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한나라당 색깔론은 新나치스를 닮았다

격돌논쟁

  • 황태연 <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입력2005-03-22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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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명천지 21세기에 사회주의의 망령이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다. 군사정부 시절 연례행사처럼 벌어졌던 국기(國基)논쟁이 반(反)독재 민주화세력에 좌익의 색깔을 덧칠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사회주의 논쟁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흔들림없이 견지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에 사회주의 딱지를 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황당한 일이다. 그것도 수십 년 동안 관치경제와 권위주의적 대중동원을 일삼던 구(舊)여권의 적자(嫡子)인 한나라당의 정책위의장이 김대중 정부의 각종 정책을 낡아빠진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데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여러 차례 밝혔듯이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의 병행발전을 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이것이 낡은 사회주의 이념과는 명확한 대척점에 서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이 현정부의 정책을 사회주의라고 혹세무민하는 것은 그들이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이념과 정책을 크게 잘못 알고 있거나 또는 알고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알고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이는 정부정책을 발목 잡기 위해 명명백백한 사실마저 호도하는 파렴치한 정치공세에 불과하다.

    필자는 한나라당이 책임 있는 공당으로서 무책임한 정치공세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작금의 사회주의 논쟁은 한나라당의 무식의 소치로 간주한다. 한나라당이 올바로 인식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지면을 빌려 현정부의 국정철학과 국정운영 방향을 개관하고자 한다.

    역사상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권을 인수한 국민의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관치경제와 정경유착·부정부패를 청산하고 IMF국난을 극복하며 시장경제를 확립하려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철학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경제개혁과 구조조정 과정에 불가피하게 중소기업의 대량부도와 대량실업이 발생했고 이에 더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소득양극화가 경제회생 추세에서도 가속화되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의 국정철학이 만들어낸 결함을 메우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광복절을 기해 중산층의 생활기반 강화와 서민의 중산층화를 겨냥한 일련의 ‘생산적 복지’ 이념을 천명했다. 이로써 국민의 정부의 국정철학은 세 원리가 3각축을 이루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의 병행발전’으로 확장되었다.

    민주주의는 시장에 대한 정치권력의 자의적 간섭, 정경유착, 부정부패 등 시장질서를 왜곡하는 행위를 척결함으로써 시장경제의 발전을 돕는다. 또 시장경제는 국가와 정치·사회적 권력 및 각종 정치경제적 독점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자유경쟁을 보장한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원리적 공통성, 상호지원, 상호보완 등 다각적인 관점에서 불가분의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상호보완 관계는 생산적 복지제도 없이 오래 지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왜곡과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튼튼한 생산적 복지제도만이 분배적 정의를 구현하여 중산층을 확대하고 민주적 시민의식을 강화하는 한편, 인적 자본의 지속적인 개발을 통해 고도의 리스크를 산출하며 혁신을 거듭하는 시장경제에 적절한 인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고 최대 다수의 시민에게 시장참여의 통로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역으로 민주주의만이 생산적 복지를 뒷받침해 주는 평등과 정의 이념을 제대로 지켜줄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는 인간의 기본을 시민적 기본권과 정치적 기본권에서 만인의 인간다운 생활을 소원(訴願)할 수 있는 개인의 법적 권리로 보장하는 ‘사회적 기본권’으로 확대하는 길을 밟아왔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역사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제제도로 입증된 시장경제만이 생산적 복지 시정(施政)에 투입되는 재원을 가장 큰 폭으로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는 마치 하나의 ‘체계’의 ‘하부체계들(subsystems)’인 것처럼 서로 ‘환경’으로 활용하는 상호환류(feedback)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 상호환류 관계에 있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의 병행발전 이념이 바로 국민의 정부의 국정철학이자 국정개혁의 기본 틀이다. 이제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국민의 정부가 추구하는 민주주의 이념은 오늘날 세 가지 방향을 요구한다. 민주화운동에서 추구되어 온 기존 민주이념의 완전한 구현과 새로운 민주제도인 참여민주주의의 도입 그리고 민주주의의 근원적 평화지향성에서 요청되는 인권·평화·세계주의(cosmopolitanism) 등 인류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참여민주주의의 과제는 한층 명확한 설명을 요한다. 근대 민주국가의 원리인 대의민주주의는 그 간접성으로 인해 국민과 정부의 거리를 넓혀 국민을 정치적으로 소외하는 원리적 폐단을 안고 있다. 이 위기에 대처하는 바른 길은 국민이 권력에 좀더 가까이 가게 만들고 정부를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참여민주주의 원칙의 도입이다.

    참여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핵심과제는 말단 행정과 고위 정책결정 과정을 포함하는 전부문에서 ‘시민사회를 국정의 동반자’로 설정하고 민관협력의 새 틀을 모색하여 민주적 정통성을 추가로 강화한 ‘새로운 민주국가(new democratic state)’의 발전이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합리적 요구를 국정에 반영하는 것은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내용을 확장하려는 현정부의 국정철학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이를 두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이니 “시민단체를 정권의 홍위병으로 활용한다”는 식의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과거 군사정권의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시민사회의 국정참여를 원천적으로 부인하고 민간단체는 단지 정부정책의 홍보나 담당하는 관변단체로 활용하는 데 너무도 익숙해 있었던 탓인 듯하다.

    또 국민의 정부의 민주주의는 인권·평화·세계주의를 한반도 전체와 세계를 향해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것의 제1과제는 바로 대북(對北) 포용정책이다.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을 ‘적이면서 동포’라는 이중적 본성을 가진 실체로 보는 관점을 전제로 깔고 있다. 그러나 포용정책은 화해·협력정책을 통해 점진적으로 적대관계를 완화하여 북한의 이중적 본성 가운데 ‘적성(敵性; enemy character)’을 약화해 나가는 기본지향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북한이 단지 ‘적국’일 뿐이라면 그들과의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은 무의미하며 이것은 일반적인 남한 내 극우 냉전주의자들이 취해온 태도다. 반대로 북한이 순수히 ‘동포’로서의 성격만 가지고 있다면, 튼튼한 안보와 전쟁방지 노력마저 포기하고 우리는 북한에 대해 희생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남한 내 감상적 통일론자들이 취하는 또 다른 극단의 태도다. 그러나 ‘적’과 ‘동포’의 이중적 속성을 가진 북한에 대해 양극단의 어느 쪽으로 치우치든 이는 현실적으로 올바른 자세가 아니며, 오히려 햇볕정책이야말로 ‘적대적 형제’에 대한 가장 현실적 접근자세다.

    이러한 햇볕정책을 한나라당은 시종일관 ‘대북 퍼주기’와 ‘안보 내주기’로 왜곡하면서 소모적인 대북대결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이는 적이면서 동포라는 북한의 이중적 실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 결여된 채 과거 냉전시대의 대적(對敵)관점에만 집착한 전쟁편집증에 불과하다.

    한나라당의 극단적 사고

    최근 논란의 핵심에는 정부가 추구하는 시장경제 이념에 대한 공방도 자리잡고 있다. 정부의 시장경제 노선을 일각에서는 ‘신(新)관치경제’로 비판하고 다른 일각에서는 정반대로 ‘신자유주의’로 몰아 붙여 왔다.

    이런 상반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시장철학에 대한 철저한 탐구가 필요하다. 한국적 상황에서 실천적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시장철학은 우리의 시각에서 창조적으로 재구성된 한국 특유의 시장철학이어야 할 것이다. 세계의 경험과 한국적 현실을 동시에 중시하는 올바른 한국적 시장철학은 무엇보다 먼저 헌법을 고려해야 한다. 헌법에 명시된 시장경제 원리는 우리에 가장 합당한 노선을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정책과 관련된 모든 정치적·이론적 논란을 초월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제119조 1항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자유시장 이념을 기본원리로 선언하는 조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경제구조의 변화무쌍한 변동과 왜곡에 대하여 1항의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기” 위해 자유시장질서를 수호하려는 국가의 규제 및 조정권한, 그리고 국가개입의 목적과 범위를 명문화한 것이다.

    독일헌법과 친화적인 이 일련의 헌법조항에 명시된 경제질서 및 운영과 관련된 내용들은 국가가 시장을 대체하는 사회주의도 아니고, 국가의 모든 간섭과 규제의 철폐를 주장하며 독과점의 형성과 경제력 남용을 방관하는 신자유주의도 아니다.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원칙으로 하여 시장질서 유지를 위한 국가의 규제와 조정, 즉 ‘질서정책’을 중시하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학파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에 가깝다.

    오이켄을 중심으로 한 프라이부르크 학파의 질서자유주의는 ‘경기변동’ 또는 경제 흐름에 대한 국가의 간섭정책을 위험하게 보고 대신 경쟁질서를 형성, 유지하는 질서정책을 주장하는 점에서 케인스주의와 구별된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규제와 개입의 법치성(法治性)과 ‘시장합치성’을 강조한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은 ‘시장합치적이지 않은’ 간섭을 원칙적으로 잘못된 개입으로 간주한다.

    질서자유주의는 또 신자유주의와도 대립한다. 신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경쟁을 초월하는 소수의 거대기업으로 구성되는, 결국 ‘시장 없는’ 독점경제를 용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독점경제를 대변하는 셈이다. 그러나 오이켄은, 국가는 자신의 임무를 시장의 ‘일반적 조건’의 창출에 국한해서는 안되고 시장불균형을 방지하는 단호한 질서 정책을 기본적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는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시장질서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독점체의 권력남용과 집단이기주의로부터 시장질서를 보호하는 것’도 중시한다.

    그러나 오이켄 이론의 문제점은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이해와 처방에서 권위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국가의 과잉개입이 벌어지는 원인을 경제적 집단이기주의의 강제로 보고, 다시 집단이기주의의 영향력이 늘어난 원인을 민주화로 규정한다.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는 전투적 집단이기주의의 직접적인 원인을 ‘민주화’로 보기 때문에 시장논리를 침해할 수 있는 ‘강한 국가’를 주장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정부의 시장경제 철학은 오이켄의 권위주의적 요소를 극복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의 질서자유주의와 친화적이다. 그는 오이켄처럼 집단이기주의의 발호와 민주화를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본인권과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집단이기주의를 이기려는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그의 시장철학은 ‘민주적 질서자유주의’로 불릴 수 있다.

    에르하르트의 경제개혁 기본원칙은 외부로부터 시장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이익집단간의 권력투쟁을 시장 내부의 생산적 경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는 경쟁원칙과 경제적 기본권을 유린하는 집단이기주의에 대해 원칙적으로 경제적 기본권을 단호히 승인하는 ‘민주적 국민여론’에 의거하여 정부의 엄정한 민주원칙과 민주주의를 강화해 대처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국민여론을 중시한다는 말은 지역감정이나 저간의 사회주의 망령 같은 유언비어, 흑색선전과 불공정보도에서 유래하는 속론(俗論)들까지 다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다. 합리적 논거에 바탕을 둔 공개토론과 쟁론이 보장된 공론장(公論場)에서 형성되는 ‘여론(public opinions)’은 어디까지나 음지의 뇌동심리(雷同心理)로 형성되는 ‘속론(popular opinions)’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전후 독일의 경제장관과 수상을 지낸 에르하르트에 따르면 경쟁을 저해할 위험을 질서정책으로 제거해 자유경쟁의 유지를 보장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사회질서에 기초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다. 여기서 공언되는 원칙은 개인적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권력을 어떤 개인과 집단에게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만인을 위한 복지’와 ‘경쟁을 통한 복지’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서 불가분적인 것이다.

    민주주의를 디딤돌로 삼아 시장경제를 확립하려는 국민의 정부의 경제개혁은 우리 헌법에 녹아든 이와같은 에르하르트의 민주적 질서자유주의 정신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간 정부가 주도해온 공공개혁, 재벌개혁, 금융개혁, 노동개혁등 4대 경제개혁을 통한 시장경제의 창출, 유지정책과 단계적 시장개방 및 이를 위한 투자환경의 개선작업, 벤처·중소기업육성정책 등은 헌법에 합치하고 또 헌법에 반영된 질서자유주의적 요소들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결국 현정부의 시장철학은 한편으로 사회주의, 케인스주의, 관치경제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분명한 대립성을 보이는 중용 노선이다. 질서자유주의는 모든 국가규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장질서 보호를 위한 규제’를 새로 도입하고 ‘시장질서를 저해하는 규제’를 철폐하는 방향을 취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한나라당이 국민의 정부의 경제정책을 사회주의적·포퓰리즘적 정책으로 매도하는 것은 우리 헌법과 질서자유주의의 시장경제원리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거 관치경제와 정경유착의 그릇된 국가개입에 능란했던 한나라당의 ‘사회주의’ 비난은 더 더욱 몰염치한 짓이다.

    정부의 생산적 복지정책은 빈곤과 궁핍화에 직면한 중산층과 서민에게 단순히 금전적으로 베푸는 과거 사회주의 정당의 시혜적인 복지정책에 반대하고, 직업·전직(轉職)훈련과 교육기회의 제공 및 고용창출 정책을 강화하여 스스로 노력해 일자리를 획득하고 소득 증대를 바탕으로 인간다운 생활과 직업적 성공을 달성하도록 지원하는 인간개발 중심의 복지정책을 말한다.

    21세기에 새롭게 대두된 복지정책은 전통적 사회주의의 소극적·시혜적·사후적·금전적 비버리지 복지이념과 신보수주의의 최소주의 복지이념에서 벗어나 ‘적극적 복지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복지정책의 기본방향은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넘어 세계화와 지식기반 사회의 각종 리스크에 맞설 수 있도록 ‘모든 국민’에게 ‘일로 통하는 복지(welfare to work)’를 적극 제공하는 것이다.

    단순히 시장경제에서 패배한 자활능력 없는 자들과 실업자들을 돌보는 ‘수용시설’이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도전정신을 발휘, 성공하도록 뒷받침해 주는 ‘성공의 디딤돌’로서의 적극적 복지인 것이다. 이 적극적 복지정책의 수단은 인력개발, 사회개발, 사회 전분야(경제와 시민사회)에서의 고용창출을 위해 국가가 모든 인적 자원의 완전한 생산적 활용의 관점에서 복지예산을 투입하는 일종의 ‘사회투자(social investment)’다.

    이에 기초하여 국민의 정부가 내세우는 생산적 복지는 세 종류의 복지를 포괄한다. 우선 좁은 의미의 생산적 복지인 인간개발 및 사회투자 중심의 복지정책을 중심으로 하면서 동시에 시혜적인 기초생활보장도 생산적 복지의 ‘전제’로 간주한다. 여기에 더하여 국민의 정부는 ‘시혜성’과 ‘생산성’이 중복된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보건·문화복지정책도 지식·정보·문화가 주요 생산자원이 된 지식기반사회에서 생산적 복지의 일부로 설정했다.

    이러한 생산적 복지 철학에 따라 국민의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입법통과시켜 시행하고 있으며 국민연금·의료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 등 4대 보험제도의 내실화 및 확대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했으며 다양한 사회복지서비스와 취약계층 자활지원을 확충함으로써 국민기본생활보장제도를 더욱 발전시켰다. 아울러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인력개발과 고용창출, 취업알선, 생산활동 참여기회의 확대를 통한 생산적 소득창출 및 향상에 주력하고 있으며 고소득층·중산층·서민 의 계층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적 국민복지 성격의 보건·문화복지 기반 구축에도 힘쓰고 있다.

    따라서 국가구성원에게 복지기본선을 보장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생산적 복지정책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10조)는 우리 헌법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당한 것이다.

    장님이 된 한나라당

    이와같은 생산적 복지정책을 ‘낡은 사회주의’ 정책으로 매도하는 한나라당은 분명 장님이거나 색맹 사회주의자들이다. 하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애초부터 ‘가진 자의 복지’에 길들어 우리 헌법의 기본이념을 보지 못할 정도로 장님이 된 한나라당으로서는 취약계층에 대한 기초생활보장과 중산층·서민의 일하는 복지를 위한 인간개발정책 등 현정부의 생산적 복지정책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볼 만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벌어진 한나라당의 색깔공세는 인식의 빈곤과 정책의 혼란에서 비롯된 듯하다. 국민여론에 귀기울이면서 인내와 관용을 통해 시민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정도(正道)의 정치에 대해 대중영합 정치라는 라벨을 붙이는가 하면, 법과 원칙에 따른 성역 없는 법치에 대해서도 권위주의적 밀어붙이기와 비판세력 길들이기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중산층과 서민의 질 높은 삶을 구현하고자 하는 민생챙기기에 대해서도 시장경제에 역행하는 ‘인기몰이식 퍼주기’라고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요구가 최대한 국정에 반영되는 것을 욕하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탄압이라고 비난하며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정책에 대해 사회주의라고 매도한다면 도대체 한나라당의 국정철학과 국정운영 원칙은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과 국정방향에 무지한 나머지 정치적 삼원색도 구별하지 못하는 한나라당의 색맹증상은 다른 세력을 다 ‘빨갱이’로 모는 일본 극우파나 독일 신(新)나치스의 색깔론을 꼭 빼닮았다. 한나라당의 좌충우돌식 혹세무민은 우리 헌법의 기본이념마저 정면으로 모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정책은 헌법의 경제·복지이념에 비해 미흡하면 미흡했지 이것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난 것이 없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합헌적 정부정책들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몬다면 한나라당도 사회주의 정당일 것이다.

    더욱 실소케 하는 것은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로 몰아붙이는 현정부의 경제정책을 한나라당이 반대로 ‘사회주의’로 매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반된 비방은 제각기 자기 노선의 극단성을 폭로하는 것인 동시에 정부가 합헌적인 ‘중도개혁주의’ 노선에 확고히 서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루빨리 한나라당이 균형 잡힌 인식을 되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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