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개혁연대 의원 23인의 ‘여의도 쿠데타’

  • 유창선

    입력2005-04-27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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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의 이재정(李在禎), 정범구(鄭範九), 한나라당의 김원웅(金元雄), 김홍신(金洪信) 의원 등 여야 개혁파 의원 10명은 2월7일 모임을 갖고 공동으로 3대 개혁입법안을 마련,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려고 노력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또 이들은 앞으로 민생정책과 정치개혁에 관한 연대를 해나갈 공동 정책기구를 결성하기로 했다. 이어 2월14일에는 여야개혁파의원 23명이 전체회의를 갖고 ‘정치개혁을 위한 의원모임’을 정식으로 결성했다.

    이날 참석자는 민주당의 이종걸 김태홍 이호웅 정범구 이재정 김경천 송영길 임종석 박인상 천정배 김성호 장성민 정철기 이창복 정장선 의원 등 15명과 한나라당의 김원웅 김홍신 안영근 오세훈 김부겸 김영춘 서상섭 조정무 의원 등 8명이었다.

    2월10일에는 여야 개혁파 의원 20여 명과 김중배(金重培)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 박원순(朴元淳) 참여연대 사무처장, 최열(崔冽)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지은희(池銀姬)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등 시민단체 대표자들이 참석한 연대모임이 국회에서 열렸다. 이날 시민단체 대표들은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말고 개혁파 의원들이 3대 개혁입법의 제·개정에 주도적으로 앞장서줄 것을 주문했고, 여야 의원들은 “시민단체와 힘을 모아 개혁입법을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와 같은 초·재선 의원들의 행동에 중진급 개혁파 의원들도 가세하고 나섰다. 민주당 내 개혁파 중진인 김근태(金槿泰)·임채정(林采正)·장영달(張永達) 의원 등은 최근 잇따라 모임을 갖고 ‘열린정치포럼’을 재정비, 개혁입법 처리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당초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 있을 때만 해도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간주하던 여야 지도부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이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특히 여야 개혁파가 연대하는 공동정책기구 추진은 우리 정치사상 초유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책연대를 표방한 여야 개혁파의 공동기구가 결성된다면 그동안 하향식 당론정치가 파괴되고 정책 중심의 새로운 정치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능케 한다.



    문제는 여야 개혁파 의원들의 이런 연대와 독자행보가 정치적 역풍(逆風)을 이겨내고 전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 과거에도 정치적 여건이 좋을 때는 개혁의 깃발을 내걸었다가, 역풍이 닥쳐오면 깃발을 내던지고 혼비백산 퇴각하는 행태를 보여온 터라,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아직까지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시선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들을 둘러싼 정치환경도 그리 녹록하지 않은 실정이다.

    개혁파 의원들이 역점을 두고 있는 보안법 개정 문제만 해도 아직 낙관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들은 당 지도부가 계속 보안법 개정을 미루거나 반대할 경우, 여야 개혁파 공동으로 독자적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당 지도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개혁파 의원들이 보안법 개정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더라도, 막상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데는 현실적 난관이 따른다. 당장 개정안이 법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당 지도부의 동의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안법 개정의 진통

    현재 법사위원회 위원장은 한나라당 박헌기(朴憲基) 의원. 위원장이 한나라당 소속이다 보니 한나라당이 보안법 개정에 반대하는 한 법사위 상정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위원장을 제외한 법사위원은 14명인데 한나라당 6명, 민주당 5명, 자민련 3명으로 돼 있다.

    이들 가운데 개혁파 범주에 속하는 의원은 송영길(宋永吉), 이종걸(李鍾杰), 천정배(千正培) 의원 정도고, 개혁파 의원들이 자유투표를 시행할 경우 중진인 조순형(趙舜衡) 의원이 가세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당 지도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법사위 통과는 무망하다.

    이런 상황이니 여야 개혁파 의원들은 보안법 개정이 연기돼 현정부에서 개정이 사실상 물 건너 가게 되느니, 부결되는 한이 있더라도 투명한 과정을 통해 결론을 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도 현실적인 면에서 여러 어려움을 안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고민. 다만 새로 민주당 원내사령탑을 맡은 이상수(李相洙) 원내총무가 그 동안 자유투표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보여왔다는 사실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겠으나, 과연 자유투표 불가를 견지하는 김중권(金重權) 민주당 대표를 설득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해 보인다.

    지난 2월7일의 모임은 이들이 넘어야 할 산이 많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날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공동기구의 성격, 명칭, 조직체계 등에 관한 충분한 논의 없이 김원웅(金元雄) 의원을 통해 언론에 보도된 데 대해 격한 토론이 벌어졌다.

    일부 참석자들은 “언론에 보도된 대로 사무총장까지 두는 조직체계라면 사실상 정치세력화라는 오해를 촉발해 각당 지도부를 자극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논란이 커지자, 당초 2월14일로 예정되었던 발족식은 연기됐고, 대신 전체 확대회의를 열어 논의를 계속하기로 했다.

    개혁파의 연대 과정에 드러난 이런 혼선은 여러 부문에서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우선 같은 개혁성향 의원이라 해도 여야간에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지난해 12월26일에 있었던 여야 개혁파 26인의 송년모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지난해 8월 임시국회에서 국회법 날치기 당시 수석부총무로 주역을 맡았던 민주당 천정배 의원이 모임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나라당 참석자들이, 천의원의 참석조건으로 날치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것. 결국 이날 모임에서 천의원이 참석자들 앞에서 공개 사과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개혁파 내부의 미묘한 갈등은 지난해 9월에 추진된 국회정상화 공동성명 무산 과정에도 드러났다. 당시 여야 개혁파 의원들은 국회정상화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자는 데는 합의했지만, 파행정국의 책임소재에 대한 의견이 달라, 끝내 성명을 발표하지 못했다.

    현재도 여야 개혁파 의원들 사이에 불신감은 여전하다. 민주당 의원들은 한나라당 의원들을 향해, “한나라당 같은 수구정당에서 무슨 개혁을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힐문하고, 반대로 한나라당 의원들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개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3김정치의 연장에 가담하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각당 개혁파 내부에도 생각의 차이는 존재한다. 편의상 개혁파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고는 있지만 이들 내부에는 이념적·정치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개혁성향의 의원들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 재야·시민운동, 법조, 언론, 전문직 출신 등 출신과 경력의 차이에 따라 생각이 다른 것이다.

    현재 논란이 되는 국가보안법 문제만 해도 개혁파 의원들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폐지냐 개정이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개정의 폭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판단이 다르다.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인 ‘미래연대’의 한 초선의원은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보수와 개혁을 구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2월3일에 열린 미래연대 수련회에서는 보안법 개정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했으면서도, 막상 방법론에 들어가서는 상당한 견해차이가 드러났다. 흥미있는 것은, 현역 의원들은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반면, 위치가 불안정한 원외위원장들은 당 분열에 대한 불안감이 앞서서인지 신중한 접근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개혁파 의원들이 이런 의견 차이를 딛고 어떻게 결속을 이룰 것인가 하는 점. 더욱이 이들 개혁파 의원들의 경우 ‘강한 개성’의 소유자가 많다는 평을 듣는다. ‘소신’에 따라 살아왔으니만큼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처럼 하나로 모이지 못하는 것이 개혁파 의원들의 최대 약점이라는 지적도 있다. 개성이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제각기 다른 이들 개혁파 의원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개혁파 의원들이 딛고 서 있는 땅은 아직 다져지지 못한 상태다. 정치적으로 다양한 가능성이 있지만 순식간에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이 이들의 현주소다.

    그래서 한 초선의원의 “당 지도부의 경고가 있으면 0.5초도 안 돼 이 자리에서 사라질 의원도 있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경고 한마디면 사라질 개혁파”

    개혁파 의원들의 연대가 발전하면 이에 비례해 각당 지도부의 견제가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여야 지도부 어느 쪽도 개혁파 의원들이 내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딴살림’을 차려 독자세력화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 공동기구가 추진되고 일부 언론에 조직체계도까지 공개되자 여야의 개혁파 의원들에게는 당 지도부로부터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는 “지나친 행동은 집권당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한나라당의 경우는 “자칫 야당분열과 정계개편을 노리는 여당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지난 1월20일에 있은 민주당 창당 1주년 기념식 치사에서 민주당 총재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당원이 당과 더불어 칭찬받고 비판받을 각오를 해야지,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성공한 예를 보지 못했다”며 ‘인기에 매달리는 이기주의적 행동’에 경고를 보냈다. 이 경고 대상에는 1차적으로는 대권주자들이 포함되지만, 당론을 무시하고 ‘튀는 행동’을 하는 개혁파 의원들도 포함된다는 것이 민주당 내의 중론이다.

    개별 의원들에 대한 당 지도부의 경고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공천 때문이다. 16대 국회 들어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이는 데는 16대 총선을 끝으로 김대통령의 공천권 행사가 마감됐다는 사실에 기인한 바 크다.

    현재의 당 지도부가 17대 총선에서 공천권을 행사할지는 불투명하다는 판단이 민주당 내 개혁파 의원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그럼에도 16대 총선 과정에 당 지도부나 중진들로부터 받은 ‘물질적 부채’에 대한 부담은 이들이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이와는 상황이 판이하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정국의 흐름이 이대로 간다면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차기집권이 유력하며, 결국 이총재가 17대 총선의 공천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 커 보이는, 그리고 공천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이는 당 총재의 방침과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분명 정치적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어차피 각당 지도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개혁파 모임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개혁파 의원들은 당 지도부에서 내려오는 압력을 이겨내고 자기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최근 개혁파의 움직임을 과거와 같은 ‘1회성 행사’로 보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정치환경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무엇보다 3김의 영향력이 점차 퇴조될 수밖에 없는 정치상황이 개혁파 의원들을 고무하고 있다. 물론 3김의 힘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겠지만, 김대통령의 임기 종료가 가까워질수록 그 영향력의 쇠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내년 중반기쯤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선출되고 나면, 그가 김대통령을 공격하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마치 1997년 대통령선거 때 이회창 후보가 당총재인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을 치고 나갔듯이, 김대통령과 분리된, 독자적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전략을 쓸 것이다. 결국 민주당은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내부 권력이 교체되면서 그에 따른 과도기적 혼돈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개혁파의 움직임에는 바로 이러한 변화를 내다본 사전 포석이 담겨 있다. 물론 이회창 총재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한나라당은 다르겠지만, 민주당 내부의 그러한 움직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리라 예상한다면, 전망이 그리 비관적인 것만도 아니다.

    이와 관련, 정치권내 개혁파 1세대라 할 수 있는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 부총재는 최근 여야 개혁파의 행동을 역사적 흐름 속에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그는 “세계적인 냉전해체에 이어 남북간의 화해로, 그 동안 우리 정치를 억눌러온 분단이데올로기가 사라져가?있다. 이러한 상황에 개혁정치세력의 등장은 시대적 필연이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국내 정치질서까지 변화시키고 있다”며, “현재 개혁파의 움직임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차 정계개편에 단초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고 환경이 변한다 해도 개혁파 정치인들은 여러 가지 고민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커다란 장벽은 이들의 행동을 이단시하는 당내의 권위주의다. 2월9일에 있었던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나타난 득표 상황은 당의 중진들이 이들의 행보에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차 투표에서 김덕규(金德圭) 의원을 지지했던, 보수성향인 중진들의 표가 결선투표에서 이상수 의원에게 몰렸고, 그 결과 소장파인 천정배 의원이 패배했다. 총무 경선을 통해 중진들은 그 동안 당 쇄신을 요구해 온 초·재선 소장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도 민주당에는 개혁성향의 의원이 많아 여건이 좋은 편. 13대 총선 이래 선거 때마다 재야 혹은 학생운동 출신 인사들이 수혈돼왔고, 이들은 현재 초선부터 3선 그룹까지 두텁게 민주당 내에 분포돼 있다.

    그러나 민주당에는 김대중 총재라는 절대적인 지도자가 버티고 있다. 오랜 기간 1인 정당체제에 익숙한 풍토에서 김심(金心)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그런 여건에서 당 지도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독자 행동을 하는 것은 김심(金心)에 대한 도전이며, 당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왔다.

    한나라당은 사정이 더욱 어렵다. 구여권 출신 인사들이 당 지도부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여건에서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과거 오랜 여당생활로 위계질서가 체질화된 당내 문화는 소장파 의원들의 독자적 목소리를 ‘튀는 행동’으로 단죄하는 경우가 많다.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의원들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 개혁파의 독자적인 목소리는 당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요소라고 여기는 구성원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은 “한나라당은 보수정당이다. 다른 소리 하려면 당을 떠나라”는 목소리가 등뒤에서 종종 들려온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왕따’를 각오한 항명

    결국 ‘왕따’가 될 각오를 하고 항명을 하거나 독자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공천을 의식하고 당직도 기대하며, 당 지도부의 지원 속에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정치인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다.

    정범구(鄭範九), 김성호(金成鎬) 의원 등 민주당의 ‘왕따’ 그룹 가운데 일부는 지난 연말의 당직개편에서 주요 당직에 기용되는, ‘포용정책’의 혜택을 입었다. 소장파의 당 쇄신 요구를 포용하려는 당 지도부의 조치였던 셈이다. 반면 김원웅, 서상섭(徐相燮), 안영근(安泳根) 의원 등 한나라당 내의 ‘왕따’ 그룹은 변함없이 외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다. 개혁파 의원들이 16대 총선에서 한결같이 정치개혁을 내걸고 당선된 이상, 그 약속을 이행할 책임도 이들 몫이다. 16대 국회 개원 이래 이들은 여론의 질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개혁파 의원들의 적극적인 행동에 대한 갈증은 흔히 386정치인들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6대 총선에서 이른바 386 후보들은 정치개혁의 기수로 대접받았고, 선거전에서 그에 따른 프리미엄을 누렸다. 거품이 있기는 했지만, 그만큼 많은 기대를 받았다는 얘기다.

    16대 총선을 두 달 앞둔 지난해 2월, 민주당에 공천신청을 냈던 임삼진(林三鎭) 전 청와대 비서관은 당시 ‘젊은 피’들의 공천 줄대기 행태를 비판하며 자신의 공천신청을 철회하여 화제가 됐다. 시민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뛰어들려던 임씨는, “이른바 ‘젊은 피’로 영입된 사람들이 핵심실세의 비서들과 친해져 작은 공천 정보라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꼴은 보기 안타까웠다”며 “특히 일부 인사들이 공천을 위해 유력자의 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는 얘기를 듣고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16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주변에서는 ‘젊은 피’들의 공천 줄서기가 기성 정치인 뺨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최근 들어 정치권 주변에서 ‘386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과 야유의 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광주 5·18 기념식에 참가했던 386 정치인들이 현지의 한 룸살롱에서 여종업원을 끼고 술판을 벌인 일은 그들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학생운동 출신인 허인회 위원장이 청와대에서 김대통령에게 엎드려 절하는 광경이 언론에 공개돼 논란을 빚기도 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송영길 의원이 의원총회에서 당의 보호가 미흡하다고 질타하자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김성호 의원이 지난해 통일외무위원회의 해외 국정감사 기간에 재미 동포 여성에게 금품을 주고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알려져, 386정치인의 도덕적 위신이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386정치인들 전체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을 계기로 386정치인들에게 쌓여 있던 실망감이 공격적으로 분출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인터넷에는 386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과 울분을 격하게 토로하는 글이 줄을 잇는다.

    국회법 날치기, 선거비용 실사 발언 파문, 국회파행, 의원 빌려주기와 DJP 공조복원 등의 일이 생겨나도 이들의 침묵은 계속됐다. 오히려 그들의 선배인 40대 의원들이 ‘거사’에 나서고 이들은 그저 지켜보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당의 보수일변도 대북정책, 보안법 개정 반대 등에 대해 앞장서서 포문을 여는 것은 주로 김원웅, 서상섭, 안영근 의원 등 40대 이상의 의원들이고, 정작 386세대에 속하는 원희룡(元喜龍), 김영춘(金榮春), 남경필(南景弼) 의원 등은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개혁파 정치인들의 엉거주춤한 행보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차라리 당을 따로 만들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원내 의석이 17석에 불과하던 자민련도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캐스팅보트 구실을 자임하는데, 그보다는 많은 수를 모을 수 있는 개혁파 정치인들이 왜 그러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답하려면 각당의 내부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이회창 총재의 보수화 노선이 점차 강화되면서 개혁파 의원들의 실망도 커지고 있다. 이총재는 그 동안 대북정책, 국가보안법 문제 등과 관련하여 보수적 색채를 강화해왔다. 지금 그의 주변은 주로 과거 민정계 정치인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 내 개혁파 의원들은 다시 민정당(民正黨)이 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이대로 간다면 이 총재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다 해도 과거 정권과 무엇이 다르냐는 회의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2월8일 이총재가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언급한 ‘주류세력 심판론’,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주류세력이 현 정권을 심판해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이야기도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21세기를 맞아 통합의 시대를 열어야 할 때에 우리 사회를 주류-비주류로 나누는 분열노선을 제기해서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는 지적이다.

    당 노선과 보안법 개정문제 등을 둘러싼 이회창 총재와 당내 개혁파 간의 긴장기류가 강화되는 가운데, 이부영 부총재는 “당내 개혁세력이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당내 개혁파로는 유일하게 지도부에 들어간 이부총재는 2월10일 여야 개혁파-시민단체 간의 연대모임에서, “한나라당에 남아 있으면서 당의 성격을 변화시키려고 미력이나마 노력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역사적 소명이 있다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만약 개혁세력이 뒤로 물러서도록 내부가 강요한다면 결단을 해야겠다”고 말해, 보안법 개정 문제를 필두로 한 보수회귀 당노선에 대해 정면으로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총재와 개혁파 의원들 간의 이런 긴장기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이총재가 보수와 개혁의 균형을 고려해 이들을 포용할 것인지, 아니면 완고한 보수노선을 고수해 개혁파 의원들의 집단탈당사태를 촉발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이처럼 한나라당 이총재와 개혁파 의원들 간의 긴장관계는 정계개편 내지 개혁신당 출현의 변수로 자리하고 있다.

    이회창과 개혁파의 대치

    민주당의 경우는 대통령후보 선출과정에 당이 분열할 가능성이 있다. 김대통령의 영향력이 퇴조한 시점에, 새로 선출되는 후보에게 과연 승복할 것인가에 대한 반신반의(半信半疑)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전망이기는 하지만,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선출과정도 신당 출현에 잠재적 변수가 될 수 있다.

    언제나 그랬듯, 차기 대통령선거 과정도 정국을 요동치게 할 변화를 불러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개혁파 의원들은 아직 독자적으로 정계개편을 시도할 조건은 갖추지 못했지만, 각당 내부의 유동적 상황은 여러 가지 변화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

    이러한 변수들이 있지만 현시점에서 개혁신당은 시기상조라는 것이 당사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개혁신당을 구성하려면 최소한 원내교섭단체의 요건인 20명 이상이 모여야 하는데, 다음 총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의원 가운데 몇 사람이나 모험에 뛰어들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패배의식이 확산된 데에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15대 총선 당시 국민회의행을 거부하고 3김정치 청산을 내걸었던 이른바 ‘꼬마민주당’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총선에 나섰다.

    당시 꼬마민주당에는 당대표인 이기택씨 이외에 이부영, 홍성우, 노무현, 이철, 박계동, 유인태, 원혜영씨 등 이른바 스타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 개혁을 내세운 정당이 지역정당 구조 아래에서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 결과였다.

    꼬마민주당의 경험은 그 후 개혁파의 머릿속에 패배의식으로 자리잡는다. 현재의 지역주의 정치구도가 유지되는 한, 아무리 명분있고 의미있는 정치적 도전도 무모하다는 비관론이 개혁파 정치인들의 정서에 깔려 있다.

    그래서 개혁파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청산대상으로 삼았던 3김정치의 한 당사자인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거나, 자신들이 ‘5·6공세력’이라 지칭했던 당사자들과 당을 같이하며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일원으로 국민회의에 입당한 노무현 장관은 후일 당시의 선택에 대해 “대단히 자존심이 상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개혁파 의원들은 시기상조론을 펴면서도 자신들이 일단 행동에 나서게 되면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 전개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극에 달했던 지역주의 정치는 점차 퇴조하는 반면, 개혁파 정치인들의 저변은 두터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한나라 양당을 합하면 그래도 수십 명의 초·재선의원이 뜻을 같이할 수 있고, 김근태·이부영·정동영 의원같이 비중 있는 지도부급 인사들이 힘을 합한다면 개혁세력은 정국의 한 축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이념과 노선에 대한 실험이 활발한 유럽의 정치를 보면 영국의 토니 블레어에게는 ‘제3의 길’이 있었고, 독일의 슈뢰더에게는 ‘신중도 노선’이 있었으며, 프랑스의 조스팽에게는 ‘쇄신적 사회주의’가 있다. 이들은 기존 정치이념을 시대환경에 맞게 수정해 나가기 위한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그에 적합한 정책들을 선택해왔다.

    우리 개혁파에는 이런 유럽식 노선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권 내에서 개혁파 혹은 개혁세력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지 10년이 넘지만, 어떤 정치인과 정치집단도 자신들의 정치적 비전과 프로그램을 국민에게 제시한 적이 없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발전이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들이 필요한지에 대한 대안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우리 정치의 개혁파들은 언제나 3김 정치를 공격하는 네거티브 정치에 머물렀을 뿐, 정작 3김 정치를 넘어서는 자신들의 비전과 프로그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는 개혁파가 책임있는 정치세력으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 장애요인인 셈이다.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여야 개혁파 의원들과 시민단체 대표들의 간담회에서 시민단체 대표들은 의원들을 향해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다. “양심과 신념의 유지 여부가 문명인과 미개인의 차이다”, “개혁파 의원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 보수 정치인들은 잘 뭉치는데 개혁 정치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거냐”며 시민단체 대표들은 개혁파 의원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최근 들어 개혁파 의원들이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겠다, 공동기구를 결성하겠다는 등 나름대로 분발하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민단체들의 시선은 아직 차갑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미래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부겸(金富謙) 의원은 “각자가 속해있는 정당조직의 논리를 전면으로 거부하기는 어렵다. 집단의 논리, 저급한 지역이기주의의 논리에 가담하지 않으면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다. 당조직의 피구속성을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의원은 “그러나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산 동세대인들에 대한 책임감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인식을 공유하고 우리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정말로 믿음을 주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며 자신들의 노력이 꾸준히 계속될 것임을 강조했다.

    결국 문제는 개혁파 정치인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게 중론이다. 젊은 정치인들의 우유부단에 대한 비판도 나오지만 그들은 우리 정치판 새바람의 진원지로 여전히 국민들에게 주목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 젊은 정치인들이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만나고 있다. 여야의 개혁파들은 지금 ‘새봄의 반란’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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