 대표들도 약속이나 한 듯 중임제 개헌론을 거론해 정가의 관심을 끌었다.

    중임제 개헌론 주장은 여당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김덕룡 한나라당부총재도 지난 연말 ‘주간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여야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보면 개헌의 필요성에 동감하고 있다. 다만 개헌했을 경우 자기 당의 집권에 유리한지 불리한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하고 있을 뿐이며 일단 개헌론에 불을 당기면 상당수 의원은 찬성하고 나설 것”이라며 중임제 개헌이 현실화될 조건이 무르익었음을 시사했다.

    무르익어가는 중임제 개헌론

    김부총재 외에도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이부영 부총재, 민국당의 김윤환 대표 등이 공·사석에서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이 임박했다는 소문도 있다. 장재식 의원을 비롯, 4명의 의원이 자민련으로 건너가면서 DJP공조가 부활하여 차제에 두 당이 합당을 위한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권은 지금 ‘붕 뜬’ 분위기다. 변화를 제어하는 최소한의 ‘안전판’만 떼어내면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러면 이런 어수선한 정국 한가운데 서 있는 현역 국회의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안타까운 것은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일부 중진의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쉽게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논쟁이든 최후에는 수 대결로 집단의 의사를 결정하는 민주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대다수 현역 정치인들의 속내를 읽어내는 것은 정국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김덕룡 부총재의 주장처럼 정말 여야의원들이 개별적으로는 중임제를 지지하는 것일까. 정계개편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직접 정국전망을 물어보기로 했다.

    ‘신동아’의 국회의원 대상 설문조사는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 간 여야영수회담 결렬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 지난 1월5일부터 1주일 동안 진행됐다. 설문조사가 진행되는 사이, 한국 정치권은 그야말로 숨가쁘게 돌아갔다. 이총재와 청와대 사이에 영수회담 결과 공개를 두고 치열한 설전을 벌였는가 하면, 안기부 예산을 선거자금으로 사용한 혐의로 강삼재 의원에 대한 검찰 수사가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나라당은 이를 야당탄압이라고 규정하고 정권퇴진운동도 불사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여권도 고삐를 늦출 태세는 아니다.

    또 같은 기간, DJP 공조를 확인하는 김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의 회동이 있었고, 두 사람의 회동 직후 장재식 의원이 자민련으로 이적해 원내교섭단체 정족수를 채워주는 고단위 ‘정치쇼’도 있었다. 한마디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정국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그런 주변 분위기 때문인지 일부 의원들은 설문 여기저기에 격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이번 여론조사에는 273명의 현역의원 가운데 155명이 참여했다. 155명 가운데 한나라당 의원은 82명, 민주당 자민련 등 여권 의원은 70명이었다.

    민국당·국민신당 무소속 의원 일부도 설문조사에 응했으며 야당으로 분류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133석인 한나라당보다 의석이 많은 공동여당(135석) 의원들이 설문조사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과거 민주당이 야당이었을 때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 의원들은 설문조사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반면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의 전신 신한국당 의원들은 설문조사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설문조사를 대하는 의원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 셈인데, 여당의 한 의원보좌관은 “국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보니 상당수 의원들이 의원회관에 들를 겨를이 없어 조사에 응하지 못한 것일 뿐 설문조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질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정계개편의 필요성과 그 방향 ▲현재 대치정국의 원인과 해결방안으로 거론되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적이탈 및 거국내각 구성에 대한 의견 ▲중임제 정·부통령제 개헌에 대한 찬반 여부 및 정·부통령제 개헌 이후 부통령에 추천할 만한 후보는 누구인가 등이었다.

    이 밖에도 올해 뜨거운 이슈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급랭정국을 풀 해법에 대해서도 의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새해 첫 영수회담이 결렬된 원인’에 대해 여당의원 67.1%(33명)가 ‘이회창 총재의 무리한 요구’가 원인이라 답했고, 한나라당의원 84.7%(72명)는 ‘김대중 대통령의 자세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해 양당간 큰 시각차를 드러냈다.

    첫째 주제인 ‘정계개편의 필요’에 대해 조사에 응한 민주 자민련 등 여당 의원 54명(77.1%)이 찬성했다. 반면 한나라당 쪽에서는 정계개편에 반대한 응답자가 65명(76.5%)에 달해 아직까지 정계개편은 여당인 민주당과 자민련의 ‘희망사항’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설문조사에 응답한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18명(21.2%)이 ‘정계개편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강창희 의원이 자민련에서 제명된 뒤 현재 민주 자민 두 공동여당의 의석은 135석. 과반수인 137석에 2석이 모자란다. 두 당의 굳건한 공조에도 다수당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니, 정계개편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20% 가량의 한나라당 의원은 두고두고 정치권 요동의 ‘진앙지’로 주목받을 것 같다.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정계개편의 필요성에 동의한 의원들은 주로 수도권과 경북, 부산 등의 초·재선 의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은 개혁성향의 소장파들로 김덕룡 부총재를 따른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부산과 경북의 초·재선 의원들은 이회창 총재의 노선에 반발하는 당내 영남세력의 일부인 것으로 해석된다.

    ‘만약 정계개편이 이뤄진다면 어떤 방식이 바람직한가’에는 한나라당 응답자의 37.6%(32명)가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보수 중도 진보정당 등으로 개편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40%에 가까운 응답자가 ‘철저한 정계개편’을 요구한 것이 이채로운데, 이는 보수 혹은 진보 성향을 막론하고 한나라당 의원의 상당수가 현재 이념과 노선에 관계없이 뒤섞인 한나라당의 인적구조에 내심 불만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만약 정계개편이 된다면 ‘뜻맞는’ 정치인들끼리 흩어져 다시 뭉치는 ‘제대로 된’ 정계개편이 돼야 한다는 데 적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생각을 함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현정국의 안정을 위해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이 필요하다’는 소규모 개편론에 대해서는 4명(4.7%)만이 ‘필요하다’고 답해 민주당, 자민련 두 당의 합당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기타 의견은 10명(11.8%)이었고 ‘정계개편이 필요없다’는 뜻에서 이 질문에 응답하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이 39명(45.9%)에 달한 점도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정계개편 방식에 대한 민주당 자민련 두 여당 의원들의 응답은 한나라당과 크게 달랐다.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보수 중도 진보정당 등으로 개편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답한 의원은 26명(37.1%)인데 비해 ‘민주당과 자민련 등이 합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의원은 이보다 약간 많은 30명(42.9%)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전면적인 정계개편에 무게를 둔 것과 달리 여당 의원들은 민주당과 자민련 양당이 합당해 여권을 단일진영으로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전면적인 정계개편을 바라는 의견이 한나라당과 거의 비슷한 비율인 37.1%로 나타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40%에 가까운 의원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이념에 근거한 이합집산, 즉 전면적인 정계개편을 희망하는 것은 정계개편이 막연히 일부의 희망사항만은 아니며 조건만 갖춰지면 대단한 폭발력을 갖고 실현될 가능성도 있음을 암시한다.

    ‘신동아’는 같은 질문을 홈페이지를 통해 네티즌들에게도 물어봤다. ‘신동아’ 홈페이지 ‘Live Poll’에 참여한 네티즌들은 ‘이념과 노선에 따른 정계개편’에 47.1%가, ‘민주·자민련 간 합당’에는 16.4%가 지지를 보냈으며 ‘정계개편이 필요없다’는 항목에도 36.6%가 동의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현 정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여당 의원 대다수는 ‘(김대통령이) 현 정국의 심각성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에 답했다(56명·80%).

    한편 ‘현 정국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항목에도 11명(15.7%)의 여당 의원이 긍정의 뜻을 나타냈다. 야당 의원들이 이 질문에 ‘일사불란’하게 답한 것과 비교하면 여당 내부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수치다.

    김대통령의 시국관에 비판적 견해를 보인 11명의 응답자 중에 자민련 의원이 상당수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민주당 의원 중에도 최소한 5명이 뜻을 같이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반란’의 의사표시를 한 민주당 의원들은 김중권 대표체제로 상징되는 김대통령의 현 정국 운영에 소외된 불만세력인 것으로 보인다.

    여당의원 15.7% “대통령 정국인식 문제 있다”

    같은 질문에 대해 한나라당 의원들은 100%가 ‘김대통령이 정국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주장처럼 김대통령이 당적을 떠나 국정운영에만 전념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김대중 대통령이 당적을 이탈한다면 어떻게 되리라고 예측하느냐’는 질문에 여당 의원의 대다수인 49명(70%)이 ‘여당이 사실상 없어지기 때문에 국정에 혼란이 올 것이다’라고 답했다.

    반면 ‘여야를 초월해 국가경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의견에는 10명(14.3%)의 여당 의원이 동의했다. 이 밖에도 11명(15.7%)의 여당 의원이 기타의견을 제시했는데 이들은 ‘여권의 대권후보가 결정된 후에는 고려해볼 수 있다’, ‘언젠가는 이탈해야 하나 지금은 아니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가 분명하게 드러난 이후, 선거전략상 필요에 따라 과거 정권 때처럼 대통령의 당적이탈도 검토해볼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인 듯하다.

    이처럼 대통령의 당적이탈을 대선 전략에 활용하는 방안은 여당의 일부 중진들의 입을 통해서도 공개된 바 있다.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은 ‘신동아’ 신년호 인터뷰에서 김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와 당적 이탈, 거국내각 구성 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노장관은 대통령의 결단과 함께 야당도 대통령을 더 이상 흔들지 않는다는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있을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사실 대통령의 당적이탈은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주로 거론했던 요구사항이다. 이회창 총재는 지난 연말 당직자 간담회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운영의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기 위해 당적과 총재직을 포기하고 각료 추천을 요구할 경우 이에 응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비주류의 리더인 김덕룡 부총재도 지난 연말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전제하에 “여야를 망라한 대규모 정계개편이 성공하려면 김대통령의 중립, 즉 당적이탈이 선결조건”이라고 못박았다.

    두 사람의 말은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김부총재처럼 정계개편을 적극 바라는 쪽이든 이총재처럼 정계개편론 자체를 불온하게 여기는 쪽이든 김대통령의 민주당적 포기는 막힌 정국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데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런 한나라당 지도부의 생각을 반영한 듯 ‘김대통령이 당적을 이탈한다면 어떻게 되리라 예측하느냐’는 질문에 응답한 한나라당 의원의 94.1%(80명)가 ‘여야를 초월해 국가경영을 할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한걸음 나아가 ‘거국내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42.9%(30명)의 여당 의원은 ‘대통령제에서는 현실성 없는 발상’이라며 부정적이었다.

    반면 31.4%(22명)는 ‘대화와 타협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응답했으며 ‘대통령이 당적을 이탈한 뒤 고려해볼 수 있는 방안’이라는 유보 의견을 밝힌 의원도 15.7%(11명)이었다.

    다양하게 의견을 내놓은 여당과 비교해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응은 흥미진진하다. 71.8%(61명)라는 절대다수의 응답자가 거국내각에 대해 ‘대통령이 당적을 이탈한 뒤 고려해볼 수 있는 방안’이라는 항목을 선택했다. 대통령의 당적이탈에 대해서는 94% 이상이 이를 찬성하면서도 당적이탈과 한묶음으로 거론되는 거국내각 구성에 대해 대다수 한나라당 의원들이 정치적 득실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거국내각제에 대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엇갈리는 반응은 거국내각 논의의 진행과정과 관련이 깊다.

    최초의 거국내각 주장은 민주당 일부 중진들이 김대통령에게 올린 경제위기 극복과 정국돌파에 관한 보고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보고서의 내용 가운데 거국내각안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이회창 총재가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 연말 이회창 총재는 “거국내각과 같은 물타기로 야당이 장관 몇 자리를 차지하는 요식행위가 현재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분명히 거부했다.

    거국내각을 반대한 사람은 이총재만이 아니었다. 공동정부의 한축인 자민련도 “대통령제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거국내각이 구성되면 당장 자민련 몫의 내각지분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반발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민주당도 대변인을 통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공식 표명하고 사태 무마에 나섰다.

    정치권의 잇따른 반대의사 표명으로 생명력을 잃어가는 듯하던 거국내각론에 다시 불을 지핀 사람은 노태우 전대통령이었다. 노 전대통령은 지난 1월3일 신년 인사차 연희동 자택을 방문한 김중권 민주당대표에게 “나라가 어려우면 대통령도 탈당과 거국 중립내각 구성을 생각해봐야 한다”며 92년 대선 직전의 민자당 탈당 및 선거중립내각 구성을 상기시켰다.

    노 전대통령의 거국내각 제안 이후 정치권에서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한 적은 없다. 오히려 정치권은 새해 초부터 심각한 대치국면으로 돌입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고 정치환경이 달라진 탓인지 조사에서 나타난 거국내각에 대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시각은 다소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서도 ‘대통령제에서는 현실성 없는 발상’이라고 답한 의원이 17.6%(15명)였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방안’이라며 적극 찬성한 의원도 11%(9명)였다.

    그러면 여야의 상당수 중진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 주장한 4년 중임제 및 정·부통령제 개헌에 대해 현역 의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부통령 4년중임제 개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여야를 막론하고 절대다수의 의원들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당 84%, 야당 53% 4년중임 정·부통령제 개헌 찬성

    여당의 경우 51.4%(36명)의 응답자가 ‘정국 안정과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답했다. 또 32.9% (23명)의 응답자는 ‘차기정권에서 고려해볼 수 있는 방안’이라고 했는데 이 둘을 합할 경우 여당 의원의 84% 이상이 정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에 긍정적 반응을 나타낸 것으로 드러났다.

    한나라당에서는 정·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에 대해 ‘여야의 현재 구도를 뒤흔들 수 있는 정략적 발상’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34명·40.1%) ‘차기정권에서 고려해볼 수 있는 방안’이라는 의견과 ‘정국안정과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안’이라는 의견에 각각 41.2%(35명), 11.8%(10명)가 답해 적어도 절반 이상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정·부통령 4년 중임제에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당 의원의 84%와 야당 의원의 53%가 정·부통령 4년 중임제를 지지하는 조사결과대로라면 당장이라도 ‘다음 정권부터 실시하는 것을 전제로 정·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실시하자’고 개헌안을 발의할 경우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통과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계개편과 맞물려 정치판은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4년 중임 정·부통령제에 반대하는 이회창 총재에게도 의원들의 밑바닥 여론은 중대한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같은 질문에 대해 네티즌들도 ‘찬성’의 뜻을 보였다. ‘신동아’ Live Poll에 참여한 네티즌의 40.4%가 ‘차기정권에서 고려해볼 수 있는 방안’이라고 답했고, ‘정국안정과 책임정치 구현을 위한 바람직한 방안’이라는 항목에도 31.8%가 지지했다. 이 둘을 합하면 중임제에 대한 지지율은 무려 72.2%였다.

    ‘만약 정·부통령제로 개헌되면 귀하의 소속당 부통령 후보감으로 누가 가장 유력하다고 보는가’에는 구체적 인물을 거명해야 하는 부담 때문인지 응답자가 많지 않았다.

    이 질문은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다. 최근 차기 대선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회창 한나라당총재와 이인제 민주당최고위원 두 사람이 치열한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후보들이 5% 이하의 낮은 지지를 받고 있어 현재로는 두 사람과 경쟁을 벌일 만한 제3의 후보는 부각되지 않은 상태다.

    두 사람의 지지율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당내 경쟁자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볼 수는 없다. 대권주자가 분명히 드러나기까지는 아직도 1년 이상의 시간이 남아있고 그 사이 정치권이 어떤 변화를 보일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최대 과제는 본선 대결에서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세력을 우군(友軍)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통령후보에 대한 질문은 각 정당이 생각하는 약점이 무엇이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어떤 세력과 손잡을 것인가를 탐색하기 위한 간접 화법이었다. 또 약점을 보완해줄 연합세력을 누구로 보느냐는 정계개편 방향을 가늠하는 데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부통령 후보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은 박근혜 한나라당부총재였다. 박부총재는 여당 의원들에게 인기가 높아 부통령 후보감으로 5표를 얻어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6표)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두 사람에 이어 정동영 최고위원(4표)과 이인제 최고위원(2표)이 여당 의원들 사이에 ‘유력한 부통령 후보감’으로 지지를 받았다.

    한나라당에서도 박부총재는 놓칠 수 없는 인물이다. 박부총재는 김덕룡 부총재와 함께 동료의원으로부터 똑같이 7표씩을 얻어 한나라당내 부통령감 공동 1위에 올랐다. 두 사람 다음으로 최병렬 부총재와 홍사덕 국회부의장이 각각 5표와 3표를 얻어 3, 4위에 올랐다.

    박부총재가 정·부통령제로 개헌될 경우 여야에서 모두 유력한 부통령 후보감에 오른 것은 TK(대구·경북)에서의 박부총재의 대중적 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TK를 대표할 만한 대통령후보가 없다는 것도 조사결과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대통령 후보는 없는 반면, 현재의 정치 지형상 누구든 TK의 지지를 얻는 쪽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회창 총재 진영은 박부총재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민주당도 TK의 적극적인 지지는 얻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TK표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박부총재가 절실한 상황이다.

    1표 이상 얻은 부통령후보 가운데 여야를 넘나들며 표를 얻은 사람은 박부총재와 김덕룡 부총재(여당 1표, 야당 7표) 그리고 김근태 민주당 최고위원(여 1표, 야1표) 등이었다.

    자신의 소속정당에서는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상대편 정당에서 부통령 후보로 추천받은 의원들도 있는데 조순형 민주당의원과 무소속 강창희 의원이 각각 한나라당 의원의 추천으로 부통령후보감으로 거명됐다.

    성사가 된다면 올해 최대의 ‘정치이벤트’로 기록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대해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응답자의 약 40%가 국내 여건상 그 시기를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구체적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여당 의원 가운데 42.9%(30명)가,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는 40%(34명)가 답방을 연기해야 한다고 했다.

    한나라당의 답방 연기는 당론과 차이가 없지만 여당 의원 사이에도 연기 의견이 만만치 않은 점은 다소 뜻밖이다. 지난 1월11일 연두기자회견에서 김대통령은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을 병행해 착실히 추진해 나아갈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약속대로 반드시 실현되도록 하겠다”며 김 위원장의 ‘서울행’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어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도 김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예정대로 이뤄질 것이며 이는 남북의 평화, 협력, 긴장완화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대통령의 강행의지가 분명한데도 여당 의원 사이에도 ‘시기상조론’이 적지않게 유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답방 연기 이외의 의견을 살펴보면 여당 의원 48.6%(34명)가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나타낸 반면, 한나라당 의원의 38.8%(33명)는 ‘뒤숭숭한 민심과 불안한 정국을 생각할 때 바람직하지 않다’며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에 반대를 표시했다. 소속 정당에 따라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차이가 있음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급랭정국을 풀 해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요구한 결과 모두 85명의 여야 의원이 나름의 대치정국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

    민주·자민련 등 여권 의원들의 정국 해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뉘었는데 ‘여야간 대화복원 등 관계개선이 시급하다’는 견해를 내놓은 의원이 가장 많았다. 응답자 가운데 20명이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다음으로 많은 의견은 ‘이회창 한나라당총재의 태도변화 및 대승적 협조’였는데 6명이 이런 해법에 동의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밖에도 5명의 의원이 ‘정부여당의 국민신뢰 회복 등 여권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자성의 의견을 내놓았다.

    여당 의원들이 대화 복원 등 야당과 관계개선을 최우선 해법으로 제시한 반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독선적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며 대통령의 태도변화가 급랭정국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주장했다. 응답자 가운데 23명이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대통령만 바라보는 여야 정치권

    ‘김대통령의 당적 이탈 및 중립내각 구성’이 대치정국을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는데 모두 12명의 한나라당 의원이 이런 종류 해법을 제시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여당 의원은 야당과의 대화복원과 신뢰회복에 무게를 둔 데 비해, 야당 의원들은 집권여당보다는 김대통령 개인에게 문제해결의 부담을 떠넘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절대권력이 집중되는 현행 대통령제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정국 해결을 위해 집권여당이 할 일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야당도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는 여당의 역할과 관련, 두고두고 짚어볼 대목이라 하겠다.

    이 밖에도 소수 의견이기는 하지만 성의껏 대치정국 해결의 방안을 내놓은 의원들도 있다.

    민주당 배기운 의원은 ‘금년 상반기(혹은 1년간) 정쟁중지를 약속하고 민생과 경제를 우선하는 생활정치를 펴야 한다’며 ‘휴전론’을 제안했다.

    정범구 의원은 ‘정국현안에 대해 사안별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야당이 된다면 거국내각, 대통령 당적포기 등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합리적 야당이 돼야 소수여당도 숫자의 정치에 대해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야당지도부로는 과연 상생의 정치를 이룰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김희선 의원은 ‘좀 냉각기를 가지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원칙과 방법을 여야 각각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며 ‘그런 후에 다시 한 번 영수회담이나 대표 수준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김충조 의원은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를 확대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최근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송영진 의원은 ‘양당 책임자들 모두가 대권욕에서 벗어나 타협과 양보를 전제로 민주적 토양 위에서 진솔한 마음으로 국민을 위해 노력하는 길뿐’이라며 원론에 충실한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의견은 다소 비관적이다. 조웅규 의원은 ‘급랭정국이 풀리기는 어렵다고 본다. 집권층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정국을 순리에 따라 운영할 철학, 비전,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며 ‘빨리 2년이 지나 국민의 선택으로 새정부가 들어서 민의를 존중하며 반민주적·권위주의적·반시대적 제도와 관행을 개혁해 국민 모두가 공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김홍신 의원은 ‘당파적 욕심을 제어하는 언론, 시민단체, 지식인, 종교단체 등의 비판기능 활성화와 구체적 운동이 필요하다’는 색다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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