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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화제

18세 이세돌이 빚어내는 盤上의 질풍노도

  • 손종수 < 전 ‘바둑세계’ 편집장· 바둑평론가 >

18세 이세돌이 빚어내는 盤上의 질풍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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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기풍은 어떤가. 약점이 있다면? 상당한 속기(速棋)로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가끔 경솔한 수를 둔다는 말도 있다.

“공격형이었는데 요즘은 집을 중시하는 쪽으로…. 빨리 두기는 하지만 초속기는 아니다. 형세 판단에 약점이 있다.”

스스로 ‘나의 기풍은 이렇다’고 말하기는 관록의 대가(大家)라도 쑥스러운 일. 의사표현이 솔직한 N세대지만 역시 이 부분에서는 얼굴을 붉히며 얼버무린다.

사실 소년의 기풍은 잘 알려져 있다. ‘리틀 조훈현’이란 애칭 그대로 실리에 강하고 발빠른 전투형. 감각이 뛰어나며 난전의 수읽기가 정확하고 빠르다.

―의식하는 상대가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라이벌을 꼽는다면 누가 있겠나. 나이가 비슷한 기사 중에….



“최명훈 7단은 아주 힘든 상대지만 나이 차이가 많고…. 신예 중에서는 역시 진석이 형(목진석 5단)이 제일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최철한, 원성진, 박영훈과 대국할 때 부담을 많이 느낀다. 후배여서인지 지면 다른 상대보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

거명한 두 선배는 모두 타이틀 홀더다. 최명훈은 무서운 ‘아줌마’(?) 루이나웨이를 물리치고 LG 정유배를 차지했으며 목진석은 이창호를 밀어내고 KBS 바둑왕이 됐다. 하긴, 이세돌은 당당한 2관왕이다. 꼭 라이벌을 꼽자면 그쯤은 돼야겠지.

뒤이어 호명된 최철한, 원성진, 박영훈은 85년생 트리오로 2000년도 다승, 승률 등 주요 성적 상위에 랭크돼 있는 ‘앙팡테리블’이다. 이들은 이세돌이 일으킨 N세대 혁명의 추종자이기도 하지만 그 관계는 머지않아 치열한 경쟁으로 바뀔 것이다.

―가장 존경하는 기사가 있다면 누군가? 꼭 현대 기사가 아니라도 좋다.

“없다. 좋아하는 기사는 조훈현 9단이다. 기풍도 닮고 싶고 무엇보다 30년 가까이 그런 성적을 유지한다는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기관리가 대단하다. 본받고 싶다.”

존경이나 호감은 엄연히 다른 표현이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이 둘의 차이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 존경하지는 않더라도 호감이 있는 상대라면 누군가 물어왔을 때 그 사람과의 교분이나 체면을 생각해서 ‘존경한다’고 의례적으로 말하는 데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소년은 단호하게 ‘존경하는 기사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쉽게 ‘좋아하는 기사는 조훈현 9단’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존경하는 기사’는 조훈현인 것이다. 어쩌면 소년은 정당한 승부조차 피하고 싶을 만큼 기꺼이 허리가 굽혀지는 사람에게나 ‘존경’이란 표현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년은 얼마 전 문용직 4단과 인터뷰하며 ‘이상형으로서 닮고 싶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말했다. 조훈현을 좋아하지만, 그는 필연적으로 승부 무대에서 마주칠 상대이고 넘어야 할 대상이므로 아버지처럼 기꺼이 굽히는 존경심을 가질 수는 없다는 뜻 아닐까. 소년의 간명한 대답은, 인간사회에 모호하고 간단치 않게 섞여 있는 존경과 호감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류기사가 되면 나만의 ‘바둑관’이라는 게 생길 것 같다. 막연한 질문이지만 바둑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글쎄, 잘 모르겠다. 내게 바둑은 그냥 바둑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부분의 프로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입단했을 때보다 바둑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바둑이 갈수록 어렵다.”

가볍게 웃는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둑이라고. 이 말은 조치훈의 철학적 사유가 함축된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는 독백과 비슷한데 그런 연륜의 깨달음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갈수록 어렵다’는 말은 어떤 소성(小成)의 경지를 엿보게 해준다. 오래 전 이창호는 똑같은 질문에 ‘바둑은 끝없이 먼 길을 가는 것’이라고 대답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는데….

“프로는 나이로 말하지 않는다”

―대국료나 우승상금이 형(이상훈 3단)의 수입을 넘어섰을 것 같은데 관리는 어떻게? 용돈은?

“큰누나(이상희·27)가 한다. 나뿐 아니라 가족들의 수입은 전부 큰누나가 관리하는데 용돈은 하루 1만원쯤 타서 쓴다.”

비금도의 가족이 하나, 둘 서울로 올라와 지금은 어머니(박양례·53)만 고향에 남아 3년 전 타계한 아버지의 터전을 지키고 있을 뿐, 5남매가 행당동에 아담한 둥지를 틀고 함께 산다.

―대국이 없는 날은 무엇으로 소일하나. 특별히 즐기는 스포츠라든가 좋아하는 취미 같은 게 있다면….

“없다. 특별히 잘하는 운동도, 즐기는 스포츠도 없다. 집에서 가끔 게임을 하는데 그것도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다. 집에서는 그냥 잠을 많이 잔다. 대국이 있는 날은 일찍 일어나지만 없는 날은 늦게까지 잔다. 오후 3, 4시쯤 일어나는 날도 많다.”

인터뷰 내내 짧고 직선적인 표현. 이번에는 말해놓고 스스로도 겸연쩍은지 머리를 긁으며 웃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얼굴. 언뜻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시니컬한 표정이 스치는 게 묘하다.

함께 자리한 둘째 누나(이세나·25)가 보다못해 “왜, 친구들하고 볼링도 하고 당구도 좀 치잖아. 집에서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도 하고…”라며 거들자 고개를 갸웃한다. 볼링이나 당구나 구력을 말할 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아, 이제는 좀 알겠다. 왜 소년의 말이 계속해서 ‘없다, 아니다’로 짧게 끊어지는지.

적어도 소년이 스스로 ‘무엇을 한다’고 말할 때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최고이거나 최고를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사실이 아니거나 마음에 없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 설혹 그것이 상대의 기분을 다소 상하게 하더라도 말이다. 소년이 가진 세속의 예절이나 배움은 투박한 것이나 그 마음은 투명하다는 것을 알겠다.

―바둑을 두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평소 그런 생각은 없었는지….

“내 성격에 얌전하게 학교나 다니는 모범생은 아닐 것 같다. 음…. 컴퓨터나 벤처 계통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쪽이 맞을 것 같다.”

내 성격에? 소년은 스스로 ‘즉각적이고 직선적이며 모험적’인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아울러, 그 독특한 개성을 누를 생각도 없다는 듯 말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가까운 목표는 물론 LG배 우승이겠고, 좀더 미래지향적인 목표가 있다면?

“최고가 되는 것이다.”

이런, 우문현답이 되고 말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두 개의 타이틀을 거머쥔 데다 이제 1승이면 세계타이틀을 획득할 프로에게 너무 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 짧은 대답의 느낌은 아주 좋았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숙연한 표정으로 ‘최고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소년의 얼굴에서, 비로소 당대 최고의 무대에 올라 세계 최강을 다투는 프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인터뷰 내내 웃고 찡그리던 개구쟁이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깜박 잊고 있었다. ‘프로는 결코 나이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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