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1호 동지를 사수하라”

김정일 서울답방 2박3일 총력 경호작전

  •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5-04-27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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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이 가시화되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호. 경호에 실패하면 단순한 회담 실패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에는 6·25전쟁 이후 가장 짙은 戰雲이 감돌게 된다.

    대통령 경호실은 2차 회담을 완벽히 경호할 수 있을까? 63년 창설된 대통령 경호실은 驚天動地할 사건을 네 차례나 겪으며 성장했다. 북한군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사건(68년 1·21사태),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74년 8월15일), 김재규 정보부장의 박대통령 저격사건(79년 10·26사건), 북한군 정찰국 요원에 의한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83년 10월9일)이 그것이다.》

    이 4대 사건 중 10·26을 제외한 3건은 북한에 의한 도발이었다. 4대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호실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신동아는 베일에 가려 있는 4대 사건의 비밀을 최초로 밝히고, 경호의 관점에서 이를 냉정히 분석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과 2차 남북정상회담 경호의 방정식을 풀어보았다.

    지난 2월14일 중앙일보가 보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월 말 답방 가능성’ 보도는 오보로 판명되고 있다. 하지만 김위원장의 올 봄 답방은 가시화돼가는 분위기다. 지난 1월 김위원장은 이미 개혁·개방의 길을 달리고 있는 중국을 방문했다. 이는 남한 답방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해석된다. 지난해에도 김위원장은 평양에서 열린 1차 남북회담을 한 달 남짓 앞둔 5월,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제 바빠진 것은 남쪽이다. 한국으로서는 한미정상회담을 가진 후 김위원장을 맞아야,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부시 정부와의 ‘연줄’이 짧아서인지, 한미정상회담 날짜를 신속히 잡지 못했다.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 장관과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을 미국에 보내는 등 총력 교섭을 벌인 후에야 겨우 날짜(3월7일)를 잡았다. 미국에 새 정부가 들어설 경우 대개 한미정상회담이 미일정상회담보다 빨랐지만, 이번만은 미일정상회담이 열린 후 한미정상회담을 갖게 되었다.



    가장 큰 화두는 警護

    한미정상회담이 열리고 난 후 김대통령은 올상반기중 김위원장을 맞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들어간다. 이 회담은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는 곧 ‘한민족이 자력으로 평화통일을 모색하겠다’는 것을 내외에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통일 모색 과정에는 숱한 암초가 널려 있다. 이러한 암초 중에서 가장 거대한 것은 ‘경호(警護)의 실패’다. 두 정상이 회담을 아무리 잘 했더라도, 경호에 실패하면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평양에서 열린 1차 정상회담은 ‘완벽한 통제’하에서 이뤄졌다. 하객은 물론이고 꽃술을 들고 김대통령을 환영한 평양 시민들조차도 엄격한 신원조회를 거쳐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두 정상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적었다. 그러나 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된 남한은 ‘사상의 자유’가 있는 세계다. 평양과는 경호 환경이 전혀 다른 것이다.

    김정일이 서울에 오면, 환영하는 사람외에 반대하는 사람도 연도에 나갈 수 있다. 6·25전쟁 때 가족과 재산을 잃고 간신히 월남한 사람,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폭파된 것으로 알려진 87년의 KAL 858기 희생자 가족, 동진호를 비롯한 납북 어부자 가족,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벗어난 탈북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김위원장에 대해 절대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이미 지난 2월1일 KAL 858기 희생자 가족들은, 김위원장을 살인 혐의로 검찰에 고소해 놓았다.

    이들이 김위원장을 향해 계란을 던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며칠 전부터 계란 판매를 금지하면, 책이나 신문지 혹은 주머니에 넣고 간 수첩을 던질지도 모른다. 모든 물품의 소지를 금지하면, 큰 소리로 욕을 퍼부을 수도 있다. 경호 당국은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겠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99년 6월3일 김포공항에서 일어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계란 세례 사건을 되짚어보자. 김 전대통령은 퇴임한 지 7년이 지나지 않았기에, 가장 경호를 잘 한다는 대통령 경호실의 경호를 받고 있었지만 ‘계란 테러’를 당했다.

    세계사는 경호 실패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1차 세계대전이다. 1914년 6월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는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을 맞고 절명했는데,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했다. 역사에서 뭔가를 배우겠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철학이 있다면, 경호 당국은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이 뜻밖의 사태로 비화하지 않도록 ‘총력경호(總力警護)’하는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2차 남북정상회담의 경호는 무조건 완벽해야 한다.

    경호 관례를 무시한 1차 회담

    더불어 이번 회담 경호는 북한의 경호 기관인 호위사령부에, ‘경호가 무엇인지. 신뢰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1차 회담시 평양 측은, 경호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큰 ‘결례(缺禮)’를 범했다고 한다. 정상회담 일자가 잡히면, 양측 실무자들은 통상적으로 2달 전부터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안건(Agenda)을 정하는 협상에 들어간다. 동시에 양측 경호 책임자들도, 방문자 측의 경호원 숫자와 소지 무기, 경호 방법 등을 협의한다. 이러한 협상이 타결되면 방문자 측의 경호 선발대가 주최국에 들어가, 자국 정상이 묵을 숙소와 방문지 등을 사전 점검한다.

    그러나 1차 남북정상회담은 안건도 정하지 않고, 사전 경호 협상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열렸다고 한다. 남과 북은 지난 50여년간 적대관계였다. 그렇다면 더욱 경호가 철저해야 하는데, 우리측 경호 선발대는 북한 측이 반대하는 바람에 김대통령이 묵을 숙소나 회담장소 등을 사전 점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간에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 주저하지 않고 북한에 들어갔다.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경호는 자기네가 책임질 테니, 남측에서는 최소한의 경호 요원이 최소한의 무기(권총 정도)만 갖고 들어오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경호실은 남북대화를 트겠다는 김대통령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경호 세계만큼 철저히 ‘상호주의’가 지켜지는 곳도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 대통령이 방문할 때 5명의 경호원이 따라 들어갔으면, 저쪽 정상이 올 때도 5명의 경호원만 대동해야 한다. 적대 관계인 양측이 신뢰를 구축하려면, ‘무력(武力)에 있어서는 양측이 똑같이 한다’는 원칙부터 세워야 한다(무력의 신뢰). 무력의 신뢰는 경호의 신뢰를 통해 쌓이고, 경호의 신뢰는 결국 철저한 상호주의 위에 쌓이게 된다. 1차 회담 때 우리 대통령이 경호 문제에 용단을 내렸으면, 이번에는 김위원장이 그만한 크기로 ‘통 크게’ 화답해줘야 한다.

    2차 남북정상회담의 경호를 둘러싼 두 가지 문제 중 상호주의 부분은 남북 경호 당국이 벌일 앞으로의 회담에 맡겨놓기로 하자. 지금 말한 주제는 완벽한 경호다.

    과연 대통령 경호실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완벽한 경호를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한국 경호사(史)부터 찬찬히 살펴야 한다. 지난 30년간 압축성장해온 한국 경제에 경제의 모든 것이 녹아 있듯, ‘폭발적’으로 성장해온 한국 경호 역사에는 경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조선시대까지 임금을 지키는 것은 경호가 아니라 ‘호위(護衛)’로 불렸다. 대한제국이 생기자 비로소 근대적인 호위조직이 생겼는데 이때 황제를 호위한 것은 경위원(警衛院) 혹은 황궁경위국(皇宮警衛局)이라고 불린 경찰 조직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해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다시 세우자, 대한제국 때의 전통이 되살아나 내무부 경무국(경찰청의 전신) 산하 경위부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호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다 1949년 2월23일 ‘경무대경찰서’가 창설돼 대통령에 대한 호위를 전담했다(경무대는 청와대의 옛이름이다). 그리고 그해 12월29일 내무부 훈령으로 ‘경호규정’이 제정되면서, ‘경호(警護)’라는 용어가 처음 쓰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경호는 경찰이 대통령을 호위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말인데, 경찰이 대통령의 신변을 호위하지 않는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1960년 4·19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내각제가 시작됐다. 권력이 대통령(尹潽善)에서 총리(張勉)로 이동하자, 경무대경찰서는 폐지되고 서울경찰국 경비과에서 경무대 경호를 담당했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주도한 군사혁명은 경찰 경호를 마감시켰다. 전권을 장악한 박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의장에 취임하자, 박종규(朴鐘圭) 소령을 중심으로 한 ‘군 경호대’가 창설돼 박소장을 경호했다. 1961년 6월1일 창설된 중앙정보부는 군 경호대를 흡수했다. 그후 중앙정보부는 ‘경호대 설치령’을 제정해, 행정·사전기획·경호·정보·기동경호의 5개 과, 37명으로 편제된 경호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독립된 대통령 경호실은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탄생했다. 그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박의장이 5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사흘 전인 1963년 12월14일 ‘대통령경호실법’이 공포되었다. 이틀 후 ‘대통령경호실법시행령’이 공포되고 다음날(12월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대통령 경호실이 발족했다. 미국에서는 재무부 산하 비밀수사국(Secret Service·약칭 SS)이 대통령 경호를 맡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본따서, SS 앞에 ‘대통령’을 뜻하는 P(Presidential)을 붙여 대통령 경호실의 영어 약칭을 PSS로 정했다.

    이후 경호실은 네 차례 엄청난 사건을 겪는데, 1968년의 1·21사태와 74년의 문세광 사건, 79년의 10·26사태, 83년의 아웅산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피비린내를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사건을 겪기 전 경호실은 왕조시대의 호위무사들처럼 단순하게 대통령을 경호했으나, 이 사건을 겪으며 자유민주체제에 맞는 경호기관으로 거듭났다.

    2선에서 걸린 北 특공대

    세계 주요 국가들은 대개 3중으로 경호하는 ‘3선(線) 경호’를 펼친다. 청와대를 예로 들면, 대통령 관저 경호가 1선이고, 청와대 담장을 지키는 것이 2선, 청와대 담장 밖에서 침입자를 막는 것이 3선 경호다. 예외적인 경우가 북한이다. 김정일이 집권하면서 북한은 4선 경호를 채택했다.

    1·21사태는 2선까지 뚫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청와대 공격 임무를 부여받은 북한군 정찰국(한국군에 빗대면 국군정보사쯤에 해당) 소속 특공대 31명이 일으켰다. 이들은 ‘청와대를 폭파하면 남한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는 세뇌 교육을 받았다. 개성을 출발해 휴전선을 넘은 이들은 산속을 행군하다 어린 나무꾼 형제와 마주쳤다. 여기서 특공대는 이들을 ‘죽이자’ ‘죽이지 말자’로 논쟁하다,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이들을 죽이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체를 파묻어야 하는데, 한겨울이라 꽝꽝 언 땅을 파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것이 큰 실수였다. 나무꾼 형제가 북한군 출현 사실을 신고한 것이다.

    한국 군·경은 즉각 방어망을 구축했지만 북한 특공대는 서울 세검정까지 침투했다. 세검정부터는 도시가 시작되므로 그들은 도로를 따라 청와대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비상으로 출동한 한국군 특수부대로 위장한 것이다. 대오를 형성한 이들이 자하문까지 접근해왔을 때 검문중이던 종로 경찰서 수사2계 박태안(朴泰安)·정종수(鄭鍾壽) 형사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소속이 어디냐”고 물으며 따라 붙었다.

    특공대는 이들을 따돌릴 생각으로 “육군 방첩대(국군정보사의 전신)다. 작전이 걸려 출동했다”고 대꾸했다. 그러나 두 형사는 청와대 부근에서 작전한다는 것이 수상해 계속 같이 걸으며 말을 걸었다. 이때 종로경찰서장인 최규식(崔圭植) (후에 총경으로 추증)이 지프를 타고 와 가로막았다. 특공대는 ‘육군 방첩대’라고 우겼지만, 최경감이 “내가 모르는 방첩대가 어디 있느냐”며 막는 바람에 옥신각신 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다 그중 한 명이 최총경에게 총을 난사하며 특공대원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일부는 청와대 쪽으로 뛰었는데 이들은 청와대 담장(2선)을 넘다가 총소리를 듣고 경비를 강화한 경호원들에게 사살되었다. 나머지 대원들도 차례차례 제압되고, 2명만 살아 남았다. 그중 한 명은 한국군에게 생포(金新朝)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북한으로 돌아가 영웅이 되었다. 1·21사건은 침입자를 3선에서 발견해 2선에서 ‘성공적으로’ 막아낸 사건이다. 이때의 경호실장은 박종규였는데, 청와대 침입을 막아냈기에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은 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74년 8월15일 제 29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암살자(文世光)와 경호원(朴鐘圭)이 총을 마주 겨누는, 한국 경호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문세광(당시 22세)은 민단(民團)계 집안에서 태어난 재일동포였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박대통령이 유신독재를 펼치는 것을 보고 적개심을 키워나갔다. 이때 그가 만난 사람이 일본 조총련 오사카(大阪)부 이쿠노(生野)구 서(西)지부 정치부장인 김호룡(金浩龍)이었다. 김호룡은 문세광에게 “박정희를 죽여야 한국의 민주화가 달성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고, 문은 여기에 세뇌되었다.

    문세광은 암살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자칼의 날’을 탐독하며 박정희 암살을 꿈꾸기 시작했다. 오사카의 한 파출소에 들어가 권총을 훔친 그는 한국으로 날아와 조선호텔에 투숙했다. 한국 신문을 통해 광복절 행사에 박대통령이 참석한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VIP로 위장하기 위해 대형인 포드 20M 승용차를 빌려 타고 국립극장을 향했다. 3선 경호를 담당한 경찰은 ‘승차입장’이라는 비표가 없는데도 대형차에 위축돼, 이 차를 통과시켰다. 문세광은 정장을 입고 중절모까지 쓴 중후한 차림으로 차에서 내려 국립극장으로 들어갔다.

    국립극장 안에는 비표를 단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극장 입구를 지키던 경찰관은 일본어를 쓰는 문을 초청받은 외국인 VIP로 판단하고, 비표가 없는데도 들어가게 했다. 이는 경호원이 외국어를 전혀 못할 때 외국인에게 얼마나 약한지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우다.

    극장 로비에서 문은 우연히 마주친 경호실 경호계장과 일본말로 주고 받는 수작을 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비표가 없는 것을 본 경찰관이 출입을 제지하자, 문은 경호계장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들어가라고 했다”며, 경찰관을 따돌리고 객석 안으로 들어갔다. 암살자는 경호계장을 아는 척하는 수작을 벌임으로써 간단히 방어망(2선)을 돌파한 것이다.

    객석에 들어온 문은 백모 순경의 안내를 받아가며 뒷줄 좌석에 앉았다. 10여 분 후 박대통령이 연설하고 있을 때 문은 왼쪽 허리춤에 감춘 권총을 뽑으며 일어나다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자기 왼쪽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혔다. 그런데도 그는 총을 뽑아 들고 중앙 복도로 빠져나갔다. 이때 문세광이 앉았던 좌석줄에는 김모 순경이 있었다. 그는 문세광이 오발한 총성을 들었을 텐데, 또 대통령이 연설하는 도중에는 일반인이 중앙복도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상식으로라도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중앙복도로 나온 문세광이 절뚝거리며 돌진하자, 권총을 본 사람들이 “우-우” 소리를 질렀다. 중앙복도 좌우 좌석에는 여러 명의 경찰관이 앉아 있었으나 그 누구도 문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때 몸을 움직인 이는 연단에 앉아 있던 박종규 실장이었다. 연단은 조명을 받아 훤하지만, 객석은 어두웠다. 박실장을 고개를 빼고 중앙복도로 나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는 듯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종이에 싼 권총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권총을 들고 나오려다 떨어뜨렸다. 박실장이 권총을 주워 올리는 순간 문세광이 제2탄을 발사했다. 첫발 오발로부터는 6초가 지난 시점이었는데, 이 총알은 20.9m 떨어진 곳에서 연설문을 읽던 박대통령의 연설대에 맞고 튕겨나갔다.

    對敵자세만 취한 朴鐘圭

    연설대는 철판이 들어 있어 권총알 정도는 튕겨낸다. 이어 문은 세 번째로 방아쇠를 당겼는데, 불발이었다. 이것이 박대통령을 살렸다. 두 번째 총알이 연설대에 맞고 튕겨나가자 놀란 박대통령은 반사적으로 연설대 아래로 몸을 숙이다가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연설대에 가려 문세광은 넘어진 박대통령을 볼 수 없었다. 이때쯤 총을 주워든 박실장이 연단 앞으로 나와 문을 향해 권총을 겨누는 ‘대적(對敵)자세’를 취했다. 건맨과 건맨이 맞서는 아주 강렬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연단에 있던 요인들은 잽싸게 몸을 낮추었다. 그러나 육여사만은 제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박실장이 총알처럼 튀어나가 대적자세를 취한데 대해, 많은 사람은 “역시 피스톨 박이다. 용감하다”고 칭찬했지만, 경호 측면에서 보면 이는 ‘빵점’이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기자는 ‘연설대뿐만 아니라 육여사 앞에 있던 탁자에도 쇠판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냈다. 박실장은 대적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이 탁자판을 객석을 향해 세우고, 그 뒤로 육여사를 ‘내리 누르는’ 육탄방어를 했어야 한다.

    박대통령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문세광은 육여사를 향해 네 번째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육여사의 목이 꺾였다(絶命). 1탄이 발사되고 7초가 지난 시점이었다. 경호 수칙 중 둘째는 ‘암살자를 육탄으로 덥쳐라’다. 그러나 중앙복도 좌우에 앉아 있던 경찰관은 문세광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다만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온 이대산씨가 총을 든 채 앞으로 걸어가는 문세광의 발을 걸었다. 문은 비틀하며 5탄을 발사했는데 이 총알은 연단 뒤에 있던 태극기를 맞혔다. 그리고 문은 연단과 객석 사이에 있던 오케스트라단의 칸막이를 잡고 몸을 세우더니, 칸막이에 권총을 쥔 오른 손을 올린 채 연단을 겨냥했다. 문의 총은 6발 리벌버인만큼 마지막 사격을 위한 조준이었다. 이 순간이 마침 현장에 있던 뉴스위크 동경 특파원의 카메라에 잡혔다.

    그때서야 좌석 전열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일어나 뒤에서 문세광을 덮쳐, 문은 마지막 총알을 쏘지 못하고 검거되었다. 이때까지 박실장은 대적자세를 취했을 뿐 실탄은 발사하지 않았다. 연단 위에는 박실장 외에도 이상렬(李相烈) 수행과장과 박상범(朴相範) 수행계장 등 경호원 네 명이 좌우로 걷은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 ‘잘못된 경호’이긴 하지만 박실장이 권총을 들고 뛰어나왔다면, 이들 또한 총을 뽑아들고 뛰어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한국 경호 역사상 지우기 힘든 치욕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커튼 뒤에서 뛰어나오던 한 경호원이 총소리에 ‘겁을 먹었는지’ 다시 커튼 뒤로 도망간 것이다.

    경호원들은 문세광이 제압된 후에야 전부 연단 위로 쏟아져 나와 박대통령이 숨어 있는 연설대 주변을 호위했다. 이때 한 경호원이 ‘너무 긴장했는지’ 객석을 향해 총을 쏴, 합창단원으로 와 있던 성동여실고 2학년 장봉화양을 절명케 했다. 그 바람에 현장 분위기는 더욱 긴장되었다. 문세광과 육여사가 들려 나가자, 팽팽한 긴장감을 깨려는 듯 박대통령이 연설대 밑에서 일어나 연설문의 중단된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 읽어나갔다. 연설문을 끝까지 읽은 그는 육여사의 고무신을 주워 들고 손을 흔들며 연단을 내려갔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담대한 박정희’라고 평가했지만, 경호 측면에서는 이것도 빵점이다. 암살 세력은 실패에 대비해 현장에 제2, 제3의 암살자를 투입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호원들은 사고가 나면 대통령을 사고 현장에서 무조건 빨리 대피시켜야 한다.

    정상을 지켜야 하는 경호원들이 암살자가 쏜 총소리에 겁을 먹고 피하는 것은 전형적인 후진국 경호 행태다. 이와 똑같은 광경이 81년 10월6일 이집트에서 연출됐다.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사다트는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치러온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78년 두 사람은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집트 군부 강경파는 이 협상을 굴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다트는, 평화 정착을 자축하는 의미로 이날 군사 퍼레이드를 열었다.

    퍼레이드 도중 트럭 적재함에 타고 사열대 앞을 지나가던 일단의 군인들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총을 쏘며 사열대로 돌진했다. 그 순간 경호원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고 몸을 숙였고, 이들은 사다트를 찾아내 사살했다.

    총소리가 들리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게 된다. 그러나 경호원은 이러한 본능을 이겨내고 대통령을 향해 몸을 날려야 한다. 이러한 능력이 없다면, 경호원이랍시고 어깨에 힘주고 다닐 이유가 없다. 사다트 피격과 문세광 사건은 무도(武道)만 익힌 경호원은 보통 사람들보다 ‘반사신경’이 빨라, 위급 상황에는 오히려 먼저 몸을 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81년 3월30일 미국 워싱턴의 힐튼호텔 앞에서 발생한 레이건 대통령 저격 사건이다. 저격범 힝클리는 레이건 대통령이 다음 행사를 위해 전용차를 타려는 순간 지근거리에서 연속해서 세 발의 실탄을 발사했다. 이중 한 발이 레이건 대통령의 왼쪽 가슴을 뚫고 들어가 허파에 박혔다. 다른 한 발은 브래들리 백악관 대변인을 맞혔고, 또 한 발은 경호 임무를 위해 현장에 나와 있던 사복 경찰관을 맞혔다.

    앞서도 설명했듯 미국 대통령 경호는 재무부 산하 비밀수사국(SS)이 담당한다. 총소리가 들린 순간 SS 요원들은 총을 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미식축구 선수처럼 레이건 대통령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육탄 방어망이 형성되자 한 요원이 전용차 문을 열고 레이건 대통령을 ‘집어 던졌다’. 전용차는 바로 출발했는데, 정확히 2분30초 만에 조지워싱턴대학 병원 응급실에 레이건 대통령을 내려 놓았다. 그때까지도 레이건은 자신이 총알을 맞은 줄 몰랐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권총알을 맞은 사실을 모를 경우, 사람들은 대개 총알을 맞은 부위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총알을 맞은 부위에서 나오는 피를 보고 겁을 먹었을 때 비로소 고통을 느끼는데, 이것은 육체적 아픔이 아니라 대개는 심리적인 고통이다”고 말한다.

    문세광 사건 때 경호원들은 문세광을 제압할 때까지 육여사를 후송하지 못했다. 반면 레이건 대통령은 2분30초밖에 걸리지 않은 신속한 후송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 경호원들은 문세광을 덮친 후 박대통령을 보호했지만, SS 요원들은 레이건을 보호한 후 힝클리를 덮쳤다. 이는 양국의 경호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SS 요원들의 육탄 방어

    어떻게 SS 요원들은 본능을 억누르고 몸을 날릴 수 있을까. 정답은 ‘조건반사’에 있다. SS 요원들은 “총성이 들리는 순간 대통령을 덮치는” 교육을 반복해서 받는다. 전문가들은 “총성이 울리는 순간 대통령을 위해 몸을 날리는 경호원은 사생관(死生觀)과 직업관이 서 있는 사람들이다”고 말한다. 조건반사를 만드는 반복 훈련과 더불어 사생관·직업관을 세우는 교육을 거듭해서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몸을 날리는 것이다. 전문적인 식격이 있으므로 이들은 대통령의 몸을 손 대기 어려운 ‘옥체(玉體)’가 아니라, 집어 던져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경호 대상체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SS는 이 사건을 ‘경호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분류하고 있다. 이유는 그 어떤 요원도 힝클리가 총을 뽑는 순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호원의 시선은 경호 대상자(대통령)가 아니라 경호 환경(모여 있는 사람)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레이건 대통령이 다음 이동지로 가기 위해 차에 타려고 할 때인지라, SS 요원들은 저도 모르게 대통령을 쳐다 보았다. SS는 요원들의 시선 이동까지 체크하는데, 우리 경호 요원은 본능을 억누른 육탄 방어조차 못한 것이 당시의 한국과 미국의 경호 수준 차이였다.

    SS는 한국 경호실이 추구하는 목표점이자, 한국 경호실의 ‘선생’이다. 한국 경호실이 영문 이름을 PSS로 정한 이유도 이것이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SS는 어떤 기관인가? 경호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잠시 SS의 실체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미 재무부 산하 비밀수사기관인 SS(Secret Service)가 미 대통령을 경호하게 된 역사적 배경부터 추적해보자. 이 과정에 ‘SS는 미국 정보·수사 기관의 모태’라는 뜻밖의 사실이 발견된다. 이야기는 19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1년부터 1865년 사이 4년간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르느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때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건맨들이 활개치던 시절, 뒤집어 말하면 미국 연방정부의 권한이 매우 약하던 때다. 이 시기 미국 연방정부의 권한은 외교·국방·화폐 발행·우편 등 몇 개로 한정돼 있었고, 치안을 비롯한 민생 업무는 주정부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가 맡고 있었다. 이 시대 미국인들은, 주민 중에서 가장 총을 잘 쏘는 사람을 ‘보안관(Sheriff)’으로 뽑아 치안을 맡기고 있었다. 국가경찰 제도가 없었던 것이다.

    연방정부가 화폐 발행권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금화나 은화 등 경화(硬貨) 발행에 한정된 것이었다. ‘은행권’이라고 하는 지폐는, 은행이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 독자적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무려 7000여 종의 은행권(지폐)이 유통되었다. 이런 상황에 남북전쟁이 일어났으니, 위폐 발행이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위폐는 수세에 몰린 남부 미국에서 조직적으로 제작되었다. 남부 미국은 이 위폐로 전비를 마련하고 북부 미국(연방정부)의 경제 질서를 마비시키려고 했다.

    위폐 단속반으로 출발한 SS

    주정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터라, 위폐를 단속할 여력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1865년 4월14일 링컨 연방정부 대통령이 연방 재무부에 “위폐 단속 기관을 설립하라”고 명령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날 링컨은 암살되었다. 링컨은 사망했지만 이 명령은 시행돼, 1865년 7월5일 재무부는 W.P. 우드를 국장으로 한 위폐단속 기관을 만들었다. 이 기관은 사법경찰권(수사권)을 가진 사복(私服) 요원들로 구성됐기 때문에 ‘Secret Service’로 명명되었다(시크릿 서비스를 우리 말로 직역하면 ‘비밀수사국’ 정도가 된다). SS는 미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최초로 생긴 수사기관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4년이 흐른 1869년, 미 연방의회는 위폐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국정화폐 발행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국정화폐를 발행하자 위폐 유통이 크게 줄어들었다. 1901년 9월14일. 이런 가운데 링컨에 이어 맥킨리 대통령이 암살돼 연방대통령 경호 문제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 연방대통령에 대한 경호 강화는, 연방대통령의 권한 강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연방의회는 연방대통령 경호 기관을 만드는데 협조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차일피일 시간만 지나자, 1906년 견디다 못한 연방대통령 비서관이 재무부 장관을 만나 “연방정부 유일의 수사기관인 재무부의 SS가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합의를 도출해냈다. 경호기관을 만들지 않고도 대통령을 경호하는 방안을 만들어내자, 연방의회는 이를 반겼다. 연방의회는 SS가 대통령을 경호할 수 있도록 재무부의 근거법인 ‘일반경비(經費)법’을 개정했다. SS에 의한 대통령 경호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연방정부 내 유일한 수사기관인만큼 SS는 법무부에도 요원을 파견했다. 이런 식으로 SS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자, 연방의회는 SS의 활동 범위를 제약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이로써 SS의 파견이 어려워지자 법무부는 “파견나온 SS 요원을 아예 법무부로 이적시켜 달라”고 요구해 허락을 받아내고, 1909년 이들을 모태로 수사국을 창설했다. 1935년 이 기구가 그 유명한 ‘연방수사국(FBI)’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FBI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정보·수사기관인 중앙정보국(CIA)은 2차대전 후인 1947년 영국의 비밀정보부(SIS) 등을 본따 만든 것이다.

    후버 대통령 시절인 1930년 5월13일 한 관광객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백악관 대통령 식당까지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까지 SS는 대통령 신변만 경호하고, 백악관 건물 경비는 제복을 입는 별도의 경찰조직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복을 입는 별도의 경찰조직이 SS에 편입되었다. SS가 대통령 신변 경호뿐만 아니라 백악관 건물까지 경비하게 된 것이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럽 정상들은 미국으로 달려와, 도움을 요청했다. 전쟁중인 나라의 정상들은 경호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 외국 정상 경호도 SS에 맡겼다. SS의 경호 영역이 더욱 넓어진 것이다. 그러나 SS의 주 임무는 어디까지나 위폐 단속이다. SS는 늘어나는 경호 업무에 대응하기 위해 ‘특별수사관(Special Agent)’을 만들었다. 특별수사관은 대통령 경호를 전담하고, 일반 수사관은 위폐 단속에 전념케 한 것이다. 특별수사관과 일반 수사관은 수시로 순환시켰다.

    활동 영역이 넓어졌지만 SS는 독자적인 근거 법률을 갖지 못하고, ‘예산법(一般經費法의 후신)’에 근거해 운영되고 있었다. 1951년 바우프만 SS 국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의회를 움직여 SS 근거법을 만들게 했다. 이로써 SS의 활동 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위폐 수사와 경호 같은 기존 업무 외에도, 재정 범죄·신용카드 사기범죄·컴퓨터를 이용한 범죄도 수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제범죄를 수사하는 SS가 대통령을 경호하는 데는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 있었다. 대통령 암살자들은 대개 SS의 정보 수집에 사각지대인 경제외의 분야에서 배출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되면서 극명히 드러났다. 이 사건 직후 ‘워렌위원회’가 설치돼, 사건 진상을 밝히고 암살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오랜 조사 끝에 워렌위원회는 SS에 경제 외의 분야에 대한 정보 수집에 주력하는 FBI나 CIA와 정보를 교류하라고 권유했다. SS의 약점을 찾아낸 것이다. 이후 SS는 FBI와 CIA로부터 방대한 자료를 제공받아 대통령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과 조직에 관한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화했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경호기관이 된 것이다.

    SS 직원들은 같은 급수의 재무부 공무원은 물론이고 FBI 요원보다도 연봉이 많다. 그러나 CIA 요원보다는 약간 적은데, CIA 요원들은 출장과 해외 주재가 잦아, 대졸자들은 SS 입사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5년 이상 근무한 SS 요원의 연봉은 5만 달러(약 6000만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좋은 봉급 때문에 매년 SS에는 하버드나 예일 등 명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미국 명문대학 졸업자들은 대개 한두 가지 이상의 운동을 할 줄 알아 사격과 무도는 가르치면 금방 따라온다. 이것이 SS가 세계 최고의 경호 기관이 된 이유다.

    SS는 총무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부’, 위폐 등 경제 범죄를 수사하는 ‘수사부’, 특수수사관(Special Agent)들로 구성된 ‘경호운용부’, 자체적으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며 FBI와 CIA로부터 경호 요주의 인물에 관한 자료를 넘겨 받아 분석하는 ‘경호조사부’, 그리고 백악관 등을 경비하는 ‘제복경찰부’로 구성돼 있다. SS의 총인원은 4500여명이고, 경호에 투입되는 특수수사관과 일반 경제 범죄를 다루는 일반 수사관은 1200명 정도다. 나머지는 총무(관리)일을 맡거나 수집한 정보를 판단·분석하는 일을 한다.

    1·21사태와 문세광 사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암살자들은 모두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특공대는 청와대를 공격하면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나, 그들은 무사히 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중앙정보부로 압송돼 김기춘(金淇春) 검사에게 조사받던 문세광은 이따금씩 “밖이 조용하냐?”라고 거듭 물어 혁명이 일어났는지를 체크했다고 한다. 암살자들이 갖는 혁명의 꿈은 10·26사건 때 또 한번 드러난다. 10·26사건은 잠시후에 분석하기로 한다.

    문세광 사건이 던져준 교훈을 제대로 분석했다면, 경호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호실장이 박종규에서 차지철(車智澈)로 바뀌었을 뿐, 경호실의 질적인 성장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차실장 시절 경호실은 오히려 퇴보했다. 차실장은 경호 연구에 주력하지 않고, 대통령의 권세를 이용해 야전부대 사령관을 불러 사열을 받는, 호가호위(狐假虎威)를 즐겼다. 경호실을 사병(私兵) 집단화한 것이다.

    이 시기 채용된 경호 요원 중에는 무도 학교 출신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全敬煥)씨다. 두뇌가 아니라 여전히 무도를 중요시한 것이다. 한 소식통은 “당시 경호실에는 ‘깍두기 형님’으로 불리던 격투기 대회 우승자도 있었다. 경호실은 충성심 강한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팔팔한 주먹들의 집합소였다”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한국은 또 한번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된다. 5년 후 대통령이 피격돼 사망하는 10·26사건을 맞는 것이다.

    미국의 도청을 허용한 경호실

    그러나 경호실의 무능은 이미 10·26사건 전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이 시기 박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축소시키려는 카터 미 대통령과 심각한 불화를 빚고 있었다. 1·21사태 후 박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외치며 방위력 건설에 매진했는데, 카터는 이러한 박정희를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인물로 보았다. 이 시기 박대통령 집무실 유리창에서 미국의 정보 기관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도청기가 발견됐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대통령 신변을 경호하는 것이 경호의 전부가 아니다. 청와대에서 주고 받는 대화와 통신이 누설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도 중요한 경호다. 도청기가 발견된 후 경호실은 모든 화분의 흙을 뒤집어 보고, 책상과 탁자 밑에 도청기가 붙어 있는지 샅샅이 조사했다. 이 일을 계기로 대통령 집무실에는 비화기(秘話機)가 설치됐다. 비화기는 사람 음성을 불규칙하게 증폭해 ‘꽥꽥’ 거리게 한다. 도청기로는 대화 내용을 엿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외국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을 허용할 정도로 경호실 실력은 한심했다.”

    그 얼마 후 10·26사건이 일어났다. 중앙정보부와 대통령경호실 요원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한바탕 총질을 한 이 사건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여성 연예인이 현장에 있었다, 宴會 도중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 등)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경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분석해 들어가면 상식을 깨는 결론이 나온다.

    첫째, 이 사건은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경호 요원이 대통령을 저격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앞서 밝혔듯 경호실은 중앙정보부에서 갈라져 나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보부는 대통령의 외부 행사가 있으면 경호실과 유기적으로 협조해 경호에 나선다. 2선과 3선 경호를 담당하는 경찰과 군을 통제하는 것도 업무 조정권이 있는 정보부다(정보부 과장은 다른 부처의 과장보다 직급이 높아 타 부서 사람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들어 이런 권한은 사라졌다).

    ‘경호원’ 김재규는 왜 박대통령을 저격했을까. 호사가들은 ‘박정희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한 차지철과의 갈등을 이유로 거론한다. 다른 호사가들은 박정희와 김재규 간의 갈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박정희는 김재규보다 9살이 많지만, 같은 고향(경북 선산)에 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 2기 동기생이다. 김재규는 부잣집 아들이고 박정희는 가난한 집 아들이다. 그런데 5·16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됐다. 때문에 이들은 “박정희보다 못할 게 없다는 김재규의 열등감이 박대통령 저격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국가원수를 저격한 경호원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재판정에서 한 김재규의 말이다.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행동을 ‘혁명’이라고 자평했다.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박정희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혁명을 위해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혁명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10·26사건은 1·21사태 그리고 문세광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혁명을 위한 저격’, 이는 대통령 암살자들이 품고 있는 중요한 저격 이유 중에 하나다. 이념 지향성이 강한 사회에서는 혁명이라는 명분 때문에 대통령을 저격하는 경우가 많다.

    경호원이 국가원수를 저격한 사례는 이스라엘에서도 일어났다. 1994년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 아라파트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과 함께 중동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사례처럼 이스라엘의 보수파는 라빈이 평화 정착을 이유로 PLO 측에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1년 후인 95년 11월4일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암살되었다.

    라빈 암살 직후 이스라엘은 “극우 청년이 총리를 저격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극우 청년이 라빈을 암살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총리 암살이라는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스라엘은 왜 자세한 암살 배경을 밝히지 않았을까?

    이스라엘에서의 총리 신변 경호는 ‘신베스(Shin Beth·보안대)’가 담당한다. 라빈 주위에는 항상 무장한 신베스 요원들이 포진해 있다. 구조적으로 암살자들이 쉬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 유수의 정보기관들은 ‘이스라엘이 국가 위신 때문에 사건 배경을 정확히 발표하지 않았다. 라빈은 신베스 소속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판단한다. 한 소식통은 “이스라엘 공안기관은 총리를 육탄 방어해야 하는 신베스 요원이 총리를 암살했다고 발표할 수가 없어, 극우 청년이 암살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극우청년은 라빈 총리의 평화 정착 노선에 반대한 사람이다”고 설명했다.

    라빈 총리가 PLO와 평화회담을 강하게 추진할수록, 이스라엘 내의 보수파도 강하게 결집한 것이다. 한 전문가의 말이다. “예를 들어 정치에서 좌와 우만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최고 지도자가 극좌나 극우 어느 한쪽으로 강하게 쏠리면 그만큼 저격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문세광 사건도 박대통령이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이유로 유신을 선포해 민주주의를 너무 억눌렀기 때문에 일어났다. 1·21사건도 박대통령이 극단의 반공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사다트 피격도 사다트 대통령이 평화협정 추진 쪽으로 과도히 쏠렸기 일어났다.”

    여기서 전문가들은 ‘경호는 과학이다’고 말한다. 경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테러 의지를 가진 세력이 최고지도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테러 의지를 가진 세력은 최고지도자 개인이나 최고지도자의 신념에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때문에 경호 관계자는 국내외 정치 상황을 세밀히 관찰해 어디에서 반대세력이 나올지부터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력이 최고지도자에 과도하게 접근할 경우 조심스럽게 차단하여야 한다.

    10·26사건이 일어나기 전 부산과 마산 일대의 대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釜馬사태). 부마사태에 대해 박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은 탱크와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강력히 진압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와 자주 접촉해 유신의 문제점을 알고 있던 김재규는 그 반대 입장이었다. 김재규와 차지철은 부마사태 대처 방안을 놓고 한바탕 설전까지 벌였다. 냉철한 경호원이라면 이때부터는 김재규 부장이 박대통령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넋을 놓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를 연다면 박대통령과 차실장을 초청해 범행을 감행했다.

    10·26 사건은 경호실이 ‘경호는 과학이다’는 명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경호는 ‘무술의 달인’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냉철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야당은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하려면 6·25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당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경호실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남(南南)갈등이 점점 커가는데 주목하고, 과학적인 경호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한 정치분석가는 재미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여당 쪽에서는 국가보안법을 개정 내지는 폐지하자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이들은 김대통령을 지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이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보안법을 지키려는 세력도 똘똘 뭉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이 방북하고, 조선로동당의 대남 담당 김용순(金容淳) 비서가 남한을 방문한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보안법 위반이다. 하지만 통치권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시비를 제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도 통치권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라 보안법과는 상관이 없다. 이러한 교류가 활성화되면 결국 보안법은 ‘죽은 법’이 될 테인데, 왜 자꾸 개정을 주장해 ‘살려놓는지’ 모르겠다. 김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은 반대파들이 뭉칠 수 있는 소지를 주지 않는 지혜도 갖춰야 한다.”

    10·26 사건의 경호는 문세광 사건 때보다 못한, 사상 최악의 경호였다. 문세광 사건 때는 그래도 박종규 실장이 뛰어나와 암살자와 대적자세를 취했으나, 10·26사건 때의 차지철 실장은 ‘혼자 살기 위해’ 대통령을 버리고 화장실로 도망쳤다. 박대통령은 두뇌도 없고 용기도 없는 자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겼기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한국은 헌법이 바뀌고 공화국의 차수가 바뀌는(4공에서 5공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맞았다. 경호의 실패는 곧 공화국 차수의 변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主君과 護衛무사 관계를 재건한 5공

    1980년 제5공화국을 이끌게 된 전두환 대통령은, 육군 준장 시절 경호차장보를 맡아 차지철 실장 밑에서 호된 ‘시집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10·26 사건 직후에는 정동호(鄭東鎬) 육군 준장이 경호실장을 맡았다. 정준장은 81년 7월까지 경호실장을 하다 소장으로 진급해 나가고,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인 장세동(張世東) 육군 준장이 후임 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3공은 박종규, 유신정권은 차지철에 의해 경호실의 성격이 결정됐다면, 5공 경호실은 장세동씨에 의해 그 성격이 결정되었다.

    장씨는 10·26사건 이후 극도로 위축된 경호실을 정상화하는데 집중했다. 여기에 사용된 도구는 장씨의 독특한 성격이었다. 한 소식통의 말이다. “장씨는 한마디로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진급이나 영달에는 관심이 없었다. 모든 기준을 전대통령에게 맞추고, 전대통령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만 주력했다. 경호원들에게 많이 베풀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경호원들은 장씨를 좋아했다.”

    장세동씨의 이러한 캐릭터는 ‘주군(主君)’인 전대통령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한 소식통의 말이다. “경호원을 상대하는데 있어 가장 탁월했던 사람은 전대통령이다. 박대통령이 ‘과묵한 카리스마’로 경호원들을 지배했다면, 경호원의 생리를 알고 있는 그는 ‘베푸는 카리스마’로 경호원들을 장악했다. 전대통령은 경호원의 이름을 외워두었다가, 부를 땐 항상 이름을 불렀다. 경호원들에게 ‘아이들은 잘 크는가’ 하고 자상하게 묻기도 하고, 부인들의 생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다. 혼자 먹지 않고 나눠 먹으니, 청와대 바깥에서는 전대통령에 대해 뭐라고 욕을 하든, 경호원들은 전대통령을 좋아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장세동 실장 시절이 경호실로서는 가장 황금기였던 것 같다.”

    전대통령은 유난히 새벽 순찰이 많은 지도자였다. 경호원들로서는 이러한 순찰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베푸는 카리스마’ 때문에 그들은 충성을 다바쳤다. 덕분에 전대통령과 경호실은 전형적인 주군과 호위 무사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경호실은 아웅산 사건을 막지 못했다. 경호 측면에서 본 아웅산 사건은 ‘경호실이 대통령을 따라가지 못해 일어난 사건’으로 정리된다.

    박대통령은 해외 순방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전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나갔다. 잦은 새벽 순찰로 공무원을 긴장시키던 전대통령은 그 연장선 상에서 ‘UN을 무대로 한 남북 대결에서 한 표라도 더 얻어 북한을 이기자’는 취지로 경호 취약 지역인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를 자주 방문했다. 이 과정에 일어난 것이 아웅산 사건이다. 미얀마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지만 북한과 훨씬 더 가까웠다. 전대통령은 미얀마를 우리 편으로 끌이겠다는 생각으로 방문한 것이다.

    미국 SS와 우리의 경호실의 가장 큰 차이점은 SS는 기본적으로 수사기관이지만 우리 경호실은 수사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대통령경호실법 7조는 경호실장의 요청에 의해 서울지검장은 경호 업무를 수행하는 경호원에게 사법경찰권을 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실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때문에 SS는 미국 각주와 주요 국가에 73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SS 지부는 그 지역에서 일어난 경제 범죄를 수사하다가 지부 관할 지역으로 미 대통령의 방문이 계획되면, 사전 경호활동에 들어가는 ‘선발대’ 노릇을 한다.

    한국은 SS 하와이 지부에서 관할한다. 미 대통령의 한국 방문이 계획되면 하와이 SS지부 요원들이 선발대로 들어와, 미 대통령이 머물 곳과 방문할 곳을 점검하고, 한국 경호실과 협조 사항을 논의한다. 그러나 더 은밀한 논의는 한국에 상주하는 CIA나 FBI 요원들이 담당한다.

    전세계에 나가 있는 미국 대사관은 반미주의자의 테러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미 국무부는 대사와 대사관을 지키기 위해 ‘외교안전국(Diplomatic Security Service·약칭 DSS)’이라는 공안기관을 만들었다.

    DSS(외교안전국)도 전세계에 나가 있는 미국 대사관에 지부를 설치해 놓고 있는데, 이 지부를 ‘보안과(Regional Security Office·약칭 RSO)’라고 한다. RSO, 즉 보안과 요원도 SS 선발대에 적극 협조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미 대통령이 방한하면 SS 요원은 물론이고 CIA와 FBI·RSO 요원들이 총을 차고 경호활동에 들어간다고 한다.

    아웅산사건, 검책요원의 실수

    한국 경호실은 SS처럼 지부도 없고, 한국 외교부는 RSO와 같은 공안기관도 없다. 한국 정보기관 중에서 해외에 요원을 파견해 놓고 있는 것은 안기부(지금의 국정원)뿐이다. 때문에 대통령의 방문이 결정되면 방문국가에 주재하는 안기부 요원(IO)과 현지 대사관 요원들이 경호실 선발대와 함께 사전 점검에 들어간다.

    전대통령이 미얀마에 도착한 것은 83년 10월8일이었다. 전대통령 일행은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관과 안기부 주재원으로부터 ‘문제가 없다’는 연락을 받고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미얀마에 상주한 북한인들의 움직임을 놓치고 있었다. 전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에 앞서 북한 선박이 미얀마에 들어왔는데 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10월9일 전대통령 일행이 아웅산 묘지를 참배하러 갔다가 엄청난 폭파 사고를 당했다(아웅산 사건).

    아웅산 사건을 모의한 것은 1·21사태를 일으켰던 북한군 정찰국이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 것은 정찰국 소속 진모 소좌(사살)와 강민철 대위·신기철 대위(사형)였다. 진소좌 등은 ‘겁도 없이’ 미얀마를 방문하는 전대통령을 응징하기 위해, 아웅산 묘지 일대에 원격으로 폭파시킬 수 있는 크레모어와 소이탄(燒夷彈)을 여러 개 매설했다.

    크레모어가 터지면 수많은 파편이 날고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난다. 소이탄이 터지면 큰 불이 붙는다. 한마디로 인민군 정찰국은 미얀마를 방문한 대한민국 요인 모두를 ‘날려버리려’고 한 것이었다.

    국가 원수에 대해서는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테러가 가해지므로, 경호 조직 또한 갖가지 기법으로 이를 차단한다. 그중 하나가 ‘위장’이다. 위장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복제(複製)’다.

    복제란 국가원수와 흡사하게 생긴 사람을 경호원으로 뽑아, 경호원들로 하여금 그를 경호케 하는 대형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 경호원이 국가원수와 더욱 흡사해 보이도록 성형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호법을 채택한 대표적인 나라는 히틀러가 이끈 나치 독일과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 김정일이 리드하는 북한이다. 그 외에도 각국은 갖가지 위장술로 대통령에 대한 위해를 차단하고 있다.

    전대통령에 앞서 요인들이 속속 아웅산 묘소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면 어느 것이 대통령 차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때 국가 원수가 도착했을 때 부는 나팔이 울렸다. 이는 예행 연습이었지 실제로 전대통령의 도착을 알리는 것은 아니었다(이것이 위장이었는지 순수한 예행연습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직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진소좌가 원격조종 폭발 스위치를 눌렀고 서석준(徐錫俊) 부총리를 비롯해 15명이 사망한 것은 그 순간이다. 그중 2명은 경호원이고 1명은 기자(동아일보 사진부 李重鉉)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李基百) 육군 대장 등 16명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터진 것은 크레모어였다. 크레모어에서 나온 파편이 많아 더욱 희생자가 많았다. 크레모아의 후폭풍으로 인해 건물 지붕이 내려 앉았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소이탄은 터지지 않았다. 소이탄이 터졌다면 불바다가 돼 더 많은 사망자가 나왔을 것이다. 이 사고 직후 천병득 경호처장이 “즉각 서울로 돌아가자”고 주장해, 전대통령 일행은 희생자 시신을 수습해 서둘러 귀국했다.

    경호 측면에서 본 아웅산 사건은, 사전 점검의 실패로 귀착된다. 사전 점검에는 안기부 주재관과 경호원뿐만 아니라 폭발물이 매설돼 있는지 점검하는 검책 요원들도 참석한다. 영화 ‘사선에서(원제 In the Line of Fire)’를 보면 대통령 행사를 앞두고 맨홀 두껑을 열어 조사한 후 봉인하고, 행사장의 화분 흙을 쑤셔서 조사하는 요원들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검책 담당자들이다. 아웅산 사건은 한마디로 대통령이 잦은 출장을 따라 가지 못한 검책 능력의 부족 때문에 일어났다. 경호실은 아직도 허점이 많았던 것이다.

    경호원 안챙긴 노태우

    아웅산 사건 후 한국 군부에서는 “응징차원에서 북한을 공격하자”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됐다. 오히려 사고를 당한 전대통령이 군인들을 말려야 했을 정도로 이들의 주장은 거셌다고 한다. 한 전문가의 말이다.

    “99년 연평해전 때 우리 고속정이 북한 고속정을 들이받아 밀어내자 견디지 못한 북한 고속정이 선제 사격을 했다. 그러자 후방 수역에 있던 덩치 큰 초계함이 함포를 발사해 북한 고속정을 격침시켰다. 이때 한국의 초계함과 고속정은 전부 북한 해안에 배치된 실크웜 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있었다. 만에 하나 북한이 실크웜을 발사해 초계함을 격침시켰다면, 한국은 막바로 전투기를 동원해 북한 해안지역을 때린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국 공군기가 공습하면 북한도 새까맣게 전투기를 띄워 남한을 공습할 것이니, 그 순간 양쪽은 전면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행히도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아 연평해전은 한국이 승리하는 모양새로 끝나고 말았다. 고속정끼리 대결할 때도 작전계획을 세워놓는데, 하물며 국가원수가 적대국에 희생될 경우에 대비한 작전계획이 없겠는가. 아웅산 사건은 경호에 실패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준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완벽한 경호가 이뤄져야 한다.”

    아웅산 사건 이후 경호실은 큰 사건을 맞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 김영삼씨가 계란을 맞은 것을 제외하면 18년째 완벽한 경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경호실은 과연 질적으로 발전한 것일까.

    소식통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 시절을 겪은 경호원들은 노태우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경호원들을 대하는 노대통령의 태도에 있었다. 한 소식통은 “노대통령은 경호원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어이-’라고 했다. 경호원들의 가정사에 관심을 표하거나, 경호원들을 챙겨줄 줄도 몰랐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서 드러났듯 그렇게 많은 돈을 챙기고서도 그는 베풀지 않았다. 그러한 대통령 밑에서 경호실장을 한 이현우씨가 노씨 비자금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는 것 자체가 경호실로서는 망신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호실에 무관심했던 노태우 정권의 5년이 오히려 경호실 발전에 약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5공 출범 직후인 1981년 4월을 경계로 공무원 체제는 크게 바뀌었다. 81년 4월 이전에는, 공무원은 일반직과 별정직으로만 나뉘어 있었다. 별정직 공무원에는 정무직(장차관급)·군인·경찰관·소방관·중앙정보부 직원·경호실 직원·검찰 공무원 등 일반직 공무원에 포함시킬 수 없는 특수직 공무원들이 망라돼 있었다. 그런데 81년 4월 공무원 체제가 바뀌면서 특정직 공무원이 생겨, 별정직 공무원에 속해 있던 안기부 직원·법관·검사·군인·경찰관·소방관 등이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특정직 공무원은 일반직 공무원처럼 공개경쟁을 통해 선발하고 신분도 보장받게 되었다. 반면 별정직 공무원은 신분보장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채용하는 ‘쭉정이 공무원’으로 전락했다. 업무 성격상 경호 공무원도 당연히 특정직 공무원으로 빠져나갔어야 한다. 그러나 ‘피 비린내 나는’ 10·26 사건을 겪은 지 얼마되지 않은 때라 경호실을 챙겨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경호 공무원은 별정직 공무원으로 남게 된 것이다.

    5공 때는 전두환 대통령이 ‘챙겨’ 주었기 때문에, 경호 공무원들은 불편함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 ‘방패막이’가 사라진 노대통령 시절이 되자, 이들은 비로소 신분 불안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때서야 경호실에서는 경호 공무원도 특정직 공무원으로 하고, 신규 임용자는 공개채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경호 공무원들이 경호원 공개 채용을 주장한 데는 다른 이유도 숨어 있었다.

    유신정권 시절 박정희 정권은 군 대위 계급을 일반 공무원 5급(사무관)과 같게 하는 총리령을 만들었다. 군에서의 대위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공무원 사회에서의 5급은 매우 높다. 박정권은 군 출신이 우대를 받도록, 군인 계급을 올려 놓은 것이다. 때문에 경호실을 비롯한 정부 부처에는 대위로 전역해 사무관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을 가리켜 ‘유신 사무관’이라고 했다. 반면 일반 대학을 나오고 3년간 군복무를 마친 사람은 경호실에 7급으로 채용됐다. 5급 공무원이 7급으로 진급하는데는 십수년의 세월이 걸린다.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7급으로 들어온 대졸 경호원들과 유신사무관으로 들어온 경호 공무원들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7급 출신들은 ‘모든 경호 공무원은 공개채용 시험을 거쳐 7급으로 들어오게 하자’고 주장했는데, 설득력 있는 주장인만큼 힘을 얻었다. 이러한 주장은 6공을 거쳐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더 구체화되었다.

    문민정부의 초대 경호실장은 경호실에서 잔뼈가 굵은 박상범씨가 임명되었다. 박상범씨의 별명은 ‘불사신’이다. 그는 문세광 사건 때 총을 들고 연설대 뒤에 숨은 박대통령을 지켰다. 10·26사건 때는 궁정동 안가에서 총을 맞았으나, 확인사살을 당하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아웅산 사건 때도 폭발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었다. 더구나 박실장은 문민정부 실세인 김현철(金賢哲)씨와도 가까웠다. 경호실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그는 경호 공무원을 특정직 공무원으로 하자며 대통령 경호실법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여야 대치로 인해 국회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사장됐다가 수평적인 정권 교체가 이뤄진 다음인 1999년 국회를 통과했다. 이로써 경호 공무원은 특정직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신규직원은 전부 7급으로 공채하게 되었다. 이 법은 또 경호 사무관제를 채택함으로써 행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들이 경호 공무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도 터주었다.

    경호실법 개정이 그토록 요원하기만 하던 경호실의 엘리트화를 촉진했다. 공채시험에 합격하는 무도인이 줄어들고, 명문대 출신들의 진출이 늘어난 것이다. 99년에는 연세대 법대 출신 경호원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미국 SS와 교류가 잦아지면서 외국어에 능통한 요원들이 늘어났고 SS의 교육과 철학이 경호실에 접목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있었던 제2차 ASEM은 한국 경호가 비약적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 회의 이전까지 두 명 이상의 외국 정상이 동시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국장(國葬) 때도, 경호 미비로 박대통령이 사망한 것을 고려한 듯, 우방국들은 국가원수 대신 부통령이나 장관을 조문사절로 파견했었다.

    성공적인 ASEM 경호

    ASEM은 26명의 국가원수가 한 자리에 모인, 우리에게는 유례가 없는 행사였다. 경호실 인력으로는 이렇게 많은 정상을 경호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경호실·국정원·경찰청·합참·육본·기무사·수방사 등 13개 기관이 참여한 ‘경호안전대책위원회’가 열려, 경찰청 특공대(868부대), 수방사 헌병대와 특수임무대, 특전사 특수임무대 등 대(對)테러 훈련을 받은 모든 부대가 출동했다. 이렇게 많은 기관이 출동했는데도 경호실은 ASEM(아시아-유럽회의) 경호를 매끄럽게 마무리지었다.

    대형 정상회담 경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1차 ASEM을 열었던 영국은 헬기를 띄워 정상들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그러나 한국은 한 단계 발전시켜, GPS 위성으로 각 정상의 위치를 정확히 추적했다. GPS를 이용한 경호는 2000년 7월1일 오키나와에서 열린 G8 회담 경호를 담당한 일본 경찰청 공안2과가 처음 사용했던 것. ASEM 경호에 성공하자 경호실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SS는 우리 경호실을 ‘꽤 경호를 잘하는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ASEM에 이어 한국의 경호 능력을 시험하는 또다른 시험장이 될 것이다. 북한은 1차 정상회담처럼 이번에도 사전에 안건과 경호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불쑥 남쪽으로 내려오겠다고 통보할 수도 있다. 지난해 9월11일 김용순 조선로동당 대남 비서가 남한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때마침 추석연휴 전이라 국정원에서 대북문제를 담당하는 김보현(金保鉉·58) 3차장은 고향(제주)에 가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어 놓았다. 김차장은 김포공항에 나가려다 김용순 비서가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북관계는 민족 내부의 일이라고 하지만 준(準) 외교관계다. 그런데 북한은 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김비서를 서울에 보내겠다고 갑작스레 통보해온 것. 그 바람에 김차장은 고향에 가지 못하고 서울 사무실에서 추석 연휴를 보냈다고 한다.

    이것만 해도 큰 결례인데, 김비서는 신라호텔에 도착한 다음에야 일정을 내놓고 “제주도와 포항제철 등을 가보자”고 요구했다. 결례가 아니라 무례(無禮)를 범한 것이다. 추석 연휴 때라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 국정원은, 공군 수송기를 동원했다(이때 국정원은 김비서에게 남한 실정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수송기를 낮게 띄워 자동차로 메워진 고속도로와 불야성을 이룬 서울과 포철 모습을 보여주는 ‘공작’을 펼쳤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도 김용순 식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1차 회담은 대화 창구를 뚫는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의전과 격식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2차 회담은 신뢰를 쌓는 출발선이니 이렇게 할 수는 없다. 2차 회담에 앞서 남북은 경호 당국 사전 협상을 갖고, 엄격한 상호주의에 기초해 합동 경호를 펼쳐야 한다. 북한은 2차 회담 직전 김용순이 사전 점검한 제주도를 정상회담 장소로 하자고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도 경호의 상호주의 원칙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

    “경호실에도 수사권을 주자”

    2차 남북정상회담은 지난 28년간 굴곡의 역사를 걸어온 경호실이 제 자리를 잡는 출발선이 되어야 한다. 한 전문가는 “경호원들은 경호 전문가로서 국가원수에게도 과감히 조언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의 발달로 요즘 나오는 방탄조끼는 매우 가볍고 얇다. 미국 듀퐁(Dupont)사가 제작한 원단을 받아 코오롱을 비롯한 국내 업체들도 방탄조끼를 제작하고 있다. 경호원들은 위험이 예상되는 상황에는 대통령에게 방탄조끼를 입으라고 과감히 제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SS가 경제범죄 수사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경호실도 수사권을 가질 필요가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초짜 경호원들은 국가원수를 지킨다는 막중한 사명감 때문에 출근할 때 부인에게 ‘갔다올게’라는 인사도 못한다고 한다.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육탄으로 국가원수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올게’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 간다’라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면 권태감을 느끼게 되고 나이 40이 되도록 남의 뒤나 따라다닌다는 자의식 때문에 무력해진다. 이러한 요원에게는 전혀 다른 업무를 맡겨 재충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즉 경호실을 마약이나 위폐 등 경찰이나 검찰이 하기 힘든 특수 범죄를 수사하는 기관으로 만들어, 이들을 수사 분야에 투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호실은 유능한 인재를 오랫동안 활용할 수 있고, 경호실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봉사하는 기관이란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이제 경호실은 그 시야를 넓여야 한다.”

    < 1호 행사 호위는 행사안전국이 담당 >

    북한 경호 조직의 움직임은 지난해 6월13일부터 15일 사이 열린 제1차 남북 정상회담 때 사실상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군복 차림의 무표정한 얼굴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바로 뒤에서 경호하던 대좌(한국군 대령에 해당)의 인상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북한의 경호기관인 호위사령부는 광복 후 김일성을 경호하기 위해 조직된 ‘경위중대’에서 시작한다. 이 중대는 경위대대를 거쳐 경위연대(연대장 강상호 대좌)로 발전했다. 6·25전쟁 후 경위연대는 ‘정부호위처’로 바뀌어, 초대 처장에 오백룡이 취임했다. 1965년 정부호위처은 ‘정부호위총국’으로 바뀌는데, 총국장은 계속해서 오백룡 상장(한국군 중장에 해당)이 맡았다. 1968년 울진·삼척 사태가 있은 후 김일성은 김창봉 인민무력상(우리의 국방장관에 해당) 등을 숙청하는데, 이때 오백룡도 퇴임하고 전문섭 상장이 뒤를 이었다. 1975년 호위총국은 ‘호위사령부’로 바뀌었다.

    警衛중대에서 출발

    현재의 호위사령관은 1984년에 취임한 이을설(李乙雪·80) 원수다. 호위사령부는 처럼 정치부·참모부·보위부·후방총국으로 구성돼 있다. 정치부는 호위사령부를 조선로동당과 연결시키는 조직.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는 이 정치부를 통해 호위사령부를 당적(黨的)으로 ‘지도’한다. 정치부의 최고위직은 ‘정치위원’인데, 이을설 호위사령관이 겸하고 있다.

    한국의 경호실은 대통령 관저 경비와 행사시 대통령 신변 경호를 함께 수행한다. 그러나 북한은 관저 경비와 행사 경호 기관이 분리돼 있다. 참모부는 호위를 담당하는 곳으로 1·2·3국으로 구성돼 있는데, 1국은 김정일을 비롯한 조선로동당 중앙정치국위원 11명의 관저와 사무실을 호위한다. 11명이 정치국위원 중에서 인민무력상(국방장관)이나 사회안전상(경찰청장)처럼 제복을 입는 위원은, 그가 이끌고 있는 기관으로부터 호위를 받는다. 그러나 사민복(私民服·사복)을 입는 위원들은 이러한 조직이 없어 호위사령부 참모부 1국의 호위를 받고 있다.

    1국은 예하에 1호위부·2호위부·3호위부·경비여단 등이 있다. 과거 1호위부는 김일성 주석의 관저를, 2호위부는 김정일 위원장의 관저를, 3호위부는 사민복을 입는 기타 정치국위원의 관저를 호위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죽은 후 1호위부는 해체되고, 김정일 위원장 관저는 여전히 2호위부가 지키게 되었다(일부 소식통은 “3호위부도 없는 것 같다. 2호위부에서 사민복을 입는 정치국위원 관저를 함께 호위한다”고 말한다).

    2호위부는 전원 군관(장교)으로 구성돼 있다. 규모는 3개 중대로 편성된 1개 대대(500명 정도) 정도로 알려져 있다. 2호위부는 대대 규모에 지나지 않지만, 김정일을 지키기 때문에 중장(한국군의 소장에 해당)이 부장을 맡고 있다. 경비여단은 북한 전역에 흩어져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특각(별장)을 경비하는 부대다.

    2국은 김정일 위원장의 행사 호위, 즉 북한식 표현으로는 ‘노상(路上) 호위’를 전담해, ‘행사호위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 경호실이 대통령을 ‘코드 원’이라고 하듯이 북한의 호위사령부는 김정일을 ‘1호’, 김위원장이 참석하는 행사를 ‘1호 행사’라고 한다. 2국은 행사계획부·행사안전부·열차호위부 등으로 구성돼 있다. 행사계획부는 1호 행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김위원장의 행사가 계획되면 한 달여 전에 선발대를 현장에 보내 사전 점검을 한다.

    행사안전부가 신변 경호

    행사안전부는 한국 경호실의 수행부처럼 행사장에 나온 김정일 위원장의 신변 경호를 전담한다. 김위원장은 대개 링컨 컨티넨탈이나 벤츠 500 등을 타고 관저 밖으로 나간다. 이때 2국장이 탄 차가 최선두에서 경광등을 켜고 달린다. 이어 행사안전부장이 탄 차와 김위원장이 탄 차, 그리고 호위사령관이 탄 차 등이 뒤섞여 빠르게 달린다. 이러한 차량 주위로 행사안전부 요원들이 탄 차가 옆 차선을 달리며 경호한다.

    평양의 주요 도로에는 김정일 위원장용 전용도로가 있다. 김위원장 일행은 이 도로를 달리는데, 이때 주변에 있던 사람과 차량은 전면 통제된다. 전용도로를 향하고 있는 건물의 창문도 이때만큼은 폐쇄한다.

    과거 호위사령부에는 김일성 주석이 타는 비행기를 관리하는 비행연대가 있었다. 그런데 70년대 비행기 폭발 사고가 있은 후, 조선로동당 정치국은 ‘주석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고 결정하고, 비행연대를 인민무력부로 보냈다. 이후 김주석과 김위원장은 지방이나 해외에 나갈 때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열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지난 1월 중국을 방문할 때도 김위원장은 열차를 이용했다.

    김위원장이 타는 열차에 대한 호위는 2국 산하 열차호위부가 전담한다. 김위원장이 승차하는 역과 도착하는 역에는 북한 특유의 4선 경호가 펼쳐진다. 전용열차가 출발하기 한 시간 전이 되면 철로에 폭발물이 매설돼 있는지를 검사하기 위해 검사 차량이 출발한다. 이어 30분 전에는 일반 객차로 가장한 열차가 같은 임무를 띠고 출발한다. 전용열차는 일반 열차와 외관이 똑같다. 그러나 일반열차는 유리창이 파손되도 그 상태에서 운행하나, 전용열차는 유리창이 깨지면 즉시 끼워 항상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북한 철도는 대부분 단선이기 때문에 전용열차가 달리면 다른 기차는 역에서 장시간 대기해야 한다. 전용열차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목적지까지 쉬지 않고 달린다. 이때 김위원장이 탈 승용차도 전용열차에 실어 함께 운반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호 행사’가 펼쳐지면, 행사장에는 사전 검색은 물론이고 신원조회까지 마친 사람만 참석한다. 김위원장이 식장에 도착한 다음에 행사장에 도착한 사람은 모든 검색을 마쳤더라도 절대로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1호 행사 경호는 행사안전부가 담당하는데 이때 대좌 계급을 단 사람이 현장에서 호위원을 지휘한다. 김위원장 바로 뒤에는 소좌 계급을 붙인 사람이 따라 다니는데, 그에게는 김위원장 육탄방어 임무가 할당돼 있는 것 같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1국은 관저 호위, 2국는 행사 호위로 임무가 나뉘어 있어 두 국은 서로 ‘우리네가 진짜 호위부다’하고 다투기도 한다”고 말했다.

    짐바브웨 경호원 교육시켜

    3국은 ‘건설국’으로, 호위사령부가 필요로 하는 각종 건설 공사를 전담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3국은 평양시 삼석구역 노산리 인근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지하 호위사령부 기지를 건설했다”고 말하고 있다.

    보위부는 기무부대 구실을 한다. 즉 호위사령부가 뽑아올 요원들에 대한 신원 조회나 이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다. 보위부 밑에는 평양시내를 경비하며 군복 입은 사람을 검문하는 연대 규모의 경비사가 있다.

    후방총국은 ‘964군 부대’로 불리기도 하는데, 호위사령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자를 조달한다. 후방총국 요원들은 전국 각지에 배치돼 각 공장과 기업소·농장에서 생산한 물자를 받아 평양의 호위사령부로 보내는 일을 한다.

    호위사령부 요원들은 고등중학교 졸업자 중에서 신분과 실력이 출중한 사람을 뽑아 선발한다. 이 사람들은 주체격술(특공무술)과 사격 등을 훈련받고 군복 칼라에 ‘빨간색 연장’을 붙이는 호위사령부의 하전사(병사)가 된다. 하전사 중에서 유능한 사람은 간부들의 추천을 받아 김정숙군관학교에 입교해 3년간 교육을 받고 호위사령부 군관(장교)이 된다. 군관이 되어야 김정일 관저를 지키는 1국이나 노상행사를 호위하는 2국에 근무할 수 있다.

    한국군이 대통령 경호실과 별도로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를 운영하듯, 인민군도 호위사령부와 별도로 ‘수도방어사령부(수방사)’를 운영해왔다. 김정일 관저 최외곽을 호위하는 인민군 수방사는 34­52­55­71의 4개 사단으로 구성돼 있다. 최근 인민군은 이 수방사를 ‘91 훈련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6·25전쟁 때 평양은 UN기의 공습으로 초토화했다. 이때의 기억 때문에 북한군은 평양을 공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평양고사포사령부(평고사)’를 창설했다. 91훈련소와 평고사는 인민무력성 소속이지만 김정일위원장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호위사령부와 같은 일을 한다.

    호위사령부의 경호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80년대에 호위총국은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공화국에 106명의 요원을 파견해 무가베 총리 관저를 경호하는 짐바브웨군 1개 여단을 훈련시킨 적이 있다. 호위사령부는 충성심이 강하기 때문에 만만찮은 경호 실력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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