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해외경제|파산위기의 일본경제

깊어가는 ‘10년 불황’, 실종된 정치지도력

  • 이영이 <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 yes202@donga.com

깊어가는 ‘10년 불황’, 실종된 정치지도력

2/4
유명 대기업들의 사정은 그래도 낫다. 어느 거리를 걸어도 디플레이션(물가하락) 추세는 역력하다. 예전에는 100엔이면 시내버스(요금 200엔)나 지하철(한구간 120∼170엔)도 탈 수 없었지만 요즘에는 불고기 한 접시, 생맥주 한 잔, 재킷 한 벌 세탁, 간단한 옷가지나 생활용품 구입 등 뭐든지 할 수 있다. 이른바 ‘100엔숍’이란 이름의 상점이 곳곳에서 성업중이다. 심지어 노래방도 37엔만 내면 30분이나 즐길 수 있다.

이쯤되자 물가지수는 점점 하락하여 1월 도매물가지수(95년 평균=100 기준)는 95.7로 지난해 1월보다 0.3% 하락했으며 조사 비교 시점인 95년보다는 4.3%나 떨어졌다. 이는 4개월 연속 하락한 것으로 하락폭도 지난해 9월 이후 최대다.

지난해 전국 소비자물가지수도 전년보다 0.4% 하락하고 12월 말 현재 101.6을 기록했다. 똑같이 95년 평균=100을 기준으로 할 때 주요 선진국의 소비자물가지수를 보면 ▲영국 114.2 ▲이탈리아 114.0 ▲미국 114.0 ▲독일 107.7 ▲프랑스 107.0 수준이다. 일본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물가가 정체상태에 있는 것.

슈퍼마켓 등 생필품 판매점의 물가하락은 이보다 더욱 두드러진다. 일본 세존종합연구소가 최근 413개 슈퍼마켓의 357개 품목 판매가격을 토대로 조사한 지난해 물가동향은 전년보다 2.0% 하락했다. 세존연구소측은 “정부통계에는 바겐세일 등 단기적인 가격인하는 포함하지 않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실제 물가수준을 측정하기 위해 이를 포함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물가하락에 대해 소비자들은 “오래간만에 싼 물건이 많아져서 좋다”며 반가워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고민은 심각하다. 물가가 하락하면 기업의 매출과 수익이 줄어들고 기업 경영이 악화되면 개인소득도 줄어들어 소비가 위축되고 다시 물가가 하락하는 악순환으로 접어들게 된다. 최근 일본 정부는 이미 디플레이션 상황에 접어들었다고 인정했다.



디플레이션이 왜 두려운지에 대해 이와타 기쿠오(岩田規久男) 학습원 대학 교수(경제정책)는 이렇게 말한다.

“물건을 싸게 파는 것 자체는 소비자들에게 나쁘지 않다. 문제는 상품을 공급하는 기업이다. 가격인하로 경영이 악화된 기업이 종업원의 임금을 낮춰 고용을 유지할 수 있으면 괜찮지만 임금을 깎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인력 감축의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소비가 줄어드니 또다시 가격을 인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업의 빚 부담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 디플레이션 아래에서는 매출이 늘지 않기 때문에 빚 상환에 쫓기게 된다. 그러면 자금을 투자에 사용하지 못해 경제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디플레이션 압력을 없애지 않으면 일본경제의 재생은 불가능하다.”

이와타 교수가 우려하는 고용불안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실업률은 지난해 12월과 올 1월 두 달간 4.9%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수준을 기록했다.

그래도 사치성 소비는 화끈

그러면 왜 소비가 위축되고 물가가 계속 떨어지는 것일까. 일본인들은 실제 경제생활에서 그렇게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일까.

아사히신문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성인 남녀 3000명 대상) 결과를 보면 일본인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조사에서는 ‘개인소비가 왜 줄어들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장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45%로 ‘돈이 없기 때문에’(34%)라는 대답보다 훨씬 많았다. 또 ‘사고 싶은 물건이 없다’는 응답도 13%나 돼 일본 소비가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또 일본 경제 전망에 대해서도 ‘나빠지고 있다’는 응답은 27%에 불과했으며 ‘변함이 없다’(50%) ‘좋아질 것이다’(14%)가 과반수를 차지해 경기침체에 무감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소비가 위축됐다고는 해도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용품이나 식료품 등 전반적인 소비는 위축되고 있지만 사치성 소비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아낄 때는 아끼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값을 따지지 않고 돈을 쏟아붓는 소비 패턴이다. 한국처럼 ‘백화점 가는 사람’과 ‘시장 가는 사람’이 나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수십만엔씩 하는 고가품을 척척 사는 것이다.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에 긴자에 있는 루이뷔통 판매점에 가보았다. 지난해 11월 새로 오픈한 이 점포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경비원이 출입구를 막고 통제했다. 문 앞에는 어림잡아 100명이 줄을 서 있었는데 경비원은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 손님을 세어 정확하게 그 수만큼만 들여보냈다.

몇 십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은 돈이 많아 보이는 ‘귀부인’들이 아니라 평범한 10∼30대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우리처럼 구경만 하는 ‘윈도쇼핑’은 거의 없었다. 모두들 들어가면 하나에 10만엔(약 110만원) 가량하는 루이뷔통을 들고 나왔다. 크리스마스 전후 이 점포에서는 하루평균 5000만엔(약 5억5000만원)어치를 팔았다고 한다. 이 가게에서는 일본경제가 침체되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일본 여성들이 ‘사족을 못 쓴다’는 루이뷔통은 지난 1년 동안 일본에서 1000억엔(약 1조1000억원)이상 팔아 사상최고 매출을 기록했다. 루이뷔통의 전세계 매출 중 3분의 1 이상을 일본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 루이뷔통뿐 아니라 샤넬, 에르메스, 구치 등 세계적인 제품은 모두 ‘침몰하는 경제대국’ 일본에서 사상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사치성 소비는 거의 타격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여행업계에서도 볼 수 있다. 일본 관광전문사 JTB가 최근 조사한 5월 황금연휴(4월29일∼5월6일) 여행동향에 따르면 국내외 여행을 계획한 사람은 전년보다 6.6%(국내여행 6.8%, 해외여행 0.8% 증가)나 늘어난 2293만3000명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4년 연속 증가한 것인데다 증가폭도 사상 최고수준. 1인당 여행경비도 국내여행에서는 전년보다 3.3% 늘어난 4만1767엔(약 45만원), 해외여행은 4.6% 늘어난 23만9072엔(약 260만원)을 사용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97년 외환위기 직후 전국민 소비가 꽁꽁 얼어붙고 해외여행이 격감하는 등 호들갑을 떨었던 한국의 불황 때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게다가 한국 같으면 연일 매스컴에서 사치성 소비를 꾸짖는 보도가 나왔을 텐데 그런 기사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일본 경제를 낙관하는 근거로 꼽기도 한다.

이런 소비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다름아닌 거대한 경제규모와 높은 저축률이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 이상이어서 우리나라의 세 배가 넘는다. 미래를 대비해 저축하는 습관 덕분에 현재 가구당 금융자산도 3070만엔(약 3억3000만원) 가량 된다.

현재 일본 시중은행의 예금 금리는 연간 0.02%. 1000만원을 1년간 맡겼을 때 세금을 제하고 받는 이자가 커피 한 잔 값인 1700원밖에 안 되는데도 저축률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일본 광고회사인 덴쓰(電通)가 최근 성인 남녀 67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을 보면 장래를 위해 저축을 늘리겠다는 응답자가 38.0%로 지난해 같은 시점보다 4.7%나 늘어났다.

일본 경제의 저력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조업부문의 경쟁력이다. 한국은행 도쿄사무소 부소장인 안세일(安世一) 박사는 “일본은 국내총생산(GDP)이 약 5조달러(500조엔)로 세계 2위 규모인데다 자동차 전자 정밀기계 소재 및 부품산업 등 제조업부문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인 비교우위에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외환보유액이 3600억달러에 이르고 월평균 100억달러(연간 120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어 웬만한 충격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는 것.

수출로 단련된 일본 제조업은 확실히 강하다. 소니와 도요타로 대표되는 일본기업 제품들은 세계시장을 석권하며 가장 비싼 값에 팔린다. 지난해에는 엔화가치가 계속 강세였지만 수출은 꾸준히 호조를 보여 무역흑자는 여전히 세계 최고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세계 32개국 3500개 품목에 대한 경쟁력을 조사한 결과 일본이 세계 1위인 품목은 354개로 한국의 55개에 비해 7배 가까이 많았다.

그러니만큼 일본 제조업들은 국제무대에서 자신감이 넘친다. 자동차산업만 보더라도 GM과 크라이슬러, 포드 등 세계적인 업체들이 생존을 위해 전략적 제휴나 합병 등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지만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만은 ‘독야청청’하며 독자적인 전략을 펴고 있다. 또 미국 등 대부분의 자동차업계가 올해 생산설비를 축소하고 구조조정을 추진중이지만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업체들은 오히려 미국 유럽 등지에서 현지생산을 늘리고 있다.

2/4
이영이 <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 yes202@donga.com
목록 닫기

깊어가는 ‘10년 불황’, 실종된 정치지도력

댓글 창 닫기

2019/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