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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100년 비화 · 2

‘40년 간판쟁이’ 백춘태의 간판전쟁으로 지샌 날들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40년 간판쟁이’ 백춘태의 간판전쟁으로 지샌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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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그 동안 미술대회에서 탔던 상장과 메달을 챙겨들고 교복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무작정 찾아간 곳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인천 화수동에 있던 인천극장이었다. 간판을 그리는 작업장으로 미술부장을 찾아가 불쑥 상장과 메달을 내밀며 “극장간판을 그리고 싶습니다” 했다. 말이 취직이지 무보수 견습생으로 붓 근처에는 얼씬하지 못 하고 간판 달기나 청소 등 온갖 잡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림이 뜻대로 그려지지 않아 미술부장의 심기가 불편한 날이면 문 밖으로 쫓겨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야, 오야지(미술부장) 성질 가라앉았다. 들어와라”는 선배의 말이 떨어진 뒤에야 겨우 작업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인천에서 극장간판을 그리던 시절 잊혀지지 않는 은사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고등학교 때 미술을 가르치신 황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인천극장으로 두어 번 나를 찾아왔다. “미대 갈 줄 알았더니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간판쟁이 되려고 그래?” 책값이 없으면 박봉을 쪼개 책을 사줄 만큼 애정을 보이던 선생님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가슴이 아팠다. 또 다른 은사는 키네마극장 미술부장을 지낸 분이다.

극장간판은 이론서나 기술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어서 오로지 혼자 기술을 터득해야 했다. “다 어깨 너머로 배우는 거야”라는 선배들 말이 유일한 정보이자 가르침이던 시절, 극장간판은 그리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수준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잘 그린 간판을 보고 다니는 것은 살아 있는 공부였다. 욕심이 앞서 서울까지 드나들었지만 그때마다 “내 그림은 턱도 없다”고 수없이 좌절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는 대학에서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한 사람이 간판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고, 외국 기법이나 기술이 들어와 지방 간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세련됐다. 그나마 인천에서 간판 그림이 괜찮았던 키네마극장 미술부장을 무작정 찾아갔다.

환쟁이 아들을 인정해주신 아버지

“무보수로 일해도 좋습니다. 수련생으로 있게 해주십시오.”



“이름이 뭐냐?”

“백춘탭니다.”

“백가? 나도 백가다. 한집안 사람이니 어디 한번 일해봐라.”

키네마극장으로 출근한 지 며칠 뒤, 내 손으로 생전 처음 최은희, 김진규 주연의 ‘돌아온 사나이’ 간판을 그렸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붓질을 끝냈지만 그림을 본 선생님(미술부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기가 꺾여 있는 내게 선배가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원래 우리 오야지는 잘했다는 말 절대 안 해. 잘못한 것만 말해. 아무 말 없으면 잘한 거야.”

이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직전 비로소 ‘환쟁이’ 아들을 인정해주었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타고난 끼니까 열심히 해봐라.” 마지막 가는 길에 내내 못마땅해하던 당신 마음이 걸렸던 걸까. 어쨌든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 무거운 마음도 미련도 없이 가족과 인천을 떠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은 때 나는 갓 스무살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맨처음 찾아간 곳이 중앙극장이다. “보수를 안 받아도 좋다. 쫓아내지만 말고 일하게 해달라.” 사정 끝에 또다시 ‘무보수 수련생’ 딱지를 달고 고달픈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새벽같이 작업장에 나와 청소를 마치고 선배들이 그 날 쓸 페인트와 붓을 챙겨놓으면 어느새 출근시간이 됐다. 남들이 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도 작업화로 갈아 신으며 벗어놓은 양말을 거둬 빨고, 선배 집으로 달려가 도시락을 받아들고 오는 생활이 매일같이 반복됐지만 ‘언젠가는 나도…’라는 희망 하나로 버텨낼 수 있었다.

맨몸으로 상경한 처지라 잠잘 곳도 없었고 반은 굶고 반은 먹는 배고픈 날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잠은 극장 문이 닫힌 후 휴게실 낡은 소파에서 잘 수 있었다. 추위를 가릴 담요는커녕 스프링이 퉁겨 나와 등이 배겼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됐다. 새우잠을 자다 수위에게 들켜 매맞고 쫓겨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소파 등받이를 씌운 홑겹 커버를 벗겨내 이불 대신 덮고 자다 들켜 발길질을 당한 적도 있다.

온갖 어려움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인천 집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성공하기 전엔 인천 땅을 밟지 않겠다는 오기도 있었지만 기차삯 250환을 마련할 길이 없어 내려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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