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인문학은 ‘베짱이’가 아닌 상상력의 ‘샘물’

  • 육영수 < 중앙대학교 교수·사학 >

    입력2005-05-23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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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의 수요-공급시장에서 생산성 없는 학과와 전공교수는 퇴출되거나 좀 더 영양가 있는 학과로 ‘통폐합’ 되고 있다. 수요자가 취업시장을 고려해 기피하는 철학과, 사학과, 인류학과, 독문과, 불문과 수학과 등 ‘자격증이 없는 학과’는 사라지거나 왜소화하는 경향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장이 요구하고 취업이 보증되는 광고홍보학과, 애니메이션학과, 엔터테인먼트 경영학 등이 신설되어 주가를 올리고 있다. 인문학을 포함한 기초학문 분야가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신세가 된 것이다.

    심지어 대통령마저 앞장서서 지식인들이 ‘용가리’의 심형래를 본받아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신지식인’이 되기를 독려하고, 최근엔 ‘권위 있는 국제 학술지에 논문 한 편도 게재하지 못하는 교수들’의 과감한 퇴출을 공개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신성한 직업’의 하나로 존경 받던 교수가 이제는 (혹시 10년 넘는 강의노트를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는지) ‘감시’의 대상이 됐으며, 돈벌이 되는 지식을 얼마큼 생산했는가에 따라 감봉과 재임용탈락이라는 ‘처벌’의 대상이 됐다.

    ‘멸종위기의 동물’ 기초학문

    한마디로 학원의 인기강사와 세일즈맨을 합쳐 놓은 괴물이 될 것을 교수들에게 강요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수는 되도록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A대학의 ‘교수업적평가안’에 따르면 수강 학생수가 일정한 인원에서 10명 단위로 증가할수록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는 업적평가에서 그에 상응하는 보너스 점수를 받는다), ‘원어(영어)로’ 강의를 진행하고 논문을 ‘외국의 저명한 학술지’에 ‘수출’하며, 외부 ‘바이어’로부터 연구과제와 연구비를 ‘주문’받아 오는 인물이다. 기초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자마저 ‘시장 전체주의’의 충실한 노예가 되라는 주문이다.

    왜, 언제부터 이 꼴이 되었을까? 올곧은 선비의 자존심을 이어받은 남산골 딸깍발이의 후예로서 학문 중의 으뜸인 기초학문 공부에 배불러 하던 학자들이 왜 찬밥신세가 되었는가? ‘멸종위기에 처한’ 기초학문과 ‘백면서생들’을 ‘천연기념물 보호법’을 제정해서라도 보존·번식시켜야 할 필요성과 정당성은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답을 모색하려는 것이 이 글이 겨냥한 목표다.



    필자는 이번 학기에 사학과 1학년 전공과목으로 개설된 ‘현대사회와 역사’ 과정에서 대학의 역사부분을 맡았다. 서양사상사 전공자로서 대학사에 대한 지식이 얕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한국 대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필자가 이런 주제를 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사학과 신입생들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던져보기 전에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해 보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대화”라는 어려운 화두에 휘둘리면서 인문학과를 선택한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대학은 어떤 배경에서 태동하여, 어떻게 발전·변화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아보면 기초학문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한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덧붙여 서양, 동양, 한국의 대학 역사를 비교사적 관점에서 관찰해 봄으로써 한국고등교육의 붕괴 원인과 인문학의 생존전략에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작용했다.

    우리 교육계의 현실과 미래상을 비쳐 볼 거울로서 서양 대학역사의 일반적인 성격과 발달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양에서 대학 발전은 행정과 운영의 주체세력이 교회→국가→시장의 순으로 점진적으로 교체되는 패턴으로 나타났다. 1200년을 전후로 수도원과 성당의 주교학교에 기원을 둔 서양대학은 ‘성직자가 중세대학 학자의 대명사였으며 ‘박사(docteur)’는 교회의 교리(doctrine)를 가르치는 사람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 따라서 초창기에는 기본적으로 ‘교회적 기관’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중세 후반부터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대학의 설립과 후원에 점차 세속군주의 간섭과 영향력이 확대된다. 20세기를 전후로 서양에서는 ‘대중 대학’ 시대가 도래했다. 대중 대학의 출현은 대학의 기능과 교육목표에 중요한 변화를 동반했다. 진리탐구나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수단 혹은 전문지식 습득 등을 목표로 했던 대학교육이 이제는 사회적 수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고등의 직업훈련에 그 초점이 맞춰졌다.

    시장논리가 국가를 대체하여 대학교육의 방향타를 결정하는 새로운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활발해진 대학과 기업체의 ‘산학협동’도 이런 경향을 부추겼다. 미국 명문 코넬대학이 호텔경영학과를 신설하고 캘리포니아 대학이 드라이 클리닝 공학이라는 교과목을 신설한 것에서 엿보이듯이, 현대 서양대학은 진리탐구의 상아탑에서 산업기술자의 주요 공급처로 성격이 변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무쇠갑옷으로 무장한 대학은 이제 국가도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포로가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서양대학의 변천사에 한국을 포함한 동양대학의 역사를 비추어 보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우리 나라에 서양식 근대대학이 출범한 이래 실제적 의미에서는 ‘대학의 역사가 없다’는 사실이다. 대학과 국가(권력)의 관계, 대학생과 사회의 관계, 교과목의 변천과 사회적 수요의 관계 등의 문제를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심도 있게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빈약한 것이다.

    우리 대학사에 대한 빈곤한 관심은 그 동안 이 땅의 학자들이 한번도 대학의 본질과 과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심도 있게 점검해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나라의 지식인들은 “대학은 진리탐구의 장소인가 아니면 직업훈련소인가” “교수와 대학생은 기존 질서와 가치관을 확대 재생산하는 자들인가 아니면 사회변혁의 촉매인가”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성찰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이 땅의 인문학자들의 직무 유기에 가까운 무관심과 게으름이야말로 오늘날 ‘인문학 위기’의 직접적인 한 요인이며 동시에 본질이다.

    둘째는 좀 더 충격적인 것으로 근대 대학의 수립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한 번도 인문학과 인문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후반 국가생존 차원에서 신식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 초기부터 신자유주의적 교육방침이 지배하는 오늘까지 인문주의적 교양교육과 시민교육은 늘 뒷전에 처져 있거나 미운 오리새끼 같은 서자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런 비인문주의적인 경향은 인문주의적 교육이 르네상스 시기부터 대학교육의 본령을 차지했던 서양의 경우와는 대조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교육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던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 교육관과도 동떨어진 새로운 현상이다.

    주지하듯이 14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자들은 문법, 수사학, 시학, 역사, 철학의 5개 분야를 ‘인간성에 대한 공부(studia humanitatis)’의 핵심과목으로 삼았다. 오늘날 흔히 인문학의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문학-역사-철학(文-史-哲)과 동일한 과목을 선별하여 공부함으로써 인간의 지적, 도덕적 인격을 함양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학, 법학, 의학 등 전문적인 고등훈련을 강조했던 서양중세 대학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성 회복을 모색한 르네상스가 이룩한 ‘교육학적 전환’이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일차적인 고등교육 목표는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고 논리적인 대화와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타인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의 ‘교양인’은 특정분야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인간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정확하고 최선의 도덕적인 판단을 자립적으로 내릴 수 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교육이 서양의 독점물은 물론 아니었다. 오랫동안 유교문화권에 속했던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터 인본주의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372년에 설립되어 흔히 우리 나라 최초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꼽히는 고구려의 태학(太學)은 오경(五經), 사기(史記), 삼국지(三國志), 옥편(玉篇), 문선(文選)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교과목 기준으로 따진다면, 서양보다 무려 천 년이나 앞서 우리 나라의 고대 고등교육기관에서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등과 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주제’들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나라가 경험한 특수한 근·현대사의 행로는 서양식 근대 고등교육의 태동과 함께 인문주의적인 전통이 죽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근대적 대학교육의 도입과 본질이 실용주의 교육에 초점이 맞춰짐으로써 대학과 인문학은 애초부터 ‘잘못된 만남’으로 결별하게 된 것이다.

    188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서양식 고등교육기관(원산학사, 배재학당, 이화학당)은 기술관료나 전문직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서양열강과 일본의 침략적인 야욕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군사, 외교, 법률, 통상, 통신 및 광산개발 등과 같은 실용적인 과목들이 강조됐던 것이다.

    19세기말에 형성된 인문교육 천시경향은 일제시대에도 지속된다. 자생적인 민족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 내에는 철학, 사학, 문학 등 인문학과가 설치됐지만 이는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전문관료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수립을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일제는 1943년 ‘교육에 관한 비상조치령’을 발표해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는 이공계통 교육을 강화하고 이들에게만 징집면제의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당시 젊은이들이 문과보다는 이공계열의 전공선택을 선호하는 풍조를 조장했다.

    광복 이후에도 인문학과 인문주의에 대한 천시정책은 지배엘리트에 의해 계승됐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관비생으로 영어위탁 교육을 받고 ‘이 땅에서는 최초로 영어로 졸업생 대표연설을 했던 인물’이며, 미국유학 시절에는 존 듀이의 실용주의적 교육철학을 연구했다. 제3공화국 출범이후 약 20년간 교육정책을 좌우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사범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황국신민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이런 전력을 가진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국가의 수요에 필요한 방향’으로 고등교육을 재편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이공계 전공자들에게 독점적으로 국비유학생의 혜택을 부여하고, 방위산업체 근무를 조건으로 징집면제의 특혜를 베푸는 ‘일제의 잔재’를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19세기말에 시작된 인문학 천시경향이 면면이 이어져 이 땅은 인문주의가 성장할 수 없는 척박한 토양이 되었다.

    익사한 인문학

    우리 대학의 인문학 천시경향은 ‘압축된 근대화’의 또다른 부산물이다. 마치 박정희 시대의 ‘압축된 근대화’가 정치적 권위주의와 집단적 병영문화를 야기했듯이 ‘압축된 근대화’란 외길을 강요 당한 우리 대학과 인문학은 국가주도형 교육정책과 시장수요 원칙에의 복종이라는 두 줄기의 가시에 걸린 ‘새 신세’가 됐다.

    서양대학이 수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경험했던 세 단계(교회→국가→시장)를 우리 대학은 채 10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압축해 경험했다. 대한제국→식민시대→유신시대를 거치는 ‘압축된 성장사’의 틈바구니에서 인문학과 인문주의는 실종됐다. 면면이 이어오던 인본주의적 교육 전통이 ‘근대화 물결’ 속에서 단절되고 익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한제국의 붕괴와 일본에의 합방이라는 우리 근대사의 특수성 때문에 근대대학의 탄생은 인문학과의 순조로운 만남을 통한 ‘연착륙’으로 귀결되지 못했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사명’의 수행에 떠밀려 인문학은 대학교육의 주류에서 더욱 소외됐다. 고담준론(高談峻論)과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유교적 선비의 후손인 인문학자는 이제 ‘냉수 마시고 이 쑤시는’ 한량이나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 비현실적인 인물로 낙인 찍힌 것이다.

    “인문학은 저항한다”

    근대대학의 짧은 발자취를 추적함으로써 ‘인문학’이란 나무가 성장하기에 어려운 이 땅의 척박함과 그 환경의 적대성을 분석해 보았다. 식민시대, 군사적 독재시대, 신자유주의적 개방시대를 거치면서 노출된 교육적 이념과 목표설정의 진통과 혼란은 교육행정 담당기관의 명칭변경(문교부→교육부→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재확인된다. 이제 교육의 모든 것을 ‘인적 자원’의 공급과 관리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교육당국은 시장의 충실한 대리인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새 천년을 맞은 지금 국가 백년대계에 대한 교육당국의 태도가 갖는 오류를 지적하고, 인문학과 인문주의가 가지는 현실적인 중요함과 시대적인 소명감을 밝히려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이 땅의 인문학과 인문주의가 보존되고 장려되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바야흐로 형성되는 ‘지식·정보의 세계체제론’에 저항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으로 대표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이래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금융에 의한 세계질서의 재편성은 ‘지식제국주의’라는 새로운 지배-종속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초고속 정보망의 구축은 거대자본을 바탕으로 한 정보의 독점적인 생산과 분할 및 보급을 가능케 한다.

    후기 산업사회가 가져온 이런 기술혁명의 도움으로 초강대국 미국은 전 세계 지식·정보를 주도적으로 창출하는 생산자이며 동시에 이를 전략적 차원에서 다른 국가들에게 공급하는 배급자가 됐다. 더구나 정보의 바다에 지식을 공급하고 이를 검색, 가공하는 매개 언어로서 미국식 영어가 전 세계적으로 사용돼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거대금융자본과 전자정보산업의 야합으로 재편성되는 세계체제의 사다리구조에서 우리 나라를 포함한 제3세계 국가들은 강대국의 ‘지식 하청국’이나 ‘정보 주변국’으로 종속될 우려가 매우 높다. ‘지식·정보의 세계체제론’이 내포한 제국주의적 음모와 종속화의 비밀을 폭로하는 데 인문학의 본질인 비판·저항정신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도의 현대 대학사는 우리에게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인도에 상륙한 영국은 19세기 초엽 이미 인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실제적인 통치자로 군림한다. 식민지 인도인들을 제국의 문화와 가치관으로 동화시키려는 목적으로 1835년 입안된 ‘매콜리(T. B. Ma-caulay) 보고서’는 “영어를 유일한 언어로 한 영국식 서양교육의 전면적 실시”를 선언했다.

    인도인에게 유럽의 문화와 과학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1837년 영어를 정부의 공식언어로 채택했고 1857년에는 런던대학교를 본 딴 서양식 대학을 대도시에 건립했다. 외양적 변화뿐 아니라 교과목에서도 실질적인 ‘인도의 영국화’가 실천됐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영국에서 출판되자마자 인도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됐으며, 옥스퍼드와 켐브리지보다도 먼저 영문학과가 설립됐다. 그 결과, 1858년에 대영제국으로 합병된 이후 1900년에 이르기까지 인도 전래의 토착언어와 교육체제는 거의 소멸됐다.

    ‘인도의 유럽화’를 겨냥한 대영제국의 식민지 교육정책은 원래 의도대로 본국에 충성하는 협력자계층을 양성하는 데 성공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영국의 식민지 교육은 역설적으로 ‘저항하는 비판세력’을 준비하는 데 기여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국정부는 인도인들이 식민통치를 이해하고 충성을 바칠 것을 기대하면서 유럽의 역사와 정치이론, 진보주의적 계몽철학과 같은 인문학 교육을 대학교육의 주안점으로 삼았다. 많은 시설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인문학을 인도인들에게 주입시킴으로써 식민지 정부의 하급관료 양성에 힘쓰는 대신 의학과 공학 등 기술응용 분야에는 본토에서 훈련 받은 영국인을 주로 채용하였다. 1937년 당시의 통계를 보면, 문리대에 전체 인도대학생의 83.5%, 의대에는 4.5%, 공대에는 1.9%가 재학할 정도로 영국식민정부는 인문학에 편중된 대학교육을 실시했다.

    백 년 가까운 기간 영국식 기초학문의 세례를 받은 인도의 엘리트들은 1947년 독립 이후 ‘제3세계 지식인’의 전위대로서 부상한다. 그리하여 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한 세계질서에 도전할 새로운 담론 창조에 앞장선다. 1980년대를 전후로 인도 출신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 주창한 ‘서발턴(subaltern·국내에서는 ‘하층민’ ‘하위주체’ ‘종속계급’ 등 다양한 명칭으로 소개됐다) 연구’가 좋은 사례다. 서양인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일그러진 동양관을 일컫는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서양 중심적 가치관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타자’ 혹은 ‘비정상인’으로 취급 받았던 유색인, 하층민, 이민자, 소수민족에 대한 재발견과 재조명에 ‘서발턴 연구’는 초점을 맞춘다.

    “유럽 도서관이 소장한 단 한 권의 서적이 인도나 아라비아의 토착적인 전체 학술작품의 가치에 필적한다”거나 “셰익스피어를 인도 전체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오만한 유럽중심주의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을 집중적으로 교육 받은 식민지 인도 지식인의 굴욕감은, 자신의 정체성 수립에 필요한 ‘쓴 보약’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적 비판정신, 역사적 진보주의의 확신, 유토피아적 꿈꾸기 등 영국이 제공한 인문학으로 단련 받은 인도인들은 ‘제국의 개’가 되는 대신에 서양문명의 허구성을 고발하는 ‘제3세계의 호랑이’로 거듭난 것이다.

    인도의 사례는 ‘지식·정보 세계체제론’과의 소리 없는 전쟁에 직면한 이 땅의 인문학자들의 비판과 책임의식을 촉구한다. 우리 지식인들이 아직까지 내세울 만한 독창적인 인문학적 담론을 창출하지 못한 것은 일제가 강요한 이공계 우선 주의적인 식민교육을 받았던 탓일까? 광복 이후 유난히 미국적 제도와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이 땅의 인문학이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지식·정보 세계체제론’의 정체와 그 위험성을 널리 알리는 작업이다.

    거대금융 시장이 선전하는 세계화, 개방화에 현혹돼 그 체제의 고착화에 협력하거나 그 체제로 ‘편입’하기 위해 애쓰는 대신, ‘가치 세계체제론’이라는 ‘21세기형 뉴 밀레니엄 제국주의’의 그물에서 나라와 지식계를 구출하는 데 인문학이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탈출에 그치지 말고 가능하다면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새로운 세계체제론’의 촘촘한 그물을 찢도록 노력해야 한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인문학 그 자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관은 ‘지식·정보 세계체제론’의 거대한 아가리로 흡수되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은 상상한다”

    학문의 지구화를 표방하는 응용과학과는 달리, 인문학의 본질과 생명력은 그것이 각 나라의 독특한 전통과 역사에 따라 ‘특수한’ 세상 읽기와 해석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지식·정보의 세계체제론’에 따르면 이 땅의 인문학은 세계 석학들이 발표한 이론적 모델이나 가설이 한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응용되는지 실험해 보고서를 제출하는 보조적 역할에 만족해야만 한다. 이런 ‘지식의 하청구조’는 미국 디즈니사로부터 만화영화 제작주문을 받아 전체 줄거리도 모른 체 배경 그림만 죽도록 그리는 막노동과 유사한 역할을 이 땅의 인문학이 담당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국내 학술지에 발표되는 인문학 논문의 가치를 ‘저명한 외국 저널’에 게재되는 논문의 반쪽 혹은 반의 반 쪼가리로 평가절하 하는 작금의 ‘교육개혁’은 학문적 사대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연말연시에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취급하는 ‘특집: 세계 석학(碩學)과의 대화를 통해 본 한국사회의 진단과 미래’는 우리 인문학이 ‘지식의 세계적 계서화’에 이미 한 발을 들여놓았다는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인문학이 보존·장려되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상상력의 보석상자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허무맹랑한 것을 공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멋진 신세계’를 소망한다. 좀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당시에는 다소 황당해 보이는) 인문주의적인 실험정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류가 향유하는 갖가지 문명이기의 출현과 기술적 진보가 가능했을까?

    인문학적 상상력이 기술발달의 밑천이며 그에 선행함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르네상스 인간형’을 대표하는 다빈치는 특정 분야의 깊은 지식이나 고도의 기술력으로 무장된 인물은 아니었다. 건축가, 미술가, 수학자, 발명가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릴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과시했던 그의 창조력의 원천은,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인문학적 호기심이었다. 그가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스케치했던 탱크, 기중기, 헬리콥터 등은 비록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지만 과학자와 기술자에 의해 실현되었다. 마찬가지로 미래소설, 공상과학 장르의 영화 등을 통한 인문학도들의 허무맹랑한 ‘다른 세상에 대한 꿈꾸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무선전화와 비행기를 발명하여 시·공간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었을까.

    인문학 천시 풍조는 젊은이들이 꿈꾸는 것을 방해한다. 시험 전문가를 양성하는 우리 교육은 인문학을 외우고, 받아쓰며, 베끼는 학문으로 타락시켰다. 그 결과 이 땅의 젊은이들은 상상력 결핍증에 걸린 ‘무늬만’ 디지털인 세대가 됐다. ‘스타크래프트’ 컴퓨터 게임의 세계적인 ‘고수’인 우리 젊은이에게 한 수 배우러 외국 게이머들이 유학을 왔다는 기사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외국인들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첨단기술의 합작인 비디오게임에 매료돼 밤을 세우는 ‘손끝만 디지털 세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빨리 보내는 기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디지털 마인드’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과 역사적 지식에 탄탄한 기반을 준 콘텐츠가 빈약한 디지털문화는 속 빈 강정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소외하는 우리 교육정책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디지털 문화를 수동적으로 소비만 하는 ‘재주 넘는 곰’ 노릇을 하고, 외국 닷컴은 ‘돈을 챙기는 점잖은 주인’ 행세하기를 장려하는 것과 같다.

    학문붕괴 막는 파수꾼

    인문학의 유용성을 생산성, 시장수요, 실적주의 등의 잣대로 측량할 수는 없다. 인문주의가 함양하는 도덕적 절대주의, 이성적 판단력, 역사적 책임의식, 사회적 공동체주의 등은 그 자체가 교환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인문학은 ‘무엇이 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생활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의사, 변호사, 은행가, 벤처 기업가를 꿈꾸는 학생들이 철학과 역사과목을 수강하더라도 취업시험과 승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윤리학, 프랑스 혁명사, 낭만주의 문학 등 교양과목은 그들로 하여금 봉사하는 공무원, 생명을 사랑하는 의사,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토목기사가 될 것을 보챌 것이다. 인문학의 유용성이 여기에 있다. 인문학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베짱이’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더 좋은 동료와 이웃이 될 것을 꿈꾸게 하는 상상력의 ‘샘물’인 것이다.

    인문학이 생존·번식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학문의 붕괴를 막는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존립위협에 그치지 않고 사회과학, 자연과학, 응용과학 등 인접학문의 연쇄적인 붕괴를 초래한다.

    인문학의 존재이유와 시대적 사명감은 모래사장을 지키는 모래언덕에 비유할 수 있다. 당장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깔끔한 해변경치에 어울리지 않는 모래언덕처럼, 인문학은 쓴 소리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래언덕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수익을 보장하는 화려한 러브호텔과 식당을 짓는다면 해변의 모래사장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고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곳이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시장성과 경쟁력 없다는 핑계로 인문학을 학대하고 ‘자유롭게’ 멸종하도록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 전체의 학문적 토대 붕괴와 인간성의 오염과 종말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자초할 것이다.

    습지대가 희귀동식물의 안전지대가 되듯이 인문학은 학문이라는 생태계를 보호한다. 늪과 갈대 숲으로 이루어진 습지대에는 지렁이를 비롯해 농약에 쫓겨난 온갖 곤충들이 서식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딴 곳에 방치된 그곳에서는 생명의 정화와 순환이 밤낮없이 조용히 진행된다. 지렁이는 진흙에 구멍을 뚫어 산소와 영양분을 제공하고, 갈대의 거친 잔뿌리는 썩은 물을 순화시킨다.

    같은 맥락에서 인문학은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하며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 ‘이겨라’ ‘성공하라’는 구호에 발맞춰 ‘누가 치즈를 옮겼는지’ 찾아 헤매다가 ‘부자아빠’가 되지 못한 처세술의 낙오자에게 인문학은 무소유(無所有)의 충만함과 자유로움을 가르쳐 준다. 후배에 밀려 승진도 못하고 (불)명예 퇴진한 직장인의 분노를 인문학은 ‘황성 옛 터의 쓸쓸함’을 노래하며 인생의 덧없음으로 포옹한다. 습지대가 사라지면 자연계 생명사슬의 정상적인 순환이 흔들리듯이, 인문학이 황폐해지면 사회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으로, 인간은 ‘가슴이 없는 기능인’으로 퇴행한다. 멸종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인큐베이터’에서 보호해야 할 당위성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매년 신학기마다 인기 없는 사학과에 할 수 없이 입학해 의기소침해 있는 제자들에게 인문학 전공자는 졸업 후에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예비 실업자’가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력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그들이 대학에서 공부할 인문학은 모든 종류의 부당한 지배에도 저항하며, 지금과 다른 세상의 도래를 상상하며, 성공시대와 성취주의의 허구성을 성찰하며 학문의 최일선을 지키는 첨병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문학자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숙맥이 아니라, 제국의 흥망사 읽기에 안경을 벼리고 몸에 해로운 담배로 철학을 사색하며 밤을 새워 시(詩)의 가래침을 내뱉는다. 가문 여름날 장대비 같은 곧은 소리를 외치기 위해. 감시와 처벌의 눈초리에도 인문학을 하는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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