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한국금융계 장악한 해외파 뱅커들

  • 이제경 < 매경이코노미 기자 >

    입력2005-04-08 13: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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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흔살에 연봉 13억, 스톡옵션 163만주
    • 서울대 - 美 MBA가 기본… 몸에 밴 실력제일주의
    • 눈치 안 보고 내 사람 데려와 써
    • 씨티은행 출신이 70%
    • 주주 이익 극대화가 유일한 목표
    강찬수 서울증권 회장. 지금의 자리를 맡아달라는 뜻밖의 제안이 들어온 때는 1999년 1월이었다. 당시 그는 뱅커스트러스트의 자회사인 뱅커스트러스트 월펜손 상무이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증권회사 M&A(인수합병) 업무를 13년 넘게 한 그는 마침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에 시달렸다. 여기에는 1998년 11월 30일로 의무 근무기간이 끝났다는 점도 작용했다.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부인과 함께 겨울 휴가에 들어가기 전 조지 소로스 펀드 측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다짜고짜 소로스 회장을 만나달라는 내용이었다. 겨울 휴가를 포기한 채 소로스를 만났다. M&A 업계에서 13년 동안 일했지만 소로스를 직접 만날 기회는 한 번도 없었기에 강회장으로서도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소로스가 발탁한 M&A 전문가

    소로스 회장은 귀를 의심케 할 정도의 제안을 했다. 한국의 대림산업그룹 계열사인 서울증권을 인수하려는데 그 곳 사장을 맡을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국 시장은 발전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업도 확대 할 것이니 믿고 맡아달라고 했다. 만약 거절하면 서울증권 인수를 다시 고려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강회장은 당황했다. 한국에서 생활하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인이 한국에서 살 의향이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즉답을 할 수 없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소로스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금융전문가를 상대로 사전 조사를 했다고 한다. 서울증권 최고경영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 수소문한 결과 십 수년 간 증권사 M&A업무를 해온 강천수씨를 천거받은 것이다. 적임자가 갖춰야 할 조건은 영어구사력과 증권업무에 대한 해박함, 경영 능력이었다.



    강회장은 직접 증권업무를 하지는 않았지만 증권사 M&A를 담당했기 때문에 별 하자가 없다고 판단한 듯 했다. 무엇보다 소로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M&A 경험이었다. 한국에서 확장경영을 하려면 다른 금융회사를 인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강회장 같은 인물이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직접 만나본 강회장의 영어 구사능력이 미국인 이상으로 뛰어나 소로스는 마음을 굳혔다.

    이렇게 해서 강회장은 서울증권과 인연을 맺었다. 1999년 5월, 3개월 동안 서울증권 고문을 지낸 뒤 대표이사 사장으로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학력은 누가 봐도 부러울 정도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간 그는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 와튼스쿨에서 MBA (경영학석사)를 받았다. 1986년 한국에 돌아와 한국개발연구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했다. 꿈을 실현하기에 한국은 너무 좁다고 생각한 것일까. 1년 뒤 그는 연구원 생활을 접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증권을 맡은 후 2년 간 그가 쌓은 업적에 소로스는 만족할 듯 하다. 한일투신운용을 인수했고, 4년 동안 줄곧 적자였던 서울증권을 1999년 업계 8위, 2000년 7위(세전 이익 기준)로 탈바꿈시켰다.

    서울증권의 2000년 ROE(자기자본수익률) 순위는 업계 6위. ROE 부문에서 업계 5위에 오르는 것이 올해 강회장의 최대 목표다. 다른 경영지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오직 어떻게 하면 ROE를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역점을 둘 뿐이다.

    헤지펀드 CEO의 변신

    서울증권이 인수한 한일투신운용 이정진 사장(43)도 떠오르는 국내 금융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국내 금융시장에 데뷔한 지는 2년에 불과하지만 벌써부터 그의 활동 하나 하나가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1999년 5월 서울증권 전무이사로 국내 증권업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강천수회장의 천거로 한국땅을 밟은 것. 서울증권에 오기 전 그는 미국 헤지펀드인 인빅터스캐피탈&동양증권아메리카의 최고경영자로 활동했다. 또한 SASM&F란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이사장의 첫 직장은 제조업체였다. 미국 인텔사의 유럽 및 일본 마케팅 담당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 2년 동안 경력을 쌓은 뒤 뱅커스트러스트에서 증권업무를 맡았다. 이렇듯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경영학과 법학을 모두 전공했기 때문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고, MBA를 딴 후 다시 조지타운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91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도 함께 취득했다.

    이사장의 경영철학은 미국법의 정신에 기초해 있다. 조직원이 자기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기업경영은 저절로 좋아진다는 것. 판사가 최종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변호사가 자신의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진실이 밝혀진다는 식의 미국 사법제도 정신이 배어있는 경영철학이다. 이 때문에 그는 성과급 제도에 심혈을 쏟는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을 정해 놓고 구성원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함이다.

    지난 7월초 한미은행 본점 로비에서 노조의 천막농성이 벌어졌다. 은행 설립 18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서장 자리에 외부경력자를 채용하지 말라는 노조의 요구를 경영층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농성 사유였다. 인사권은 대주주와 경영층의 고유권한이라는 논리와, 경영층의 외부수혈은 받아들이지만 부서장까지 그럴 수는 없다는 노조의 자존심이 맞붙은 것이었다.

    지난 5월 한미은행을 ‘점령’한 하영구 행장(48)은 농성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인 듯 하다. 당초 7월 중순경으로 예정된 부서장급 인사가 7월 7일에 단행됐다. 부서장급 인사를 외부에서 스카우트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노조가 파업 움직임을 보이자 인사를 앞당긴 것이다. 하행장은 외부 영입이 없음을 노조에 인식시키려 선수를 친 셈이다.

    그러나 노조는 제일은행의 인사를 상기했다. 이번에 확실한 안전장치를 해두지 않으면 언제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조와 협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절대 부서장에 외부인을 앉히지 말라”는 노조 주장에 대해 하행장도 원칙으로 맞섰고 결국 한미은행 사상 처음으로 로비 천막농성 사태가 불거진 것이다.

    노조가 천막농성을 불사하며 저항한 이유는 하행장의 인사스타일 때문이다. 하행장은 취임 한 달만에 씨티은행 임원을 3명이나 영입했다. 11개 본부 가운데 기업금융·개인금융·사업본부장을 씨티은행 출신 3인방에게 맡긴 것. 주인공들은 강신원 개인금융본부장, 원효성 카드사업본부장, 박진회 기업금융본부장이다. 이들은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한국 소비자금융그룹 대표로 있던 하행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인물들이다.

    하행장은 만 20년 동안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잔뼈가 굵은 금융전문가다. 은행장 자리를 놓고 신동혁 전행장과 세(勢) 싸움을 벌이다 마침 대주주인 칼라일의 지지를 받아 시중은행장 자리에 오른 것. 신동혁 행장의 실력이 하행장에 뒤질 리 없다. 다만 나이가 많고 개혁이미지가 약하다는 것이 감점 요인으로 작용한 듯 하다. 결국 신동혁 행장은 열 네살 밑인 하행장에게 자리를 내주고 이사회 회장으로 물러앉았다.

    하행장은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대주주인 칼라일의 입맛에 딱 맞았을까.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나온 뒤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은 그는 1981년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은행원 생활 5년만에 자금담당 총괄이사로 승진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 한국투자금융그룹 대표·기업금융그룹 부대표·소비자금융그룹 대표 를 두루 역임했다. 시중은행에서 요구하는 소매와 도매금융을 모두 경험한 셈이다. 금융발전심의회 위원과 규제심사위원회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하행장과 같은 배를 탄 강신원 개인금융본부장(46)은 경기고와 서울대 공과대학을 거쳐 미국 MIT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은 수재다. 그는 이후 MIT에서 다시 MBA를 받았다. 1989년 씨티은행 서울지점 마케팅부장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1997년 소비자금융 대표로 승진했으며 판매담당 총괄이사 자리에 올랐다.

    박진회 기업금융본부장(44)은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 출신이다.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경제학석사를 받았다. 경제정책의 싱크탱크로 통하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잠시 몸담았으나 1년이 조금 지나 씨티은행 서울지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해 4월 자금담당 본부장에서 삼성증권 운용사업부 담당 상무로 변신했고, 올해 6월 하행장을 따라 다시 한미은행 사람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씨티은행 출신으로 시중은행 수장에 오른 강정원 서울은행장은 국제 금융시장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질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특히 1996년 합병은행인 도이체방크 한국법인 대표를 맡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도이체방크 한국법인은 뱅커스트러스트 한국법인보다 덩치가 컸다. 강행장은 당시 피합병은행인 뱅커스트러스트 한국법인 대표를 맡고 있었다. 도이체방크는 통합 도이체방크 한국법인 대표에 뱅커스트러스트 한국법인 대표였던 강행장을 선임한 것이다.

    임원 회의는 아예 영어로

    강행장은 성장배경과 이력에서 국제적 인물이란 인상을 물씬 풍긴다. 초등학교는 일본 성미소학교를 졸업했고 중학교는 한국에서 다녔다. 홍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다트머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미국 플레처대 대학원에서 국제법과 외교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79년 씨티은행 뉴욕본사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씨티은행 서울지점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3년만에 기업금융부문에서 경쟁력이 있던 뱅커스트러스트 맨으로 변신했다. 결국 그 곳에서 한국대표까지 맡은 것이다. 금융발전심의위원회 위원과 국제금융분과위원회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서울은행장으로 취임한 그는 서울은행을 외국금융기관에 매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대주주가 정부인만큼 은행경영을 정상화해 비싼 가격에 국외매각을 하면 그의 임무는 끝난다. 당초 2001년 6월까지 국외매각을 했어야 했으나 사실상 올해 12월까지 면죄부를 받았다. 만약 12월까지도 국외매각에 실패한다면 은행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강행장은 서울은행에 부임하면서 4개월 동안 주말을 잊고 일에 파묻혔다. 평일에도 저녁 11시 넘어서까지 일하기 일쑤였다. 김규연 부행장은 강행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외국금융기관에서 인정받았다 해도 외국은행 국내 지점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업무가 다양하고 인력이 많은 시중은행을 잘 경영할 수 있을까 의심했다. 그러나 4개월 간 모든 은행 업무를 샅샅이 파악해 요즘은 모르는 게 없을 정도다.”

    강행장이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부문은 자산운용 쪽이다. 실무자도 알지 못하는 부문까지 구석구석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강행장도 외부에서 자기 사람을 들여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경영성과를 내지 못하면 퇴출될 처지이기 때문에 남의 눈치 볼 겨를이 없다. 경영성과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영입한다는 자세다.

    최동수 부행장, 원명수 부행장, 배전갑 부행장, 김명옥 부행장 등이 강행장과 운명을 같이 한 주인공들이다. 지난 6월 교보생명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장형덕씨도 강행장이 스카우트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1년만에 교보생명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두고 외부에선 국외매각이 힘들어지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한다. 나중에 불명예 퇴직 하기보다 한발 앞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옮긴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강행장은 장형덕 부행장에 대해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좋은 자리가 생기면 언제든지 떠나는 게 월급쟁이 경영인이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사람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것이 외국 금융계 출신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김명옥 부행장은 씨티은행 서울지점 검사 및 업무총괄이사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그러나 씨티은행 시절의 탁월한 업무능력을 높이 산 강행장이 그녀를 부행장으로 발탁했다. 그녀의 부행장 발탁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경영의 모든 책임을 강행장이 지고 있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명수 부행장은 경기고와 미국 델라웨어 벨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화재보험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1997년 7월부터 2000년 7월까지 한빛은행 상무로 근무했다. 강행장은 한빛은행에서 몸담았던 그를 다시 불러들일 만큼 인력채용에서 자기색깔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강행장과 같은 배를 탄 배전갑 부행장은 대림코퍼레이션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미국 존 애덤스 고등학교와 위스콘신대 경영학과를 나와 워싱턴대에서 MBA를 받았다. 대림그룹과 인연을 맺기 전에는 JP모건 부사장과 고려CM생명 상무이사를 지냈다.

    서울은행은 수석부행장이 외국인이고 강행장을 비롯해 한국말 이상으로 영어가 편한 임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임원 회의는 영어로 하는 게 일반적이다. 제일은행의 경우 은행장이 외국인이어서 영어가 아니면 아예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H&Q로 경영권이 넘어간 굿모닝증권 도 외국 금융회사 출신들이 대거 포진한 곳이다. 조지 소로스가 인수한 서울증권과 다를 바 없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이름 석자만으로 통하는 도기권사장(44)이 1998년부터 굿모닝증권을 이끌고 있다. 그는 경북고와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미국 듀크대에서 MBA를 받은 후 국내로 돌아와 씨티은행 서울지점에 둥지를 틀었다. 서울지점에서 소매금융 담당 이사를 지냈고 태국 씨티코프 금융증권 사장을 맡았다. 태국 씨티은행 소매금융부문 사장도 역임했다. 한때 국내은행에서 그를 모시기 위해 로비(?)를 벌일 정도였다.

    도사장도 책임경영 차원에서 경영진에 자기 사람을 포진시켰다. ING베어링증권 수석조사담당자로 활동했고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증권 조사분석부 담당 상무였던 이근모(46)씨를 1999년 7월 상무로 영입했다. 이전무는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미국 워싱턴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전무 이외에 도사장이 영입한 씨티은행 출신 임원은 이흥주 상무(41)와 김두헌 이사(40)다. 이상무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연세대 경영학과와 미국 테네시테크놀러지대학 MBA 출신이다. 1989년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뱅커 생활을 시작했고 신용카드사업부 총괄이사를 끝으로 굿모닝증권에 합류했다. 현재 마케팅본부 총괄 상무를 맡고 있다. 김이사는 인하대 출신으로 연세대에서 MBA를 받았다. 1999년 씨티은행 이사에서 굿모닝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일투자신탁증권 황성호 사장(48)도 씨티은행 출신이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9년 씨티은행에 입사했다. 소비자금융 기획담당 부장을 거쳐 대출담당 심사역을 끝으로 씨티은행을 떠났다. 이후 다이너스클럽카드 한국지사장, 그리스 아테네은행 공동대표, 한화은행 헝가리 행장 등 폭넓은 활동을 벌여 왔다. 제일투자신탁증권 사장으로 옮기기 전엔 다시 씨티은행으로 들어가 임원을 지냈다. 황사장은 씨티은행 뉴욕마케팅 지배인을 지낸 안재범(38)씨를 마케팅 본부장으로 영입했다.

    금융감독원에도 씨티은행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 이성남 부원장보(54)와 최명희 은행검사2국 검사6팀장(49)이 주인공들. 이부원장보는 20년 넘게 씨티은행에 몸담았고, 최팀장은 경기여고와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씨티은행에서 16년 동안 일했다.

    하나은행 송갑조 부행장(CIO;최고정보담당책임자)은 3개 외국금융회사(씨티은행, 케미칼은행, 시어슨 해밀)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며 박준규 HSBC 소매금융 본부장(39)은 씨티은행 서울지점 영업전략기획본부 이사와 AIG생명(한국 현지법인) 전무를 지내 차세대 금융전문경영인으로 대접받고 있다.

    외국 금융기관 출신들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IMF 외환위기 직후부터다. 그 이전만 해도 자행(自行) 출신이 아니면 임원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곳이 금융권이었다. 이 때문에 외국계 금융기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들은 종종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국내 금융기관에 진출한 동급생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받는 반면 직장생활의 최종 목표로 금융기관 최고경영자를 상정하기는 어려웠다. 외국은행 내에서도 대표 자리는 본국이나 아시아 지역대표의 몫이었다. 국내 금융기관의 임원진 자리는 아예 쳐다보기도 어려웠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IMF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금융개혁 작업에 선진 금융기법에 정통한 외국은행 출신을 많이 등용하라는 주문을 한 것. 이에 따라 외국계 은행 금융전문가 50여 명의 명단이 작성돼 상부에 보고됐다고 한다.

    “주주이익 극대화가 유일한 목표”

    정치적 배경도 인선에 작용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관측이다. 집권당 실세와의 친분, 공동정권에 따른 지연, K고 학맥 등이 무시 못할 요소로 작용했다는 풍문이다.

    외국 금융회사 출신이란 점만으로 대접받는 요즘 세태를 폄하하는 시각도 있지만 대주주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만큼 대주주 이익에 민감한 인물 찾기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국내 금융기관에서 활동하는 외국금융회사 출신은 크게 두 부류다. 한 쪽은 최대주주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경우다. 은행권에선 한미은행이 유일하고 증권업계에선 굿모닝증권과 서울증권이 대표적이다. 이들 회사의 공통점은 경영권이 외국인에게 넘어갔고, 이 곳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주주 대리인으로서 주주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노력한다.

    하영구 한미은행장은 공공연하게 은행경영의 최대 목표가 주주이익 극대화라고 말한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많은 회사들이 고객만족을 외치지만 결국 이익을 많이 내 주주들이 많은 배당금을 받는 게 최대 목적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결국 주주 말을 잘 듣는 게 실력 있는 경영인이다. 주주는 소위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막기 위해 막대한 임금을 주고, 대리인은 많은 이익을 내야 더 큰 부를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이익극대화 경영에 모든 역량을 맞추는 것이다. 이른바 미국식 CEO제도가 우리 금융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셈이다.

    외국 금융기관 출신은 국내 인사들도 인정하는 나름의 강점을 갖고 있다. 외국 금융기관의 인사고과는 철저히 실적위주다. 실적이 뛰어나지 않으면 승진은 바라보기도 어렵다. 이런 분위기의 외국기관에서 승승장구한 인물인 만큼 실력 제일주의가 몸에 배어 있다.

    영어 구사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이 국내 금융기관을 잠식하면서 자본주들이 의사소통 가능한 외국 금융기관 출신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또 대부분 외국지점과 서울지점을 오가면서 선진형 금융기법을 체득했다. 직수입한 금융인과 달리 한국적 금융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점도 이들이 국내 금융기관에 발탁된 요인이다.

    국내 금융기관 종사자들이 상대적으로 국제경쟁력이 떨어진 것도 외국금융기관 출신을 돋보이게 했다. 한 시중은행원은 “과거 시중은행은 실적보다는 연공을 중시한 인사를 해왔다”고 꼬집는다. “자율 경영을 방해하는 관치금융 등으로 전문가를 키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한때는 뛰어난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직장이었지만 낙후된 시스템 안에서 그들은 무능력자로 전락해버렸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외국계 금융기관 출신 유입에 불만을 털어놓는 쪽도 적지 않다. “외국은행 국내지점 규모는 시중은행 규모에 비할 바가 못된다. 거대조직 운용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임원 자리를 내주는 것은 금융사대주의나 다를바 없다”는 비판이다.

    S은행 K모 지점장은 “기존 금융계 임원들이 선진 경영기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외부적 요인으로 소신을 펴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외국계 은행에서 수혈하기보다 기존 인력의 자질을 높이고 사기를 진작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간간부층은 국제화 면에서도 외국금융기관 출신에 뒤지지 않는다는 반발이다. 한편 외국계 금융기관의 혹독한 실적주의는 능력 있는 사람도 중도 탈락키는 무자비한 인사 시스템으로 국내풍토에 맞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이런 내부 불만에도 불구하고 외국금융회사 출신이 경영하는 금융회사들은 대부분 좋은 실적을 올려 ‘수혈경영인’들 또한 합격점을 받은 상태다.

    최대 주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나, 국제 선진금융기법을 전해 받기 위해 외국금융기관 경력자를 채용한 곳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이른바 ‘외풍’에 강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정부 입김에 맞서 과감히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안다는 것. 최근 현대건설 회사채 인수와 관련해서도 이들은 오로지 ‘회사 이익’만을 내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정부에 약한 이전 금융기관 경영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투명경영도 강점이다. 한 외국금융회사 출신 경영자는 “아직도 한국 금융기관 중에는 회사 이익보다는 계열사 봐주기나 외부 입김 때문에 위험한 돈 장사를 하는 곳이 있다”고 꼬집었다. 계열사를 우회지원하기 위해 금융기관에 입금한 것처럼 하고 해당 기업에 콜자금 대출을 해주는 영업방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콜 대출을 하면 단기적으로는 이익을 낼 수도 있겠지만 위험한 기업에 대출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자산운용전략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이런 위험한 자산운용을 이들은 철저히 배격한다.

    그러나 외부인력 수혈은 내부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오고 있다. 특히 기존 인력의 사기저하는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실망한 이들은 회사 발전보다 자기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IMF 이전과는 확실히 비교되는 직업관이다.

    새 경영진은 미국식 경영을 요구한다. 구성원들도 미국식 경영에 점차 물들어 가고 있다. 성과급제도는 오히려 미국보다 앞서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정진 한일투신운용 사장은 “성과급은 개인·조직·회사 모두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운영돼야 하는데 일부 한국기업들은 개인능력만 강조하는 게 흠”이라 지적한다.

    개인이 아무리 많은 이익을 냈다 해도 회사가 적자라면 자기 몫을 상당 부분 포기하는 게 미국식 성과급제라는 설명이다.

    연봉 13억, 스톡옵션 163만주

    외국은행 출신 수혈은 연봉 파괴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중은행 간에도 연봉이 10배 이상 차이 나고 은행장보다 연봉을 많이 받는 임직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미국식 성과주의가 은행 경영에 빠른 속도로 파고들면서 연봉파괴 현상도 가속될 전망이다.

    하영구 한미은행장은 연봉 100만달러(약 13억원)와 163만주의 스톡옵션(주식매입선택권)을 받았다. 하행장의 스톡옵션 행사 가격은 7310원. 만약 이 은행의 주가가 8310원이 된다면 16억3000만원의 이익을 얻게 된다. 지난해 한미은행장의 보수총액이 2억8000만원이던 것과 비교하면 하행장은 전임 행장보다 4배 정도의 연봉을 받는 셈이다. 한미은행 노조도 “위화감을 조성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면서도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라면 문제될 것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강정원 서울은행장의 연봉은 5억6000만원. 별도의 스톡옵션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유성 우리금융지주회사 부회장은 3억6000만원을 받는다.

    도기권 굿모닝증권 사장은 1999년 440만주의 굿모닝증권 주식을 주당 7085원에 살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한때 평가 차익이 300억원 대에 달했지만 현재 가치로 따지면 제로다. 주가가 행사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4000원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스카우트된 임원의 경우 수억원 대의 연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외국계 은행 출신 임원의 연봉이 행장보다 많다”면서 “외국계 기관에서 온 일부 임원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 데 대해 은행 내에서는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체적 분위기는 ‘많은 연봉이 문제될 것은 없다’는 쪽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경영성과다. 수십억원대 연봉을 받는다해도 이들이 경영을 잘해 회사에 이익을 준다면 공적자금을 투입할 일도, 무리한 구조조정으로 동료를 내보내야 하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은행권에도 ‘연봉 적게 받는 대신 부실대출을 해주고 커미션을 받는 경영인보다는 실력만큼 인정받는 외국 금융사 출신이 낫다’는 인식이 자리잡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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