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한국경제, 불투명하지만 더 나빠지진 않는다”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입력2005-05-20 1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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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환(全哲煥·63) 한국은행 총재는 김대중(金大中) 정부 출범 초기인 1998년 3월 취임, 외환이 바닥난 ‘곳간’을 넘겨받아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비교적 무난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 정부 들어 여러 대학교수들이 청와대와 경제부처, 연구소 등에 들어왔지만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관료 출신들에게 밀려났다. 충남대 교수 출신인 전총재는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10년 넘게 하다가 교수로 진로를 바꾼 이채로운 경력을 갖고 있다. 경제기획원, 교통부, 중화학공업기획단 등에서 오래 경제정책을 다뤄봤기 때문에 다른 교수 출신들과는 달리 ‘현실 적응’에 무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전총재의 연설이나 좌담을 몇 차례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복잡한 경제현상을 아주 쉽게 설명하는 남다른 기술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관료시절의 현장 체험과 오랜 대학교수 생활을 통해 연마한 이론이 어우러져 정밀한 현상 분석이 나오는 것 같다.

    전총재는 인터뷰에서도 명쾌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평소 강연에서는 메모를 보지 않고 달변을 들려주던 그가 인터뷰에서는 금리 환율 물가 등 주요 경제문제에 대해 질문할 경우 꼼꼼하게 준비해온 자료를 뒤져가며 답변했다. 중앙은행 총재의 입에서 ‘아차’하는 사이에 말 한 마디만 삐끗 잘못 나와도 금융시장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총재를 보좌하는 이들은 그의 이처럼 신중한 자세가 작은 실수 하나도 허용하지 않게 한다고 귀띔했다.

    외환보유액 더 늘려야



    ━1997년 한국경제를 쓰러뜨린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환의 급격한 감소였습니다. 우리 경제규모에서 외환을 얼마나 비축해놓아야 적당하다고 봅니까?

    “외환보유액이 5월 말 기준으로 936억3000만 달러입니다. 지난해 말보다 조금 줄어들었는데,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려온 자금을 거의 다 상환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17억 달러 가량 남아 있지만 이것도 8월까지 모두 상환할 계획입니다. 우리의 외환보유액 규모는 일본 중국 홍콩 대만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습니다.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적정 외환보유 수준은 그 나라의 경제여건이나 특성에 따라 다릅니다. 금융시스템이 건전한 나라는 그렇지 못한 나라보다 외환을 덜 갖고 있어도 돼요. 경제의 질적 측면까지 고려해 적정 외환보유액을 산정하는 작업은 그리 단순한 수학이 아닙니다.

    대체로 경상 외환지급액 기준으로 3개월분 이상의 수입을 충당할 수 있는 규모이거나 단기 외채 기준으로 1년 이내에 만기 도래하는 차입금의 상환을 충족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유한 936억 달러는 월 평균 경상지급액의 5.8배이고 1년 내 만기 도래하는 단기 외채의 1.6배 수준이므로 단기적으로는 대외지급 능력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기업 및 금융시스템이 선진국처럼 건실한 상태가 아닙니다. 구조조정이 진행중이고 대외 신인도도 아직 만족할 만한 단계로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북한 관계 같은 특수한 요인까지 고려하면 외환보유액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좀더 늘려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연방기금 금리를 올 들어 2.5%포인트 인하했는데 한국은행은 2월에 0.25%포인트 인하했을 뿐입니다. 재정경제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내심 금리의 추가 인하를 희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겠지만 원론적인 말씀이라도 해주시죠.

    “한국을 포함해 지금까지 18개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하했습니다. 미국과 경제여건이 다르다며 금리 인하에 부정적이었던 유럽 중앙은행도 5월10일 목표금리를 우리처럼 0.25%포인트 내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마다 처한 경제상황이 다릅니다. 각국의 중앙은행이 FRB의 통화정책을 무조건 따르지는 않습니다. 자국의 대내외 경제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판단해 금리인하의 시기와 폭을 결정합니다.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경기상황과 물가동향, 금융시장 등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관찰, 분석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하겠습니다. 해외 경제여건도 종합적으로 참고해 결정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 방향을 예단해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금리는 정부나 국민이 원한다고 해서 올리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제 상황에 비춰 인하할 필요가 있으면 인하하고 필요가 없으면 안 하는 것입니다.”

    인터뷰를 가진 지 며칠 뒤에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한국은행은 콜금리를 인하하지 않고 동결했다. 그래서 인터뷰 내용을 다시 뜯어 읽어봤지만 콜금리 동결을 시사한 대목은 찾아내기 어려웠다. 중앙은행 총재가 되려면 듣는 사람이 감을 잡을 수 없도록 애매하게 말하는 기술을 익혀야 하는가 보다.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도 금융정책에 관해 의회에서 증언할 때 완곡하고 모호한 용어를 사용해 시장에 주는 충격을 줄인다.

    공부 미련 못 버린 공무원

    ━여담 같은 질문을 하나 해보지요. 미국 같은 나라도 외환을 보유할 필요가 있습니까? 미국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결제통화를 갖고 있으니 아쉬울 게 없을 듯한데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은 그런 면에서 유리하지요. 그중에서도 미국은 기축통화 국가거든요. 물론 미국도 유로화나 엔화 등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처럼 외환을 많이 가질 이유는 없죠. 더욱이 경제시스템도 아주 튼튼하니까요.”

    FRB의 금리정책을 분석하고 전망하자면 그린스펀 의장의 학문적 배경이나 경제철학을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런 차원에서 전총재의 개인 이력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다.

    전총재는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 때인 1960년 고시 행정과(12회)에 합격했다. 사법과를 포함한 고시 12회 동기 중에는 이종남 감사원장, 김기춘 한나라당 의원, 하경철 헌법재판관, 강경식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 장덕진 전 농수산부 장관, 염보현 전 서울시장 등이 있다. 분배문제를 집중 연구한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는 전총재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스승이고 한국경제발전학회를 물려주는 등 학문적 교분이 깊다. 전총재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1966∼68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고시에 합격해 13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 그만둘 때는 상당히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을 것 같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도 학문에 대한 애정과 향수가 컸습니다. 그 시절에는 학사학위만 있어도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기에 공무원을 하면서도 시간강사로 강단에 섰죠. 1976년 은사이던 박희범 선생님이 충남대 총장으로 가셔서 경제학과를 신설했습니다. 유자격자가 드물던 때라 그분이 내려오라고 해서 과감하게 대전으로 내려갔죠.”

    ━관계에서 출세할 비전이 안 보였습니까? 솔직히 말해 출세하려고 고시 공부하는 것 아닙니까.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웃음). 징계처분을 받거나 남보다 승진이 늦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이 말씀을 드리기는 조심스러운데, 제가 공무원 생활을 그만뒀을 때가 유신시대였습니다. 그때 ‘공무원 노릇을 오래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정도로만 이해해주세요.”

    전총재의 경력을 보면 재야 성향이 엿보인다. 1980년에는 교수 시국선언에 참여했고 경제정의실천연합에서도 활동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재야 경력’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재야 활동’ 대신 ‘비정부기구(NGO) 활동’이라고 써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가 치른 여러 차례의 고초가 ‘정부기구’에서 활동했기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비정부기구 활동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1980년에 겪었던 일도 가까운 몇 사람 외에는 잘 모른다. 그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고 한은 총재가 된 후에는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조차 꺼린다. 그만큼 기억하기 싫은 악몽이었을까.

    한국은행은 1998년 시행된 한은법에 따라 물가안정을 단일 목표로 통화신용정책만을 책임지는 정책기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물가안정은 중앙은행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약간 주춤해졌습니다만, 올 들어 4월까지 소비자 물가 상승세가 계속됐습니다. 전망과 대책을 말씀해주시죠.

    “올해 소비자 물가는 전년 대비 기준으로 1/4분기에 4.2%, 4월에는 5.3%, 5월에는 5.4% 올랐습니다. 작년 하반기의 고유가, 공공요금 인상의 영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올 들어서도 건강보험 수가 등 일부 공공요금이 추가 인상됐고 원화환율이 크게 올라 수입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앞으로는 경기둔화에 따른 시차효과, 최근 원화환율의 하향 안정 등으로 물가 오름세가 점차 완만해질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상반기 중의 높은 상승세 때문에 연 상승률은 4%를 상회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공공요금과 개인 서비스 가격 안정을 도모하는 미시적 측면의 물가안정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플레이션은 왜 나쁩니까? 교수 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한번 강의를 해주시죠.

    “가격은 재화와 용역의 합리적 배분을 유도하는 지표기능을 합니다. 어떤 상품의 생산이 수요보다 많으면 생산은 줄이고 소비는 늘려야 합니다. 그런 신호를 보내는 게 바로 가격입니다. 공급이 수요보다 많으면 가격이 떨어질 겁니다. 그러면 생산자는 예상 수익성이 떨어질 테니 생산량을 줄일 것이고, 소비자는 소비자 잉여가 높아지니까 더 사게 되어 균형이 맞게 됩니다.

    인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호흡, 체온, 맥박, 혈압이 건강상태의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정상인의 체온은 36.5℃인데, 운동을 하거나 몸이 아프면 체온이 그보다 오르거나 떨어집니다. 그래서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죠. 체온이 40℃를 넘어서면 못 견디게 될 겁니다. 이처럼 체온이 오르는 것은 건강이 나쁘다는 신호입니다. 체온처럼 가격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체온이 40℃를 넘으면 생명이 위험해지듯, 물가가 너무 올라가면 자원의 합리적 배분을 유도하는 기능을 못 하게 됩니다.

    인플레이션은 부의 왜곡된 분배를 초래합니다. 금융부채가 적은 사람이나 기업은 금융부채가 많은 사람이나 기업보다 손해를 많이 보게 됩니다. 10% 이자를 주기로 하고 돈을 빌려서 부동산을 샀다고 가정합시다. 인플레이션이 됐다는 건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얘긴데, 빚을 내 부동산을 산 사람은 부동산 가격이 10% 이상 오르면 이득을 보는 반면 빚을 준 사람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실하게 경제활동을 한 사람보다 불성실하게 경제활동을 한 사람이 이익을 보게 되죠. 이런 것은 막아야죠.

    모든 가계와 개인은 금융시장에서 자금 공급자입니다. 돈을 빌려주는 쪽이에요, 양은 적지만. 개인은 돈을 많이 빌릴 수도 없어요. 그래서 개인은 금융자산 측면에서 보면 채권자입니다. 부채가 많은 쪽은 돈이 많은 사람과 기업이에요.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중의 소득이 자산을 많이 가진 기업이나 개인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나 중앙은행은 민생을 보전하고,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부의 분배를 왜곡하는 비효율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 물가를 안정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생활하듯 물가안정이 개인들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를 깨닫지 못하기 쉽습니다. 인플레이션 위험을 느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사전에 막지 못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10만 원권 화폐는 시기상조

    ━한 번 쓰고 마는 10만 원권 자기앞수표의 발행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에 비해 미국에서는 100달러(10만 원), 일본에선 1만 엔(10만 원), 영국에선 50파운드(9만 원), 독일에선 100마르크(5만6000원)짜리 고액권 화폐가 유통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경제규모를 감안하면 10만 원권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1998년 한은 총재에 임명돼 그해 가을 첫 국정감사를 받을 때부터 의원들에게서 10만 원권 발행에 대한 질문을 받고 여러 차례 검토했습니다. 현재의 최고액권인 1만 원권이 도입된 게 1973년인데, 지금은 그때보다 경제규모가 커졌고 소비자 물가도 많이 올라 1만 원권의 상대적 가치가 많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니 화폐체계에 경제여건의 변화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1만 원권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현금을 거래하고 화폐를 휴대하는 불편이 커져 10만 원권 정액 자기앞수표의 수요가 폭증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고액권 화폐를 발행할 경우 과소비 내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소비가 일어나면 소비 증대에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빈부격차 갈등을 일으킬 우려도 있어요. 더구나 요즘은 결제수단으로 신용카드가 널리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각종 전자결제 수단이 많이 늘어나 상거래에서 현금결제 비중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고액권은 자칫 불건전 음성 거래수단으로 악용되어 신용사회를 구현하는 데 장애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고액권 화폐 발행 여부는 신용사회 정착과 거래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사회제도적인 보완장치가 정착된 뒤에 다시 검토해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일본의 엔화 약세 기조는 어떤 흐름을 탈 것으로 전망하십니까? 교과서대로라면 환율이 오르면 수출이 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해 11월 초 달러당 106엔 수준에 머물던 엔화 환율이 일본의 경기침체 지속, 대규모 재정적자 누적, 금융시스템 불안정성 등의 복합적인 요인 때문에 빠른 오름세를 보이다가 지난 4월 초엔 달러당 127엔까지 상승했습니다.

    당시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엔화가 추가적인 약세를 보여 달러당 130엔 수준을 넘어서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만, 엔-달러 환율은 4월 초를 기점으로 하향 안정세로 돌아서서 최근에는 120엔 전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엔 유럽의 경제전망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경제성장률이 예상보다 둔화됐고 물가는 상대적으로 강세이기 때문에 일본의 유럽지역 투자자금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죠.

    일본 경제상황이 빠른 시일 안에 개선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엔화 약세요인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급속한 엔화 약세에 대한 아시아지역 국가들의 부정적 반응과 최근 일본으로 유입되는 국제 투자자금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종전과 같이 엔화 가치가 급속히 하락할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따라서 특별한 돌발요인이 없다면 원화환율은 안정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수출 주력 상품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엔화가 절하되면 원화도 절하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때문에 원화환율이 절하돼도 수출이 크게 늘지 못하는 것이죠. 더욱이 우리 수출상품의 대부분은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동남아, 중남미 시장 경기에 따라 탄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 경제가 하나같이 침체 상태라 환율이 절하됐는데도 불구하고 수출이 늘지 않고 있어요.”

    전철환 총재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중경제론’ 초판을 집필할 때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김대통령의 대표적인 경제 서적으로 꼽힌다. 어느 정도나 도움을 주었느냐는 질문에 전총재는 “그 얘기는 쓰지 말아 달라”며 답변하지 않았다.

    미흡한 새 한은법

    ━김대통령의 초기 경제정책은 IMF 관리체제 극복에 집중됐고 일단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경제가 나빠지면서 비판적인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김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장기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어요. 소위 ‘DJ노믹스’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국민의 정부는 단기적으로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보유외환을 확충하고 장기적인 경쟁력을 배양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시행했습니다. DJ노믹스는 곧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창달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구조조정도 원칙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이뤄져야 옳았지만, 국가적 경제위기를 맞아 신속한 구조조정을 하려다 보니 정부가 어느 정도 주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시장친화적인 상시 구조조정 체제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민의 정부가 장기 비전 없이 단기적인 정책만 썼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창달처럼 장기적인 비전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경제를 그것에 맞게 제대로 운용했느냐 하고 비판을 한다면 몰라도…. 경제 제도와 운용체제, 질서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는 과정에 국민과 기업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한국은행의 독립이 왜 필요하며, 한국은행법에는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아시다시피 중앙은행은 ‘시니어리지(seigniorage·화폐발행이익)’를 갖는 발권은행입니다. 1만 원권 한 장 찍는 원가가 80원입니다. 80원을 들여 1만 원권을 찍어 구매력을 행사하니 9920원이 한국은행의 이득입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발행하면 물가가 오르게 되죠.

    경제성장에 관심이 많은 정치권, 이익을 많이 내려는 기업의 처지에서는 돈을 많이 찍어내는 게 좋을 겁니다.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는데다, 물가가 오르면 화폐 부채가 많은 기업이 이익을 보니까요. 만일 중앙은행이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면 돈을 많이 찍기를 바라는 정치권과 기업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어요. 이걸 차단해야 합니다. 과거 한국은행이 정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한국은행이 화폐가치와 물가안정을 확보하려면 법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1997년 말 마련된 새 한국은행법은 물가안정 목표제도를 도입하고 한은 총재가 금통위의장을 맡는 등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제고했다는 점에서 많이 개선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통화신용정책을 중립적·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최종 대부자로서 금융시장의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기본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예컨대 새 한은법에도 금통위 의결사항에 대한 재정경제부의 재의 요구권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재경부 차관은 금통위에 출석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행 예산을 재경부가 승인하도록 돼 있습니다. 재경부는 이런 권한을 통해 한국은행의 정책과 조직 운영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은행이 통화신용 정책과 금융시장 안정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독자적인 금융감독 검사, 지급결제시스템 감시기능은 없습니다.”

    ━요즘 ‘한은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 가끔 나옵니다. 한은이 법률상 주어진 권한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 하는 지적이죠. FRB와 비교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은은 한은법에 물가안정이라는 단일 목표로 통화신용정책만 책임지는 정책기관으로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행 감독기능이 분리되면서 한은은 정책수행 과정이나 결과가 쉽게 눈에 띄는 인허가 및 감독관련 권한을 행사할 수 없게 됐습니다. 더욱이 외환위기 이후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긴박한 과제로 대두됐고 소관부처인 금감위와 재경부가 이러한 구조조정을 주도함에 따라 한은이 하는 일들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됐습니다.

    한은이 제 기능을 다 했느냐는 평가는 그간의 거시경제 운영 성적표와 연결지어 이뤄져야 합니다. 1999년 이후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거시경제 면에서 물가안정과 견실한 성장,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확충 등 비교적 좋은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국민경제가 이처럼 안정적인 성장을 달성하는 데 한은이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한은은 기업·금융 구조조정 추진과정에 금융시장 불안이 초래되지 않도록 유동성을 신축적으로 공급했습니다. 신용경색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총액한도 대출을 1997년 말 4조6000억 원에서 지금은 9조6000억 원으로 확대했습니다.

    한은과는 대조적으로 FRB는 강력한 감독·검사권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중앙은행의 중립성과 경제의 안정성장을 뒷받침하는 통화신용정책을 잘 수립한 전통 때문에 국민의 신뢰가 두터워요. 독립된 중앙은행의 위상에 걸맞게 통화신용정책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관행을 확립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가 발행한 국고채를 직접 인수하라고 요구받자 실세금리로 시장에서 발행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영리법인에 대한 직접 출연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현행 한은법이 독립적인 통화정책을 수행하기에 미흡하다는 점을 국회 업무보고, 국정감사, 관계 장관회의 등을 통해 누누이 제기했습니다. 국회 업무보고 때는 ‘칼이 있어야 무를 자를 것 아니냐’고까지 했습니다. 아무런 권한도 안 주면서 뭘 하라는 겁니까.

    그간 정부가 주도해온 기업 구조조정이 지난 2월부터 시장에 의한 상시 구조조정 체제로 전환하는 등 시장시스템이 어느 정도 복원됨에 따라 이제는 채권시장과 외환시장 등 금융시장이 과거와는 달리 중앙은행의 정책의지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습니다. 이건 아주 큰 성과거든요.

    최근에는 한국은행의 견해나 정책 방향에 따라 금리나 환율이 즉시 변동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은의 시장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원 배분에서 시장의 기능이 더욱 커지고 정부 정책도 규제보다는 민간의 자율과 시장기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등 시장시스템이 더욱 확충돼 나갈 것으로 예상되므로 통화신용정책의 영향력도 커지고 중앙은행의 위상도 높아질 것으로 내다봅니다.”

    진보와 보수의 조화

    ━전총재의 저서들을 보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꾸준히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가령 ‘사회정의와 경제의 논리’ 머리말에서는 “무릇 사회정의에 대한 감각은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쓰셨습니다. 경제학자로서 지닌 진보적인 색채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중앙은행 총재라는 자리가 어떻게 조화를 이뤄냅니까?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해서 중앙은행의 보수적인 성격과 조화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는 물가안정이 긴요한데 이게 바로 중앙은행의 기본 목표입니다. 중앙은행이 책임지는 물가안정의 목표는 공정하게 분배하고 계층간의 격차를 줄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가안정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매우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다만 통화신용정책을 운용하는 면에서는 진보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통화증발의 유혹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보수적이어야 합니다.”

    ━재테크는 어떻게 하십니까?

    “정기예금과 채권으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발령 받던 날 자식들을 불러다놓고 명령을 했죠. ‘너희 아버지가 중앙은행 총재를 잘 마칠 수 있게 하려면 주식거래는 지금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움직이지 말아달라’고.”

    ━한은총재는 주식투자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까?

    “법률로 제한된 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은의 금리정책 등은 주식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칩니다. 금리가 떨어지면 채권보다는 현금이나 다른 금융자산을 선택하게 될 겁니다. 반대로 금리가 오르면 채권을 보유하는 대신 다른 금융자산을 줄일 겁니다.

    또한 금리가 인하되면 금융자산 중에 주식을 늘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통화신용정책을 관장하는 중앙은행의 총재는 주식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금리의 향방을 미리 알 수 있는 ‘내부자’입니다. 따라서 중앙은행 총재나 그 가족은 주식거래를 해선 안 되죠. 오해받을 소지가 다분하니까요. 채권이야 확정금리니까 사든 팔든 상관이 없겠지만.”

    국제화 시대의 세계경제는 그물망처럼 연결돼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만 잘한다고 경제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미국 일본 등의 해외 여건이 한국경제의 중요한 변수이고 이것은 우리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부분이다.

    ━세계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미국과 일본의 경기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과거에는 예측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일기예보라고 했어요. 일기예보가 어려운 것은 날씨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요즘에는 기상관측 기법과 기기, 정보전달 수단이 발전해 일기예보가 비교적 잘 맞지만 아직도 특정한 지역에 특수한 여건이 조성됐을 때는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일기예보는 기초 데이터를 분석해 현재의 상황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를 비롯한 사회현상은 지금 당장의 상황도 잘 모릅니다. 안다는 게 겨우 3개월 전, 2개월 전의 상황입니다. 통계를 수집하고 합계하고 분석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연현상보다 사회현상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사·분석능력과 예측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우리 은행의 과제입니다.

    미국 경제는 지난 1/4분기에 1.3% 성장한 것으로 나타나 경기침체 우려가 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경제지표를 보면 소비가 예상외의 호조를 보였는데도 산업생산이 감소하고 실업률이 상승해 2/4분기 중에도 여전히 경기가 부진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와 달리 재고 조정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그 동안의 금리인하 및 감세 효과 등에 힘입어 하반기 이후 경제가 점차 회복세를 나타내리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지난해 4/4분기 중 557억 달러로 증가했던 재고가 1/4분기에는 189억 달러로 감소했습니다.

    일본 경제는 세계 경제의 후퇴에 따른 수출감소와 기업투자 및 민간소비 위축 등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수출과 산업생산의 감소세가 지속되면서 기업수익의 신장세가 둔화되고 고실업의 영향 등으로 소비도 위축되고 있어요. 일본 경제는 국내외 수요부진, 물가하락 등을 감안할 때 당분간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얼마 전 IMF는 올해와 내년의 일본경제 성장률을 각각 0.6%와 1.5%로 전망하면서 경제가 회복되려면 정책당국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정리를 촉진하고 국채 매입규모를 확대하는 등 유동성 공급을 늘려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미국 경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혼재하고 있으나 완만하게나마 금년 하반기에는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러나 일본 경제는 아직도 방향을 짐작하기가 대단히 힘든 상황입니다.”

    ━정부, 기업, 연구소의 경기예측이 다 다릅니다. 언제쯤 경제가 살아날 것 같습니까?

    “한국 경제는 지난 1/4분기 중에 국내총생산(GDP)이 전년 동기 대비 3.7% 성장했습니다. 지난해 4/4분기의 4.6%에 비해 소폭 낮아져서 경기둔화가 지속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지난 분기와 비교한 GDP 성장률이 지난해 4/4분기 중 -0.4%에서 올해 1/4분기에는 +0.3%로 반전되는 등 경기 둔화 속도가 다소 완만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는 다소 호전되고 있으나 수출이 큰 폭의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설비투자와 건설투자도 여전히 부진합니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아직은 경기가 회복국면에 진입했는지를 판단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다만 지난해 4/4분기에 나빠지기 시작한 경기가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댁에 장서가 얼마나 됩니까?

    “아마 1만 권쯤 될 겁니다.”

    ━경제학, 국문학 서적 외에는 어떤 책들이 있습니까(전총재의 부인 이경자씨는 충남대 국문과 교수다)?

    “철학, 수학, 역사책이 많습니다. 수학은 형식논리학의 핵심입니다. 경제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자연과학과도 관련이 있지요. 또한 인문사회과학에서 정점에 있는 게 역사와 철학 아닙니까…”

    ━젊은 사람들한테 꼭 읽어야 할 책을 한 권만 추천한다면 어떤 책을 고르시겠습니까?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초록’을 들고 싶습니다. 읽기도 쉽고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바른 역사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좋은 책이에요.”

    ━바쁘실 텐데 신간서적을 구해 읽고 경제신문에 독서 에세이를 연재하시더군요.

    “잘 읽었다는 반응도 있지만, ‘바쁜 사람이 정말로 책을 읽긴 읽는 거냐’, ‘책 읽을 시간에 정책연구를 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정보에는 현상 정보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사실을 중심으로 체계화하고 이론화하는 것도 정보입니다. 책이 바로 그것이죠. 책을 읽는 것은 정보를, 그것도 굉장히 큰 정보를 얻는 활동입니다. 중앙은행 총재가 아무리 바빠도 책과 현상정보를 동시에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격려할 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내가 본래 선생 하던 사람이니 지적 호기심도 있죠. 계속 책을 구해 읽고 독후감을 남김으로써 나 자신도 충전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주고 싶습니다.”

    프라이드 모는 한은 총재

    ━학생시절에 바둑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척이나 좋아했죠. 그런데 많은 시간이 소모되더군요. 이겨도 또 두고 져도 또 두게 되니까요. 대학 다닐 때 친구하고 바둑 두다 시험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바둑판을 도끼로 깨부수고 다시는 안 두겠다고 결심했는데, 나중에 몇 번 더 뒀지요. 꼼수바둑 8급쯤 될 겁니다.”

    ━8급 실력인데 그렇게 빠졌습니까?

    “그때가 제일 잘 빠질 때입니다.”

    ━댁에서는 어떤 차를 탑니까.

    “프라이드 베타를 탑니다. 교수 시절에는 프라이드 DM을 탔는데 10년이 넘어 재작년에 폐차하고 작년에 프라이드 베타를 샀습니다. 참 좋은 차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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