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vs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 이창훈< 세계일보 기획취재팀 기자 > farsight@chollian.net

    입력2005-04-20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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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싱크탱크 전쟁’이 시작됐다. 여야 모두 당내연구소를 신설하거나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두뇌집단이라 하기엔 낯부끄러운 수준이라는 비판도 있다. 여야의 두뇌전쟁, 싱크탱크 경쟁의 현장을 들여다보았다.
    지난 2월15일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열린 국가전략연구소 개소식. 97년 대선 승리로 여당이 된 뒤부터 ‘숙원사업’이던 당내 싱크탱크(Think Tank)가 설립되는 순간이었다.

    당 총재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국가경영전략연구소(출범 당시 공식 명칭)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구현을 위한 당의 이념과 정책을 구체화하고 발전시키는 싱크탱크가 되어야 하겠다. 21세기 국가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희망의 생산기지’가 돼 달라”고 격려했다.

    임채정 소장도 “21세기 문명사적 전환기와 남북정상회담 이후 격동하는 한반도시대를 맞아 민족의 미래와 국가의 운명을 효과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국가 대전략’ 창출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연구소의 좌표를 설정했다.

    이날 개소식에는 김중권(金重權) 대표와 소속의원 100여 명이 참석해 당의 정책정당화를 향한 이정표적 의미를 갖는 국가전략연구소의 출범을 축하했다. 언론도 국가전략연구소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와 대칭점에 세우며 앞으로 달아오를 여야 싱크탱크 간 경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이틀 뒤인 2월17일 국회에서는 김원길 의원을 이사장으로 소속의원 79명이 참여한 새시대전략연구소 개소식이 열렸다. 당내 기구가 아닌 별도의 사단법인 형태인 새시대전략연구소는 옛 국민회의 당사 인근 안원빌딩 4층에 50여 평 공간을 빌려 문을 열었다.



    야당 시절부터 김대통령의 ‘브레인 풀’기능을 수행해온 아태재단이 당의 정책 현안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반면, 당내 기구인 국가전략연구소나 당 소속의원들이 직접 참여한 새시대전략연구소는 정책현안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이를 통해 야당과 정책대결을 펼칠 것이라는 점에서 존재 의미가 다르다.

    때문에 잇따른 여권 내 싱크탱크의 설립을 놓고 한국정치가 일관된 정책노선과는 무관한 ‘이슈 파이팅(Issue Fighting)’ 중심의 투쟁구조에서 선진적인 정책 대결구도로 업그레이드되는 청신호 아니냐는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또 이들 연구소 스스로도 미국의 헤리티지재단이나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이 정당 이념과 연계된 정책연구재단을 성장모델로 표방하면서 이와 같은 여론의 기대감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국회를 중심으로 삼각점을 이루며 마주 보고 있는 민주당사와 한나라당사에서 나란히 꼭대기 층에 자리잡고 두뇌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민주당 국가경영전략연구소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그리고 당 외 싱크탱크의 실험적 모델로 출범한 새시대전략연구소, 이들 여야 싱크탱크간 경쟁이 과연 험구(險口)와 몸싸움의 추태가 그칠 날 없는 우리 정치의 고질적 정쟁 체질을 세련되고 합리적인 정책대결 구조로 끌어올리는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정가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의 당 연구소가 출범한 직후인 지난 3월 초 현재, 이들 연구소의 미래를 밝게 보는 정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국가전략연구소가 아직은 태동단계라는 점, 그리고 여의도연구소가 야당의 궁핍한 살림살이 탓에 유지조차 어려운 실정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책대결의 정치구도를 향한 시금석이라 할 정당연구소들의 장래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대칭점에서 경쟁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여야의 당내 연구소들은 모두 총재의 직할 통치를 받는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국가전략연구소는 당의 조직도상 총재인 김대통령 직속기구로 자리잡았고, 여의도연구소는 당에서 분리된 재단법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야당이 되면서부터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이사장을 맡고 있어 사실상 총재 직속기구나 다름없다.

    벌써부터 위상 논쟁 벌여

    그러나 두 연구소 관계자들은 서로 비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국가전략연구소의 한 실무관계자는 “국가전략연구소는 여의도연구소처럼 총재의 연설문 작성 같은 ‘페이퍼워크’나 하려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면서 “명칭이 연구소여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한나라당의 기획위원회와 같이 큰 틀에서 정치 경제 사회분야 현안에 대한 당의 대응방향과 전략을 구상하고 조율하는 곳으로 보아달라”고 주문했다. 또 “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한 3선의 임채정 소장과 ‘배지도 달지 못한’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의 ‘정치적 눈높이’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으냐”며 여의도연구소와는 위상이 다름을 강조했다.

    반면 여의도연구소 관계자들도 “싱크탱크 본연의 기능은 당과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고 중립성이 확보될 때 발휘할 수 있다”면서 “기껏해야 ‘당내 기구에 불과한’국가전략연구소를 싱크탱크로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격했다. 또 “국가전략연구소는 결국 당 정책위나 청와대비서실과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권한을 놓고 유사 기관과 다투다가 유야무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폄했다. 그러나 두 연구소 관계자들 모두 상대당 연구소의 재원이나 연구인력의 수준 등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국가전략연구소는 구성원들이 내세우는 자존심만큼이나 확고한 위상이 보장돼 있다. 임소장이 당 중진일 뿐 아니라 김중권 대표 및 당5역과 함께 매주 청와대 보고에 참석, 김대통령과 마주보고 대화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도 자랑하고 있다. 연구소의 정치적 파워가 여당의 경우 대통령, 야당의 경우 당총재와의 거리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국가전략연구소는 단순한 싱크탱크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 모든 정책 현안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파워탱크’의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가전략연구소가 출범 3주째를 맞은 지난 3월6일 당사 10층 소장실에서 연구위원들과 회의를 가진 직후 기자를 만난 임 소장은 “당 정책위는 행정부와 정책현안을 조율하는 기능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만 국가전략연구소는 중장기적 국가경영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힘을 주었다. 그는 또 “그 동안 한국정치는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구도 위에서 지역갈등과 구태적 정쟁이 지배하다 보니 정책대결이라는 것이 싹틀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야 정당간 정책를 갖고 경쟁할 정치환경적 기반이 어느 정도 구축됐다”며 국가전략연구소 설립이 갖는 정치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임소장의 자신감과 달리 국가전략연구소의 모양 갖추기는 의아스러울 만큼 지지부진한 상태다. 비상근 부소장으로 임명됐던 황태연 동국대교수가 설화(舌禍)를 입고 낙마한 사건이 연구소의 의욕적 출발에 찬물을 끼얹은 측면도 없지 않다. 황교수는 연구소 창립 12일 만인 2월27일 국회 ‘21세기 동북아포럼’ 조찬토론회에서 “6·25전쟁의 책임은 국제법적 절차에 따라 소추해 규명될 문제이지 전쟁 당시 유아였던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게 사과를 요구할 성질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이 발언이 ‘김정일에게 6·25전쟁에 대한 사과를 요구해선 안 된다’로 해석되면서 정국을 발칵 뒤집자 서둘러 연구소 부소장직을 사임했다. 당직을 보유한 채 언론과 야당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당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발언 파문이 확대되자 민주당은 어디까지나 황교수가 개인 의견을 피력한 것이지 연구소와는 무관한 발언이라며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연구소의 존재를 대외에 각인시킨 첫 번째 사건이 ‘설화’라는 사실은 연구소의 이미지에 상당한 흠집을 남기게 됐다. 연구소 내부에서는 이미지 손상보다도 현 정부의 손꼽히는 논객으로 연구소 활동을 실질적으로 견인할 황교수가 낙마함으로써 추진력이 크게 위축됐다는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국가전략연구소는 출범에 쏠리는 기대만큼 설립 추진과정에 당내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지는 못한 듯하다. 김대통령은 연구소 설립 후 첫 청와대 주례보고에서 임소장에게 “(연구소 설립을) 어렵게 결정했으니만큼 열심히 해서 성과를 거두라”고 말했다.

    어감상 김대통령이 연구소 설립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임소장은 이에 대해 “김대통령도 연구소 설립이 당의 슬림화라는 명분에 역행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셨다”고 인정했다. 당의 한 관계자는 “기존 아태재단과 기능이 중복된다는 문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아직 한국 정치의 수준과 체질상 정당의 연구소가 본연의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 김대통령의 인식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해석했다.

    당 총재인 김대통령의 지원 의지가 확고하지 않다는 것은 연구소가 처한 현실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우선 국가전략연구소는 연구인력 확보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초 ‘20여 명의 연구진을 3실 체제로 편성해 ▲정치개혁 및 정치발전 ▲당의 중장기 전망과 발전방안 ▲중장기 국가정책개발 및 국정운영방안 ▲국정현안 등의 연구활동에 집중할 것’이라는 청사진을 밝혔지만 현재까지 외부에서 박사급 1명과 석사급 1명을 영입하고 당에서 6명을 지원받아 총 8명의 연구인력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청와대 언론비서관을 역임한 이병완 상근부소장은 “연구소의 운영 목적이 학술적인 연구실적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현안 분석과 당의 중장기적 정책개발에 있는만큼 학계나 연구소의 연구경력보다는 ‘현장감각’이 중요하다”면서 “앞으로 충원될 연구 인력도 현장감각을 우선 고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연구인력 확보는 그렇다 쳐도 재원 확충 역시 여의치 않아 보인다. 당 정책전문위원 출신인 곽해곤 연구1실장은 “연구소 설립을 기획하는 과정에 재원 마련 및 독립성 확보 여부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1안은 당에서 기금을 출연해 독립된 재단법인 형태로 세운다, 2안은 국고보조금 중 20%를 연구소에 직접 지원하도록 정당법을 고쳐 독립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재원을 확보한다, 3안은 당내 기구화였는데 최종적으로 3안이 채택됐다”고 말했다. 원래의 청사진은 충분한 재원을 확보해서 별도 법인으로 설립하는 것이었으나 결국 당내 기구로 후퇴했다는 얘기다.

    명의도용 시비에 휘말려

    연말까지 연구소 활동비로 20억원 정도의 기금을 확보할 방침이지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연구소 설립 작업이 그다지‘주도면밀’하게 추진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명칭문제다. 출범 초 대내외적인 공식명칭이 ‘국가경영전략연구소’였던 국가전략연구소는 개소식과 함께 당사 현관에 현판을 걸고 난 뒤에 한 통의 항의서한을 받았다. 발신인은 강경식 전 부총리 등 전직 국무위원들이 설립한 한나라당 외곽단체인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아홉 글자 중에서 겨우 끝자 하나가 다를 뿐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명의 도용’이나 다름없으니 재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내건 명칭을 출범하자마자 고칠 수도 없어 고심 끝에 결국 공식명칭은 그대로 두되 언론 등 대외적 으로는 ‘경영’이란 단어를 빼고 ‘국가전략연구소’로 줄여서 부르자는 미봉책을 마련했다. 결국 당 기구표에는 여전히 ‘국가경영전략연구소’로 존재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국가전략연구소로 불리는 웃지 못할 혼선이 초래된 것이다.

    당내 기구인 국가전략연구소의 현실은 거의 동시에 출범한 김원길 의원의 새시대전략연구소와도 뚜렷이 대조된다. 새시대전략연구소의 경우 출범과 함께 각각 4명의 박사급 연구위원과 석사급 연구간사를 확보해 발빠르게 연구소의 골격을 완성했다. 연구인력 확보와 재원 마련뿐 아니라 연구소의 존재와 활동을 홍보하는 작업 등이 초스피드로 진행돼 출범 5일째인 2월22일에는 미국의 친공화당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과 자매결연도 했다.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가진 조인식에는 에드윈 퓰러 소장과 켄 쉐퍼 아시아지역담당관 등 헤리티지 재단측 주요 인사 상당수가 참석했다. 4월중에는 연구팀을 미국에 보내 헤리티지 재단의 운영에 관해 속속들이 벤치마킹해 온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반대로 헤리티지 재단 쪽에서도 연구인력을 보내 연구협력창구 개설을 논의키로 했다. 영문이니셜인 NSIK(New Strategy Institute-Korea)를 공식명칭으로 사용하면서 별도의 로고도 제작했는가 하면 수시 제작하는 활동 리포트 형식의 소식지인 ‘NSIK 소식’을 출범 3주 만에 7차례나 발간했다.

    재정확충 계획도 매우 조직적이어서 입회비 100만원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한 79명의 의원들을 이사와 평회원으로 나눠 이사는 월30만원, 평회원은 월10만원씩 운영회비를 내야 한다. 이사로는 강성구 강운태 강현욱 곽치영 김민석 김태홍 남궁석 박광태 박상규 박인상 설송웅 송영길 유용태 유재건 이재정 이창복 임종석 장영신 천용택 함승희 의원 등 20명이 참여했고, 감사에는 이호웅 장영달 허운나 의원이 선임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돈줄’은 월 100만원씩 내는 특별 회원들로, 이들은 주로 기업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길 이사장은 당의 공식적 지원을 받지 않는 새시대전략연구소의 출발이 쾌조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 “문제는 추진력에 있다”면서 “6개월 후에는 지금보다 규모 면에서 정확하게 2배 이상 커질 것”이라고 호언했다.

    김이사장은 여권에서 국가전략연구소와 별도로 사설연구소를 가동하는 것이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국가전략연구소는 여당의 당내기구로 관계와 학계, 기업 등의 전문가들을 광범위하게 네트워킹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고급 두뇌들이 모인 싱크탱크가 되기는 어렵다”면서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당과 거리를 가진, 독립된 연구기관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 모두 지역색이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 당원이 돼 당내 연구기관에서 일한다는 게 일반 연구자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인데 별도법인 형태인 우리 연구소는 그런 부담이 적은 만큼 당의 외연확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새시대전략연구소의 경우 성격과 기능이 김대통령이 퇴임 후 복귀하게 될 아태재단과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당내, 특히 동교동계의 견제가 계속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김 이사장은“동교동계의 견제가 없지 않았지만 권노갑(權魯甲) 전최고위원을 찾아가 새시대전략연구소의 연구영역은 현실정치와 경제문제에 국한돼 평화와 통일정책개발을 지향하는 아태재단과 영역충돌은 없을 것이란 점을 충분히 설명드렸고 권 전최고위원도 이해하셨다”고 말했다.

    여권에서 야심차게 출범한 두 연구소의 미래를 올해로 출범 6년째를 맞는 여의도연구소의 부침과 연관해 점치는 것이 얼핏보기엔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여의도연구소의 경우 모체인 한나라당이 여당에서 야당으로 처지가 바뀌는 결정적인 외풍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한국정치사에서 빈번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여의도연구소야말로 역설적으로 여당의 두 연구소의 앞날과 관련, 참작할 가치가 있는 모델일 수도 있다.







    95년 당시 정당 출연 연구소로는 사상 처음이던 여의도연구소의 출발은 현재 민주당의 당내외 두 연구소를 합한 것보다도 화려했다.

    당시 민자당 총재인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세계화 시책에 부응한다는 기치하에 주로 민주계 인사들이 주도했던 여의도연구소는 출범 첫해와 이듬해에 걸쳐 200억원의 기금을 출연한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독립 재단법인으로 출범했다. 통일 및 안보정책 연구를 재단 설립 목적으로 설정, 외무부에 설립신고를 한 것은 당시 김대중씨의 아태재단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을 낳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해 2월 개소식에서 “미국 공화당의 중요 정책을 개발해내는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1급 연구소가 돼달라”고 당부하며 각별한 관심을 표했고 설립 당시 정관에서 ‘차관급 대우’를 명시했던 박사급 연구위원의 경우 13명을 공개채용했는데 무려 220여 명이 응시해 16 대 1에 달하는 경쟁률을 기록했다.

    선발된 13명 중에는 현역 국립대학 교수와 서울소재 대학 전임강사 5명이 포함됐을 만큼 여의도연구소는 수준급 연구인력을 확보했다. 연구직원 20명과 행정직원을 포함해 40여명의 인력이 당시 민자당사 인근 동우국제빌딩 5, 6층을 전세내 사무실로 이용했다.

    창립멤버인 여의도연구소 선임연구위원 곽창규 박사는 “당시 연구위원실이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화려하다는 지적을 받아 다시 검소한 장식으로 교체하는 해프닝이 벌어질 만큼 초창기 연구소의 위용은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당초 민자당 몫의 국고보조금으로 재단기금을 출연한다는 계획이 중앙선관위의 제재를 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선관위는 “용도가 정해진 국고보조금을 별도기관이나 설립자금으로 운영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국고보조금의 재단기금 출연을 금지한 것이다. 이 바람에 200억원을 목표로 했던 재단기금은 43억원을 확보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당초 연구소가 내세웠던 중립성과 독립성이라는 위상도 출범 초부터 당내 민주계와 민정계 간의 파워게임에 휘말리면서 굴절되고 만다. 먼저 여의도연구소의 본격 출범 직후에 취임한 김윤환(金潤煥) 사무총장이 사실상 민주계가 설립한 여의도연구소에 탐탁지 않은 심사를 드러냈다. 여의도연구소를 당 정책위 소속으로 하고 확대당직자회의에 여의도연구소장이 참석도록 한 것이다. 초대 이영희 소장은 서울대 재학중 한일회담반대시위로 제적됐던 6·3세대로 민정계에 대해 본질적 거부감을 가진 인물이니만큼 김총장의 이런 조치는 이소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해 11월 이소장은 국민대 정치대학원 특강에서 “5·18사태 주역들의 단죄와 수구세력의 퇴장이 있어야만 한국정치의 선진화를 위한 역사적 토양이 마련될 수 있다”고 언급, 민정계를 자극한 데 이어 주간지 인터뷰에서도 “문민정부가 5·6공 전체와 단절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5·6공을 주도했던 인물이 당을 이끌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해 당시 당대표를 맡고 있던 김윤환씨를 정면으로 비난했다.

    좌초하는 여의도연구소

    결국 이영희 소장은 교체됐고 이를 계기로 여의도연구소는 중립성이라는 출범 초의 이상이 훼손되고 말았다. 2대 소장에 내정됐던 서울대 표학길 교수가 극구 고사해 한때 소장대리체제로 운영되더니 3대 소장으로 내정됐던 황인정 전 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이 다시 소장직을 고사하는 등 두 번에 걸친 파행은 여의도연구소가 연구소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중립적 연구기관을 표방했지만 외부로부터는 결국은 정당조직이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게 된다.

    대단하던 위용과 규모는 야당이 되면서 급전직하했다. 재정상 별도의 공간확보를 포기한 채 당사에 입주한 뒤부터 43억원의 재단기금은 대부분 차입형태로 당에 유입됐고 지금은 당으로부터 차입금의 이자조로 연간 3억원 정도의 운영비를 지원받을 뿐이다.

    13명의 연구위원은 뿔뿔이 흩어졌고 현재 박사급 연구위원은 4명에 불과하다. 행정지원팀도 따로 없어 1명의 석사급 연구원과 3명의 연구간사가 행정보조 업무를 겸하고 있다. 전화 ARS 여론조사를 담당하던 당내 사회개발연구원이 해체돼 연구소 산하 조사팀으로 합류한 것을 제외하면 현재 여의도연구소는 연구인력과 행정인력을 다 합쳐도 총원 10명 규모로 축소됐다.

    출범 초에는 매월 발간되던 ‘여의도 정책논단’은 야당이 되면서 ‘폴리비전21’로 명칭을 바꿔 계간지로 전환했다가 이마저 지난해 말 발간이 중단됐다. 옛 영화는 간데 없고 잔해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유승민 소장에 대한 이회창 총재의 각별한 신임과 여당 내 싱크탱크 설립에 자극받아 여의도연구소 중흥 계획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수호 전의원의 아들로 KDI에서 13년간 근무하다가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전격 발탁된 유승민 소장은 “비록 과거 여당 시절처럼 규모있는 정책개발기구 노릇은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연구위원들이 갖고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필요한 경우 정책개발의 아웃소싱이나 정책자문단 구성의 기능은 훌륭히 해내고 있다”며 “예산의 제약을 받는 야당의 연구소는 싱크탱크로서보다는 싱크 넷(Think Net)기능에서 존재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유 소장은 이어 “오히려 최근에는 서울대 박세일 교수 등 학자들을 중심으로 싱크 넷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야 공히 정당 출연 연구재단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꼽는 독일은 어떤가. 한남동 단국대 정문 옆 두경빌딩 3층에 위치한 독일 기독교민주당(CDU) 계열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서울지부 사무실. 기민당의 정책 연구기능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교육을 역점사업으로 삼고 있는 아데나워 재단이 서울에 지부를 설치한 것은 78년이다. 독일인 소장과 한국인 직원 3명으로 구성된 서울지부의 지난해 예산은 5억원.

    전세계 90여 곳의 분소 가운데 하나인 이곳의 예산이 여의도연구소의 1년 예산보다도 많다는 사실은 한국과 독일의 국력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말해 준다.

    독일은 기민당의 아데나워재단뿐 아니라 사회민주당(SPD)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자유민주당(FPD)의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기독교사회당(CSU)의 ‘한스 자이델 재단’, 녹색당의 ‘하인리히 뵐 재단’ 등 주요 정당마다 의석수에 따른 국고보조금을 지원받는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각 정당의 재단들은 연구활동을 통해 정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부합하는 정책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시민정치교육이나 환경·노동 등 주요정책 관련 세미나 개최, 언론 및 학술활동 지원 등 공익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비록 정당이 기금을 출연해 설립하고 정당국고보조금을 지원받는다고는 하지만 정파적 이해를 초월한 공익적 성격과 독립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기업과 시민들의 기부도 활발하다.

    정당간 이념적 정체성에 따라 에버트재단은 노사관계, 나우만재단은 지방자치, 자이델재단은 통일과 평화문제, 뵐재단은 환경문제로 영역을 나누어 소속 정당의 정책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재단이 세계 각국에 분소를 두고 소속 정당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쓰고 있다. 뵐 재단을 제외한 4개의 재단은 서울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

    오로지 정권재창출이냐 정권탈환이냐는 권력다툼 외에는 눈돌릴 여유조차 없는 우리의 정치현실과 비교해 국경을 넘어서까지 정당의 이념을 구현하고 전파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독일정당의 연구 재단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패러다임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아데나워재단 지원으로 독일 뮌헨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자민련 서준원 정책전문위원은 “독일의 경우 정당의 지속성이 보장돼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정치적 구조가 다르니만큼 독일과 같은 연구재단의 설립을 목표로 논의하는 것은 무리”라고 진단했다. 서 위원은 또 “미국의 헤리티지와 브루킹스 연구소등이 민주·공화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부합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정치적 싱크탱크 구실을 할 수 있는 것도 양당 체제기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카루스의 날갯짓

    정당연구소가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체인 정당이 분명한 이념적 정체성과 지속성을 유지하는 정치의 구조적 토대가 확립돼야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재원이다.

    여야 정당연구소 관계자들은 정당연구소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해 제 기능을 수행하는 방안으로 정당법상 정당국고보조금 20%를 정책개발에 쓰게 돼 있으나 사실상 사문화돼 있는 현실을 들어 “20%의 정책개발비를 연구소에 직접 지원토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정당보조금으로는 비대한 중앙당조직을 운영하기에도 빠듯한 실정이다 보니, 이는 터무니없는 이상론으로 치부되고 있다.

    정당의 연구소 또는 연구재단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는가는 정치 문화의 수준에 따르는 것이란 연역적 결론이 가능하다. 최근의 여야간 싱크탱크 경쟁이 정책대결구도로 자리잡을 수 있는가는 우리 정치의 수준과 가능성을 가늠해볼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야 싱크탱크의 경쟁이 정치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지렛대로 기능할 것인가, 아니면 날아 오르지 못할 이카루스의 날갯짓에 그치고 말 것인가. 비록 극히 희박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고질적인 정쟁 위주의 정치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국민들은 전자가 그 답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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