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조양은·조세형 전철 밟지 않겠다”

조직폭력 대부 김태촌 옥중심경 고백

  • 입력2005-04-29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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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촌(54). 그는 주먹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의 이름 석 자는 조직폭력의 대명사다. ‘대한민국 제일의 깡패’.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의 이름은 그렇게 각인됐다. 그가 이끌던 서방파는 양은이파 OB파와 더불어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폭력조직으로 암흑가를 주름잡았다. 이름하여 3대 패밀리.

    이들은 주먹이 아닌 칼과 조직력으로 한국 주먹계의 판을 새로 짰다.

    세 조직의 우두머리 중 김씨의 이름이 조직폭력의 대명사로 굳어진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먼저 그는 ‘활동기간’이 가장 길었다.

    ‘잘 나가던’ 양은이파 보스 조양은씨는 너무 일찍 발이 묶였다.

    1980년 범죄단체조직 혐의로 구속된 조씨는 15년 동안 바깥 세상을 구경하지 못했다. OB파의 이동재씨는 1988년 양은이파 계열인 순천시민파의 공격을 받은 후 미국으로 도피, 주먹계에서 이름이 잊혀졌다. 당시 이씨는 칼과 도끼 등으로 난자 당해 거의 불구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적 사건들에 관련된 것도 김씨의 위력을 돋보이게 하는 데 한몫했다.



    신민당 전당대회장 각목사건(1976) ‘김태촌 비망록’ 사건(1990), 슬롯머신사건(1993) 등은 그와 권력층의 유착관계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검찰은 지난 몇 달에 걸쳐 조직폭력배에 대해 대대적 수사를 벌였다.

    전국적 조직의 우두머리급을 상당수 구속했는데, 그중엔 범서방파 부두목이라는 이택현씨(47)가 끼여 있다. 검찰에 따르면, 범서방파는서방파가 확대·발전한 것이다.

    청송교도소에서 11년째 복역 중인 김씨는 최근 친지 J씨와 면회하는 자리에서 검찰 수사와 관련해 자신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데 대해억울해 하며 자신이 달라졌음을 강조했다.

    아울러 과거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몇 가지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

    그가 자신의 죄가 묻어 있는 사건들에 대해 입을 연 것은 더 이상 과거의 굴레에 갇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과연 그는 달라진 것일까. 달라졌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조직폭력 특집기획과 관련해 그의 ‘변화’를 추적하던 ‘신동아’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재구성해 공개한다. 》

    접견실 창구에 나타난 김태촌씨, 겉보기엔 건강했다. 단정하게 빗질된 머리와 약간 홍조를 띤 얼굴. 그러나 J씨는 그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방음벽 구멍 사이로 전해오는 불규칙한 숨소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갈망에 젖어 있었다. 왜소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강렬한 기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다’고.

    “계단 오르는데 숨이 차”

    이런 자리에서는 으레 건강에 관한 얘기가 맨 먼저 나오게 마련이다.

    “계단 오르는 게 힘들어. 여기까지 오는 데도 아주 힘들었어. 숨이 차.”

    그는 옥중에서 폐암진단을 받았다.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1986년)으로 형을 살고 있을 때였다. 1989년 1월 형집행정지로 풀려 나온 그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폐암수술을 받았다. 김씨는 이날 J씨에게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재삼 강조했다.

    “연세대 총장을 지낸 김병수 교수가 주치의로 진단서를 끊어줬는데 그때 그 분이 ‘상태가 굉장히 위험하다. 감기만 걸려도 생명이 위험하다’고 얘기했다고. 왜냐 하면 한쪽 폐를 떼내고 심장막도 제거했기 때문이지. 암이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나머지 한쪽 폐에 옮을 가능성이. 그때 그런 진단이 내려졌는데도 지금까지 나를 (교도소에서) 안 내보내주고 있어. 요즘 검찰 수사와 관련해 신문에 또 내 이름이 났던데, 제발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해줘. 계단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이 무슨 조직의 두목이냐고.”

    김씨는 교도소 내 병동에서 생활한다. 오랫동안 독방을 쓰다 지금은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있다. 그는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무척 야속한 모양이었다.

    “병동에 있다가 출소한 사람들한테 물어봐.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나 정말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있어. 옛날에나 보스지, 지금은 다 떨어진 속옷 입고 쓰레기 주우며 살고 있다고.

    옛날에 내가 신우회를 조직했잖아. 오기준이라고, 지난번에 정현준·이경자 사건 때 이름이 나온 신양팩토링 사장 있잖아. 그때 범단(범죄단체조직)으로 걸린 사람이 오기준을 비롯해 16명이야. 박종석 나 이택현 손하성 정광모 최OO 김OO…. 교도소 면회는 누구라도 할 수 있어. 그런데 내가 먼저 이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다고. 왜? 내가 지금 이 안에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데, 그 사람들을 만나면 또 이상한 소문이 날 테니까. 교도소측에 그들의 명단을 내밀고 ‘신우회 사람들이어서 만나지 않겠으니 그들의 접견을 금지시켜 달라’고 부탁했어. 그들이 항의도 했지. 그래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어.

    이번에 언론이 이택현이가 (범서방파) 부두목이라면서 나하고 관계 있는 것처럼 보도했는데, 이택현과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 그동안 편지 한 번 한 적 없어. 신우회 사건으로 4년 살고 나갔는데, 면회 한 번 안 왔다고. 내가 끊었어. 만약 그가 부두목이고 내가 두목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이런 얘기를 아내한테 편지로 써 언론에 전하려고 해.”

    신우회는 1989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김태촌씨가 만든 조직이다. 기독교친목회임을 내세웠지만 검찰은 이를 범죄조직으로 판단했다. 범서방파란 바로 이 신우회의 다른 이름이다. 당시 신우회 회원은 350명이 넘었는데 호남주먹들이 주축이었다. 간부진은 김씨의 선배주먹들로 채워졌다. 1970년 번개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날렸던 박종석씨가 회장 자리에 앉았고, 오기준씨가 부회장, 박영장씨가 자문 노릇을 했다. 김씨는 총무로서 모임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J씨가 “신우회 시절과 지금의 신앙을 비교하면 어떠냐”고 묻자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때도 신앙은 있었지만 지금보다는 못했던 것 같아. 지금은 신우회 시절보다 훨씬 신앙심이 깊어. 그런데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지. 나를 아는 사람들, 이 곳에서 나와 함께 지낸 사람들 얘기가 그래. 나를 찾아와 기도해주는 목사님들 얘기가 기자들이 내 생활을 많이 궁금해하고 면회를 하고 싶다고 부탁한다는 거야. 그런데 내가 다 거절했어. 물론 기자라고 면회가 금지된 건 아니지. 그렇지만 인터뷰 기사가 나가면 나는 이 안에서 큰일 난다고.”

    J씨가 조양은씨와 조세형씨를 예로 들며 “교도소 안에서 열심히 신앙을 찾던 사람들이 출소해 다시 사고를 치니 검찰이 믿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하자 김씨는 “두 사람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조양은이 나와서 그런 행동을 하고 조세형이 절도로 다시 들어가니까 김태촌이도 그러지 않겠느냐고 의심하나본데 그건 기우야. 내 아내도 암이야. 생명이 위험하다고. 이런 처지에 내가 위장된 생활을 할 수 있겠나. 내 고향이 전남 담양인데, 거기에 땅이 조금 있어. 출소하면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그 땅에 집 짓고 조용히 살 거야. 내 아내와 아들 때문이라도 꼭 그렇게 할 거야.”

    이에 J씨는 “형님 의지도 중요하지만 형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동생들을 어떻게 할 건가. 그들은 형님 나오기만 기다리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김씨의 답변은 단호했다.

    “그러니 안 만나지. 외롭고 사람이 보고 싶어서 솔직히 만나고도 싶어. 얘기도 하고 싶고. 그렇지만 잊기로 한 거야. 나중에 동생들 만나면 ‘나는 내 길을 간다’고 말해야지. 내가 나가면 언론에서 시끄럽지 않겠어? 그런 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거야. 아내와 결혼식도 올리고. 나를 신앙인으로 믿어줄 때까지 그렇게 조용히 살 거야.

    조양은이 그랬다고 해서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 마. 아직도 나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무슨 일만 터지면 나와 관련시키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출소하면 신앙인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이 안에서 나는 그렇게 살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어. 내게도 꿈이 있어. 시골에 내려가 집 짓고 마당 가꾸고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거야.”

    워커힐카지노에 500명 동원

    이야기는 다시 과거 김씨가 관련된 사건으로 옮아갔다. 과거를 참회하고 새 삶을 살겠다는 마당에 과거 일을 감출 이유가 없고, 오히려 불미스러운 소문의 진상을 떳떳이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김씨 구속을 둘러싼 항간의 소문 중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카지노 대부인 전낙원 파라다이스그룹 회장 관련설이다. 주먹계에서는 거의 정설로 굳어진 얘기다. 5년 전 이런 내용을 담은 김씨의 편지가 언론에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화가 이 문제에 이르자 김씨의 얼굴에 난감해 하는 빛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내가 그때(1989년) 정덕진 형제와 함께 카지노(제주 서귀포 칼호텔)와 오락실(광주신양파크호텔 슬롯머신업장)을 인수했잖아. 전낙원이 그걸 보고 정덕진이 김태촌과 손잡고 카지노업계를 넘본다고 지레 생각한 거야. 내가 당시 전낙원이 운영하는 워커힐호텔 카지노에 500명을 데리고 가 밥을 먹인 적이 있어. 다 모아놓고 신앙에 관한 얘기를 했지. 전낙원은 자신을 협박한다고 여겼어. 그런데 워커힐이 선경 거잖아. 전낙원이 돌아가신 최종현 회장에게 그 일을 얘기하고, 최종현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말해 나를 구속하게 했다는 거야. 최회장이 노대통령과 사돈지간이잖아. 또 워커힐에서 내가 애들과 식사하는 것을 최회장이 봤다는 얘기도 있어. 당시 소문이 그렇게 났어.

    내가 누구를 해치지도 않았고 신우회가 범죄단체라고 볼 만한 증거도 없었어.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런데 때마침 손하성이라고, 신우회 멤버였는데, 그 애가 내 자리를 넘봐 가지고 검찰에 나를 밀고한 거야. 그래서 내가 구속됐다고.”

    서방파의 부두목급인 손하성씨는 1989년 8월 김씨의 비리를 고발하는 진정서를 관계기관에 제출했다. 폐암에 걸렸다고 속여 석방된 김씨가 계속 세력을 키우는 한편 정·관계 및 수사기관에 비호세력을 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손씨는 법정에서 자신의 증언을 뒤집어 검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손씨의 진정 내용은 김씨가 유죄판결을 받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비록 손씨가 최초 진술을 번복하는 진정서를 나중에 법원에 제출했어도 손씨의 종전 진술에 신빙성이 있어 (김태촌씨의) 유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1993년 5월 슬롯머신사건이 터졌을 때 정덕진씨의 동생 덕일씨는 검찰 출두 전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당시 김태촌이 부하들을 데리고 전낙원씨의 카지노에 찾아가 행패를 부린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전씨는 우리 형제가 자신의 카지노를 넘본다고 판단한 듯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씨가 구속된 그 해 정씨 형제가 운영하는 슬롯머신업소는 국세청 특별세무조사를 받고 100억 원 이상의 추징금을 내야 했다. 정씨 형제는 그 일이 전씨의 영향력과 관련된 것으로 믿고 있다. 덕일씨에 따르면 당시 안기부 기조실장이던 엄삼탁씨(현 민주당 달성지구당위원장)가 “당신들이 살 길은 전낙원씨와 화해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는 것.

    김태촌씨와 정덕진·엄삼탁씨의 친분이 세간에 드러난 것은 1993년 슬롯머신사건을 통해서다. 김씨는 이날 J씨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덕진씨와는 사적인 인연이 있다. 서로 사업하는 데 도움을 주고받기도 했다. 엄삼탁씨와는 의형제를 맺었다. 두 사람과의 친분은 조직이나 자금력과 상관없는, 인간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1989년 김씨는 정씨에게 2억 여 원을 빌려 광주신양파크호텔 슬롯머신업소를 인수했다. 4년 후 슬롯머신사건이 터졌을 때 항간엔 김씨가 정씨를 협박해 그 돈을 받아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대한 김씨의 해명.

    “나는 어떤 사람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 내가 양보하면 하지 협박 따위는 하지 않아. 덕진 형이 (슬롯머신사건으로) 재판 받을 때 내게 돈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되자 자기가 빠져나가려고 내가 협박했다고 말한 거야. 그는 또 ‘왜 권총을 가지고 다녔느냐’고 묻자 ‘김태촌 쏘려고 그랬다’고 대답했지. 그래서 김태촌이 (정덕진을) 협박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 거야.”

    김씨는 과거 일에 대해 초연한 듯 말을 이었다.

    “뒷날 전낙원씨도 구속됐잖아. 그가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나도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제는 다 잊고 살아. 새 삶이 중요하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전씨는 1996년 11월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불구속기소됐다. 이듬해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3월 법정구속됐다가 그 해 8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김씨는 내친걸음이라 생각했는지 “항간에 잘못 알려진 얘기가 있다면 바로잡아 달라. 또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 보라”고 했다. 김씨는 이어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아들의 이혼에 개입했던 사건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절대로 조용기 목사님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야. 인천 뉴송도호텔 사건으로 내가 구속됐잖아. 그때 사실은 어느 부장검사가 연루됐지. 그 사람이 부탁한 일을 해결하려다 황OO(뉴송도호텔 사장)를 찔렀어. 그 부장검사 옷 벗었잖아, 그 일로. 그때 죽고 싶더라고.

    하도 괴로워 자살하려다 조용기 목사님에게 편지를 보냈어. 죽고 싶다고. 그런데 조목사님이 바로 답장을 보내신 거야. 그래서 조목사님을 알게 됐고 신앙에 눈을 뜨게 됐지. 그 인연으로 출소한 후 순복음교회에 나가게 됐고, 조목사님을 따라다니며 간증도 했어.

    그 아들 이름이 조희준이지? 지난번에 보니까 또 결혼한 것 같던데. 당시 탤런트 나OO와 결혼했는데, 그 여자가 조용기 목사님 손녀를 낳은 후 뭐가 잘못됐는지 하여튼 이혼하는 상황이 벌어졌어. 그런데 위자료를 너무 많이 요구해 그 아들이 고민하고 있었다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최자실 목사님(조용기 목사의 어머니) 장례식날 기도원에 기도하러 갔다가 기도원 식당에서 우연히 아들(조희준)을 만났어. (조목사) 가족 얘기를 하다가 그 얘기가 나왔지. 고민이 크더라고.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여자 쪽을 만나 얘기해보겠다고 한거야. 아들이 부탁한 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한 일이라고.

    그 후 내가 나OO를 만나고 (조희준의) 장인·장모도 만나 얘기를 했지. 그 일로 조목사님이 괜히 오해를 받아 그 다음부터 만나지도 못하게 됐어. 당시 “목사가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키느냐”는 얘기도 나왔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야.”

    김씨는 J씨에게 “신문사나 국회 같은 데 가서 나에 대해 잘못 알려진 얘기는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출소 예정일은 2004년 10월. 그의 부인은 가석방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제 다 살았어. 지금까지 10여 년 살았는데, 마지막까지 잘 버텨야지. 앞으로 더 열심히 살 거야. 이제 한 3년 남았어.”

    김씨에게는 보호감호 7년형이 따라다닌다. 보호감호법에 따르면 그는 교도소 형기를 마친 후 보호감호소에 들어가야 간다. 그러나 보호감호법이 바뀌어 보호감호 규정엔 과거와 같은 구속력이 없다.

    J씨는 김씨를 따라다니는 보호감호형에 대해 물어봤다. 김씨는 “옛날 사건(인천 뉴송도호텔사장 피습사건) 판결 때 받은 건데 열심히 생활해 모범수가 되면 보호감호를 받지 않아도 된다”며 희망을 내비쳤다. 이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어린아이 같았다고 J씨는 전한다.

    “아내 위해 살겠다”

    김씨는 가수였던 이영숙씨(55)와 3년 동안 편지교류를 하다 1998년 3월에 옥중결혼했다. 두 사람 다 재혼이다. J씨가 “형수님의 어디가 좋아 결혼했냐”고 묻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소개로 만났는데 정말 순수하고 한마디로 천사 같았어. 흔히 연예인에 대해 선입견을 갖게 마련인데, 이 사람은 너무 순수한 거야. 연예인이니 미모니 이런 걸 떠나서 사람이 그렇게 진실할 수가 없어. 나 때문에 암이 생겼어. 내 옥바라지하느라. 지금 나는 오로지 아내 건강만 생각하고 있다고.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나가서 다시 끌려가는 짓을 하면 안 되지.”

    J씨가 보기에 김씨의 얼굴이 발그스름하니 좋아 보였다. 김씨가 정색을 했다.

    “동상이 걸려 그런 거야. 이번 겨울에 너무 추워 고생 무지하게 했다. 처음으로 동상까지 걸렸어.”

    접견실 직원이 “시간 다 됐다”고 말하자 김씨는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또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다. 직원을 의식한 J씨가 더 질문을 하지 않자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면회 때 이런 얘기를 했다’고 전해달라”고 덧붙였다.

    J씨가 마지막으로 “사람들한테 형님이 진짜 이 세계를 떠났다고 말해도 문제없겠냐”고 물었다. 김씨는 “남아일언중천금이다. 사람들한테 확실히 그렇게 얘기해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면회실 안쪽으로 사라져 갔다.

    지난해 12월 청송교도소에서 출소한 소태영씨(62)는 김태촌씨와 2년4개월 동안 한 병동에서 생활했다. 그는 “내가 겪은 김태촌씨는 한마디로 무척 마음이 선한 분”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소씨에 따르면 김씨는 자신도 폐암 환자이면서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본다는 것이다. 주로 나이가 많거나 병이 심한 환자들이 그 대상이다. 김씨는 병동 재소자들로부터 ‘박사님’으로 불린다. 의학 관련 책을 많이 읽어 병에 대해 아는 게 많고 성경지식이 풍부해서다. 소씨는 당뇨병과 고혈압 협심증 등을 앓았다.

    “구치소에 있다가 청송으로 이감될 때 ‘살아선 못 나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김씨가 비싼 일제 약을 구해 아침저녁으로 먹을 수 있게 해줬다. 그 덕분에 몸이 좋아져 남은 형기를 견딜 수 있었다. 내겐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소씨는 딱 한 번 김씨와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다. 문성근씨(74)라는 환자 때문이었다. 문씨는 다른 재소자들이 ‘한방에 같이 있을 수 없다’며 다들 한방 쓰길 꺼리는 사람이었다. 치매가 심해 똥오줌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씨가 문씨를 받아들였다. 병동에선 보통 3∼4명이 한방을 쓴다. 소씨는 문씨와 함께 지내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 김씨 고집을 꺾지 못했다. 김씨는 매일같이 문씨가 싼 오줌똥을 치우고 속옷을 빨아줬다. 문씨는 출소할 때 김씨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궂은 일 도맡아

    김씨는 ‘거물’이라 그런지 남들보다 편지가 많이 온다고 한다. 하루 평균 7∼8통을 받는데 재소자 평균치의 10배 이상 들어오는 소포는 병동 재소자들과 나눠 갖는다. 과거 친분이 있던 사업가 정치인 목사들이 보내오는 것이다. 김씨는 성경퀴즈를 내 정답을 맞히는 사람에게 소포를 상품으로 주기도 하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그냥 선물로 주기도 한다. 속옷이 들어오면 남들에게 주고 자신은 다 떨어진 속옷을 입는다.

    소씨가 전하는 김씨의 하루는 무척 바쁘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에 많은 시간을 바친다. 기상 시간 전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김씨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수시로 기도시간을 갖는다. 성경은 하루 평균 3시간 읽는다는데, 소씨 말로는 하도 많이 읽어 성경 구절을 달달 외울 정도다. 재소자들은 매주 일요일 각 병실 창가에 모여 김씨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본다.

    환자 뒷바라지도 빠뜨릴 수 없는 일과인 데다 편지에 들이는 시간도 만만찮다. 받는 편지마다 일일이 답장하고 아내에게 2∼3일에 한번 꼴로 편지를 쓰기 때문이다. 시간이 남으면 성경 외 다른 책을 읽는다. 운동시간엔 휴지를 줍는 등 자발적으로 운동장 청소를 한다.

    소씨가 지켜본 김씨의 건강 상태는 매우 좋지 않다. 재소자들은 매일 한 시간씩 운동하는데 김씨가 즐기는 운동은 테니스다. 그런데 조금만 뛰어도 입가에 허연 버캐가 끼고 숨이 차 헉헉거려서 쉬엄쉬엄 해야 한다. 3층 건물 계단도 한번에 다 오르지 못한다. 폐가 한쪽밖에 없는 탓이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을 담은 통을 수건으로 싸 폐가 없는 쪽 가슴에 대고 잔다.

    “분노로 어떻게 살아가겠나”

    소씨에 따르면 김씨는 아내 이영숙씨를 끔찍이도 생각한다. 이씨는 지난해 봄 자궁경부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항암치료에 따르는 고통으로 부인이 밤늦도록 잠을 못 이룬다는 걸 알자 김씨는 자신도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 아내가 암에 걸렸다’며 옆에서 보기에 딱할 정도로 자학했다. 김씨는 또 옛 부하들의 면회를 일절 거절하고 있다. 부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김씨 방엔 다른 방에선 볼 수 없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언젠가 소씨가 “인권유린 아니냐”고 분개하자 김씨는 “내 마음이 자유로우니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씨는 “김씨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얘기를 못한다”며 기사에 자신의 이름을 밝혀도 좋다고 말했다.

    한편 김씨와 한병동에서 2개월 동안 지내다 출소한 K씨 또한 소씨와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K씨는 자신의 가족을 생각해 이름과 나이를 밝히지 말라고 했다).

    “씨앗을 뿌려 배추 상추나 과일을 수확해 다른 재소자들과 노나먹는다. 변기 청소와 뒤뜰 청소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K씨는 김씨와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다. 김씨의 ‘화려했던’ 주먹계 생활에 대해서도 잘 아는 편이다. 그가 보기에도 김씨는 정말 변했다.

    “바뀐 정도가 아니라 이상해 보일 정도다. 내가 알던 김태촌이 아니다. 성격이 완전히 개조됐다. 예전 같으면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남들한테 노나주고 퍼주길 즐긴다. 매일 성경책을 끼고 살면서 재소자들에게 ‘우리는 쓰레기였다’고 말한다.”

    최근 김씨가 자신의 후배 건달인 A씨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요즘 나는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쪽 폐가 없으니 남들보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가끔 분노도 치밀지만 분노로 어떻게 살아가겠나. 이제 아내도 다시 만났으니 여한이 없다.”

    그가 완전히 조직을 떠났는지 또는 ‘개과천선’했는지를 속단하긴 이르다. 무릇 진실은 현상의 뒤에 숨어 있는 법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무언가를 무척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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