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다시는 내입으로 미당을 말하지 않겠다”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입력2005-03-23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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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고은씨가 ‘미당 파문’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인터뷰에서 고시인은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 방문 비화,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 YH사건을 비롯한 각종 시국사건에 관여한 얘기 등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스승인 미당 서정주를 둘러싼 친일문학논쟁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을 삼가는 대신 친일역사의 청산을 강조함으로써 완곡하게 소신을 드러냈다.
    고은(高銀·68) 시인이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젊은 시절 ‘시의 정부’라고 칭송했던 미당 서정주 시인을 비판한 ‘미당담론’을 발표한 이후 문단이 찬반논쟁으로 소연하다. 고시인은 미당담론 이후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일절 사절하고 외국에서 열리는 시 축전에 다녀오고 백담사에서 열린 만해 한용운(韓龍雲) 축전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고시인은 왜 이 시점에서 시의 사부(師傅)였던 미당의 친일 친독재 행적을 비판하고 나섰을까. 그는 아직 독자들의 궁금증에 답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미당담론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고시인은 1970년대 중반을 고비로 시의 세계는 물론 삶과 사유의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시는 허무에서 민중으로 방향을 틀었고 술과 자학으로 방랑하던 시인은 사회의 모순,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운동가로 변신했다. 그가 국민연합, YH사건 등 이 나라 반독재 민주화 운동사에 남긴 족적은 실로 만만치 않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작가 유시춘씨를 통해 인터뷰 교섭에 성공했으나 질문요지를 보냈더니 ‘싫다’는 응답이 왔다. 미당과 소설가(이문열씨)에 대한 질문은 답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고시인은 북한의 문화재와 자연을 탐방하기 위해 두 차례 북한에 다녀왔고 작년에는 남북정상회담 수행원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동석한 만찬장에서 시를 낭송했다. 미당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물어볼 거리가 많았다.



    삶과 문학, 그리고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묻기로 약속하고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시사잡지의 인터뷰를 하면서 세인들이 관심을 갖는 현안을 비켜갈 수는 없는 것이니 기회를 보아 물어보리라는 결심을 하고 안성을 찾아갔다.

    고시인은 중앙대학교 안성 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 산다. 집 앞에 키 큰 오동나무가 서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근처에 비슷비슷한 형태의 집이 많아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84년 ‘법에 사는 사람들’ 효봉 스님 편을 취재하기 위해 이 집에 왔던 적이 있으니 두 번째 방문이지만 고시인은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현재 영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차령(高車嶺·16)양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와 1983년 중앙대 영어과 이상화(李相華·54) 교수와 결혼한 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안성으로 내려와 18년째 살고 있다.

    집에 에어컨이 없는 모양이었다. 고시인은 “더워서 이야기가 안 될 테니 냉방이 되는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전원주택 단지 인근 식당에서 파전과 백세주를 시켜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민감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부담이 덜한 북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남쪽에서 생각하는 것하고 실제로 가보면 많이 다르지 않나요? 북한 사회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개성 만월대에 오르니 서울 도봉산과 북한산이 가깝게 보여요. 거기서 남쪽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니까 이제까지 남쪽에서 태극기를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뭉클한 감회가 일어요. 비로소 내가 살았던 땅과 전혀 다른 곳에 서 있구나 하고 실감했습니다.

    북한의 사회구조는 우리와 달리 매우 인공적입니다. 어떤 개인이 다른 고장으로 이동하고 싶어도 개인의 자유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될 때에만 이동이 허용되거든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훨씬 우월하다든지, 그쪽이 답답하다든지, 이런 판단을 떠나 전혀 다른 사회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북한에도 새로운 도로가 많이 건설돼 있습니다. 남쪽의 도로는 교통량이 너무 많아 체증이 심하지 않습니까. 거기는 도로가 거의 적막합니다. 도로에서도 사회구조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장차 그곳의 교통량이 많아지는 것을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중에서도 활약이 눈부시지 않았습니까. 고시인이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장에서 ‘대동강 앞에서’라는 시를 낭독했지요? 다음날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 오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손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를 때 두 분 사이에 고시인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여기서 떠날 때 몇몇 신문사에서 시 청탁을 받았습니다. 시가 나올지 몰라 확답을 하지 않고 떠났어요. 비록 북한을 처음 여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적인 현장의 증인이 된다는 생각에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방에 준비된 북한 술을 조금씩 따라 마시다가 감회가 깊어져 새벽 3시쯤 시가 나왔습니다.

    친구로 지내는 민화협 공동의장 강만길 교수와 새벽에 대동강변으로 산보를 나갔습니다. 강가에서 친구에게 시를 읽어줬어요. 친구도 좋다고 말하더군요. 목란관 만찬 때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이종혁씨(월북 소설가 이기영씨 아들)와 한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그 자리에 공동 성명 초안이 도착하고 남북의 정상이 서명을 해 장내 분위기가 고조됐습니다.

    강만길 교수가 박재규 통일부장관에게 내 시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보고를 받은 김대통령이 “나는 괜찮지만 상대방이 있지 않으냐”고 말했고 북한 쪽도 좋다고 해 박장관이 연단에 올라가 소개를 했지요. 술 마시다가 갑자기 불려나갔습니다. 순서에 전혀 없던 겁니다. 외교 관례상 시 읊는 경우가 흔하지 않지요. 시를 낭독하자 가슴이 뜨거워져 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떠나는 날 백화원 오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내 시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옆에 있는 우리와 포도주 몇 잔을 주고받았죠. 그 자리에서 꼭 북한에 다시 오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남북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시 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는 어떤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나쁜 평을 하면 초청이 취소될 테니 조심스럽겠습니다만….

    “남한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일단 낯선 존재죠. 분단의 이쪽에 있는 우리에게 좋은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은 아니었잖습니까? 그 동안 적대관계에 있었으니까.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상도 그런 점이 작용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에 가서는 단순히 낯선 것을 넘어 있는 그대로 인간의 얼굴을 봤습니다.

    그분은 뭔가 면밀히 구상을 해 새겨서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어법이 아닙니다. 속에 있는 말이 바로 나오는 직설적인 화법을 가졌습니다. 직선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우 예술적인 취향도 지녔습니다. 시를 좋아하고 특히 영화 예술에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치인을 만났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예술가를 만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인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받은 인상으로 모든 걸 읽었다고 할 수는 없죠.”

    ―북한 문인들도 만나봤을 것 아닙니까. 북한의 문학과 문인들에 대해 말해주시죠.

    “남북 문학의 교류를 통해 공통성 내지 동질성을 만들어가야 하고, 이질성은 이질성대로 그 시대의 소산인 만큼 인정함으로써 문학사에 기본 텍스트로 놔둬야 합니다. 북한의 문학은 남한 문학과 분명한 차이가 있죠. 남쪽의 문학은 개인에게서 나옵니다. 북한은 국가적 혹은 주체적인 규범을 통해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학 발생 근거가 우리하고 전혀 다릅니다.

    북한 작가에게는 북한의 현실이 요구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문학을 하잖습니까. 개인이나 세상을 노래할 수도 있고, 다른 세계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입니다. 북한은 규범화되어 있습니다. 좋은 의미든 그렇지 않은 의미든 타율을 통한 자율을 지향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평안북도에 시를 쓸 만한 소재가 있다고 하면 자기 의지로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토의해 그걸 노래하는 것이 어떻게 기여를 할 것인지를 판단한 다음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주 많이 다르죠. 이렇게 다른 것 자체가 한국문학사에서 특별한 시대의 문학으로 서술될 것이라고 봅니다.”

    ―북한의 문화재는 전쟁통에 크게 파손됐다고 들었습니다. 두 차례나 문화재 탐방여행을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고구려 역사의 정통성을 많이 강조한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의 문화재는 대개 있을 자리에 있잖습니까. 문화재는 그 자리에서 보존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전혀 다른 데 옮겨놓은 것들도 있더군요. 우리도 전쟁 때 문화재가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북한은 특히 미 공군의 융단폭격을 받았습니다. 우리하고 비교가 안 되죠.

    평양만 해도 대동문과 일제시대 은행 건물 등 몇 군데밖에 안 남고 전부 잿더미가 됐습니다. 전후에 노동집약적으로 기계도 없이 부다페스트를 본으로 하고 민족 형식을 가미해 옛날 일제시대의 평양과 전혀 다른 도시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추억을 가진 사람들은 섭섭하겠지만 지금 평양은 도시계획으로 인해 아주 아름다워졌습니다. 나는 서울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조금씩 변모해 이렇게 됐기 때문에 강남말고는 옛날의 기본 도시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셈이지요. 평양은 완전히 폐허가 됐으니까 새로 만들 수 있었겠죠.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칠보산 낭림산, 이렇게 유명한 산은 잘 보존돼 있습니다. 그 밖의 야산에는 나무가 없어요. 땔감이 모자라니 나무를 베고 경지면적을 넓히느라 다락밭을 개간했습니다. 비라도 한번 크게 오면 토사가 깎여 내려갑니다.

    공군 장교한테 들었는데 1960년대는 휴전선 이남이 벌거숭이고 이북은 녹음이었대요. 그런데 1970, 1980년대 와서는 거꾸로 저쪽이 벌거숭이고 이쪽이 퍼렇대요. 남북이 바뀐 거죠. 농경지 주위에 있는 산악들은 민둥산이에요. 다락밭 시책은 일단 실패했으니 다시 그것을 산으로 되돌려줘 자연환경을 가꿀 필요가 절실합니다.”

    ―북한이 고구려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어느 정도입니까.

    “고구려를 강조하는 건 남한에도 필요합니다. 북한이 고구려를 강조하는 것은 고구려 고토이기 때문이지요. 식민지 시대에 단재(丹齋) 신채호는 우리 민족사가 고구려를 상실해 이렇게 처참하게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도 이런 단재 사관에 대해 1970년대 이래 지지해오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발해가 건국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삼국통일시대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고구려가 있던 자리에 발해가 들어섰습니다. 역사에서는 고대 후기 남북조시대라고 합니다. 분명히 발해도 우리 역사이고 통일신라도 우리 역사죠. 두 나라가 있었으니까 삼국 시대를 두 개로 정리해 2국 시대, 말하자면 오늘의 분단시대가 고전적으로 형성됐다고 할 수 있죠.

    북한은 고구려와 발해를 북방 영토의 정신적인 근거지, 혹은 정통성의 공간으로 설정한 것이겠죠. 평양을 수도로 한 북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1980년대 후기에 단군릉을 발굴합니다. 역사학자들은 단군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쪽도 있고, 무시하는 쪽도 있습니다만 해답이 완전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단군릉을 장대하게 조성해놨습니다. 멕시코 아즈텍 문명의 자취를 떠올렸습니다. 고조선의 수도가 나중에 평양이었고 고구려도 압록강 북쪽에 있다가 평양으로 내려오잖습니까. 역대 국가의 고도로서의 위상이 오늘날 북한 수도의 정통성의 배경이 돼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고시인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인터뷰 협의과정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다. 고시인은 인터뷰에 응하면서 “말은 글에 비해 정합성(整合性)과 완결성이 떨어진다”며 질문을 보내오면 답을 직접 쓰겠다고 제의했다. 만나서는 사진이나 찍자는 것이었다. 대통령 인터뷰가 가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고시인이 권위를 챙겨서가 아니라 당대의 문장가로서 남의 문장을 통해 표현되는 자신의 말이 못 미더웠을 것이다. 인터뷰는 그의 장기인 문학장르와는 다른 언론의 장르이며 서면 인터뷰는 현장감 생동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터뷰 기사는 인터뷰이(interviewee)의 글이 아니라 인터뷰어(interviewer)의 작품이라는 논리로 고시인을 설득했다.

    ▶ “다연방제로 통일하자”

    자정 무렵 인터뷰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고시인이었다. 자신의 통일방안 구상에 관한 이야기가 빠졌다는 것이다. 다음날 통일방안 구상을 팩스로 보내왔다.

    “내 통일관은 다연방제입니다. 2연방제가 아니라 한반도 각 지역 또는 도 단위를 공화국 정부로 발전시켜 그 공화국의 수상으로 당선된 사람들이 국가위원회를 구성해 윤번제로 국가원수를 추대합니다. 그러면 지역감정이 소멸되고 지역경제의 특화로 진정한 자치자립 정부가 출현할 수 있습니다. 중앙정부는 군사 외교 등만 담당하고 무역도 각 지역 공화국이 임의로 추진합니다. 국내외 문화교류도 활발하게 될 것입니다. 말레이시아 연방, 스위스 연방에서 배울 바가 있고 미합중국 연방체제에서도 좋은 경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통일국가는 늘 내부의 사회갈등을 지속시킬 것입니다.”

    고시인이 생각하는 통일 방안이 독특하다. 서울공화국 평양공화국, 함경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공화국, 이런 식으로 나누어 러시아 연방 또는 미합중국 스타일로 통일하자는 발상이다.

    북한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고 세인의 관심이 쏠리는 쪽으로 화제를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해서 조심스럽게 친일 논쟁을 끄집어냈다.

    ―프랑스는 비시 정부(1940∼1944)에서 부정축재로 백만장자가 된 사람에게는 5년 정도의 감옥살이를 시키고 200자 원고지 6장 정도의 친독(親獨)행위를 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지요. 고시인의 글에서 읽었습니다.

    미당담론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질문을 꺼내자마자 고시인은 말 허리를 자르고 “그 얘기는 왜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오늘 하지 않기로 한 얘기와 연결되는 것 아닙니까?”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당황스러워서 “쓰지 말라면 안 씁니다”라고 하자 목소리가 다소 풀리며 “인터뷰용이 아니고 둘이 사담 나눈 것으로 하면 좋습니다”고 말했다.

    ―하여튼 저는 ‘쓰지 말라’는 내용은 안 쓰기로 한 약속을 지킵니다. 비시 정권 치하에서 부역한 문인이나 언론인에 대한 처벌이 가혹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비시 정권은 단명한 정권이었지만 한국은 일제 점령 기간이 너무 길어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주장에 대해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는 점은 없으십니까?

    “프랑스에는 드레퓌스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1998년 프랑스 정부의 초청을 받아 갔을 때 마침 그해 프랑스 최고 법원에서 100년 전 사건의 재심을 해 피고인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건 실정법이 전혀 아니에요. 실정법이 자연법으로 된 것으로 역사 실정법은 현실의 실정법과 다른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거짓이 밝혀지는 데 100년이 걸린 것이죠. 우리 50년은 이에 비해 짧습니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죠. 우리 36년은 길었고 프랑스 페탱 원수가 집권한 비시 정부는 짧았다는 형식논리로 따질 일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는 독일이 100년을 통치했더라도 그대로 두지 않고 역사를 청산하는 작업을 진행했을 겁니다. 루소와 볼테르의 계몽철학이 그렇게 사회발전에 힘이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문민정부 때 갑오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식을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정부의 장관이 갑오농민운동의 기념사를 하는 데 100년 걸렸습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가령 농민운동을 연구한 역사교수들도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못 하고 ‘동학란 연구’라고 했습니다. 1980년대에 민중운동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면서 비로소 힘을 얻어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역사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재야 사학에서 떠돌아다니던 것이 문민정부 들어와 100주년 되어서야 합법이 된 것입니다. 한국 근대사에서도 민족운동이 역사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역량을 발휘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사회가 분열되고 역사가 정체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미당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지금 말한 건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자 고시인은 선뜻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라고 받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고시인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패러디한 것이다. 고시인은 “그거 내가 30대에 쓴 건데…”라고 말했다.

    고시인은 저서의 수를 기억하지 못한다. 줄잡아 120권 가량 냈는데 시와 산문이 거의 반반이다.

    ―언짢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나 ‘이중섭 평전’ 같은 산문을 통해 고시인을 알게 됐습니다. 혹시 산문이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요즘 산문은 가능한 한 안 쓰고 있습니다. 문학을 질과 양으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면 무엇을 더 많이 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적게 쓰느냐를 작업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미술대생 중에는 이중섭 평전을 읽고 진로를 미술로 바꾸었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중섭 평전은 본래 ‘신동아’에 연재했던 글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한용운 이중섭 이상 등 평전을 많이 썼는데요.

    “아이작 도이처가 쓴 트로츠키 전기를 읽고 평전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중섭 평전은 분단과 전란 속에서 불우했지만 미적 영혼을 불태운 화가를 영속화하기 위한 뜻에서 썼습니다.”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송시는 어떤 것입니까. 시인이 스스로 애착이 가는 시와 독자들의 애송시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어려운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대표작이 곧 그 시인의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대표작이라고 말하기 싫어요. 1970년대는 ‘문의마을에 가서’ 이후 ‘화살’이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학생들이 많이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 시였지만 오늘도 그 시를 읽으라고 권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대에 맞는 시가 있겠죠. 애송시는 죽은 시인들에게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소월 정지용 윤동주 이런 분들의 시를 읽으면 시와 시인이 함께 살아나잖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인들의 시를 애송시로 삼기를 권하죠. 살아 있는 자의 시는 유보해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는 시인의 죽음이기도 하니까.”

    ―저서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어떤 책입니까. 인세를 모아두었으면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아니에요. 내가 1970년대 중반에는 독자 앙케트에서 자주 1등으로 나오고 인기가 좋았어요. 그런데 싸움하는 현장에 있게 되니까 촉촉이 젖은 정서의 독자들이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지금도 기본 독자는 있습니다. 소설 ‘화엄경’은 30만부 팔렸습니다. 민음사에서 나온 시집 ‘부활’은 20만부쯤 나갔을 거예요. 궁하다가 책이 팔려 원고료가 들어오면 반드시 긴요하게 쓸데가 생겨요. 참 재미있습니다. 돈이 생기면 그것을 쓰게 되는 경제원리에 충실하다고 할까요.”

    ―국내외 작품 중에서 누구의 작품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많죠. 요새는 폴 발레리를 좋아합니다. 발레리는 자기 세계가 이론적으로 투명해서 신(神)이 필요없어요.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의한 무신론이 아니라 자기 지성에 의한 무신론입니다. 대상과 자아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투명한 순수공간이 있죠. 그의 시는 어렵습니다. 옛날 시는 쉬웠지만 지금 시는 너무 쉬워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죠. 난해성은 현대시의 기본입니다. 현대를 이야기하고 현대를 노래하고 현대의 핵심을 형상화할 때는 어려움이 따르죠. 어려움은 필요합니다. 발레리는 재미있어요. 평소 페탱 원수하고 친했지만 프랑스 한림원에서 여러 사람들이 페탱을 지지하자고 나왔을 때 발레리가 용기있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거부했어요. 그래서 프랑스 한림원의 존재가 제대로 유지된 거죠. 드골은 발레리가 죽자 국장을 지내줬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자기를 지킬 수 있었다는 이유도 포함되었겠지요. 이 사람은 참여시인도 아닙니다. 자기의 깊은 공간에 들어가 있습니다. 시인의 자세는 어려운 용기로 일관했죠.”

    ―역사와 현실에서 만난 인물 1만명을 시로 담겠다는 만인보(萬人譜)를 구상하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징역을 살던 육군 교도소 특별감방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암실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극한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했죠. 살아서 나간다면 만났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형상화하겠다는 구상을 했습니다. 죽음이 엄습하니까 ‘살아서 나간다면’이라는 가정이 절실했어요. 어머니 아버지, 내가 고향 떠나온 다음에 만났던 사람들, 내가 만나지 않은 사람이라도 역사 속에 있는 인물들, 이런 인물들을 시로 형상화하는 일입니다.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간의 바다가 되는, 진시황의 토우(土偶)처럼 거대한 인간의 바다를 이뤄내야 되겠다는 구상이었지요.

    이렇게 서사시를 구상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어요. 거기서는 볼펜 하나 허용되지 않으니까요. 지금 감옥에서는 허가제로 신문도 넣어 줍니다. 그러니 오히려 책을 못 읽어요. 신문 몇 번 보면 그냥 하루가 가버리니까. 내가 네 번째 투옥됐던 노태우 정권 시절 교도소에서 신문 읽기가 허용됐습니다. 저 방에 있던 신문이 이리 오기도 하고 이 방에 있던 것이 가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동아일보 보다가 중앙일보 보다가 하면 하루가 가고 저녁 먹을 때가 되지요. 오히려 지금 가면 건달되는 거예요. 그 전에는 그게 없으니까 악조건이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죠.

    만인보를 구상하다가 나와 다시 1981년부터 2년까지 대구교도소에 가서 국어사전을 외웠어요. 대구 추위가 얼마나 심합니까. 한 20명 자는 방을 혼자 쓰니까 얼마나 춥습니까. 거기서 심신이 멍들었죠. 하지만 필사적으로 국어사전을 외웠는데 멋진 말이 나오면 표시하려고 성냥개비로 인주를 이용해 점을 찍으려 했더니 이것도 집필행위라고 거부당해서 단식을 했죠. 단식을 열흘 하니까 그 사전을 안기부 서울본부까지 들고 가 여기다 이렇게 찍는다는 설명을 해주니까 ‘그런 정도면 해라’고 허가가 떨어져 교도관이 볼 때만 찍기로 합의를 봐서 단식을 풀었어요. 권력이 어린애처럼 치사하지요. 찍어 가지고 나와서 다 외워서 쓰려고 하니까 나오자마자 기억했던 게 홍수에 가재도구 떠내려가는 것처럼 없어졌어요. 한참 있다 다시 들여다봤더니 없어진 것들이 다 들어와요. 흩어진 이산가족들이 모여들 듯. 지금까지 15권을 썼고 앞으로 15권을 더 쓰고 다른 작품 구상해야죠.”

    ▶ YH 여공들 신민당사로 보내

    만인보를 이야기하다 보니 이 시를 구상한 교도소 이야기가 길어졌다. 본격적인 옥살이의 시작은 1979년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이 국회의원과 취재기자들까지 복날 개처럼 패는 폭력진압의 와중에 김경숙양이 투신해 숨졌다. 유신통치에 숨죽이던 신문들이 이 사건을 오랜만에 크게 보도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과 부마사태로 이어지고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18년 독재정권이 YH 사건을 계기로 파국의 내리막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씨 죽은 다음에 1980년 2월 병보석으로 나왔어요. 윤보선 전대통령이 우리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이제 고은은 고은(高銀)이 아니라 고금(高金)이라고 해요. 자기의 숙적인 박정희씨를 지상에서 제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그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 의미로 몰고 가니까 사람 죽이는 데만 기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묘한 감정이었어요.

    YH사건은 1970년대에 유일하게 도시산업선교의 밖에서 일어난 운동입니다. 1970년대 노동쟁의의 모든 패턴은 도시산업선교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도산이 들어가면 도산된다’ ‘도산은 빨갱이다’는 말을 유포했습니다. YH는 여성근로자들이 독자적으로 만들어갔어요. 특이한 겁니다. YH는 가발을 만들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출산업이 가발이었어요. 사주 전영호씨는 지금 미국에 살아요. 이름의 이니셜을 따 YH죠. 그 사람은 떠나고 빈 껍질만 놔두어 노동자는 혹사당하고 실직 위기에 처했어요. 노조가 잘 조직된 공장에 생존 위기가 닥쳐오니까 노동운동이 제대로 일어났죠. 근로자들이 농성할 때 나를 불렀어요. 군자동에 있는 YH공장에서 농성하는 처녀들에게 강연하고 격려했지요. 의논을 해본 결과 거기다 그대로 두면 애들이 찢겨나가겠어요. 그때 마침 김영삼씨가 총재 경선에서 이철승씨한테 이겼어요. 김대중씨의 도움을 받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두 정치인이 아주 친했어요.

    나하고 문익환 목사, 동생 문동환 목사, 이문영 교수, 서경석씨가 모여 신민당사로 농성 장소를 옮기게 하자고 결정했지요. 지금은 상투적으로 정당에서 아무나 농성하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운전사한테 물어 나하고 문동환 이문영 셋이 상도동에 갔어요. 정치인들은 총재네 집에 아침마다 모이데요. 이른 아침인데도 황낙주씨 등 여러 사람이 보여요. 김영삼씨는 감각이 빠르잖습니까. 얘기를 했더니 즉각 그렇게 하자고 받아요.

    우리가 성공했어요. 신민당 마포당사에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 거죠. 현실 정치에 맡겨놨으니까 우리는 떠났다고 생각했죠. YH사건은 크게 보도됐어요. 그래서 기자들이 맞으니까 기사를 쓴다고 우스개 삼아 말했지요. 1970년대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1971년 11월에 죽었거든요. 1979년 8월에 김경숙양이 죽습니다. 노동자의 죽음으로 1970년대가 시작돼서 노동자의 죽음으로 마감돼요. 1970년대는 그런 시대입니다.

    유신으로 꽉 막히고 억압돼 있던 사회가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죠. 박정희 정권은 초강수로 나옵니다. 김영삼씨 제명 처분했잖습니까. 우리도 감옥에 집어넣었죠. 국가보안법보다 더 무서운 국가보위에 관한 특례법이 적용됐습니다. 죽은 법을 살려 가지고 우리한테 적용한 것이죠. 본격적으로 재판을 열려 하다가 부마사태가 났어요.

    YH사건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급선회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죠.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다는 방송을 교도소에서 들었습니다. 교도소장이 내 방 앞에 와 지켜보더군요. 서서 만세 부르면 또 징벌방으로 들어갈 판입니다. 껄껄 웃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한참 노려보다가 돌아가더군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서도 함께 법정에 섰고 6·15 정상회담 때도 동행했습니다. 현직 대통령과 과거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가까우니 어려움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분이 지금 잘하고 있는 겁니까.

    “김대중씨를 처음 본 것은 1970년대 대통령 후보로 나와 장충단공원에서 집회를 가졌을 때입니다. 친구 최인훈씨(소설가)와 함께 정치 강연을 처음 들어봤어요. 그 뒤 신민당 간부 한 사람이 찾아와 후보자 명의로 내는 글을 대신 써달라고 했어요. 정대철 의원의 선친인 정일형 선거대책본부장 쪽이었는데 도와주면 당선 후 공보부차관을 보장하겠다는 이야기도 했지요.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그런 글을 쓸 수 없다고 거절했죠.

    1970년대부터 삶의 노선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에 동참했습니다. 1970년대 후기에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만들어집니다.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씨가 공동의장이고 나하고 문익환 목사, 함세웅 신부가 중앙상임위원회 위원장단을 맡아 실제로 이끌어 가는 단체였지요. 김영삼씨도 자주 만났습니다.

    박대통령 서거 이후 감옥에서 나와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열 건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죠. 국민연합이 재야운동의 주축이 됐습니다. 그 전에 윤보선 대통령과 함께 카터 방한 반대 데모를 하다가 맞아 고막이 없어졌습니다. 고막을 수술하고 다른 쪽 고막 하나를 수술할 약속을 해놓고 돌아다니다가 전두환 신군부가 들이닥친 것이죠.

    두 달 동안 처박혀 조사를 받았습니다. 관을 세워놓은 것 같은 감방에서 24시간 서 있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피가 내려오는 기분이 들고 정신착란 직전까지 갑니다. 아주 무서운 경험이었죠. 그렇게 두 달을 조사받고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나 이렇게 다섯 명이 육군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보통 감옥은 복도가 직선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가운데 복도가 있고 감방이 미로처럼 배치돼 있어요. 어디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소리 쳐도 잘 몰라요. 방에 창이 없어 암실이에요. 40촉짜리 불만 하나 켜 있는데 정전을 이유로 꺼놓으면 사진 현상을 할 수 있는 방이죠.

    나는 김재규씨(전 중앙정보부장)가 살던 방에 들어갔어요. 육군교도소 특별감방 7호입니다. 김재규씨가 그 방에서 아침에 교도소장이 주는 커피 한 잔 마시고 그 길로 서대문교도소로 가서 목이 밧줄에 걸렸거든요. 그가 비워놓은 자리에 내가 들어간 거예요.

    재판이 끝난 후 감형됐는데, 나는 대구교도소로 가고 김대중씨는 진주교도소로 갔죠. 거기까지가 김대중 대통령과의 관계입니다. 그분은 망명 갔다 돌아와 현실정치를 하잖습니까. 나는 문단에 복귀해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설립해 살림을 맡고 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립합니다. 문화예술운동을 하면서 어느 경우에는 현실정치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 사양했습니다. 사람 사는 일이 어려울 때 동지가 있고, 일할 때 동지가 따로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대통령과 국민의 한 사람 사이입니다.”

    ―함께 재야운동하던 사람들도 김대통령에 대해 불만이 많지요? 김대통령이 반독재 민주화운동하던 동지들의 기대를 거스르지 않고 잘하고 있다고 봅니까? 그리고 앞으로 남은 임기에 뭘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요?

    “재야사람들을 만나면 개혁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불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잘한 일은 남북 문제에서 평화공존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지요. 당장 통일이 안 되더라도 적대관계는 끝나야 합니다. 남북 정상의 만남은 우리 민족사에서 큰 위업입니다. 인권법을 만들어 국제적으로 공인된 보편적인 인권의 가치를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어느 대통령보다 직접 경제를 챙기지만 경제의 기초와 해외여건 등 주변 환경이 열악해 얼마나 성과가 날는지 의문입니다. 잘잘못이 함께 존재할 겁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얘기할 수가 있죠. 개인적으로 그분에게 뭘 이렇게 하는 게 좋다고 요청할 바도 없습니다. 나는 현실정치를 잘 모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정시인으로 활동하시다가 1970년대 전태일 분신을 계기로 민중문학으로 돌았다고 들었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 전두환 독재하에서 민중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전후 허무주의가 오랫동안 내 핏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고향이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인데 일제시대 공산당 이론가인 김철수의 영향으로 좌익이 많았습니다. 6·25가 터져 북에서 내려오니까 군경이 이런 사람들을 거의 죽이고 도망갔어요. 인민군이 떠날 때는 지주계급을 다 죽였어요. 수복한 다음에는 도망간 좌익들을 잡아다가 또 죽였어요. 학살의 악순환이었습니다. 빨랫비누로 목욕을 해도 송장 냄새가 15일 동안 떠나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송장을 많이 만졌어요. 구덩이에서 꺼내야 되니까. 그만 소년적인 농촌의 순정이 완전히 깨진 거예요. 정신의 외상이 깊어져서 오락가락 하게 된 것이죠. 전쟁으로 도시는 폐허가 되고 산천은 나무 한 그루 없을 정도로 초토화됐습니다.

    폐허와 비인간화된 사회를 보면서 완전히 세상에 가치가 있는 것이 없다, 존재의 무의미성, 실존주의 이런 것이 스며들어왔죠. 폐허는 정신에도 폐허를 만들었어요. 심신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허무와 폐허에 젖고 있었어요. 어떻게 죽을까 이것만 늘 생각하고…. 자살 미수가 네 번입니다. 전후에 도망갔다가 아버지에게 잡혀오기를 거듭하다가 군산 미군 부대 검수관으로 취직했습니다. 최종학력이 6·25 때 중학교 4학년 중퇴니까 고등학교 1학년이죠. 기본 회화는 하는 실력이라 검수관을 했습니다. 밤참 먹을 때는 부두에 아무도 없거든요. 그 시각에 부두에 뛰어들었지요. 그 뒤로 1970년까지 불면증이 계속됩니다. 밤에 잠을 못 자 무교동에서 소주하고 빨간 낙지 안주로 살았습니다.

    무교동에서 탁자에 엎드려 자다가 떨어지면 시멘트 바닥에서 그대로 자기도 했지요. 몸을 내던지는 거예요. 어느 날 인쇄물 조각을 들여다보니 전태일씨 분신사건 기사가 실려 있더군요. 이 죽음과 내 죽음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면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태일이라는 넋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같이 그 인력에 끌려 그가 살던 환경을 보게 된 거죠. 그러면서 사회적 모순, 분단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했죠. 내가 이제까지의 존재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돼요. 사회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니까 집요한 귀신처럼 달라붙었던 10년 불면증이 없어졌어요. 이쪽으로 가던 물이 급격하게 돌아서서 다른 쪽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죠. 그것이 유신시대와 결부되면서 동아일보 광고사태를 지원하고 전태일 1주기 3주기 때 추도시를 발표합니다. 1975년에는 한국 인권운동협의회 부의장이 되고 재야운동에 깊숙이 동참합니다. 더 나아가 1970년대 후반에 국민연합으로 이어집니다.”

    ▶ 법정 스님과의 인연

    고시인이 국민학교에 다닐 때 전교생이 동맹휴학으로 친일파 교장을 추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교장은 교육자에서 사업가로 변신해 큰 부자가 되었다. 열두 살 때 겪은 이 경험이 내면에 침잠해 있다가 1970년대에 다시 살아나 불붙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효봉 스님 밑에서 상좌를 했지요.

    “동산 스님은 제자가 수백명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 제자인지도 몰라요. 승려들도 다산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효봉 스님은 상좌가 몇 명 안 돼요. 내가 다섯 번째인가 네 번째인데 다 해서 일곱인가 여덟밖에 없어요. 그중에 법정 스님도 있지.”

    ―고시인의 영향으로 법정 스님이 입산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맞습니까?

    “입산을 내가 먼저 했으니까요. 승려 시절 목포에서 포교를 할 때 불교와 실존주의를 얘기하면 대학생들이 ‘아!’ 그럴 때입니다. 전후에 실존(實存)과 불교의 각존(覺存)을 얘기하면 귀가 가다듬어지는 거죠. 전쟁 직후라서 매우 철학적인 시대였으니까. 목포 정혜원에서 포교할 때 전남대학생이던 재철이라는 학생이 철학적인 사유를 많이 했어요. 법정 스님의 속명이 재철입니다.

    법정 스님은 불교학생회 총무였습니다. 행동이 아주 방정하고 생각이 깊고 매우 문학적이었어요. 시를 쓰기도 했고 내가 추천해 수필을 현대문학에 발표했죠. 그때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한 거죠. 지금은 수필의 대가가 됐지만. 나와 박완일씨(전 불교신도회 회장)가 통영에 있던 효봉의 상좌로 안내했습니다. 내가 가라고 해서 간 건 아니겠지만 함께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영향을 받았죠. 법정 스님이 ‘일초 스님(고시인의 승려 시절 법명) 때문에 여기 왔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죠. 지금은 종단의 고승입니다.”

    ―그분도 유신 시절 재야의 국민회의에 참여했었죠?

    “나는 문인 대표, 그쪽은 불교계 대표로 같이했어요. 그러다 1970년대 중반에 떠났어요. 떠난 게 잘했다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자기가 몸을 오래 둘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겠지요. 출가를 한 사람이라 그런 한계를 깨달은 것이겠지요.”

    ―요즘은 두 분이 자주 안 만나죠?

    “1970년대 중반에 우리 집에 한번 온 적이 있고 그러고는 만난 일 없어요.”

    ―‘법에 사는 사람들’ 효봉 편을 취재할 때 한승헌 변호사에게 들었는데 ‘두 사람이 요새 잘 안 만난다’고 그러더군요. ‘고시인이 어려운 시대에 차나 끓이고 클래식이나 듣는다는 이유로 법정을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1980년대 초 이야기지요.(웃음)

    “그 사람 취향이지요. 나도 클래식 좋아합니다. 내가 절에 들어간 전쟁 직후에는 차 생활이 없었습니다. 된장에 밥 한 끼만 먹어도 감지덕지하던 시절 아닙니까. 이런 것에 익숙해져 차를 마시는 풍류에 별로 익숙하지 않아요. 찬물하고, 찬물 비슷한 소주, 두 가지 물 이외에 어중간한 건 싫어합니다. 그런 차이는 있죠. 그 이는 잠 오는 차도 있고, 잠 안 오는 차도 있고, 잠 깊이 오는 차도 있고, 잠 덜 오는 차도 있고, 여러 종류의 차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 우아하죠. 나도 옛날에는 클래식을 많이 들었어요. 드보르자크의 콘체르토를 듣고 감기가 나은 적도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이걸 내가 듣고 혼자 즐기는 것보다 세상의 소리와 함께 있겠다 이런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자연히 먼 거리로 나왔습니다. 지금은 이따금 클래식을 듣습니다.”

    ―외국 정부나 문화단체의 초청을 받아 시낭송회에 많이 다녀오더군요.

    “1년 중 반은 외국에 있습니다. 1993년에 여권이 처음 나왔어요. 그 전에는 여권이 없었습니다. 미 국무성의 강력한 요청이 거듭되면 한국 정부가 어쩌다 1회용 여권을 내줘요. 1999년 하버드대에서 특별연구 교수로 초청받아 한국 시를 얘기하고 시낭송을 했습니다. 서부의 버클리대에서 한 학기 시론강의를 마쳤습니다.

    하버드대 페인홀에서 시낭송을 했는데 한 500명 모였죠. 한국 교포들도 많이 왔어요. 내 시를 한국어로 읽고 미국 계관시인 하스가 영어번역을 읽어주죠. 그 사람이 한국에 오면 내가 한국말로 읽어주고 그 사람이 영어로 읽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 사면되니까 처음으로 5년짜리 여권이 나왔어요. 여권이 나오자마자 여러 나라에서 초청이 와요. 프랑스 정부에서 두 번 초청받았습니다.

    현대문명의 속도에 인간 정신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인간 정신이 문명에 굴복해 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 정신의 핵은 시라고 봅니다. 형식으로서의 시는 아니지만 시성(詩性) 시혼(詩魂) 이런 것이 인간정신이거든요. 인간정신으로서의 시를 회복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세계 시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그리스 정부와 제휴해 무당이 신탁을 받던 델피 신전에서 시인들이 시의 신탁을 받는 행사를 합니다. 한국에서 내가 갔지요.

    세계 시인의 날을 3월22일로 정해 매년 행사를 합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 시 아카데미’를 창립했습니다. 매년 만나 시 대회를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베로나 등에서 열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 대회를 유치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이 대회를 유치하면 참 좋은데 그런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올해만 해도 그리스 일본 남아메리카 콜롬비아 독일 미국 이탈리아 등지에 다녀왔습니다. 9월에는 스웨덴에 갔다가 캐나다에 시낭송 순회 여행을 합니다. 다시 미국에 갑니다. 내년 1월에는 인도, 4월에는 체코 등 여러 나라에서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시 낭송 축제가 많아요. 대중가수가 노래할 때처럼 시낭송회를 하는 야외극장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요.”

    ―딸은 왜 영국으로 보냈습니까?

    “미국에 아내와 함께 갔어요. 하버드와 버클리를 오가다 보니 애를 한 군데 둘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런던대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는 이가 영국 체트남시 시장입니다. 거기에 맡겼어요.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죠.”

    ―이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결혼한 직후라 차령이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결혼이 아주 늦었지요.

    “안병무 박사네 집에서 했어요. 안기부에서도 그날 아침에 알았죠. 1983년 5월5일입니다. 함석헌씨가 주례를 서고 문익환 목사가 ‘고은이 장가간다네’ 하고 축시를 읽었습니다. 안병무 박사 집에서 재야 가족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재야에서 한 100명 참석하는 행사가 됐지요.”

    ―일제시대에 모든 국민이 상하이(上海)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할 수는 없지 않았습니까. 이 나라에 남아 어쩔 수 없이 일본이 시키는 대로 기미가요도 따라 부르고 창씨 개명도 하면서 후손을 교육하고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 자체는 찬성합니다. 국민 대다수가 그렇게 살아왔잖습니까. 그 국민을 부정하면 안 되죠. 선친도 일제가 공출 내라면 냈고, 창씨 개명하라고 해서 내게도 일곱 살 때 다카바야시 도라스게(高林虎助)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국민의 실체를 부정하지 않죠. 독립운동이야 소수가 했죠. 우리 국민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우리 역사를 지탱해온 전범(典範)을 가슴에 품어야 해요. 그럴 의무가 있는 것이죠. 독립운동한 사람과 조국에서 산 사람을 구별하지 말아야죠. 친일하고 동포를 탄압하면서 향락하고 기득권을 누린 사람을 비판하자는 것이지 일제시대에 살았던 절대 다수 한국 동포를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죄악이지요.”

    ▶ 고언은 한 번으로 족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이문열 담론이 한창인데요. 후배 문인이라서 말하기가 조심스럽겠습니다만 어떻게 봅니까?

    “사회는 여러 생각이 담긴 공간입니다. 나는 외국에 있을 때라 그 글을 읽지 못했어요. 한 작가의 발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소신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것과 별도로 할 얘기가 있어요.

    우리 근대사를 보면 역사가 제대로 정리될 단계에서 정리를 못 하고 봉합됐습니다. 일종의 가매장 상태입니다. 정식으로 묻히지 않았습니다. 언제인가 이것이 옮겨지거나 파헤쳐지거나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봉합하지 말고 여러 의견이 다 나와야 합니다. 봄과 여름에 모든 생물이 나오잖습니까. 다 나와서 의견을 펴보고 가을이 와서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은 다 정리돼 상록수가 될 것은 되는 시대가 한번 왔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국론 분열이 심각하다고 하지만 사회가 그렇게 쉽게 망가지지 않습니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견고한 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히려 국가보다 사회가 더 강합니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그야말로 국가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국가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으니까. 20세기를 나라 없이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때는 국가를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비록 분단체제이지만 국가를 충분히 지탱하고 있잖습니까. 국가는 일본이나 독일처럼 국가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럴 때 국가만이 영원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운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민족통일도 체제와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의 역량으로 통일되리라는 기대를 합니다. 시민의 의견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논쟁을 하다 보면 논리적으로 귀결되고 새로운 시대가 올 때 이런 것은 많이 정리됩니다. 우리 민족이 어느 위기인들 견디지 못하겠습니까? 지구상에서 멸망하지 않은 것만 봐도 우리 민족의 생명력은 질긴 편입니다.”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미당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고언은 한 번이면 됩니다. 내 입에서 그 고유명사는 다시는 안 나옵니다. 그게 내 교양이죠.”

    그는 실제로 인터뷰를 하는 세 시간 동안 미당이라는 고유명사를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질문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면서도 미당 대신에 ‘그 고유명사’라고 할 정도였다. 문단에서는 이번 기회에 본격적인 미당 평전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고시인의 미당 평가는 현재로서는 미당담론이 완결편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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