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순간의 ‘대박’보다 영원한 ‘윈윈’으로

황성호 제일투자신탁증권 대표이사

  • 장인석 < CEO전문리포터 > jis1029@hanmail.net

    입력2005-04-04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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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한 가운데 서서히 이루어진 제일투자신탁증권(이하 제일투신)의 변신에 재계가 술렁이고 있다. 침체에 빠져 있는 투신과 증권업계에 ‘난관을 돌파할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처음의 무관심이 이제는 놀라움으로 변하고 있는 것.

    변신의 과정은 투신사→종합증권사→자산관리형 증권사.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제일투신은 2년 반이란 변신의 과정에서 대우채 파동으로 2000억원에 달하는 부채에 허덕이던 신세에서 2000회계연도에는 18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며 흑자로 돌아선데다 그 많은 부채를 모두 청산했다. 올해는 49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리기 위해 연말까지 투신부문에서 수탁고를 11조원으로 끌어올리고, 증권시장 시장점유율도 1.5%로 높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러나 제일투신의 변신에서도 가장 눈부신 성과는 외자유치 성공으로 평가된다. 지난 4월 투자사인 프루덴셜로부터 1차 투자금액 2000억원을 유치한 제일투신은 앞으로 2년 이내에 4000억원의 자금을 더 받아 외국계 증권사로 거듭나게 된다. 제일투신의 외자유치는 대우채 파동으로 국내 투신시장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다른 투신사와는 달리 자력으로 활로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또 세계적인 금융회사의 까다로운 투자심사를 통과해 세계 금융계에 한국 투신회사의 능력을 알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죽어가는 회사를 살렸다”

    그 변신을 진두지휘해온 황성호(黃聖虎·48) 대표. 1999년 3월 취임해 2년 반의 실적을 자평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냉정히 얘기하면 죽어가는 회사를 살렸다, 그 일을 황성호 대표가 아니면 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물어봐도 ‘그렇다’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주들과 모기업인 제일제당에서 좋은 평가를 해주고 있지요. 직원들도 구체적인 평가는 하지 않지만 사내를 오가며 만났을 때 건네는 인사가 제가 취임할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되게 따뜻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저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황대표의 자신감은 그가 추진해온 경영전략이 예상대로 성공을 거두고 난 뒤의 즐거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모르면 자칫 ‘지나친 자신감, 혹은 자만’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는 씨티은행 소비자 금융 담당 이사로 재직중일 때 제일투신의 CEO를 뽑는 인터뷰에서도 “맡겨주면 자신 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고 한다. 그는 제일투신을 맡기 전부터 회생에 관한 확실한 수순을 읽은 것이다.

    “처음 제일투신을 봤을 때, 한마디로 굉장히 답답한 회사였습니다. 팔고 있는 상품이 채권형 수익증권 하나였으니까요. 시장의 목판 장수 아줌마도 가지만 파는 게 아니고 고추 배추 깻잎 등 다양한 품목을 다룹니다. 하나가 안 팔리면 다른 걸 팔아서 이익의 균형을 맞추는 거지요. 하지만 제일투신은 채권형 수익증권이 수입의 98%였습니다. 그런데 이 수익증권이 잘 팔리지 않으니 수익이 적고 부실이 늘어난 겁니다.”

    제일투자신탁증권은 원래 부산지역 상공인들이 만든 지역투자신탁회사였으나 1997년 9월 제일제당이 인수했다. 하지만 IMF를 맞아 대우채 파동이 일어나 부실이 발생하고 경영수지가 악화되자 돌파구를 열어줄 경영자로 황성호 카드를 선택했다.

    황대표는 취임하자마자 수익의 다변화를 추구했다. 그는 먼저 주식형 상품을 만들어 팔면서 증권 중개업에 진출하기로 결심, 연구를 지시했다.

    “각 지점을 둘러보니 매장은 넓고 직원도 많은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더군요. 증권 중개도 투자업의 일환이므로 우리 회사의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장은증권이 망했다. 황대표는 증권업에 진출하려면 전산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구축돼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장은증권에 전산실 직원과 전산시스템을 전부 인수하겠다고 제의했다. 1999년 7월, 장은증권을 인수한 황대표는 50개 지점을 반은 투신, 반은 증권업무를 할 수 있도록 개조하고, 직원 200명을 충원해 10월1일 마침내 증권업을 개시했다. 2000년 3월 말 결산해보니 증권 중개로만 400억원을 벌었다.

    “전체 매출을 따져보니 채권형, 주식형 상품, 증권 중개가 대략 3분의 1씩 차지하더군요. 채권형 수익증권 하나만 취급할 때보다 매출이 세 배로 늘어난 거죠.”

    피 말리던 9개월의 외자유치 협상

    수익 다변화에 성공한 황대표는 침체에 빠진 국내 투신시장에서 살아남는 길은 외자유치뿐이라고 판단했다. 회사 성장에 단비가 되는 자금유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선진금융기법을 도입해 당시 화두였던 ‘금융시장의 국제화’를 실현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외자 유치를 시작할 때 세 가지를 특히 고민했습니다. 먼저 어떤 회사를 대상으로 해야 하는가, 둘째 그 회사는 투자 여력 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노하우(상품개발 마케팅 리서치 리스크관리 등의 금융기법)를 전수해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나라 시장이 그 회사의 성장 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외자유치를 단순히 자금원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선진금융회사로 거듭날 수 있는 전기가 된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마침 아시아 진출을 추진하던 미국 프루덴셜 그룹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프루덴셜은 제일투신이 믿을 만한 회사인지 알아보기 위해 변호사를 동원해 조사하고 그런 다음 회계사를 보내 회사장부를 이 잡듯 뒤지는 치밀함을 보였다. 믿을 만한 회사라는 판단이 서자 그 다음에는 자사 전문가들을 불러 경영 전반에 걸쳐 자기네 방식으로 다시 조사했다. 프루덴셜은 이 조사과정에 100억원이 넘는 비용을 부담했다. 선진금융회사의 투자심사가 얼마나 까다롭고 치밀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심사와 협상이 진행되는 9개월간은 정말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진행이 잘 돼가던 시기에 국내 증권시장이 악화되면서 몇 차례 협상이 결렬될 위기를 겪자 조인서에 사인하기 직전까지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일투신의 투명성과 잠재력을 인정받았고, 국내 투신시장의 장래가 그리 비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프루덴셜의 외자 유치는 쾌거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 1차분 2000억원을 지원한 프루덴셜은 앞으로 3000억원을 더 지원해 제일투신의 지분 60%를 인수, 최대 주주가 된다. 이 과정에 프루덴셜과 전략적 업무제휴를 통해 한층 강화된 서비스를 펼치게 된다.

    다른 투신사들은 엄두도 못 내던 증권 중개업과 외자유치를 소리 소문 없이 뚝딱 해치운 황대표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씨티은행 시절 “감이 빠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한발 앞선 감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 고민을 안 했던 거겠죠. 저는 이 회사가 아니면 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가 안 되면 난 죽는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룹에 돈 더 달라고 손을 벌릴 수 없습니다. 그룹 돈 쓸 만큼 썼는데 누구한테 손을 벌립니까. 우리 스스로 벌어야죠.”

    제일투신 직원들은 황대표가 외자유치 기간 내내 노심초사한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우고, 프루덴셜의 까다로운 주문에 비상이 걸리는 일이 많았지만 황대표가 의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것을 보고 내심 그를 좋아하지 않던 직원들도 차차 마음을 열었다.

    “직원들이 참 열심히 일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나 헝가리, 미국 등에서도 CEO로 일했지만 우리 직원들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외국사람들은 이니셔티브, 즉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에 아주 능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장점은 실행하는 것이죠. 일을 아주 빨리 끝내요. 전 우리 직원들에게 부족한 새로운 시도 정신을 부여하려고 노력했어요. 그것만 접목된다면 외국 기업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번 외자유치를 통해 자신에게도 많은 공부가 됐지만 직원들의 능력이 배가된 것에 대단히 만족해하고 있다. 프루덴셜의 그 많은 자료요구와 내사를 거치며 선진금융이 뭔지 막연하게나마 알게 된 것은 앞으로 무한경쟁시대를 견뎌나가는 큰 자산이 됐다는 것.

    황대표가 취임하고 2년 반 제일투신은 외형뿐 아니라 사내에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제일투신의 짧은 역사는 ‘황성호 이전’과 ‘황성호 이후’로 나뉜다. 그 첫째가 일하는 우선순위의 변화다. 제일투신 직원들은 ‘황성호 이전’에는 돈을 버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았고, 실제 일을 추진할 때도 얼마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가를 화두로 잡았다. 하지만 그렇게 황대표에게 보고하거나 결재를 올리면 틀림없이 기각된다.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려라

    “제가 수익 다변화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리스크 관리입니다. 제 경영방식을 보수적이라고 여기는 분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인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일은 사상누각이고 위험합니다. 전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면 어떤 리스크가 생기고, 그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느냐에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컨트롤이 가능하다면 오케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돈을 버는 건 그 다음 문제고 그건 제가 간섭하지 않아도 직원들이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황대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프랜차이즈를 늘리는 일이다. 황대표는 고객 수가 늘어나야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고 강조한다. 그는 지점망을 이용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다 할 생각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열린 경영의 추구가 마지막 원칙이다. 회사가 성공하려면 직원들이 항상 튀는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하고 조직은 이 새로운 시도를 허락해주어야 한다. 새로운 시도는 위험요소는 있지만 부가가치가 높다. 그래서 그는 항상 ‘90 경영’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사실 사장은 90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회사의 승부는 95에서 갈립니다. 나머지 5가 문제인데 그 다섯 개는 직원이 알고 있다는 겁니다. 직원은 비록 80밖에 모르지만 그 80 속에 사장이 모르는 부분이 있고 그것이 바로 회사의 존망을 결정하지요.”

    그래서 그가 늘 주장하는 것은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려라”다. 남의 생각에 귀기울이고 의견을 교환할 때는 아무리 조직이지만 계급장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황대표의 지론이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취임하자마자 사내 게시판에 ‘나도 한마디’라는 코너를 개설했다. 무기명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이 코너에는 별의별 얘기가 다 올라오는데, 직원 900명 중 700명이 볼 정도로 인기가 있다.

    “이 코너에서 제일 많이 두들겨 맞는 사람이 인사본부장, 기획실장, 임원들입니다. 만일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 안 하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면 여기서 다 두들겨 맞아요. 하하. 저도 한때 고급주택에 산다고 비난하는 글이 올랐지요. 물론 제가 정확히 해명해서 넘어간 적이 있지만….”

    어떤 임원들은 소수의 의견이 전체 분위기를 흐린다며 이 코너를 없애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당신 생각이다. 그러니 직원들한테 물어봐라” 하고 물리친 적이 있다. 대신 극단적인 얘기, 일방적인 비난은 자제할 것을 호소한다.

    그는 ‘머리 굴리는 것보다는 나가서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자신이 야전사령관 출신이기도 하지만 직위가 높다고 해서 아랫사람을 그냥 부려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으면 사람이 되는 기분

    “제가 사내에 요즘 유행시킨 말이 뉴 웨이브 무브먼트입니다. 바꿔 말하면 ‘헬리콥터 뷰’를 버리자는 것인데요, 우리 기업은 과장 이상만 되면 펜만 들려고 해요. 실무는 밑의 말단직원이 다 하고…. 그래서 부장 되면 신문 보고 임원 되면 방에서 논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요. 또 회의를 해보면 우리 생각은 굉장히 관념적입니다. 구체적이지 못해서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지요. 그런 걸 저는 모두 ‘헬리콥터 뷰’라고 합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려고만 한다는 거지요.”

    선진조직은 직위가 올라갈수록 더 바쁘다고 한다. 그가 오랫동안 근무한 씨티은행만 해도 그는 회사에서 신문 볼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키려고 해도 뭘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 뭔가를 알아내는 과정만 해도 엄청나게 바쁘다는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는 그리 좋은 델 못 나왔지만 대학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꼴찌부터 일등까지 모두 해볼 만큼 성적의 기복이 심했다고 한다. 공부보다는 노는 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 하지만 그는 일류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이 인생에 더 큰 공부가 됐다고 말한다.

    “저희 집사람은 사대부고를 나왔는데, 가끔 이런 얘길 합니다. 당신 친구들은 뭐하냐고…. 아내의 친구들은 거의 다 공무원 아니면 판사, 의사, 월급쟁이예요. 근데 제 동창들은 가수, 영화배우, 사업가, 형사, 증권사 사장 등 매우 다양합니다. 이런 게 사는 묘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그는 CEO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록이나 팝송 등의 음악감상을 좋아한다. 아내와 라이브 콘서트에 가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할 정도. 그는 음악을 듣는 시간은 기계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때라고 말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정신없이 일 속에 파묻혀 잊혀진 자아가 꿈틀 뛰쳐나오는 시간이라는 것.

    예리하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의외로 소탈하고 재미있는 점도 많다는 것이 직원들의 귀띔이다. 집에 가면 아내와 수다떠는 것도 즐거움이라는 그는 “아내에게 내가 가장 무서울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집에 와서 아무 말 없이 30분만 있어도 뭔 일이 있는 걸로 안다고 해요”라며 웃는다.

    고려대 졸업 후 별 생각 없이 씨티은행에 입사한 그는 10년 만에 다이너스클럽카드 한국 지사장을 맡으면서 12년 CEO의 첫발을 내디뎠다. 경쟁이 치열한 씨티은행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초고속 승진을 한 배경에 대해 그는 “글쎄요,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 덕분 아닐까요?”라며 잘 모르겠다는 듯 둘러댄다.

    건강을 위해 특별히 운동은 하지 않아도 별로 아파본 적이 없는 걸 보면 타고난 건강체질인 것 같다는 황대표는 제일투신이 마지막 직장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자산관리형 증권사로 만드는 일에 제 모든 역량을 결집할 겁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실적은 잊고 다시 시작이라는 자세로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그가 말하는 자산관리형 증권사는 고객의 돈을 맡아 안전하게 운용해 적정한 수익을 붙여 되돌려주는 회사를 말한다. ‘대박’을 꿈꾸는 투자자에게는 좀 실망스러운 얘기겠지만 그는 주주와 고객이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 기업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선진경제를 이뤄나가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이제 차입경영은 사라질 겁니다. 저금리 시대가 정착되면 기업이 어디서 돈을 조달하겠습니까. 바로 투신과 증권시장입니다. 또 여기서 돈을 빌려 써야 기업의 투명성이 보장됩니다. 사실 IMF 환란도 따지고 보면 차입경영이 원인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투신과 증권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의 지원이 지금보다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목소리에 힘을 준다. 아직 은행에 비해서는 여건이 많이 부족해 경영자로서 어려움이 많다는 것. 이 과정에 그는 제일투신을 직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회사로 키우고 싶어한다. 능력에 따라 억대연봉을 받는 회사, 30대 초반에도 임원이 될 수 있는 그런 조직만이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 22년의 금융인 생활, 마침내 프루덴셜이라는 날개를 단 그가 이제 어떤 변신을 시도할지 궁금하다.





    CEO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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