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김근태의 이상주의 이인화의 영웅주의

  •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입력2005-03-23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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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외국의 한 시각장애인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꿈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의 중요성이 새삼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 인간 승리의 한 켠에는 등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가 너무 욕심을 부린다고 우려의 눈길을 보냈던 주위 사람들의 얘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의 등정은 그가 가졌던 희망의 결과인가 아니면 욕심의 부산물인가.

    쿠데타나 혁명의 차이가 그런 것처럼 ‘희망’과 ‘욕심’도 다분히 결과 지향적인 개념을 내포하는 단어다. ‘희망’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또 그걸 얻고자 바라는 것”이다. 반면 ‘욕심’은 “분수에 지나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사전적으로는 이렇듯 명확하게 뜻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어떤가. “나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어”라고 말하며 질박하게 미소짓는 중산층 주부가 있다. 말 그대로 소박한 ‘희망’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망 없는 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아이를 둔 또 다른 주부에게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주었으면 하는’ 희망은 세상에서 가장 사치한 욕심일 것이다.

    20대의 한 젊은이는 희망과 욕심에 관해 이런 갈등을 토로한다.

    “욕심과 희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 피해가 가면 욕심이고 아무에게도 피해가 없으면 희망인가. 그냥 생각해볼 때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욕심이라면 불행해졌을 때 가져야 할 게 희망일 것이다. 잠시 욕심을 버린다고 생각하고 희망을 버린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욕심이 아니라 그냥 정당한… 내 삶의 희망인 것 같았다.”



    확실히 희망과 욕심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줄기에서 뻗어나간 두 개의 잎사귀다. 희망이라고 여겼지만 욕심이었던 일은 없었는지, 혹은 욕심이라고 생각해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 희망은 없었는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그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일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와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을 살펴보려고 한다.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는 ‘희망과 욕심’처럼, 이인화 교수와 김근태 최고위원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이인화 교수에 대해서 살펴보자.

    “흔히 이인화씨는 보수 우파라고 해서 무서우리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보니 동안(童顔)이라서 놀랐어요… 주변 사람들이 이인화씨를 보고 그래요. 그 사람은 나이도 젊은데 머리에 든 것이 어찌 그리도 많은가 하고요. 이인화씨는 머리가 복잡하겠어요.”

    강경한 보수 우파 & 방대한 지식

    1999년 7월 방송인 배유정씨가 이인화와의 대담 중에 한 말인데,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하나는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이인화를 무서우리만큼 강경한 ‘보수 우파’로 보는 시각이며 또 하나는 사람을 주눅들게 할 만큼 방대한 지식을 가진 그의 지적 능력에 대한 찬탄이다. 이인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그 두 가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이인화는 소설가이자 평론가이며 현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유명한’ 지식인이다. 1995년 만 29세에 만장일치로 명문대학 교수에 임용 추천돼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인화를 독특한 시각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기억한다.

    1988년 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한 이인화는 그동안 모두 네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그중 100만부가 넘게 팔린 ‘영원한 제국’이 그를 스타급 작가 반열에 끌어올렸다면, 박정희 전대통령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간의 길’은 그를 ‘극우 보수’ 성향의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단초가 되었다. 확실히 그의 특이한 문학관과 동안에 어울리지 않는 과격하고 보수적인 지식인관은 남다르다.

    이인화는 “소설은 문단에서나 통하는 나긋나긋한 문학이어서는 안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으냐를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일생에 걸쳐 딱 한 편만 쓰고 싶다는 ‘국민소설’의 궁극적 지향점을 시사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는 그 국민소설의 한 모델이 1부 3권까지 출간된 ‘인간의 길’이다.

    한 문학평론가는 이인화의 문학관에 강력히 반론을 제기한다. 소설은 작가가 준엄하게 꾸짖거나 작가의 독백을 듣는 장르가 아님에도, 이인화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전부가 이인화의 이념을 대변하는 메가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의 관념이 소설속 인물보다 더 설치는 경향이 있다고까지 진단한다.

    그러나 소설을 자신과 같은 지식인의 계몽적 도구로 인식하는 이인화의 의지는 강경하고 확고하다. 그의 이런 문학관은 종종 1970년에 자위대 궐기를 외치며 할복자살을 한, 일본 우익 진영의 상징적 존재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에 비교될 정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익 지식인으로서 이인화의 사명감이나 과격함도 그에 못지않다. 언론개혁 문제로 지식인들 사이에 논쟁이 한창 가열되고 있던 지난 7월 초, 이인화는 “반공이데올로기가 득세하던 때에는 좌파 지식인들이 발언을 못했는데, 요즘은 거꾸로 우파 지식인들이 말을 못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주로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그는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에 대해 혐오와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987년 대선이 끝난 후 입으로만 민주화를 떠든 사람들에게 실망했는데, 줏대도 없고 주변도 없고 시류와 유행에 편승하는 그런 지식인들은 ‘인간 쓰레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단다. 그런 인간 쓰레기들에 비하면 박정희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란다. 자신은 박정희가 한 일은 쿠데타와 유신을 포함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외적 조건이 그런 솔직함을 계속 막는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인화는 “어떤 천재성을 지닌 개인이 길을 제시하고 모범을 보이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하고 비주체적으로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곧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영웅숭배는 비단 박정희에 국한되지 않고 동서고금을 넘나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오쩌둥, 세종대왕 등 그의 숭배 대상은 적지 않다.

    소설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절대로 일방적인 ‘예스’나 일방적인 ‘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는 그가 ‘주의’라는 말이 붙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맹목적으로 영웅숭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정신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반 대중에게 강요하는 그의 부적절한 용맹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그는 박정희의 영웅 서사시 ‘인간의 길’을 출간하면서 “지식인 사회라는 거대한 항공모함을 향한 가미가제가 되어 자폭 돌격하는 심정이었다”고 고백했다.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인화의 ‘가미가제’식 저돌성이다.

    이인화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의 표현대로 하면 1년 365일 단 하루도 매를 맞지 않고 집에 간 날이 없을 만큼 공부를 못한 지진아였다. 지금은 서울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중인 엘리트 지식인이지만 이인화에게는 그 시절의 상처가 꽤 깊었던 모양이다.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글 솜씨를 칭찬해준 후, 반에서 ‘글 잘 쓰는 아이’가 된 것이 그 시절의 유일한 긍정적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이인화는 11세 때 이광수의 ‘유정’을 읽고 난 후 이광수를 그의 확고한 우상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어린 시절 내내 소외당한 평안도 출신의 고아로 위대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이광수의 일생이 어린 그의 상처받은 자존심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란다.

    이인화는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고 일정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 대해서 남다른 존경심과 애정을 표현하곤 한다. 한때 노예로 팔린 적이 있는 플라톤이나 고아인 이광수, 무당의 아들인 공자, 미천한 농부의 아들에서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절대 권력자의 지위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불우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물론 박정희는 맨 첫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 이인화는 그 인물들의 맨 마지막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본래 평범하지 않은 무엇, 천재를 ‘희망’했던 사람이다. 그의 초등학교 성적표 ‘행동발달 상황’란에 적혀 있듯 “침착성과 지구력이 모자라고 덤비는 성질이 있는” 그는 빨리 천재가 되고 싶어했다.

    최인호나 황석영처럼 고등학교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문학 천재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대학에 진학해서도 그는 쉽게 꿈을 이루지 못했다. 신춘문예 당선작이 발표되는 1월에는 거의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어쩌면 이토록 재능이 없단 말인가…” 하며 자신의 무능을 혐오했단다. 대학시험의 실패가 자신에게 특히 비참했던 것도 “내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천재를 흉내내기 위해 그 나이의 정상적인 삶을 희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그때 뿐 아니라 그 이후 그의 삶이 ‘천재를 흉내내기 위한’ 시도들과 그 부작용들로 채워진 부분이 적지 않게 느껴진다.

    그 연장선상에 이인화의 ‘가미가제’식 저돌성이 있다. 그가 소망했던 “지식인 사회에 대한 가미가제식 자폭 돌격”은 천재가 될 수 없었던 그의 절망이 빚은 드라마틱하고도 선정적인 돌파행위가 아니었을까. 이인화가 자신의 ‘불꽃화’를 위해 박정희라는 민감한 소재를 이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길’로 인한 박정희 논쟁이 한동안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지만 그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천재성에 대한 욕심

    “저는 사실 이 소설은 출간하자마자 몰매를 맞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어요. 작가는 비판을 받음으로써 ‘오피니언 리더’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아무도 비판을 안해주고 모두 ‘선택’만 비판하니까 이문열씨는 자연스럽게 1990년대 작가로까지 살아남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이 책이 일으킬 반향에 대해 과잉기대를 하고 실망했죠. 제일 비참한 건 비난이 아니라 무관심 아닙니까?”

    논쟁 자체가 ‘공론’으로 그치고 실제 소설 판매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족의 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긴 필생의 역작이라는 ‘인간의 길’을 출간하면서 아내에게 1억부를 판매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니 그럴 만도 하다. 아직까지는 그의 호언장담이 지나친 욕심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유보하자.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1억부 판매가 한바탕 우스갯소리로 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초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나는 내 소설이 한 1000만 질 정도 팔려서 모든 가정에 내 소설집이 있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틈만 나면 동아시아적 가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이인화답게 그의 꿈은 몽골 초원처럼 드넓고 웅대하다. 평생에 걸쳐 10권 분량의 장편소설로 완성하겠다는 ‘인간의 길’은 이제 3권이 출간됐을 따름이니 좀더 두고볼 일이다.

    이인화는 작가 자신과 작품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1995년 한 잡지는 이인화를 이렇게 표현한다.

    “이인화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치밀하고 능란한 이데올로그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어떤 의도나 장치를 숨겨 놓았고, 논쟁을 격발시켰다.”

    사실이 그랬다. 이인화는 단지 4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을 뿐이지만 그때마다 그의 작품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그게 이인화가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이인화의 천재성에 대한 욕심이 빚은 부작용 중 첫번째는 표절시비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이다. 1992년 이인화는 그의 첫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발표하면서 문학평론가에서 소설가로 변신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제1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한다.

    제목부터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독백 대사를 차용한 이 작품은 일본작가 요시모토 바나나나 하루키뿐 아니라 공지영의 문장을 그대로 베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이인화는 “제목부터 작가의 이름 그리고 문장 하나하나까지 이미 씌어진 다른 작품들의 혼성모방으로 이루어졌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한 평론가는 혼성모방이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인 ‘패스티시’라는 작가의 자기 변호를 겨냥해 ‘센세이셔널한 신제품이 되고자 하는’ 가장 포스트모던한 욕망에 의해 혼성모방의 이름으로 상상을 초월한 표절과 모방의 극한을 보여주었다고 질타했다. 또 다른 평론가는 자신의 누비 이불을 만들기 위해 남의 작품을 아무렇게나 짜깁기하는 기법이라고 비난했다.

    얼마나 논란이 심했는지 당시 저작권 연구소장이던 한 변호사는 “아무리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을 내세운다 해도 남의 글을 그 출처도 밝히지 않고 자기 글 속에다 옮겨 써먹는 것은 저작권 위반 행위에 다름아니므로 마땅히 삼가야 할 일”이라고 거들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데뷔작에 관련한 가장 화려한 해프닝은 한 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평가일 것이다.

    “나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너무 생생한 묘사로 빛나는 까닭에 이인화의 작가적 여정을 걱정하게 된다. 이 작가가 자칫 그 이야기의 재능 때문에 어설픈 대중적 취향에 영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대중의 때묻은 박수를 원하기보다 관념과 사상의 깊이를 더욱 확보하고….”

    이토록 극진히 이인화의 작가적 여정을 걱정한 평론가는 과연 누구일까. 바로 류철균이다. 류철균은 이인화의 본명이다. ‘이인화’는 그가 소설가로 변신하면서 그 당시 처음으로 사용한 필명인데 한자로 이인화(二人化)이며 평론가와 소설가 두 가지 역할을 한다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인화는 한 사람이 두 가지 역할을 하면서 ‘세계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자기 작품에 대해 자기가 칭찬하는 해프닝을 벌인 것이다.

    신랑이 주례를 겸하는 결혼식 같은 것이라고 할까. 한 평론가는 그 작품을 평가하면서 “이인화의 문장 베끼기는 ‘작가적 천품을 타고나지 못한 소설가 지망생의 안간힘과 간기”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인화가 유난스러울 만큼 복고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런 뒤틀리고 불안정한 정서를 다독이려는 무의식적 시도일지 모른다. 어째서 그런가. 이인화의 문학적 자서전에는 자신의 문중과 그 내력에 대한 소개가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도 가문과 족보의 연대기에 대한 그의 과도한 집착을 볼 수 있다.

    이인화는 종종 자신을 유교신자라고 소개하면서 유교의 근간은 가문의식인데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내재한 건전한 가문의식이야말로 급격한 근대화의 혼란 속에서도 이 사회를 이나마 지탱해온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건전한 가문의식’의 한 증거로 들이대는 다음과 같은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말할 수 없는 가난과 고통을 짊어지고도 시댁을 떠나 도망가지 않았던 이 땅의 어머니들. 그들은 나 하나로서가 아니라 친정 가문의 얼굴로서 시댁에 왔던 것이다.”

    이인화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학생들에게 그런 해석이 온당한지, 얼마나 수긍할 수 있는지 한번 물어보라. 당시의 윤리의식은 그럴 수 있었노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럴 수도 있지만 역사란 그것을 해석하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거에 대한 그의 회고는 단순하게 말하면 “황금시대여 다시 한번”식으로 언제나 화려함과 넉넉함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이인화에게 과거와 비교되는 현실은 늘 남루하고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이인화는 한 신문의 칼럼을 통해 그런 마음의 일단을 격렬하게 토로한다.

    “오늘날 여야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개싸움의 진흙탕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인간이 어떻게 저런 비루한 일에 저처럼 열중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놀라움을 느낀다.… 조선의 정쟁은 사리사욕의 당쟁이 아니라 16세기의 파란을 겪으며 발전한 수준 높은 중세의 정치 형태였다.”

    그는 불안정한 현재나 예측불가능한 미래를 대면하는 일보다 자신이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과거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성향이 있는 듯하다. 자신의 개인사를 돌아보면서도 비슷한 심리적 패턴을 보인다.

    그는 대학과 대학원을 다닌 1980년대 후반을 어둡고 질척거리는 시대에 대한 끝없는 불만족과 그로 인한 초조감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때의 악몽이 군입대와 더불어 끝났다며 군 생활에 대한 벅찬 감동을 자주 밝히곤 한다. 필자는 이인화처럼 자신의 군복무 시절을 정감있게 회상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대학원을 다니다 말고 방위병으로 입대한 이인화는 대학에서는 갖지 못했던 우정의 따뜻함도 군대에서 절절히 경험했고 인간관계의 가치를 배우기도 했다고 말한다. 전역할 때 이별의 괴로움에 눈물이 나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회고하는 대목에 이르면 좀 어리둥절한 느낌까지 든다.

    ‘대작’에 대한 집착

    그의 욕심으로 인한 두번째 부작용은 대작에 대한 집착이다.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변화한 경영현장에서 여전히 외형 불리기에만 주력하는 시대착오적인 기업인의 모습이 이인화라는 작가의 얼굴 위에 겹쳐진다. 그 스스로도 자신은 논문을 쓰거나 공부를 할 때는 참으로 행복하지만 소설가로서는 재능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당대의 아웃사이더 자리에 선 예술가로서 남다른 내면의 진실을 보여주는 예술적인 소설은 ‘능력이 안돼서’ 포기했다고 덧붙인다.

    그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보다 논문을 쓰듯 객관적 자료수집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처럼 보인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대하소설 같은 ‘대작’에의 집착은 그래서 생긴지도 모른다.

    이인화는 소설을 쓸 때 소재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느낌이 들어야 글을 시작한다고 한다. ‘영원한 제국’을 쓸 때도 관련 논문만 200편을 넘게 읽었고 박정희에 관련된 자료를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어서 박정희에 대한 전문가임을 자부한다고 말한다. 그는 늘 ‘산더미같은’ 자료를 쌓아놓고 작업을 한다. 자료수집에 대한 그의 열정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보면 문학적 상상력보다 자료에 대한 집요함이 더 도드라진 특이한 작가를 보는 느낌이다. 천재성에 의한 최고는 어느 정도 포기하고, 양적 경쟁에서의 최고를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인정을 얻는데 더 빠를 수도 있다는 계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게 작품을 쓸 때마다 큰 소재로 대작을 쓰겠다는 욕심이라고 고백한다. 그렇게 완성된 그의 작품은 작가 자신으로부터 대작의 극진한 예우를 받는다. ‘인간의 길’에 관련된 작가의 말은 그가 강조하는 명확한 사생관(死生觀)처럼 화끈하고 비장하다.

    “훗날 신이 내게 이승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인간의 길’ 3부작을 썼다고, 내가 바로 그 소설을 쓴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한국 소설사에서 나밖에 쓸 수 없는 소설이고, 나밖에 창출하지 못한 캐릭터다. 나는 이거 하나로, 이 사람 하나로 소설사에 남을 수 있다.”

    아무리 1억부 판매를 목표로 쓴 ‘국민소설’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려고 그러지” 하는 걱정이 절로 생긴다. 그러나 이인화는 ‘인간의 길’ 이후에 쓴 ‘초원의 향기’라는 장편소설집의 작가 후기에서는 “이 소설을 탈고한 지금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소재와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과 근심에 쫓기고 있다”고 또 다른 비장미를 드러낸다. 지나친 욕심과 영리한 계산에서 비롯한 부적절한 극단과 앞뒤 가림없는 비장미라고 할까.

    섬세한 감수성과 다원적 세계관으로 대변되는 작가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국가’에 관한 거대 담론에 탐닉하는 이 희한한 작가를 어떤 이는 ‘착각적 국가지상주의자’라고 부른다. 그 별난 호칭까지 다 동의하는 것은 그가 문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답지 않게 전체주의적 사고가 강하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일본이 근대화에서 한국과 중국을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는 ‘국가정신’을 꼽는다.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조차 어머니를 부르지 않고 “다이 닛본 반자이(대일본만세)”를 외치게 했던 국가에의 감격과 도취, 이것이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인화의 분석에 대해 한 일본사 연구가는 이인화가 근대정신과 국가주의, 군국주의를 혼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근대정신이 바로 군국주의라는 것을 느꼈다고 공박한다.

    그러나 이인화는 자신은 정말 국가에 신세를 졌다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불알 두쪽’만 차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이제는 집도 있고 땅도 좀 있고, 자가용 타고 다니고 무엇보다 공인으로서 봉사할 직장을 갖고 살 수 있게 해준 이 나라가 정말 고맙지 않느냐는 것이다. 고맙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 이인화처럼 해석하는 지식인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도 안 좋고 운도 안 좋아 이인화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국가를 증오해야 하나?

    필자는 지난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인화의 ‘시인의 별’을 읽는 동안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그랬듯이 몇 번씩 앞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보았다. 지금껏 읽은 단편소설 중 문학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하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제 이인화에 관한 ‘산더미 같은’ 자료를 읽으며 필자는 또 다른 이유로 그의 사진을 몇 번씩 들여다 본다. 그런 재능과 그보다 더한 열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 젊은 보수주의자의 극단적이고 단세포적인 시각이 의아스러워서다.

    모든 권력을 다 향유하고 마침내 정상의 권력에 집착하는 정치인 JP가 떠오른다. 국민의 지지도가 바닥이라 직접 선거방식으로는 희망이 없지만, 내각제라면 간접적인 선거방식을 통해 정상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때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할 수도 있는 이 노정치인의 ‘이루고자 하는 바’는 희망인가, 아니면 욕심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욕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실현가능하긴 하지만 ‘제 몫 이상을 누리려’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를 필자는 이인화에게도 적용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 이상을 탐하며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충수를 두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 희망’을 ‘욕심’으로 간주하는 타인과의 투쟁에서 우위에 서려면 더 교묘하고 더 자극적이어야 하고 더 전투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이인화의 자충수는 더 잦아질 것이다. 어쩌면 이인화는 필자의 글이 악의에 찬 비방이라고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나 초인적인 열정에도 불구하고 ‘왜 이인화가 극우 보수주의자’로 규정되고 또 ‘왜 이인화가 하는 일은 늘 논란을 일으키는지’를 욕심을 버리고 찬찬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많은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지만 김근태는 유난히 ‘희망’이란 단어를 자주 거론하는 정치인이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95년에 출간한 책 제목도 ‘희망의 근거’다.

    그런데 익숙한 일상의 언어가 시인의 손을 거치면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듯이 김근태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희망’은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 해답의 실마리는 지난 7월 한 대학 초청토론회에서 김근태가 한 말 속에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일지라도 그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신뢰의 무게는 천차만별이다.”

    바로 그렇다. 김근태는 단단하게 여문 강냉이를 튀겨 팝콘을 만드는 사람처럼 작은 목소리로 ‘희망’을 얘기하면서도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커다란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아주 희귀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김근태의 정치적 ‘희망’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런 일은 전문가적 식견으로 정치적 메커니즘을 정교하고 명확하게 분석하는 정치평론가의 몫이다. 이 글은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지’ 또 ‘우리에게 희망이 왜 필요한지’를 인간 김근태의 삶의 역정을 통해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김근태는 1996년 15대 총선을 통해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는데, 그는 이 선거를 회상하며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한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고 그런 호들갑을 떤다면 애초에 김근태가 아니다.

    김근태는 재야에 있던 30여 년 간 언제나 익명이나 가명을 쓰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오지 못하다가 15대 총선 때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내걸고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는 거절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고 회고한다. 그 동안 왜곡되고 편견에 갇혔던 자신의 진짜배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 나를 소개하는 일 따위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사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감흥을 주는 얘기가 아닌데도, 김근태는 그 일이 그렇게 고맙고 좋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1965년 대학에 입학한 김근태는 이후 1995년까지 30년 동안 그의 말처럼 늘 공포와 부담 속에서 살아왔다. 독재와 맞서 싸우는 동안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6개월에 걸친 두 번의 투옥을 포함해 수없는 가택연금과 수배, 살인적 고문을 당하며 어두운 시절을 버텨온 사람이 바로 김근태다.

    여기까지 듣고 나서 이미 뒷얘기를 짐작하겠다는 듯 “또 그 뻔한 민주화투쟁 얘기야?”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때는 “언제까지 민주화운동 경력을 훈장처럼 내세울 거냐?”는 비아냥까지 있었으니 그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김근태의 삶은 진짜 ‘뻔한’ 얘기인가.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총을 든 흉악범이 100명의 선량한 사람을 위협하고 있는데 그 총에 총알이 한 발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한 명만 희생하면 99명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선뜻 그 한 명이 되려고 나서지 않는다. 더구나 총알이 몇 발 장전되어 있는지 또 그 흉악범이 어느 정도의 실탄을 더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미련하게(?) 총알받이로 나서서 희생 당한 사람들의 미담을 훗날 그 결과에만 주목해서 말한다면 너무 ‘뻔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미련한(?) 사람들이 당시 한 깊은 고뇌를 감안하면 절대로 뻔하지 않은 얘기다. 김근태 본인도 “군사독재의 폭압이 깊었을 때는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있었다”고 수차례 고백한 적이 있다.

    지난 1994년 김근태가 택시에 합승을 했는데 차에 있던 여대생 두 명이 그를 한참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렇게 물었단다. “혹시…이근안선생님 아니세요?” 그들은 김근태를 ‘고문경관 김근태’에게 붙잡혀 고생한 ‘재야인사 이근안 선생님’으로 착각한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혹시 ‘미련한’ 인간 김근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지식도 그 여대생들 수준은 아닐까. 그래서는 그가 제기하는 희망의 근거를 알기 어렵다. 다시 김근태의 뻔하지 않은 얘기로 돌아가자.

    고뇌하고 회의하는 투사

    극단적인 것을 싫어하는 김근태의 원래 꿈은 교수였다.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계속해 비전을 제시하는 지식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유신으로 종쳐 버렸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유신은 투쟁 이외에 다른 대안의 선택을 내 양심에 허락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의 선택은 늘 흔들리는 과정에서의 선택이었단다. 그래서인지 김근태는 대단히 ‘지성적인 투사’다. 늘 고뇌하고 회의한다. 정치인이 되어서도 그의 이런 성향은 변하지 않는다. ‘영혼을 지키면서’ 현실 정치에 몸담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고 있다고 재선 국회의원 김근태는 고백한다. 1992년 말 한 신문은 ‘군사독재정권 시절 운동권의 대부 역할’을 한 김근태를 이렇게 평가한다.

    “서울대 학생운동권 출신인 김근태는 보기 드물게 지도자적 품성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원칙주의자이면서도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연함을 잃지 않아 왔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르고 정치를 시작한 지 6년이 지난 현재도 김근태는 ‘재야운동을 오래 하고 독재세력과 많이 싸워서 강경파다, 비타협적이다’는 이미지에 시달리고 있단다. 오죽했으면 집권당 최고위원이면서도 국가보안법에 시달린 자신의 전력 때문에 오해를 받을까 싶어 금강산 관광조차 포기했겠는가.

    이런 강성 이미지는 그가 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1967년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경찰서에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비생산적인 삶 속에서 고통스러운’ 군대생활을 힘겹게 마감한 김근태는 운동을 계속할지 잠시 갈등한다. 그러다가 운동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결심한 것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했을 때라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 나는 역시 여기에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구나” 하는 비장한 각오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김근태의 민주화 역정이 시작된다.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과 학생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되고, 또 1974년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다시 수배되어 김근태는 박정권의 막이 내릴 때까지 피신생활을 계속했다. 1960년대가 제적과 군대생활이었다면 1970년대는 수배와 피신생활의 연속이었다.

    김근태는 뛰어난 도피술로 7년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다. 그의 피신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그의 인간성에 매력을 느낀, 보이지 않는 많은 후원인들의 도움 덕택이었다는 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평가다.

    당시 서울대 학생과장은 김근태를 늦깎이로 졸업시키기 위해 다른 학생으로 하여금 졸업리포트를 대신 제출케 했을 만큼 그에게 각별히 마음을 쏟았다. 그러나 장기간의 도피생활은 김근태에게 많은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피신 시절이던 어느 정월 대보름날 밤 은신처를 구하지 못한 김근태는 통금 시간에 쫓겨 도곡동의 한 갈대밭에서 밤새도록 제자리 뛰기를 하며 추위와 싸웠다. 그때 그의 머리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 얼어죽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고 한다. 김근태가 그런 고통을 감내한 이유는 유신과 군사독재가 없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좀더 안정되고 예측가능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김근태를 가장 어렵게 한 것 중의 하나는 생활을 해결하는 문제, 즉 경제문제였다. 김근태는 도피기간 중인 1978년 이화여대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수배를 받고 있던 인재근씨를 만나 인천 부평의 한 설렁탕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신접살림을 꾸렸다.

    그의 아내 인재근씨는 김근태에 못지 않은 민주투사다. 민가협의 초대 총무를 지냈고 서울민중운동연합(서민통) 상임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서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오히려 김근태의 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따름이지 지금도 그들 부부는 금배지를 달고 안달고의 차이밖에 없는 영원한 민주화 동지다. 인재근씨에 관해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인간탐구’에서 독립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녀는 그만큼 충분히 의미있고 특별한 삶을 살았다.

    다시 1978년의 김근태로 돌아가자. 단칸셋방에서 살고 있던 그 해 연말 아내와 아들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친구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때 김근태는 생전 처음으로 경제문제 때문에 비참한 심정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전태일 분신과 유신발생 이후 거의 흔들린 적이 없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무한정의 갈등이 밀려왔단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철저히 신봉하고 실천한 김근태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인천지역 도시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노동자교육, 노동운동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그의 반유신 투쟁은 1979년 10·26까지 줄기차게 계속됐다.

    김근태는 자신의 1980년대를 “매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로 회고한다. 1980년대는 김근태에게 운동가로서는 최고이자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고통을 안겨준 시절이다. 그는 1983년 9월 학생운동 출신들이 조직한 최초의 독자적이고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였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초대, 2대 의장을 맡는다. 이때부터 김근태는 항상 권력의 첫번째 기피인물이 되었다. 군부독재의 살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으니 불법단체인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겪었을 괴로움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날 안기부 국장을 만나러 나갔던 민청련의장 김근태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처참한 몰골로 집에 내동댕이쳐졌다. 부인 인재근씨의 말을 들어보자.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어요. 찢어지고 터지고, 코뼈는 부러진 것 같았고 눈썹 끝이 갈라져서 벌겋게 살이 드러나 있었지요. 그리고는 한 시간 이상이나 구토를 하더라구요.”

    부인 인재근씨는 잠이 든 남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김근태는 그 사진을 들고 안기부를 압박해 민청련을 공식화하는 데 성공한다. ‘부창부수(夫唱婦隨)’란 표현이 이런 때도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1985년 9월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민청련 의장 김근태를 공산당 지하조직의 총책 쯤으로 인식했다. 도표까지 곁들여진 김근태 관련기사의 조직도 맨 위쪽에 김근태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간 ‘말’이 폭로한 당시의 보도지침인 “김근태 관련 단체의 이적행위 관계를 ‘꼭 1면톱으로 쓸 것’, 주모자인 김근태의 출신배경 등 신상에 관한 기사를 꼭 박스기사로 취급할 것”이 충실히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아직도 일부에서 김근태를 재야의 강성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생각한다면 이때의 사건보도들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폭압의 시대에는 싸우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그렇게 행동한 김근태를 보고 과격하다고만 하니 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아무리 지식인의 ‘양비론’이 안전 빵이라지만 문제의 원인제공자는 따로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 정당한 이의를 제기한 측과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항상 똑같이 취급하면 그게 말이 되는가.

    ‘고문 지옥’ 견뎌낸 ‘초월적 인물’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 출판사들이 우리 작가의 작품 중에서 번역출판하길 원하는 첫째 조건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이란다.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은 삶의 근원적 딜레마를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 고문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씨랜드 참사나 수학여행길 교통사고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내 자식이 그 끔찍한 고통 속에 있을 때 나는 편안히 (자고) 있었다”는 생각에, 그 생각이 날 때마다 고통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김근태는 우리에게 부모의 가슴을 불편하고 아리게 하는 자식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편안히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있을 그때 그는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공동선을 위해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민청련의장 김근태 고문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추위 배후 조종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11회에 걸쳐 물고문·전기고문을 당한다. 그로부터 석달 후 김근태는 재판과정에서 지옥의 23일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또렷하게 증언한다.

    “새로운 사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될 때마다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암기, 복습시켰습니다. 죽음에 대한 협박공갈, 집단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굶기기, 잠 안재우기, 동물적 능욕….”

    진저리를 치는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티어 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단폭행을 당한 후 그들은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옥 속에서 김근태는 눈을 가리기 전에 그들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어둠을 통해 날짜를 가늠하면서 고문자의 이름과 인상을 외우려 애를 썼고, 진행과정이 어떠했는지 소상하게 기억하려 했으며, 감옥으로 넘어가서도 반복해서 외워 그 모든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발뒤꿈치 상처부스러기를 모았다. 이 상처조각은 아내 인재근씨에게 전해졌고, 고문을 입증하는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당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다는 그의 고백을 들으면 유대인 출신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떠오른다.

    프랭클은 끌려간 사람의 95%를 도착 30분 내에 가스실에서 처형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극심한 기아와 강제노동에 고문까지 견디면서 그는 자기 자신과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의 심리변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 그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 중 99%는 자기경멸로 인한 정신적 황폐화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은 알코올중독이나 약물중독 등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빅터 프랭클은 그야말로 ‘초월적 존재’라 불러도 될 만한 사람이다. 초월적인 존재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박정희같은 사람이 아닌 프랭클, 김근태같은 사람이 바로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다.

    극심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던 시기에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어떤 사람들이 딴지를 걸어 아버지는 넘어졌단다. 심하게 다치기도 했었다”고 담담히 말한다. 그런 ‘초월적 인간’이기 때문에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면의 쉼없는 일렁거림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 경관에 대해서는 고문 무혐의 결정이 났지만, 실형을 선고받은 김근태는 1988년에야 감옥에서 나온다. 출소후 또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해 정책기획실장을 맡은 김근태는 1990년 5월 또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 3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김근태는 더할 수 없이 ‘징글징글’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심 깊은 강물처럼 외적으론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늘 쉼없는 일렁임이 계속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민주화실현에 벽돌 한 장쯤 쌓는 게 되기는 하는건지, 독재자들의 양심을 조금이라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일인지 회의가 생긴다고 토로하던 사람이 김근태였다.

    아내의 생일 무렵에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김근태는 생일선물로 그녀에게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인간적 번민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마 인재근씨의 성격을 미루어 보건대 김근태는 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 남녀간의 문제로서 뿐만 아니라 사상적 동지로서도 ‘감상적 패배주의’라는 이유로 그녀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런 내적인 일렁임은 오히려 그의 행동이 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나침반 역할을 한 듯하다. 김근태는 히딩크 감독을 좋아한다는 데,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하면서 뛰는’ 축구를 지향하기 때문이란다. 제대로만 소화가 된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전술은 없을 것이다.

    1990년 연말 언론인 김종철씨는 두 번째 감옥살이를 하는 김근태에게 편지를 보내 일상에 쫓겨 그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잊다시피 사는 자신의 무심함을 질책하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는 양심수들을 보며 “그 사람 또 들어갔나? 이제 그만하지 않고…”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라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라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토로한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김근태는 ‘아이들 앞에서 체포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 싫은 인간적 고민’에서 해방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생했지만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이름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은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진짜로 그런 것인가에 대해서 필자는 아직도 의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치부 기자나 지식인 집단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지도자’ 선정 조사에서 그가 몇 년째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반갑다. ‘밀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인 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또 민주화운동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으로 해서 ‘괜찮은 사람이구나’하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한 징표라는 분석 때문이다.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와 대중적 인지도를 일치시키는 일은 정치 전략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므로 필자의 영역 밖이다.

    세계적 석학으로 평가받는 학자 한 분이 장관을 할 때의 일이다. 국회 상임위에서 국회의원들에게 민망할 만큼 추궁을 당하자 그는 속으로 “보통 때같으면 나하고 동석도 못할 사람들이…”하는 생각을 하며 분했다고 말했다. 그 분의 심정을 차용해서 말해보자. 만일 김근태가 ‘정치인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비난을 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정치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평생을 민주화운동을 위해 헌신하고 말년에 경제적 사정으로 치료비를 걱정하다 타계한 계훈제 선생처럼, 그렇게 살아야만 진정한 운동가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부당하다. 김근태처럼 미련하게(?) 수많은 사람의 희망을 위해 개인적 삶을 희생한 사람들도 시샘이 날 만큼 성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또 다시 우리 앞에 불행이 닥쳤을 때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더 개인적인 이유로 필자는 김근태가 정치인으로 꼭 성공하길 바란다. 김근태 같은 사람마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질 거라는 인간적인 걱정 때문이다. 김근태는 그런 ‘희망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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