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서양사에서 본 左와 右, 상극·상생의 파노라마

  • 안병직 <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

    입력2005-03-22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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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주의의 몰락은 좌익 일반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좌익운동의 몰락을 의미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좌익뿐 아니라 우익도 심각한 위기에 당면한 적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좌익은 무엇이고, 우익은 무엇인가. 상호 대립적이면서 동시에 한 쌍을 이루는 이 두 개념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용어의 역사적 연원을 살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좌익과 우익의 구분이 처음 나타난 것은 프랑스대혁명 시기로 알려져 있다. 우선 1789년 봄 프랑스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삼부회가 소집되었을 때, 특권 신분인 제1신분의 성직자와 제2신분 귀족 대표들은 국왕의 오른쪽에, 나머지 제3신분인 평민 대표들은 왼쪽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정치적 성향이 다른 세력들이 좌우의 공간 개념을 통해 상호 구분되는 현상은 혁명의 본격적인 진행과정에 확립되었다. 절대 왕권에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촉발시키고 마침내 구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국민의회에서는 구체제의 신분적 특권에 집착하는 ‘특권파’가 의회장의 중앙 연단을 마주보고 우측에, 혁명적인 부르주아로 구성된 ‘애국파’가 좌측에 앉았다. 그리고 국민의회에서 제정된 헌법에 따라 1791년 가을에 선출된 입법의회에서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페이양파’와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지롱드파’가 좌·우익으로 갈라졌다. 마지막으로 혁명이 과격해지면서 이듬해 가을에 소집된 국민공회에서는 입법의회에서 좌익에 속하였던 ‘지롱드파’가 온건세력으로서 우익을,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파’가 급진세력으로서 좌익을 구성하였다.

    보수적이거나 혁명의 진행에 소극적이고 온건한 세력은 우익으로, 상대적으로 급진적이고 과격한 세력은 좌익으로 나누는 것이 혁명기에 하나의 관행이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기에 확립된 좌·우파 정치 세력의 구분은 이후 유럽 정치에서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예를 들면 1848년 봄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프랑크푸르트에 국민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중앙 의장석의 오른쪽에는 혁명에 부정적인 보수세력이, 왼쪽에는 공화국 체제를 지향하는 급진적인 민주주의 세력이, 가운데에는 온건한 자유주의 세력이 자리잡았다. 물론 19세기에 좌익 혹은 우익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좌·우로 구분해 지칭할 수 있는 상호 대립적인 정치세력의 존재는 어디서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접어들어 좌익과 우익은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를, 때로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정치는 물론이거니와 일상 용어로 자리잡았다. 실로 ‘좌·우익’은 갈등으로 점철된 정치세계를 분할하는 여러 이데올로기와 운동 사이의 대립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하는 개념 쌍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평범한 공간적인 메타포가 프랑스대혁명 이래 2세기가 넘도록 정치세계를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나누는 데 사용되어 왔지만, 좌익과 우익이라는 범주가 의미론상으로 명확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은 실재론이나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어떤 단일하고 고정되었으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정치적 이념체계나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좌우 개념의 태동

    좌익과 우익은 특정 정치세력의 고유한 정치적 속성을 표현하는 용어이기보다는 단지 정치공간 내의 위상을 자리매김하는 것일 뿐이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표현은 그것들이 상호 대립항이라는 점 외에, 각각의 내용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어떤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다. 좌익은 우익에 의해 규정되고, 우익은 좌익을 통해 그 의미를 가질 뿐이다.

    서양의 정치 발전에서 좌익과 우익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상이한 성격을 띠었다. 유럽의 경우 19세기를 통해 좌익의 중심은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운동에서 민주주의 운동으로 그리고 다시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동했다. 19세기의 전통적인 우익과 20세기 후반에 대두한 새로운 우익세력은 종교에 대한 태도나 사회와 경제문제를 보는 관점에서 판이하다. 우익의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종교와 결부되고, 공동체의 유기체적 성격을 강조하였으며,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권력의 가부장적인 역할을 기대했다. 반면 새로운 우익은 세속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는 철저한 시장경제의 옹호자들이다.

    민족주의는 좌·우익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민족주의는 19세기 전반에는 좌파의 이데올로기였으나, 19세기 후반에는 우파의 이데올로기로 바뀌었다. 1848년 혁명기까지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이었으나, 19세기 말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슬로건으로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선동한 것은 비민주적인 보수세력이었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중엽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영국 노동계급의 차티스트 운동을 언급할 수 있다. 선거권을 제한하려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비하면, 차티스트 운동은 두말할 나위 없이 좌파운동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참정권을 내건 동시대의 페미니즘 운동에 비하면 남성에만 국한한 성 차별적인 이 운동은 결코 ‘좌파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좌·우익의 위상이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라 하더라도, 좌익과 우익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좌익과 우익의 정치적 속성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호 대립된 두 세력이 전혀 차별성을 가질 수 없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좌익과 우익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정치집단은 달라졌지만,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와 이상에는 보편적인 요소가 존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좌익 혹은 우익세력의 정치이념과 행동에는 일정한 경향성이 내재되었다고 보고, 단순한 공간적 비유를 넘어 의미론적으로 좌익·우익을 구분하려고 시도해왔다.

    통상 좌익과 우익의 공간적 메타포는 다른 무엇보다 전통과 혁신, 혹은 보수와 진보의 시간적인 메타포에 상응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우익은 전통을 중시하고 변화를 기피하며 현상유지를 지향하는 보수세력인 반면, 좌익은 전통과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세력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 세력이 좌파 정치세력을 구성하였고, 이들은 주로 기성의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는 편에 섰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다 해도 우익을 보수세력으로, 보수세력은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으로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선 우익과 보수세력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극단적인 우익세력이라 할 수 있는 파시스트의 경우가 그러하다. 보수세력은 파시스트 세력을 지지하고, 파시스트 세력은 보수세력과 연합했지만, 둘은 결코 동일한 세력이 아니었다. 나치스는 보수주의자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권을 획득했지만, 집권 후에는 보수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나치스의 통치는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나치스의 집권이 기존 사회질서에 끼친 변화는 ‘사회혁명’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우익과 보수세력을 동일시하더라도, 보수세력을 전통과 현상유지에만 집착하는 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면적인 파악이다. 보수세력이 대체로 변화에 소극적이었음은 사실이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변화에 적극적이었고 변혁을 주도했던 역사적 사례도 드물지 않다. 1867년 영국에서 선거법 개정을 통해 투표권을 도시 노동자에게까지 확대한 것은 디즈레일리가 이끄는 보수당이었다. 아울러 19세기 후반 독일을 통일하고 보통선거권제를 도입한 것은 ‘백색 혁명가’로 일컬어지는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였다.

    이른바 ‘보수혁명론자’로 지칭되는 일단의 지식인 집단의 존재와 활동은 바이마르 시대 독일 우익 정치의 특징적 양상 가운데 하나다. 이들 보수혁명론자들은 전통적 보수주의자와는 달리 근대 기술문명에 매료되었고, 근대화를 통해 보수주의의 중흥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치즘과도 맥이 닿았던 보수혁명의 이데올로기는 독일에 국한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소렐, 이탈리아의 파레토와 크로체도 혁명적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좌파의 자유 vs 우파의 평등

    보수와 진보 외에도 좌익과 우익을 구분하는 잣대는 여러 가지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성(聖)과 속(俗), 즉 종교와 정치의 대립으로 보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기준을 제시하는 주장에 따르면, 도덕과 윤리, 종교 등 비정치적 영역은 우파의 영역이었고, 정치는 좌파가 주도하는 영역이었다. 그리하여 좌파의 속성은 종교적으로는 이신론(理神論)이나 무신론 등 부정적인 요소와, 정치적으로는 정의, 창의성, 미래 등 긍정적인 요소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역사적인 사례로 보면 적절한 경우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즉 19세기 프랑스에서 우파 정치세력은 가톨릭 교회와 긴밀하게 결합했지만, 독일의 가톨릭세력은 정치적으로 우파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종교는 보수세력에게 도덕과 윤리의 원천이고, 법과 정치제도의 토대로서 인간생활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익은 종교적이고, 좌익은 비종교적이거나 무신론적이라는 인식은 실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다양성과 복합성, 종교와 정치가 연결되는 복잡한 방식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다.

    일반적으로 평등 이념을 추구한다는 좌파 가운데는 바로 종교로부터 그 이념을 도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7세기 영국혁명기의 급진적 정치세력인 수평파, 특히 ‘진정한 수평파’로 자처하는 윈스턴리와 그의 추종자로 이뤄진 ‘디거스(Diggers)’는 가장 전형적인 예다. 또 1960년대 이후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중남미의 급진 좌익운동 역시 좌파가 비종교적이고 무신론적이라는 주장과는 대치되는 사례다.

    종교를 기준으로 좌·우를 나누는 것이 부적절하기는 우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흄이나 파레토는 보수주의자였지만, 제도화된 전통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어떤 믿음도 갖지 않았다. 더구나 오늘날의 소위 ‘신우익’ 세력은 전통적 우익과는 달리 대부분 세속화되었다. 우익의 사회적 기반으로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도 그리 크지 않다.

    좌·우익을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으로 흔히 자유와 평등에 대한 견해를 든다. 우익은 평등이 아니라 자유를 추구하고, 좌익은 자유보다는 평등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평등을 좌익운동의 보편적 원리와 특징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매우 일반적이며, 역사적으로도 수긍할 만하다. 물론 평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대해서는 좌익 집단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았다. 유토피아적이고 극단주의적인 이상에서부터, 능력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고 평등을 결과가 아닌 기회의 측면에 국한하려는 경향에 이르기까지, 평등에 대한 관념에는 큰 편차가 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인 편차에도 우익에 비하면 좌익이 상대적으로 평등주의자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울러 선천적인 불평등은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인위적 성격의 불평등, 즉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만큼은 개선해야 한다는 열망은 좌익 이념과 운동의 본질적인 요소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평등의 이념을 완전히 좌파의 전유물로 보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우익세력 가운데에서도 이념상으로는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극우주의 운동으로서 나치즘이 그러했다. 나치즘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민족공동체 이념은 독일사회 내 계급과 신분에 따른 불평등을 타파하고, 성취능력에 따라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민족국가를 이상(理想)으로 한 것이었다.

    자유이념을 우익의 전유물로 파악하는 것은 평등이념을 좌익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익의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며, 국가나 사회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우익세력이 다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독점과 독재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던 파시스트 극우세력의 존재를 상기하면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자유는 우익에 못지않게 좌익에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재권력에 저항했던 좌익운동의 역사적 사례는 흔하다. 동시에 좌익의 폭압적인 권력이 철저히 자유를 유린했던 사례 역시 드물지 않다. 자코뱅의 공포정치, 스탈린의 공산주의 독재,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 등은 테러와 인종학살이 극우세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결국 자유의 가치에 대한 태도는 좌익·우익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좌익과 우익 내에서 온건한 중도세력과 과격한 극단주의 세력을 구분하는 잣대라고 할 수 있다. 즉 극우와 극좌 세력은 반(反)자유, 반(反)민주 세력으로서 서로 공통점을 지니며, 좌우의 온건세력은 비록 이념상 대립적이지만 민주정치의 규칙과 절차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그리하여 바이마르시대 나치세력과 독일 공산당세력이 좌우의 중도세력으로 구성된 정권을 공격하는 데 연합했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히틀러와 스탈린이 비밀협약을 맺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수와 진보, 성(聖)과 속(俗), 자유와 평등 외에도 좌·우익을 가르는 기준으로서 개인과 공동체, 권력에 대한 태도 등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우익은 개인을, 좌익은 공동체를 앞세운다거나, 우익은 권력의 부재를, 좌익은 권력의 남용을 경계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일면적임을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회를 유기체적 공동체로 파악하고,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었던 것은 전적으로 우익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듯이, 극단적인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남용한 것은 우익뿐 아니라 좌익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부정적인 역사적 경험이었다.

    좌익·우익의 구분과 관련해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주장을 검토할 수 있다. 예컨대 우익은 권위와 복종, 좌익은 참여와 해방을 이념적 특징으로 한다거나, 우익은 특권과 기득권을 옹호하는 반면, 좌익은 이를 비판한다거나, 또 우익은 폐쇄적인 데 비해 좌익은 개방적이라든가, 우익에는 안정과 질서가, 좌익에는 폭력과 무질서의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언급하는 것은 그 타당성 여부를 따져야 할 필요성 때문이 아니다. 좌익·우익에 대한 그러한 규정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가치중립적인 의미, 즉 단지 분석적이고 기술적인 개념으로만 사용될 수 없으며, 좌익과 우익에 대한 가치평가와 긴밀하게 결부됨을 일깨워준다.

    좌익과 우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가치론적이라 할 수 있다. 이분법적 틀 내에서 상호 대립관계에 있는 두 존재와 관련하여 어느 한쪽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한 존재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좌익·우익은 개념의 기원에서부터 가치론적 의미를 내포한다.

    삼부회에서 성직자와 귀족 대표가 오른쪽에 착석했던 것은, 오른쪽이 공간적으로 ‘명예로운 장소’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왼쪽은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용례에 경멸의 의미가 있듯이 오른쪽에 비해 정통성이 떨어지며, 또 초자연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것과 결부되었다. 예컨대 ‘벤드 시니스터(bend sinister)’, 즉 위에서 아래를 향해 왼쪽으로 비스듬히 굵은 사선이 들어간 귀족의 문장(紋章)은, 그가 서출(庶出)임을 표시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역사적 존재로서 좌익과 우익에 대하여 전적으로 타당한 의미 규정을 찾기는 어렵다.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가치론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좌·우익에 대한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하며, 좌익과 우익의 용어는 공허한 수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운위하며 좌익과 우익의 구분에 대하여 근본적인 회의가 제기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몰락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역사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보수 우익이 세(勢)를 얻으면서 위축되었던 좌익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고 존립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몰락은 좌익 일반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 특정한 좌익운동의 몰락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좌익뿐 아니라 우익도 심각한 위기상황에 당면한 적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즉 파시즘의 몰락 이후 우익은 경계와 불신, 배척의 대상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우익 정당들의 발전이 보여주듯이, 우익은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한편 좌익과 우익의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 가운데는 충분히 고려할 만한 것도 있다. 정치현실의 변화에 대한 지적이 그것이다. 점점 더 다양한 이익집단과 압력집단이 등장하고, 정치집단 사이의 관계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좌익과 우익의 이분법은 더 이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너무 단순한 구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환경, 생명과학, 낙태 등 좌익·우익의 전통적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면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점차 의미를 잃고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옳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는 속성상 대립적인 것이고, 정치세계에서 독자적인 존립을 모색하는 세력은 스스로 차별화해야 한다. 상대방과의 차별성을 창출하지 못하는 세력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정치세력이 정치적 이념과 활동에서 차별화하고 상호 대립하는 한, 좌익과 우익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좌익과 우익의 의미는 상대적이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한다. 하지만 좌익과 우익의 개념이 의미론상으로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무의미하며,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좌와 우라는 수평적인 공간개념은 비록 설명적 가치는 미흡하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스펙트럼을 이루는, 다양한 정치세력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 차별성을 규정하는 데는 유용하다.

    좌익과 우익은 가치론적인 개념이다. 좌익과 우익은 가치평가와 가치선택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양자의 관계가 가치론적으로 반드시 상호 배제적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좌익과 우익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좌익과 우익은 서로 대립하지만, 동시에 서로 지지한다. 우익이 없으면 좌익이 존재할 수 없고, 좌익이 없다면 우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좌익과 우익은 각각 타자의 존재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좌익과 우익의 존재이유가 상대에게 있다면, 그것은 상극(相剋)이 아니라 상보(相補)의 관계다. 그 점에서 좌익과 우익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하다. 수레는 어느 한쪽 바퀴라도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이 좌익과 우익이 언제나 상생(相生)을 모색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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