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호주 시드니

절제의 미학이 가꿔낸 ‘아침의 도시’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5-04-08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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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드니가 아름다운 것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기 때문이다. 바다와 육지, 자연과 인공, 섬나라의 낭만과 대륙의 실용주의, 관광객의 흥청거림과 토박이의 여유, 마천루와 중세풍 건물들, 빌딩숲과 녹림이 어우러져 이 거대한 도시를 맛깔스런 삶터로 만들어낸다.
    • “무한천공에서 일출(日出)을 맞는 이들은 복되도다 그대들의 아침을 정결한 시드니 하버에서 맞으리니 3월의 신부(新婦)처럼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옷깃에 장미 한 송이 꽂아도 좋으리 시드니는 슬픈 질문을 하지 않는 도시 오늘 아침은, 몽땅 그대들의 것이다….”
    • -수잔 스탠포드의 ‘시드니’중에서
    호주 시인 수잔 스탠포드는 이렇듯 물감같은 시어(詩語)들을 흩뿌려 시드니를 그려놓고 방문객을 설레게 한다. 미항(美港)으로 향하는 마음은 다들 비슷한가 보다. 누군가는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도 “머리칼에 꽃 몇 송이 꽂는 것을 잊지 마세요…”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시드니는 더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챙 넓은 모자’에다 ‘장미’까지.

    시드니의 한낮 햇살은 겨울에도 강렬하다. 챙 넓은 모자가 없으면 맑디 맑은 물빛 하늘과 도시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하늘빛 바다 어름을 찾아보려다 이내 부신 눈을 잔뜩 찌푸려야 한다.

    시드니는 대담한 유혹자다. 자연미와 인공미가 표나지 않을 만큼 절묘하게 어우러져 밤낮없이 전방위로 여행자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러니 연인의 옷깃에 이슬 머금은 붉은 장미 한 송이라도 꽂혀있지 않다면 깜빡하는 사이에 연인조차 눈길에서 벗어날지 모른다.

    “여긴 왜 이렇게 잘 생겼어?”

    스탠포드의 시처럼 시드니는 아침의 도시다. 서울에서 저녁에 출발하는 시드니 직항편을 타고 밤을 꼬박 새워 남으로 남으로 날아가면 화장기 없이 풋풋한 시드니의 아침이 10시간의 비행기 여행에 지친 객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그래서 시드니 여행일정은 비행기 안에서 시작된다. ‘무한천공의 일출’과 함께 창문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새벽노을이 비행기 안을 온통 와인빛으로 물들이며 장관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시드니는 그런 아침부터 저녁까지 결코 슬픈 질문을 하지 않는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시드니를 처음 돌아보던 날, 동행한 제자에게 이렇게 털어놓더라고 한다.

    “그래, 내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이만한 도시는 없었어….”

    고은 시인이 시드니를 찾았을 때는 보다 직설적이었다.

    “씨펄, 억하심정이 생기누만. 여긴 왜 이렇게 잘 생겼어?”

    시드니는 호주의 6개 주 가운데 하나인 뉴 사우스 웨일스주의 주도(州都). 인구는 400만명으로 호주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그런데 해마다 인구보다 많은 400만∼500만명의 방문객이 시드니를 찾는다. 그 대부분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과 비즈니스맨들. 올림픽이 열렸던 지난해엔 방문객 수가 600만명을 넘었다. 방문객의 절반은 일본(31.5%)을 비롯한 아시아권 사람들이다. 나폴리, 리우 데 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히는 도시답게 시드니가 매년 관광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50억달러에 이른다. 호주의 대표적 수출품인 양모나 육류, 원유, 철광석 수출액보다 많은 액수다.

    여행객들의 ‘시드니 사랑’은 열렬하다. 1999년 미국의 세계적인 여행전문지 ‘콩드 나스트 트래블러’ 독자들은 5년 연속으로 시드니를 ‘세계 최고의 도시(World’s Best City)’로 선정했고, ‘트래블 앤 레저’지(誌)는 4년째 시드니를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여행지(World’s Best Value Destination)’로 꼽았다. 1998년에는 ‘콩드 나스트 트래블러’ 영국판 독자들도 시드니를 ‘최고의 해외 도시(Best Overseas City)’로 뽑았다. 같은 해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해리스 폴이 “비용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를 가장 방문하고 싶은가”를 물었더니 미국인들은 성과 연령에 상관없이 시드니를 첫손에 꼽았다.

    특히 눈여겨볼 만한 사실은 최근 수년간 시드니를 찾은 방문객 가운데 재(再)방문객이 시드니를 처음으로 방문한 사람보다 많았다는 것. 시드니를 다녀간 많은 여행객들이 시드니를 ‘다시 찾고 싶은 도시’로 가슴에 품으며 살아간다는 얘기다.

    조화와 공존의 도시

    시드니가 이렇듯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호주의 10대 관광명소 중 7개가 시드니 시내에 몰려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페라 하우스, 하버 브리지 같은 볼거리들이 여행객을 압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도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힘의 원천은 언뜻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조화에 있는 듯하다.

    시드니에는 바다와 육지, 자연의 선물과 인공의 흔적, 섬나라의 낭만 기질과 대륙적 실용주의, 관광객들의 흥청거림과 토박이들의 여유로움, 현대식 마천루와 빅토리아풍의 고색창연한 건물들, 즐비한 빌딩숲과 짙푸른 녹지, 갖가지 인종과 언어가 매끄럽게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그런 균형과 절제의 미학이 이 거대한 도시를 아기자기하고 맛깔스런 삶의 공간으로 다듬어 내는 것이다.

    시드니는 천혜의 자연미를 자랑한다. 남태평양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곳곳에 그림같은 만(灣)과 곶을 만들고 그 안으로는 깊은 강들이 흐른다. 굽이굽이 해안선을 따라가면 푸른 숲과 은빛 백사장, 투박하게 깎여나간 절벽들이 쉼없이 펼쳐진다. 이어 붙이면 200km가 넘는 해안에는 맨리 비치와 본다이 비치 등 37개의 비치가 흩어져 있는데, 대부분 중심가에서 대중교통편으로 30분 이내 거리에 있다.

    또한 중심가 바로 앞까지 대형 유람선이 들어와 정박할 수 있을 만큼 수심이 깊어 도심에도 남빛 바다의 정취가 물씬하다. 앞가슴이 눈부시게 하얀 갈매기들이 해안은 물론, 시내 쇼핑가와 공원, 노천식당 테이블까지 날아든다. 공원 벤치에서 샌드위치로 요기라도 할라치면 갈매기들이 사람 발께까지 총총 다가와 “나 좀 떼주지, 혼자 그걸 다 먹게?” 하듯 뾰로통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계절은 바뀌지만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해(겨울 평균기온이 12℃) 시드니의 숲은 아열대 식물의 푸르름이 사철 퇴색하지 않고, 새들의 지저귐도 잦아들지 않는다.

    그러나 시드니의 아름다움이 온전히 자연의 선물 덕분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며 자양분을 주고 받게끔 도시를 가꿔온 시민들의 관심과 노력이 깃들어 있다. 주민과 여행자 모두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드넓은 녹지, 쾌적한 공기, 세심하게 보존된 전통유산, 문화적 개방성, 편리한 교통, 확고한 치안 등 이 도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들은 대개 시민의 힘으로 일궈낸 것들이다.

    시드니 시내엔 왕립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을 비롯, 공원 등의 녹지 면적이 130만㎡에 달한다. 도심의 21%가 녹지 공간이다. 시 당국은 지난 4년간 1400여 그루의 가로수를 새로 심었다. 이로써 시내의 가로수는 5200그루로 늘어났는데, 시내 도로의 총연장이 75km쯤 되므로 시드니 거리에는 14.4m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셈이다.

    30만㎡의 부지에 4000여 종의 동·서양 식물들이 어깨를 기대며 자라고 있는 왕립식물원과 드넓은 잔디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는 더 도메인(The Domain),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을 만큼 수목이 우거진 하이드 파크같은 공원들이 고층건물이 밀집한 시내 중심상업지역(CBD·Central Business District)과 인접해 있는 것도 이채롭다. 그래서 점심시간 무렵이면 공원 곳곳의 벤치에서 한가로이 점심을 들거나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을 즐기는 회사원, 소풍 나온 가족, 풀밭에서 뒹구는 젊은 연인들이 평화로운 정경을 만들어 낸다.

    끝간 데 없는 물욕을 앞세웠다면 빌딩 수십 채를 짓고도 남았을 공간을 이렇듯 ‘돈 안 되는 땅’으로 내버려뒀기에 시드니는 바위투성이의 황량한 유배지에서 남반구 최대의 미항으로 탈바꿈하는 개발의 회오리 속에서도 건강한 ‘허파’를 간직했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미시즈 매쿼리스 포인트에서 해안선을 따라 오페라 하우스로 이어지는 팜 코브를 걷노라면 왼편으로는 왕립식물원의 무성한 녹림(綠林)이, 오른편으로는 색색의 요트와 유람선이 유유히 떠다니는 시드니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도열하듯 객을 맞는다.

    왕립식물원 입구의 푯말에 쓰여진 글귀도 눈길을 끌었다. ‘입장료 대인 8000원, 소인 5000원’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나무에 손대지 마시오’ 따위의 퉁명스런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교가 넘쳤다.

    “왕립식물원과 더 도메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잔디를 밟고 걸어보세요. 장미향을 맡고 나무들을 껴안아 보세요. 새들에게 말을 건네고 풀밭에서 피크닉을 즐기세요. 입장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곳을 보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으면 ‘식물원 친구들(Friends of The Gardens)’에 가입해 스폰서가 되실 수 있습니다….”

    왕립식물원 관계자는 “식물원의 명물로 자리잡은 ‘장미 정원’ ‘허브 정원’ ‘희귀·멸종위기 식물 정원’ 등이 ‘식물원 친구들’의 자금 지원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이들은 각종 식물관련 연구활동을 지원하고 방문객을 위한 설비를 구입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자세히 보니 식물원 풀밭에 설치된 벤치들에도 ‘식물원 친구들 기증’이라고 쓰인 작은 명판이 붙어 있었다.

    녹지면적이 넓고 전철, 페리 등 무공해 대중교통수단이 발달해 시드니는 400만명의 인구에다 그 인구만큼의 방문객이 다녀가는 대도시답지 않게 공기가 맑다. 1999년 기준으로 시드니의 오존농도와 이산화질소, 이산화황 등 대기중 오염물질 함유량은 유럽과 아시아지역의 어느 대도시보다 낮았다. 시드니에 머무는 5일 동안 비가 한 차례도 내리지 않았지만, 마지막 날 250m 높이의 AMP 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니 시 외곽은 물론,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100km나 떨어져 있는 블루 마운틴을 넘어 까마득한 지평선까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배를 타고 시드니 항으로 들어서면서 바라보면 시드니 시가는 고층빌딩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배에서 내려 도심으로 걸어 들어가면 빌딩 사이 사이에 중세풍의 나지막한 옛 건물들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인 역사가 200년밖에 되지 않는 호주에 왜 이런 구식 건물들이 많을까 의아스럽지만, 1788년 영국의 죄수 선단이 9개월의 기나긴 항해 끝에 호주대륙에 닿아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 시드니였음을 떠올리면 답은 쉽게 나온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라 현대 문명이 싹트기 전이었고, 더욱이 호주는 ‘불귀의 땅(Never-Never Land)’으로 불렸을 만큼 본국과 까마득히 떨어져 있었기에 시드니에 내던져진 유형수들은 거의 맨손으로 바위를 깎아 삶터를 만들어야 했다. 현대식 건물을 짓고 넓은 도로를 닦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었다.

    지키고 복원하는 개발

    지금은 이름난 관광지로 변모한 록스(The Rocks·바위투성이였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일대가 그 대표적인 지역이다. 호주 정착민들이 가장 먼저 개발한 록스에는 집과 상점, 병원, 군 막사, 은행 등이 들어서면서 항구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당시의 석조 창고와 오두막이 남아 있다. 록스는 19세기 이후 도시화와 슬럼화가 가속화되고 술집과 사창가가 늘어나면서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게다가 1900년에는 페스트가 창궐해 주민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당국은 수개월에 걸쳐 록스 일대의 건물을 불태우는 ‘대청소(Big clean-up)’를 감행했다.

    그후 도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하버 브리지를 비롯한 대형 구조물과 고층빌딩이 속속 들어섰다. 이에 따라 록스가 그나마 흔적만 남은 옛 모습마저 깡그리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자 급기야 주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주민들은 연일 가두시위를 벌이며 무분별한 개발을 성토했고 정부에 록스의 복원을 요구했다.

    마침내 주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록스는 ‘지키고 복원하는 개발’에 힘입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버 브리지 아래쪽에 줄지어 있던 양모창고들은 노천카페, 화랑, 기념품 상점 등으로 바뀌었지만, 건물 앞면은 손대지 않고 뒷부분만 개조했기 때문에 200년 전 ‘호주 첫 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호주 최초의 우체국이나 경찰서, 호텔, 바 등은 지금도 원래의 용도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새 건물을 지을 때도 앞면은 옛 건물의 외양을 따라야 하고, 벽돌 한 장도 마음대로 못 옮기게 할 만큼 규제가 까다롭다. 한 사람이 몸을 움츠리고 겨우 빠져나올 만큼 비좁은 개척시대의 골목도 그대로 보존한다.

    시드니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 중의 하나는 문화적 개방성이다. 이민을 기반으로 건국된 호주의 관문답게 시드니는 14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180여 개의 민족이 모여 사는 ‘민족과 문화의 용광로’다. 시드니 주민의 55%가 호주 밖에서 태어났다. 이민자 중에는 중국계가 14.6%로 가장 많고, 인도네시아 출신도 10.7%나 된다. 이민의 ‘원조’격인 영국계는 10%로 세 번째로 큰 이민자 그룹을 형성한다. 시드니 시민 다섯 명중 한 명은 광동어나 만다린 등의 중국어를 구사한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딕슨 스트리트 부근의 차이나타운, 리버풀 스트리트 주변의 리틀 스페인,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 옥스퍼드 스트리트, 레바논과 터키 음식점들이 늘어선 클리블랜드 스트리트 등이 제각기 고유한 정취를 뿜어낸다. 이민자들의 정체성은 교외지역에서 더욱 뚜렷하게 관찰된다. 라이하르트의 리틀 이탈리아, 아랍사원들이 들어선 오번, 코리아 타운을 형성해가고 있는 캠시, 베트남인들이 모여드는 뱅크스타운과 매릭빌 등지가 그런 곳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한 도시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데도 시드니에선 인종차별이나 민족간 갈등이 표면화되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그런 문화 차이를 보다 넓은 범주의 ‘시드니 문화’, 혹은 ‘호주 문화’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시드니 서부의 라캄바 초등학교에는 130여 개 소수민족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데, 학교측은 민속의상축제 등 출신국의 문화와 풍속을 알리는 다채로운 행사를 자주 열어 학생들의 융합을 시도한다. 차이나타운의 중국음식점에는 익숙한 솜씨로 젓가락을 놀려대는 백인 손님들이 수두룩하고, 대학가나 노천카페에선 데이트를 즐기는 백인-아시아인 커플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시드니를 처음 방문해 가이더 없이 돌아다녀도 이방인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고, 크게 불편한 것도 없었다. 피진 잉글리시(Pidgin English)에 익숙한 시민들은 낯선 동양인 여행자가 떠듬거리는 영어로 길을 물어도 끈기있게 경청한 다음 핵심 단어를 병렬하는 쉬운 영어로 친절하게 답해줬다. 공항의 세관 직원은 손에 쥔 여권 색깔만 보고서도 똑 부러지는 우리말로 “면세품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뉴 사우스 웨일스 주정부 산하 이민 헤리티지 센터의 브루스 로빈슨 이사장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호주인들의 주요한 생활신조다. 이는 우리에게 다양한 과실(果實)을 안겨준다. 언어능력이나 다양한 문화와 집단에 대한 이해력 같은 것이 그 예인데, 이런 것들은 무역이나 국제관계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다. 특히 ‘세계도시(world in one city)’로 변모한 시드니는 다문화주의 덕분에 다른 어느 도시보다 풍성한 사회적 보너스를 얻고 있다”고 말한다.

    올해 호주는 연방수립 10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호주 정부는 ‘연방수립 100주년 문학상(Centennial Federation Literature Awards)’을 제정했는데, 1980년대에 시드니로 이민 온 한국인 윤필립씨가 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윤시인은 시드니에서 영어로 시작(詩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시민권자는 아니다. 호주 문학을 총결산해 100년만에 처음으로,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시인에게 주는 상을 귀화하지 않은 외국 시인에게 안겨준 것도 그냥 지나쳐 볼 일이 아니다.

    시드니의 이런 문화적, 민족적 포용성의 배경을 짐작할 만한 몇가지 사연들이 있다.

    시드니 사람들은 스스로를 ‘시드니사이더(Sydneysider)’라고 부른다. ‘뉴요커’나 ‘파리지엔’과는 사뭇 어감이 다르다. ‘시드니사이더’는 주류집단에서 소외됐다는 의미의 ‘아웃사이더’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1788년 시드니에 상륙한 영국인들은 죄수와 물먹은 관리, 실패한 장사꾼 같은 이른바 ‘언더독(underdog)’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열패감에서 ‘시드니사이더’라는 자기 모멸적인 별칭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시드니로 유배된 죄수들 가운데 절반 가량은 노동운동가 부류였다. 당시 산업혁명이 시작됐던 영국에선 노동자 계층이 한창 부상하며 자본가와 맞서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이들의 요구 가운데 임금 인상이나 근로시간 단축 같은 것은 웬만큼 수용했지만,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며 지배계급에 도전해 ‘의식화’를 주도하는 이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정부와 자본가는 한 통속이 되어 이런 노동운동가들에게 20년, 30년의 장기형을 선고해 호주로 송출했다.

    이들은 ‘괘씸죄’ 때문에 형기를 마쳐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시드니로 향하는 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땅에 모든 인간이 평등한 노동자 천국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죄수들은 열심히 일해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들의 협력이 필요했던 정부 관리들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고 토지 소유를 허용해 미래를 개척할 수 있게 했다. 이렇듯 시드니에서 발아한 인류 평등주의(egalitarianism)는 그대로 호주의 건국이념이 됐고, 이 정신은 지금도 시드니사이더들의 가슴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윤필립 시인은 “시드니에서 혼자 택시를 탈 때는 앞좌석에 앉는 게 좋다”고 진반농반의 ‘조언’을 건넸다.

    “앞좌석에 앉으면 운전사가 친절하고 말도 잘 거는데, 뒷좌석에 앉으면 시큰둥한 표정으로 난폭운전을 한다고 한다. 이것도 시드니사이더들의 몸에 밴 평등주의 때문이다. 택시 운전사는 승객이 자기 옆에 앉으면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한다고 느끼지만, 뒷좌석에 앉으면 승객이 자신을 하인쯤으로 여긴다고 생각해 열을 받는다는 것이다.”

    죄의식과 생존철학

    ‘백호주의’라는 치욕의 역사 또한 시드니사이더들이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851년 호주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그 직전 미국의 골드 러시 때 재미를 못본 노다지꾼들과 백인 건달들이 호주로 대거 몰려들었다. 이때 수많은 중국인들이 들어와 금광 등에서 저임 노동자로 일하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수탈당하고 폭행당하고 살해됐다.

    그런데도 1901년 호주 연방 출범과 함께 정권을 잡은 노동당 정부는 중국인 등 아시아계 저임 노동자들이 호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협한다며 아시아계의 호주 이민을 차단하는 백호주의를 주창하기에 이른다. 호주는 70년도 넘게 백호주의를 고수하다가 국제사회와 호주 지식인들의 비난에 굴복, 1973년에야 이를 철폐했다.

    사실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 주민들은 호주 건국사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그들의 희생과 저임 노동에 힘입어 부국(富國)의 기반이 다져진 것이다. 오늘날 저렇듯 아름답게 바다 위에 걸려 있는 하버 브리지에도 많은 중국 노동자들의 희생이 숨어 있다. 시드니사이더, 그 중에서도 특히 백인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지난 역사에 대한 죄의식에서 다민족, 다문화 사회를 지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다 실용적인 이유도 있다. 호주는 아직도 축산업, 농업, 광업 등 1차 산업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그 주요 수출시장은 일본, 한국, 중국이다. 인구 2000만명이 채 안 되는 내수시장만으로는 먹고 살 길이 모자란다. 이 세 나라 사람들이 안겨주는 관광수입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다. 그러니 동아시아 3국이 호주의 생존권을 틀어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다민족, 다문화주의 외에 대안이 없는 것이다. 한 시드니 교민은 이렇게 말했다.

    “속으로는 30년 전처럼 자기들끼리 뭉쳐 살고 싶지만, 그런 속마음을 노출시켜선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영악하고 교활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정으로는 원치 않으면서도 다민족, 다문화주의라는 방향을 설정하고 모두 그 길로 나아가는 것, 이거야말로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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