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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깐수’ 정수일 박사 특별기고

한국·이슬람, 1천2백년 교류사 탐험

  • 정수일 < 전 단국대 교수 >

한국·이슬람, 1천2백년 교류사 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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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러한 상생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이다. 한국과 이슬람은 실로 이질적이고 원격(遠隔)한 두 문명이지만 그 만남은 역사의 필연이다. 이로 인해 그 생명력은 면면히 이어졌으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이슬람의 근본이념에 따르면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신앙체계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이 합일된 생활양식이며, ‘인간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조화로운 전체’이고, 종교와 세속 쌍방을 모두 아우르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다.

기독교 사회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있으나, 이슬람 사회는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샤리아(이슬람법)에 의해 통치·운영되는 정교일치 사회다. 그리하여 이슬람에는 사회 제반 영역에 관한 고유의 사상과 이념, 제도와 규범이 나름대로 마련되어 있다. 이것이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슬람’이라는 단어에는 종교로서의 이슬람교와 무슬림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해 창출된 결과물의 총체로서의 이슬람문명이라는 두 가지 뜻이 복합적으로 내재한다. 따라서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이란 한국과 종교인 이슬람교의 만남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문명)와 이슬람문명과의 만남도 아울러 뜻하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13억 신도를 가진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유라시아대륙 50여 개 나라를 망라하는 범세계적인 이슬람문명권(일명 이슬람세계)이 형성되어 인류 역사발전에 간과할 수 없는 기여를 해왔다. 이슬람문명권은 발원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동서에 활 모양으로 뻗어 있다. 일찍이 그 동단(東端)의 가장자리에서 3국 통일로 성운을 맞은 한국(신라)과 처음으로 만났다. 한국으로 보면 그 만남은 실로 범상치 않은 만남이었다. 세계로의 비상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5년경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W. Rubruck)가 그의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카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G. de Cespedes)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1627년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漂着)한 네덜란드 상선 프리깃선 오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가 한국 해역에 나타난 최초의 이양선(異樣船: 외국배)이라고 여겨져왔다.

서구보다 앞선 아랍과의 만남

이처럼 한국과 서양이 뒤늦게 만나다보니 근세에 이르러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세상을 알지 못하고, 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이른바 ‘은둔국’이었다. 한국에 은둔국이란 이름 아닌 이름을 붙인 사람은 미국의 동양학자이며 목사인 그리피스(W. E. Grifis)다. 그는 일본 도쿄대학 교수로 있을 때인 1871년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모든 것이 금시초견(今時初見)이고 초문(初聞)이라서 의아하기만 하였다. 돌아간 다음해에 그는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이란 책을 펴냈다. 그가 한국을 일컬어 ‘은둔국’이라고 한 것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살아온 한국을 이제서야 발견했다는 뜻에서였다. 2년 후 한국에 온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도 저서 ‘한국역사(History of Corea)’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면 과연 한국은 그네들이 빈정대듯 호젓하고 닫힌 나라였는가? 서구인들의 주장처럼 그들에 의해 비로소 한국이 세상에 알려졌는가? 대답은 역사가 한다.

루브루크보다 400~500년,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00~800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무슬림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하였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귀중한 사료가 중세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요컨대 한(漢)문화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만방에 소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 무슬림들로, 그 역사는 자그마치 1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아랍 무슬림 학자들은 자신의 견문이나 연구 및 기타 여행가들로부터의 전문 등을 토대로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지견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술하였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첫 기록을 남긴 사람은 술라이만(al-Sulaiman)이란 아랍 상인이다. 그는 현지 체험기인 ‘중국과 인도의 소식’(851년)에서 신라가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 후 아블 피다(Abu’l Fida) 같은 지리학자는 신라의 경도와 위도까지 상세히 기술하였다. 이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지리관념이 타파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이 첨가되었다.

10세기 이후 신라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한층 자세하다. 특히 중세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al-Idrisi)가 작성한 세계지도에는 신라를 중국 동남해상에 위치한 여러 개의 섬나라로 명기하였다. 이것은 서방의 세계지도에 한국이 처음 등장한 벨호(B. Velho)의 지도(1562년)보다 무려 408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명이 기입된 현존 세계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막의 아들’로부터 일약 ‘바다의 아들’로 변신한 아랍 무슬림들로서는 산명수려하고 무구무병(無垢無病)한 자연환경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가 비록 멀기는 하지만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방면에 관한 여러 가지 생생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지리학자 마크디시(al-Maqdi shi)가 966년에 쓴 책 ‘창세와 역사서’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라고 기술한 것이 그 한 예다.

저술자들은 또한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 특히 황금이 풍부하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문자 그대로 ‘황금의 나라’였다.

최초로 신라를 세계지도에 명기한 이드리시는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라고 기상천외의 놀라움을 토로했다.

만인이 그토록 선호하고 귀중히 여기는 황금이 여기 신라 땅에서는 개의 사슬로부터 가옥의 단장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흔하게 쓰이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못내 놀랍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넉넉한 부의 혜택을 누리는 신라인들의 생활상은 한마디로 이상향이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絶好)의 나라다. 그곳에서는 … 불구자를 볼 수 없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이것이 중세 아랍 무슬림들의 눈에 비친 신라인의 생활상이다. 또한 그들은 신라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며 ‘양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바로 이것이 외래인들이 신라를 찾아갔다가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이렇듯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으로 선망하였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이 신라에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인 ‘처용설화(處容說話)’에 나오는 주인공 처용의 정체는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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