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가전 ‘빅3’와 맞붙은 TV업계 작은 거인

(주)현우맥플러스 최형기 사장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11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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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우맥플러스는 알맹이가 단단한 중소기업이다. TV 한 품목으로 세계시장에 도전해 매출 500억원을 달성하는가 하면, 디지털제품으로 세계시장 석권을 꿈꾸고 있다. 디지털업계 ‘작은 거인’ (주)현우맥플러스와 최형기 사장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대개 설립 후 5년을 중소기업의 사활을 가름하는 시기로 본다. 5년 안에 탄탄하게 자리매김을 하면 생존 가능성이 있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생존한 기업은 10년 정도가 되면 조직력과 영업망이 어느 정도 갖춰져 업계에서도 인지도를 갖게 된다.

    올해로 회사 설립 10년째를 맞는 (주)현우맥플러스(HYUNWOO McPLUS) 역시 10년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은 기업이다. 그 동안 해외시장에 TV를 전량 수출해온 탓에 국내보다는 외국에 이름이 더 알려진 이 회사는 10년 세월을 거치며 괄목상대하게 성장했다. 창업당시 5명이던 직원은 250명으로 늘어났고, 5000만원이던 자본금은 2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무역의 날엔 ‘30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우는 회사 설립 후 매년 100% 이상의 성장을 기록했는데 이처럼 경이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앞선 기술력과 우수한 품질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디지털 시대에 ‘단순하고 쉽게’라는 모토를 내걸고 기술경영을 해온 최형기 사장(48)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투자하되 못하는 일은 잘하는 곳의 도움을 받자”는 경영원칙을 지켜왔다. 굳이 어렵고 힘든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 투자해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근거해 최사장은 회사가 안정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TV 한 품목만 생산해왔다.

    지난해까지 현우는 세계 40여 개국에 TV를 수출해 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800억원의 매출 목표를 세워놓았으며, 내년에는 코스닥에 등록할 계획이다. 그 동안 전량을 수출, 국내 판매를 전혀 하지 않다가 지난해 7월부터 국내 시판에 들어갔다. 국내 시장에 상품을 내놓지 않다 보니 회사 인지도가 낮은데다, 1999년부터 환율도 크게 올라 회사 운영상 균형 잡힌 판매정책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 여기에 지금 내수시장을 장악하지 않으면 동남아나 중국의 값싼 제품이 들어와 시장을 점령할 거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이유로 국내시장 진출을 결정하고 막상 시작하려고 보니 그 장벽이 상상외로 높았다. 내수시장의 80%를 가전 3사가 꽉 잡고 있는데다, TV는 다른 가전 제품보다 소비자들의 브랜드 선호가 강했다.

    내년에 코스닥 등록 계획



    이런 상황에 인지도도 없는 중소기업이 끼어들어 경쟁을 하겠다고 하니 주위에선 모두 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20여 개에 달하던 TV생산업체가 이들 가전 ‘빅3’의 과점체제로 대부분 문을 닫고 겨우 아남전자와 한국전자(해외시장에 OEM생산만 함) 두 업체만 남아 있으니 말리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최사장은 시도조차 않고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궁리 끝에 PB상품(Private Brand·유통업체가 기술력 있는 중소 제조업체와 손잡고 기획, 개발한 제품)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대신 제품은 가전 3사를 자극하지 않는 소형제품으로 하되, 저가(低價), 저(低)마진 전략을 펼친다는 것. 이 경우 대형할인점과 손잡았기 때문에 제품판매도 자동적으로 해결되고, 소형제품에 저가품이다 보니 가전 3사와 직접 부딪칠 일도 적다는 판단이었다.

    이렇게 전략을 세운 최사장은 직접 견본 TV를 들고 대형할인점들을 찾아 나섰다. 매장 담당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여러 할인점을 타진하던 끝에 신세계 이마트로부터 함께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이마트 측은 6개월에 걸쳐 품질시험과 시장성을 검토한 후에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계약석상에서 최사장은 두 가지를 요구했다. 현찰거래를 해줄 것과 무자료 거래를 하지 않을 것. 이는 그가 사업을 하며 철칙으로 삼는 조항이다. 이마트는 최사장의 요구조건을 수락했다.

    2000년 7월 현우는 이마트와 손을 잡고 PB상품 TV ‘시네마 플러스’를 내놓았다. 14, 20, 21인치 세 종류로 대기업 제품보다 20∼30% 쌌다. 이렇게 가격을 내릴 수 있었던 건 광고비가 전혀 들지 않은데다 대기업들처럼 중간 거래처 없이 소비자에게 직판하고, 여기에 제품의 기능도 단순화해 재료비를 낮췄기 때문이다.

    가전 3사는 기능의 단순화를 가리켜 “PB TV는 화면자동조정기능 등 첨단기능은 배제한 채 단순히 화면 재생 기능만 강조한 반쪽짜리 제품”이라며 맹공격했다. 이에 대해 최사장은 “TV는 거의 밤 에 보는데다 실내에서 보기 때문에 ‘화면자동조정기능’이 크게 필요치 않다. 괜히 복잡한 기능을 많이 넣어 가격을 올리는 것보다 꼭 필요한 기능만 넣어 저렴한 가격에 소비자들이 부담 없이 제품을 구입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단순화한 것이다. 절대 기술이 없어 안 만든 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대기업들의 공격에도 ‘시네마플러스’는 출시 8일 만에 1000여 대가 팔려나가는 개가를 올리고, 6개월 후에는 소형TV 시장에서 단일브랜드로 이마트 내 매출 1위의 히트상품이 되기도 했다.

    “광고도 전혀 하지 않고 제품만 매장에 조용히 가져다 놓은 상태라 예측불허였어요.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 우리도 놀랐어요. 이렇게 반응이 좋았던 것은 기존 제품보다 가격이 싼데다 디자인이 독특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특히 소비자들의 눈길을 끈 디자인은 스피커인데, 귀 모양을 본떠 스피커를 만든 후 그곳을 철망으로 스틸그릴 처리를 했는데 이 디자인으로 ‘시네마플러스’는 지난 1월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이 선정한 ‘2000년 BEST 10 디자인 상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네마플러스’의 성공에는 집 안에 TV를 한 대만 놓던 과거와 달리, 방마다 들여놓고 보는 생활 환경의 변화도 일조했다. 방에서 보는데 굳이 클 필요도 없고 여기에 값비싼 메이커보다는 값싼 제품이 더 나았다. 출시 1년이 돼가는 지금도 ‘시네마플러스’는 전국 33개 이마트 매장에서 한 달에 3000여 대가 팔려나간다.

    이처럼 현우는 내수시장 진입 과정에 제품의 브랜드 못지않게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철저한 차별화 전략과 감각적인 디자인, 그리고 가격파괴로 최사장은 내수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소비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현우는 지난 6월말 대기업들의 반발을 의식해 뒤로 미뤘던 29인치 일반 TV를 시장에 내놓았다. 뒤이어 29인치 완전평면TV도 선보일 예정이다.

    대기업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

    소형TV와 달리 29인치는 거실용이다. 거실용 대형TV는 그 집을 찾는 사람이 가장 먼저 눈여겨보는 가전제품. 따라서 최사장은 남의 이목을 의식하는 소비자들이 브랜드 인지도가 낮은 현우 제품을 외면하지 않을지 은근히 걱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평면 TV출시 때는 제품출시를 알리는 신문, 잡지광고를 고려중이다.

    이쯤 되면 그 동안 피해왔던 대기업들과의 한판 대결은 불가피할 것 같다. 현재 현우가 생산하는 제품은 TV와 TV 셋톱박스, 인터넷 셋톱박스, DVD, MP3, 핸즈프리 등. 최사장이 회사가 안정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TV 한 품목만 생산하겠다던 약속을 깨고 이 디지털 관련 제품들을 생산하게 된 것은, 전남 무안의 생산공장을 경북 김천으로 옮기면서 30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두게 될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무안에서 수출항인 부산까지 물류비용이 너무 많이 들자, 최사장은 지난해 4월 김천에 대지 8000평을 구입, 건평 3000평의 최첨단 생산공장을 지어 TV생산라인을 옮겼다. 이 과정에 생산직원 30명이 회사를 그만둬야 할 상황이 벌어지자, 최사장은 디지털 TV를 개발하면서 축적된 기술을 이용, 디지털 관련 제품을 만들기로 하고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 동안 회사를 믿고 열심히 일해온 사람들을 모른 체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현재 무안공장에서는 멀티미디어 사업본부를 두고 디지털 관련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 제품들엔 자사상표인 ‘imedia’를 부착,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 가동한 김천공장엔 영상사업본부를 두고 TV관련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곳에선 완제품(Complete Build-up), 반조립제품 (Semi-Knock-Down), 완전부품(Complete Knock-Down) 상태의 세 가지 형태 제품을 생산해 내고 있는데, 이는 수출국에 따라 각각 주문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이들 제품의 생산비율은 완제품 40%, 반제품 20%, 완전부품 40%인데 완제품 주문이 차츰 늘고 있다.

    최형기 사장을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도전의식과 끈기다. 매사에 말이 없고 진득하게 기다려 ‘왕건 형’으로 불리는 그가 감각적인 영상매체인 TV와 만난 것은 동국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대한전선 TV개발부 연구원으로 들어가면서 부터다. 한창 열정을 갖고 일하던 1983년 대한전선은 대우전자에 흡수됐다. 대우전자로 옮겨온 그는 영상연구소에서 계속 TV관련 연구를 했다. 당시 미국 시장에 TV를 수출하던 대우전자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반덤핑 정책으로 수출시장이 막히자, 중남미 시장개척에 나섰다. 이때 책임연구원이었던 최씨는 신입사원들을 데리고 시장개척에 나섰다. 멕시코, 콜롬비아, 파나마, 브라질 등 중남미 일대를 돌며 판로를 개척했다.

    한 번 출장을 가면 보통 한 달 넘게 걸렸고, 한꺼번에 여러 나라를 돌아 가방 속엔 항상 사계절 옷을 넣고 다녔다. 아침, 저녁 시차가 바뀌는 상황에도 일에 빠져 힘든 줄을 몰랐다.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 집안 일은 거의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사업에 귀한 자산이 되었다. 특히 외국 바이어들과의 교분은 현우의 성공에 결정적 요인이 됐다.

    최사장 등 대우전자의 중남미팀이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중남미 시장 전역에 진출하는 데 3∼4년이 걸렸다. 이들이 진출하기 전까지 이 시장은 일본 제품이 장악하고 있었고 삼성과 LG가 시장의 귀퉁이를 차지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 들어서면서 중남미 시장의 40%를 대우전자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시장을 잠식할 수 있었던 것은 수요자들의 요구를 세심하게 파악, 그 요구를 가능한 한 충족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브라질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은 완제품보다 반제품이나 부품형태로 수입하기를 원합니다. 이럴 경우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고, 관세도 적기 때문이죠. 당시 우리는 각 나라 바이어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하나 수용해주고 그들이 현지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도면이나 장비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판로가 넓어졌어요. 이렇게 반제품이나 부품 형태로 수출을 하면 적은 재료비에 원하는 추가 기능에 따라 값을 올릴 수 있어 완제품보다 마진율이 높아요. 그리고 부품이나 반제품의 경우 일단 계약이 맺어지면 그 제품규격에 맞게 공장 시스템을 바꿔야 하기 때문에 쉽게 거래처를 변경하지 못해 거래가 오래 유지되죠. 그런데 이런 계약관계를 맺기까지가 쉽지 않아요.”

    현지 생산성을 고려해 장비를 설계하고 가격도 적정선에서 조정해주며 다른 업체와 차별화된 영업 방법을 취하자 시간이 흐르면서 판매망은 늘어났다. 이렇게 시장이 확대되면서 대한전선에서 대우전자로 옮겨올 당시 30명이던 직원은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내부 조직이 커지면서 업무에 대한 의사 결정은 늦어졌다. 이 일에 남다른 열정과 재미를 느꼈던 최형기 사장은 더욱 새로운 일로 자유롭게 시장개척을 해보고 싶었지만 조직사회다 보니 제약이 많았다. 그러자 갑자기 회사에 다니기가 싫어졌다.

    마침내 ‘현우’ 간판을 올리다

    이런 생각이 들자 한 달 만에 그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오직 ‘마음껏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대책없이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대우전자 시절, 별것도 아닌제품으로 해외에서 돈을 버는 걸 보고는 굳이 회사에 몸담지 않아도 세상엔 돈 벌 일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을 해도 혼자 할 순 없다는 생각에 동료 직원들에게 슬며시 “내가 일을 시작하려는데 차제에 나와서 함께 해보자”며 의사 타진을 해보았다. 그러자 몇몇 직원들이 선선히 그러겠다고 희망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최사장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며 말렸다. 어머니만은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해보라”며 지지했다.

    1992년 1월 그의 나이 서른아홉에 여의도에 열 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현우맥플러스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사무실을 얻어놓고 그는 한 달간 중국 TV생산업체들을 돌아보며 시장조사를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가장 잘 아는 TV를 인건비가 싼 중국에서 생산해 중남미 시장에 팔기 위해서였다. 시장조사를 하고 돌아오자 과거 함께 일했던 직원 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고 현우에 합류했다.

    그 후 2∼3개월 사이에 3명의 동료가 들어왔다. 최사장까지 연구원 5명이 뭉치니 기술력에서 부족할 게 없었다. 여기에 최사장의 오랜 마케팅 능력까지 갖춰져 겁날 것이 없었다. 본격적인 회사가동을 위해 각자 1000만원씩 투자, 자본금 5000만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 제품을 개발해서 중국 생산 공장에 외주를 줘 수출하려던 계획은 자금이나 인력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 차후에 하기로 하고 다른 일을 찾았다.

    그때 (주)대우로부터 제품을 개발해 달라는 개발용역이 들어왔다. 그 동안 대우전자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던 (주)대우는, 대우전자가 독립해 나가면서 마케팅 채널과 인원은 있는데 팔 물건이 없자 현우와 손잡고 제품을 개발해 중국에서 생산, 수출할 계획을 세웠다. 자금력이 없던 현우로선 기술력을 이용할 수 있으니 크게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개발용역은 자금결제가 몇 개월 단위로 이루어져 아직은 규칙적인 수입원이 없는 현우로서는 회사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용역 서비스업이라 제조업보다 세율도 높고 정부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최사장은 개발한 제품의 일부를 중국공장에서 생산해 대우를 통해 수출하기로 했다. 중국공장엔 기술지원과 함께 그곳에서 생산되지 않는 부품을 직접 수출공급도 했다. 2년을 이렇게 하다보니 직접 제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모은 돈으로 공장부지를 물색했다. 싼 가격에 넓은 공간을 찾아 전남 함평까지 내려갔다. 부도로 경매에 부쳐진 공장을 직원 20명까지 함께 인수해 생산설비를 갖춘 후 바로 제품을 생산했다.

    처음엔 노래방에 들어가는 멀티비전을 생산했다. 그런데 물량이 점점 늘어나자 거래업체들이 “어음거래를 하자”, “무자료 거래를 하자”는 등의 제의를 해왔다. 돈을 벌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만큼 최사장은 모든 걸 정직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거래업체들의 요구가 집요해지자, 최사장은 매입·매출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수출로 방향을 돌리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현우가 내수시장을 공략하지 않았던 이유도 국내에선 투명한 거래를 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수출 시장으로는 먼저 최사장이 가장 잘 아는 중남미 시장을 주목했다. 처음엔 독자적으로 시장을 개척, 생산에서 마케팅까지 해나갔으나 적은 인원으로 이 모든 걸 해나가려다 보니 물건을 주고도 대금을 못 받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영업을 (주)대우에 맡겼다. 그리고 현우는 기술을 개발, 좋은 품질의 제품 생산만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최사장은 국내시장 진입에서도 이마트에 유통을 맡기고, AS는 대우전자에 맡겼다. 이것이 현우맥플러스가 지금까지 실패 없이 성장한 비결 중 하나다.

    이런 체제는 IMF사태 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IMF 이후 환율이 크게 올라 대우로부터 달러 결제를 받는데 환차손이 너무 컸다. 1997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 사이 환차손만 10억원에 달했다. 그런데다 이 무렵 대우도 여러 내부 문제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자 현우는 스스로 영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때부터 조금씩 자체 영업을 시작했다. 영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 동안 거래해왔던 바이어들이 생산업체가 현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생산공장도 직접 방문했던 터라 쉽게 거래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주로 기술영업을 했다. 반제품이나 완전부품 형태로 수출하는 거래업체에 기술진이 직접 나가 생산이 가능하도록 모든 기술과 장비를 지원해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제품을 만들어 현지에 가져가면 국내에선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생겼다.

    “멕시코시티, 콜롬비아, 보고타 등지는 해발 2000m가 넘는 고산지대여서 국내에선 발생하지 않던 기압과 관련된 문제, 공기 유압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음향 스피커가 찢어지는 등 예상밖의 문제가 많이 발생했어요. 브라질 상파울루 같은 항구 도시에선 명도·습도로 인한 문제가 많이 나타났고요. 이런 문제는 현지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만능인이 돼야 합니다. 이렇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며칠씩 매달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바이어들은 이전보다 더 우리를 믿게 되죠. 성실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걸 보고 더 신뢰감을 갖게 된 거죠. 문제가 오히려 돈독한 거래관계를 맺는 데에 도움이 되었어요. 중요한 건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제대로 빨리 해결해주느냐입니다.”

    틈새시장 공략으로 차별화

    이렇게 최선을 다해 기술영업을 하다 보니 3∼4년이 지난 뒤로는 소문을 들은 바이어들이 직접 찾아와 거래를 요구했다. 이런 적극적인 기술영업으로 중남미, 동남아,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 호주, 일본 등 세계 40여 나라에 수출 문을 열었다. 올해 미국과 유럽시장에 진출하면 세계 전지역에 수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9년이 걸렸다. 제품은 모두 수입국의 주문자 상표를 달고 나가지만 현우 자체기술로 생산하고 있다. 현재 현우는 한 나라에서도 여러 바이어들과 거래하고 있다. 대기업과 달리 이런 거래가 가능한 것은, 중소기업은 각 바이어들의 주문에 따른 ‘다품종 소량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대기업이 할 수 없는 틈새시장을 이용한 것이다.

    올해 초 이 회사는 호주와 올 연말까지 TV셋톱박스 12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톰슨, 노키아 등 내로라하는 세계적 전자회사들도 퇴짜 맞고 돌아간 곳과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브라질, 필리핀, 남아공에서 현우의 인터넷 셋톱박스가 인기리에 팔려나가고 있다. 앞으로 현우는 TV뿐 아니라, 디지털 관련 제품으로도 수출 문을 열어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현재 이 회사는 차세대 제품 생산을 위해 외부 연구기관과 손잡고 기술개발을 하고 있다. 제품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있는 디지털TV는 올 9월부터 시험방송에 들어가는 국내 디지털 방송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그에 맞춰 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미국의 호텔텍, 루넷과 함께 호텔정보화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국내를 비롯, 동남아 호텔의 70%와 계약이 성사된 이 사업에 현우는 모니터 겸용 TV를 만들어 납품하기로 했다. 중남미를 비롯, 미국, 유럽 시장은 호텔텍과 현우가 단독으로 손잡고 이 사업을 추진하기로 이미 계약을 끝냈다. 이제 현우맥플러스는 본격적인 제2도약기에 들어선 셈이다.

    “끝이 없어 이 일이 즐겁다”는 최사장은 그 동안 기술개발과 제품생산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직원이 느는 등 조직이 커지면서 관리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효율적인 조직관리를 위해서는 중간간부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최사장은 올해부터 10년 이상 된 팀장급 이상 임원들에겐 안식년을 주어 1년간 어학연수나 경영자과정 연수를 보낼 계획이다. 조직이 공룡화하면 망한다고 생각하는 최사장은 조직이 더 커지면 분야별로 전문성을 살릴 수 있도록 분사할 계획이다. 작지만 경쟁력 있는 세계적인 기업, 그가 꿈꾸는 기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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