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기계적 생존이냐 인간다운 죽음이냐

  • 임기영 < 아주대 의대 교수·의학부장 >

    입력2005-04-13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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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락사 논쟁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논의 그 자체다.
    • 이를 통해 생명의 존엄성, 자율권을 포함한 환자의 권리, 의료자원 의 정의로운 분배, 의사의 치료 의무의 한계, 호스피스 운동 등 의학윤리의 중요한 이슈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죽는 것은 아니다. 쉽고 평온하게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렵고 고통스럽게 죽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평온하고 안락하게 죽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의학의 발전 때문이다.

    의학의 발전은 사망의 주요 원인뿐 아니라 최종적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변화시켰다.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첨단 의학장비 개발로 이제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 생명을 거의 무한정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계에 연결되어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것을 삶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난 100년간의 사회적 변화 역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집, 자기 침실에서 가족과 친구, 이웃들에 둘러싸여 임종했다. 성직자와 왕진을 온 의사는 환자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평온하고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었고, 환자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병원에서의 죽음은 평온이나 안락과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과 친구들은 병실 밖으로 내몰리기 일쑤고 환자의 침상 곁은 수많은 의료진들이 점령한다. 그들은 다가오는 죽음을 막기 위해서 최후까지 온갖 조치를 취한다. 환자의 입에는 인공호흡을 위한 기도관이 물려지고, 수많은 전극과 수액 줄이 부착되고 꽂힌다. 그것들은 환자가 완전히 숨을 거둔 다음에나 제거된다. 가족들이 환자를 마지막으로 보는 것도 의료진이 사망선고를 내린 후 시신이 흰 천에 덮여 냉장실로 옮겨지기 전의 짧은 시간뿐이다.

    평화롭게 죽을 권리



    안락사를 뜻하는 유사너지아(euthanasia)는 좋음, 편안함을 뜻하는 eu-와 죽음을 의미하는 thanatos가 합쳐진 용어다. 즉 수월한 죽음, 고통이 없는 빠른 죽음, 평화로운 죽음을 말한다. 좀더 정확히는 치료될 수 없는 상황이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통증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해주는 행위(웹스터 사전)를 뜻한다.

    넓은 의미의 안락사에는 소위 의사조력자살 (physician-assisted suicide)이 포함된다. ‘죽음의 의사’로 유명한 미국의 잭 커보키언(Jack Kervokian)이 시행한 방법이 의사조력자살인데, 최종적으로 생명을 끊는 행위자는 환자 자신이다. 즉 의사는 환자에게 자살기구나 약품을 제공하지만 이를 이용하여 자살을 실행에 옮기는 이는 환자 자신인 것이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안락사는 의사 혹은 제3자가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환자의 동의 유무에 따라 자의적 안락사와 타의적 안락사로 나뉜다. 또한 그 방법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한다. 적극적 안락사는 치명적인 약물을 주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서 사망의 직접적 원인이 외부적 행위인데 반해, 소극적 안락사는 죽음을 지연시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최단시간 내에 환자가 자연사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원래 환자가 앓고 있던 병이 사망의 직접 원인이 된다.

    소극적 안락사는 죽음의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의미없는 치료를 중단하고 진통제나 안정제를 투여하여 고통을 줄여주면서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므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환자의 의사에 반해 치료를 강행하는 것을, 신체의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권과 환자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비윤리적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한편 안락사 반대론자들이 흔히 안락사의 극단적 예로 드는 것이 우생학적 안락사다. 그러나 이것은 치료 불가능한 환자가 아닌 특정 인종이나 장애자, 기형아를 대상으로 하므로 명백한 살인행위이며 따라서 안락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논란이 되는 것은 환자의 요구에 의해 의사가 실시하는 자의적이고 적극적인 안락사다.

    유럽과 캐나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이 항상 70%를 상회하며, 안락사에 대해 비교적 보수적 견해를 취하는 미국인들도 절반 이상이 안락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민들의 일반적 정서와는 달리 안락사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최근 네덜란드가 안락사를 합법화한 것이 세계 최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금지 혹은 반대와는 무관하게 실제로는 여러 나라에서 안락사가 묵인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커보키안처럼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을 실행한 의사들이 거의 기소되지 않았거나 기소되었어도 실질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최근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도 1980년 이후 의사에 의한 안락사를 사실상 허용해왔다.

    일본에서는 1991년 4월 도카이(東海) 의대 부속병원의 의사 도쿠나가 마사히토가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말기 암 환자에게 염화칼륨을 정맥 주사하여 사망케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요코하마 지방법원은 1995년 3월 도쿠나가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동시에 환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을 것, 죽음이 임박하여 소생 가능성이 없을 것,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다른 수단이 없으며, 환자의 명시적 승낙이 있을 것 등 네 가지를 안락사 요건으로 제시해 사실상 안락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1981년 9월24일 충남대학교 총장, 문교부 차관을 역임하고 간암으로 투병중이던 박희범씨의 안락사 사건이 일어났다. 내과 의사였던 부인이 남편을 안락사시키고 자신도 자살한 이 사건은 안락사에 대한 본격적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당시엔 단순히 금실 좋던 부부의 순애보적 동반자살사건으로만 인식됐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의 안락사 논의는 소수 학자들간의 학문적 의견 교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와 일반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음을 둘러싼 모든 고통과 갈등은 고스란히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고 결정에 대한 책임 역시 그들이 져야 한다.

    1997년 12월에 발생한 보라매병원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술에 취한 채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져 뇌출혈을 일으킨 58세의 알코올 중독자가 수술 후 회복과정에 부인의 강력한 요구로 퇴원했다. 의료진은 간곡히 만류했지만 “당신들이 치료비를 대겠느냐”며 반발하는 부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고, 결국 환자는 퇴원 직후 사망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부인과 담당의사를 살인죄로 기소했고 법원은 부인에게 징역3년에 집행유예 4년, 담당의사는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물론 이 사건은 환자의 회생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안락사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그 동안 관행적으로 행해지던 소위 가망 없는 환자의 퇴원이 일절 중지됐고, 퇴원을 요구하는 가족들과 의료진 사이에 심한 갈등이 빚어졌다.

    정부의 명백한 법적·제도적 지침과 장치가 없는 가운데 의사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소극적 안락사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 때문에 의학적 판단이나 환자 및 가족들의 요청과는 관계없이 환자가 죽을 때까지 무의미한 의료행위를 계속 실시할 수밖에 없게 됐다. 가족들은 아무도 치료비나 생계비를 지원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환자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결국 환자가 빨리 죽어주기만 기다리는 기막힌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환자들의 치료 중단 요구권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일반화되고 점차 강화되고 있는 자기 결정권 역시 현재 우리나라 실정법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죽음이 아닌 삶의 문제

    안락사 문제는 낙태논쟁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결론을 내릴 수 없을지 모른다. 안락사 찬성론자들의 주장,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므로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거나, 회생 가능성 없이 고통받는 환자에게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사실상 고문행위이며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자비로운 일이라는 등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안락사 반대론자들의 주장과 우려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것이다. 안락사가 허용될 경우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여 그 대상이 점차 확대될 것이고 결국 경제논리에 따라 장애자·극빈자·사회소외계층이 병들었을 때 치료보다는 안락사가 손쉬운 해결책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우려, 안락사가 생명 수호자인 의사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크게 훼손할 것이라는 주장, 강력한 진통제나 안정제 등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킬 효과적 방법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를 행하는 것은 경솔하고 지나친 행위라는 지적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의학윤리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안락사에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논의 그 자체다. 사회 구성원이 안락사를 둘러싸고 활발한 찬반논쟁을 거치는 과정에 생명의 존엄성, 자율권을 포함한 환자의 권리, 의료자원의 정의로운 분배, 의사의 치료 의무의 한계, 호스피스 운동 등 의학윤리의 중요한 이슈들이 깊이 있게 다뤄질 것이고 우리 사회 전반의 윤리적 감수성도 증가할 것이다.

    안락사 논쟁은 기본적으로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한 논쟁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일부, 삶의 마지막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고, 삶의 종말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인간적이고 인도적인지가 안락사 논의의 핵심이다. 따라서 삶의 질에 대해 무관심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윤리적 감수성이 무딘 후진사회에서는 애당초 안락사 논쟁이 불붙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안락사를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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