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슈퍼뱅크냐, 물먹는 하마냐

국민·주택 합병은행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5-04-06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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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최초의 우량은행간 대등합병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총자산 162조원의 한국 최대 합병은행 출범이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기대와 회의가 엇갈리는 합병은행의 실체를 들여다봤다.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주택 합병은행 설립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2000년 12월22일 양해각서를 교환하고 합병을 공식 선언한 두 은행은 지난 3월 말 합병계약을 맺고 4월 말 주주총회 승인을 거쳐 7월1일 합병은행을 출범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합병비율과 존속법인 등 합병 본계약에 포함돼야 하는 필수사항은 물론, 합병은행의 이름과 행장 선임 등 주요 사안에 대해서도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하다 결국 출범일자를 11월1일로 연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4월 들어 합병계약은 체결됐지만, 어정쩡한 절충으로 미봉한 측면이 강해 갈등이 재연될 소지가 있는데다 국민은행의 미국 뉴욕증시 상장이 합병은행 출범의 선결조건으로 남아 있다. 또 무엇보다 양 은행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직원들이 합병을 극력 반대하고 있어 아직 변수가 많은 상황이다.

    하지만 합병은행 CEO후보 선정위원회가 예정대로 7월 말까지 은행장후보 선정을 완료하면 합병작업은 급류를 탈 전망이다. 그 동안 합병작업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두 은행 중 어느 은행도 합병의 주도권을 쥐지 못해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기 때문. 따라서 국민은행 김상훈(金商勳·59) 행장이나 주택은행 김정태(金正泰·54) 행장 가운데 한 사람이 합병은행장으로 선정되면 ‘리더와 팔로워(leader & follower)’의 구도가 형성되면서 힘의 균형이 깨져 합병작업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대표하는 우량은행인 국민과 주택이 손잡으면 규모의 경제를 이뤄 세계 수준의 은행들과 경쟁할 수 있고, 국내 은행권의 열악한 영업여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선도은행 기능을 할 것이라는 게 두 은행 합병론의 근거다.

    자산 162조, 수신고 125조



    지난해 말 기준으로 두 은행의 자산을 합치면 162조6382억원으로 국내 은행 총자산의 33%에 이르고, 수신고는 125조1718억원으로 불어나 전체 은행 총수신의 36%를 차지한다. 이 밖에 가계여신이 62%, 중소기업 여신이 32%, 대기업 여신이 24%로 시장점유율 1위에 오른다. 합병은행의 총자산은 세계 유수 은행인 미즈호 파이낸셜(1560조원), 도이체방크(1061조원), 씨티그룹(910조원) 등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세계 랭킹 60∼70위권에 드는 거대한 규모다.

    그러나 합병이 기정 사실이 된 지금까지도 두 은행의 합병효과에 대한 회의론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민·주택은행 노조가 합병 철회를 요구하며 은행권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주도했을 때만 해도 이들의 주장은 합병 이후 인력감축을 우려한 생존권 투쟁 정도로 이해됐다. 하지만 그 후 많은 전문가들이 국민·주택은행 합병의 시너지효과에 의문을 제기했고, 최근에는 “두 은행은 물론 한국경제 전체를 위해서도 합치지 않는 게 낫다”는 비관론까지 나오고 있다. 합병이 공익과 사익, 어느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두 은행 노조간부들도 “구조조정이 두렵긴 하지만, 일등 은행이 돼서 수익이 늘면 그 열매는 직원들에게 돌아온다. 그런데도 우리가 합병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것이 공익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때문”이라며 “합병 반대론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기에 앞서 합병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으로선 합병이 유예되거나 무산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두 은행은 일정대로 합병이 완료된다 해도 이러한 지적을 염두에 두고 경영에 나서야 할 것이다.

    국민·주택은행 합병의 으뜸가는 메리트는 대형화다. 그렇지만 우리 경제여건에서는 은행의 대형화가 반드시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이선근 집행위원장은 “은행의 규모는 경제규모에 맞게 정해지는 게 순리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 은행을 무리하게 대형화하면 은행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수신고가 늘고, 그 결과 무모한 경영전략을 택하기 쉽다”고 우려했다.

    수신고가 100원인 A은행과 70원인 B은행이 합병한다고 해서 총수신은 꼭 170원이 되는 게 아니다. 대형 은행의 공신력 때문에 합병 후 수신고가 늘어 총수신은 200원도, 250원도 될 수 있다. 자산을 운용할 곳은 그대로인데, 덩치만 커져 수신고가 늘면 마땅히 돈 빌려줄 곳이 없는 은행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위험한 투자처를 찾아나서거나 불투명한 신규사업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가령 우리 은행들은 합리적인 신용평가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담보 위주로 돈을 빌려주는데, 담보대출을 받을 만한 고객은 한정돼 있다. 요즘은 신용대출도 많이 늘었지만 대부분 소액대출이라 막대한 수신고를 소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마냥 돈을 쥐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무모한 투자나 대출로 이어질 위험이 높아지는 것이다.

    1998년 미국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는 네이션즈뱅크를 합병, 미국 최다인 4500여 개의 지점망과 6720억달러의 자산, 14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형 은행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BOA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경제가 흔들리고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부실대출 비중이 늘어났다.

    특히 거액을 대출해준 PG&E, SCE 등 캘리포니아주의 전력회사들이 도산위기에 몰리면서 채권회수가 어려워졌고, 지난해 4/4분기 매출은 26.8% 격감했다. 올해 초에는 BOA가 유럽 선물시장 등 투기성이 강한 해외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했다가 거액의 손실을 봤고, 향후 회수불능 여신이 급증하리라는 소문이 증권가에 퍼지면서 주식거래가 정지되는 사태를 빚었다. 넘쳐나는 수신고를 방만하게 운용한 결과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BOA의 부실여신 증가가 1998년 도산한 헤지펀드인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경우처럼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근 PG&E와 SCE가 국유화로 가닥이 잡히면서 이들에게 빌려준 돈은 부실화 위험에서 벗어난 듯하지만, 해외 파생금융상품 투자 손실분이 드러나면 파산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경제여건이 받쳐주지 않을 때는 ‘은행 대형화=경쟁력 제고’의 논리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G-10은 올해 내놓은 금융분야 합병에 대한 보고서에서 “대형 은행은 해당 은행의 건전성 파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은행 부실시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특성상 워크아웃도 어려워 시스템 리스크를 증대시킨다”고 경고했다.

    인천대 이찬근 교수(경상학부)는 “도매금융, 국제금융을 주로 하는 은행간의 대형화는 어느 정도 필요성이 인정되지만, 국민·주택은행은 가계금융과 중소기업 금융 위주의 소매은행인데다 합병 후에도 소매금융에 주력할 것이므로 두 은행의 대형화는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소매금융 비중은 각각 81.0%, 92.9%. 두 은행은 합병 양해각서에서 앞으로도 소매금융 위주로 영업활동을 할 것임을 확인했고, 양행의 외국인 대주주인 골드만삭스와 ING베어링도 이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찬근 교수는 “외국의 은행 대형화는 업역(業域)과 영업지역, 고객기반을 달리하는 은행끼리 손잡고 시장을 넓히거나 외국자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 혹은 높은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도록 자본베이스를 키우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국민·주택 합병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며 합병의 시너지효과를 의심했다.

    예를 들어 지역은행인 뱅크원과 대도시 은행인 퍼스트 시카고, 미국 동부에 기반을 둔 네이션즈뱅크와 서부 중심의 BOA는 영업지역과 고객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합병했고, 상업은행인 씨티코프와 보험 증권 자산관리 투자은행 기능에 강한 트래블러스 그룹의 합병은 업역확대와 겸업화에 목적을 둔 경우다. 또한 일본 은행들이 지주회사형 합병을 시도한 것은 외국자본을 견제하려는 측면이 강하고, 체이스 맨해튼과 JP모건은 위험감당(risk taking) 능력을 키우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규모의 경제’ 의문

    국민·주택은행 합병추진위원회(이하 합추위)는 “개인 및 중소기업 금융 등 소매금융을 기반으로 대기업 금융, 국제금융, 자본시장 업무 등에서의 ‘선택과 집중’으로 비교우위 분야를 개척한다”는 ‘기본전략’을 제시했다. 이찬근 교수는 이런 전략의 현실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두 은행의 주력분야인 가계대출 시장은 씨티그룹, 홍콩상하이은행 등의 외국 은행과 외국자본이 인수한 제일은행이 빠른 속도로 잠식하고 있다. 국민·주택은행은 그간 소매금융에 치중해온데다, 합병은행의 대주주인 외국자본이 국내 기업에 대한 대출을 꺼릴 것이 분명해 기업금융을 확대하기도 어렵다. 합병은행은 국제 비즈니스 경험이 일천하고 영어소통능력과 리스크 관리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국제금융에 진출하기에도 역부족이다. 또한 전문성이 높은 외환딜링이나 M&A 분야는 외국계 지점들이 석권하고 있으며, 채권딜링은 규제 때문에 진출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유휴자금을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위험하니 160조원이 넘는 거대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만한 대상을 찾기 어렵다.”

    합병은행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 비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산업대 조복현 교수(경제학과)가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은행합병 사례를 조사한 결과 자산규모가 250억달러(약 32조원)를 넘어서면 비용 면에서 규모의 경제를 나타내는 은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국민·주택은행의 총자산은 그 다섯 배에 달한다.

    설령 규모의 경제가 발생한다 해도 점포망의 확대에 따라 수신기반이 늘어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이자비용에서 규모의 경제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주택은행은 업역과 고객기반이 거의 같은데다 두 은행 지점이 1000개를 넘고 그중의 3분의 2가 500m 거리 안에 있다. 따라서 합병 후 점포망을 확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축소해야 할 처지여서 이자비용에서 규모의 경제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중복점포의 폐쇄나 인력감축을 통해 비이자 비용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도 있지만, 이는 대개 중소형 은행끼리 합병할 경우에 나타나는 효과다. 1999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판매비 및 일반관리비 비중은 각각 영업비용의 11.9%와 18.5%에 불과하다. 영업비용에서 차지하는 인건비 비중도 국민은행이 7.8%, 주택은행이 12.4%밖에 되지 않아 이 부문에서도 비용절감 효과가 크지 않다.

    결국 두 은행은 각각 86.8%와 80.5%를 차지하는 이자비용과 기타 영업비용을 절감해야 비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데, 이는 해외 사례에서 보듯 단순히 규모만 불린다고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국민·주택은행측도 합병선언 이전까지는 두 은행의 합병에 따른 시너지효과가 없다고 봤다. 국민은행 김상훈 행장은 “우리 은행은 주택은행과 업무영역이 비슷해 합병 시너지효과가 없는데다 인력을 줄여야 하는 부작용이 있다” “주택은행과의 합병은 규모의 경제에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업무의 중복성 등으로 범위의 경제는 기대할 수 없다”고 못박은 바 있다.

    주택은행 김정태 행장도 “두 은행의 합병이 이상적일지 모르나 사업구조를 보면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 비슷한 규모의 우량 선도은행이 합병에 성공한 예는 외국에서도 찾기 힘들다” “국민은행과의 합병은 점포위치나 대상고객이 중복돼 시너지효과를 내기 어렵다”며 합병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현재 국민은행의 최대주주는 18%의 지분을 가진 외국자본 골드만삭스다. 주택은행의 2대주주는 지분 10%를 확보한 외국자본 ING베어링이다. 정부는 국민은행 지분 6.5%와 주택은행 지분 14.5%를 보유해 2대주주와 최대주주로 올라 있지만, 민간은행에 대한 정부 지분을 조속히 매각하겠다고 대내외에 천명한 터라 합병이 이뤄지면 곧 지분을 빼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골드만삭스와 ING베어링은 각각 합병은행의 1, 2대주주로 경영권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된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은 골드만삭스와 ING베어링의 지분을 포함, 각각 62%, 66%에 이른다. 이에 따라 합병은행의 외자 총지분은 65%선이 될 전망. 그러니 정부가 현재 지분을 계속 보유한다 해도 합병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은 없다.

    더욱이 두 은행 지분을 보유한 외국인들이 대부분 기관투자가라 담합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예컨대 지난해 말 현재 주택은행 주식을 10만주 이상 보유한 대주주는 128개 기관투자가인데, 이들 중 100개가 외국계 기관투자가다. 때문에 정부가 합병은행에 ‘최소한의 공익성’을 요구하다 갈등을 빚을 경우 65%의 지분을 점유한 외국계 기관 대주주들이 공동전선을 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벌처펀드 성격에 가까운 골드만삭스는 합병은행의 주가를 올려 지분을 매각하는 데 우선적인 목표를 둘 것이므로 긴 안목으로 은행의 경영전략을 모색하기보다는 단기적인 수익 제고에 급급하리라는 게 은행가의 대체적 시각이다. 향후 골드만삭스가 합병은행 지분을 매각할 경우 국내에는 그만한 규모의 지분을 사들일 세력이 없어 다시 외국자본으로 넘어갈 공산이 크다.

    인천대 이찬근 교수는 “수익성을 지상의 경영목표로 삼는 외국자본이 대형 은행을 지배할 경우 월스트리트의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 부실상태인 우리 기업들에게 대출해주기를 기피해 신용위기가 만성화될 수 있고, 고수익을 노리고 파생상품 등에 위험투자해 은행의 부실화를 초래할 수 있으며, 협상력이 약한 중소기업이나 서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자본시장에서는 불경기에 유동성 중개기능이 마비되는 경우가 많다. 자본시장은 은행의 기업금융보다 정보가 더 불투명하므로 불확실성에 대해 더 취약하다. 그래서 작은 요인에도 시장이 쉽게 경색될 수 있다. 그런 마당에 은행마저 최소한의 공익적 기능을 외면할 경우 기업의 연쇄 도산과 대량 해고 사태가 초래될 위험이 높다. 이 때문에 개방경제하의 금융 선진국들도 최종적인 ‘안전장치’라 할 주요 은행의 국적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

    가령 아시아의 대표적 개방경제체제인 싱가포르는 1999년 5월까지 은행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율을 40%로 제한했고, 지금도 상위 4대 은행의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도 미국과 주요 산업에서 경쟁하고 있는 현실에서 반드시 대형 은행의 국적을 지켜야 한다는 방침이고, 캐나다는 외자에 대해 동일인 소유지분을 25%로 제한하고 있다.

    이찬근 교수는 “국내 은행업 발전을 위해 외국은행과의 경쟁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반드시 국내은행을 대거 접수하는 방식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외국은행들은 지점 형태로 국내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므로 이를 대폭 확대해주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대안을 제시한다. 지점 방식으로 국내시장에 진입한 씨티그룹과 홍콩상하이은행이 뛰어난 실적을 보이고 있는 게 그 좋은 사례다.

    독과점의 폐해

    국민·주택은행이 합병하고 한빛은행 중심의 지주회사가 출범해 국내 은행권 총자산의 50% 이상을 보유한 두 개의 거대 은행이 생기면 독자생존이 어려워진 다른 은행들도 합종연횡을 모색, 국내 은행권이 3∼4개의 독과점체제로 개편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도 자금력이 막강한 외국자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은 불문가지.

    시장지배력과 가격결정력(pricing power)을 지닌 독과점 은행들이 고수익 경쟁에 나설 경우 가뜩이나 외면당하는 기업금융이 더 위축돼 유동성 위기가 만성화할 수 있고, 공익성을 띤 저수익 사업을 축소하거나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을 늘리고 수수료를 확대함으로써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들에겐 은행 문턱이 더욱 높아진다는 것이다. 김상훈 국민은행장도 “고객의 은행 기여도를 분석해본 결과 상위 12%의 고객이 은행 수익의 80∼90%를 올려주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소액 예금자에 대한 수수료를 차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주택은행 노조 정현민 기획부장은 “저금리인데다 대출금 연체가 많은 국민은행의 학자금 융자, 역시 이자가 낮은 주택은행의 서민대상 주택융자 등 공익성을 띤 저수익부문 사업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은행측은 수신고가 넘쳐 운용할 길이 막막하겠지만 외국자본의 특성상 이런 부문보다는 리스크를 떠안고서라도 해외투자 로 눈을 돌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해 3월 독일에서는 도이체방크와 드레스너방크가 합병을 선언했다가 한 달 만에 취소했다. 두 은행의 대주주인 알리안츠보험이 합병을 주도했으나 독일 금융당국은 이들이 합병할 경우 과도한 시장지배력을 갖게 돼 시장의 경쟁을 저해하고 독점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합병을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두 은행의 소매금융 시장점유율은 25%, 자산 합계는 독일 은행권 총자산의 10% 정도로, 국민-주택은행의 경우보다 훨씬 낮다.

    국민·주택은행의 합병은 한 은행이 다른 은행을 흡수하는 형태가 아닌 대등합병이기 때문에 첨예한 조직간 갈등을 야기, 화학적 융합을 이루지 못하고 비효율로 빠져들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게 두 은행 직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주도권 시비와 파벌간 대립, 나눠먹기 인사와 같은 부작용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

    1998년 국민은행이 장기신용은행을 흡수합병했을 때 장은 직원은 1000명에 달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합병후 벤처업계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은 출신 직원은 국민은행 직원들보다 전문성이 높은 기업금융과 투자개발 부문 정도 외엔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나은행에 흡수된 보람은행 직원들도 하나은행 출신들의 기세에 눌려 있다.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지만, 이들처럼 내부 주도권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면 조직 전체로 봐서는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지만 국민·주택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규모와 시장점유율에서 1, 2위를 다투는 은행 간의 대등합병인데다, 두 은행 직원들 모두 공적 자금이 한푼도 들어가지 않은 국내 최고·최대 우량은행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더욱이 논란을 거듭한 끝에 합병 후의 존속법인을 두 은행 중 하나로 하지 않고 신설법인을 만들기로 했기 때문에 합병은행 출범 후 상당 기간은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기(氣)싸움으로 골머리를 앓을 조짐이다.

    규모가 엇비슷한 은행끼리의 대등합병이 조직갈등으로 인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한빛은행의 경우다.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이 합병, 1999년 1월 출범한 한빛은행은 인사 때마다 한일 출신과 상업 출신을 직급별로 정확하게 같은 수로 안배한다. 지점별 인력배치에도 신경을 쓴다. 가령 지점장이 상업 출신이면 차장은 한일 출신을 앉히는 방식으로 견제와 균형을 고려한다. 인사부에도 양행 출신을 동수(同數)로 배치해 오해의 소지를 막는다.

    이렇다 보니 인사에서 가장 먼저 고려돼야 할 업무효율과 능력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는 얘기를 듣는다. 자신과 같은 은행 출신이 아닌 상사가 지시를 내리면 공공연히 ‘말발’을 세워주지 않는 경우도 자주 있다고 한다. 자체 감사를 벌여도 감사팀 멤버가 양행 출신 동수로 구성돼 있지 않으면 피감부서에서 감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빛은행 노조는 대외적으로는 한 개지만 한일·상업 출신으로 나눠진 두 개의 집행부가 번갈아 자리를 맡기 때문에 실제로는 노조가 두 개인 셈이다. 하나은행의 경우 지금도 노조 간부 선거를 하면 표차가 합병 당시의 하나·보람은행 직원비율과 거의 일치할 만큼 출신에 따른 결속력이 강하다.

    1976년 서울은행과 한국신탁은행이 손잡고 출범한 서울은행은 통합한 지 20여 년이 지난 최근에야 출신파벌간 갈등이 잦아들었다. 합병 이후에 신입행원으로 들어와 파벌의식이 없는 직원들이 지점장, 차장 등 관리직으로 진출하면서 생긴 변화다. 그 전까지는 파벌간의 암투가 극심했다고 한다. 금융권에서는 두 은행 출신들의 갈등이 서울은행을 부실로 몰아갔다고 봤을 정도다.

    이런 갈등이 지속되면 직원들 간에 정보가 공유되지 않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나오기 어려워 직무에 대한 소명의식과 애행심이 옅어지게 마련이다. 그 결과 여신사고 등이 자주 터져 은행의 부실화를 촉발한다.

    두 은행 중 한 노조의 간부는 “출신별로 인사 안배를 철저하게 해도 본부장이 어디 출신이냐, 팀장이 어디 출신이냐에 따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므로 파벌의 결속력과 배타성이 강하다. 제조업체와는 달리 은행은 여러 지점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행원은 자신이 어느 파벌에든 귀속돼 있다고 느껴야 마음이 편하다. 게다가 은행원들은 대개 성격도 예민하다. 국민·주택도 이대로 합병하면 이런 조직갈등이 심각할 것이다. 자랑할 일은 못 되지만, 이게 현실인 이상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아니냐”고 털어놨다.

    또한 우리나라 은행원들은 중간에 스카우트되거나 계약직으로 입사해 이 은행, 저 은행으로 옮겨 다니는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신입행원으로 들어와 입사 때부터 함께 손발을 맞춰 일해온 ‘식구들’이기 때문에 조직문화가 다른 은행과 합병하면 상대은행 출신과는 사소한 사안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갈등을 빚는 순혈주의의 폐단을 드러낸다.

    국민·주택은행 노조는 함께 보조를 맞추며 합병저지 투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미 합병절차가 상당한 수준까지 진전됐기 때문에 밖으로는 합병반대를 외치면서도 안으로는 합병시 조합원의 실익을 챙기는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조합원들은 합병 자체보다는 합병의 주도권이 어디로 가느냐에 더 관심을 보인다. 노조원의 정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두 은행 노조는 공조체제는 유지하면서도 다소 소원해진 분위기다.

    주도권 노린 중복투자

    국민은행 노조 관계자는 “처음부터 둘 중 한 쪽을 존속법인으로 못박았으면 다른 한 쪽이 그 쪽 시스템을 따라갔을텐데, 논란만 거듭하다 어정쩡한 타협의 산물인 신설법인으로 가닥을 잡다 보니 이렇게 됐다. 앞으로 양측이 전산, 인사시스템 등은 물론 각종 전표 양식이나 하다못해 통장 디자인을 놓고서도 사사건건 시비를 일으키며 매일처럼 주도권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이라며 답답해 했다.

    어느 부문에서든 두 은행 중 한 쪽의 시스템을 합병은행의 표준으로 정할 경우 다른 쪽에서는 자신의 시스템을 버리고 새 시스템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 익숙해져야 한다.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자존심도 상한다. 이 때문에 두 은행은 요즘 각 부서마다 자신들의 방식이 ‘표준 방식’으로 채택되도록 하기 위해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는 불필요한 중복투자.

    예컨대 두 은행은 합병은행 출범을 석 달 남짓 남겨놓고도 차세대 전산시스템을 따로따로 개발하느라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9월경 시스템 개발을 마칠 예정이고 주택은행은 50% 정도의 진척도를 보이고 있다. 서로 자신의 시스템을 표준화할 욕심에 결국은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할 시스템을 개발하느라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 처음부터 공동 개발에 나섰다면 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 합병 후 전산통합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함으로써 고객의 불편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단 전산시스템뿐 아니라 영업, 마케팅, 광고활동 등도 모두 독자적으로 하고 있어 여러 부문에서 이런 낭비가 빚어지고 있다. 국민은행은 각 지점과 부서에서 선발한 인력을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서관에 모아놓고 주도권 확보를 위한 시스템과 논리를 개발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은행도 CRM(고객관리시스템·Customer Relationship Marketing) 등에서 국민은행보다 비교우위에 서기 위해 시스템 선진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주택은행은 카드사업 부문에 150억원을 새로 투자할 계획인데, ‘국민카드’가 ‘주택BC카드’보다 회원수는 2.6배, 이용금액은 3배 가량 많아 합병은행의 카드사업 부문은 국민카드로 일원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또한 투자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합병은행의 실제 업무와 관련된 준비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두 은행 간에 송금할 때 타행환 수수료를 동일 은행간 수수료로 감면한 것과 여직원 유니폼을 통일한 것 등 당장 외부로 드러나는 것 말고는 손댄 게 없다. 전산통합, 조직정비 등 핵심적인 사안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여직원 유니폼도 한 은행이 디자인 시안을 내놓자 다른 은행이 “그쪽에서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느니 사복을 입고 근무하겠다”고 버티는 등 티격태격하다 어렵사리 ‘절충복’에 합의했다.

    양 은행에서 같은 수의 직원을 파견해 합병관련 실무를 맡고 있는 국민·주택은행 합추위에서도 국민·주택 일부 직원들 간에 문서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 등 견제가 심하다고 한다.

    두 은행은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합병은행의 이름을 ‘국민은행’으로 정했다. ‘국민은행’의 브랜드 가치가 워낙 높은데다 ‘주택은행’이라는 이름이 주택금융에만 특화된 은행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한 은행을 존속법인으로 정하는 데는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신설법인으로 등록하기로 했다. 새로운 은행을 설립하는 데는 최소 500억원에서 많게는 1000억원대의 비용이 든다. 이것도 끝간 데 없는 자존심 싸움이 공연한 낭비를 초래한 사례다.

    이런 분위기에서 두 은행이 합병은행의 행장 자리를 양보할 리 만무하다. 김상훈, 김정태 두 사람 중 누가 은행장이 되느냐가 사실상 합병은행 경영 주도권의 향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경영의 주도권도 주도권이지만, 행장 자리가 누구에게로 가느냐는 합병 후 구조조정을 치러내야 할 양행 직원들에겐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은행은 “말이 대등합병이지, 합병비율이 61대 39로 총자산 자기자본 당기순이익 총수신 총여신 직원수 등 규모 면에서 월등한 국민은행에서 행장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택은행은 “1998년 8월 취임 이후 주택은행 주가를 700%나 끌어올리며 국내외에서 뛰어난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김정태 행장이 당연히 행장이 돼야 한다”고 맞선다.

    김상훈 행장은 전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김정태 행장은 광주일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와 두 김씨의 행장 경쟁은 두 은행의 울타리를 넘어 ‘남북전쟁’ ‘법상(法商)전쟁’의 양상까지 띠고 있다.

    국민·주택 합추위는 CEO후보 선정위원회에서 7월 말까지 행장후보를 선임하겠다고 밝혔다. 선정위원은 합추위 김병주 위원장과 최범수 기획단장, 국민은행 김지홍 사외이사, 주택은행 최운열 사외이사, 골드만삭스 민지홍 이사, 주택은행 얀 옵드 빅 부행장 등 6명.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측 인사가 각 2명씩인 만큼 합추위 김위원장과 최단장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셈. 하지만 양 은행 노조 모두 “상대 은행장이 합병은행장에 선임되면 선정위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어 행장 선임과정이 순조로울 것같지는 않다.

    행장 선임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에는 두 김씨가 행장과 이사회 의장을 나눠 맡는 이원경영체제가 절충안으로 제시됐다. 행장이 경영전략을 입안·집행하고, 이사회 의장이 이를 승인·평가하는 구조다. 합추위 최범수 기획단장은 “이원경영체제는 운영하기에 따라 합병은행의 원만한 출범을 가능케 할 수 있어 최근에는 외국 합병은행에서도 보편화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원경영체제가 ‘행장파’와 ‘의장파’로 파벌을 조성해 경영의 일관성이 실종되고 생산성이 저하될 우려도 있지만 적어도 합병 초기의 갈등은 완화할 수 있다. 한 쪽으로 확실하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80점짜리라면 이원경영체제는 50점짜리밖에 안 된다. 하지만 80점을 받겠다고 무리수를 두다간 자칫 판이 깨져 빵점이 될 수 있다. 초기에 이원경영체제를 거쳐 한 지붕 아래로 들어간 뒤에 그 안에서 자연스레 하이어라키(hierarchy)를 구축해가면 나중에 90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행장과 이사회 의장으로 자리를 나눈다고 해도 경영 일선에서 인사, 예산, 조직을 주무르는 주역은 행장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양 은행이 이 체제를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이사회의 기능을 강화하고 권한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법대로’ 해석하면 현행 이사회 의장-행장체제에서도 이사회의 기능 강화될 수 있다. 법적으로 이사회 의장(chairman)은 집행의 최고 책임자인 행장(president)보다 상위에 있다. 이사회 의장은 행장을 평가하고 견제함으로써 행장이 일할 수 있도록 경영권을 창출한다. 행장이 ‘매니저(manager)’라면 이사회 의장은 ‘가버너(governor)’다. 상법에는 지점장 인사와 같은 경미한 사안도 이사회를 거치게 돼 있다. 이사회의 권한이 이처럼 신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만큼 이사회 의장은 이사회 진행권을 이용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행장에게 딴지를 걸 수 있다.

    따라서 합병은행이 이원경영체제로 간다면 이사회 의장에게 상당한 권한을 보장하는 내용의 협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합병은행이 향후 보험, 증권업 등으로 진출해 자회사를 설립할 경우 이사회 의장에게 지주회사 회장 자리를 내주는 타협안이 제시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낭떠러지 피해 ‘좁은 문’으로

    국민·주택은행이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두 은행의 합병에 따른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오버뱅킹의 폐해가 심각한 우리 은행권에선 이런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대형 선도은행(Super Leading Bank)을 만들어 기형적인 금융시스템을 개편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국민·주택 합추위 최범수 기획단장은 “우리나라에도 해마다 혈세를 쏟아부을 필요가 없는 은행이 나올 수 있다는 희망에서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은 생과 사가 걸린 상황이다. 시너지효과 같은 걸 따지는 건 배부른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 은행의 예대마진은 평균 4%포인트 이상이고 이자비용보다 수수료 수입이 커 세계 최고의 건전성과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국내 은행들은 과당경쟁으로 인해 예대마진이 2%포인트에 불과하고 수수료 수입도 보잘 것 없어 배당은커녕 직원 월급 주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국내 은행은 미국 은행에 비해 부담하는 위험은 두 배 이상이지만 이를 감당할 수익창출 능력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우량 선도은행이 나와 과당경쟁을 해소하면서 예금금리를 2%포인트 이상 끌어내려야 한다. 고객이 예금이자를 많이 받겠다거나 수수료를 못 내겠다고 하면 은행이 다시 부실화돼 훨씬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은행합병의 성공확률이 50%도 안 되는데도 미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합병이 추진되고 있는 이유는 그보다 높은 성공확률을 가진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합병은 ‘좁은 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길의 끝은 낭떠러지다. 낭떠러지로 가지 않으려면 좁은 문이라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연세대 하성근 교수(경제학과)도 “업역이 비슷한 은행끼리 합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하지만, 그런 슈퍼뱅크라도 없으면 재벌 못지않은 중복, 과잉투자로 금융효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는 우리 은행시스템을 누가 뜯어고치겠느냐”고 반문했다.

    최범수 기획단장은 금융주권 상실을 우려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했다. 국민은행에 투자한 골드만삭스의 경우 주가는 올랐지만 환율상승으로 별 재미를 못 봤다고 한다. 그래서 매매차익을 노리고 지분을 매각하려면 국민은행 주가가 지금보다 적어도 두 배는 올라야 한다는 것. 그런데 주가가 이 정도로 상승하려면 합병은행의 가치를 크게 높여야 하므로 골드만삭스는 합병은행과 한배를 탄 셈이라는 것이다. 골드만삭스가 국부를 유출하려면 유출할 국부보다 몇 배나 많은 국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미다.

    합병의 시너지효과를 당장 눈에 보이는 해당 은행의 지표만으로 추정하긴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가령 국내 은행의 전산시스템은 해킹에 무방비상태인 경우가 적지 않다. 브라질의 모 은행은 지진이 발생해도 금융자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위성에 백업시스템을 구축한다지만, 우리 은행 중에는 건물 안에라도 제대로 백업시스템을 갖춘 곳이 드물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엄청난 규모의 IT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국민·주택은행이 이런 수준의 선진화된 전산시스템을 갖추려면 지금껏 두 은행이 각각 투자해온 IT 예산보다 훨씬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선도은행이 과감한 투자로 이런 시스템을 확보하면 후발은행들은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같은 시스템을 깔 수 있다. 이것은 또다른 의미의 시너지효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금융연구원 김병연 은행팀장은 “합병은행이 제 기능을 다하려면 은행 간에 명확한 역할분담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은행권을 소매금융 은행과 투자은행으로 기능을 나눠 합병은행은 개인, 중소기업, 주택, 공채 등 안전한 자산을 운용하면서 소매금융에 치중하고 투자은행은 대기업 금융을 전담하되, 합병은행이 투자은행의 회사채, 금융채, 리스채 중 안전한 것을 선별 인수해 간접적으로 기업금융을 수행하도록 하는 구도가 바람직하다는 것. 합병은행은 소매금융을 기반으로 안정된 영업활동을 하되 수신금리를 더 낮춰야 하며, 투자은행은 리스크를 부담하는 대신 높은 수익을 올리며 영업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내 은행 고객들은 현금거래를 많이 하다 보니 은행에 많은 비용을 부담시킨다. 가령 1만원이 넘는 고액권이 없어 자기앞수표를 많이 쓰는데, 이 때문에 은행은 자기앞수표를 2중으로 체크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할 뿐 아니라 이서, 교환, 결제과정에서 많은 운용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또한 창구거래를 많이 하기 때문에 단말기 조작을 한 번만 잘못해도 거액사고가 터질 수 있어 교육수준이 높은 고임금 직원을 창구에 배치해야 한다. 그런데도 은행간 경쟁이 심해 이런 부분에 들어가는 비용을 고객들에게 전혀 부담시키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합병은행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과열경쟁을 유도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다른 은행들도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수신금리 인하를 선도하고 금융서비스에 대해 적정한 수수료를 받는 등 가격조정자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는 게 김병연 팀장의 주문이다.

    은행 고객으로선 예금 금리가 낮아지고 수수료 부담이 커지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로 인해 금융시스템이 건전해지고 은행이 안전해지면 예금을 떼일 위험도 낮아지고 은행예금 이외의 투자처도 늘게 된다는 것. 고수익을 좇는 자금들이 은행 대신 주식·채권시장 등의 자본시장으로 이동하면 자금시장의 경색도 완화될 수 있다고 한다.

    국민·주택 합병은행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인력감축 문제다. 업역이 유사하고 중복점포가 많아 최소한의 ‘칼질’은 불가피할 전망인데, 행원들에겐 무엇보다 민감한 사안이다. 두 은행 직원들은 “왜 우량은행 직원인 우리가 희생돼야 하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급격한 인력감축은 없다”며 직원들을 다독이고 있다. 실제로 국민은행은 전체 직원의 30%인 3000명을 감원한다 해도 비용절감 규모는 1200억원으로, 이 은행의 올해 수익목표 1조500억원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 정도 비용을 줄이자고 직원들의 거센 반발을 무릅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노조는 “당장은 대량 감원이 없겠지만, 업역 확장의 한계로 인한 고객 이탈로 3∼5년 후엔 고용불안이 만성화될 것”이라며 불안해 한다.

    김정태 주택은행장도 “인위적인 인력감축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러나 일부 중복점포는 정리할 수밖에 없고 각종 컨설팅 결과 합병은행이 30% 안팎의 인력감축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나타나 직원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국민과 주택이 국내에서는 우량은행이라고 해도 ROE(자본이익률)나 ROA(자산이익률)에서는 세계 수준과 거리가 멀다. 합병은행으로선 감원에 따른 직접비용 절감규모는 얼마 되지 않지만, 직원 1인당 창출 수익과 직결되는 이런 수익성 지표를 상승시키기 위해 결국 사람에게 손을 댈 공산이 크다”고 우려했다.

    방카슈랑스 변수

    두 은행은 합병은행이 보험업, 투자운용업 등에 진출해 방카슈랑스(은행·보험 연계영업) 업무를 시작하면 중복점포와 인력을 이 분야로 전용해 인력감축 규모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주택은행의 2대주주인 ING베어링은 보험, 증권 등을 기반으로 한 금융그룹. ING베어링은 전국에 걸친 합병은행 점포망을 통해 당초 투자목적인 보험업과 투자운용업에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정부의 뜻에 맞춰 정리해고 규모를 줄이는 대신 이들 전략사업 부문의 국내 진출권을 얻어내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최근 정부도 2003년부터 도입하기로 했던 방카슈랑스를 조기에 도입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방카슈랑스로 은행의 잉여인력을 흡수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보험업무라는 게 은행원들을 몇 달 가르쳐서 데려다 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율산정을 비롯한 각종 통계와 설계사 관리 등의 노하우가 하루 아침에 습득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합병은행에 방카슈랑스를 허용할 경우 막대한 자금을 쌓아놓고 영업을 하는데다 기존 점포망을 활용하면 영업관리 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어 누워서 떡 먹는 장사를 할 수 있다. 그 결과 대기업을 제외한 제2 금융권이 커다란 타격을 받게 돼 이들을 살리거나 청산하기 위한 공적 자금 소요가 발생하는 등 그 파장이 커질 수도 있다.

    금융감독원 김병연 은행팀장은 “합병은행은 현재로선 겸업화에 신경 쓰기보다는 업무영역을 명확히 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것부터 제대로 해야 금융질서가 확립되고 대내외 신인도도 높아진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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