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힘의 통치’는 민주주의의 적

  • 유승민 <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

    입력2005-04-26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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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정권은 집권 3년 만에 국가위기를 자초했다. 지금 이 나라는 위기인가, 아닌가? 위기 여부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위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 나라 국민들의 몫이다.
    집권세력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국민 대다수가 위기라고 느끼면 분명히 위기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70% 이상이 위기라고 느끼고 있으니, 최소한 ‘70%의 위기’인 것은 분명하다. 이는 결코 조작된 여론조사가 아니라 민심의 소재를 정확히 알려주는 숫자다.

    그것도 단순한 경제위기 정도가 아니라, 온 나라가 무너져 내리는 총체적 국가위기라는 것이 국민의 생각이다. 경제위기는 물론, 정치와 사회 전반에 퍼진 불안과 불신, 만연된 부정부패, 붕괴된 교육과 전도된 가치관, 남북관계와 외교·안보에 대한 불안 등이 겹치면서 많은 국민들은 나라의 근본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한 해 1만5000여 가구가 이 나라를 떠나 이민길에 오른 것도 결국 자신의 인생이 위험하다고 느낀 사람들의 ‘떠나는 자유(自由)’라는 마지막 의사표시로 봐야 한다.

    이런 암담한 현실에서 갑자기 김대중 대통령과 김중권 민주당 대표는 이구동성으로 ‘강한 정부, 강한 여당’을 외치고 나섰다. 진정 국민이 원했던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정쇄신의 해법이었는데, 이 정권이 국민에게 들려준 대답은 뜻밖에도 ‘강한 정부’였다.

    원했던 대답을 시원스레 듣지 못한 국민은 지금 어리둥절하다.



    “강한 정부라니, 과연 이게 무엇일꼬…. 이토록 나라가 위태롭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이렇게 큰데, 설마 제 정신을 가진 ‘국민의 정부’라면 우리의 고통과 절규를 외면하진 않겠지….”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은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강한 정부든 국정쇄신이든 우리 민초(民草)들은 그런 어려운 말씀일랑 알 바 없으니 그저 걱정없이 잘 살 수 있는 편한 세상이나 만들어 주면 좋겠다. 어디 한번 기다려 보자.”



    ‘초인적’ 의원 임대·임차

    거짓이 난무하는 판에 거대담론(巨大談論)은 무용지물(無用之物)에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의 ‘강한 정부’는 과연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福音)인가?

    야당과 일부 언론은 먼저 ‘강한 정부론(論)’ 뒤에 숨겨진 위선과 가식을 지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한 정부의 ‘첫 작품’이 연말 연초의 신문 휴식기를 틈타 국회의원 세 명을 임대 임차하는 역사적·초인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사건을 ‘역사적’이라고 보는 까닭은 분명히 한국정치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초인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평범한 인간의 두뇌와 용기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기막힌 발명품이었기 때문이다. ‘17+3=20’. 유치원생도 다 아는 산수인데…. 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니, 무릎을 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평가도 열흘 만에 ‘절반은 오류’로 판명되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한 사람 더 꿔주기’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는 강한 정부라는 그림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불과 열흘 사이에 안기부자금 사건이 터졌고, 여야영수회담은 불발로 끝났다.

    강한 정부는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강한 정부란 민주적인 정부로서 원칙과 법을 준수하고, 국민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는 정부”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순간, 강한 정부는 갑자기 국정의 중심이념이 되어 버렸다. 여권 내부에서도 “우리 지금 잘하고 있는 거냐?”는 불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강한 정부의 위력 앞에서 평정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김대중 정권 전반기의 국정목표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 생산적 복지, 지식기반 경제’였다면, 집권 후반기의 국정목표는 이제 대통령 스스로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법, 원칙, 정도를 걷는 강한 정부, 힘있는 정부, 강한 여당’이다.

    아마도 지금쯤 김대중 정권의 뒤를 봐주는 지식인들은 책상에 앉아 ‘강한 정부, 강한 여당’의 철학, 논리, 역사적 사례를 찾기 위해 열심히 책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홉스(Thomas Hobbes)나 로크(John Locke)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강한 정부를 예찬하는 멋있는 문구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강한 정부의 철학과 정의를 두고 이른바 지식인들이 입씨름을 벌이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필자 역시도 강한 정부라는 말을 놓고 그 누구와도 논리적으로 싸울 전의(戰意)를 느끼지 못한다. ‘말’이 더 이상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다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란 말을 냉소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국민들은 그것을 ‘신(新)권위주의와 신(新)관치경제’로 보고 있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 강한 정부는 무엇이고 약한 정부는 또 무엇이냐에 대해 입씨름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소위 ‘레토릭’(rhetoric)이 신뢰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것은 현 위기의 한 단면이다. 언어가 언어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거대담론(巨大談論)일수록 우리를 더욱 허탈하게 만든다. 지금 정치 지도자들의 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도 사(思) 언(言) 행(行)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정철학,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디제이노믹스(DJnomics), 언론 자유, 안기부 자금, 대북정책 등으로 이어지는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어록(語錄)을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독자의 기억을 위해 대통령의 말씀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민주적인 절차를 준수하면서 대화와 양보로 풀어가는 정치, 이것이 힘있는 정부다.”(2001년 1월 연두기자회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확립되지 못하고 관치경제와 정경유착,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우리 경제가 총체적으로 부실화되었기 때문이다.”(98년 ‘DJnomics,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에서 ‘외환위기의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2000년 12월까지 기업과 금융의 구조조정을 완료하고 2001년 2월까지 노동과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완료하겠다.”(2000년 10월 이후 수차례 언급)

    “이제 곧 윗목도 따뜻해질 것이다.”(99년 ‘국민과의 대화’)

    이런 말들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이미 내려졌으며, 이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국민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강한 정부는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백약(百藥)이 무용지물이다. 이젠 제발 레토릭을 그만두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말의 의미(意味)는 행동(行動)으로 판단돼야 한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권의 강한 정부는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정답은 ‘두고 보자’다. 강한 정부라는 말이 과연 올바른 노력과 훌륭한 성과로 이어지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만약 김대중 정부가 정권 연장을 위한 정계개편 음모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주장대로 정말 사심없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남은 2년의 임기를 국정의 중심에 서서 책임지겠다는 자세라면, 강한 정부라는 말 한마디를 두고 이처럼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일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지금은 강한 정부를 평가할 때가 아니다. 최소한 수개월의 시간을 두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무엇을 보여주는지 관찰한 다음, 논쟁을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강한 정부, 강한 여당이 등장한 이후 한 달 동안 이 정권이 했던 일을 되돌아 보는 것이다. 안기부자금 사건, 언론정책의 변화, 현대 등 부실기업에 대한 구제금융과 경기부양…. 이 정부가 지금 열심히 추진하는 일들이 과연 나라와 국민의 장래를 위해 최선의 선택인지 분명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소위 안기부자금 사건에서는 ‘강한 정부’의 ‘강한 대통령’과 ‘강한 여당’의 ‘강한 대표’가 검찰 발표를 정확히 반나절 내지 하루 앞서가면서 “야당이 공산당 잡는 돈을 선거자금으로 횡령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횡령의 주범에게 엄정한 법의 심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원칙이고,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상식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법원이 그 진실과 책임을 판단할 일이다. 그 이전에 철저한 수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일국의 대통령이 일선 담당검사처럼 나서서 ‘공산당 잡는 돈’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정치자금에 관한 엄정한 수사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라면 여야를 막론하고 차제에 투명하고 공정하게 수사해서 제발 깨끗한 정치를 만들라는 것이 국민의 주문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검찰이 공정한 수사를 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정권이 특검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은 국민의 정치냉소주의를 부추길 뿐이다. 특검제를 받아들이는 정부라야 진정 강한 정부일 것이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와 공정위의 조사는 3건의 언론공작 문건이 발견되기 이전부터 준비된 작품이다. 국민들은 이미 그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 탈세와 불공정거래 행위를 일삼는 언론사를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하는 것은 법치라는 점에서 옳다. 하지만 이것은 ‘낮은 단계의 법치’에 불과하다. ‘높은 단계의 법치’라면 언론탄압이라는 정당하지 못한 목적으로 추진되는 세무조사와 공정위 조사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언론탄압 여부를 둘러싼 여야의 논쟁에 대해서 필자는 말을 아끼는 대신 김대통령의 말씀 몇 마디를 소개하고자 한다. 강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사람은 언론의 자유에서 동물과 구분된다.”(80년 한신대 연설)

    “취지야 어떻든 정부가 개입하면 언론을 권력유지의 도구로 삼고 언론자유를 제한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98년 ‘동아일보’ 창간기념 회견)

    “나는 과거 언론자유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언론에 간섭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99년 국민회의 원외지구당위원장 회의)

    대국민 약속을 번복하면서 현대 등 부실기업을 살리고, 막대한 자금을 풀어 무조건 경기를 띄워놓고 보자는 정부는 강한 정부가 아니다. 겁많은 정부, 포퓰리즘 정부에 더 가깝다. 진정 강한 정부라면 오늘을 인내하면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비록 경기부양을 추진하더라도 올바른 구조조정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정부가 강한 정부다.

    왜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왔는가? 지난 3년을 반성하지 않고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정권에게 역사는 별로 관대하지 않을 것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세금을 쓰고서도 경제가 3년 전보다 못하다면 한번쯤 자기반성을 해보는 것이 강한 정부가 할 일 아니겠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부실기업을 살리고 돈을 퍼부어 경기하강을 막아보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국가경제를 위한 것도 아니고, 김대중 정권이 웃으면서 물러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요행수만 바라는 위험한 경제정책을 동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경제가 망할 수도 있는 경제정책이라면, 정부는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현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2003년 2월에 물러나는 김대통령의 경제성적표가 좋아지려면 지금부터 고생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경제학자들의 의견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정부는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채, 단지 돈으로만 해결하려 한다. 이런 경제정책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던지는 식의 구제금융과 경기부양이 진행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금년에 어떻게든 정계개편을 추진해 내년 말 대선에서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발상이다. 또 올 봄에 있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을 성황리에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필자가 판단하는 구제금융과 경기부양의 진짜 이유다. 경제가 너무 나빠진다면 국민들이 정계개편이나 개헌을 어떤 눈으로 보겠는가? 경제가 형편없이 추락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하는 길에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 마음이 생기겠는가?

    결국 경제정책 측면에서 볼 때 ‘강한 정부’는 국민의 주머니에 대해서만 강할 뿐이다. 나라경제의 앞날과 부실기업에 대해서는 약한 정부라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 있지 않은가?

    레임덕을 인정해야

    지난 한 달 동안 ‘강한 정부’의 속내를 들여다보니 그 출발이 참 걱정스럽다. 결국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강한 정부냐”가 중요한데, 유감스럽게도 이 정부는 국민과 야당과 언론에게만 강한 정부라는 평가를 면할 길이 없다.

    너무 몰라주는 국민, 발목잡는 야당, 비판만 일삼는 언론 카르텔 때문에 지금의 나라 형편이 이렇게 왔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그 생각을 고치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가 5년에 한 번씩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국민과 야당과 언론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가 불안해지고 국가 위기가 왔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정부가 왜 필요한 것인가? 우리는 왜 정부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하는가?

    강한 정부는 강한 남편과 같다. 밖에 나가서는 돈도 못 벌어 오고 식구들을 고생시키는 남편이 집 안에서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구타나 일삼는다면, 그는 강한 남편이 아니라 폭력 남편에 불과하다.

    아내와 자식들이 바라는 강한 남편, 강한 아버지는 거친 세상에 나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가정을 지켜주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집에 와서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따뜻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다.

    지금 국민이 바라는 강한 정부도 그런 정부 아니겠는가? 국민은 대한민국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북한을 대하고, 우리 경제를 살려줄 강한 정부를 원한다. 국민에게 권력의 쓴맛을 보여주려는 정부는 강한 정부가 아니라 폭력정부일 뿐이다.

    국민들은 정부가 웃통을 벗고 근육을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정부가 얼마나 무서운 줄 잘 안다. 야당도, 언론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지난 3년간 한순간이라도 정부가 약한 적이 있었던가? 빅딜이라는 위헌적 정책은 과연 ‘약한 정부’가 추진했던 것인가?

    강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김대중 정부는 현재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강하게 대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강한 정부가 아니다. ‘근육질’ 정부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소위 레임덕이란 권력의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이다. 따라서 이를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정리를 잘하는 것만이 레임덕을 막아줄 수 있다. 시간은 가는데 레임덕을 계속 부정한다면, 우리는 정권의 ‘연착륙’이 아닌 ‘경착륙’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정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평소 좋아하는 글로 답하고자 한다.

    “우리는 정부를 깊이 신뢰한다. 우리는 정부를 필요악(必要惡)으로 보지 않는다. 모든 문명사회는 정부의 형태를 갖고 있다. 정부란 결정을 하기 위한 공동사회의 메커니즘이다. 어디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노숙자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며,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지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이다. 정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예컨대 국방, 환경보호, 치안, 고속도로, 상하수도 등을 공급하는 방법이다. 정부는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사회가 당면한 문제, 즉 마약, 범죄, 노숙자, 문맹, 폐기물, 지구온난화, 의료 등은 반드시 집단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정부는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강한 정부의 정도(正道)에 관한 필자의 뚱딴지 같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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