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학교경쟁력 추락시키는 오락형·출세형 교사들

  • 이인규

    입력2005-05-02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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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사사회는 진정 ‘부적격자’들이 흘러넘치는 무능력 집단인가. 과연 그들은 무사안일에 젖어 개혁을 가로막는 수구세력인가. 무능한 교사를 퇴출시키는 시스템만 만들면 학교붕괴현상은 중단될 것인가.
    며칠 전 필자가 쓴 검정교과서가 심의에서 불합격처분을 받았다. 출판사측은 재검정을 받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역사, 지리, 일반사회 3개 영역 집필팀에 12명의 필자가 참가했고 편집팀과 디자인팀도 따로 있었는데, 회의에서 갑론을박을 펼쳤지만 불합격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다들 ‘네 탓이야’ 식으로 상대방을 은근히 겨냥했기 때문이다.

    왜 심의에서 떨어졌는지 확인할 방법은 있다. 심사위원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면 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간단한 일이 아닌 이상 회의를 통해 밝혀내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집필팀, 편집팀, 디자인팀 모두 잘못을 인정하면 된다. 내 영역에서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를 스스로 찾아내서 고치면 된다.

    사소한 일에서만 이런 상황이 빚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 교육계에는 학교교육의 위기를 놓고서도 남의 탓만 하는 일이 다반사다.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이 갈등하는 것에서부터 교육정책을 놓고 정부와 교원단체, 학부모단체가 갈등하는 것까지 모두 상대방의 잘못만 탓하고 책임을 묻는다. ‘남 탓하기’는 ‘신자유주의 정책’ ‘교원의 자질’ ‘관료주의’ ‘집단이기주의’ 등과 같은 추상적인 언어로 치장되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학교교육의 위기는 공동체의 위기로 비화된다.

    이런 현상은 정부가 강력한 교육개혁 드라이브를 펼 때, 교원단체가 단체교섭을 행할 때, 그리고 학부모단체가 강한 정체성을 표방할 때 더욱 심화된다. 또한 고액·불법과외로 국민적 스트레스가 가중되거나 학생들이 관련된 대형 사고가 일어날 때, 학교붕괴의 조짐으로 볼 만한 사건이 벌어질 때도 그러하다. 이런 경우 예외없이 문제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남에게 있다.

    교사 자질 논쟁



    가장 최근의 ‘사건’은 지난 1월4일 교육부 주최로 교육인적자원정책위원회에서 열린 2001년 교육정책 워크숍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이돈희(李敦熙) 당시 교육부 장관은 20여 분 동안 강한 어조로 교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학교가 학원과 경쟁해서 이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학원강사들은 연구·교수 활동에 엄청난 시간을 할애하는 데 반해 학교 교사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노력없이도 정년을 보장받는다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연구·교수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교사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돌아오는 이득이 없긴 하다. 열심히 하는 교사들이 능력을 발휘할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사범대, 교육대에서 훌륭한 교사를 길러내봤자 학교에 가서는 좋은 교사로 활동하지 못하며, 형편없는 교사를 길러내도 학교에선 별 문제 없는 교사로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교사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능력없는 교사는 자리를 떠나게 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이런 얘기가 나온 배경에는 제7차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교육부의 고민이 숨어 있다. 학교의 재량시간과 학생의 선택교과를 대폭 확대한 7차 교육과정에 대해 교원단체들은 교직의 불안정성, 지나친 노동강도, 불충분한 교육시설 등을 이유로 반대해왔다.

    교육부는 교사들의 지적에 대해 상당 부분 수긍했지만 당장 대안을 내놓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학교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학생들에게 적합한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대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처지였기에 교사들의 자질을 거론하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이 전장관의 발언을 즉각 반박했다.

    “학교 현장의 냉소주의는 교육부에 대한 불신과, 교원을 개혁대상으로만 삼는 교원정책에서 비롯됐다. 이에 대한 반성은 없이 모든 문제를 교사들에게만 전가하는 사고, 열심히 하는 교사보다 교장·교감이 되려고 매달리는 교사가 인정받는 왜곡된 교직사회에 대한 진단은 없이 현상적인 문제를 확대 해석하는 발상, 교원 양성·임용과정은 사범교육의 본질과 교육철학에 근거한 체계있는 교육과정이어야 하는데도 교대·사대를 땜질식 교사연수원쯤으로 바라보는 기능적 사고 등은 교육문제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수장의 인식으로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전교조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이 전장관의 발언을 비난하는 글과 옹호하는 글들이 함께 올랐다. 참교육학부모회 게시판에서도 이 전장관의 발언을 놓고 교사와 학부모, 학생간의 논쟁이 홍수를 이뤘다. 교육관련단체 게시판마다 서로를 비방하는 원색적인 글로 가득 찼다.

    학교 현장의 ‘모럴 해저드’

    어떻게 보면 학교가 학원에 뒤처지고 학교붕괴현상이 만연한 현실의 원인과 책임을 교사들에게 지우는 데 대해 교육부와 학부모, 학생들의 광범위한 연대가 형성돼 있고 그 속에 교원단체들이 포위된 듯한 형국이다. 그들이 날린 화살은 한국교원단체총연합(교총)이나 한국교원노동조합(한교조)보다는 전교조로 집중된다. 참교육을 표방한 탓에, 그리고 교육부와 갈등의 고리가 깊은 탓에 전교조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안티스쿨’이라는 사이트가 생겨 교사들을 파렴치범으로 고발하는가 하면, 학부모단체 사이트에서도 교사들에 대한 비판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교사들은 단골 안줏감이 되어 도마에 오른다. 대체적인 시각은 교사들이 무사안일에 젖어 있으며 개혁을 가로막는 수구세력이라는 것이다.

    교사사회는 진정 부적격 교사들로 흘러넘치는 무능한 집단인가. 능력없는 교사들을 퇴출시키는 시스템을 만들면 학교는 좋아질 것인가. 교사들의 ‘내부자 고발’을 통해서, 학생들의 호소를 통해서, 그리고 학부모들의 항의를 통해서 드러난 부적격 교사의 단면을 살펴보자.

    “그 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혐오스러운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면서 수학수업을 했어요. 쌍곡선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여자의 가슴으로 암시하고, x/y를 남자가 위에, 여자가 아래에 누워 성행위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했어요. 남학생 반에서는 재미있어 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정말 싫었어요. 그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가 있으면 ‘밤에 일 나가니?’라며 성적인 수치감을 주곤 했어요.”

    “국어교사 한 분이 어느 날 이른바 ‘연판장’을 돌렸다. 학교장이 자신에게 3학년 담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분명 3학년 담임을 할 차례가 됐는데도 ‘실력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일방적으로 담임을 주지 않은 데 앙심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동료 교사들은 ‘연판장’ 내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 국어선생님이 쓴 항의서한이 어법과 맞춤법에 맞지 않는 글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실제로 부적격 교사가 있다. 어느 집단에나 부적격자가 있듯이 교단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을 부적격 교사로 봐야 하며, 또한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행 교육제도로 부적격 교사를 퇴출시키지 못한다는 지적은 오해다. 지금 시스템에서도 학교장 경고는 물론 그 이상의 징계도 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학교 현장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현상이다. 학교에서는 문제가 있어도 쉬쉬하면서 온정주의로 풀려 한다.

    단지 교직사회의 자정(自淨) 의지가 부족하다는 걸 꼬집으려는 것은 아니다. 학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그런 문제가 생기면 대개 감내하고 넘어가지만 대신 이를 교원집단 전체의 본질적인 문제로 호도한다. ‘각론’은 모른 체하면서 ‘총론’만 들고 흔드는 형국이다.

    이처럼 교원집단 전체의 문제로 몰아붙이면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만큼 멀어진다. 가령 부적격 교사를 퇴출하기 위해서는 성과급제를 도입하거나 연봉제를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이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적격 교사를 효과적으로 가려내기보다는 교사집단에 대한 관료적 통제의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부적격 교사를 도태시키려다 오히려 ‘적격 교사’에게 상처만 주기 십상이다. 부적격 교사를 방치하는 학교 현장의 도덕적 해이를 치유하는 것이 지름길이므로 이를 우회하려 해선 안 된다.

    부적격 교사의 개별적인 사례들도 자주 거론되지만, 교사 전체의 반개혁적 성향에 대한 언론, 관료, 학부모, 학생들의 지적도 날카롭다. 특히 지난날 1500여 교사가 해직을 감수하면서 참교육을 외쳤던 전교조에 대한 국민의 요구수준은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실망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하다. 한 학부모회 임원은 전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솔직히 전교조는 이제 노동조합일 뿐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속 편하죠.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속상합니다. 결국 그렇게 변해버릴 전교조를 내가 그토록 열렬히 지지했던가 하고…. 요즘 전교조는 교사의 권익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정책이 나오면 아무리 진보적인 것이라도 반대성명을 내고 집단시위를 벌입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권익에 대해선 아예 ‘모르쇠’입니다. 학교를 다양화하자는 것도, 학생을 위해 선택교과를 늘리자는 것도, 아이들의 학습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통합교과를 늘리자는 것도 반대합니다. 사학 민주화처럼 ‘권력 분산’을 요구하는 데나 적극적이죠.”

    교사사회의 무사안일에 대한 지적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참교육학부모회 자유게시판에는 이런 고발이 실려 있다.

    “지금 일선 학교에 가봐라. 수업시간에 뒤에서 자는 애들이 태반이다. 그런 애들을 깨우는 교사는 별로 없다. 그렇다고 교사들이 수업을 따라오는 상위권 아이들에게 맞는 수준으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가사, 음악, 미술, 체육교사들? 연구는 무슨 연구며 학생에 대한 애정은 무슨 애정인가? 이런 교사들은 수업할 내용을 특별히 공부해 오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교장이나 교감 눈치보며 대충 책 읽고 진도 나가는데, 학생 대다수가 그런 과목 수업시간에 입시과목을 공부한다. 체육교사들은 아예 그냥 놀게 한다.”

    이런 지적에 대해 교사들은 “학교붕괴의 구조적 맥락에 대한 치밀한 접근 없이 ‘학교=교사’라는 좁은 시야로 현실을 판단,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교사의 등뒤에 교장, 교육청, 교육부, 정부, 그리고 국가의 교육정책과 교육이념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도 그런 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문제의 하중이 교사에게 실린다는 얘기다.

    실제로 교사가 학교에서 맞닥뜨리는 난제들은 개별적인 연구나 수업 전문화를 통해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최근의 학교붕괴 현상도 국가 근대화 체제에서 ‘압축적 근대화’ 작업의 일단을 담당했던 학교가 대변혁의 세기에 문화지체(culturallag) 현상을 보이면서 나타난 것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감지되는 붕괴현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전교조 참교육실천위원회 토론회에서 한 여고 교사가 들려준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면 그 책임을 교사에게 일차적으로 묻게 되겠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책임의 소재는 복합적이다.

    PLAY-PAUSE-PLAY…

    “차렷, 차렷-! 차-아-려엇! 차-아-려-엇!”

    반장이 차렷을 다섯 번쯤 외친다. 그래도 자기 자리에 돌아오지 않거나 친구와 떠드는 아이들이 있다. 나머지 50여 명의 아이들은 홍콩 무술영화 비디오를 보다 잠시 멈춤 버튼을 눌러놓은 듯 엉거주춤 어색한 자세로 앞에 서 있는 교사를 쳐다본다.

    “경례!”

    고개들이 잠시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은 순간, 교실은 곧 ‘PAUSE’ 버튼을 풀고 ‘PLAY’ 버튼을 누른 듯 활기 찬 움직임과 소리로 가득 찬다. 그 활기 속에서 오직 교사만 소외된다. 선생이 손으로 칠판을 몇 번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막대기로 교탁을 힘껏 내리친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썰렁한 얼굴로 교사를 바라본다.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교사는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너희들 오늘 학교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니? 난 지하철 속에서 만난 거지 소년의 웃음이…”

    그쯤에서 절반 가량의 아이들은 교사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하던 얘기를 계속한다. 한쪽에선 까르르 웃고 다른쪽에선 농구선수의 사진, H.O.T의 그림엽서가 오간다. 저 뒤에선 음료캔을 따는 소리….

    교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딱딱하게 굳는다. 신경 써서 준비했던 이야기를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하고 황급히 거둬들여야 하는 참담함. 교사는 끓는 속을 억누르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책들 펴!”

    분위기 파악에는 ‘귀재’인 아이들, 즉시 고요해진다. 이럴 때 잘못 걸리면 재수없게 당하기 쉽다. 그리고 어차피 이 과목은 필수. 지겨워도 대학 가려면 들어야 한다. 그래봤자 교과서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아이들은 극소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하품소리, 첫 시간부터 졸기 시작하는 아이들, 몰래 오가는 쪽지.

    “선생님!”

    의외라는 듯 학생을 쳐다보는 교사.

    “왜? 질문 있니?”

    “화장실 좀 갔다 오면 안 돼요?”

    지금 학교가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는 문화지체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과적으로 학교의 ‘적응력 부재’가 연이은 정책 실기(失機)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은, 이제라도 냉정하고 과감하게 정책을 전환하면 학교가 새롭게 재편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락형·출세형·개혁형 교사

    그렇다면 왜 교육정책들이 실기했을까.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교육개혁과 정책이 교육의 필요와 논리에 의해 이뤄졌다기보다 외부의 정치·경제적 요청과 필요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경험과 자생적인 개혁 아이디어를 교육 현실에 접목시키기보다는 관료와 학자들이 우리에게 맞지도 않은 외국의 이론과 아이디어를 무리하게 도입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 오히려 문제를 더 꼬이게 한 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공허한 구호와 타율적 규제로 교사들에게 자율적인 능력을 실험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고 피동적인 교직 수행을 관습화했다. 교사들을 개혁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키지 못하고 동원하는 방식으로 개혁이 추진되면서 정부의 교육개혁 조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적 태도를 형성하게 한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그렇게 야기된 교사들의 무관심과 냉소적인 반응을 문제 삼아 ‘국민적 압박’을 통한 정년 단축, 성과급제 등의 드라이브를 강행한 것이다.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로 교사집단에도 개혁의 싹이 있는가 하면 개혁의 암초도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이재정 의원(李在禎·민주당)은 지난 1월 펴낸 ‘학교를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정책보고서에서 교사를 세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유형은 ‘오락형’ 교사다. 이들은 수업보다 취미생활에 더 관심이 많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는 바둑이나 장기, 컴퓨터 게임을 즐긴다. 방과 후에는 테니스 같은 운동이나 놀이에 몰두한다. 승진에도 신경 쓰지 않고 학생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다른 직장에 비해 이른 퇴근시간과 방학은 그들이 즐기는 오락을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이들은 재테크에도 관심이 많다. 학교에 출근하는 대로 신문 경제면을 섭렵하고 교육용으로 지급한 컴퓨터로 틈만 나면 주식시황을 체크한다.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교사들은 겉으로는 이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이들의 경험에 바탕한 ‘비공식’ 강의에 귀를 쫑긋 세운다.

    둘째는 ‘출세주의형’ 교사다. 이 유형의 교사는 교육적 소신이나 학생에 대한 관심은 제쳐놓고 자신의 진로에만 신경을 쏟는다. 아부는 이들의 생존기술이다.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대학원에 가서도 공부보다 교수들과의 회식 같은 사교에 더 관심이 많다. 대학원에서 내주는 과제물은 동료나 후배 교사들의 몫으로 넘겨진다. 근무성적 평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교장 등 상급자들과의 술자리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는다. 과음한 다음날 수업이 비는 시간에는 대개 휴게실에서 빈둥거린다.

    이들은 승진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수업과 별 관계도 없는 현장연구나 수업자료·작품 제작에 목숨을 건다. 돈을 주고 업체에다 용역을 맡기기도 한다. 이런 교사들의 넘치는 수요 덕분에 교사들의 현장연구 논문 작성을 대행하는 업체는 호황을 누린다.

    셋째 유형은 ‘개혁형’ 교사다. 이들은 학교의 부조리나 동료 교사들의 나태함에 분노하고 교육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업과 학급경영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초임 시절의 정열과 소신을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교사들과 손잡고 권위주의적인 교장과 대립해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상급자나 다른 동료들로부터 경원시된다.

    지금 교직문화는 오락형·출세형 교사들이 개혁형 교사들을 포위하고 있는 양상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완수하려니 교사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출세형 교사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보다는 교장 말 잘 듣고, 점수 따기 연수와 전시용 연구에 매달리는 교사들에게 승진과 같은 보상이 더 많이 돌아간다. 이런 현실을 하나하나 개선하지 않고, 오직 ‘교육개혁’만 외치면 개혁적인 교사들이 많아지리라는 환상은 깨져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왜 교사사회 전체가 문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왜 개혁형 교사들이 학교에서 리더로 부각되지 못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들을 통해 학교가 스스로 변혁하고 그리하여 아래로부터의 교육개혁을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과 지원이 필요한지 살펴봐야 한다.

    부적격 교사 퇴출제도 같은 강압적인 방식이나 성과급제 같은 물질적 보상체계를 정비하는 것보다는 교직이 갖는 가치와 비전을 공유하도록 돕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사회가 새로운 교육의 패러다임을 원한다면 교사들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라. 누가 교사들에게 새로운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교육부인가? 교원단체인가? 학교 컨설팅그룹인가? 아무도 그러지 못한다면 이 작업이 급선무 아닌가.

    교사만이 학교붕괴와 교육의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으며, 위로부터의 교육개혁이 낳은 부작용의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교사들은 냉소적인 자세와 관료주의적 병폐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 주변부터 개혁해야 한다.

    ‘교사가 먼저 변해야 학교가 변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교사들은 반감을 갖는 듯하다. 다른 부문이 이미 선도적으로 자기 혁신을 완성했기 때문에 교사의 자기 변혁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개혁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서 자기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의 주체라 함은 다른 집단이나 세력을 개혁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개혁하고 자기 혁신으로 얻은 힘을 통해 주변을 정화하고 교육의 ‘기본’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교사뿐 아니라 교육관료와 학부모, 학교장에게 모두 적용되는 명제다.

    개혁 주체가 된다는 것은 시스템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갖추는 게 아니다. 사람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은 제도개혁은 반드시 실패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낡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운영하면 반드시 타락한다. 제7차 교육과정의 선출보직제나 자율학교, 자립형 사학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의 의식에 따라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한다. 제도는 본질적으로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의 것이다.

    교사 생존권<학생 행복권

    특히 교사들이 개혁의 주체로서 자기 혁신을 해야 하는 이유는 압축적 근대화 시절에 형성된 교사들의 교직관이 변화해야 학생들이 행복해질 수 있으며, 학교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는 힘을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교사들의 지식은 더 이상 권위적이지 않으며, 어느 경우에나 어떤 학생에게나 유용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은 학습의 보조자로서, 때로는 좋은 습관의 훈련자로서 새롭게 자리잡아야 한다. 학생들이 원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을 양보할 줄 알며, 학생들 스스로 가치를 탐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교사들의 존재 이유는 학생들의 행복에 있다. 학생 행복권과 교사 생존권의 가치 비중은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의 생존권이 학생의 행복을 위해 무조건 짓밟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학생의 행복을 위해 교사들이 얼마간 불편해지는 것을 용인해야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개혁의 주체인 교사들은 현장을 혁신하는 작업에 용감하게 나서야 한다. 정부로 하여금 ‘그림’의 구도를 전체적으로 뜯어 고치라고 압박하기에 앞서 학교 현장에서 개혁의 바람을 일으켜야 하고 그것이 다른 학교들로 확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원주의 사회에선 모든 부문에 예외없이 적용될 만큼 좋은 제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획일적인 다른 제도를 내놓으라고 하는 대신 자율성을 요구하고 그 속에서 과감하게 실험하고 실천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한 사람이나 집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쥐고 있다. 교육의 위기가 교사집단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도, 교육관료들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도, 학생과 학부모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도 모두 잘못이다. 이것은 분명 공동의 문제다.

    이런 상황에 이돈희 전장관이 교사들의 문제만 지적한 것은 어른답지 못한 것이었다. 교육관료들이 교사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부모들이 교사 개인에게 반감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 때문에 교사집단 전체가 문제라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과급이나 ‘정신감정’ 같은 방법으로 통제하면 교사들이 변화될 것이라는 착각도 버려야 한다. 교사들의 자기 혁신은 오직 교사에게 달려 있다.

    교육정책의 핵심은 교사들이 자기 혁신 집단을 만들고 이를 확산시킬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지난날 내놓은 그릇된 개혁정책에 대한 교육당국의 뼈저린 자기반성이 선행돼야 한다. 관료들 스스로 자기 변혁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자기 원칙을 세우고 이를 맹렬히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확립된다는 것을 안다면 교육 관료들의 자기 반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부모들도 일방적으로 교사들을 비난하지는 말아야 한다. 구조적인 난제에 처한 교사들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 그들의 아픔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내 자식의 이익을 위해 학생 전체의 이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학교에 대한 불만을 원색적으로 표출하기에 앞서 자기부터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실 학교문제의 상당 부분은 이기적인 학부모 때문에 야기된 것이다.

    최근 필자는 인성교육 교사모임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학생들을 위한 인성교육 프로그램과 교사·학부모를 위한 자기 혁신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는 것이 목적이다. 인성교육이라고 하면 흔히 집체교육과 예절교육을 떠올리는데, 이곳에선 교육을 통해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의식으로 접근한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고, 자신의 영혼이 이웃과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과 연관돼 있음을 깨닫게 하고, 교사와 학부모들이 진정 아이를 생명으로 대하고 그 속에서 양육과 교육의 즐거움을 찾게 하려 노력하고 있다. 오랫동안 제도개혁에 매달려왔던 필자 개인으로서는 뒤늦은 자각의 산물이지만, 학교를 변혁하는 데 이처럼 중요한 일도 없다고 본다.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성찰에 매진함으로써 교육계에 비난의 목소리보다는 자기 성찰의 목소리가 가득하기를 기대한다.



    교육&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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