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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해체 10년 싹트는 ‘붉은 제국’의 향수

  • 김기현 <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 kimkihy@donga.com

소련해체 10년 싹트는 ‘붉은 제국’의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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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는 당시 소련 국민 전체의 뜻은 아니었다.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존속에 대한 지지는 77.3%로 나타났다. 그러나 각 공화국의 지도자 등 정치 엘리트들은 독립을 원했다. 독립국가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옐친에게 소련 해체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오랜 정치적 라이벌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밀어내고 권력의 상징인 크렘린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다시 말해 옐친 진영은 소련 해체 문제를 권력 투쟁의 일환으로 보았다. 이 점 때문에 옐친의 비판자들은 옐친이 단지 ‘권력욕’ 때문에 소련을 해체로 몰아갔다고 보고 있다. 필립 보브코프 전 KGB 제1부의장은 “소련 해체의 원인은 옐친 등 각 공화국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욕과 이를 부추긴 미국 등 서방의 음모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운명의 1991년 12월8일, 옐친과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스타니슬라브 슈스케비치 벨로루시 최고회의 의장 등 3국 지도자들은 벨로루시 수도 민스크 교외의 벨로비예스카야 푸샤의 별장에서 만나 소련 해체와 소련을 대체할 주권국가공동체를 구성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고르바초프는 “이 선언은 불법이며 소련 헌법에 어긋나는 위헌”이라며 저항했으나 나머지 공화국들이 차례로 이 선언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사임했고 소련은 붕괴됐다.

즉흥적으로 나온 CIS구상

이런 과정을 보면 CIS 구상은 다분히 즉흥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옐친의 최측근으로 ‘꾀주머니’로 불리던 겐나디 부르불리스 러시아 국무장관이 ‘CIS구성을 통한 소련 해체’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 지배적인 증언이다. 심지어 12월8일 CIS 결성을 선언한 3국의 지도자와 참모들조차 CIS의 명확한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소련 국민들은 그저 CIS를 형식을 바꾼 소련체제 정도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이 퇴조한 후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완벽한 독립을 누리려는 열망이 각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당초 CIS국가들은 CIS군(軍) 합동사령부를 창설하고 러시아의 루블화를 단일통화로 하는 등 국방과 핵통제권, 통화 등을 공동 관장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미 1992년 초부터 각국이 앞다퉈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고 독자 화폐를 발행하면서 분열은 가속화했다.

독립 직후부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주를 둘러싸고 영토분쟁을 벌여 지금까지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CIS국가끼리 무력충돌까지 일어났다. 또 모르도바의 드네스트르 지역에 살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고 그루지야에 속한 압하스 자치공화국과 러시아 내 체첸공화국이 독립 투쟁을 벌이는 등 곳곳에서 독립에 대한 소수민족의 열망과 민족분규가 내전과 무력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CIS는 역내의 이러한 분쟁에 전혀 손을 쓰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였다. 오히려 일부 국가 사이에는 역내 왕래에도 비자가 필요할 만큼 멀어졌다.

기자는 1996년 9월 발트 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에 다녀왔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만난 교통경찰 제냐 브이스트로프는 부모 대부터 에스토니아로 옮겨와서 살기 시작한 러시아계. 그는 1991년 당시 에스토니아의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태어나서 30년 가까이 살아온 에스토니아를 조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독립 후 겪을 고통을 상상하지 못했다. 소련 시절에는 공용어가 러시아어였기 때문에 굳이 에스토니아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독립 후 에스토니아어가 국어가 되면서 졸지에 ‘벙어리 신세’가 됐다. 더구나 에스토니아 정부는 러시아계에는 국적을 주지 않기로 결정해서 에스토니아 출신인 부인과 국적도 달라졌다. 그는 당시 이미 없어진 소련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외국인이 됐기 때문에 공무원인 경찰직도 곧 그만둬야 할 처지. 그렇다고 아무런 연고 없는 러시아가 돌아갈 수 있는 조국도 아니다.

소련 해체 후에도 한동안 각국은 소련 여권을 유지했다. 구소련의 여권은 해외 여행을 갈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 14세가 되면 모든 국민에게 주는 한국의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이다. 따라서 소련이 없어지고도 한동안은 모두 ‘소련 국민’이었다. 그러나 각국이 차례로 독자적인 국적을 부여했고 러시아도 1997년 10월부터 새로운 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없어진 지 5년이 넘도록 러시아 국민들이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표지의 소련여권을 계속 사용해온 것은 공산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공산당은 소련 해체 후에도 소련 부활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고 독자적인 러시아 여권 발급을 반대해왔다. 때문에 당시 옐친 대통령은 의회 동의가 필요없는 대통령 포고령으로 독자여권 발급을 강행해야 했다.

기자는 지난 6월 우즈베키스탄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 러시아 주재 우즈베키스탄 영사관에 갔다가 지금까지 소련국민으로 남아 있는 사실상의 무국적자들을 만났다. 이들이 구소련 영내를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어머니를 8년째 만나지 못하고 있다며 영사를 찾아온 한 여인의 사연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뚜렷하다. 소련 해체 후 이러한 고통을 겪은 개인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소련이 나뉘며 자산분할이나 영유권을 둘러싼 국가간의 갈등도 여전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크림반도를 놓고 벌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 소련 시절 최고 지도자들의 휴양지가 모두 모여 있던 이곳은 역사적으로 러시아 땅이다. 그런데 1954년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주었다. 소련이 해체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당시로서는 단순한 행정구역의 변경이었으나 오늘날 분쟁의 원인이 된 것이다.

대다수가 러시아계인 크림 주민들은 러시아로 환원되기를 원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순순히 넘겨주지 않고 있다. 더구나 우크라이나는 슬라브계이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탈러시아 정책을 펴는 CIS국가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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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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