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내 아버지 소파를 두 번 죽이지 말라”

소파 방정환 아들 방운용 옹의 피끓는 절규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5-04-20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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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들 코묻은 돈으로 만든 동상이나마 있으니 이젠 됐어요. 더 이상 재단은 안 했으면 해요” 방정환재단의 파행으로 겪은 마음고생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팔순노인은 분노와 회한이 엇갈리는 표정으로 방정환재단이 파행으로 치달은 지난 2년을 회고했다.
    지독한 황사(黃砂)였다. 방운용 옹(方云容·83)을 처음 만난 3월7일, 서울의 대기는 사람들의 눈과 목을 자극했다. 쌀쌀한 공기 탓에 더더욱 을씨년스럽기만 한 날씨였다. 방옹이 사는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주공아파트. 약속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각인데도 아파트 주차장에 미리 나와 기다리는 방옹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 방정환의 유일한 아들인 방옹은 말년에 얻은 아들마저 유학을 떠나보내고 노부부가 단둘이 살고 있다. 낯선 방문객의 손을 맞잡는 그에게서 누구라도 찾아오면 반겨줄 듯한 너그러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한때는 제 집 드나들듯 이 아파트를 출입했다는 이씨의 행적에 새삼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치밀었다.

    첫 인터뷰에서 방옹은 피를 토하듯 이종찬씨와 세상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이씨의 범죄혐의를 입증할 만한 자료를 취재진에 한가득 챙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방옹은 배웅을 하겠다며 10분 거리에 있는 전철역까지 취재진과 동행했다. 그리고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3월13일 오전, 다시 방옹의 철산동 집을 찾았다. 일주일도 안 됐지만 그 사이 방정환재단사건에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경찰조사에서 혐의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던 이종찬씨에게 리베이트성 뇌물을 줬다는 증인이 나타나면서 수사는 급진전됐고 이씨의 구속은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 소식에 방옹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타일렀거늘…” 방옹은 이 말을 되풀이했다.



    ―이종찬씨의 공금 유용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제넘은 얘기인지 모르지만 세상 혼자 사는 게 아니니 어른들 공경하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나중에 돌아다니는 얘기 들어보니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예요. 명예를 훼손당한 사람도 적지 않아요. 그분들도 다 저명한 사람들이라 이종찬이에게 당하고도 어디 내놓고 말도 못 하고, 그러다 보니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지요. 처음엔 저도 아들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남들이 뭐라고들 하면 덮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래선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제2, 제3의 이종찬이 나오지 말라는 법 있나요.”

    ―이종찬씨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색동회 회장이던 윤극영 선생을 통해 인사를 했지요. 97년인가, 98년인가부터 우리 집에 출입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집에 올 때도 혼자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그를 안 믿게 되면서는 늘 다른 사람을 앞세우곤 했는데 재단이사장인 김명윤씨도 이종찬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 가운데 한 분입니다. 재단이사장인 김명윤씨와 이종찬의 관계는 훨씬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옹의 말대로 김이사장과 이씨의 관계는 뿌리가 깊다. 96년 김이사장이 ‘장한나후원회’ 회장을 맡을 때 이 이벤트를 연출한 이가 바로 이종찬씨였다. 오랜 인연 탓에 김이사장만은 이종찬씨의 사기 전력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방옹은 대답을 피했으나 옆자리의 부인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돌연 방옹은 미국 유학중인 외동아들 얘기를 꺼냈다.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애가 미국 가기 전에 그래요. 제발 이종찬이와 어울리지 말라구요. 그런데 이렇게 일파만파로 일이 커지고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서는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는 얘기를 안합니다.”

    ‘방정환재단 사건’의 가장 큰 정신적 피해자이면서 아들에게만은 근심거리를 전하고 싶지 않다는 부정(父情)에 공감이 가긴 했지만, 어쩌면 주위에 아무도 도움을 청할 가족이 없는 노인이라는 점을 상대가 악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건립예산만도 수백억원에 달하는 방정환기념관을 건립하겠다며 거창한 계획서를 들고 나타난 이종찬의 유혹을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살고 있는 노부부가 과연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처음 이씨는 소파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나섰다면서요.

    “97년 봄인가 어느 날 밤에 알고 지내던 아동문학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색동회 사람들과 아동문학가 등이 현직 총리를 모시고 소파기념관 건립준비위원회를 만든다, 방정환기념사업회 모임을 갖는다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유족대표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라고 해 조찬모임에 나갔는데 이수성 총리, 김명윤 의원 등이 계셨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했지만 기념관이라는 게 여러모로 이용해야 하는 것이어서 실제 그 자체로는 그다지 쓸모가 없어요. 그저 일년에 한 번 돌아가신 분 추모식이나 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도 건물 유지비는 들어갑니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겠다며 이경재 전의원, 이동원 전의원 등이 인사차 찾아왔을 때도 저는 기념관 건립은 싫다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의 순수한 돈, 한푼 두푼 모은 코 묻은 돈으로 마련한 아버님 동상으로 만족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든 미국이든 어느 나라를 가봐도 어린이를 위해 일하다 돌아가신 분을 기념해 작게라도 기념관을 운영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외국인들을 불러다 어린이 관련 행사를 해도 데리고 갈 만한 곳이 없지 않습니까. 어린이 관련 민간단체들도 사무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기왕 재단을 만들고 기념관을 세우겠다고 하니 가난한 어린이 관련 단체들이 모여 지낼 수 있는 공간이 되겠다 생각했지요. 저 자신은 재단이니 기념관이니 탐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건 분명히 해두고 싶어요.”

    ―이종찬씨가 사심(邪心)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는 판단을 언제 했습니까?

    “사실 기념사업을 시작하면서 이종찬에 대한 잡음도 흘러나왔습니다. 당초 이종찬이가 전과자라는 얘기가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으면 달리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색동회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 이겁니다. 어느 날 조용히 이종찬에게 ‘자네가 전과가 있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가 있다’고 그래요. 한번은 처가 경사에 갔는데 저보다 나이 어린 처남하고 말다툼을 하다 때려서 상해죄로 구속된 적이 있다고 해요. 다른 하나는 면세점에서 친구에게 카드를 빌려줬는데 친구가 카드빚을 갚지 않아서 구속이 됐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소파선생 기념사업한다는 친구가 전과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고 나무란 뒤,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는 ‘멀쩡한 사람 잡는다’면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고 다녔습니다.”

    ―재단을 만들 당시까지도 이종찬씨를 믿었다는 말씀이군요.

    “그 후 재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요, 이종찬이가. 이런 좋은 사업을 하는데 재단을 만들어야 각계에서 성금을 모으기가 유리하다고 그러더군요. 당시 이수성 전총리가 이 사업에서 물러난 뒤라 전택부 선생을 새 위원장으로 모시겠다고 그래요. 전택부 선생은 내가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이인데 전선생을 만나러 가자고 해 같이 갔습니다. ‘참 젊은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선생을 만나 재단이사장으로 모시고 싶다 하니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소파선생 기념사업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며 종로YMCA건물 재건 당시 경험을 얘기하면서 이대로 하면 된다고 해 고무돼 돌아왔습니다. 얼마 뒤 이종찬이가 와서는 문화일보사에 가자고 그래요. 왜 가느냐 물으니 남시욱 사장이 이 사업을 문화일보 차원에서 도와주겠다고 해서 전택부 선생을 모시고 서대문 문화일보사에 같이 갔지요.”

    ―재단 구성과 관련해 그 뒤 이종찬씨가 업무보고를 하던가요?

    “신문사도 방문하고 해서 그 후로는 일이 잘되는 줄 알았는데 흐지부지해요. 며칠 뒤 문화일보 사고(社告)에 성악가 조수미가 10만달러를 방정환재단에 희사했다, 그런 얘기가 나왔더라구요. 그런데 이종찬이는 나뿐 아니라 재단 이사 누구에게도 돈이 어떻게 들고나는지 얘기한 적이 없어요. 내가 답답해서 ‘돈이 좀 모아졌느냐’고 물으면 ‘얼마 안 돼요. 그저 경비 정도 될까요’ 그렇게 대답하더라구요.”

    ―그런데도 이종찬의 행적이 의심되지 않던가요?

    “97년엔가요, 내 생전 가장 큰 행사를 치렀습니다. 12월 말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를 모시고 프레스센터에서 ‘방정환 문집’ 헌정식을 가졌습니다. 그날 보니까 대통령당선자가 나온다고 해서인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인과 재벌총수, 기업인이 80명 이상 찾아왔어요. 이수성씨와 나 두 사람이 입구에 서서 인사를 했는데, 하여간 그날은 내 생애에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어요. 이렇게 대통령당선자까지 움직일 정도니 이종찬이를 의심했겠어요. 하여튼 그날도 손님들이 저마다 봉투 하나씩을 내미는데 나와 이수성씨는 인사하느라 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확인도 못 했습니다만, 이종찬이 말로는 이수성씨에게는 보고를 했다는데 그랬겠습니까? 나한테는 돈에 대한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이종찬씨의 행적을 보면 거금이 모아지면 모금에 참여한 인사를 재단에서 밀어내곤 했다는데요.

    “늘 혼자 하는 거예요. 뒤끝이 좋지 않게 방정환기념사업회 일을 그만두고 난 뒤 이수성씨가 저더러 ‘이종찬이는 맹랑한 친구’라고 그러더라고요. 이수성씨 말이 자신이 나서서 김대통령까지 참석하는 행사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종찬에게 재단법인을 설립하라고 코치도 해줬대요. 그런데도 이수성씨를 재단설립에서 제외시켰어요.”

    ―재단 설립 뒤에도 그랬습니까?

    “마찬가지예요. 사업보고를 하나, 이사회를 하나… 이건 완전히 이종찬이 제 마음대로예요. 소파상이라는 게 있어요. 해마다 아버지 돌아가신 날 주는 문화상인데요, 한동안 시상이 중단됐다가 재단이 설립되면서 부활했는데 시상식날 행사장에 조금 일찍 나갔는데 마침 이경재 의원이 나와 있더라구요. 나를 보더니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밖에서 보자고 해요. 그래 따라갔죠. ‘방선생님 큰탈났습니다. 이사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내가 소개해 이 일을 시작했는데 이거 이종찬이 원맨숍니다’ 그러는 겁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이전의원 말이 일전에 마사회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알선했고 그 뒤 이종찬이 더러 보고를 하라 했는데 보고가 없어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됐느냐고 채근했더니 그 후 보고고 뭐고 소식을 딱 끊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더러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이 무렵 이전의원은 방옹이 이종찬과 한편인 줄 알았다고 한다. 방옹도 이전의원이 이종찬과 같은 광주 이씨 종친인 까닭에 두 사람 사이가 긴밀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방옹과 이전의원이 만나 자신의 비행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 사실을 안 이씨는 그 후 의도적으로 방옹과 다른 이사들이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설령 이종찬씨가 다른 이사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요.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종찬의 비리를 알고 난 뒤 태도가 달라지더군요. 또 내가 이경재씨 쪽에 접근할까 봐 그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했습니다. 그 후 이전의원의 보좌관이던 이상일씨를 만나 이종찬과 관련한 소문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마사회에서 받은 지원금 2000만원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경재 의원이 터무니없이 이종찬을 헐뜯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을 알고 나니 낯이 뜨거웠습니다. 남들이 이종찬이가 전과자라 손가락질하면 그걸 말린 사람이 난데…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후 방옹은 이씨를 만나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고 인연도 끊자”고 단교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2000년 봄 미국에 있는 아들집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해 7월 도서관에서 신문을 열람하던 방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김명윤씨를 새 이사장에, 권노갑 민주당 고문이 총재로,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조승형 변호사, 이주영 의원, 탤런트 최불암 등 쟁쟁한 인물들을 이사로 영입한 방정환재단의 새출발 소식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유족이 없는 방정환재단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도 가만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그해 추석 이틀 전 이종찬씨가 다시 철산동 집을 찾아왔다. 김명윤 이사장과 여직원 몇 명을 데리고서였다. 이씨가 못마땅했던 방옹은 마지못해 김이사장 일행을 응대했고 그날의 냉랭한 분위기에 김이사장도 어색해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방정환재단의 파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마침내 김명윤 이사장마저 이씨를 배척했고 이씨는 경찰조사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김명윤 이사장 등 이종찬씨를 고소한 현 재단관계자들은 방정환재단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는데요.

    “그건 안 됩니다. 유족의 뜻과 상관없이 재단을 할 수 없습니다. 99년 8월에 더 이상 재단을 안 하겠다는 생각으로 보훈처에 인가증을 반납했습니다. 우리 유족의 뜻은 재단의 해산입니다. 비록 어린이들 코 묻은 돈으로 만든 동상이지만 소파선생 동상이 있으니 그것으로 됐습니다.”

    눈물의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

    “그렇지만 법인으로 존속하는 이상 유족의 뜻과 상관없는 재단이라도 존속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방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옆에 있던 부인은 눈물을 비치며 말했다.

    “그렇게는 안 돼요. 재단을 없애야 해요. 저렇게 놔두면 종찬이가 언제 다시 돌아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방옹이 재단사업을 벌이면서 가장 가슴아팠던 기억은 99년 11월9일의 ‘소파방정환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 당초 이 행사는 포스코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 분수공원에서 치러질 계획이었다. 유명 연예인과 어린이 관객을 대거 초청해 치르기로 한 이 행사는 그러나 포스코측이 막판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행사가 무산될 상황에 몰렸다. 행사 전날 밤 이종찬씨는 방옹에게 전화를 걸어 “방해세력이 많아 예정대로 행사를 못하게 됐다”고 통보했다.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포스코의 자금지원 중단이 행사를 중단한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 무렵 이씨는 마사회 지원금 횡령사건과 카드사기 등으로 수배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행사를 못 치른다는 말에 방옹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연예인들이야 못 올 수도 있지만 소파의 후배들로 무대에 오르기로 약속한 미동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밤새 뒤척이던 방옹은 어린이들만으로 행사를 열기로 결심했다. 마음이 약해지고 다리가 떨릴 때면 ‘하늘나라의 아버지도 어린이들만의 힘으로 꾸민 잔치를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이렇게 스스로 위안했다.

    “아침 일찍 미동초등학교를 찾아갔습니다. 다행히도 미동초등학교 교장도 제 뜻에 흔쾌히 동의해 주셨습니다.”

    초라한 무대였지만 어린이들의 손으로 꾸며진 ‘방정환 선생 탄생100주년 기념음악회’를 마친 뒤 방옹은 미동초등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슴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탄생 100주년행사를 망쳐버린 회한과, 빵 한조각 사주지 못했지만 초라한 무대나마 끝까지 지켜준 어린이들에 대한 고마움에 목이 메었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가라” “아버지 유품을 보여주마” 방옹은 모처럼 온 객을 보내기 아쉬웠던지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지체하게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취재진이 아파트 문을 나서자 방옹이 다시 따라 나섰다. 아파트 입구에 서서 방문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여전히 손을 흔들었다. ‘이쯤이면 들어가셨겠지’ 하고 돌아서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드는 방옹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철산동을 찾았을 때 눈과 목을 가렵게 하던 황사는 볼 수 없었고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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